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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부 "하야쿠키테, 아오모리와 하지메테다요네(어서 와! 아오모리는 처음이지)!"
비행기를 타고 들뜬 표정을 감추지 못하는 김정형 이희용 한상철 대원(왼쪽부터).
10월 12일 아침이 밝았습니다. 공덕역에서 정형이와 만나 인천공항 제2청사에 도착하니 약속 시간 오전 8시에 맞춰 속속 대원들이 모여듭니다. 포켓 와이파이 두 대도 빌렸습니다. 영수에 이어 상철이가 마지막으로 도착해 보딩패스를 받고 짐을 부칩니다. 제2청사가 새로 생긴 데다 출국 절차가 간소화돼 금방 면세구역에 들어섭니다. 10시 5분 출발 시간까지 여유가 많습니다.
저는 일본 산토리 양주를 골랐고 갑표는 글렌피딕, 동규는 달모어, 영수와 짝을 이룬 병래는 올드파를 각각 집습니다. 태성과 한 조인 정형은 집에서 밸런타인 15년산을 가져왔다며 사지 않습니다. 술 한 병씩 면세로 살 수 있는 공항에서 양주를 안 사다니 아깝다는 생각이 듭니다.
비행기에 탑승해 기내식을 먹고 나니 금세 아오모리 공항 도착입니다. 영화를 한 편 볼 틈도 제대로 없습니다. 국제공항치고는 청사가 아담합니다. 대원 중 몇 명은 세관원에게 짐을 모두 열어 보이느라 빠져나오는 데 시간이 걸립니다. 영수는 캐리어 가방을 깜박 잊고 나왔다가 허겁지겁 다시 들어갑니다.
아담한 아오모리공항 청사 내부. 광고판에 도호쿠 단풍 사진이 보인다.
짐을 찾아 나오자마자 상철이가 비닐팩을 하나씩 나눠줍니다. 견과류, 비타민, 사탕 등이 들어 있습니다. 짐을 줄이려고 자신에게 배당된 공통 준비물을 아예 따로 포장해 처음부터 대원에게 각각 나눠준 겁니다. 신입 대원인 주제에 잔머리가 심합니다.
밖으로 나오니 서울보다 위도가 높은 데도 포근합니다. 서울은 기온이 많이 떨어져 꽤 추웠거든요. 당초 비 예보도 있었는데 맑고 화창합니다. 여행이 순조로울 조짐입니다.
공항 바로 옆의 렌터카 회사에서 수속을 하고 5박6일을 함께 할 애마(愛馬) 두 대를 빌렸습니다. 1호차는 백마, 2호차는 흑마입니다. 트렁크에 짐을 싣고 첫 여정에 나섭니다.
원정대원과 5박6일을 함께한 렌터카. 오른쪽이 1호차이고 완쪽이 2호차.
우리끼리만 길을 떠나니 오붓해 좋지만 다른 일행, 특히 여성을 만난다는 기대감이 없어 서운한 기분도 살짝 듭니다. 성수기가 아니어서 그런지, 인구 밀집 지역과 멀리 떨어진 탓인지 그런 아쉬움은 여행 기간 내내 계속됩니다. 여성 단체 여행객이 많은 곳으로 패키지 여행을 떠날 걸 그랬다는 생각도 잠깐 해봅니다.
첫 목적지는 아오모리 동남쪽 핫코다산(八甲田山)입니다. 일본 100대 명산의 하나로 해발 1,584m의 오다케(大岳)가 최고봉이죠. 도처에 습지대가 펼쳐져 고산 식물의 낙원입니다. 봄부터 가을까지 등산객의 발길이 이어지고 늦가을부터 초봄까지는 스키어들의 놀이터가 된답니다.
1902년 기록적인 폭설이 내려 훈련 중인 군인 201명 가운데 199명이 동사한 곳입니다. 이날의 참변은 소설과 영화로도 꾸며졌는데, 억울하게 죽은 병사들의 저주로 등산객들의 사망 사고가 끊이지 않아 밤에는 잘 다니지 않는다고 합니다. 지난해 MBC TV ‘서프라이즈’에서는 깊은 겨울밤 아무도 없는 핫코다산 산장에서 전화가 걸려온 미스터리한 사연이 소개되기도 했습니다.
