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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우표 없는 편지 원문보기 글쓴이: 청풍명월
☪ (한국) 역사 속의 전쟁
BC 2000년부터 1990년까지 931회의 외침을 받는 동안의 기간이 무려 230년, 고구려·신라·백제간 전쟁을 비롯해 삼별초 항쟁, 한국전쟁(6.25)등 내전으로 싸운 기간이 무려 240년에 이른다니 참으로 한국은 전쟁의 역사라는 생각이 든다. 외국의 식민지 또는 속국으로 있었던 기간이 또한 880년이나 된다니 부끄럽기도 하다. 근대에는 1882년 명성황후가 청나라 군대를 끌어들여 3년, 아관파천으로 러시아군이 1년 6개월, 일제강점기로 일본군이 36년, 한국전쟁 때는 중공군이 8년 그리고 1945년부터 지금까지 77년간이나 미군이 주둔해 있는 대한민국의 역사는 전쟁의 역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듯싶다.
역사학자들은 지구의 역사가 시작된 이래 한 곳에서도 전쟁이 없었던 기간이 고작 80년을 넘지 못한다고 하니, 평화의 시기보다 전쟁의 시기가 얼마나 길었는지 알게 한다. 전쟁의 역사를 훨씬 더 재미있어하는 데는 어떤 이유가 있을까. 책은 “한국 역사 속의 전쟁”만을 다룬 것이므로, 재미 못지않게 역사가 어떻게 흘러왔는지를 살피고 있는 것 같다.
고대와 중세는 우리도 다른 나라와 다르지 않게 왕조로 이어져 왔다. 그렇지만 왕조 교체 주기가 무척 길었다. 고구려가 701년, 백제는 678년, 신라가 992년, 고려 474년, 조선은 518년으로, 중국과 일본의 경우 보통 200∼300년을 주기로 교체된 것과 비교하면 아주 길었다고 할 수 있다. 국가란 하나의 유기체처럼 탄생기-성장기-전성기-쇠퇴기를 거쳐 멸망하게 되는 것이 보통인데, 기간이 길다 보니 쇠퇴기에서 멸망에 이르는 기간도 길었다. 이로 인해 힘이 커진 성장기와 전성기가 짧았던 주변 국가들보다 상대적으로 쇠약해질 가능성이 컸다. 우리가 그만큼 주변국으로부터 침략당하는 경우가 많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우리는 우리 스스로 ‘평화를 사랑하는 민족, 단 한 번도 다른 나라를 침략 해 본 적이 없다’고들 한다. 하지만 전쟁이란 역사발전에 촉매제 역할도 하는 것이어서 다른 나라를 침략하지 않은 역사가 결코 자랑스러운 것만은 아니다. 물리력을 동원한 정복 활동도 없었다는 말은 아니다. 광개토태왕의 정복 활동, 고려와 조선의 대마도 정벌, 세종시대 4군 6진 개척, 청나라 요청에 의한 것이었지만, 효종이 2차례 흑룡강까지 군사를 진출시켰던 사실, 근래의 베트남 파병까지 그 예는 다양하다.
‘평화를 원하면 전쟁을 준비하라.’고 하는 것처럼, 전쟁은 평화를 바라는 인간의 욕구에서 비롯되었다. 실제로 전쟁은 그것의 도구인 군사력 없이는 예방할 수 없다. ‘현명한 자는 역사에서 배우고, 어리석은 자는 체험에서 배운다’는 말도 “한국 역사 속의 전쟁은 우리에게 평화가 얼마나 절실하며, 그것을 위해 우리는 지금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생각해 보게 한다.”고 한 저자의 말이 실감된다.
