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스타브 모로 '오이디푸스와 스핑크스':스핑크스의 수수께끼와 유혹
사자 몸에 여성상체 형상 괴물 도발적인 유혹과 질문, 답하는 순간 비극을 부르나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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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스타브 모로(1826∼1898)가 그린 '오이디푸스와 스핑크스'(1864년 작)의 부분도. 여성의 얼굴과 가슴을 가진 스핑크스가 날개를 펴고 도발적으로 오이디푸스의 몸에 올라타 있다. |
- 묘사 중심→표현 중심 전환 시기
- 그리스 신화 속 이야기를 그림으로
- 여성적인 혼돈의 수수께끼를
- 남성적 질서의 정답으로 바꿔
- 결국 스스로 파멸한 오이디푸스
- 오늘날 서구 문명의 위기도
- 지성의 과신이 부른 불행
- 신화에서 경고했던 건 아닐까
아침에는 네 발로 걷고 점심에는 두 발로 걷다가
저녁에는 세 발로 걷는 짐승을 아는가?
그러나 당신은 너무 섣불리 답을 말하려고 해서는 안 된다.
목구멍으로 막 올라오는 답을 잠시 도로 삼켜야 한다.
자신의 지성을 너무 과신하지 말 것.
위험은 항상 그곳에 있다.
보라, 스핑크스의 등은 피에 대한 갈증으로 잔뜩 웅크렸다.
네 발은 상대를 찢어놓고 싶은 욕망으로 팽팽하게 긴장해 있고
발톱은 이미 세워져 있다.
어깨 부근에는 살기(殺氣)의 떨림 같은
미세한 바람이 깃털을 세우고 있다.
그런데 스핑크스의 눈빛에는 왠지 복잡하고
미묘한 감정이 교차하는 듯하다.
구스타브 모로(1826∼1898)는
묘사 중심의 회화(사실주의, 인상주의)에서
표현 중심의 회화(상징주의, 표현주의, 초현실주의)로 이행하는
미술사의 중요한 다리다.
그는 파리에서 꽤나 잘나가는 건축가 루이 모로와 음악을 사랑하는
다감한 여성 폴린 사이에서 태어났다.
섬약하고 따뜻하고 몽상적인 이 아이는 잠깐 기숙학교 생활을 빼고는
어머니 품과 집 서재를 가득 채운 장서 속에서 자란다.
그리고 화가를 꿈꾼다.
스무 살에 당시 화가로 성공하는 지름길이던 에꼴 데 보자르에
입학하지만, 곧 그만두고 자신만의 길을 찾아 나선다.
들라크루아와 앵그르 영향권 내의 그저 그런 화가 정도로 알려졌던
그가 일약 화단의 시선을 끌게 된 것은 바로 1864년 살롱 출품작
'오이디푸스와 스핑크스' 때문이었다.
■ 오이디푸스는 남성·이성을 상징
고대 그리스인을 전율시키고 매혹시킨 오이디푸스의 비극은
서구인의 의식을 지배하는 무의식의 기본 틀(어머니에 대한 성적 애착과 아버지의 거세 위협)이었음을 프로이트는 밝혔다.
그런데 프로이트가 오이디푸스 콤플렉스 개념을 정립하기 전에
모로는 오이디푸스를 그렸다.
그가 그린 것은 오이디푸스 신화 가운데서도 스핑크스와 만나는
장면이었다.
왜 하필 그 장면일까?
이 섬뜩한 만남은 해독되지 않은 고대 상형문자처럼, 스핑크스
자신이 낸 수수께끼처럼 신비롭다.
고향 테베로 가는 길, 깊은 골짜기를 품은 벼랑길에서 오이디푸스는
스핑크스와 만났다.
스핑크스는 날개를 펴고 도발적으로 오이디푸스의 몸에 올라타 있다.
오른쪽에는 모로 특유의 장식성을 보여주는 향로가 있어 이곳이 스핑크스를 위한 제단임을 짐작하게 한다.
그런데 향로의 받침대를 타고 뱀 한 마리가 머리를 내밀고 있다.
뱀은 지혜를 상징하기도 하지만 또한 유혹이면서 죽음이다.
어둔 골짜기, 자궁 같은 향로와 더불어 뱀의 상징성은 이곳이 위험한 여성성, 이브의 영토임을 말한다.
오이디푸스는 스핑크스의 수수께끼에 맞서고 있다.
스핑크스의 도발에 반사적으로 뒤로 젖혔지만, 그렇기에 반발력의 긴장과 탄력을 지닌 상체,
스핑크스의 시선을 놓치지 않는 눈빛, 지면을 버티는 긴장으로 살짝 굽은 발가락들에서 결코 물러서지 않겠다는 단호함이 보인다.
창과 같이 뾰족한 끝을 가진 지팡이는 스핑크스의 발톱에 맞서면서 남자의 권위를 드러내고자 하는 기호다.
다스리고 지배한다는 의미를 가진 한자 '尹(윤)'이나 '君(군)'의 갑골문 역시 모두 남자가 지팡이를 든 상형이어서 흥미롭다.
