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치 : 제주시 이호2동 1467번지
시대 : 조선
유형 : 묘
제주에 살고 있는 전주이씨 중 가장 큰 종파를 이루고 있는 계성군파의 제주입도조는 유배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전주이씨 계성군파 입도조는 이팽형이다. 이팽형의 아버지 이덕인(회은군)는 인조22년(1644년) 심기원(沈器遠) 등이 그를 새로운 왕으로 추대하려는 역모가 발각돼 제주 대정현에 유배되었다. 인조실록(22년 3월 21일)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었다.
〈부사직(副司直) 황익(黃瀷)과 오국 별장(五局別將) 이원로(李元老) 등이 상변(上變)하여, 청원 부원군(靑原府院君) 심기원(沈器遠)이 전 지사(知事) 이일원(李一元), 광주 부윤(廣州府尹) 권억(權澺) 등과 모반하여 장차 회은군(懷恩君) (李德仁)을 추대하려고 한다고 고하니, 대신 및 비국·금부의 당상과 삼사의 장관을 명초(命招)하여 내병조(內兵曹)에다 추국청을 설치하고 범인들을 체포하여 안문(按問)하였다. 지난밤에 황익과 이원로 등이 기원의 집으로부터 곧장 대장 구인후(具仁垕)의 집으로 가서 기원의 모반 내막을 고하고, 아울러 입직 초관(入直哨官) 김응현(金應鉉)이 내응하기로 되어 있고 남영 초관(南營哨官) 정형(鄭蘅)도 그 모의에 가담한 사실을 말하자, 인후가 황익 등을 데리고 김류의 집으로 가서 상의하였다. 그런 다음에 사람을 시켜 내직 장관(內直將官) 정이중(鄭以重)과 정부현(鄭傅賢)을 불러서 문틈으로 지시하여 김응현을 홍화문(弘化門)의 입직 장소에서 사로잡게 하였는데, 응현은 본디 용력(勇力)이 있었으므로 이중 등이 유인하여 포박하였으며, 인후는 스스로 남영으로 가서 정형을 사로잡고 마침내 나팔을 불어 병사를 모아 돈화문(敦化門) 앞에 진을 치고 역당(逆黨)을 잡아들였다.
심기원은 상변이 있다는 말을 듣고서 그의 군관을 거느리고 대궐 안으로 들어가 여러 재상이 회좌한 곳에 이르러 한참 동안 머뭇거리다가 옆 방으로 물러가 앉아서 갑자기 ‘안광립(安光立)은 왔느냐? 김응현(金應鉉)은 어디 있느냐?’고 물었는데, 이는 대개 광립 역시 용력이 있었고 응현이 잡힌 사실을 몰랐기 때문에 어수선한 틈을 타 변란을 일으키려고 한 것이다. 그의 군관들이 모두 칼을 빼어 들고 그의 앞에 빙 둘러섰고 나문(拿問)하라는 명이 내렸다는 말을 듣고서도 나오려 하지 않았다. 군인들이 그 군관들을 잡고는 싶어도 감히 앞으로 나가지 못하고 먼저 나문하라는 명이 내렸다고 말하니, 기원은 목소리를 가다듬어 말하기를 ‘내가 어찌 역적질을 할 자인가. 지금 내가 아직 건재한데 누가 감히 나의 군관을 사로잡는단 말이냐.’ 하였다. 결국 군인들이 치고 들어가 그를 잡았고 덕인(德仁) 또한 도총관(都摠管)으로 입직(入直)하다가 함께 잡혀 끌려왔다. 상이 하교하기를, "이미 역적이라고 하면 마땅히 시급히 국문해야 할 것인데 날이 저물어도 아직 추국하지 않으니, 매우 놀랍다. 담당 승지를 먼저 파직하고 나서 추고하라." 하였다. 이날 뜻밖에 변이 발생하여 일이 많이 두서가 없어 제 때에 국문을 개시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이 전교가 나온 것인데, 좌부승지 남선(南銑)이 파직되었다.〉
심기원은 유생(儒生) 출신으로 이귀(李貴) 등과 협력하여 인조반정의 정사공신(靖社功臣) 1등에 봉해진 인물이다. 병자호란 시에는 유도대장(留都大將)에 임명되어 한양 방어의 책임을 맡았으나 실패하였고, 다시 제도도원수(諸道都元帥)에 임명되었으나 별다른 전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종전 이후 남한산성에 고립된 인조를 적극적으로 구원하지 않은 죄로 탄핵을 받아 유배당하였다. 최명길(崔鳴吉)과 신경진(申景禛)의 적극적 천거로 1639년에 귀양에서 풀려나 다음해 김자점(金自點)과 함께 호위대장(扈衛大將)에 임명되었다. 1640년에는 남한산성수어사(南漢山城守禦使)에 임명되었다(인조실록 18년 4월 8일). 이후 병조 판서를 역임하였고, 1642년에는 우의정을 거쳐 좌의정으로 승진하였다. 다음해 사은사(謝恩使)로 청(淸) 나라에 다녀왔다. 1643년에는 대사헌홍무적(洪茂績)으로부터 정승의 신분으로 비루하게 수어사를 겸직하면서 방납(防納) 비리에 연루되어 사사로운 욕심을 채웠다는 탄핵을 받고, 좌의정에서 물러났다(인조실록 21년 10월 26일).
