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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908. 묵상글 ( 연중 제23주일. - 들어야지 말하고 들은 대로 말한다.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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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908. 연중 제23주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2024.09.08 04:14
- 들어야지 말하고 들은 대로 말한다.
아시다시피 이사야서는 오실 메시아가 어떤 분이신지,
메시아가 오시면 세상이 어떻게 되고 어떤 일이 벌어질지 예언하는 책이고
그래서 오늘 첫째 독서도 메시아가 오시면 어떤 벌어질지 묘사하는데 이렇습니다.
“그때에 눈먼 이들은 눈이 열리고, 귀먹은 이들은 귀가 열리리라.
그때에 다리 저는 이는 사슴처럼 뛰고, 말 못하는 이의 혀는 환성을 터뜨리리라.”
오늘 복음은 이런 이사야서의 예언이 예수님에 의해 실현되는 표시로
귀먹고 말 더듬는 이를 치유해주시는 내용인데 아주 짧지만
그 안에 담겨 있는 내용들은 그 의미가 매우 풍부하고 깊습니다.
우선 오늘 치유 받은 사람은 귀먹고 말 더듬는 이라는 점입니다.
무릇 말 더듬는 이는 혀가 짧아서 더듬을 수도 있겠지만
근본적으로는 듣지 못하기에 말을 하지 못하는 법입니다.
이것을 우리에게 적용하면 이렇게 됩니다.
우리가 영적인 말을 하지 못함은 성격이나 능력 때문이 아니라
근본적으로 하느님의 말씀을 듣지 않거나 못하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수줍은 성격이기에 못하거나
신학 공부를 많이 하지 못해서 하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무슨 이유 때문인지 하느님의 말씀을 듣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이유도 들려주는 사람이 없어서 듣지 못하는 경우도 있겠지만
다른 귀는 열려서 그 말은 듣지만 영적인 귀는 열리지 않아서 듣지 못하는 겁니다.
그런데 왜 다른 귀는 열리고 영적인 귀는 열리지 않을까요?
제 생각에 요즘 우리는 말의 홍수 속에 허우적거리고 있습니다.
말의 홍수란 말이 귀하지 않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홍수가 나면 거기에 떠내려가고 허우적거리게 마련이듯
말의 홍수가 나도 그 말들에 의해 우리가 떠내려가고 허우적거리게 됩니다.
요즘 얼마나 말들이 많습니까?
방송으로 치면 갖가지 티브이 방송이 있고,
자기 손안의 방송인 스마트 폰 시대에 온갖 유튜브 방송이 있습니다.
이런 말의 홍수와 방송의 홍수 속에서 우리는 정신을 차리고
깨어서 듣고 골라서 듣습니까? 아니면 떠내려가고 허우적거립니까?
어릴 적 생각이 납니다.
시골에서 살았기 때문에 만화방이 없었고 그래서 저는 만화를 못 봤습니다.
그런데 하루는 엿장수가 앞뒤 뜯어진 만화를 가지고 왔는데
저는 고물을 가지고 엿을 사 먹지 않고 그 만화를 샀습니다.
그리고 그 만화를 보고 또 보고
그야말로 닳도록 보며 온갖 상상의 날개를 펼쳤습니다.
이 정도 얘기하면 제가 뭘 말씀드리려고 하는지 아실 겁니다.
말들을 끊지 않으면 그 수없는 말들에 의해 영적 감수성을 잃거나 무디어집니다.
이것은 요즘 젊은이들이 귀에 이어폰을 달고 살다가 청력이 잃는 것과 같습니다.
오늘 주님께서는 데리고 온 사람들을 놔두고
귀먹고 말 더듬는 이를 따로 데리고 나가셔서 아주 더러운 짓을 하십니다.
그의 귀에 당신 손을 대시고 그의 혀에 당신 침을 발라주십니다.
주님께서는 손이 오그라든 사람을 고쳐주시듯 사람들 가운데서,
그리고 백인대장의 종을 고쳐주시듯 멀리서 말씀 한마디로도 고쳐주실 수 있지만
따로 그러니까 은밀히 만나주시고,
한마디 말씀이 아니라 정성스러운 행위로 고쳐주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우리도 따로 불러내실 때
우리는 그 소리를 들을 수 있습니까, 지금?
주님의 목소리를 오늘 듣게 되거든 너희 마음 무디게 가지지 말라고 하시는데,
오늘 그 목소리를 들을 수 있을 정도로 우리 마음 무디지 않고 깨어 있습니까?
주님은 오늘도 우리의 귀에다 대고 ‘에파타’, 열려라! 하시는데
우리는 그 말씀을 들을 수 있도록 마음의 귀가 열리겠습니까?
“에파타!”곧 “열려라!” 하고 말씀하셨다.
그러자 곧바로 그의 귀가 열리고 묶인 혀가 풀려서 말을 제대로 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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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908. 연중 제23주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는 ‘복음의 기쁨’ 53항에서 “나이 든 노숙자가 길에서 얼어 죽은 것은 기사화되지 않으면서, 주가지수가 조금만 내려가도 기사화되는 것이 말이나 되는 것입니까?”라고 하셨습니다. 교황님의 탄식이 실제 우리 삶에 많이 보입니다. 그래서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은 잘 보이지 않습니다. 돈과 연관된 세상의 것만 더 크게 부각되는 세상이기 때문입니다.
사랑의 반대말이 ‘무관심’이라고 합니다. ‘무관심’이 많은 세상인 것을 보면, 그만큼 우리는 사랑의 반대편을 서 있는 것이 아닐까요? 특히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을 향한 관심은 자기가 아닌 국가가 또 교회만 하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런데 우리 신앙인이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예수님께서 가난 속으로 이 땅에 오셨다는 점입니다. 허름한 마구간에서 시작해서 아버지로부터 목수 일을 하셨고, 또 공생활 중에도 늘 가난 속에 사셨습니다. 먹을 것이 부족해서 제자들이 자주 걱정할 정도였습니다.
특히 소외된 사람들에게도 예수님의 관심은 지극했습니다. 사람들이 외면했던 병자들을 고쳐주시고, 마귀 들린 사람 역시 외면하지 않으셨습니다. 세리, 창녀 등과 같은 소외된 사람에게도 따뜻한 사랑으로 다가가십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따뜻한 주님의 사랑을 볼 수 있습니다. 귀먹고 말 더듬는 이를 사람들이 데리고 와서 손을 얹어 주십사고 청합니다. 그 뒤의 행적을 이렇게 복음은 전해줍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를 군중에게서 따로 데리고 나가셔서, 당신 손가락을 그의 두 귀에 넣으셨다가 침을 발라 그의 혀에 손을 대셨다. 그러고 나서 하늘을 우러러 한숨을 내쉬신 다음, 그에게 에파타 곧 열려라 하고 말씀하셨다.”(마르 7,33.34)
손만 얹어주셔도 사람들은 충분히 만족하셨을 텐데, 귀에 손을 넣고 침을 발라서 그의 혀에 손을 대셨다는 것은 그만큼 사랑하신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조금 지저분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사랑하면 전혀 지저분하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갓난아기의 아빠 엄마는 아기의 똥을 지저분하게 생각하지 않는다는 점을 기억해 보십시오.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에게 늘 사랑으로 다가가셨던 주님이십니다. 이는 우리가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에게 무관심하다면, 우리 곁에 계신 주님을 알아볼 수 없을 것입니다. 실제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던 사람들은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기에 그런 말과 행동을 했었던 것이지요. 하느님의 아드님이라는 사실을 알고도,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라고 큰 소리로 외칠 수 있었을까요?
어렵고 힘들어하는 사람을 향한 관심이 필요한 요즘입니다. 이런 관심이 예수님을 알아볼 수 있게 하고, 또 함께하는 유일한 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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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명언: 사랑이면 충분합니다(성녀 베르나데트 수비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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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908. 연중 제23주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축하합니다. 오늘은 ‘성모 탄생 대축일’입니다. 동시에, <몬떼 올리베또 성 마리아 대수도원>과 연합회의 주보성인 축일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더욱 기쁜 날입니다. 이 기쁜 날, 아기 성모님과 함께 벌어진 은총과 축복이 여러분 모두에게 찰찰 넘쳐나길 빕니다.
사실, “성모성탄 대축일”인 오늘로부터 10달을 거슬러 올라가면, 12월 8일은 “마리아의 원죄 없으신 잉태 대축일”이 됩니다. 그러니, 성모님의 탄생은 ‘원죄 없으신 잉태’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따라서 오늘은 ‘성모 마리아를 원죄 없는 잉태로 탄생시킴으로써 성자의 강생에 합당한 준비를 갖춘 하느님의 구원사업을 기념하는 축일’입니다. 곧 구원 역사의 중요한 국면이 시작됨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이처럼, 마리아의 탄생은 우리 구원의 여명으로 이해됩니다. 곧 구세주께서 준비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마리아의 탄생으로 구원이 시작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느님 아버지께서는 이토록 ‘성자의 강생에 합당한 준비’를 갖추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무한하신 사랑으로 성모님을 원죄로부터 보호받는 축복을 주셨습니다. 이는 비록 인간이 죄의 굴레에 있다 하더라도, 결코 하느님의 축복의 굴레를 벗어날 수는 없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그러니, 우리는 ‘죄보다 먼저 축복을 받은 존재’입니다. ‘죄보다 먼저 축복이 왔다’는 이 사실을 우리는 깊이 기억해야 합니다. 인간은 본질적으로 축복받은 존재라는 사실을 말입니다.
그것은 바로 성모님의 탄생으로 준비 되었던 것입니다. 참으로, 성모님께서는 원죄조차 없는 티 없이 아름답고 거룩한 대성전이셨습니다. 구세주, 하느님의 아들을 품으신 까닭입니다. 그러기에, 오늘은 참으로 기쁨과 찬미와 감사의 날입니다.
따라서 ‘성모님의 탄생’은 우리에게 다음과 같은 사실을 일깨워 줍니다. 하느님께서는 “은총과 복을 주시는 분”이시오, 성모님께서는 “은총과 복을 가득히 받으신 분”(루가 1,28)이시라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성 안셀모는 성모님을 “넘치는 은총으로 충만하신 분”, “복되시고도 지극히 복되신 분”이라고 찬양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은총과 복이 모든 피조물에게까지 이르게 되었음을 이렇게 묘사했습니다.
“당신이 받으신 축복으로 말미암아 모든 피조물은 창조주로부터 축복을 받고, 창조주께서는 그들로부터 찬미를 받으신다. ~모든 피조물이 당신의 충만함의 흘러넘침을 입어 새싹이 트듯 되살아났다.”
이는 성모님께서 받은 은총과 축복이 성모님으로 말미암아 온 피조물에게 흘러들었음을 말해줍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성모님의 은총과 축복으로 말미암아 당신의 아드님과 형제가 되며 아버지의 자녀가 되고,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여 ‘한 몸’을 이루며, 그분 안에 수렴(accapatulatio)됩니다. 이토록, 우리는 ‘은총에 은총을, 축복에 축복을 입게 되었습니다.’(요한 1,16 참조). 그리하여 성모님께서는 우리 모두의 어머니가 되십니다.
흔히들, “부모의 기쁨은 자녀에게 있다”고 합니다. 성모님의 기쁨도 아들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있습니다. 구세주 아들을 탄생시키기 위해 원죄 없이 잉태되셨으며, 오늘 탄생하셨습니다. 그렇게 아들로 말미암아 구원의 면류관을 쓰셨습니다. 그리고 이제 우리가 어머니의 그 은총과 축복의 충만함을 입었습니다.
그러기에 오늘 우리는 특별히 축복에 축복을 받은 존재라는 사실, 많은 은총에 은총을 입은 존재라는 사실을 깊이 기억하고 찬미와 감사를 드립니다.
다시 한 번, 이 기쁜 날, 아기 성모님과 함께 벌어진 은총과 축복이 여러분 모두에게 찰찰 넘쳐나길 빕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다윗의 자손이며 아브라함의 자손인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마태 1,1)
주님!
보이는 인간의 역사 안에 보이지 않는 당신의 역사를 보게 하소서.
세세대대로 베풀어진 당신의 자비를 보게 하소서.
그 자비의 사슬 안에서 당신의 감실을 보게 하소서.
그들 모두가 당신이 담겨 있는 성합임을 보게 하소서.
오늘, 제 심장의 고동소리와 제 말과 발걸음과 손짓 모두가
당신의 자비를 엮어내는 사슬이 되게 하소서.
오늘, 저 안에 새겨진 당신 자비의 얼굴을 뵙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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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908. 연중 제23주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제대로 듣고 말할 수 있는 은혜
찬미 예수님, 사랑합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시고 당신의 사랑에 우리를 부르십니다. 그리고 그 사랑 안에 머물 수 있도록 몸소 우리의 귀를 열어주시고 입을 열어주십니다. 이 시간 ‘귀먹고 말 더듬는 이’에 관해 생각하는 가운데 우리의 삶을 새롭게 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제대로 듣고 제대로 말할 수 있는 은혜’가 주어지길 희망합니다.
창세기에 보면, 인간은 하느님의 말씀으로 창조되었습니다. 하느님의 모상을 닮은 인간으로, 당신의 숨을 우리에게 불어넣어서 생명을 주셨습니다(창세1,27.2,7). 따라서 하느님께 가까이 가기 위해서는 하느님으로부터 말씀을 듣고 제대로 말할 수 있도록 길들여져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라면 무엇보다도 먼저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시는 것을 듣는 것에 익숙해야 합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오기 때문입니다. 말씀을 제대로 듣지 못하면 제대로 말할 수 없고 말씀대로 살 수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말씀을 듣기를 간절히 원하시기 바랍니다.
그렇다면 하느님의 말씀은 어떻게 들을 수 있습니까? 가장 확실한 방법은 성경을 통해서입니다. 성경은 하느님의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을 모르는 것은 그리스도를 모르는 것입니다”(성 예로니모). 기록된 하느님의 말씀이기에 우리가 눈을 통해서 마음으로 읽어야 하지만 그분은 말씀하시고 나는 듣는 것입니다. 말씀과 함께하려는 정성이 있을 때 어느 순간 살아있고 힘이 있는 능력의 하느님(히브4,12)을 체험케 됩니다.
