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자가 위에서 주님의 일곱 말씀
누가복음 23:34,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하시더라
찬송가 461장(십자가를 질 수 있나)
예수님께서 작정하셨고 오랫동안 준비하셨던 십자가의 못 박히셨을 때에 그 고통은 말할 수 없이 컸을 것입니다. 단지 육체적인 고통만이 아니라 정신적 영적 고통이 말할 수 없이 컸을 것입니다. 대제사장 앞에서나 빌라도 총독의 심문시에도 침묵으로 일관하셨던 예수님께서 그 사명의 절정이자 고통의 절정이었던 십자가 위에서 입술을 열어 말씀하신다는 것은 극히 힘들었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입술을 열어 말씀하셨다면 그 말씀은 의미가 있고 무게감이 큰 말씀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래서 성금요일인 오늘 아침에는 그 일곱 마디 말씀을 한번씩 읽고 마음에 두는 시간을 갖도록 하겠습니다.
첫째로, 자기를 죽이는 자들을 향한 용서의 기도를 드리셨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인 누가복음 23장 34절 말씀에 이르기를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하시더라”
고 하였습니다. 자기를 죽이려 들었던 대제사장과 산헤드린 의원들, 그들과 동조한 대제사장의 종들과 수많은 바리새인들과 유대인들, 그리고 헤롯 왕과 그 신하들과 군인들, 그리고 빌라도 총독과 그의 험하고 잔인한 로마 군병들 나아가 아담 이래로 하나님을 대적하는 모든 죄인들이 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는 일에 동참한 악인들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로 주님을 십자가에 못박는 일에 동참한 주님의 원수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 십자가 위에서 자기를 악하게 죽이려 들고 조롱한 자들을 향하여 죄를 사해주시기를 하나님 아버지께 간청하였습니다. 주님의 십자가의 순종뿐 아니라 주님의 이 입술의 기도 모두가 죄인들의 죄를 사해주시기를 간청하는 사죄의 요청이었습니다. 그 덕분에 우리도 죄사함을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이 죄사함을 받은 자답게 우리를 향하여 악을 행한 자들을 기꺼이 용서해주고 그들의 죄를 사해주시기를 주님께 간청하는 자들이 됩시다.
둘째로, 회개한 한 강도를 위하여 구원의 약속을 베푸셨습니다.
누가복음 23장 39절 이하에 보면 예수님 좌우편에 함께 못박힌 두 강도들 중 한 사람이 예수님을 향하여 비방하였습니다.
“네가 그리스도가 아니냐 너와 우리를 구원하라”
그러자 다른 한 사람은 그를 꾸짖었습니다.
“네가 동일한 정죄를 받고서도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아니하느냐 우리는 우리가 행한 일에 상당한 보응을 받는 것이니 이에 당연하거니와 이 사람이 행한 것은 옳지 않은 것이 없느니라”
그러면서 그는 예수님을 향하여 얼굴을 돌리고 이렇게 간청하였습니다.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기억하소서”
이 회개하는 강도의 고백은 놀라운 일입니다. 다른 복음서를 보면 처음에는 함께 예수님을 비방했다고도 말합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이 강도는 변화가 되었습니다. 그는 점점 예수님의 인격에 점점 매료되었습니다. 아마도 예수님의 첫 번째 십자가 위에서의 말씀 곧 모든 죄인들의 죄를 사해주시기를 간청했던 기도가 하나님께 상달된 첫 번째 열매라 할 것입니다. 그는 변화되었고 예수님이 이스라엘의 오랜 소망이었던 그리스도라는 사실이 놀랍게 깨달아졌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 지극히 겸손한 마음으로 간청하기를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기억하소서”
라고 고하였습니다. 예수님은 그의 진실한 회개, 그의 겸손한 마음, 그의 간절한 요청을 물리치지 않으시고, 자기도 고통 중에 있으면서도 그 강도를 위하여 확실한 응답을 주셨습니다.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이 말씀처럼 확실한 구원의 약속이 없습니다. 참으로 이 한 편 강도처럼 구원이 확정적인 사람은 세상에 달리 없을 것입니다. 많은 악행을 저질러서 십자가 형벌을 받는 악인이 분명하지만 오직 예수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믿고 그의 긍휼을 바라고 그에게 간청한 까닭에 너무나 확실한 구원의 은혜를 그 날 저녁에 받게 되었습니다. 주님은 그 고통스러운 순간에도 회개하는 한 영혼을 기쁨으로 받아들여서 함께 낙원의 행복과 평안을 누리게 해주셨습니다. 이처럼 아무리 악한 죄인일지라도 회개하면 주님께서 얼마든지 용납하시고 구원해주심을 기억하면서 최선을 다하여 다른 영혼들을 주님께 인도하여 주님 나라에 들어가도록 중보 기도하며 전도하며 권면하는 사람이 됩시다.