아마 스핑크스는 막 저 유명한 수수께끼를 던졌으리라
"아침에는 네 발로 걷고 점심에는 두 발로 걷다가 저녁에는 세 발로 걷는 짐승은 무엇인가? 말해보라."
스핑크스는 이중적이다.
그녀의 입은 답을 요구하고 있지만, 눈빛은 수수께끼 속으로 남자를 유혹하고 있다.
모로는 스핑크스의 감성적 얼굴보다 오이디푸스의 이성적 얼굴을 상위에 그렸다.
오이디푸스는 스핑크스를 오만하게 내려다보면서 탐색과 추론을 행하고 있는 것이리라.
그러나 그는 좀 더 신중했어야 했다.
그가 "사람"이라고 답을 말하는 순간, 그는 문제는 풀었지만 유혹에는 졌다.
그의 지성은 결국 자신의 눈을 찌르고 스스로 빛을 거두어 갈 것이다.
■ 수수께끼가 풀렸을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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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로가 그린 '스핑크스와 오이디푸스'(1888년 작). |
오이디푸스가 수수께끼를 풀자
스핑크스는 골짜기(혹은 바다)에 떨어져 죽는다.
그리고 스핑크스는 서구의 주류 담론에서 사라진다.
스핑크스는 서구의 시선이 지나쳐버린 곳에 있다.
그러나 칼 융은 좀 달랐다.
그는 스핑크스에 숨어 있는 얼굴을 발견했다.
그것은 우리의 심혼 속에 살아 있는 무서운 어머니의 원형적 이미지다.
고대 이집트에서 스핑크스는 "모든 것이 시작되는 곳"이라 여겨졌으며,
그리스어로 스핑크스는 '괄약근(sphincter)'에서 파생되었다.
이 모든 것을 종합해 보라. 무엇이겠는가?
스핑크스 자체가 숨겨진 수수께끼임을 오이디푸스는 몰랐다.
스핑크스는 모든 것이 시작하는 어머니의 생식기다.
오이디푸스도 프로이트도 몰랐지만, 모로의 예술적 직감은
무의식적으로 그것을 포착한 듯하다.
모로는 몇 점의 그림에서 오이디푸스 이성의 승리를 기획하지만, 그때마다 자신의 기획을 뒤흔드는
스핑크스의 불가사의한 유혹을 느꼈던 것 같다.
그의 성장과정이 오랫동안 어머니의 품이었다는 것, 어머니에 대한 애착은 25년간 사귀었던 여인을 두고
끝내 그를 독신으로 살게 했다는 것을 환기해 두자.
1888년 그린 '스핑크스와 오이디푸스'에서는 스핑크스의 위험한 매혹이 화면 전체를 압도하며, 오이디푸스는
그 힘에 경의를 표하는 것처럼 보인다.
칼 융은 오이디푸스의 해법을 지성을 과신하는 남성적 방식이라고 규정했다.
여성적인 혼돈의 수수께끼를 오이디푸스가 남성적 질서의 정답으로 바꾸는 순간 스핑크스는 배경으로 사라진다. 그러나 그녀는 사라지지 않았다.
그녀의 수수께끼는 오이디푸스 신화 전체에 스며들면서 오이디푸스가 건설하는 질서를 역으로 해체한다.
신화적인 근친상간으로 표현되곤 하는 어머니 생식기는 실상 모든 생명과 생성이 소용돌이치는 곳이다.
그곳에서 시간이 시작된다.
■ 서구 문명이 잉태한 위기 예견
그녀 뒷머리가 소라 고동처럼 소용돌이치며 말려 있는 것이 보이는가.
그녀의 혼종의 몸은 온통 시간 메타포로 가득하다.
날개는 전갈자리의 성좌인 독수리자리와 추분을, 사자의 꼬리는 태양이 사자자리에 도달하는 하지를 가리킨다. 스핑크스의 뒷다리는 본래 황소 발굽이었다고 한다.
바빌로니아 달력은 한 해가 춘분에서 시작하는데 이때 태양은 황소자리로 들어선다.
소용돌이치며 생성하는 시간은 오이디푸스적 이성이 놓쳐버린 구멍이다.
서구 문명의 주류는 끊임없이 이 구멍을 은폐하고 무시간의, 불변하는, 기하학적 진리를 추구하였다.
그것이 초래할 비극을 신화는 경고하고 있지만, 그들은 오이디푸스의 길을 선택했다.
전 지구적인 환경과 생명파괴라는 서구 문명의 위기는 기하학적 이성을 과신한
오이디푸스의 비극(어머니 대지의 파괴와 자신의 파괴)에서 예견되었던 것이 아닐까?
자세히 보면 향로 위로 연기 대신 보라색 나비 한 마리가 날고 있다.
누구의 영혼일까?
아래 구덩이의 주검에서 빠져나온 것인가, 아니면 오이디푸스의 기구한 운명에 대한 연민일까?
어쩌면 이제 곧 저 까마득한 절벽으로 사라질, 그리하여 문명사에 구멍으로 남을
스핑크스를 위한 나비일지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