신자들이 세속적인 이야기는 많이 하면서 하느님의 말씀 앞에서는 귀먹고 말을 더듬는 이가 많습니다. 사실 그리스도인이라면 그리스도처럼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며 살아가겠다고 나선 사람입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의 말씀을 알아들어야 하고 그리스도의 언어로 말해야 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럼에도 많은 이들이 그리스도의 복음을 알아듣지 못하고 또 복음적으로 말하지 못하고, 또 살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성경대로 생각하고 성경대로 살자!”라고 마음속으로 다짐하면 좋겠습니다.
그룹모임에 가보면 자유 기도를 잘 하지 않습니다. 한다 해도 내 바람만 얘기하고, 말씀을 중심으로 기도하지 못합니다. 말씀 나누기에도 입을 꼭 다물고 계십니다. 사회적으로는 공부도 많이 했고 높은 지위에 있으면서도 하느님의 말씀 앞에서는 침묵하고 계신 분들이 있습니다. 왜 그럴까? 밖에서는 그렇게 말씀을 잘하시는 분이 꿀 먹은 벙어리가 되는가?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하느님의 말씀을 들으려 노력하지 않은 채 그냥 세상에 묻혀 살기 때문입니다. 입술로는 하느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마음과 행동은 전혀 말씀과 함께하지 못하고 있다면 그가 귀먹고 말을 더듬는 반벙어리입니다. 세상 것을 즐기는 시간과 하느님 말씀에 귀 기울이는 시간을 비교해 보십시오. 부끄럽습니다.
성경을 펴십시오! 그리고 주님의 말씀을 들으십시오. 귀가 열리고 입이 열리게 될 것입니다. “성경을 읽을 때 비판 정신으로 읽을 것이 아니라 단순한 마음으로 읽으십시오. 마치 자녀가 아버지의 편지를 읽을 때에 문법을 따지지 않듯이, 식탁에서 밥을 먹을 때에 영양가를 분석하지 않고 먹듯이 성경을 읽으시길 바랍니다”(알베리오네 신부). 일반 소설책은 밤을 새워 읽지만, 성경이나 신심 서적은 그렇게 읽지 않습니다. 그러면서도 주님의 은총을 기대하고 있으니 안타깝습니다. 시간을 내십시오. 그만큼 은혜로울 것입니다.
귀먹었다는 것은 들을 귀가 없다는 뜻입니다. 귀가 있어도 하느님의 말씀을 듣지 못하는 사람은 귀먹은 사람입니다. 입이 있어도 하느님에 대해 한마디 말하지 못하는 사람은 말 더듬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빵의 기적에 관한 가르침을 듣고도 마음이 완고해서 알아듣지 못했고, 호숫가에서 자기들을 구하러 오시는 예수님을 보고 유령인 줄 알고 비명을 지르면서 제대로 말을 하지 못했습니다. 바로 귀먹고 말 더듬는 이의 모습입니다. 그 모습이 바로 오늘 우리의 모습이 아닐까요?
오늘 복음의 치유 과정을 한번 살펴보겠습니다. 1). 예수님께서 환자를 군중에게서 따로 데리고 나가셨습니다. 따로 불러낸다는 것은 사랑의 표현이고 배려입니다. 무엇보다 안정시킬 수 있는 곳이요, 당신의 말씀에 온전히 귀 기울일 수 있는 곳입니다. 예수님은 기도하시러 자주 한적한 곳에 머무셨고 제자들에게도 그렇게 쉬도록 하셨습니다. 우리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따로 한적한 곳에서 기도 시간을 갖지 못한다면 우리의 영적 성장은 이루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2). 당신 손가락을 그의 두 귀에 넣으셨습니다. 손가락은 창조하는 도구입니다. 내가 너를 치료해 주겠다. 나는 너를 사랑한다는 표현입니다. 말을 못 하는 이들은 자기의 의사 표현을 손으로 합니다.
3). 침을 발라 그의 혀에 대셨는데 유다교에 있어서 침은 안질에 특효가 있는 치유로 여겼습니다. 당시 관습적인 치유행위 입니다. 우리도 벌레에 물렸을 때 침을 바릅니다. 엄마가 자식에게 먹을 것을 꼭꼭 씹어서 주는 것과 같은 사랑의 표현입니다.
4). 하늘을 우러러 보셨습니다. 5천 명을 먹인 빵의 기적을 행하실 때도 하늘을 우러러보셨습니다. 아버지께 기도하시는 것입니다. 빵을 보고 기도한 것이 아니라 아버지 하느님의 도움을 청하셨습니다. 오늘도 귀먹고 말 더듬는 이를 바라본 것이, 아니라 하늘을 우러러보았습니다. 불쌍한 사람을 보고 기도하면 연민의 정과 측은한 생각으로 기도하겠지만, 하늘을 우러러보며 기도하면 전능하신 아버지의 능력을 바라보면서 희망과 신뢰를 갖고 기도하게 되는 것입니다. 어떤 상황이더라도 상황만을 바라보지 말고 반드시 하늘을 우러러보며 기도해야 합니다. 베드로가 물위를 걸었는데 거센 파도를 보자 물에 빠졌습니다. 주님을 바라볼 때는 걸었지만, 파도를 볼 때는 걸을 수 없었습니다.
5). 한숨을 내쉬셨습니다. 이것은 하느님의 영, 숨을 얘기합니다. 영으로 가득 차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상대의 아픔을 공유하는 것입니다. “저의 하느님, 저의 하느님, 어찌하여 저를 버리시나이까?”(마르15,34), 절규하며 기도하는 그 아픔으로 함께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기서 한숨은 절망이 아니라 생명을 주는 희망입니다.
6). 열려라! 에페타! 이 말은 부활입니다. 듣지 못하고 말하지 못하는 사람에게 ‘열려라’는 말씀은 기쁜 소식, 복음입니다. 귀먹은 반벙어리에게 이보다 더 기쁜 것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러나 이런 치유를 받기 위해서는 말씀에 대해 열려있어야 합니다. 능력의 말씀은 믿는 대로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내가 열려있는 만큼 빛이 들어오고 은총이 열매 맺게 됩니다. 시편에서는 “ 너 한껏 입을 벌려보라, 나는 곧 그 입을 채워주리라”(시편80,11)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오늘 주님께서는 바로 우리 귀를 열어주시고 입을 열어주시려‘열려라’하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마음의 문을 열기 바랍니다. 주님의 은총이 아무리 크다 하여도 인간이 협력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주님의 말씀에 힘입어 나의 영적 감각이 열리고 건강한 영혼을 지켜나갈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이제는 예수님의 치유 결과를 봅니다. 귀먹고 말 더듬는 이의 귀가 열리고 묶인 혀가 풀려서 말을 제대로 하게 되었습니다. 말을 제대로 한다는 것은 단순히 발음을 똑똑히 한다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을 찬미하고 감사드리는 말을 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저분이 하신 일은 모두 훌륭하다.”
우리는 우리가 지닌 귀와 입을 제대로 사용해야 합니다.‘제대로’라는 말은 ‘올바르게’, ‘정확하게’라는 뜻입니다. 하느님을 찬미해야 하는 입이 다른 사람을 비난하고 불평하고 원망하는 데 사용한다면 그것은 제대로 사용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께서 주신 모든 것은 하느님 마음에 들게 사용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때때로 조용한 곳을 찾아 침묵 속에 하느님의 소리를 들어야 하고 하느님의 말씀에 항상 열려있어야 합니다. 에파타! 열린 사람은 감사와 찬미로 제대로 말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치유해 주신 다음 다른 사람에게 말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왜 그러셨을까? 사람들이 제대로 전하지 않고 반벙어리 고쳐주셨다는 얘기만 할 것이 자명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엉뚱한 소리만 퍼질 것을 경계하셨습니다.‘저분이 하신 일은 모두 훌륭하다’는 것은 ‘보시니 참 좋더라’는 창세기의 말씀과 함께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혹시라도 보기에 좋지 않은 것이 있다면 다시 회복시키는 오늘이기를 바랍니다. 말씀을 듣고 그 말씀 안에서 새로워지기를 기도합니다. 이기적인 마음을 주님의 말씀으로 정화하여 들어야 할 것을 제대로 듣고 말해야 할 것을 확실히 말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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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908. 연중 제23주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러시아의 문호 톨스토이의 작품 중에 “사람에게는 얼마만큼의 땅이 필요한가?"라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이 단편 소설의 주인공인 파흠은 가난한 농부였습니다. 어느 날 아주 싼 값에 많은 땅을 얻을 수 있는 마을이 있다는 소문을 들었습니다. 파흠은 그 소문을 따라서 원주민이 사는 동네를 찾았습니다. 정말 원주민들은 단돈 1,000원에 원하는 만큼의 땅을 주겠다고 했습니다. 아침 해가 뜰 때 출발해서 저녁 해가 질 때까지 돌아오면 그만큼의 땅을 준다고 했습니다. 땅을 많이 가지고 싶었던 파흠은 해가 뜨면서 걸었습니다. 기분이 너무 좋았습니다. 이렇게 많은 땅을 가질 수 있다는 사실에 행복했습니다. 걷다보니 어느덧 해가 지려했습니다. 파흠은 돌아가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조금만 더 걸었습니다. 그리고 이제 방향을 돌려 뛰기 시작했습니다. 돌아가기 전에 해가 지면 소용이 없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렇게 뛰고 또 뛰다 파흠은 마을에 도착하면서 그만 심장마비로 죽고 말았습니다. 파흠은 많은 땅을 원했지만 결국 파흠이 묻힌 땅은 ‘반평’에 불과 했습니다.
비슷한 이야기로 ‘시애틀’ 추장에 대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원주민 추장인 시애틀에게 땅을 팔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시애틀은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백인 형제들이 나에게 우리 땅을 팔라고 요청했다. 하지만 이 땅을 팔수는 없다. 땅은 우리 어머니이며, 우리는 그 어머니의 일부분이다. 모든 것이 신성하다. 우리에게 이 땅은 우리의 조상들이 잠든 곳이기에 더욱 소중하다. 백인들은 땅을 소유물로 여기지만, 우리는 땅의 일부이다. 모든 나무와 바위, 강물, 숲의 소리조차 우리 민족의 기억과 역사를 담고 있다. 우리가 죽으면 이 땅은 우리의 영혼을 품고 있기에, 그 어느 곳에도 우리 영혼이 없지 않을 것이다. 자연은 우리의 일부분이며, 우리의 신성한 유산이다. 백인들은 자연을 파괴하지만, 우리는 자연을 돌보고, 후손들에게 물려주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만약 우리가 땅을 판다면, 그 대가로 이 땅을 소중히 여기고, 존중해 달라는 약속을 받아야 한다. 백인들이 우리 땅을 사고 싶다면, 그들이 이 땅을 사랑하고, 그 땅의 신성함을 존중하며, 그곳에서의 삶을 소중히 여기기를 바란다. 하늘과 땅, 나무와 물이 모두 우리의 형제자매이며, 우리가 죽은 후에도 이 땅 위에 우리의 영혼이 남아 있을 것이다.” 당시 땅을 사려했던 주지사는 원주민 추장의 깊은 성찰을 존중하며 도시 이름을 ‘시애틀’로 정했다고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에파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에파타는 예수님께서 사용하시던 언어인 ‘아람어’입니다. 뜻은 ‘열려라’입니다. 사람들이 듣지 못하고, 말하지 못하는 사람을 예수님께 데려왔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사람에게 ‘에파타’라고 하셨습니다. 그러자 듣지 못하고, 말하지 못하는 사람은 귀가 열리고, 입이 열려서 말을 할 수 있었습니다. 러시아와 우크라이나는 2년 넘게 전쟁 중입니다. 러시아는 우크라이나의 땅을 향해 진격했습니다. 해가 지면 돌아와야 하는데 러시아는 2년이 넘게 진격하고 있습니다. 이번에 우크라이나는 반대로 러시아의 땅으로 진격했습니다. 1,000킬로가 넘게 진격했다고 합니다. 이렇게 서로 땅을 차지하는 과정에서 수많은 사람이 죽거나 다쳤습니다. 정든 땅을 떠나야 했습니다. 아름다운 마을이 파괴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듣지 못하고, 말하지 못하는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의 ‘대통령’에게 이렇게 말하실 것입니다. ‘에파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에 참된 평화가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하마스와 이스라엘의 전쟁이 1년 가까이 지속되고 있습니다. 하마스와 이스라엘은 아브라함의 자손입니다. 이스라엘은 남의 땅에서 종살이 했던 민족입니다. 나라 없이 2,000년을 방황하던 민족입니다. ‘홀로코스트’의 슬픈 역사를 간직한 민족입니다. 이스라엘은 문설주에 이런 말을 적어 놓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아 들어라! 온 마음과 온 정성을 다해서 하느님을 사랑하여라. 같은 마음과 정성으로 이웃을 사랑하여라.” 이스라엘은 좀 더 많은 땅을 차지하기 위해서 정착촌을 만들고, 이웃 사람을 내 쫓고 있습니다. 하마스, 헤즈볼라, 시리아 민병대는 이란의 지원을 받고 있습니다. 이스라엘과 미사일을 주고받고 있습니다. 국제 정세는 한치 앞을 내다 볼 수 없을 만큼 위험해 지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스라엘과 하마스에게도 이렇게 말하실 것입니다. ‘에파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이스라엘과 하마스에도 참된 평화가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신앙과 미신은 비슷한 것 같은데 다른 점이 있습니다. 미신은 나의 뜻대로 하느님이 변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이름으로 땅을 빼앗고, 하느님의 이름으로 사람을 죽입니다. 신앙은 하느님의 뜻대로 내가 변하는 것입니다. 하느님 때문에 가진 것을 나누고, 하느님 때문에 희생하고, 하느님 때문에 이웃을 사랑하는 겁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이 변하기를 바라는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에파타’ 열려라. “주님은 고아와 과부를 돌보시나, 악인의 길은 꺾어 버리시네. 주님은 영원히 다스리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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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908. 연중 제23주일. 민동규 다니엘 신부님.