한적한 길을 달리니 기분이 상쾌합니다. 주행 차로가 왼쪽이어서 어색하고 헷갈립니다. 2호차 조수석에 앉은 정형이가 운전하는 것 같은 착각도 듭니다. 1호차나 2호차나 맞은편 차와 부딪칠 것 같은 기분이 드는지 자꾸만 갓길 쪽으로 붙습니다. 워낙 길이 좁은 탓도 있는 듯합니다.
우리나라와 달리 길가에 식당이 좀처럼 눈에 띄지 않습니다. 마을이 나타나도 편의점만 눈에 띌 뿐입니다. 소바(蕎麦·메밀국수)라고 쓰인 간판을 보고 들어갔더니 스키 리조트인데 시즌이 아니어서 문이 닫겼습니다. 한참을 더 달려 목적지에 거의 다다르자 식당이 나타납니다.
기념품점을 겸한 전형적인 관광지 식당인데 메뉴는 라면, 우동, 오뎅 등 단출합니다. 각자 라면과 우동을 주문해 먹고 오뎅을 한 점씩 맛봅니다. 맛이나 가격이나 만족스럽긴 하지만 푸짐한 느낌은 없습니다. 김치는커녕 단무지도 주지 않으니 허전하기도 합니다.
일본에서 첫번째로 만난 식당의 라면.
다시 길을 달립니다. 서울보다 위도가 높고 고지대인데도 단풍이 별로 없습니다. 제가 “아오모리(靑森)란 지명이 푸른 숲이라는 뜻이어서 사시사철 푸른 모양이네”라고 실없는 농담을 던집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이곳 단풍은 10월 말부터 절정기에 접어든다고 합니다. 아키타에 가서 보니 그곳의 단풍 축제도 10월 19일에 시작되더군요. 물론 대원들의 개인 일정을 감안해 날짜를 조정하다 보니 여행 기간을 불가피하게 10월 12~17일로 접은 것이긴 하지만 아쉬움을 떨치기 어렵습니다. “단풍 성수기에 왔으면 복잡해서 다니기 불편했을 거야”란 말로 자위합니다.
마침내 핫코다산에 도착했습니다. 읽는 분들은 1,500m가 넘는 산을 어떻게 오르려나 걱정하셨을지 모르겠지만 이곳에는 정상 근처까지 가는 케이블카가 있답니다. 여기서는 로프웨이라고 부르는데, 한 번에 101명씩 태우는 대형 곤돌라가 줄에 매달려 양쪽 끝에서 오고갑니다. 왕복 요금은 인당 1천850엔으로 조금 비싸다 싶지만 한국보다 비싼 일본 물가에 용평리조트의 곤돌라 왕복 요금이 1만5천 원인 것을 생각하면 그럴 법도 합니다.
핫코다산의 로프웨이. 안내원 1명과 승객 100명 등 101명을 태울 수 있다.
선로 길이는 2,459.7m, 고도 차는 649.5m, 속도는 초당 5m, 이동시간은 8분 8초입니다. 순환식 삭도인 용평리조트 곤돌라(3,710m)나 무주리조트 곤돌라(2,659m)보다는 짧지만, 양쪽에서 곤돌라 두 대가 동시에 운행하는 복선 교주식(two-way system) 삭도로는 국내 최장인 밀양 얼음골 케이블카(1,751m)보다 훨씬 깁니다.
참고로 세계 최장 케이블카는 2017년 말 개통한 베트남 푸꾸옥섬(7.9㎞)이랍니다. 대전시와 충북도는 대청호에 10㎞에 달하는 케이블카 건설 계획을 추진한다네요. 국내 최장을 둘러싼 케이블카 설치 경쟁이 이제 세계 최고 경쟁으로 번질 조짐입니다.
