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 15: 7-11
또 그에게 이르시되
우리 믿음의 길을 주선하시고 자라게 하시며 열매 맺게 하시는 분이 살아 계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분께서는 우리의 연약을 아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때를 따라 적절한 방식으로 자기 택하신 자들에게 하나님 자신과 자신의 일을 나타내십니다. 때로는 양보하시고 낮추셔서 설득하십니다. 그리고 보다 높은 차원으로 인도하십니다.
1. 본문 7절은
“또 그에게 이르시되 나는 이 땅을 네게 주어 업을 삼게 하려고 너를 갈대아 우르에서 이끌어낸 여호와로라” 입니다.
우리가 어떤 의혹된 길로 무모하게 들어서 있지 않다는 사실을 우리가 알기 위하여 하나님을 우리 생애의 인도자로 모시는 것이 우리 자신들에게 지대한 관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여호와께서는 아브람을 부르시는 과정에 대하여 그에게 확증을 주십니다. 그리고 그가 최초에 구원받은 혜택을 다시 한번 상기시켜 주고 계십니다. 마치 하나님은 “내가 죽음의 미로에서 너를 인도해 내려고 내 팔을 너에게 뻗친 후에 지금까지 너에게 나의 은혜를 베풀어 주었다. 그러므로 너는 계속 나아감으로 나에게 보답해야 한다. 또한 너의 믿음을 처음부터 끝까지 꾸준히 고수해 나가거라”하고 말씀하신 듯한 내용입니다.
이 말씀은 아브람 혼자에 관해서만 하셔서 그의 신앙의 생활이 시작될 때부터 그에게 하신 모든 약속들을 함께 모아서 그것들을 모두 하나로 만들게 하시려는 것뿐만 아니라 모든 경건한 자들이 자기들의 소명의 시작을 그들의 공동 아버지인 아브람에게서 유출되어 오는 것으로 여기도록 배우게 하려는 것입니다. 또한 그렇게 배워서 자기들이 믿고 있는 분을 알고 있습니다(딤후2:2). 아브람의 인격 안에서 그분 자신에게 한 교회를 구별시켜 놓으신 하나님이 자신에게 예치되어 있는 구원을 신실하게 지켜주실 것이라는 사실을 바울과 함께 자랑하게 하려는 것입니다
바로 이 목적을 위하여 여호와께서 자신을 아브람의 구원자였다고 선포하시는 것은 여기에서 나타나고 있습니다. 즉 지금 주시려고 하는 그 약속을 하나님이 이전의 구속과 관련짓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분이 마치 “내가 이제는 너에게 이 땅을 약속하는 것을 먼저 시작하지 않는다. 그 약속은 너를 이 땅의 주인이며 상속자로서 세우려고 네 고향 땅에서 데리고 나온 사실에 이미 근거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제 나는 똑같은 형식으로 너와 언약을 맺고 있으니 그것은 네가 헛된 말로 속았다거나 넘어졌다고 생각하지 않게 하려는 것이다. 그리고 내가 명령하노니 너는 처음 언약을 잊지 말고 생각해야 하리니 그렇게 함으로 많은 햇수가 지난 후 지금 내가 되풀이하고 있는 이 새 약속이 더욱 더 확고한 지원을 받게 하려는 것이다”고 말씀하신 것처럼 이해됩니다.
2 . 본문 8절은
“그가 가로되 주 여호와여 내가 이 땅으로 업을 삼을 줄을 무엇으로 알리이까”입니다.
첫 번째로 모호한 점은 전에는 아브람 자신에게 주어진 약속들에 관하여 전혀 의문을 제기하지 않고 하나님의 단 한마디 말씀에도 확신을 가졌던 그가 이제 와서 하나님이 직접 하시는 말씀을 듣고도 사실인지 아닌지를 캐묻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로 모호한 점은 그는 하나님에게 거의 영광을 돌리지 않고 있으니 하나님께 대하여 투덜거릴 뿐만 아니라 하나님이 말씀하실 때 그분이 말씀하신 것 외에 더 추가해서 담보가 되는 것을 주시라고 요청하고 있는 사실입니다. 세 번째로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믿음에 속한 지식이 말씀에서 나오지 않고 어디서 유래되겠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그러므로 아브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의지하지 않으면서 그 땅을 장차 소유하는 것에 대하여 확실히 알려고 하는 것은 헛된 것입니다.