찬미 예수님
‘블랙’이란 영화를 아실까요? 영화의 주인공은 보지 못하고 듣지 못하는 장애를 가졌습니다. 그래서 사람의 형상이긴 한데 동물에 가깝습니다. 그때 한 스승을 만납니다. 처음에 그 스승에게 반발합니다. 자기 멋대로 자기 생각대로 살고자 하는 그녀를 스승은 모질게 가르칩니다. 그녀는 그렇게 서서히 스승을 믿게 되고 그렇게 사람답게 살아가게 됩니다.
오늘 복음에서 사람들이 듣지 못하고 말도 더듬거리는 사람을 데리고 옵니다. 아마도 그 사람은 보기 보는데 듣지 못하기 때문에 우리가 사용하는 문자를 이해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문자를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은 동물과도 같은 삶을 산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 사람이 주님 앞에 왔습니다. 어쩌면 그 사람은 주님이 누구인지도 모르고 있었을 것입니다. 듣지 못했기 때문이지요. 알고 싶지도 않았을지 모릅니다. 자기 삶에 익숙해져 있었을지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때 주님께서 ‘에파타’라고 말입니다. ‘열려라.’라는 뜻이지요. 무엇이 열리라는 말입니까? 귀가 입이? 그것도 맞겠지요? 그러나 그 전에 마음이 열려야 합니다. 마음이 열려야 삶의 희망이 있고 빛이 있습니다. 마음을 닫으면 그것으로 어둠이 되어버립니다.
마음을 닫고 사람을 만나면 그 만남은 죽은 만남입니다.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마음을 닫고 강론을 들으면 성령의 힘은 여러분 안으로 들어가지 못합니다. 마음을 닫고 미사를 봉헌하면 그 미사는 미사일 수 없습니다.
겉으로 보이는 장애는 장애도 아닙니다. 겉으로 보이는 허물은 허물도 아닙니다. 마음이 닫혀 있는 것보다 백배 나은 것입니다.
빛은 한순간에 찾아옵니다. 어두운 방 안에서 초에 불을 붙이는 것처럼 말입니다. 초에 불을 붙이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용기를 내야 합니다. 그러면 온 방 안이 환해집니다. 그러면 삶이 환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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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욕을 조심하세요.
우리가 하느님의 길을 걷는데
우리를 방해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탐욕’입니다.
탐욕은 우리 마음에서 하느님을 가려버립니다.
더 많은 것을 원하고 더 좋은 것을 원하며
다른 사람들보다 더 높기를 바랍니다.
탐욕은 나를 우상으로 앞세워 하느님과 멀어지게 만듭니다.
늘 경계하세요.
하느님을 지워버리는 탐욕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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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908. 연중 제23주일. 키엣 대주교님.
소통은 듣고 말하는 것입니다
사람과 사람의 소통은 듣고 말하는 것입니다.
말은 자신의 영혼을 여는 문이고 귀는 다른 사람을 받아들이는 문입니다. 마음은 마음속에 가둬 두지 않고 밖으로 내보낼 때 이해 받고 소통할 수 있습니다. 다른 사람의 말을 들을 수 있어야 그 사람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듣지 않고 말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다른 사람에게 나를 이해시키고, 다른 사람을 이해할 수가 있겠습니까? 신체적 장애가 없음에도 우리는 스스로 귀머거리, 벙어리가 되기도 합니다.
편견의 귀머거리, 영혼의 귀머거리
다른 사람의 말과 행동을 사실여부에 상관없이 부정하는 사람들, 세상과의 단절을 위해 스스로 귀머거리가 되는 사람들, 배신과 불신으로 이웃과의 소통을 단절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마음을 닫아버려 주님의 말씀을 듣지도 못하고 이해하지도 못하는 영혼이 닫힌 사람들, 주님의 말씀을 듣기 위해 귀와 마음을 열어야 하지만 너무 오래 닫고 있어 주님의 위안의 말씀과 행복의 길로 인도하는 말씀 그 어느 것도 듣지 못하는 불쌍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아주 오랫동안 욕망의 소리만 들었기에 아주 쉬운 주님 말씀도 알아듣지 못하는 귀머거리가 되어가고 있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말을 못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이기심의 벙어리, 두려움으로 꼭 해야 하는 말도 못하는 벙어리, 안일함과 무관심으로 말 못하는 벙어리 등.
다른 사람의 관심과 기대가 아닌 내가 하고 싶은 말만 하는 이기심의 벙어리, 그들이 다른 사람의 말을 경청하지 않듯이 다른 사람도 그의 말을 귀담아듣지 않기 때문에 이해 받지 못하고 점점 세상과 단절되어가는 사람들입니다.
두려움에 감히 진실을 말하지 못하는 사람들, 자기가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는 명예와 권위, 사람을 잃을까 봐 침묵하고 말 못하는 사람들입니다.
안일함과 무관심으로 말 못하는 사람들, 다른 사람에게 무관심하여 격려의 말조차 하지 못하는 그들은 다른 사람이 슬픔에 잠겼을 때 위로의 말도 못하고, 다른 사람이 기쁠 때 같이 기쁨조차도 나누지 못합니다. 무엇보다 가장 불행한 것은 주님의 말씀에 귀 기울이지 않고 복음을 읽고 실천하는 것조차 게을러 주님께 무엇을 고백해야 하는 지, 어떻게 주님을 찬양해야 하는지도 알지 못하는 사람들입니다.
욕망과 이기심, 나태함은 우리의 혀를 꽁꽁 묶어 아무 소리도 내지 못하는 벙어리를 만들고 내가 쳐 놓은 벽들이 귀를 막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귀먹은 이들과 말 못하는 이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열려라 에파타”
주님의 말씀과 사랑하는 사람들의 소리를 들을 수 있도록 마음의 귀와 신앙의 귀를 여십시오.
주님의 말씀을 받아들이고 이웃의 말을 들을 수 있도록 이기심의 장벽을 헐어내야 합니다.
주님과 이웃에 가까이 갈 수 있도록 입을 여십시오.
이웃에 좀 더 다가갈 수 있도록 이기심의 줄을 끊으십시오.
용감하게 진실을 말 할 수 있도록 두려움의 사슬을 끊으십시오.
이웃에게 따뜻한 말을 건네고, 주님을 찬양할 수 있도록 나태함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주님, 저희가 영혼의 귀머거리와 벙어리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도와 주소서. 아멘
함께 묵상해 봅시다.
1. 사람들은 귀머거리가 되어가고 있는 것도 느끼지 못한 채 살아가고 있습니다. 나는 지금 어떻습니까? 세상의 말을 잘 듣고 있습니까? 주님의 말씀을 잘 듣고 있습니까?
2. 경청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주님의 말씀을 경청하려고 노력하고 있습니까?
3. 말을 잘 한다는 것은 잘 듣는 것일수도 있습니다. 나의 말을 경청하는 상대를 보며 행복하다고 느낀 적이 있습니까? 내가 주님의 말씀을 잘 듣는다면 주님도 기쁘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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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908. 연중 제23주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하느님 중심의 삶
“두려워하지 마라, 열려라, 차별하지 마라”
“내 영혼아, 주님을 찬양하라.
한평생 주님을 찬미하라.
이 생명 다하도록 내 하느님 기리리라.”(시편146,1-2)
지금 남태평양에 있는 섬나라 파푸아뉴기니는 흥분의 도가니속에 있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이 3일간 사목방문중에 있기 때문입니다. 교황님도 열렬한 환대중에 꿈처럼 행복한 시간을 보내고 계십니다. 어제 강론처럼 오늘도 교황님의 소식을 알림으로 강론을 시작합니다. 인구 1천50만명의 파푸아뉴기는 전체 인구의 약 26%가 가톨릭 신자이며, 70%는 개신교를 믿는 기독교 국가입니다.
어제 교황님이 파푸아뉴기니 곳곳에서 나눈 연설 제목을 소개합니다. 88세 고령이지만 정신은 영원한 청춘이요 우리 가톨릭 신자들에게는 빛나는 희망의 표지가 되고 있습니다.
“정의감, 친근함, 연민 그리고 부드러움을 지니십시오.”
“용기, 아름다움 그리고 희망의 증인이 되십시오.”
“언제나 새롭게 시작할 준비가 되어 있으십시오.”
“교회의 선교는 우리의 기술이 아닌, 성령의 활동입니다.”
“기도하는 백성은 미래를 지닙니다.”
“파푸아뉴기니 가톨릭 신자들은 멜라네시아계(96%) 파푸아인 정신으로 그들의 믿음을 살아야 합니다.”
“파푸아뉴기니 어린이들이여, 타오르는 사랑의 빛으로 사십시오.”
“교황님의 방문은 학생들에게는 큰 꿈을 꾸게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제목 하나하나마다 우리를 고무하고 격려하고 위로합니다. 그대로 오늘 우리를 향한 말씀으로 들립니다. 꼭 10년전 2014년 한국을 찾았던 교황님이 기적처럼 10년후 이맘때쯤 동남아시아 3개국과 오세아니아의 파푸아뉴기니를 찾은 것입니다. 철저히 하느님 중심의 삶을 살아가는 하느님의 사람,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영향력이 전세계 가톨릭 신자들을 고무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늘 우리 가톨릭 신자들에게는 절박한 물음입니다. 답은 단 하나, '하느님 중심의 삶'입니다. 구체적으로 믿음의 삶, 희망의 삶, 사랑의 삶, 즉 신망애의 삶입니다. 오늘 말씀을 바탕으로 하느님 중심의 삶에 대해 세 측면에 걸쳐나눕니다.
첫째, “두려워하지 마라”는 주님 말씀입니다.
우리의 원초적 정서가 두려움과 불안입니다. 두려움과 불안에 포위되어 살아가는 우리들입니다. 성서에 365회 나온다는 “두려워하지 마라”는 성구는 수도원 십자로 예수 성심상 바위판에도 새겨져 있습니다.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
오늘 제1독서에서 이사야 예언자는 이스라엘이 바빌론 유배로부터 귀향과 행복을 노래하며 이들의 희망과 믿음을 북돋웁니다. 그대로 오늘 우리의 믿음을 북돋우며 믿음의 삶을 살라 촉구하는 말씀입니다.
“너희는 맥 풀린 손에 힘을 불어넣고
꺾인 무릎에 힘을 돋우어라.
마음이 불안한 이들에게 말하여라.
굳세어져라, 두려워하지 마라.
보라, 너희의 하느님을! 그분께서 오시어 너희를 구원하신다.”
이런 하느님을 믿으며 하느님 중심의 '믿음의 삶'을 살 때 사라지는 두려움입니다.
둘째, “열려라!”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열려라의 아람어 “에파타!” 어감도 힘차 좋습니다. 닫힘에서 희망의 열림입니다. 닫힌 우리를 열어주시어 희망의 기쁨을 살게 하시는 주님이십니다. 닫혀 불통일 때 온갖 죄요 병입니다. 마음도, 귀도, 입도 열려야 제대로 듣고 말할 수 있습니다. 바야흐로 이사야 예언자의 꿈이 오늘 복음을 통해, 또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실현되고 있습니다.
“그때에 눈먼 이들은 눈이 열리고, 귀먹은 이들은 귀가 열리리라.
그때에 다리저는 이는 사슴처럼 뛰고,
말못하는 이의 혀는 환성을 터뜨리리라.
광야에서는 물이 터져 나오고, 사막에서는 냇물이 흐르리라.
뜨겁게 타오르던 땅은 늪이 되고, 바싹 마른 땅은 샘터가 되리라.”
실낙원은 복락원이 되고 새로운 창조의 구원으로 새롭게 살아나는 희망의 그때를 노래하는 사랑의 시인이자 신비가이자 영성가인 이사야 예언자요, 그때는 오늘 복음의 예수님을 통해 실현됩니다. 귀먹고 말더듬는 이가 상징하는바 오늘의 우리들입니다. 그대로 시공을 초월하여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똑같은 파스카 예수님께서 하늘을 우러러 한숨을 내쉬신 다음, 우리 모두에게 말씀하십니다.
“에파타! 열려라!”
복음의 귀먹고 말못하는 이가 그러했듯이, 우리의 귀가 열리고 묶인 혀가 풀려서 말을 제대로 하게 하는 이 거룩한 미사은총입니다. 우리 역시 복음의 치유기적을 목격한 이들과 함께 더할 나위없이 놀라서 고백합니다.
“저분이 하신 일은 모두 훌륭하다, 귀먹은 이들은 듣게 하시고, 말못하는 이들은 말하게 하시는 구나!”
그대로 태초에 하느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실 때마다 “하느님께서 보시니 좋았다” 매번 되뇌던 말씀을 연상케 하는 장면입니다. 창세기 1장 마지막 말마디도 생각납니다. “하느님께서 보시니 손수 만드신 것이 참 좋았다.” 과연 하느님 보시기에 참 좋은 세상이요 우리들인지, 하느님 향해 활짝 열린 희망의 삶인지 반성하게 됩니다.
셋째, “차별하지 마라”고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차별하지 않는 사랑이, 편애하지 않는 사랑이 하느님 다운 사랑입니다. 참으로 사랑의 하느님을 닮은 이들은 사람을 차별하지 않습니다. 사도 야고보가 주님의 마음을 그대로 잘 반영합니다.
“나의 형제 여러분, 영광스러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서 차별해서는 안됩니다. 화려한 옷을 입은 부자에게는 ‘선생님은 여기 좋으 자리에 앉으십시오.’하고 가난한 사람에게는 ‘당신은 저기 서 있으시오.’ 한다면 여러분은 서로 차별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악한 생각을 지닌 심판자가 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나의 형제 여러분, 들이십시오. 하느님께서는 세상의 가난한 사람들을 골라 믿음의 부자가 되게 하시고 당신을 사랑하는 이들에게 약속하신 나라의 상속자가 되게 하셨습니다.”
