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10월 30일 연중 제30주간 목요일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예언자들을 죽이고,
자기에게 파견된 이들에게 돌을 던져 죽이기까지 하는 너!
암탉이 제 병아리들을 날개 밑으로 모으듯,
내가 몇 번이나 너의 자녀들을 모으려고 하였던가?
그러나 너희는 마다하였다. (루가 13,31-35)
Jerusalem, Jerusalem, you who kill the prophets and stone those sent to you, how many times I yearned to gather your children together as a hen gathers her brood under her wings, but you were unwilling!
말씀의 초대
바오로 사도는 에페소의 신자들에게 영적 투쟁을 촉구한다. 또한 자신이 담대히 복음을 전하도록 기도해 주기를 청한다(제1독서). 죽음에 직면하시는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을 두고 한탄하신다. 예언자는 예루살렘이 아닌 다른 곳에서 죽을 수 없다(복음).
☆☆☆
오늘의 묵상
지난 두 주간 평일 미사의 제1독서로 에페소서가 봉독되었고, 오늘은 그 마지막 부분입니다. 에페소서에서 바오로 사도가 전하는 말씀은 흔히 ‘가르침’과 ‘권고’로 구분합니다. 가르침은 현양되신 그리스도의 영광, 그리스도를 통하여 주어진 평화와 은총의 선물, 성령을 통하여 자라나는 교회의 충만함 등 하느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미’ 이루신 ‘승리’에 관한 것입니다. ‘권고’에서는, 이러한 구원의 승리는 각 그리스도인과 교회 공동체가 악마와 세상의 권세에 맞서 끊임없는 영적 투쟁을 해 나갈 때 비로소 체험될 수 있음을 상기시킵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이러한 ‘권고’ 부분을 맺으면서 다양한 상징으로 영적 투쟁이 삶 전체와 관련되어 있음을 보여 줍니다. ‘하느님의 무기로 무장을 갖추고, 진리로 허리에 띠를 두르며, 의로움의 갑옷을 입으라.’ 이 권고에서는 영적 투쟁을 위해서는 먼저 마음부터 정화하고 다져야 한다는 점을 알 수 있습니다. ‘발에는 평화의 복음을 위한 준비의 신을 신고, 믿음의 방패를 들라.’ 영적 투쟁이란 죄를 짓지 않는 것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평화의 복음을 널리 전하는 과정에서 만나는 박해와 유혹을 믿음으로 이겨 내라는 것입니다. ‘구원의 투구를 쓰고 성령의 칼을 받아 들라.’ 영적 투쟁의 힘은 주님 구원의 선물과 성령을 통하여 우리 안에 심어진 하느님의 말씀이라는 점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러한 영적 투쟁의 모범을 이미 보여 주었습니다. 이제 그는 자신이 시련 속에서도 담대하게 복음의 신비를 알릴 수 있도록 교회 공동체가 기도해 주기를 청합니다. 이는 또한 모두가 함께 기도하며 영적 투쟁의 길에 나서자는 초대이기도 합니다. 세상의 권세와 악을 거슬러 살아가는 것은 분명 어려운 일입니다. 그러나 바오로 사도의 권고처럼,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이미’ 구원의 승리가 이루어졌다는 희망을 지니고, 서로 사랑하고 격려하며 기도해 주는 공동체 안에 머문다면, 이 사명을 능히 수행해 낼 수 있을 것입니다.
언젠가 7살짜리 꼬마를 데리고서 동네 슈퍼마켓을 갔던 적이 있습니다. 저를 초대한 집의 아이인데, 너무 예뻐서 “신부님이 맛있는 것 사줄게. 슈퍼가자.”라고 말하고는 옷을 입고 아이와 함께 온 것입니다. 이 아이는 자신이 좋아하는 막대 사탕을 샀습니다. 그리고 어떤 것을 보고는 망설이는 것입니다. 제가 살짝 보니 가격이 조금 비쌉니다. 하지만 꼭 갖고 싶은가 봅니다.
“신부님이 이것도 사줄까?”라고 말하자, 이 아이는 “이거 제 동생이 너무나 좋아하거든요.”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사실 이 아이의 동생은 3살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이것을 좋아하기에는 너무나도 어린 나이지요. 결국 무슨 뜻일까요? ‘제가 이것을 정말로 좋아하거든요. 이것도 사주면 안 돼요?”라는 뜻이지요.