저자 방기철 선생은 건국대학교 사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대학에서 석·박사가 된 뒤, 한국과 일본의 관계, 전쟁이 가지는 의미 등에 관심을 갖고 연구 중으로, 건국대·선문대 강사를 역임하였으며 지금은 선문대 역사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인간의 탄생으로 인류의 역사는 시작되었다. 인간의 탄생에 대해서는 창조론과 진화론이 대립하지만, 진화론에 무게가 실리는 이유는 역사가 그렇게 말해 주고 있기 때문이다. 지금으로부터 150억 년 전쯤 상상조차하기 힘든 어떤 힘에 의해 폭발한 빅뱅으로 우주가 생겼으며, 처음에는 아주 뜨거웠으나 30억 년쯤 지나자 점차 식으면서 원자가 생성되고, 45억 3천 7백만 년 전에 ‘지구’라는 것이 탄생했다. 지구는 소용돌이 속에서 태양의 빛과 열로 각종 유기물과 영양분이 생기고 지금 우리는 그 이름도 알 수 없는 알갱이들이 생겨났다. 생명이 탄생한 것이다. 1천만 년 전에 인간과 원숭이 공동 조상인 ‘라마 피테쿠스’가, 250∼300만 년 전에는 ‘오스트랄로 피테쿠스’가 등장했다. 그들은 직립했지만, 침팬지 수준의 유인원이었다. 200만 년 전에는 ‘호모 하빌리스’가 도구를 만들어 사용했고, 얼마 뒤 ‘호모 에르가스테르’는 언어 능력을 갖추었으며, ‘호모 에릭투스’는 불을 사용했다. 그 뒤 ‘호모 사피엔스’가 구석기 문화를 발달시켰으며, 4만 년 전쯤에 현생인류인 ‘호모 사피엔스 사피엔스’가 등장했다.
▢ 고대 전쟁
인류가 도구를 사용하면서 앞발은 손이 되었다는 것은 짐작할 수 있는 일인데 그 손에 맨 처음 무엇이 쥐어졌을까? 아마 돌이 아니었을까? 우리나라에도 흔히 보이는 성황당 돌무더기는 마을을 지키는 무기였다. 돌을 무기로 사용한 풍속을 ‘척석희(擲石戲)’또는 ‘돌 편쌈’이라고 하는데, 고구려의 경우 왕까지 나서 참여했다는 기록이 있고, 신라는 ‘석투당(石投幢), 석투군(石投軍), 척석군’이라는 이름으로 전문군대까지 존재했다. 고려 시대도 ‘석투반’이라는 군대가 있었으며, 조선시대는 이를 계승한 석전군이 정규군을 지원하는 보조부대가 있었으며, 세종대에는 여진족을 막는데, 석전을 사용하기도 했다.
석기시대에서 청동기·철기시대로 이어진 것은 인류 역사의 순서로서, 청동기에 비해 철기는 단단하지만 더 많은 공력이 들어갔다. 철기로 만든 최초의 무기는 칼과 창이었다. 칼은 한쪽에만 날이 있는 도(刀)와 양쪽에 날이 있는 검(劍)으로 나뉘는데, 도는 신석기 시대부터 생활도구로도 사용되었고, 검은 주로 전쟁에 사용되었다. 창은 돌진하면서 적을 무찌르는 모(矛)와 ‘꺽창’이라고 불리는, 끌어당겨 베는 과(戈)가 있으며 이 둘을 합친 것이 극(戟)이다. 창 중에 길이가 4∼6m에 이르는 삭(槊)은 수렵과 어업용으로 사용되었고, 전투용으로는 삼이창(三丫槍-삼지창)이 있으며, 겸창(鎌槍)은 창끝에 낫을 달아 육전에서는 말의 다리를 베거나 기병을 말에서 끌어 내릴 때, 해전에서는 적선의 돛줄을 끊거나 적병을 배에서 끌어 내리거나 물에 빠진 적을 벨 때 사용되었다.