하느님은 당신을 사랑하는 가난한 이들을 믿음의 부자가 되게 하시고 당신 나라의 상속자가 되게 하셨습니다. 참으로 하느님을 사랑하여 하느님을 닮은 이들은 결코 차별하지 않으며 자발적 가난으로 믿음의 부자가 되는 길을, 하느님 나라의 상속자가 되는 길을 선택합니다.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우리의 생명이자 빛이요, 진리이자 길이신 하느님 중심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하느님을 닮아 예수님처럼 “두려워하지 않는 믿음의 삶, 하느님께 이웃에 활짝 열린 희망의 삶, 차별하지 않는 대자대비(大慈大悲), 공평무사(公平無私)한 사랑의 삶”을, 바로 참된 신망애(信望愛)의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이렇게 살도록 도와 주십니다.
“주님은 눈먼 이를 보게 하시며,
주님은 꺾인 이를 일으켜 세우시네.
주님은 의인을 사랑하시고, 이방인을 보살피시네.”(시편146,8-9ㄱ).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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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908. 연중 제23주일.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그리함으로써>
“귀먹은 이들은
듣게 하시고,
말 못하는 이들은
말하게 하시는구나.”(마르 7,37)
들음으로써
말 못하는 이가
말하게 하는 것입니다
말함으로써
귀먹은 이가
듣게 하는 것입니다
보임으로써
볼 수 없는 이가
보게 하는 것입니다
스밈으로써
느낄 수 없는 이가
느끼게 하는 것입니다
품음으로써
외로운 이가
함께하게 하는 것입니다
먹힘으로써
배고픈 이가
배부르게 하는 것입니다
나눔으로써
가지지 못한 이가
갖게 하는 것입니다
돋움으로써
시들어가는 이가
푸르게 하는 것입니다
이끎으로써
멈춰선 이가
나아가게 하는 것입니다
섬김으로써
보잘것없는 이가
어엿하게 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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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908. 연중 제23주일.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오늘은 연중 제23주일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주님께서 말씀하신 ‘에파타! 곧 열려라’는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 각자의 내면을 일깨우는 소리이기도 합니다. 잠자는 우리의 내면의 영적인 감성을 일깨우는 이메시지는 가슴에서 나오는 사랑의 목소리를 듣게 하고 우리들의 양심에 느껴지는 절대적이고 영원불변한 가치관에 귀를 기울이게 합니다. 자신안의 하느님의 사랑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자신안에 담겨진 소중한 가치들과 자신안의 심오한 존재의 빛을 발견하도록 주님은 오늘도 사랑의 ‘에파타’를 외치십니다.
‘에파타’의 초대는 우리의 영적 감각의 모든 것을 열어 놓는 것입니다. 우리의 인격 안에 있는 모든 것을 여는 것입니다. 그분의 사랑의 소리에 응답하기위해 온존재가 눈으로 열리고 온존재가 귀와 입으로 열려 있는 상태입니다. 대양을 흡수하기 위해서 열려 있는 스펀지의 모공(毛孔)처럼 존재의 모공이 열려 그분의 사랑의 손길을 받아들이는 상태입니다.
귀머거리와 벙어리에게 주님 사랑의 손이 얹어질 때 치유가 시작되듯이 우리가 열린 마음으로 하느님께 다가가 우리 자신의 나약함과 상처들을 하느님의 사랑 앞에 펼쳐 보일 때 비로소 내적 치유가 시작됩니다. 이 주님 사랑의 손길안에서 삶의 상처 입은 부분들이 온전하게 될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에파타’를 말씀하시기전에 하늘을 우러러 보았듯이 이 ‘에파타’의 내적인 치유는 사랑의 원천인 하느님의 사랑을 그리워하고 갈망하게 합니다. 그리움이 우리로 하여금 사랑의 원천으로 향하게 하고 우리의 정신을 하느님 사랑의 원천으로 집중케합니다.
이 그리움은 인생의 본질적 목적인 동시에 목표인 하느님께서 늘 사랑의 눈으로 우리를 바라보고 계신다는 것을 확고하게 믿게합니다. 더 나아가서 그분의 사랑의 시선안에 머무는 것에 만족하지 않고 그분이 열어주시는 길, 그분께 도달하기 위한 길을 걷게 합니다.
하느님 사랑을 향한 그리움은 내적인 치유의 첫 출발점입니다. 이러한 내적인 치유의 결과로서 하느님과 이웃을 향해 늘 열려 있는 넓은 마음을 지니게 됩니다. 넓은 마음 안에는 하느님의 참된 소리를 소홀히 하지 않는 검허한 귀기울임이 있습니다. 넓은 마음안에는 깨지고 실망하고 고통받는 이웃을 보며 침묵하지 않고 변호해 주는 진리의 소리가 있습니다.
주님의 ‘에파타’를 몸소 체험한 보나 벤뚜라 성인의 글을 묵상하며 우리 각자 자신의 ‘고유한 에파타’ 체험을 하는 한주간 되기를 바랍니다.
“창조된 사물들이 그러한 광휘를 보고도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누구나 장님임에 틀림없다. 사물들의 힘찬 목소리를 듣고도 깨어나지 못하는 사람은 누구나 귀머거리임에 틀림없다.
그분의 모든 작품을 찬미하지 않는 이는 누구나 벙어리임에 틀림없다.
이 모든 표지를 보고도 제일원리를 발견하지 못하는 이는 누구나 바보임에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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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요일 성체의 날✝️
<세계 도처에 일어난 성체의 기적(마리아 헤젤러)>
성 파스칼 바이론 (Pascal Baylon)
---성스러운 성체성사의 소년목동---
스페인 : 1540-1592년
그 소년 목동은 일요일 날 교회에 갈 때면 언제나 즐거웠다. 그는 조심스럽게 제대 앞에 무릎을 꿇었다. 성찬의 빵과 포도주가 예수님의 살과 피로 축성되는 동안에 그는 꼼짝않고 성스러운 성체와 성찬용 잔(성작)을 올려다 보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성스러운 살과 피에 경배드렸다.
그는 평일에도 미사성제에 몹시 가고 싶었지만 그가 해야 할 일들이 시간을 허락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마음 속으로 온 세상의 모든 미사에 참석하였고 어느 곳에서라도 예수님께 경배드리기를 소망했다. 이에 주님께서는 한 기적을 통해서 그의 성스러운 갈망에 보답해 주셨다.
어느 날 파스칼이 한 교회에서 울려퍼지는 성체축성의 종소리를 들었을 때 그는 들판에서 무릎을 꿇고 경배드렸다. 그 때 하늘이 열리더니 형언할 수 없는 광채 속에서 고귀한 성광을 두 천사가 받치고 있었으며 그 성광 위에 계신 성체가 공중에 나타났다.
지극히 행복한 기쁨에 넘친 목동 소년은 그 성스러운 성체께 경배드렸다. 그 성체의 모습이 사라질 때까지 그렇게 경배드렸다. 이후에도 그는 이러한 기적을 몇 번 더 체험했다. 스무살이 되던 해에 파스칼은 스페인의 발렌치아(Valencia)에 있는 프란치스코 수도회의 수도자로서 들어 갔다. 그는 이 곳 주방과 들판, 그리고 농장에서 열심히 일했다. 곧 동료 수사들은 그의 근면함이나 겸손함 뿐만 아니라 신앙의 신비에 대한 그의 비범한 지식, 그리고 특히 성찬식에 대한 그의 놀라운 지식에 경탄하게 되었다.(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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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908. 연중 제23주일. 전삼용 요셉 신부님.
꽉 막힌 사람이 뻥 뚫린 사람이 되는 방법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말을 더듬는 이에게 말을 잘 할 수 있게 만드는 기적 이야기입니다.
예수님은 그 사람을 마을 밖으로 데리고 나오셔서 성령을 부어주십니다.
그 방식은 당신 손가락으로 귀를 막고 당신 침을 손가락에 묻혀 그의 혀에 대고는 숨을 내쉬시며
“에파타!”(열려라)라고 말씀하시는 상징적인 행위로 표현됩니다.
성령으로 우리가 열린다는 말은 무슨 의미일까요?
우선 어떤 사람이 열리지 못한 사람인지 알 필요가 있습니다.
영화 ‘김 씨 표류기’(2009)에서 남자 주인공은 자신의 섬에, 여자 주인공은 자기 방에 스스로를 가두었습니다.
그리고 누구도 들어오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왜냐하면 그 공간만은 지키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우리는 모두 각자의 집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집에 타인에게 열려 있느냐, 없느냐가 우리가 갑갑하게 닫힌 사람인지 활짝 시원하게 열린 사람인지를 결정합니다.
C.S. 루이스의 책을 원작으로 한 ‘나니아 연대기’의 ‘사자, 마녀 그리고 옷장’은 거의 성경 말씀을 상징적으로 묘사하였습니다.
이 이야기는 제2차 세계 대전 중 런던에서 시골집으로 대피한 네 남매의 이야기를 따릅니다. 숨바꼭질을 하던 중 루시는 우연히 그녀를 마법의 나라 나니아로 데려다 주는 옷장을 발견합니다. 결국 네 남매는 모두 나니아에 입성하게 됩니다.
거기에는 마녀와 아슬란이라는 사자가 전쟁을 벌이고 있었습니다.
이미 나니아에 한 번 들어가 하얀 마녀를 만난 에드먼드는 마녀의 약속에 유혹받아 형제들을
배신합니다.
에드먼드는 자신이 부모와 형제들로부터 가장 소외당하였다고 여기고 마녀의 헛된 약속에 자신을 종속시킨 것입니다.
그러나 마녀의 잔혹함을 직접 목격하면서 그녀의 약속이 헛된 것임을 깨닫고 후회하기 시작합니다.
그를 마녀의 손아귀에서 구해온 것은 아슬란입니다.
아슬란은 자기 목숨을 내어놓으며 에드먼드를 구합니다.
아슬란이 사라지자 마녀는 군대를 이끌고 아슬란의 군사들에게 진격하지만, 타인의 죄를 대신해 희생한 자는 부활하게 된다는 것을 마녀는 알지 못했습니다.
에드먼드는 형제들과 아슬란의 말을 듣기를 거부하였습니다.
귀가 막혀 있었습니다.
그러니 형제들과 진실한 대화를 할 수도 없고 오직 악의 세력과만 대화가 통하였습니다.
혀도 묶여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아슬란의 죽음으로 그는 해방됩니다.
그렇게 위대한 힘센 왕이 자기를 위해 죽었기 때문입니다.
자기가 아무것도 가진 게 없는 존재인 줄 알았는데 모든 것을 가진 자가 자기를 위해 죽을 정도로 모든 것을 가진 자임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그러자 목숨을 아끼지 않게 됩니다.
우리가 세상에 닫히는 이유는 가진 것을 빼앗길 ‘두려움’ 때문입니다.
이 두려움을 자아내는 존재가 각자 안에 있는 마녀입니다.
창세기에는 뱀으로 나옵니다.
그놈은 내가 가진 것이 없으니 다른 존재들에게 그것을 빼앗겨서는 안 된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을 의심의 눈초리로 봅니다. 자신에게 이익이 되는 존재만을 받아들이려 하지만, 그렇게 받아들여진 이들은 그에게 먹힙니다.
이는 마치 사막에 홀로 세워진 한 채의 오두막과 같습니다.
길을 가는 지친 손님들을 그냥 받아들일 수는 없습니다.
도둑질하거나 그 집을 빼앗길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사랑을 믿는 사람은 다릅니다.
성모님은 성령으로 예수님을 잉태하셨습니다.
작은 오두막이 아닌 성전이 된 것입니다.
성전의 주인은 내가 아닙니다.
하느님이십니다.
제가 아는 어떤 부자 할머니의 이야기입니다. 그분이 젊으셨을 때 돈이 아주 많았는데 그것을 자랑하기 바빴습니다.
자존심을 세우며 살다가 망하기 직전에 다다랐습니다.
그녀는 친구들에게 지금까지 자신의 부를 자랑해 왔는데 망하면 친구들이 비웃을까 봐 겁냈습니다. 점집에도 갔다가 결국 성당으로 돌아와서 십자가의 길을 하였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성모님을 만나는 장면에서 “사랑한다.”란 예수님의 목소리를 들었습니다.
하느님이신 분이 그녀를 사랑하고 계셨습니다. 그녀는 창피한 게 없어졌습니다.
성당으로 가서 바로 화장실 청소부터 하였습니다. 하느님을 가지면 다 가진 게 되기 때문에 더는 내가 무언가를 잃는 두려움을 가질 필요가 없어서 열린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김수환 추기경도 신자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오갈 데 없는 이들을 명동성당으로 받아들였습니다.
그분의 집은 자기 집이 아니라 하느님의 집이었습니다.
이것이 성령을 받는 이들이 열리게 되는 원리입니다.
작은 오두막이 아닌 성전이 됨으로써 우리는 두려움 없이 모든 이를 받아들일 수 있는 존재가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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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908. 연중 제23주일. 굿뉴스 게시판-우리 묵상 체험
■ ‘에파타’ 뜻에 따라 열리기를 /
박윤식 [big-llight] 240907. 20:44 ㅣNo.175770
하느님 말씀을 충실히 따른다는 우리도, 가끔은 “말이 안 나온다. 또는 기가 막힌다.”를 자주 쓴다. 어려움을 하소연할 길이 없어 말이 안 나오는 경우가 이 경우다. 내가 겪는 고통을 알아주는 이 없어 가슴이 답답한 때도 더러 있다. 반벙어리가 곧 그러한 이다. 예수님께서는 삶의 아픔을 지닌 그의 처지를 헤아리셨다. 그리고 따뜻한 마음과 관심으로 부르시어 고치셨다.
‘예수님께서 이방인 지역을 지나 갈릴래아로 돌아오셨을 때에, 사람들이 귀먹고 말 더듬는 이를 그분께 데리고 와, 그에게 손을 얹어 주십사고 청하였다. 예수님께서는 그를 사람들에게서 따로 데리고 나가셔서, 당신 손가락을 그의 두 귀에 넣으셨다가 침을 발라 그의 혀에 손을 대셨다. 그러고 나서 하늘을 향해 한숨 내쉬시고는, 그에게 “에파타!” 곧 “열려라!”하고 말씀하셨다. 그러자 곧바로 그의 귀가 열리고 묶인 혀가 풀려서 거기에서 말을 제대로 하게 되었다.’