우연히 텔레비전에서 ‘연애능력평가’라는 개그 프로를 보게 되었습니다. 남녀의 통화 내용입니다.
여: 오빠 뭐해? / 남: 잠깐 친구들 만났어! 왜? 여: 그래? 언제 끝나는데? / 남: 응? 무슨 일 있어? 여: 아니야! 나 신경 쓰지 말고 놀아. / 남: 자기한테 갈까? 여: 아니! 나 신경 쓰지 말라니까.
문제: 이후, 여자는 3일 동안 전화를 받지 않았습니다. 여자의 ‘나 신경 쓰지 말고 놀아.’라는 말에 내포되어 있는 뜻은 무엇일까요?
정답: “신경 쓰지 않되, 계속 내 생각을 하고 재밌되, 불편하게 놀아.”
앞선 아이의 말이나 이 개그 프로에 나오는 답을 보면, 겉으로 하는 말과 속뜻이 다를 수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이를 오늘 복음에서도 볼 수 있네요.
바리사이 몇 사람이 예수님께 “어서 이곳을 떠나십시오. 헤로데가 선생님을 죽으려고 합니다.”라고 말하면서 얼핏 보면 주님의 편인 것처럼 합니다. 하지만 예수님께 호의적인 듯 보이는 그들 마음은 미움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왜냐하면 오늘 복음의 바로 앞 구절은 첫째였던 자들이 꼴찌가 될 수 있다는 말씀을 덧붙이셨기 때문입니다. 사람들 위에 군림하는 지도자의 지위를 잃고 이익을 빼앗길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그분 편인 척 꾸미고 다가가 “어서 이곳을 떠나십시오. 헤로데가 선생님을 죽이려고 합니다.”라고 했던 것입니다. 즉, 이들의 속마음은 “더 이상 여기에 머물러서 우리를 불편하게 하지 말고, 빨리 다른 지역으로 떠나!”라는 것입니다.
우리도 주님께 이렇게 겉과 속이 다른 말을 할 때가 종종 있습니다. 겉으로는 바른 신앙인의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으면서도, 속으로는 온갖 나쁜 생각으로 주님의 편에 서지 못하게 만듭니다. 겉으로만 그럴싸한 신앙인이 아닌, 안과 속이 주님을 향한 뜨거운 마음으로 가득했으면 합니다. 그래야 언제나 주님과 함께 할 수 있습니다.
사람이 살아가면서 꼭 위로 높아지는 것만이 정답은 아닌 것 같아. 옆으로 넓어질 수도 있는 거잖아. 마치 바다처럼(김동영).
추억
지난번 동창 모임 때, 예전에 신학교 다닐 때의 이야기가 나왔습니다. 상당히 긴 시간을 그때의 일을 떠올리면서 이야기꽃을 피웠지요. 사실 그 당시에 재미있었던 일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성소에 대한 갈등으로 인해 아파하기도 했고, 친구들과의 갈등으로 서로 싸우기도 했었던 괴롭고 힘든 시간도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이렇게 말합니다.
“그때 힘들었지. 그래도 그때가 좋았어.”
추억을 떠올리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드라마나 영화도 70~80년의 이야기를 전하면서 추억을 보여주고, 사람들은 이를 보고서 좋아합니다. 과거 음악도 리메이크 되어 크게 인기를 끕니다. 하긴 프로야구도 그렇더군요. 초창기의 촌스러운 유니폼을 입고서 경기하는 장면을 종종 보니까요.
분명히 힘든 시간인데도 추억을 들추면서 미소를 짓는 것을 보며, 지금 어렵고 힘든 시간도 언젠가는 그 시간을 떠올리면서 “그때가 좋았어.”라고 말할 것이라는 확신을 하게 됩니다.
지금 어렵고 힘들다고 모든 것을 포기하는 사람들이 종종 있습니다. 이는 곧 “그때가 좋았어.”라고 말할 수 있는 추억을 포기하는 것과 똑같은 것이 아닐까요?
조금만 힘내십시오. 그리고 이 힘든 시간이 멋진 추억의 한 단편을 구성할 것이라는 희망을 가져보았으면 합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늘 “그때가 좋았어.”라고 말할 수 있는 시간을 선물로 주셨습니다.