여호와는 때때로 그분의 자녀들에게 양보하셔서 그들이 마음 속에 품은 어떤 반론이라도 자유롭게 피력하게 하십니다. 그분은 자신에 대하여 전혀 의문을 제기하지 않도록 그들은 엄격하게 다루시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아브람이 하나님께서 진실하신 분이라는 사실을 더 확실하게 설득되면 될수록 그분의 말씀에 그만큼 더 강하게 달라붙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처럼 더 친근하게 자기의 모든 걱정과 염려를 하나님의 가슴에 맡겨 버렸기 때문입니다. 이것에다 첨가될 수 있는 것은 질질 끌면서 지연된 기간이 아브람의 신앙에 적잖은 장애였다는 점입니다.
하나님의 그의 생애의 많은 부분을 정처없이 다니게 붙들고 계시다가 이제 늙어빠져 기진맥진하게 되어 그 앞에 남은 것이라고는 죽음과 무덤 밖에 없는 이때에 하나님은 그가 그 땅의 주인이 될 것이라고 새롭게 선언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런 어려움에서도 그에게 일어나리라고는 도저히 믿기 어려운 것을 배격하지 않고 그가 내적으로 압박을 당하고 있는 걱정을 하나님 앞에 가지고 나왔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드린 그의 질문은 오히려 불신의 표가 아니고 신앙의 증거입니다. 악한 자들의 만음은 여러 가지의 갈등하는 생각들로 뒤엉켜 있기 때문에 그들은 어떤 방법으로든지 그 약속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육신 속에 있는 장애들을 느끼고 있는 경건한 자들은 그것들을 제거하려고 노력하여 하나님의 말씀으로 가는 길을 그것들이 가로막지 않게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의식하고 있는 방법을 추구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이 많은 성도들 속에는 몇몇 특별한 충동들이 있었다는 사실을 관찰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렇다고 그런 것을 하나의 전례(前例)에로 끌어들이는 것은 지금은 적당하지 않습니다. 히스기야와 기드온이 어떤 기적들을 요구했지만 이것이 오늘날도 우리가 같은 일을 해주도록 요구해야 될 이유가 되지 못합니다. 오직 여호와께서 그분의 기쁘신 뜻을 따라서 가장 적절하게 판단하실 것이라는 확신을 갖는 것을 추구함으로 만족해야 될 것입니다.
3. 본문 9절은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나를 위하여 삼년 된 암소와 삼년 된 암염소와 삼년 된 숫양과 산비들기와 집비둘기 새끼를 취할지니라” 입니다.
어떤 자들은 이 삼년된 암소 대신에 이 말씀을 세 마리의 암소들이라고 번역하고 상술되어 있는 동물들의 각 종류에서 각각 세 마리씩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3 이라는 말을 암소의 나이에 적용하는 자들의 의견은 보다 일반적입니다. 더욱이 하나님이 그분의 종이 질문하는 것을 막지 않으셨지만 그렇다고 육신의 욕망을 만족시키는 것을 허용하신 것은 절대로 아닙니다. 그렇다면 이 암소와 암 염소와 양을 죽임으로 그 약속에 무슨 확실성이 더 첨가될 수 있었겠습니까?
우리가 곧 더 자세하게 알게 되겠지만 이 희생제물의 진정한 의도는 지금까지 아브람에게서 숨겨져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제 아무리 얼핏 보기에는 별로 유익한 점이 있는 것처럼 보였던 하나님의 성령을 순종함으로 거기서 그의 믿음의 순종을 입증해주고 있습니다. 그가 지니고 있는 장애들을 제거함으로 그전과 똑같이 경건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묵묵히 복종하려는 한가지 마음으로 그런 문제를 제기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겸허하게 하나님께서 우리 믿음을 위하여 제공하시는 그런 도움들을 붙드는 것을 배워야 합니다.비록 도움들이 우리 판단과는 상반되고 오히려 조롱거리로 보일지라도 그것들을 받아들이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면 마침내 그 결과에서 하나님께서는 되도록이면 우리를 조롱거리가 되지 않게 하셨다는 사실이 분명히 나타나게 될 것입니다.
4. 본문 10절은
“아브람이 그 모든 것을 취하여 그 중간을 쪼개고 그 쪼갠 것을 마주 대하여 놓고 그 새는 쪼개지 아니하였으며” 입니다.