이렇게 예수님께서는 “에파타!”라고 외치셨다. 그분께서 직접 사용하셨던 ‘아람어’다. 사람들은 너무 놀랐기에 예수님 말씀을 ‘발음 그대로’ 기억하고 있었다. 사실 이는 이사야의 ‘눈먼 이들은 눈이 열리고, 귀먹은 이들은 귀가 열리리라. 다리 저는 이는 사슴처럼 뛰고, 말 못하는 이의 혀는 환성을 터뜨리리라.’라는 예언에 예수님께서는 “에파타!”하고 이르시면서 실현하신다. 귀먹고 말 더듬는 그가 누구였는지는 모른다. 알 수 없는 그를 우리라고 어디 생각해 보자. 물론 우리는 들을 귀를 지녔다. 하지만 주님 말씀에 얼마만큼 새겨듣는지를 돌아봐야 하리라.
그분께서는 믿음의 신앙생활을 하는 우리에게도 일상에서 계속 말씀하시는데, 이를 외면하는 것은 아닌지를 돌이켜 보아야 한다. 자기 자신만을 아는 이는 남의 말을 제대로 알아듣지 못한다. 듣기보다는 가르쳐야 한다고 생각하기에. 자기도취의 굴레에 빠진 이다. 여기에서 벗어나야 한다. 그러면 참된 기쁨이 주어져 지금까지 도저히 상상도 할 수 없었던 것들을 보고 듣고 즐기게 되리라. 아울러 다른 이들의 눈과 귀를 열어 주는, 어쩜 놀라운 일 이루게 될 게다.
우리는 세례성사로 하느님 말씀을 들을 수 있고 혀가 풀려,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르며 그분의 말씀을 찬양하며 전하고 있다. 오늘 예수님께서 베푸신 치유 행위는 우리에게 더 넓은 것을 생각하도록 이끈다. 따라서 하느님 말씀을 귀담아듣지 않거나 듣기만 하고 실천하지 않는다면, 신앙의 귀머거리나 말 못하는 이가 될 게 눈에 보듯 뻔하다. 정전이 되면 답답함을 느끼듯이.
외국에 나가면 말이 안 통해 참 갑갑할 때가 많다. 그 답답함을 지닌 이의 눈과 귀, 입이 열린다면 얼마나 기쁠까? 그걸 위해 주님께서 오셨다. 지금 그분께서 우리에게 “에파타!”라고 명하신다. 당신께서 어둠과 침묵에 갇힌 우리에게 귀와 입이 열려 말벗이 되시고자. 무엇보다도 마음의 귀를 생각하자. 이렇게 하느님 목소리, 세상의 울부짖는 소리를 듣는 귀가 열려 있도록 하자. 주님과 이웃 소리를 듣지 못하는 정신적 귀먹음이 세상의 많은 비극의 원인이기에.
따라서 우리는 그분 말씀을 끊임없이 들어야 하고, 신앙적으로 귀먹은 상태라면 주님께 “에파타!”라며 치유해 주시기를 간절히 청해야 한다. 이처럼 주님 말씀 가로막는 것들에서 벗어나, 그분 말씀 귀여겨 들음으로써 믿음을 키워 하느님께 나아가야 하겠다. 그렇게 하여 귀로는 하느님의 말씀을 잘 듣고, 입으로는 긍정적이고 좋은 말로 그리스도인의 삶의 방식을 드러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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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908. 연중 제23주일. 안소근 실비아 수녀님.
구약의 예언을 배경으로 놓고 볼 때, 예수님께서 오늘 복음에서 하신 일은 ‘예언의 성취’입니다.
이사야서의 말씀은 그 예언이 선포된 때에는 비현실적인 꿈이었습니다.
뜨거운 땅이 늪이 되고 바싹 마른 땅이 샘터가 되는 것이, 지금의 현실과는 거리가 먼 일이고 이루어지기 어려운 희망이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눈먼 이들의 눈이 열리고 귀먹은 이들의 귀가 열리는 것도 머나먼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귀먹은 이들은 듣게 하시고 말 못하는 이들은 말하게 하시는”(마르 7,37) 분이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러한 기적들을 이루시는 것을 볼 때 사람들은 이제 약속이 이루어지고 하느님의 통치가 실현됨을 알아보았습니다.
오늘 화답송에서는 하느님께서 굶주린 이들에게 먹을 것을 주시고 눈먼 이를 보게 하시는 것이, 바로 그분께서 영원히 다스리시는 방식이라고 선언합니다.
하느님의 통치나 권력은 세상의 통치자들처럼 “백성 위에 군림하고, 백성에게 세도를 부리는”(10,42) 것으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하느님 나라는 그런 것이었습니다.
그러면 그 하느님 나라를 우리는 어떻게 선포할 수 있을까요? 야고보서에서 그 답을 말하여 줍니다.
“영광스러우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서, 사람을 차별해서는 안 됩니다”(야고 2,1).
우리가 눈먼 이의 눈을 열고 귀먹은 이의 귀를 열기는 쉽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통치가, 그분의 나라가 가난한 이들을 돌보시는 것으로 이루어진다면, 우리가 그 가난한 이들을 대하는 모습은 하느님의 통치를 우리가 실현하고 있는지 아니면 가로막고 있는지를 보여 주는 척도가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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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하 자료는 보관을 위해 추가 첨가한 자료입니다
(1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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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908. 연중 제23주일. 김명겸 요한 신부님.
예수님께서는
귀먹고 말 더듬는 이를 치유해 주십니다.
이것은 오늘 1독서에서
이사야 예언자가 말한 것이
이루어진 사건이었습니다.
이사야서의 이 말씀을
메시아 왕국의 예언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면
이 사건은
예수님께서 메시아이심을 증명한 사건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이야기하기에는
예수님의 행동과 말씀이 조금은 다르게 보입니다.
우선 예수님께서는
귀먹고 말 더듬는 이를
군중에게서 따로 데리고 나가십니다.
사람들 앞에서 기적을 보여주시면서
메시아가 이 땅에 왔음을 보여주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사실을 감추려는 것처럼 보입니다.
더 나아가 치유가 끝나고 나서 사람들에게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분부하십니다.
사람들이 기다려온 메시아이지만
정작 예수님께서는
'내가 메시아다'라고 드러내 놓고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여기에서 생각해 볼 것은
모두가 메시아를 기다려 왔는지입니다.
귀먹고 말 더듬는 이는 메시아를 기다렸겠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었습니다.
우리는 마태오복음 시작부분에서
'유다인들의 임금'이라는 단어에 놀라
베들레헴과 그 일대의 어린 아기들을
모조리 죽인 헤로데 이야기를
알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활동하시는 한
그것을 아무리 감춘다고 해도
예수님의 말씀과 활동은 숨겨지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감추시려는 것은
예수님의 말씀과 행동을 받아들이지 않고
거부하는 것과 연결해서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즉 예수님을 받아들이는 이에게는
그래서 예수님을 기다리는 이에게는
예수님의 말씀과 활동이 기쁜 소식으로 다가갑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거부하는 이에게 그것은
불편한 소식, 듣기 싫은 이야기일 뿐입니다.
내가 기다리는 메시아
내가 만나고 싶은 하느님은
어떤 분이신지 생각해 볼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나의 부족함을 채워주신다는 것은
때로는 나의 부족함이 드러나는 순간을 뜻합니다.
채워주심을 기다리는 것은
드러남을 감당할 용기도 함께 생각하게 합니다.
만나고 싶은 하느님을 생각하면서
나 자신의 모습도
나의 부족함을 드러낼 수 있는 용기도
함께 생각해 볼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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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908. 연중 제23주일.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부족하면 부족한데로, 죄인이면 죄인인 그대로의 나를 사랑하시는 주님!
공생활 기간동안 보여주신 예수님의 치유 능력은 대단한 것이었습니다.
전지전능하신 분이었기에 원격치유까지 가능하셨던 분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환자가 현재 처해있는 위중한 상황을 예수님께 설명하면서 직접 가주실 것을 청하기도 했지만, 어떤 때 직접 가시지 않고도 원격치유를 하셨습니다.
굳이 가시지 않아도, 굳이 손대지 않아도 치유는 가능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의 예수님 모습은 꽤 특별합니다.
귀먹고 말 더듬는 사람을 데려오자 대뜸 그만을 따로 데리고 조용한 장소로 가십니다.
이어서 그의 두 귀에 당신 손가락을 집어넣으십니다.
그뿐이 아닙니다.
이번에는 손가락을 당신 혀에 대시고 침을 발라 환자의 혀에 갖다 대십니다.
예수님의 이런 행동에 환자는 꽤 당혹스러웠겠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그냥 치유해주시지, 남의 귓구멍은 왜 손을 집어넣지?
왜 자기 침을 내 혀에 묻히지?’
그러나 곰곰이 생각해보니, 그러한 예수님의 행동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환자의 귀에 손가락을 집어넣으시는 예수님의 모습에서 우리 각자와 적극적으로 접촉하시려는
주님의 모습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당신의 침을 환자의 혀에 바르는 예수님의 모습에서 우리 각자와 하나 되시려는 주님의 모습을 확연히 엿볼 수 있습니다.
환자를 사람들 사이에서 따로 불러내는 모습을 통해서 우리 각자와 일대 일의 관계, 절친 관계를 맺고자 간절히 원하시는 주님의 모습을 똑똑히 볼 수 있습니다.
우리 인간 측에서 바라볼 때 너무나 다행스럽고, 너무나 행복한 일 한 가지가 있습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우리 주님께서는 너무나 따뜻한 분이라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너무나 다정다감한 분이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하느님께서는 얼마나 우리 각자를 사랑하시는지 우리와 끊임없이 접촉하길 원하시며, 우리와 1대 1로 만나기를 원하시며, 우리와 지속적인 스킨쉽을 바라신다는 것입니다.
오늘도 우리의 주님께서는 존재 자체로의 나, 있는 그대로의 나를 극진히 사랑하십니다.
부족하면 부족한 데로, 허물투성이면 허물투성이 그대로, 죄인이면 죄인인 그대로의 우리 모습을
극진히 사랑하시는 주님을 생각하니 그저 감사와 찬미와 영광을 드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결국 주님께서는 여전히 죄인인 우리와 하나 되기를, 완벽히 우리 안에 사시기를, 우리에게 기쁨과 웃음, 희망과 사랑, 결국 구원을 선사하기 위해 육화하시기를 바라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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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908. 연중 제23주일.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귀먹은 이들은 듣게 하시고
예수님께서 귀먹은 반벙어리를 고쳐주셨을 때, 군중들은 “귀먹은 이들은 듣게 하시고 말 못 하는 이들은 말하게 하시는구나.”(마르 7,37)라고 경탄한다. 소경이 눈을 뜨고 귀머거리가 다시 듣게 된다는 사실들은 진짜 기적적인 사실들에 대한 것이라기보다는 그들이 마침내 자기 고향으로 돌아가게 된다는 사실에 대해 놀란다는 사실을 강조하는 것이다. 진짜 기적이라는 것은 하느님께서 당신 백성을 구원하셔서 해방하시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를 예언자들이 예언했던 그 메시아로 알아듣고자 했다. 이것은 적어도 마르코가 자신의 복음을 쓰면서 가졌던 의도라고 할 수 있다.
귀먹은 반벙어리 치유의 의미는 누구든지 하느님의 말씀을 이해하고 경청하려고 한다면 결코 구원에서 제외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말해주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당신 손가락을 그의 두 귀에 넣으셨다가 침을 발라 그의 혀에 손을 대셨다. 그러고 나서 하늘을 우러러 한숨을 내쉬신 다음, 그에게 ‘에파타!’ 곧 ‘열려라!’하고 말씀하셨다.”(33-34절) 예수님의 이 행위들은 마술사들이 행하는 그런 행위가 아니다. 이것은 당신의 구원 능력이 당신 인성을 통해 병든 이의 인성에 전달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예수님은 모든 인간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신다. 여기 나오는 한숨은 희랍어 원문으로 신음을 낸다는 뜻으로 예수님이 다른 사람의 고통에 동참하고 계심을 뜻하며, 하늘을 우러러라는 말은 당신의 기적의 힘이 바로 하늘에서 온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그러자 곧바로 그의 귀가 열리고 묶인 혀가 풀려서 말을 제대로 하게 되었다.”(35절) 오늘의 귀먹은 반벙어리의 모습은 이것이다. 유다인이든 이방인이든 모든 사람이 하느님의 말씀에 귀를 막고 있으면 신앙을 통해 자신들 안에 이루어지는 구원의 놀라운 사실을 말할 수도, 선포할 수도 없음을 의미한다. 귀먹은 반벙어리가 “귀가 열리고 묶인 혀가 풀려서 말을 제대로 하게 되었다.”(35절)는 사실이 이를 말해주고 있다. 우리는 세례를 받을 때에 집전자가 예수님께서 하신 것처럼 세례자의 귀와 입술을 엄지손가락으로 만지며 “귀머거리를 듣게 하시고 벙어리를 말하게 하신 주 예수님, 이 자녀가 오래지 아니하여 귀로 주의 말씀을 듣고 입으로 신앙을 고백하여 하느님 아버지께 찬미와 영광을 드리게 하소서.”하고 기도한다.
이렇게 신앙생활의 모든 의미는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말씀 “열려라!” 하는 그 행동과 말씀 속에 내포되어 있다. 그러므로 주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도록 귀를 열어 놓고, 주님의 말씀을 자신을 변화되도록 주님께 자신을 맡기고, 우리의 생활로 다른 사람들에게 신앙을 전하는 것이 우리가 받은 세례에 충실한 것이다. 귀먹은 반벙어리의 사건은 과거의 사건이 아니다. 우리의 삶 속에서 수없이 반복되는 사실이다. 귀먹은 것이 치유되어도 또다시 귀먹을 수 있고, 그래서 계속 언어장애인이 될 수 있다. 언어장애인은 귀가 먹었기 때문에 언어장애인이 되지 않는가? 즉 주님의 말씀을 깨어 들을 줄 모르기 때문에 다른 사람에게 선포할 말이 없는 것이다. 이같이 오늘 복음의 반벙어리 이야기는 영적인 면에서 볼 때, 복음에 대해 병들어있는 사람의 이중적인 불행의 상징적 의미가 있다. 먼저 복음을 순종하는 마음으로 듣지 않는 신자는 그 복음을 말로 전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게다가 생활로 전한다는 것은 더더욱 어려울 것이다.