셋째로, 모친 마리아를 사도 요한에게 맡기셨습니다.
요한복음 19장 26절 이하를 보면, 예수님은 십자가 아래에서 눈물과 탄식으로 힘없이 서 있는 자기 모친 마리아를 바라보면서 마음이 아팠습니다. 그리고 제자 사도 요한이 그 곁에서 육신적으로 이모인 마리아를 부축하고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모친을 향하여 눈빛으로 요한을 가리키면서 “보소서 아들이니이다”라고 하시고, 요한에게는 “보라 네 어머니니라”고 말씀해주셨습니다. 공생애를 시작하시면서 돌보지 못하였고 늘 예수님의 신변에 무슨 일이나 닥칠까 염려해온 마리아를 인하여 염려스러웠던 예수님은 모친 마리아를 아들처럼 돌보아 줄 사람으로서 사도 요한이 적격이라고 생각하였던 것입니다. 주님은 이처럼 십자가의 극한의 고통 중에 있으면서도 모친을 돌보는 육신의 의무를 소홀히 하지 않고 이렇게 까지도 아름답게 감당하였던 것입니다.
넷째로, 하나님을 향하여 자기 영혼의 괴로움을 토로하셨습니다.
마가복음 15:34 말씀에 보면 이르기를
“제 구 시에 예수께서 크게 소리 지르시되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니 이를 번역하면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라”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라는 말은 시편 22편 1절 말씀에 나오는 다윗의 고백입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절규하신 것은 하나님께서 자기를 버리는 것과 같은 깊은 좌절감의 표출입니다. 그가 이렇게 절규함은 결코 꾸민 이야기가 아니요 실제로 예수님께서 이처럼 강렬한 버림받음의 영혼의 고통을 그 십자가에서 당하신 것을 말해줍니다. 예수님은 단지 육체적 고통만 당한 것이 아니요 모든 죄인들이 하나님으로부터 영원히 단절되어 영원한 버림받음의 상태에 떨어지게 되는 내적인 영혼의 고통까지도 우리를 대신하여 처절하게 당하신 것입니다. 우리를 살리시려고 죄인된 우리가 하나님의 공의의 판단을 받아 영원히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당하는 가장 깊고 아프고 두려운 버림당함의 고통까지 받으셨음을 우리 모두 기억합시다. 그 대속의 고난 덕분에 우리가 영원히 하나님께로부터 버림당함의 슬픔과 애환에서 영원히 벗어나는 기쁨을 누리게 된 것입니다.
다섯째로, 주님은 자기의 목마름을 말했습니다.
요한복음 19:28 말씀에 보면
“그 후에 예수께서 모든 일이 이미 이루어진 줄 아시고 성경을 응하게 하려 하사 이르시되 내가 목마르다 하시니”
라고 하였습니다. 6시간 동안 나무에 매달려서 피와 물을 계속 쏟으시니 예수님이 깊은 갈증을 느끼실 수밖에 없었습니다. 고통 중에 배고픔보다 더 큰 고통이 목이 타는 고통입니다. 육체의 목마름을 인하여 호소했을 때에 군병 중 하나가 신 포도주를 적신 해면을 매어서 예수님의 입에 대어 잠시 그 목마름을 달래주었습니다. 모든 인생의 목마름이 있습니다. 채워지지 않는 마음의 갈망이 있습니다. 그 목마름을 우리 주님께서도 십자가 위에서 겪으시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누구보다도 우리 인생의 목마름을 아시고 그를 믿는 자들에게 그 목마름을 채워주십니다. 요한복음 4:13 이하의 말씀에 보면 예수님께서 인생의 목마름으로 방황하던 사마리아 여인에게 약속해주셨습니다.