영적 전쟁
-하느님의 무기로 완전무장 하십시오-
-이수철신부-
삶은 전쟁입니다.
세상이 전쟁터입니다.
예로부터 수도승 영성의 요소중 하나가 영적전투입니다.
사실 수도승생활을 보면 하루하루가 영적전투입니다.
흡사 공동체의 모습도 하느님의 군대같고 수도복 또한 하느님의 전투복같습니다.
수도승만 아니라 믿는 이는 누구나 예외 없이 영적전투중인 '하느님의 전사'입니다.
평생제대가 없는, 죽어야 제대인 영원한 현역의 하느님의 전사입니다.
그러니 하루하루가 영적전투입니다.
결코 퇴역이나 은퇴가 없는 영원한 현역입니다.
오늘은 말씀을 중심으로 영적전투를 승리로 이끌기위한 필수조건에 대한 묵상을 나눕니다.
오늘 말씀의 주인공인 예수님과 바오로 사도야 말로 진정 하느님의 전사입니다.
첫째, 적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의 적은, 전투상대는
인간이 아니라, 권세와 권력들과 이 어두운 세계의 지배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령들입니다.
"가서 그 여우에게 이렇게 전하여라."
여우로 지칭되는, 예수님을 죽일 기회를 노리는 헤로데가 상징하는바 어두운 세계의 지배자입니다.
우리의 적은 눈에 보이는 적이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적입니다.
또 적은 밖에 있는 게 아니라 내 안에 있습니다.
외부의 눈에 보이지 않는 적들의 유혹에 빠지는 내가 바로 적입니다.
이런 나와의 싸움은 평생 끝이 없습니다.
하여 주님 안에서 그분의 힘을 받아 굳세어져야 하며 분별력의 지혜도 선사받아야 합니다.
둘째, 하느님의 무기로 무장해야 합니다.
악마의 간계에 맞설 수 있도록 하느님의 무기로 완전히 무장하십시오.
진리로 허리에 띠를 두르고 의로움의 갑옷을 입고 굳건히 서십시오.
발에는 평화의 복음을 위한 준비의 신을 신으십시오.
무엇보다도 믿음의 방패를 잡으십시오.
악한 자가 쏘는 불화살을 그 방패로 막아서 끌 수 있습니다.
그리고 구원의 투구를 받아 쓰고 성령의 칼을 받아 쥐십시오.
성령의 칼은 하느님의 말씀입니다.
하느님의 전략가 바오로의 지혜로운 권고입니다.
매일의 이 거룩한 미사시간,
주님은 이렇게 우리를 무장시켜 삶의 영적전쟁터로 우리를 출전시킵니다.
셋째, 사기(士氣)와 전략이 좋아야 합니다.
좋은 무기에다 사기가 높고 전략이 좋을 때 백전백승입니다.
그러니 늘 성령 안에서 온갖 기도와 간구를 올려 필요한 은총을 청해야 합니다.
무엇보다 삶의 목표가, 삶의 의미가, 사명감이 또렷해야 사기도 충천해
일당백의 하느님의 전사입니다.
"보라, 오늘과 내일은 내가 마귀들을 쫓아내며 병을 고쳐주고, 사흘째 되는 날에는 내 일을 마친다.
그러나 오늘도 내일도 그 다음 날도 내 길을 계속 가야 한다."
삶의 목표인 전략에 따라 거칠 것 없이 진군하는 하느님의 전사 예수님입니다.
전사(戰死)해야 전사(戰士)입니다.
'예언자는 예루살렘 아닌 다른 곳에서 죽을 수 없기 때문이다'
자신의 전사를 예견하는 예수님입니다.
다섯째, 늘 영적훈련을 해야 합니다.
유비무환입니다.
영적훈련을 통해 늘 깨어 있어야 하고 영육을, 심신을 단련해야 하며,
믿음과 희망과 사랑을 키워야 하고, 삶을 참되고 좋고 아름답게 가꿔야 합니다.
평생 영적 전투병이자 훈련병인 우리 믿는 이들입니다.
그러니 바오로의 충고대로 인내를 다하고 모든 성도들을 위하여 간구하며 깨어 준비해야 합니다.
오늘 옥중에서 사슬에 매여 있으면서도
우리에게 영적전략을 전수하는 하느님의 전사 바오로의 모습이 감동입니다.