성 아우구스티노는 이렇게 말하였다. “오늘날에는 비록 육체적인 눈이 주님의 기적을 통해서 뜨이는 일은 없을지라도 마음의 눈이 주님의 말씀을 통해 뜨이고 있다. 그리고 시체는 다시 살아나지 않으나 살아있는 시체의 죽어있는 영혼은 다시 살아난다. 또한 귀먹은 육체의 귀는 소리를 듣지 못하나 닫힌 마음의 귀는 하느님의 말씀에 활짝 열린다. 그래서 믿지 않던 사람들이 믿고 악하게 살던 사람들이 착하게 살고 순종하지 않던 사람들이 순종하게 된다.”(훈화 88)
어떤 환경에서든 주님의 말씀에 귀를 열어 놓는다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다. 야고보서의 공동체는 귀먹은 공동체이다. 공동체 안에서 신자들이 부자들은 환대하고 아부하지만 가난한 이들은 업신여겼던 행동을 하기 때문이다. 하느님 앞에서는 모두가 평등하다.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모두 형제들이다.”(마태 23,8)라고 하셨다. 예수님은 가난한 이들을 선택하셨다. 그러니 그러한 신자들은 복음을 배반하는 것이다. 그러한 신앙은 거짓된 신앙이다.
마지막 구절을 보자. “나의 사랑하는 형제 여러분, 들으십시오. 하느님께서는 세상에 가난한 사람들을 골라 믿음의 부자가 되게 하시고, 당신을 사랑하는 이들에게 약속하신 나라의 상속자가 되게 하지 않으셨습니까?”(야고보 2,5) 주님의 말씀을 잘 듣는다면, 잘 따른다면 그 말씀은 반그리스도적인 것을 분별하게 해주며 공동체 안에서 차별대우가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게 해줄 것이다.
하느님 앞에 참된 부자는 믿음을 갖고 온전한 마음으로 사랑하는 가난한 이들이다. 그들이 바로 하느님 나라의 참된 상속자들이다. 하느님께서는 바로 그러한 가난한 이들을 선택해 주실 것이다. 우리의 신앙생활은 하느님을 닮고자 하는 노력의 길이기 때문에 가야 할 길이 끝이 없다. 그래서 하느님의 말씀을 끊임없이 들어야 하며 우리의 귀먹음을 주님의 강하고도 부드러운 손길에 맡겨 항상 새롭게 치유되도록 해야 한다. 말씀을 삶으로써 이제는 그 말씀을 이웃에게 전하는 사람이 되도록 하여야 할 것이다. 귀머거리가 되어도 다시 주님께 치유를 받고 다시 일어나는 우리가 되도록 노력하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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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908. 연중 제23주일. 전삼용 요셉 신부님.
꽉 막힌 사람이 뻥 뚫린 사람이 되는 방법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말을 더듬는 이에게 말을 잘 할 수 있게 만드는 기적 이야기입니다.
예수님은 그 사람을 마을 밖으로 데리고 나오셔서 성령을 부어주십니다.
그 방식은 당신 손가락으로 귀를 막고 당신 침을 손가락에 묻혀 그의 혀에 대고는 숨을 내쉬시며
“에파타!”(열려라)라고 말씀하시는 상징적인 행위로 표현됩니다.
성령으로 우리가 열린다는 말은 무슨 의미일까요?
우선 어떤 사람이 열리지 못한 사람인지 알 필요가 있습니다.
영화 ‘김 씨 표류기’(2009)에서 남자 주인공은 자신의 섬에, 여자 주인공은 자기 방에 스스로를 가두었습니다.
그리고 누구도 들어오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왜냐하면 그 공간만은 지키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우리는 모두 각자의 집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집에 타인에게 열려 있느냐, 없느냐가 우리가 갑갑하게 닫힌 사람인지 활짝 시원하게 열린 사람인지를 결정합니다.
C.S. 루이스의 책을 원작으로 한 ‘나니아 연대기’의 ‘사자, 마녀 그리고 옷장’은 거의 성경 말씀을 상징적으로 묘사하였습니다.
이 이야기는 제2차 세계 대전 중 런던에서 시골집으로 대피한 네 남매의 이야기를 따릅니다. 숨바꼭질을 하던 중 루시는 우연히 그녀를 마법의 나라 나니아로 데려다 주는 옷장을 발견합니다. 결국 네 남매는 모두 나니아에 입성하게 됩니다.
거기에는 마녀와 아슬란이라는 사자가 전쟁을 벌이고 있었습니다.
이미 나니아에 한 번 들어가 하얀 마녀를 만난 에드먼드는 마녀의 약속에 유혹받아 형제들을
배신합니다.
에드먼드는 자신이 부모와 형제들로부터 가장 소외당하였다고 여기고 마녀의 헛된 약속에 자신을 종속시킨 것입니다.
그러나 마녀의 잔혹함을 직접 목격하면서 그녀의 약속이 헛된 것임을 깨닫고 후회하기 시작합니다.
그를 마녀의 손아귀에서 구해온 것은 아슬란입니다.
아슬란은 자기 목숨을 내어놓으며 에드먼드를 구합니다.
아슬란이 사라지자 마녀는 군대를 이끌고 아슬란의 군사들에게 진격하지만, 타인의 죄를 대신해 희생한 자는 부활하게 된다는 것을 마녀는 알지 못했습니다.
에드먼드는 형제들과 아슬란의 말을 듣기를 거부하였습니다.
귀가 막혀 있었습니다.
그러니 형제들과 진실한 대화를 할 수도 없고 오직 악의 세력과만 대화가 통하였습니다.
혀도 묶여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아슬란의 죽음으로 그는 해방됩니다.
그렇게 위대한 힘센 왕이 자기를 위해 죽었기 때문입니다.
자기가 아무것도 가진 게 없는 존재인 줄 알았는데 모든 것을 가진 자가 자기를 위해 죽을 정도로 모든 것을 가진 자임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그러자 목숨을 아끼지 않게 됩니다.
우리가 세상에 닫히는 이유는 가진 것을 빼앗길 ‘두려움’ 때문입니다.
이 두려움을 자아내는 존재가 각자 안에 있는 마녀입니다.
창세기에는 뱀으로 나옵니다.
그놈은 내가 가진 것이 없으니 다른 존재들에게 그것을 빼앗겨서는 안 된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을 의심의 눈초리로 봅니다. 자신에게 이익이 되는 존재만을 받아들이려 하지만, 그렇게 받아들여진 이들은 그에게 먹힙니다.
이는 마치 사막에 홀로 세워진 한 채의 오두막과 같습니다.
길을 가는 지친 손님들을 그냥 받아들일 수는 없습니다.
도둑질하거나 그 집을 빼앗길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사랑을 믿는 사람은 다릅니다.
성모님은 성령으로 예수님을 잉태하셨습니다.
작은 오두막이 아닌 성전이 된 것입니다.
성전의 주인은 내가 아닙니다.
하느님이십니다.
제가 아는 어떤 부자 할머니의 이야기입니다. 그분이 젊으셨을 때 돈이 아주 많았는데 그것을 자랑하기 바빴습니다.
자존심을 세우며 살다가 망하기 직전에 다다랐습니다.
그녀는 친구들에게 지금까지 자신의 부를 자랑해 왔는데 망하면 친구들이 비웃을까 봐 겁냈습니다. 점집에도 갔다가 결국 성당으로 돌아와서 십자가의 길을 하였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성모님을 만나는 장면에서 “사랑한다.”란 예수님의 목소리를 들었습니다.
하느님이신 분이 그녀를 사랑하고 계셨습니다. 그녀는 창피한 게 없어졌습니다.
성당으로 가서 바로 화장실 청소부터 하였습니다. 하느님을 가지면 다 가진 게 되기 때문에 더는 내가 무언가를 잃는 두려움을 가질 필요가 없어서 열린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김수환 추기경도 신자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오갈 데 없는 이들을 명동성당으로 받아들였습니다.
그분의 집은 자기 집이 아니라 하느님의 집이었습니다.
이것이 성령을 받는 이들이 열리게 되는 원리입니다.
작은 오두막이 아닌 성전이 됨으로써 우리는 두려움 없이 모든 이를 받아들일 수 있는 존재가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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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908. 연중 제23주일. 송영진 모세 신부님.
<신앙인은 말을 ‘제대로’ 해야 하는 사람입니다.>
“사람들이 귀먹고 말 더듬는 이를 예수님께 데리고 와서, 그에게 손을 얹어 주십사고 청하였다.
예수님께서는 그를 군중에게서 따로 데리고 나가셔서, 당신 손가락을 그의 두 귀에 넣으셨다가 침을 발라 그의 혀에 손을 대셨다. 그러고 나서 하늘을 우러러 한숨을 내쉬신 다음, 그에게 ‘에파타!’ 곧 ‘열려라!’ 하고 말씀하셨다.
그러자 곧바로 그의 귀가 열리고 묶인 혀가 풀려서 말을 제대로 하게 되었다.
예수님께서는 이 일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그들에게 분부하셨다.
그러나 그렇게 분부하실수록 그들은 더욱더 널리 알렸다.
사람들은 더할 나위 없이 놀라서 말하였다. ‘저분이 하신 일은 모두 훌륭하다.
귀먹은 이들은 듣게 하시고 말 못하는 이들은 말하게 하시는구나.’(마르 7,32-37)”
1) 귀를 먹었다는 것은, 하느님 말씀을 제대로 듣지 못하는 것을 상징하고, 말을 더듬는다는 것은, 하느님 말씀을 제대로 전하지 못하는 것을 상징합니다.
<듣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전하지도 못하는 것입니다.>
하느님 말씀을 제대로 듣지 못하는 것은, 제대로 전해 주는 사람이 없는 것이 가장 큰 원인입니다.
듣고 싶어도, 또 들으려고 해도, 여러 가지로 막혀 있어서 들을 수 없는 상황인 경우도 많습니다.
그것이 곧 ‘목자 없는 양들 같은 처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배에서 내리시어 많은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셨다.
그들이 목자 없는 양들 같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 주기 시작하셨다(마르 6,34).”
군중이 목자 없는 양들처럼 되어버린 것은,
일차적으로 종교 지도자들 탓입니다.
목자로서 일해야 하는 자들이 목자가 되어 주기는커녕 사람들을 착취하고 억압하는 일만 했기 때문입니다.
또 말씀을 제대로 전해 주지는 않고 성경과 율법의 해석과 적용을 독점하고서 사람들을 억누르는 도구로 악용했기 때문입니다.
그 상황은, 하늘나라의 문을 잠가 버리고, 자기들도 들어가지 않고, 들어가려는 이들마저 들어가지 못하게 막는 상황입니다(마태 23,13).
2) 예수님은 우리의 귀와 입을 열어 주시는 분입니다.
“내가 저 사람들에게 비유로 말하는 이유는 저들이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듣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기 때문이다(마태 13,13).”
예수님께서 비유를 자주 사용하신 것은, 사람들이 좀 더 쉽게 알아들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또 예수님께서는 ‘말로만’ 사람들을 가르치신 것이 아니라, ‘일들’을(기적들을) 통해서도 가르치셨습니다.
<사실상 당신의 ‘온 삶’으로 사람들을 가르치셨습니다.>
예수님은 ‘말씀’이신 분이고, ‘말씀’을 통해서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는 분입니다.
또 ‘말씀’을 전해 주시는 분이면서, ‘말씀’대로 살아가는 길을 알려 주시는 분이고, 그 실천의 모범을 보이신 분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예수님의 가르침대로 살면서 예수님의 뒤를 따르면,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됩니다.
3) “에파타!”(“열려라!”) 라는 말씀은, 장애를 치유하신 말씀인데 막힌 귀’와 ‘묶인 혀’에게 하신 명령입니다.
이제 ‘말씀’을 제대로 듣고, 제대로 전하는 일은
그 사람 자신이 스스로 해야 할 일입니다.
못 듣는 것은 죄가 아니지만, ‘안 듣는 것’은 죄입니다.
그것과 마찬가지로 말을 못하는 것은 죄가 아니지만, ‘말을 안 하는 것’은 죄입니다.
<들으면 안 되는 말들에 귀를 기울이는 것과
하면 안 되는 말들을 하는 것은 더 큰 죄가 됩니다.>
신앙인은 ‘제대로’ 듣고, ‘제대로’ 말해야 하는 사람입니다.
이 말은, “신앙인은, ‘말씀’을 받아서 세상에 전하는 임무를 받은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자기가 믿지 않는 분을 어떻게 받들어 부를 수
있겠습니까? 자기가 들은 적이 없는 분을 어떻게
믿을 수 있겠습니까? 선포하는 사람이 없으면
어떻게 들을 수 있겠습니까? 파견되지 않았으면 어떻게 선포할 수 있겠습니까?(로마 10,14-15ㄱ)”
“믿음은 들음에서 오고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이루어집니다(로마 10,17).”
“말씀을 선포하십시오.
기회가 좋든지 나쁘든지 꾸준히 계속하십시오. 끈기를 다하여 사람들을 가르치면서, 타이르고 꾸짖고 격려하십시오(2티모 4,2).”
4) 요즘 교회의 모습을 보면, 물론 일부 개인의
문제이긴 하지만, 하느님 말씀이 아닌 자기 생각을 하느님 말씀처럼 퍼뜨리는 자들이 있습니다.
그자들은 권력자들과 기득권층 편에 서고, 나쁜 권력과 나쁜 기득권층을 향해서 회개하라는 말은 하지 않고, 그들이 듣기 좋아하는 말만 하고, 예언자 흉내를 내면서, 교회의 진짜 예언자들을 박해합니다.