활은 신석기 시대부터 사용되었는데, 나무·대나무·철·짐승의 뿔과 뼈 등으로 만든다. 박달나무로 만든 단궁(檀弓)은 동예(東濊)의 특산물로 널리 알려졌으며, 민어의 부레가 재료인 아교(阿膠)를 이용해 만든 각궁(角弓)은 성능이 뛰어났지만, 습기에 약한 단점이 있다. 활시위는 명주와 명주실을 꼬아 만들었고, 활은 먼 거리 적을 공격할 수 있지만 재료비가 비싸고 평소에는 활시위를 풀어 놓아야 하므로 적의 기습에는 취약했다. 한 번 사용하면 회수가 힘든 화살촉은 돌이나 짐승의 뼈를 사용하다 점차 쇠로 대체되었다. 중국은 우리 민족을 동이(東夷)라고 했는데, ‘동쪽의 활 잘 쏘는 민족’이라는 뜻이다. 올림픽 양궁에서 금메달을 따는 이유가 이와 관련이 있는지는 잘 모르겠다. 철기시대 초기까지는 전쟁이 적을 죽이는데 있지 않고 포로로 잡아 제사의 제물로 바치거나, 노예의 목적이 있었으나, 점차 땅뺏기로, 자기방어를 위하여, 종족을 지키기 위한 큰싸움으로 변했다.
우리 역사에는 중국과 전쟁이 매우 잦았는데 이웃에 있다는 이유기도 하지만, 중국이 우리를 못살게 군 측면이 많다. 《삼국유사》에 단군조선과 위만조선을 구분하기 위해 고조선이란 이름을 썼으며, 나중에 이성계가 조선을 건국함으로써 구분하기 위해 ‘고조선’이란 이름이 굳어졌다. 《사기》에도 조선이 나온다. 기원전 323년 연(燕)나라 장수 진개(秦蓋)가 고조선을 공격했는데, 이때 고조선은 2천여리의 영토를 잃었다. 하지만 고조선은 진·한 교체기에 진의 국경 요새를 공격하여 빼앗긴 영토를 되찾았으며, 기원전 312년에도 연(燕)이 조선을 침략하고 연이 왕을 칭하자, 고조선도 왕이란 호칭을 사용했다.
이후 위만조선의 성립과 한무제의 한사군 설치 등은 아무리 봐도 중국역사책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것이 사료의 현실로서 우리가 ‘그건 아니다’라고 해도 중국은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고, 우리 외침이 마냥 허구에 지나지 않는 것 같아 그저 안타까움만 생긴다. 하지만 고구려 이후의 역사는 어느 정도 신빙성을 갖는 것으로, 우리도 할 말은 해야한다는 생각이 든다. 증거는 만주와 평양 등에 널려 있다. 《삼국지》〈위지, 동이전〉에는 고구려인에 대해 “그 나라 사람들의 성질은 흉악하고 급하며, 노략질하기를 좋아한다.”라고 했다. 중국인의 입장이겠지만 고구려인이 상무적이고, 무사다웠다는 것을 짐작하게 한다.
▢ 삼국시대
서기 28년 한의 요동태수가 고구려를 침략해 왔다. 대무신왕은 을두지(乙豆智)의 의견에 따라 환도산성을 굳게 지키면서 지구전을 펼쳤다. 결국 한군이 물러갔다. 이후에도 유주자사와 현도태수가 고구려를 공격했다. 태조왕의 동생 수성(遂成)이 항복의사로 적을 안심시킨 후, 적을 기습해 크게 승리했다. 한이 멸망할 무렵에는 위·촉·오 삼국시대가 전개되었는데, 조조가 세운 위는 고구려와 우호 관계를 맺고 요동의 공손연을 견제했다. 237년 손권이 고구려에 사신을 보냈으나, 고구려는 사신을 목 베어 위에 보내는 등 관계를 유지했다. 위는 부여와도 동맹을 맺고, 고구려에 등을 돌렸다. 244년 유주자사 관구검이 고구려를 침공하자 동천왕이 2차례나 승리를 거두면서 자만해져 관구검을 깊이 추격하다 피해를 입었다. 이듬해 10월에도 관구검이 다시 고구려를 침공해 환도성을 함락시켰다. 그리고 그곳에다 자신의 공적비를 세워서 그것이 지금도 남아 있다.
한이 설치한 한4군 중 현도군은 20년, 진번·임둔군은 25년 만에 소멸됐다. 이에 한은 낙랑군 남쪽에 대방군을 설치하여 낙랑군과 대방군으로 축소되었다가 고구려가 313년 낙랑군을, 이듬해 대방군을 복속시켰다.