하여 평생 성무일도와 성경 렉시오디비나및 제반 수행을 통해
영적훈련에 항구한 우리 수도승들입니다.
하루하루가 영적전쟁의 날입니다.
죽어야 끝나는 영적전쟁이요 영원한 현역의 하느님의 전사인 우리들입니다.
주님은 매일의 영적전쟁에 승리할 수 있도록
우리 모두 거룩한 미사를 통해 하느님의 무기로 완전무장시켜 세상 영적전쟁터에 출전시킵니다.
아멘.
“암탉이 제 병아리들을 날개 밑으로 모으듯, 내가 몇 번이나 너의 자녀들을 모으려고 하였던가?”(루카13,34)
-김대열신부-
너무도 사랑하는 자식이 죄 속에 빠져 있는 것을 보고 있는 아버지의 마음은 어떠할까요? 파멸로 치닫는 뻔한 길을 달려가고 있는 자식을 보아야 하는 어머니의 마음은 어떠할까요? 하루가 멀다 하고 원수처럼 싸움질 하는 자식들을 바라봐야 하는 부모의 마음은 어떠할까요?
자식을 구하기 위해 온 힘을 다해 손을 뻗어보지만 닿지 않는 안타까움. 그 어떤 희생을 치러서라도 자식의 잘못된 길을 막고자 하지만,
아랑곳하지 않는 자식에 대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안타까움.
어쩌면 세상을 바라보시는 하느님의 마음이 바로 이런 안타까움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암탉이 제 병아리들을 날개 밑으로 모으듯, 내가 몇 번이나 너의 자녀들을 모으려고 하였던가?” 우리에 대한 하느님의 안타까움을 이리도 잘 표현한 구절은 없을 듯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오늘을 살고 있는 우리를 어떻게 바라보고 계실까요? 우리 안에 있는 각자인 나를 바라보시는 마음은 어떠실까요?
안타까움이 아니었으면 좋겠습니다. 애쓰는 마음이 안쓰럽게 보이지만 그래서 더욱 기특하고 대견한 모습으로 그분 마음 안에 있는 우리였으면 좋겠습니다.
아버지이기를 자처하신 분, 그분이 바로 우리의 하느님이십니다. 그 아버지께서는 우리를 진정으로 사랑하십니다. 그리고 우리가 진정으로 행복하기를 원하십니다.
행복해야 합니다. 그 아버지의 사랑을 절감(切感)하기에 행복한 우리여야 합니다. 우리가 힘들 때, 우리보다 더 힘들어하실 아버지의 마음을 헤아려보려 하는 우리였으면 좋겠습니다. 그분의 안타까움을 조금이라도 생각할 수 있는 우리였으면 좋겠습니다.
진실한 참회와 다시 일어설 수 있는 희망은, 그분의 사랑에 감사할 수 있을 때 비로소 가능함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조재형신부-
10월도 이제 이틀 남았습니다. 교구청 마당에도 떨어진 나뭇잎이 바람에 날리곤 합니다. 나뭇잎이 떨어져 낙엽이 되는 것은 슬픈 일입니다. 하지만 낙엽이 되지 않으면 새로운 잎이 생기지 않습니다. 그러기에 나뭇잎이 떨어지는 것은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추운 겨울이 다가 올 때 나뭇잎이 떨어지지 않으면 나무는 얼어붙은 대지위에서 양분을 얻기 위해 더 많은 노력을 해야 할 것입니다. 낙엽이 된다는 것은 긴 겨울을 이겨내려는 나무의 지혜이기도 합니다.
지난 월요일 ‘옹기장학회’ 미사와 강의가 있었습니다. 학교 법인을 담당하는 몬시뇰께서 법인 산하 직장과 병원에서 근무하는 사람들 중에 예비자 교리를 받게 될 분들이 1,700명이 넘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가톨릭에서 운영하는 직장과 병원에서 근무하는 사람들이 나중에 세례를 받지 못하고 하느님께로 간다면 그것은 가슴 아픈 일이라고 하셨습니다. 본인이 학교 법인을 담당하는 동안에는 많은 사람들이 세례 받을 수 있도록 하겠다고 하셨습니다. 지난 8월 방한하신 교황님의 영향도 있었을 것입니다. 본인이 맡은 직책의 범위에서 최선을 다하신 몬시뇰의 열정도 있었을 것입니다.