믿음 없는 세속 사람이라면, 귀가 막혀 있고 혀가 묶여 있어서 그런다고 말할 수 있지만, 신앙인이라고 자처하는 자들이 그러는 것은, 주님께 큰 죄를 짓는 일이고, 교회 공동체 모두에게 큰 고통을 주는 일입니다.
5) 37절의 “저분이 하신 일은 모두 훌륭하다.” 라는 말을 원문대로 번역하면, “저분이 모든 것을 좋게 하셨다.”인데, 이 말은 창세기 1장에 있는 “하느님께서 보시니 좋았다.” 라는 말과 같은 표현입니다.
그래서 이 말은, “예수님은 고장 난 세상을 고쳐서
원상복구하시는 새로운 창조자” 라는 증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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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908. 연중 제23주일. 함승수 세례자 요한 신부님
“저분이 하신 일은 모두 훌륭하다. 귀먹은 이들은 듣게 하시고 말못하는 이들은 말하게 하시는구나.”
그리스도교는 혼자 깨달음에 이르는 종교가 아니라,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받아들여 그 말씀에 따라 사는 종교입니다. 그러니 우리에게 ‘귀’와 ‘입’은 신앙을 형성하는 기본조건에 해당하지요. 그런데 우리 그리스도인들 중에 ‘귀 먹고 말 더듬는 이’들이 참 많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마음을 닫아걸은 채 제대로 소통하려고 하지 않기에, 하느님과 그리고 이웃과 친교를 나누지 못하고 서로가 단절된 채 외로움과 고독 속에 살아가고 있는 겁니다.
우리는 귀머거리입니다. 하느님께서 나에게 말씀하시려는 바를 제대로 알아듣지 못합니다. 고집과 편견으로 스스로 내 귀를 막았기 때문에, 하느님의 나지막한 음성을 들을 수 없습니다. 자신의 일에만 지나치게 열중하느라 나를 부르시는 하느님의 음성을 흘려 버립니다. 남의 말을 듣지 않고 내 얘기만 하기에 하느님께서 이웃을 통해 하시는 말씀도 듣지 못합니다. 자신이 인정하는 것 만 들으려 하고, 의심스러운 것에는 귀를 닫습니다. 나만 생각하는 이기심 때문에 도움의 손길을 바라는 형제 자매의 간절한 외침을 듣지 못합니다.
우리는 벙어리입니다. 다른 사람들이 나를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이 나의 말을 가로막기 때문에 벙어리가 되었습니다. 사람들이 나를 신뢰하지 않는다는 생각에, 나의 입이 막혀 버렸습니다. 나의 기도가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나는 하느님 앞에서 스스로 벙어리가 되었습니다. 나의 내밀한 진실을 이웃이나 하느님 앞에 드러내는 것이 두려워 입을 닫았는지도 모릅니다. 그렇게 나 자신을 많은 말 뒤에 숨기고 경건한 말 속에 감추어 버립니다. 그래서 내가 어떤 마음으로 살고 있으며 내 안에 어떤 생각과 감정들이 있는지를 아무도 모르게 합니다.
이처럼 참된 소통을 하지 못하고 닫힌 채 살아가는 우리 마음을 열어 주시기 위해, 예수님께서는 귀먹고 말 더듬는 이를 다섯 단계에 걸쳐 치유하시는 모습을 통해 우리에게 제대로 듣고 말하는 것이 무엇이며 왜 그렇게 해야 하는지를 보여 주십니다. 먼저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따로 불러 내십니다. 일상의 시끄러운 소음에서, 늘 우리 주변에서 함께 일하던 많은 사람 가운데서 우리를 따로 불러내시어, 당신 곁에 머물게 하십니다. ‘따로 데리고 나가다’라고 번역된 부분은 그리스어로 ‘카트 이디안'인데, 이는 ‘당신 집으로 데리고 가다’ 혹은 ‘당신 가족으로 삼다’라는 뜻입니다. 즉,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당신 집으로, 당신이 하느님과 만나 대화를 나누시는 그 ‘외딴 곳’으로 초대하시어 우리와 함께 머물기를 원하십니다.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치유의 첫 단계는 예수님께서 당신 손가락을 귀 먹고 말 더듬는 이의 귀 속에 넣으시는 일입니다. 그분은 당신 손가락을 우리의 상처 난 자리에 넣으심으로써 우리의 아픈 부위가 어디인지를 알려 주십니다. 또한 우리의 두 귀를 막으시는 것은 우리로 하여금 들어야 할 중요한 것을 제대로 듣지 못하게 방해하는 외부의 소음을 차단하시기 위함이기도 하지요. 손가락으로 귀를 막고 있으면 마치 깊은 물 속에 있는 것처럼 세상과는 단절된 느낌이 듭니다. 그리고 내 몸 안에서 나는 소리, 즉 숨쉬는 소리, 심장 뛰는 소리 같은 것들이 아주 크게 들립니다. 그 상태에서 우리는 자기 자신 안으로 깊이 침잠해 들어갈 수 있습니다. 그리고 깊이 들어간 나의 내면 안에서 나를 기다리고 계시는 주님을 만나게 됩니다. 우리는 자꾸만 바깥을 향하게 하는 나의 두 귀를 막음으로써 외부의 소리 대신 마음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법을 익혀야 합니다. 주님께서 나의 마음에 대고 나지막히 속삭이시는 목소리에 집중해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가 지향해야 할 참된 경청의 시작이며 그렇게 할 때 나의 이웃 형제 자매들을 통해 들려오는 외부의 소리에서도 주님께서 그들을 통해 말씀하시려는 뜻을 알아들을 수 있게 됩니다.
치유의 두번째 단계는 예수님께서 당신 손가락에 침을 발라 말 못하는 이의 혀에 대시는 행동입니다. 이는 오늘날의 관점에서 상대방에게 불쾌함을 유발하는 불결한 행동처럼 여겨지지만, 예수님께서 그렇게 하시는 이유는 상처 입은 자녀에게 약을 발라주시는 어머니의 마음으로, 제대로 듣지 못하여 마음에 상처를 입은 이에게 다가가 위로해 주시려는 겁니다. 그가 오해로 주눅든 마음을 풀고 편안한 분위기에서 마음 속에 꾹꾹 눌러 놓았던 말들을 하나씩 꺼낼 수 있도록 배려해 주시는 것이지요. 그런데 예수님의 이 행동을 그리스어 원문에 가깝게 해석하면 사뭇 다른 분위기가 조성됩니다. “예수님께서 침을 뱉으셨고 말 못 하는 이의 혀를 붙잡으셨다.” 즉 이 문장은 예수님께서 우리가 제대로 말하는 법을 익힐 때까지 말을 멈추게 하셨다는 의미가 됩니다. 우리는 자주 많은 말들 속에 자신을 감추려고 듭니다. 자기 자신에 대해 아무도 관심을 두지 않게, 되도록 많은 말을 하는 것입니다. 그 상태에서는 아무리 많은 말을 한들 진정한 소통은 이루어지지 않지요. 그렇기에 우리에겐 침묵이 필요합니다. 침묵은 자기 내면을 그리고 하느님을 대면하게 합니다. 그런데 참된 침묵을 위해서는 우리의 혀만 붙들 게 아니라 우리의 이성도 다스려야 합니다. 입을 다물고 있는 순간에도 우리의 이성은 쉬지 않고 말하기 때문입니다. 우리 머릿 속에 떠다니는 수많은 생각들, 즉 걱정 근심 고민 계획 후회 집착으로 인해 우리는 정말로 집중하며 머물러야 할 참된 가치들에 소홀해지는 경우가 많기에 그렇습니다.
치유의 세 번째 단계로 예수님께서는 ‘하늘을 우러러’ 보십니다. 우리의 시선을 땅에서 세상에서 하늘로 돌리시기 위함입니다. 시선이 세상에만 묶여 있으면 세상살이가 주는 걱정과 근심들 때문에 항상 마음이 불안하고 혼란스럽지요. 하지만 우리가 예수님을 통한 기도, 묵상, 침묵으로 하느님의 현존을 느끼며 그분 뜻을 헤아리면 복잡하고 심란했던 모든 것이 단순하고 분명해집니다. 그럴 때 우리는 삶을 긍정적으로 보게 될 것이고, 아량도 넓어질 것이며, 하느님께서 만드신 모든 것이 선하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더 이상 남들 눈치를 보며 주눅들 일도, 이런저런 근심 걱정 속에서 괴로워 할 일도 없겠지요. 예수님께서는 하늘을 우러러 보심으로써 우리가 말하고 듣는 모든 것이 결국 하느님을 향하고 있으며 또 향해야 함을 알려 주십니다. 우리는 모든 말에서 그 안에 담긴 하느님의 뜻을 알아보아야 합니다. 여러 상황 속에서, 여러 사람을 통해 말씀하시는 하느님의 마음을 헤아려야 합니다. 그래야 제대로 들을 수 있고 올바르게 말할 수 있습니다.
치유의 네 번째 단계로 예수님께서는 한숨을 내쉬십니다. ‘한숨을 쉬다’라고 번역된 부분을 직역하면 ‘예수님께서 소리를 내며 신음하신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아픈 이를 위해 온 힘을 기울이시는 예수님의 눈물겨운 노력을 보여줍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를 위해 싸우십니다. 내가 모든 굴레에서 벗어나 진정한 자유를 누리도록, 내가 자아와 편견이라는 감옥에서 빠져나와 하느님만을 의지하며 살 수 있도록 싸우십니다. 그분은 내 병든 마음과 싸우시고, 말못하는 나의 입과 싸우시며, 듣지 못하는 나의 귀와 싸우시어 나의 모든 감각이 하느님을 향하도록 이끌어 주십니다. 그렇게까지 하시는 이유는 나를 너무나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나의 아픔을 당신 아픔처럼 나의 슬픔을 당신 슬픔처럼 함께 느끼시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공감과 연민이 가득한 자비의 주님, 나를 위해 온 힘을 다하시는 사랑의 주님이 나와 함께 계시니 나는 세상의 어두운 골짜기를 걷는다 해도 두려움 없이 당당하게 갈 수 있는 겁니다.
치유를 마무리 하시는 단계로 예수님께서는 구원과 해방의 메시지를 선포하십니다. 그분은 귀먹고 말 더듬는 우리에게 “에파타!”, 곧 “열려라!”하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불안과 걱정에서 비롯되는 두려움과 집착이라는 속박에서 우리를 해방하십니다. 그리하여 우리가 제대로 알아듣고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을 말하게 하십니다. 곧 우리가 말을 통해 하느님과, 그리고 이웃 형제 자매와 올바른 관계를 맺게 하시고, 사랑과 배려가 가득 담긴 참된 소통으로 깊은 친교를 맺게 하시며, 마침내 참된 일치에 이르게 하십니다. 이처럼 예수님을 통해 제대로 듣고 말함으로써 오해와 갈등으로 단절된 관계를 회복하고 함께 참된 행복을 누리는 것, 그것이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구원’입니다. 그런데 그 과정에서 중요한 것은 우리의 의지와 결단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참된 행복으로 이끄시기 위해 문 밖에 서서 기다리고 계시는데, 그 문을 열 수 있는 건 나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입과 귀의 상처는 주님께서 언제든지 치유해 주실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분을 향해 마음의 문을 활짝 여는 건 나 자신이 해야만 하는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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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908. 연중 제23주일. 정인준 파트리치오 신부님.
바로 보고, 듣고 말하게 하시는.”
예수님께서 이방인 지역을 여행하시고 바로 갈릴래야 호수로 돌아 오십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귀먹고 말 더듬는 이를 한 사람을 예수님께 데리고 옵니다.
평소에는 말씀으로 병자를 치유해 주셨는데
오늘은 독특하게 아픈 사람의 귀에 손가락을 넣으시더니 이어서 침을 발라 그의 혀에 대면서
하늘을 우러러 한 숨만 쉬었는데, ‘열려라’는 뜻인 ‘에페타’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놀라운 것은 그 시간에 그 병자의 병이 말끔히 끝난 것입니다.
‘눈 뜬 장님’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눈이 있어도 제대로 못 보는 사람을 일컫는 것입니다.
제게도 큰 교훈의 일이 있었습니다.
한번은 군종에 있을 때 함께 있었던 몇몇 장교들이 제가 유학을 하던 도시를 들렸는데
연락이 닿아 그들이 묶는 호텔 가까이에 있는 한 식당에서 만났습니다.
그런데 그 교우들 사이에 한국 공동체에서 별로 평이 안 좋은 한 가족이 그 자리에 있었던 것입니다.
손님 중에 그 가족과 평소에 잘 아는 사이인지 식사 시간 내내 서로 오순도순 이야기도 주고 받는 것입니다.
손님들과 이야기를 나누면서 그 가족과는 평소의 선입감 때문에 그런지 거의 말도 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손님들과도 헤어져 숙소로 오려고 하니까 그 부부가 이야기를 더 나눌 수 있느냐? 고 청하는 것이었습니다.
달리 핑에 댈 것도 없고 해서 그 자리에서 그들과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그들이 가장 힘들었던 것은 같은 한국 사람인데도 자기들은 그곳 나라로 귀화했다는 이유로
항상 따돌림 받으며 성당에서까지 그 분위기는 마찬가지였다는 것입니다.
그 부부는 서러워 서로 부부가 울기도 많이 울었다는 것입니다.
마침 함께 왔던 손님들도 중에 한 교우가 부부가 어려우니 많이 위로해주면 좋겠다는
청도 있어서 힘들기는 해도 이야기를 들었던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들에 대한 선입감이
쉽게 가시지는 않았습니다.
그 부부는 그 후에도 가끔씩 기숙사로 전화를 해서 안부를 묻곤 했습니다.
그러다가 그 가족의 남편의 남동생이 의사였는데 그곳에서 좀 떨어진 도시에서
폭력조직으로부터 피살되는 사건이 있었습니다.
그 이유는 그 동생이 침도 놓고 잘 고치니까 그 주위의 의사들로부터 따가운 눈초리를 받았나 봅니다.