호동왕자와 낙랑공주 설화에는 대무신왕의 아들 호동이 서기 32년 4월 옥저로 갔다가 낙랑국왕 최리(崔利)를 만났고, 최리의 딸과 혼인하였다. 낙랑에는 적이 쳐들어오면 스스로 소리를 내어 위기를 알리는 북과 뿔피리가 있었는데, 호동은 공주에게 부탁해 이것을 찢고, 부수도록 한 후에 낙랑을 정복했다고 했는데, 이렇게 보면 두 개의 낙랑이 존재하는 것이 된다. 그렇다면 설화에서 낙랑은 한사군 중의 하나인 낙랑군이 아니라, 낙랑국이라는 다른 나라로 보는 것이 맞는 듯하다.
광개토태왕의 할아버지 고국원왕은 비운의 왕이다. 342년 전연(前燕)의 모용황이 군사 5만으로 고구려를 침공해 오자, 용맹한 군사들을 데리고 적을 막았으나 패했다. 이때 왕의 아버지 미천왕의 산소가 도굴돼 시신을 빼앗기고, 어머니는 인질로 잡혔다. 하지만 고국원왕은 전연과의 싸움을 미룬 채, 남진정책으로 백제를 우선 공격하다가 백제에게 기습 당해 전사하고 말았다.
370년 전연은 전진(前陳)에게 망했지만, 385년 모용황의 아들 모용수가 후연을 재건했다. 이틈에 고국원왕의 아들 고국양왕이 요동성과 현도군을 점령하기도 했지만 오래 버티지 못했다. 389년과 이듬해에 백제의 공격을 받기도 했으며, 391년에는 19세 나이로 즉위한 광개토태왕이 등극했다. 왕은 이듬해 한강 유역으로 진출해 싸웠고, 395년에는 거란을 정벌하고, 396년 백제 아신왕으로부터 “영원히 고구려의 노객(奴客)이 되겠다.”는 항복을 받아냈다. 398년에는 숙신을, 400년에는 신라를 도와 가야와 왜를, 410년에는 북쪽으로 베이징까지 영향력을 행사했으며 고구려 최대 영토를 확보했다.
581년 수(隋)나라는 건국하자마자 백제와 외교관계를 맺었고, 고구려는 왜와 친선관계를 유지하면서, 이해 12월부터 584년까지 8차례나 수나라에 사신을 파견했다. 우호적이던 양국 관계는 590년 수문제가 고구려는 번신(藩臣)으로서 성의를 다하지 않는다고 질책하면서 냉각되었다. 수는 599년 돌궐, 609년 토욕혼(吐谷渾,지금의 투족-토번)을 복속시키고, 고구려에게도 복속을 요구했지만 거절하자 침공을 준비했다. 그러나 전쟁은 고구려가 먼저 시작했다. 598년 영양왕이 1만 군사를 동원해 영주(瀛州)를 기습하는 선제공격을 감행했다. 수문제는 30만 대군으로 반격했는데, 이로써 4차례 16년간의 고구려와 수의 전쟁이 시작되었다.
598년에 이어, 113만을 동원했다는 611년 2차 전쟁은 을지문덕 장군의 지략으로 물리쳤고, 이듬해 다시 쳐들어왔을 때는 수나라 병부시랑 곡사정(斛斯政)이 고구려에 투항하는 바람에 밤에 몰래 군수품을 버리고 철수하기도 했다. 그다음 해에도 국내 반란을 진압하고 고구려를 침공하자, 영양왕은 곡사정을 돌려주고, 왕이 수나라에 입조하는 조건으로 강화를 요청했다. 수양제는 항복하는 적과 싸울 명분을 잃고 돌아갔다. 하지만 이때는 수나라에 복속되었던 돌궐 등 이민족이 반란을 일으키면서 수나라 위신은 땅에 떨어졌고 결국 멸망의 길을 걸었다.