가끔씩 사제들의 대한 이야기를 듣게 됩니다. 강론 준비를 잘하고, 신자들과 원만하게 지내며, 사목에 충실한 사제들에 대한 이야기, 고백성사를 정성껏 드리고, 장례가 나면 제일먼저 가서 연도를 함께 하고, 가난한 이와 소외된 이를 먼저 생각한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저도 기분이 좋아지고, 자부심을 느끼게 됩니다. 새로운 임지에서 모든 것을 새로 바꾸려 한다는 이야기, 말을 함부로 한다는 이야기, 질책과 비판을 일삼는다는 이야기, 전임 사목자에 대한 비난을 공개적으로 한다는 이야기, 지나치게 돈 이야기를 많이 한다는 이야기, 본당을 자주 비운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저도 부끄러워집니다. 교구에 229개의 본당이 있습니다. 모든 본당에서 사제들에 대한 사랑과 칭찬이 가득했으면 좋겠습니다.
오늘 바오로 사도는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잘 말해주고 있습니다. “우리의 전투 상대는 인간이 아니라, 권세와 권력들과 이 어두운 세계의 지배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령들입니다. 진리로 허리에 띠를 두르고 의로움의 갑옷을 입고 굳건히 서십시오. 발에는 평화의 복음을 위한 준비의 신을 신으십시오. 무엇보다도 믿음의 방패를 잡으십시오. 여러분은 악한 자가 쏘는 불화살을 그 방패로 막아서 끌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구원의 투구를 받아쓰고 성령의 칼을 받아 쥐십시오. 성령의 칼은 하느님의 말씀입니다. 여러분은 늘 성령 안에서 온갖 기도와 간구를 올려 간청하십시오. 그렇게 할 수 있도록 인내를 다하고 모든 성도들을 위하여 간구하며 깨어 있으십시오.”
10월도 이제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내가 헛되이 버린 시간들은 없는지, 내가 나의 영혼을 위해서, 남을 위해서 무엇을 했는지 돌아보았으면 좋겠습니다. 이제 곧 지나갈 10월입니다. 의미 있는 일에, 보람 있는 일에, 하느님을 찬미하는 일에 나의 정성과 마음을 담아내야 하겠습니다.
< 유혹을 이기는 유일한 방법 >
-전삼용신부-
미국의 황야지대에는 방울뱀이 살고 있습니다. 이 뱀은 무서운 독을 가지고 있어서 물리면 치명적이라고 합니다.
이 방울뱀이 다람쥐를 잡는 방법은 특이합니다. 먼저 꼬리를 흔들어서 소리를 냅니다. 이때 나무위에 있던 다림쥐가 그 소리를 듣고 호기심이 발동하여 소리 나는 곳을 내려다봅니다. 그 순간 다람쥐의 눈과 독사의 눈빛이 마주치게 됩니다. 다람쥐가 겁을 집어먹고 떨고 있을 때 독사는 입을 쩍 벌리고 기다립니다. 두려움에 사로잡힌 다람쥐는 주문에 걸린 것처럼 비실비실 흔들리다 중심을 잃고 나무 아래로 떨어집니다. 이때 독사는 떨어진 다람쥐를 한 입에 꿀꺽 삼켜버립니다.
베드로가 물 위를 걷다가 중심을 잃고 가라앉게 된 것도 예수님을 바라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와가 죄에 떨어진 것도 뱀을 바라보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당신 시선으로 성령을 주시고 유혹자는 자신의 시선으로 유혹의 힘을 내보냅니다. 누구를 바라보느냐가 유혹을 이길 수 있느냐 없느냐의 결과를 낳는 것입니다. 우리 힘으로는 안 됩니다.
우리 모두는 영적 전쟁을 치르고 있습니다. 전쟁을 위해서는 좋은 갑옷과 튼튼한 방패와 날카로운 칼이 승패를 좌우합니다. 총으로 싸우는 때에 돌을 들고 덤빈다면 이길 수 없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바오로는 이 영적인 전쟁에서 성령님의 역할이 절대적이라고 합니다. 사실 의로움의 갑옷을 입고 평화의 신을 신고 믿음의 방패를 잡고 성령의 칼을 쥐고 싸우라고 하는데, 믿음도 의로움도 평화도 모두 ‘성령’의 열매이기 때문입니다. 결국 성령으로 악에 떨어지지 않도록 싸워야 하는데 성령은 말씀을 통하여 오신다는 것이 그 결론입니다.