상행 곤돌라와 스쳐 지나간 하행 곤돌라가 안개 사이로 점점 멀어지고 있다.
우리는 렌터카 회사에서 지체하느라 오후 3시가 훨씬 넘어서야 케이블카 역에 당도했죠. 안내문을 보니 로프웨이가 4시 30분까지만 운행한다고 합니다. 허걱! 위에 올라가 1시간가량 트레킹하려던 계획도 무산돼 잠깐 둘러보고 서둘러 내려와야 합니다. 그나마 탈 수 있는 게 다행이네요. 우리 일행 얼마 앞에서 탑승객 행렬이 끊겨 다음 박스를 타야 합니다. 조금만 더 게으름을 피웠다면 모든 계획이 어긋날 뻔했습니다.
연녹색 조릿대와 진녹색 주목과 푸른 하늘, 흰 구름이 멋진 배치를 보여주고 있다.
산 위에 오르니 전망이 끝내줍니다. 주목 닮은 멋진 나무들과 파란 하늘과 하얀 구름과 겹겹이 펼쳐진 산 능선들이 기막힌 조화를 이룹니다. 100여m를 걸어올라 해발 1,324m 다모야치다케(田茂萢岳) 전망대에 서니 사방이 일망무제로 펼쳐집니다. 여기서 정상인 오다케까지는 2시간 30분이 걸립니다.
핫코다산 트레킹 코스를 그려놓은 지도.
1.8㎞에 달하는 표주박 모양의 등산로, 즉 핫코다 고드라인(gourd Line)을 도는 것은 시간상 불가능하지만 그래도 간이라도 보고 싶어 능선을 따라 바삐 걸어갑니다. 상철이가 뒤따라 옵니다. 다른 친구들의 모습은 보이지 않네요. 얼마 남지 않은 시간에 전망대에서 충분히 눈으로 만끽하고 싶은 모양입니다. 저와 상철이도 얼마 가다가 전망대로 되돌아옵니다. 이곳에선 우리 사이에 사진작가로 불리는 병래가 친구들 얼굴을 카메라에 담고 있더군요.
사진만 봐도 다시 걷고 싶어지는 핫코다산 등산로.
서쪽 하늘의 해는 점차 산 아래로 떨어지려 합니다. 조금만 더 기다리면 낙조와 노을을 볼 수 있을 텐데, 마지막 곤돌라를 놓칠 수는 없는 일이어서 아쉬움을 남기고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억지로 옮깁니다.
고산지대인 만큼 기상 변화가 극심합니다. 올라갈 때는 구름 사이로 햇살이 언뜻언뜻 비쳤다가 전망대에 도착하니 보슬비에 강한 바람이 불어닥칩니다. 로프웨이 탑승장에 도착하니 다시 햇살이 나옵니다.
핫코다산에서 내려다본 풍경. 구름 사이로 비치는 햇살이 환상적인 광경을 연출하고 있다.
로프웨이를 타고 내려오니 5시를 막 넘겼는데도 금세 어두컴컴해집니다. 위도가 서울보다 높은 41°쯤이고 표준시 기준 경도선(동경 135°) 동쪽인 140°에 위치해 있어 한 시간은 더 일찍 해가 지네요. 애마에 나눠 타고 길을 재촉합니다.
밤길을 달려 숙소인 ‘호텔 셀렉트 인 아오모리’에 도착했습니다. 체크인을 한 뒤 사다리를 타서 룸메이트와 방을 정합니다. 이틀을 묵는 것인데도 엑스트라 베드가 없는 탓인지 긴장감이 훨씬 덜합니다. 희용-정형, 갑표-병래, 태성-상철, 영수-동규로 짝이 정해집니다.
일본 호텔치고는 방이 널찍한 편입니다. 화장실 겸 욕실은 비행기 화장실을 방불케 할 정도로 비좁지만 침대 사이 간격도 있고 바닥도 여유가 있습니다. 태성 총무와 상철 부총무가 함께 묵는 방이 다른 방보다 넓어 술방으로 낙점합니다.