결국 그들은 폭력조직과 연결해서 위협을 하다가 결국 아들이 보는 앞에서 아빠를 피살했던 것입니다.
그 형제가 자기 남동생은 천주교 신자가 아닌데, 연로하신 부모님들에게
너무 충격이 커서 성당에서 미사라도 해 주면 큰 위로가 되겠다는 청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가족과 부모들과 함께 그곳 마을의 한 성당에서 장례 미사를 봉헌했습니다.
폭력조직원들이 성당 곳곳에서 삼엄한 경계를 펴는 것이었습니다 .
그 미사를 계기로 그 부부와는 벽이 없어지는 것이었습니다. 그 가족에 대한 나쁜 평판만
듣고 함부로 생각하고 말했던 자신이 부끄러웠습니다.
눈이 있어도 혀가 있어도 그들의 모습을 있는 대로 못 보는 자신이 소경이었고 올바로
말하지 못하는 자신은 벙어리였던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이웃을 있는 대로의 모습을 보도록 가르치십니다.
초대 교회 공동체에서 있을 수 있는 일을 오늘 독서에서 사도 야고보는 일깨워주고 있습니다.
외적인 모습대로 판단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돈이 있고 부자인 것 같은 사람, 초라해서
가난하게 보이는 사람들을 판단하지 않고 누구나 소중한 사람으로 대접을 받을 수 있도록
판단하고 대해야 한다는 가르침입니다.
주님께서는 귀먹고 말 더듬는 사람을 지나치지 않으시고 손가락을 귀에 넣고 침을
그의 혀에 발라주시는 주십니다.
주님의 사랑으로 그를 치유해주시지요.
그리고 하늘을 향하여 ‘열려라’하는 뜻인 ‘에페타’하고 말씀하십니다.
그 병자는 주님의 말씀 한 마디로 바로 보고 말할 수 있는 사람으로 치유됩니다.
우리도 주님께서 치유해주십니다. 그래서 우리도 이제는 주님을 따라 이웃의 아픔에
함께 하며 올바로 보고 듣고 말하며 하느님 나라를 준비해야 하겠습니다.
이사야 예언자가 말한 대로
불구의 몸의 사람들이 치유되는 날이 있으리라는 예고는 다음과 같습니다.
“그때에 눈먼 이들은 눈이 열리고 귀먹은 이들은 귀가 열리리라. 그때에 다리저는 이는
사슴처럼 뛰고 말못하는 이의 혀는 환성을 터뜨리리라. 광야에서는 물이 터져 나오고
사막에서는 냇물이 흐르리라.“(이사 35,5-6)
주님께서 소경과 말 못하고 귀머거리인 병자를 치유해 주신 것은 한 개인에게 구원이고
또한 우리에게는 눈 뜬 소경, 벙어리를 치유하셔서 제대로 보게 해 주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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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908. 연중 제23주일.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님.
열린 마음으로 맡기고 받아들이는 삶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창조하시고 온갖 피조물을 우리에게 맡겨주셨다. 나아가 그분은 우리를 통하여 당신의 창조 사업을 이어가고자 하시고, 이 순간도 당신의 창조의 얼을 불어넣어 주신다. 그런데 왜 우리는 기쁘게 신앙생활을 하지 못하고 영적 성장을 이루지 못한 채 제자리걸음을 하는 것일까? 오늘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보자.
인류 타락의 원인은 인간이 하느님을 믿지 않고, 하느님처럼 되려고 하는 교만에 있다(창세 3,1-4). 자만심은 모든 악의 뿌리이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이 주신 모든 것을 사람들이 기꺼이 서로 나누고 서로 위해 주면서 자유롭게 살기를 바라신다. 교만한 인간은 하느님의 계획을 무시하고 자기 뜻을 앞세운다. 그는 자신만의 자유를 누리려 하고 이기적으로 행동함으로써 타인을 노예화하고 자신도 물질과 탐욕의 노예가 된다. 이렇게 하느님 보시기에 참으로 좋게 창조하신 생명의 낙원은 실낙원(失樂園)이 되어가는 것이다.
하느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신 뜻은 남을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같은 하느님께 순종하며 서로를 이롭게 하며 살라는 것이 아니겠는가! 우리는 어떤가? 제 잘난 멋에 살고, 마치도 자신이 심판관이나 된 듯이 다른 이들을 저울질하고, 자기 기준에 모든 것을 꿰어 맞추려 하며 살 때가 얼마나 많은지. 하느님께서 주신 자유는 어디까지나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기 위한 자유이다. 하느님의 뜻이 아닌 자신의 뜻을 성취하고자 할 때, 우리는 죽음의 길로 치닫게 될 수밖에 없다. 따라서 하느님의 뜻을 가장 중요시 여기며 그분께 온전히 맡기는 자세를 지녀야 할 것이다.
오늘 복음에서 벙어리는 예수님께 맡기려는 자세로 믿음을 가지고 다가갔다. 이 벙어리는 예수님 앞에 나아가 치유되기에 앞서, 이미 부족하고 나약한 자신의 모습을 알고, 또 ‘스스로’ ‘다른 사람들 앞에서’ 그것을 인정하고, 받아들일 줄 알았다. 또한 그는 하느님께서 나를 통해서는 물론, 주위 사람들을 통해서도 말씀하시고 계심을 알았기에 사람들을 통해서 들려오는 하느님의 목소리에 늘 깨어있었다. 성인이란 죄가 없는 사람이 아니라 자신의 죄나 나약함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는 사람이다. 우리도 자신의 있는 그대로를 인정하고, 감사하는 마음으로 자신의 처지를 받아들이면서, 모든 것을 새롭게 하시는 하느님께 자신을 통째로 맡기도록 해야 할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군중 가운데서 벙어리를 ‘따로 데리고 나가셔서’(7,33) 치유해주신다. 그분은 군중의 인기를 끌기 위해서가 아니라 하느님에 의해서 행해진 신비 그 자체를 보여주신다. 따라서 예수님께서는 호기심에 가득 찬 군중들의 시선을 피해 그 기적을 행하고자 하셨다. 우리는 어떤가? 우리가 하는 봉사나 선행에 대하여, 자신의 능력에 대하여 은근히 드러내려고 하지 않는가? 하느님이 원하시는 일, 주님 마음에 드는 일은 무엇이나 이미 하느님께서 보고 계시며, 저절로 드러나 모두에게 흐뭇함을 안겨주고 서로를 살리는 힘이 된다. 그런데도 우리는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선을 자기 것으로 삼으려 할 때가 얼마나 많은지!
예수께서 ‘열려라’ 하고 말씀하시자 곧바로 병자의 귀가 열리고 혀가 풀려 말을 할 수가 있게 되었다(7,34). 벙어리의 치유를 통해서 예수께서는 병자든 죄인이든 모두를 조건 없이 사랑으로 받아주셨다. 이것이 바로 모든 피조물을 풀리게 하고 다시 새롭게 태어나게 하는 재창조의 열쇠이다. 우리 삶의 결정적 중심이요 하나뿐인 방향이신 주님께 우리의 삶을 통째로 내맡기면서, 예수 그리스도처럼 우리도 받아들이도록 하자.
받아들임은 언제나 한결같은 마음으로 너그러이 대하는 것이다. 그것은 상대방을 존중하며 끝까지 들어주는 것이다. 받아들임은 차별없이 모두를 향하여 여는 것이다. 그것은 남의 죄, 약점, 고통, 허물 등도 기꺼이 함께 지는 것이며, 계산하지 않고 모든 것을 나누는 것이다. 받아들임은 자기 마음에 드는 면만이 아니라 인격 전부를 인정하는 것이다. 그것은 침묵 안으로 모든 것을 돌려 드리며 하느님의 소리를 듣는 것이다. 우리 모두 귀를 열고 마음을 열어 주님께 모두를 내맡기고 사랑으로 서로를 받아들임으로써 ‘서로를 살리는 살맛나는 세상’을 이루도록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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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908. 연중 제23주일.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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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908. 연중 제23주일
간절함과 신뢰가 만들어 낸 기적의 삶
<2024.9.8> 아침을 여는 묵상 (왕하 4:18~37절)
❝간절함과 신뢰가 만들어 낸 기적의 삶❞
❚ 인생의 문제 앞에서 우리는 전능하시고 긍휼이 많으신 하나님께 즉각적이며 간절한 기도로 나아가야 합니다.
✔ 어떤 간절함과 신뢰하는 믿음이어야 합니까?
➲ 참담한 상황 속에서도 간절함과 신뢰하는 믿음이어야 합니다(18~24절).
하나님의 기적적인 역사로 얻은 수넴 여인의 아들이 어느 날 갑자기 죽었습니다. ‘...어머니의 무릎에 앉아 있다가 죽은지라..’(20절). 여인은 참담한 현실 앞에 직면하게 됩니다. ‘...아들을 하나님의 사람의 침상 위에 두고...내가 하나님의 사람에게 달려갔다가 돌아오리이다...’(21~22절).. 사랑하는 아들이 갑자기 죽었기에 망연자실할 수 있는 상황에서 여인은 침착하게 선지자를 찾아가겠다 합니다. 삶의 급박한 상황 앞에서 그녀는 하나님께 도움을 구하는 것을 선택합니다. 반면 남편은 ‘...초하루도 아니요 안식일도 아니거늘 그대가 오늘 어찌하여 그에게 나아가고자 하느냐...’(23절).. 아이가 이미 죽었기 때문에 더 이상 방법이 없다며 사실상 포기한 상태임을 보여줍니다. 그러나 여인은 ‘...평안을 비나이다..’ 즉, ‘잘 될 것입니다..라는 간절함과 신뢰의 믿음을 가지고 즉시로 엘리사를 찾아갑니다.
인생에 문제가 없을 수 없습니다. 단순히 문제를 넘어 수넴 여인과 같이 참담한 상황을 맞이할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을 잘 믿고 살아가고 있음에도 갑작스럽게 위기와 절박한 상황이 닥칠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 우리는 원망과 좌절이 아닌 지금 당하고 있는 현실의 문제보다 더 크신 하나님을 절대적으로 신뢰하는 믿음의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현실의 문제에 우리의 마음이 빼앗기지 않도록 하나님을 온전히 믿고 순종해야 합니다.
➲ 절박한 문제 앞에서도 간절함과 신뢰하는 믿음이어야 합니다(25~30절).
엘리사가 먼저 수넴 여인을 발견하고 사환인 게하시를 보내어 안부를 묻도록 하였습니다. 그러나 여인은 게하시에게는 간단히 대답만 하고 곧바로 엘리사 앞으로 나아와 그 발을 안았습니다. 그런데 정작 엘리사는 이 여인에게 어떤 문제가 있는지를 알지 못했습니다. ‘...그의 영혼이 괴로워하지마는 여호와께서 내게 숨기시고 이르지 아니하셨도다...’(27절).. 다시 말하면 하나님께서 수넴 여인의 아들이 죽은 사실에 대하여 엘리사에게 숨기셨다는 것입니다. ‘...너는 평안하냐 네 남편은 평안하냐 아이가 평안하냐..’(26절) 이렇게 연속적으로 질문을 하는 것을 보면 엘리사는 정말 몰랐던 것이 분명합니다. 엘리사는 당황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여인으로부터 아들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게 된 엘리사는 게하시에게 지팡이를 들고 가서 죽은 아들의 얼굴 위에 놓도록 명령합니다. 그런데 여인은 엘리사가 직접 가야만 아들이 살 수 있다고 엘리사를 재촉합니다. ‘...내가 당신을 떠나지 아니하리이다...’(30절)..
인생의 절박한 문제 앞에서 우리는 하나님을 간절히 찾고 붙들어야 합니다. 남편이 보인 것처럼 부정적 시각으로 문제를 바라보면 그 어떤 문제도 해결할 수 없습니다. 인간의 지식과 지혜는 한계가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하나님은 어느 누구도 해결할 수 없는 인생의 문제들을 능히 해결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계십니다. 절박한 현실의 문제 앞에서 간절함과 신뢰하는 믿음을 갖고 살아가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함을 깨닫게 됩니다.
➲ 죽음의 절망 앞에서도 간절함과 신뢰하는 믿음이어야 합니다(31~37절).
게하시가 그들보다 앞서 아이의 얼굴에 지팡이를 놓았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31절). 엘리사가 집에 들어가 보니 아들이 자기 침상 위에 눕혀 있었습니다. 문을 닫고 엘리사는 여호와께 기도하고 아이 위에 올라 엎드려 자기 입을 그의 입에, 자기 눈을 그의 눈에, 자기 손을 그의 손에 대고 그의 몸에 엎드렸더니 아이의 살이 차차 따뜻해졌습니다(34절). 엘리사가 내려와 집 안에서 이리저리 다니다가 다시 아이 위에 오라 엎드리니 아이가 일곱 번 재채기를 하고 눈을 떴습니다. 살아난 아들을 건네받은 수넴 여인은 엘리사의 발 앞에 엎드려 절하면서 엘리사에게 최고의 경의를 표했습니다(36~37절).
하나님은 인간의 생사를 주관하신 분이십니다. 우리 인생에 있어서 가장 큰 문제이면서 피할 수 없는 죽음의 문제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해결해 주셨습니다. 우리 주님은 문제가 많은 인생에 참된 평안과 생명을 주실 수 있는 유일하신 분이십니다. 우리의 삶에 다가오는 다양한 문제 앞에서 절망과 낙심하지 말고 전능자이신 하나님의 도우심을 간절히 찾고, 신뢰하는 믿음의 삶이어야 합니다. 무엇보다 영생의 소망을 주신 예수 그리스도를 온전히 믿고 나아가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오늘도 이해가 되지 않는 문제를 만나거나 절박한 인생의 위기에 처할 때 모든 문제를 해결하실 수 있는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삶을 살아갈 뿐만 아니라 절대 믿음과 신뢰함으로 하나님의 도우심을 간절히 찾고 찾으며 생명과 평안을 누리는 삶을 살아갈 수 있기를(삼하 4:18~37절)...
행복의 시작 예수 그리스도!!!
빛이 있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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