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확신이 뭐 그리 큰 죄가 되죠?”
- 내 생각대로 하나님을 통제하는 것과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의 차이
혼란스러운 이 세상에서 ‘확신’을 신앙생활의 중심에 놓고 그것을 고수하는 게 뭐가 문제란 말인가? 최근 주목받는 성서신학자 피터 엔즈는 하나님에 대한 믿음과 우리가 믿는 것에 대한 ‘확신’을 동일시하는 것, 건전한 믿음을 유지하기 위해 ‘올바름’만을 지나치게 집착하고 고수하는 것, 그리하여 창조주 하나님을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대상으로 한정하여 그분을 과소평가하게 되는 것에 ‘죄’라는 딱지를 붙인다. 『확신의 죄』는 그 이유에 대한 흥미진진하고 설득력 있는 설명이다.
흔들리지 않는 독단적 확신을 가지려 하기보다는 하나님을 신뢰하라고, 그리할 때 우리 삶에 끊임없이 줄지어 지나가는 신비와 불확실성을 신앙의 정상적 일부로 포용하고, 좀 더 깊이 신뢰할 수 있는 기회로 삼을 수 있다는 것을 자신의 라이프스토리로 들려준다.
‘믿는다’는 동사의 목적어는 ‘인격’이다!
- ‘올바른’ 생각에 대한 집착을 내려놓고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는 법
우리는 모두 하나님에 대해 생각하고 믿어 온 익숙한 방식들이 위협받는 난감한 순간을 경험하곤 한다. 그것이 눈부시게 발전한 과학에 의해서든, 고고학의 놀라운 성과로 인한 것이든, 성서신학에서 제기된 본문비평에 의해서든, 아니면 성경 속의 모순된 주장에 의해서든 말이다. 그래서 우리는 이런 일이 벌어지는 것을 막기 위해 견고한 담을 쌓고 우리를 안심시키는 것들 가운데 머물려고 한다. 물론 올바른 생각은 확실성과 안정감을 느끼게 해 준다. 문제는 확실성을 잃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올바른’ 생각에 대한 집착으로 이어져, 무슨 수를 써서라도 익숙한 신념들을 기필코 옹호하고 지지하게 만든다는 데 있다. 결국 이런 태도는 우리의 질문과 의구심을 가로막고, 믿음이 성장하지 못하게 만든다.
최근 주목받는 성서신학자 피터 엔즈는 하나님에 대한 믿음과 우리가 믿는 것에 대한 ‘확신’을 동일시하는 것, 건전한 믿음을 유지하기 위해 ‘올바름’만을 지나치게 집착하고 고수하는 것, 그리하여 창조주 하나님을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대상으로 한정하여 그분을 과소평가하게 되는 것에 ‘죄’라는 딱지를 붙인다. 확신에 목매는 것은 그것이 익숙함과 예측 가능성을 잃어버릴까 걱정하는 모종의 인간적 두려움에 근거하고 하나님을 우리 마음속 형상으로 한정시키기 때문이다.
『확신의 죄』는 믿음, 곧 우리가 믿는 ‘내용’보다 우리가 믿는 ‘대상’으로 정의되는 믿음에 대하여 달리 생각하는 방법을 이야기한다. 우리는 그동안 믿음을 ‘인칭 단어’가 아니라 ‘비인칭 단어’로 오해하여, 신앙을 기본적으로 우리가 신뢰하는 대상이라기보다는 믿는 신념의 내용이라고 오해한다는 것이다. ‘믿는다’는 것은 누군가가 믿는 것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 아니라, 그가 신뢰하는 인격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명료성이나 확신이 아닌 하나님에 대한 신뢰를 배워야만 한다. 만약 ‘강한’ 믿음을 단순히 불확실성이나 위기가 없는 상태로 생각한다면, 우리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시고 그리스도인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라는 문제에서 중요한 부분을 잘못 이해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 책은 먼저 올바른 생각에 대한 집착이 현대 그리스도인들의 체험을 어떻게 지배하게 되었는지 살펴본 후(2장), 어쩌다가 이렇게 엉망진창이 되었는지, 어디에서부터 잘못되었는지, 성경은 우리에게 어떤 종류의 믿음을 본보기로 제시하는지 살펴본다(3-5장). 그리고 성경 기자들이 믿음을 확신이 아니라 신뢰로 여긴 사례를 살펴봄으로 우리가 어쩔 수 없이 맞닥뜨리는 당혹스런 순간들을 다른 관점에서 해석할 수 있도록 돕는다(6장). 그다음에는, 어떻게 해서 ‘하나님의 부재’가 그분이 확신의 죄를 다루시는 방법인지(7장), 또 생존을 위해 확신에 의존하지 않는 신뢰의 습관을 우리 안에 길러 주시는 방법인지 살펴보는 것으로 마무리한다(8-9장).