짐을 내려놓고 저녁을 먹으러 나옵니다. 영수가 찜해 둔 집은 아오모리역 근처입니다. 도보로 10분 정도 떨어져 있습니다. 스시(壽司·초밥)와 사시미(刺身·생선회)를 주로 하는 집인데 퓨전식 안주도 종류가 많습니다. 생맥주 몇 잔과 청주도 한 병 시킵니다.
일본에서의 첫 저녁 식사. 왼쪽 맨 앞부터 시계 방향으로 박동규 오영수 홍갑표 김정형 민병래 한상철 김태성 이희용.
일본 음식이 그렇듯 화려하고 예쁜데 양이 적습니다. 한 사람당 두어 점 집어 먹으니 바닥을 보입니다. 청주도 쪼끄만 도쿠리(徳利)로 나와 몇 잔 따르니 없더군요. 모두 아쉬운 마음에 총무 눈치만 보는데 정작 태성이는 “여기서 배 채울 필요 없잖아. 방에 가면 라면에 햇반에 양주에 소주에 먹을 것 많은데”라고 말합니다.
보다 못한 정형이가 “내가 3천 엔(3만 원) 낼 테니까 사시미 두 접시만 더 시키자”라고 합니다. 역시 통 크고 내지르기 좋아하는 정형이가 찬조에 나섭니다. 일본 소주도 한 병 시킵니다. 술 한 잔에 생선회 두어 점씩을 더 먹은 뒤 일어섭니다.
돌아오는 길에 이자카야(居酒屋)와 가라오케(空オケ)가 간간이 눈에 띕니다. 그러나 첫날 밤인 만큼 앞으로 어찌될지 모르니 돈을 아끼기로 하고 호텔로 향합니다. 미리 재물조사를 해보니 먹을 걸 많이 싸와서 부지런히 소비를 해야겠다는 계산도 깔려 있습니다.
옷을 갈아입고 총무단 방에 속속 모여듭니다. 갑표가 라면포트를 들고 옵니다. 제가 지난번 스위스 원정 때 가져온 걸 보고 따라 샀다고 합니다. 저녁을 방금 먹고 왔는데도 허기를 달래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탓인지 신라면과 미역국라면을 끓여 햇반까지 말아 먹습니다.
양주도 땄습니다. 짐의 무게를 줄이려고 서로 자기 양주를 먼저 비우려고 하는데, 갑표는 미얀마에서 사왔다는 양주를 한 병 더 들고 왔다고 해서 그 병이 1순위가 됩니다. 황금빛 양주병에서 광채가 납니다. 정형이가 울릉도에서 산 오징어와 함께 육포를 꺼냅니다. 저도 비닐로 포장된 볶음김치와 깡통에 든 견과류를 내놓습니다. 병래는 깻잎, 참치, 번데기, 햄 등의 통조림을 늘어놓습니다.
호텔방에 둘러 앉아 술판을 벌이고 있다. 갑표(왼쪽 맨 앞)가 미얀마에서 사온 황금색 양주병이 보인다.
푸짐한 안주에 유쾌한 대화가 있고, 집에 갈 걱정이나 마누라 잔소리 들을 일 없다 보니 양주병이 금세 비워집니다. 원래 하룻밤에 양주 1병씩 쳐서 5병을 사왔는데 갑표가 한 병을 더 들고 왔으니 주저 없이 두 번째 양주의 병마개를 엽니다. 그래도 일본에 왔으니 일본 양주를 먼저 맛보고 싶다는 게 중론이어서 제가 사온 산토리가 간택됩니다.
아오모리의 밤이 깊어갈수록 술자리 분위기는 무르익고 오래된 벗들의 대화는 끊일 줄 모릅니다. 옛 추억담도 꺼냈다가 객쩍은 농담을 늘어놓는가 하면, 때론 우국지사가 돼 시국담을 주고받기도 하고, 가족 이야기나 직장 이야기도 털어놓습니다. 그래도 이튿날 여정을 위해 아쉽지만 첫날밤 술자리는 일찍 마감하기로 합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