1644년 3월 21일, 부사직(副司直) 황익과 오국별장(五局別將) 이원로 등이 심기원이 전 지사(知事) 이일원(李一元), 광주부윤(廣州府尹) 권억(權澺) 등과 모반하여 회은군을 추대하려고 한다고 고변하였다. 고변을 접수한 훈국대장 구인후는 김류(金瑬)와 상의한 뒤 즉각 군사를 동원하여 역모의 연루자들과 심기원을 차례로 체포하였다. 고변자 황익은 심문 과정에서, 심기원이 병자년의 치욕 이후 인조의 미온적 대처에 불만을 품고서 휘하의 군사와 광주부의 별아병(別牙兵)을 동원하여 말로만 청류(淸流)라고 자처하는 무리들을 몰아낸 뒤 전부 무신(武臣)으로 조정을 채우고 회은군을 추대하려 했다고 말하였다. 황익은 심기원이 원래 인조를 상왕(上王)으로 모시고 심양에서 나온 소현세자에게 양위시키는 방안도 강구하였으나, 세자가 응하지 않을 것 같아 시도하지 않았다는 진술도 덧붙였다. 연루자로 지목된 남영초관(南營哨官) 정형(鄭蘅)은 심기원이 조선 해안에 출몰하는 당선(唐船), 즉 명(明)나라 배와 합류하여 심양을 공략하려 했다고 진술하였다. 심기원은 고변자 황익과의 대질 심문에서 자신이 당선의 대거 도래시 어떻게 대처할 것인지 걱정한 바 있었고, 나라의 안보를 염려하여 군사를 양성하려고 시도한 것은 맞지만 역모를 도모한 것은 결코 아니었다고 부인하였다.(인조실록 22년 3월 21일) 그러나 심기원의 주장은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심기원과 권억 등 주모자는 즉시 처형되었다. 회은군은 역모에 단순히 추대되었다는 사실만으로 억울한 죽음을 당하였다.
이덕인은 제9대 임금 성종의 16남 가운데 2자인 계성군의 증손이다. 인조가 신하들에 의해 임금으로 선택됐듯이 이덕인은 신기원 등에 의해 왕으로 선택됐지만 그 해 제주에서 사약을 받아 생을 마감한다. 그의 아들(庶子) 이팽형은 아들 득춘을 낳고 득춘은 아들 열셋을 낳았다. 이팽형의 묘는 제주시 이도2동 현재의 종친회관 자리에 있었는데 다호마을 인근으로 이장했다.
제주인물사를 다룬 대부분의 책자에서는 이팽형(1576년생)은 1596년 21세인 젊은 나이에 제주에 낙향, 두목골(현재의 제주시 이도1동 부근)에 정착해 임윤화(임윤회)의 딸을 맞아 아들 이득춘을 낳았으나 30세의 나이에 요절하였으며 외아들이던 이득춘은 제주에서 아들 13명을 둬 자손이 번성하였다고 한다.
반면 전주이씨 계성군파 제주특별자치도 종친회는 입도조인 이팽형이 제주를 찾은 시기를 다르게 보고 있다. 종친회가 제시한 족보 등에 따르면 이팽형은 아버지가 제주로 유배된 1644년(69세) 이에 충격을 받아 아버지를 돌보려 제주 두목골에 정착, 1665년 90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아들 이득춘을 얻고 이득춘이 아들 13명을 낳아 가계가 번창하게 된다. 통계청이 지난 2000년 조사한 자료에 따르면 제주지역에 거주하는 전주이씨는 2만4818명(7571가구)인 것으로 조사됐다.
이득춘이 묻힌 곳은 명당자리로 알려져 있다. 묘소 인근에는 용천수가 나오는 덕지물과 멩강물이 자리 잡고 있어 명당의 조건을 갖췄다고 종친회는 설명했다.(제민일보 2010년 9월 1일)
이득춘의 묘는 일반적인 묘와 크게 다른 점이 하나 있다. 묘의 머리쪽인 용미가 유난히 긴 것이다. 묘 앞에는 현무암으로 만든 동자석과 문인석이 설치되었다. 비석에는 〈嘉義大夫靖社功臣全州李公得春之墓 貞夫人晉州姜氏祔左〉라고 새겨져 있다. 정사공신이란 1623년에 일어난 인조반정에서 공을 세운 공신(주로 서인 계열)들에게 내린 훈호인데 이득춘에게 왜 이 훈호를 썼는지는 알 수 없다.
靖社功臣(53명) = 1등공신(10명) 김류·이귀·김자점·심기원·신경진·이서·최명길·이흥립·구굉·심명세, 2등공신(15명) 이괄·김경징·신경인·이중로·이시백·기시방·장유·원두표·이해·신경유·박호립·장돈·구인후·장신·심기성, 3등공신(28명) 박유명·한교·송영망·이항·최내길·신경식·구인기·조흡·이후원·홍진도·원우남·김원량·신준·노수원·유백증·박정·홍서봉·이의배·이기축·이원영·송시범·김득·홍효손·김련·유순익·한여복·홍진문·유구(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작성 2021-01-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