“구원의 투구를 받아쓰고 성령의 칼을 받아 쥐십시오. 성령의 칼은 하느님의 말씀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말씀이 단순한 성경말씀이 아니라 사람이 되시어 우리와 함께 사셨던 성체와 성혈까지도 포함한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성령님을 주시는 방식이 당신 말씀의 가르침뿐만 아니라 당신 살과 피를 받아먹고 마셔야만 구원에 이른다고 하셨습니다. 따라서 영적 투쟁을 위해 우리 자신을 강하게 만드는 방법은 말씀을 가까이 하는 방법밖에는 없는 것입니다. 바오로는 확실히 말씀의 힘이 쌍날칼보다 날카롭다고 말합니다.
“사실 하느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힘이 있으며 어떤 쌍날칼보다도 날카롭습니다. 그래서 사람 속을 꿰찔러 혼과 영을 가르고 관절과 골수를 갈라, 마음의 생각과 속셈을 가려냅니다.”(히브 4,12)
문제는 이 말씀의 힘을 우리가 잘 느끼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의 힘을 조금이라도 느끼면 우리는 성경을 읽고 묵상하지 않을 수 없고 성체를 영하고 조배를 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어쩌면 그 힘을 느끼지 못하는 것은 그 힘을 통해 영적인 싸움을 해 본 경험이 없기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죄를 이기기 위해 말씀의 힘을 빌려본 적이 없기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유혹이 있을 때 성경을 읽거나 조배를 해 보았다면 그래서 그 힘으로 승리해 보았다면 우리는 기도하지 않고는 유혹을 이길 수 없음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미국의 존스 홉킨스 대학병원의 벤 카슨 의사는 신의 손이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는 모든 의사들이 포기한 하루 120번의 발작을 일으키는 4살짜리 악성뇌종양환자를 수술해서 완치시켰으며 세계에서 처음으로 머리와 몸이 붙은 샴쌍둥이를 분리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그러나 신의 손으로 불리며 성공을 거둔 벤 카슨 박사지만, 그의 어린 시절을 보고 그가 위대한 의사가 되리라고는 아무도 상상하지 못했습니다. 그는 디트로이트 빈민가에서 태어났고, 8세 때 부모님의 이혼으로 불행한 가정에서 자랐으며 소년기에는 흑인불량배들과 어울려 싸움을 일삼는 장래가 어두운 아이였습니다. 그는 피부가 검다는 이유로 친구들에게 따돌림을 당했고 초등학교 때는 항상 꼴지를 도맡아 했습니다.
어느 날 그에게 기자가 찾아와서 질문을 했습니다. “오늘 당신을 만들어 준 것은 무엇입니까?” “나의 어머니 쇼냐 카슨 덕분입니다. 어머니는 내가 늘 꼴찌를 하면서 흑인이라고 따돌림을 당할 때도 ‘벤, 너는 마음만 먹으면 무엇이든 할 수 있어. 노력만 하면 할 수 있어’라는 말을 끊임없이 들려주시며 격려해 주셨습니다.”
사랑이 가득 담긴 어머니의 말씀도 이렇게 큰 힘을 지니는데 사랑 자체이신 말씀의 힘은 얼마나 강력하겠습니까? 그 말씀의 힘으로 무장하여 악이 감히 싸우자고 범접하지도 못할 정도로 강한 영을 소유한 신앙인이 되어야겠습니다. 유혹을 이기는 힘은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처음부터 끝까지 말씀에만 시선을 고정시키는 것뿐입니다. 그리고 유혹을 이긴다면 나뿐만 아니라 내 주위의 많은 이들이 성령의 은총으로 가득 차게 될 것입니다.
어릴 적엔 또래들과 잘 지냈었는데
-이기정신부-
고집 욕심 자존심 이기심 명예욕 우월감 등 이런 게 우리와 함께 살지요. 나이가 많아, 학력 지위가 높아, 재산 권력이 있어, 잘 생겨서라며 말입니다. 이런 우월감으로 이웃과 벽을 쌓고 단절하고 밀쳐 버리며들 힘들게 삽니다.