수나라와의 2차 전쟁은 대군에도 불구, 을지문덕 장군이 살수에서 이를 막아냈다는 것은 좀체 잘 이해되지 않는 면이 있다. 물론 백제와 신라는 전쟁 전에 수나라에 사신을 보내 고구려를 침공해 달라고, 특히 신라는 원광법사에게 군사를 요청하는 걸사표(乞師表) 지어 고구려 정벌을 요청하기도 했다지만, 2년 동안 113만 3천 8백 명을 동원하고, 지원인력까지 합하면 200만 명에 이르는 군사가 고구려 침공에 나섰다는 것은 과장되어 보인다. 실제로 고구려 침략에 나선 군사가 67만이라는 견해도 있는데다 행군 군사가 960리에 이르고, 출발하는데 40일이 걸릴 정도였다고 하니 엄청난 군사인 것은 맞겠지만 말이다.
이때 수양제는 4개월 동안 요동성 등을 공격했으나 별 성과를 거두지 못하자, 우문술(宇文述), 우문중(于仲文)을 대장으로 30만 별동대를 만들어 평양으로 진격토록 했다. 이 별동대를 격퇴한 것은 을지문덕 장군인데, 장군은 게릴라전으로 수군의 힘을 소모 시키기 위해 거짓 항복과 적장을 격노시키면서 철군의 명분을 주기도 했다지만, 살수를 막았다가 터뜨려 적을 수장시켰다는 이야기는 사실이 아닐 가능성이 높다. 기록은 없지만, 당시에 대군을 휩쓸 만큼 물을 확보하는 토목공사를 할 능력과 통신수단도 발달하지 않아 적절한 때 제방을 무너뜨리도록 연락할 방법도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살수(薩水)는 청천강의 옛 이름으로, 영변부지(寧邊府誌)에는 한나라 공수(龔遂)가 물맛을 보고 강 상류에 보살이 있을 것이라고 해 살수라고 했다지만, 물살이 화살처럼 빨라서 살수라고 했다는 주장도 있다. 《손자병법》에는 “적이 물을 건너 쳐들어오면 물가에서 맞아 싸우지 말고, 절반을 건널 때까지 기다렸다가 공격하면 이롭다(客絶水而來 勿迎之於水內 令半濟而擊水利)”라는 구절이 있듯이 고구려가 이 병법을 이해하고 있었을 것이고, 그래서 그런 말이 지어진 것이 아닐까?
수나라에 이어 들어선 당나라도 고구려를 못살게 굴었다. 지금도 갖고 있는 그들의 중화사상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까지 우리가 살아남았듯이 고구려는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647년에 이어, 648년에도 당은 고구려를 공격했다. 하지만 실패했다. 그러나 이 무렵 신라의 김춘추는 고구려와 백제의 협공에 대항하기 위하여 어떤 대안이 필요했는데, 고구려와 왜를 찾아가 협조를 부탁했지만 거절당하자 김춘추는 당나라 태종을 찾아갔다. 김춘추를 후대한 당 태종은 고구려·백제를 멸한 후 대동강 북쪽은 당이, 남쪽은 신라가 차지하기로 밀약했다. 신라는 그전에 당 태종이 고구려를 침략했을 때도 군사 3만을 보내 지원한 바 있었다.