이 희생제사의 그 어느 부분도 신비를 지니지 않은 곳이 없는 듯합니다. 어떤 해석가들은 이 모호한 점들을 조작하여 설명하는 데에 모든 정력을 다 쏟아 지친 상태에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애매한 점을 파헤치는 것이 우리의 임무입니다. 우리가 고백하거니와 우리 역시 새들을 제외하고 세 종류의 동물을 잡도록 하나님이 명령하신 이유를 모릅니다. 그리고 몇 가지 사실이 있는데 그것에 대하여 만약 누가 호기심을 가지고 그 이유를 추구할지라도 그것에 대한 우리의 무지를 인정하는 것이 조금도 부끄럼이 되지 않을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불확실한 공상에서 방황하는 것을 택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전체 내용의 요약입니다. 즉, 동물들을 죽이라고 명령하신 가운데서 하나님께서는 교회의 미래 상태가 어떻게 될 것이라는 점을 제시하고 계십니다. 아브람은 분명히 그 땅을 상속받는 약속에 대하여 더 분명히 알기를 원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그 상속이 죽음으로부터 시작될 것이라고 가르침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그와 그의 자녀들은 그 땅을 정복하여 통치도 하기 전에 반드시 죽을 것이라는 교훈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동물들을 쪼개라고 명령하신 가운데서는 고대 사람들이 언약을 체결할 때 했던 의식을 따르고 있는 듯 합니다. 그들 고대인들이 동맹을 맺거나 군대를 소집할 때에 했던 의식입니다. 그것은 또한 이방인들에게 전해진 관례이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이제 그 동맹군들이 격렬한 지역을 지나서 이 희생제 내에서 서로 함께 유합되어 그들이 더 한층 한 몸 안에서 신성하게 연합되게 하였던 의식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방법을 유대인들이 이용했다는 사실을 예레미야가 증거하고 있습니다(34:18). 거기에 보면 그는 하나님이 “그들이 송아지를 둘로 쪼개 그 두 사이로 지나서 내 앞에 언약을 범하였나니, 곧 유다 방백들과 예루살렘 백성들과 환관들과 제사장들과 이 땅의 모든 백성들이라” 고 말씀하신 것으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실은 거기에 언급된 그 행동을 하게된 다음과 같은 특별한 이유가 있는 듯이 우리에게는 보이고 있습니다. 즉 여호와께서 아브람의 종족에게 말씀하시기를 그것이 마치 죽은 짐승의 시체 같아야 하며 심지어는 찢기고 여러 가닥으로 갈라놓은 것과 같이 되어야 한다고 하셨다는 사실입니다. 그들이 당분간 압박 당했던 노예생활은 단순한 죽음보다도 더 참을 수 없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희생제물이 하나님에게 드려져 있기 때문에 죽음 자체는 곧 새로운 생명으로 변화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아브람이 그 희생제물의 조각들을 각각 서로 반대쪽으로 놓고 그것들을 이것과 저것이 잘 맞게 하였으니 그것은 그 조각들이 분산되었다가 다시 서로 합쳐져야 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교회의 재흥은 참으로 어려운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재흥에 포함되어 있는 어려움들은 아브람이 사로잡혔던 그 공포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여기 두 가지 일이 예증되었다는 사실을 압니다. 말하자면 고된 노예 생활입니다. 그것은 아브람의 자손들이 거의 찢기고 멸망되는 상태에까지 압박을 받아야 할 것이라는 흑심한 노예생활이었습니다. 그리고 또한 그들의 구속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양자 삼으심에 대한 신호로서의 서약이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똑같은 그 거울에서 교회의 일반적 상태가 우리에게 묘사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무에서 교회를 창조하고 사망에서 그 교회를 일으키시는 것이 하나님의 특이한 섭리라는 의미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5. 본문 11절은
“솔개가 그 사체 위에 내릴 때에는 아브람이 쫒았더라” 입니다.
그 희생제가 하나님께 드려지긴 하였지만 그러나 아직도 그것이 새들의 공격과 난폭에서 지켜지지 않고 있었습니다. 그와 같이 신자들도 그런 공격에서 빠져 나오지 않고 있는 것입니다. 신자들이 하나님의 보호하에 받아진 후에도 그런 상태에서 있게 됩니다. 그래서 그분의 손으로 덮어주셔서 사방에서 공격을 받지 않게 지켜주신 것입니다. 그것은 사단과 세상이 그들에게 계속 문제를 야기시키는 것을 그치지 않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일단 하나님께 드린 제물이 공격을 받지 않고 순수하고 전혀 상하지 않게 남아있게 하려고 그것을 대항하는 상대적인 공격을 반드시 배격해야 합니다. 어떤 불편한 일이나 노고가 들지라도 반드시 배격해야 합니다. 이런 점들은 우리의 공예배와 일상에 그대로 적용되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