이런 걸 거의 개인의 자유라고 주장하고 성격 참 못됐다고 비판도 합니다. 어릴 적엔 또래들과 잘 놀고 욕심 사심도 없이 잘 지냈었는데 말입니다. 그래도 깊은 마음속 양심은 조용히 하늘의 소리 들으며 우리를 타이르잖아요.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예언자들을 죽이고 자기에게 파견된 이들에게 돌을 던져 죽이기까지 하는 너! 암탉이 제 병아리들을 날개 밑으로 모으듯, 내가 몇 번이나 너의 자녀들을 모으려고 하였던가? 그러나 너희는 마다하였다.(루카 13,34)”
한 마리 여우 -반영억신부-
여우는 밤에만 은밀하게 활동하고 낮이 되어 위험할 때면 굴속에 숨는다고 합니다. 겉으로는 온순한 것처럼 보이나 속으로는 간교하고 음흉한 것이 특성입니다. 제가 머물고 있는 사제관 뒤뜰에는 매괴동산에 사는 고라니가 내려오기도 합니다. 가끔은 너구리도 볼 수 있습니다. 어느 날 여우의 모습을 볼 수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한밤중 바스락, 바스락 소리에 또 왔구나 하며 사진에 담으려고 했지만 번번이 실패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헤로데를 왜‘여우’라고 칭했을까요? 헤로데에게는 예수님의 전도활동이 골칫거리였습니다(루가 9,7이하). 그는 예수께서 자기 제자들을 선동할까 두려워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자기 영토 밖으로 내쫓고 싶어 했습니다. 그러나 드러내 놓고 그 표현을 하진 않았습니다. 예수님께 대한 어떠한 찬성이나 반대의 입장을 전혀 취하지 않고 예수님에게서 벗어나고 싶어 했습니다. 그야말로 교활함과 비열함을 모두 갖춘 한 마리 여우였습니다. 이렇게 보면 가끔 ‘너는 하는 짓이 여우같다’는 소리를 하는데 정말 좋은 말이 아닙니다.
어째든 예수님께서는 이 여우와 맞서서 마귀를 쫓아내고 병을 고쳐주며 당당하게 당신의 일을 계속 하셨습니다. 예언자가 예루살렘 아닌 다른 곳에서 죽을 수 없다고 하시며(루가13,33)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으시고 아버지 하느님의 뜻을 이루십니다. “내가 받아야 하는 세례가 있다. 이 일이 다 이루어질 때까지 내가 얼마나 짓눌릴 것인가?”(루가12,50).하시며 고통을 감당 하셨지만 마침내 “다 이루어졌다”(요한 19,30).하시며 숨을 거두셨습니다. 이렇게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의 구원자로서 활동하셨지만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한 사람들에 의해 처형을 당할 정도로 배척을 받으셨습니다.
예루살렘은 하느님의 사랑과 예언자들의 눈물로 세워진 도시입니다. 그런데 ‘자식’이 ‘어미’를 배척 하는 불효를 저지른 것입니다. “예언자들을 죽이고 자기에게 파견된 이들에게 돌을 던져 죽이기까지 하는 너! 암탉이 제 병아리들을 날개 밑으로 모으듯이 내가 몇 번이나 너의 자녀들을 모으려고 하였던가? 그러나 너희는 마다하였다”(루가13,34).하시는 탄식에 등 돌린 자식에 대한 아픔이 배여 있습니다.
그러나 “암탉이 병아리를 날개 아래 모으듯이”어미의 사랑은 끝내 그를 품습니다. 그리고 미래를 약속합니다. ‘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분은 복되시어라.’하고 너희가 말할 날이 오리라(13,36). 하시며 죽음이 마지막이 아니라 다시금 보게 되리라는 희망을 줍니다. 그러나 그 깨달음을 얻기까지 얼마나 긴 세월이 필요했는지요?
우리의 일상 안에서도 어미의 사랑은 여전합니다. 내가 겪는 어렵고 힘든 일이 자초했든 다른 사람에 의해왔든 주님께서는 그 안에 함께하십니다. 완고한 마음 안에도 여전히 계시고 그 마음이 풀어지기를 기다리십니다. 하느님이 어디 계시냐고 항변하는 그 안에도 계십니다. 그리고 마침내 당신의 영광 안에 함께하기를 원하십니다. 분명코 “하느님께서는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고 진리를 깨닫게 되기를 원하십니다”(1티모2,4). 그럼에도 그분을 볼 수 없고 만날 수 없는 것은 내 눈이 가려진 탓입니다. 내 마음이 여우인 까닭입니다. 나보다 더 나를 사랑하시며 나를 품고 계신 주님을 찬미하는 날 되시기 바랍니다.