658년과 659년 당은 고구려의 서쪽을 공격했다. 신라와 연합해 백제를 칠 때 고구려가 후방에서 백제를 지원 못 하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660년 당 태종의 아들 당 고종은 태종무열왕의 아들 김인문을 ‘신구도부대총관(神丘道副大摠管)’으로 임명하고, 소정방과 함께 13만의 군사로 백제를 치게 했고, 신라군 5만과 사비성에서 만나기로 했다. 백제는 당군을 먼저 칠 것인지, 신라군에 대항할 것인지를 두고 의견이 분분했으나, 의자왕은 당군이 신라군과 만나기 전에는 쉽게 전투를 벌이지 못할 것으로 보고, 신라군을 먼저 상대하기로 했다. 김유신이 이끈 5만의 신라군은 계백이 5천의 결사대로 맞섰다고 하는데, 너무 이상하지 않은가? 황산벌 지형을 잘 알고 이용한 계백이 신라군과 4번 전투에서 모두 승리했다거나, 흔히 죽음을 무릅쓰고 용감히 싸웠기 때문이라고 하지만, 신라군에 맞선 백제군은 계백 외에도, 좌평 충상(忠常)과 상영 등이 거느린 부대도 있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삼국사기》는 삼국시대에 총 480회의 전쟁이 있었는데, 그중 275회가 고구려·백제·신라 간의 전쟁이었다. 세 나라 간 전쟁은 지금의 서울을 차지하기 위해서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데, 한강 때문이었다. 한강은 『한서』에는 대수(帶水), 광개토태왕비에는 아리수(阿利水), 백제는 한수(漢水)·욱리하(郁里河), 신라는 북독(北瀆)으로 불렀다. 고려시대에는 열수(洌水)·사평도(沙平渡)·사리진(沙里津) 등으로 불렀고, 조선시대에 와서 한강으로, 한수·경강(京江)으로도 불렀다. 아무튼 삼국시대의 경우 4세기 이후 전쟁은 영토 확장이 주목적이었다. 가장 먼저 주도권을 잡은 나라는 백제였다. 근초고왕이 371년 평양에서 고국원왕을 전사케 하고 고구려를 대파했다. 그리고 마한 남쪽과 가야 일부도 통합했다. 그러나 광개토태왕 등장으로 판세가 바뀌었고, 신라는 진흥왕대에 한강유역을 차지하는 등 세력균형은 여러 번 요동쳤다.
660년 신라와 연합해 백제를 멸망시킨 당은 이듬해 고구려를 침공했다. 신라의 지원을 받고 평양까지 진격했으나, 평양성을 함락시키지 못했고 오히려 고구려가 배후를 쳐 당군을 격퇴시켰다. 662년에도 당은 고구려를 치면서 신라에게 군량 조달을 요청했다. 이번에도 평양성을 포위했지만,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연합군의 여러 번 공격에도 흔들리지 않던 고구려는 연개소문의 죽음으로 흔들리기 시작했다. 연개소문도 견훤처럼 세 아들이 문제였다. 아들들이 국정에 참여하여 서로 협력해 권력이 탄탄해질 것으로 기대했지만, 결과는 정반대였다.
장남 남생이 막리지를 계승하여 지방을 시찰하던 중, 동생 남건과 남산이 평양에 있던 큰 형 남생의 아들 헌충(獻忠)을 죽이는 반란을 일으켰다. 소식을 들은 남생이 당에 투항할 때 국내성과 부여 쪽 백성들이 남생을 따랐다. 연개소문의 동생인 연정토(淵淨土)는 강원도 북부 여러 성을 거느리고 신라에 투항했다. 667년 이세적이 이끈 당군이 남생을 선봉으로 고구려를 침공해 평양을 함락시키지는 못했어도 큰 타격을 주었다. 그리고 이듬해 다시 20만을 동원해 신라와 같이 평양성을 공격했다. 병자호란 때 남한산성에 인조가 피신해 있을 때처럼 이때에도 강건파와 온건파가 대립했다. 그러나 보장왕은 남건 등 신하들을 데리고 당군에 항복했다. 남산이 항전 의지를 불태웠지만, 군사지휘권을 맡긴 승려 신성(信誠)이 이미 당에 투항한 남생과 내통함으로써 난공불락이던 평양성은 당나라가 접수했다. 고구려의 멸망 원인은 여럿 있겠으나, 특히 신라가 당과 연합한데 반하여, 고구려는 연합할 세력이 없었다는 것이다. 당은 630년 동돌궐, 646년 설연타, 657년 서돌궐, 661년 백제와 철륵 등을 격파하고 거란과 말갈까지 복속시켰기 때문이었다.
백제와 고구려가 망한 뒤 상당 기간 부흥 운동이 일어나기는 했으나, 결론적으로 성공을 거두지는 못했다. 또한 신라도 당나라가 애초 약속을 저버리고 한반도 모두를 집어삼킬 야욕을 드러내자 여러 번 전쟁을 치른 끝에 겨우 몰아낼 수 있었다. 이 과정을 두고 우리는 만약에 신라가 아닌 고구려가 통일했다면 하는 아쉬움을 가지게 된다. 고구려가 만주 지역을 포괄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고구려는 수당 등 강력한 세력과 국경을 접하고 있었던 만큼 남쪽에 전념할 수 없었다는 사실이다. 고구려 군사가 10∼20만이었다고 가정한다면 백제나 신라를 공격할 때는 언제나 2만을 넘어선 적이 없었다. 다시 말해 중국을 막기 위해 남쪽에 신경 쓸 여력이 없었다는 것이다.