“이 물을 마시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와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요한복음 4:13,14)
그렇습니다. 이 땅에 사는 동안 영호과 마음과 육체의 목마름의 고통을 느낄 때 주님께서 우리의 목마름을 완전히 채워주시는 성령의 생수로 우리 심령을 채워주실 것입니다.
여섯째, 주님께서 다 이루었다고 선포하셨습니다.
요한복음 19:30 말씀에 이르기를
“예수께서 신 포도주를 받으신 후에 이르시되 다 이루었다 하시고”
라고 하였습니다. 주님께서는 드디어 자기의 사명의 완전한 성취를 아시고 만족하신 마음으로 선포하셨습니다.
“다 이루었다.”
헬라어로 “테텔레스타이”라는 단 한 단어로 말씀하셨습니다. 만세 전에 성부, 성령 하나님과 함께 작정하셨던 죄인의 구원을 위한 사명을 주님께서 다 성취하셨다는 선언입니다. 드디어 죄인의 구원의 길이 활짝 열린 것입니다. 천국 문이 활짝 열린 것입니다. 마침내 인류 구원을 위하여 하늘 아버지의 곁을 떠나 세상에 내려오셔서 산전수전 겪으면서 수고한 수고가 결실을 맺은 것입니다. 할렐루야.
일곱째로, 주님께서 하나님께 자기 영혼을 맡기셨습니다.
누가복음 23:46 말씀에 예수님의 마지막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께서 큰 소리로 불러 이르시되 아버지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 하고 이 말씀을 하신 후에 숨지시니라”
다윗이 일찍이 시편 31:5 말씀에서 고백하기를
“내가 나의 영을 주의 손에 부탁하나이다 진리의 하나님 여호와여 나를 속량하셨나이다”
라고 하였습니다. 그렇습니다. 그 어떤 것보다 안전한 곳은 하나님의 손, 우리 주님의 손 안에 있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0:27 이하에 보면 주님께서 친히 이르시기를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그들을 알며 그들은 나를 따르느니라 내가 그들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하지 아니할 것이요 또 그들을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그들을 주신 내 아버지는 만물보다 크시매 아무도 아버지 손에서 빼앗을 수 없느니라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요한복음 10:27~30)
고 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온 세상을 그 오른손으로 붙드시며 다스리시는 하나님에서 누가 빼앗을 수 있겠습니까? 만왕의 왕이요 만주의 주시요 천사들의 머리가 되신 주님의 손에서 누가 우리를 빼앗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가 세상을 떠날 때에 주의 손에 우리 영혼을 부탁하는 것보다 더 안전한 것은 없습니다. 아버지의 손에 자기를 부탁하신 주님께서 우리 영혼을 주님의 손에 의탁할 때 친히 우리를 붙들어주시고 천군 천사를 보내사 호위하사 주님 나라 들어갈 때까지 어떤 어둠의 세력도 틈타지 못하도록 불말과 불병거로 호위하사 인도해주실 것입니다. 할렐루야.
이 일곱 마디의 말씀을 우리가 조용히 묵상할 때에 십자가의 그 맹렬한 불길 속에서도 주님의 영혼은 남자다우셨고 흔들리지 않으셨으며 세상의 남은 자기 사람들에게 따뜻하였고 원수들에게조차 자비로우셨습니다. 자기에게 피하는 자에게 방패가 되어주셨으며 끝까지 충성되어 사명을 완수하셨으며 하나님 아버지를 끝까지 신뢰하며 자기 영혼을 온전히 맡기셨습니다. 그 십자가의 절정 속에서 주님은 우리를 대신하여 깊은 목마름을 체험하셨고 심지어 영혼까지 완전히 버림당하는 고통까지 친히 겪으셨습니다. 그렇기에 그는 택한 백성들을 결코 버릴 수 없으며 택한 백성들의 삶의 목마름을 그냥 놔둘 수 없으신 것입니다. 끝까지 하나님 앞에 진실한 인간으로서 자기에게 정해진 길을 끝까지 저 깊은 어둠의 나락 끝까지 묵묵히 순종하여 걸어가셨습니다. 그리하여 우리를 완전히 살려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주님을 뜨겁게 사랑합시다. 아무리 세상이 악하고 험할지라도 주님을 굳게 믿고 주님을 본받아 그 뒤를 끝까지 따르가는 자들이 다 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