이 책은 그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수 있는지를 다룬다.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머지않아 ‘모든 그리스도인’이 될 것이라고 단언한다)들이, 하나님에 대해 생각하고 믿어 온 익숙한 방식들이 위협받는 난감한 순간을 뜻밖에 경험한다. 닥칠 일을 준비하거나 몸 숨길 곳을 찾을 겨를도 없이, 초대하지도 않았는데 찾아오는 것이다. 그냥 책을 읽거나, 팟캐스트를 듣거나, 텔레비전 프로그램을 보거나, 비행기에서 디즈니 영화를 한 편 보았을 뿐인데, 한때 굳건했던 믿음이 흔들리기 시작한다. 아니면 성경이나 하나님에 대한 우리 생각에 전혀 동조하지 않지만, 더없이 사람 좋고 옳은 말만 하는 새로운 친구를 만났을 뿐인데도 그럴 수 있다. 아니면 하나님과 세상, 우리의 의미에 대하여 우리가 믿는다고 생각해 온 모든 것에 의문을 품게 만드는 깊은 상실이나 이루 말할 수 없는 비극을 경험했을 때도. --- p.16
결혼은, 배우자에 대해 강하게 확신하고 있는 각자의 정확한 지식에 근거하지 않는다. 우리의 결혼 서약은, 상대방을 올바르게 이해하든 말든, 두 사람의 관계가 순조롭게 흘러가든 말든 상관없이 서로 신뢰하고 따르기로 한 약속에 근거한다. 설령 우리가 서로 좋아하지 않거나 서로 바짝바짝 약을 올리거나 꼴도 보기 싫어하는 사이라 하더라도 신뢰의 약속은 매우 중요하다. 사실 신뢰는 인간다움의 필수 조건이다. 어린아이는 자의식이 생기는 즉시 별다른 생각 없이 자신의 부모를 무조건 신뢰한다. 우리가 성장해 가는 동안 신뢰는 모든 건전한 관계의 핵심이다.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도 다르지 않다.--- p.38
논쟁 끝에 우격다짐으로 하나님을 믿게 되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우리는 전통적 의미에선 실상 ‘이유’ 같지 않은 가지각색 이유로 믿음을 갖게 된다. 그런 ‘이유’는 이성적이기보다는 직관적이고, 논리적이기보다는 감정적이며, 납득할 수 있기보다는 불가사의하다. 믿음을 가지려면 하나님의 임재를 감지해야 한다는 것이 내 생각인데, 하나님의 임재는 그러한 만남을 이성적으로 처리하는 인간의 능력을 초월하거나 아예 무시하기도 한다. 그렇다고 해서 믿음에 현실성이나 안정성이 떨어지는 것은 아니다. 내 말은, 믿음이 우리의 인간성 전체에 관여하며, 절대 지적 과정으로만 축소되는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 p.44
만약 우리가 무엇을 믿는지 알고 그 내용을 확신해야 한다면, 그리고 그 지식이 성경에서 오는 것이라면, 제각기 성경적이라고 주장하는 개신교회들이 어떻게 수천 곳이나 있는 걸까? 이 그림에서 무엇이 잘못된 것일까? 그중 하나만 근본적으로 올바르고 나머지는 근본적으로 잘못되었다고 생각해야 하는가? 아니면, 어쩌면 이런 혼란은 우리가 지금껏 잘못된 길을 걸어왔을지도 모른다는 증거일까? 이것이 엄청난 모순이다. 성경을 올바르게 이해하려는 개신교의 오랜 추구는 성경이 뜻하는 바에 대한 더 큰 확신으로 이어지지 않았다. 오히려 정반대로, 성경의 상당 부분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지를 두고 첨예하게 대립하는 수많은 교파와 하위 교단을 낳았다. 그러면, 성경이 하나님에 대한 확실한 지식의 원천이라면 우리는 이 모든 다양성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겠는가? 성경은 우리를 분열이 아니라 연합으로 이끌어야 하지 않는가? --- p.72