한 재상이 임금에게 어떻게 하면 깨끗한 충신으로 살 수 있을지를 물었습니다. 그러자 임금은 물이 가득 든 그릇을 주며 물을 한 방울도 흘리지 말고 정한 시간 안에 고을을 돌아서 오면 알려 주겠다고 하였습니다. 그 재상은 임금이 명한대로 물그릇을 들고 정한 고을을 돌아 무사히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그러자 임금이 물었습니다. “장 안에 떨어진 돈다발이 있었는데 그것을 못 보았는가?”그가 대답하였습니다.“보지 못했습니다.”“그렇다면 궁녀들의 무리가 부채춤을 추며 행렬하고 있었는데 보지 못했는가?”그는“아무 것도 보지 못했습니다. 오로지 임금님의 명령을 수행하기 위해 그릇의 물을 흘리지 않는 데만 온통 신경을 썼습니다.”그러자 임금이 말했습니다. “깨끗한 충신으로 사는 방법은 이렇게 주변 것에 마음과 정신을 빼앗기지 않고 오로지 해야 할 자신의 목적과 목표에 온 마음을 쏟는 것이라네.”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느님께 충실한 신앙인은 이리 저리 휘둘리지 않고 두 마음 품지 않으며 오늘도 내일도 그 다음 날도 나의 가야할 길을 갑니다. 세상 것에 두리번거리지 말고 천상 것에 마음을 고정시켜야 하겠습니다. 사랑합니다.
사랑의 당당함과 초연함
-인영균신부-
“오늘도 내일도 그다음 날도 내 길을 계속 가야한다.” 당시 갈릴래아를 다스리고 있던 헤로데 안티파스의 살해 위협 앞에서 예수께서 하신 말씀입니다. 죽음을 향해 걸어가는 예수님의 당당함이 묻어납니다. 초연함이 보입니다. 헤로데에게 예수님은 눈에 가시였습니다. 세례자 요한을 없앤 ‘여우’ 헤로데는 예수님도 제거할 방책을 찾고 있습니다. 여우의 계획은 머지않아 십자가에서 이루어질 것입니다.
주님은 악의 세력에 짓눌린 이들, 몸과 마음이 아픈 이들을 외면하지 않으셨습니다. 이웃의 고통 앞에 나 몰라라 하지 않으셨습니다. 헤로데를 비롯한 통치자들은 자신의 안위만 생각했습니다. 자기 배만 불리는 것이 바로 불의입니다. 이웃의 아픔을 외면하는 것이 불의입니다. 사랑이 없는 곳에 불의가 판을 칩니다.불의 앞에 주님은 뜻을 굽히지 않았습니다. 불의 앞에 눈을 감지 않았습니다. 침묵하지 않았습니다. 사랑의 열정이 정의로 드러나는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처럼 사랑의 당당함, 사랑의 초연함을 살도록 기도합니다. 그러면 예수님처럼 남을 위해 죽어야겠지요.
-한상우신부-
"오늘도 내일도
그다음 날도
내 길을 계속
가야 한다."
우리의 시간이 어디를 향해 가고있는지를 묻게 됩니다.
사랑의 길은 결코 멈출 수 없는 우리의 길입니다.
우리존재를 일깨워주시는 주님께서는 당신의 선하신 길을 묵묵히 걸어가십니다.
주님과 함께 살아가야 할 일치의 길을 우리들에게 가르쳐주십니다.
예루살렘에 홀로 남겨질 예수님의 수난을 봅니다.
피 흘리지 않고는 걸어갈 수 없는 생명의 길을 주님께서는 걸어가십니다.
할 수 있는 일을 언제나 사랑으로 하시는 주님이십니다.
사랑의 길은 자신의 모든 것을 내어주는 길입니다.
하느님을 향해 나아가는 길은 십자가라는 신비의 길뿐입니다.
십자가는 하느님 구원의 목표점입니다.
우리또한 그 목표점을 향해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은총의 시간 되시길 기도드립니다.
십자가에 온전히 일치할 수 있도록 우리자신의 십자가를 기꺼이 받아들이는 사랑의 하루 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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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