신뢰는 약한 자들을 위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고통스러운 선택이다. 특히 하나님이 당신을 실망시켰다고 느낄 때 그렇다. 그러나 이것은 신앙의 삶에서 유일한 선택이다. 다른 방법은 없다. 신뢰는 완전한 굴복과 용기를 동시에 필요로 한다. 또 다른 역설이 아닐 수 없다.--- p.148
나는 성경에서와 마찬가지로 고뇌와 의심의 시기가 신앙생활에서 흔한 경험이라고 믿게 되었다. 그 기간이 얼마나 오래 지속되든지 간에, 필연적으로 무언가를 배우기 마련이다. 나는 만사가 완전히 깔끔하게 정리되지 않는 것이 신앙의 신비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그런 상태는 내게 이 여정이 끝났음을 알리는 신호가 아니라 여전히 여행을 계속하고 있다는 신호가 된다. --- p.204
의심은 하나님의 엄한 사랑이다. 하나님은 교회에 왔다 갔다 하고 봉사활동을 하는 우리의 피상적 모습만이 아니라, 우리의 전 존재를 소유하고자 하신다. 사람들이 볼 수 있는 부분만이 아니라, 깊숙이 감추어져 아무도 보지 못하는 부분까지 말이다. 우리 자신조차 볼 수 없는 부분까지. --- p.218
신뢰 중심 신앙은 골치 아픈 질문들에 대한 최종 해답을 속단하기보다는 하나님의 신비를 존중하는 지혜로운 질문들을 공들여 표현한다. 또 앞으로 나아갈 길을 찾기에 앞서 충분히 오랫동안 그 질문들을 곱씹을 수 있는 용기를 하나님께 요청하는 시간을 찾을 것이다.
--- p.268
성경 시대 사람들은 현대인들과 달리 무엇을 믿을지에 집착하지 않았다. 천상의 신성한 영역은 실제로 존재하는가? 라는 질문은 당시에는 그다지 시급한 문제가 아니었다.
실제로 신성한 영역은 단순히 존재하는 것 이상이었다.
오늘날 신성한 영역에 대한 회의론과 불신은 굉장히 흔하고 많은 사람에게 당연한 문제이기도 해서, 최소한 서구 문화권에서는 설명이 필요 없는 일반적인 것이라고까지 할 수 있다. 많이 알수록 하나님을 믿기가 어려워집니다. 이 여성의 말은, 우리가 사는 현대 사회는 초자연적 방법보다는 과학의 방법으로 꽤 설득력 있게 만사를 설명해 주기에 하나님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점점 믿기 어렵게 만든다는 뜻이었다.
따라서 우리가 성경에서 믿음이나 믿는다는 단어를 발견할 때는 (그런 유혹이 들더라도) 지나치게 합리적으로 분석한 의미를 성경 인물에 주입해서는 안 된다. 이 단어들을 신뢰로 바꾸면, 성경이 추구하는 의미에 좀 더 근접할 것이다. 그럴 때 우리는 깨닫는 내용에 놀라고, 고무될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통제 불능 상태로 몰아가셔서, 우리로 하여금 우리가 무엇을 믿는지 알고자 하는 집착이 아니라 신뢰하는 법을 배우게 하신다. 이것이 믿음과 신앙의 익숙한 의미들은 도달하지 못하는 존재의 심오한 상태다.
신뢰하라.
어두움이 없이는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만족을 얻을 수 없다. 죽음만이 부활로 가는 유일한 길이요 하나님을 알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여정이며 현재의 부활이다.
우리 신앙에 의심이 들어설 여지가 없다면, 결국 우리에게 남은 종교란 인생에서 직업이나 취미 같은 것들이 차지하는 위상과 별 차이가 없다.
이스라엘의 대서사시가 우리에게 주는 가장 큰 위안은 고대 이스라엘 민족이 자기 신앙의 일부로 껴안은, 하나님에 대한 불신과 격한 의심의 원초적 표현을 그대로 담고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신약은 다르다. 신약은 60년 내외라는 훨씬 더 짧은 기간에 쓰였다. 고통이 신약의 주제이기는 하지만, 구약의 오랜 기다림과는 거리가 멀다. 실제로 사람들은 그 마지막 곧 예수님의 재림이 코앞에 다가왔다고 생각했으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