신라통일에 대하여는 긍정적인 면과 부정적인 면이 함께 존재하는 것이 사실이다. 특히 북한의 경우, 신라통일은 동족을 배반하고 당을 끌어들인 악의적 행위라며 신라에 의한 통일을 인정하지 않고 고려에 의한 후삼국통일을 최초의 통일로 인정하고 있다. 하지만 당을 몰아내기 위한 백제와 고구려의 부흥운동에 신라가 공조했던 것은 민족의식의 발로라기보다는 당의 간섭을 배제하고자 한 의지였으며, 이 과정에 연대감이 형성되었고 신라는 삼국을 통일하겠다는 의지보다 스스로 살고자 한, 상대를 죽이지 않으면 안 된다는 절박감이 있었다는 것을 이해해야 하지 않을까? 그런 의미에서 신라의 통일은 절반의 통일이었던 것은 분명해 보인다.
▢ 후삼국 시대
신라 선덕여왕의 아버지인 진평왕의 경우 53년간 왕위에 있었던 반면에 신무왕의 경우는 6개월이었다. 하대에 이르자 왕위 계승권을 둘러싼 유혈 상쟁으로 여러 번 피비린내를 풍겼다. 중앙정부의 통제력은 상실되었고, 실정과 흉년으로 백성이 도탄에 빠지자 왕위는 잠시 머물다 가는 자리가 되고 말았다. 지방 세력들이 발로하여 호족으로 커졌다. 견훤과 궁예도 그중의 한 사람으로, 견훤은 그래도 아버지가 아자개(阿慈介 또는 阿慈蓋)로 문경 가은 사람이라고 알려졌지만, 궁예는 《삼국사기》에는 헌안왕 또는 경문왕의 서자, 「순천김씨세보」에는 신무왕의 서자라고 기록되어 있는가 하며 고구려에서 귀순한 안승의 후예거나, 문성왕의 아들 아니면 장보고의 외손자라는 기록도 전한다.
궁예는 출신은 명확하지 않지만, 신라 왕실의 피를 이어받았으나 버림받은 것으로 보인다. 그는 어린 나이에 지금의 안성(竹州) 세달사로 출가하였다가, 891년 환속하여 지역 호족인 기훤(箕萱)에게 의탁하려 했으나, 어릴 때 다쳐 애꾸눈인데다가 세력도 약해 푸대접을 받고 원주 양길에게 갔다. 양길(良吉)은 그의 능력을 인정하고는 영월, 평창, 울진, 강릉 등을 맡겼는데, 궁예는 스스로 장군을 자처하면서 고성, 인제, 양구, 화천, 철원까지 장악한 뒤에 양길을 몰아내고, 901년 송악을 장악하여 나라를 건국했다. 궁예가 건국한 나라는 후고구려라는 이름은 사용하지 않았고, 고구려를 계승한다고 하였는데, 918년 왕건이 건국한 고려와 구분하기 위해 ‘후고구려’라고 하는 것이다.
904년 대동방국(大東方國)을 뜻하는 마진(摩震)이란 국호를 사용했으며, 이는 아마도 백제와 신라를 아우르는 국가를 지향하기 위하여 고려라는 국호를 포기한 것일 것이다. 이해 도읍을 철원으로 옮기고, 연호를 무태(武泰), 905년에는 성책(聖冊), 911년에는 다시 국호를 태봉(泰封), 연호를 수덕만세(水德萬世)로 바꾸었다. 이렇게 보면 궁예가 조금은 변덕스러운 인물로 보이기는 한다.
안성지방에는 궁예미륵이라고 불리는 불상들이 많은데(석조암석조여래입상 등) 소문처럼 궁예가 포악한 정치를 펼쳤다면, 백성들이 그를 존경하고 불상을 세우고, 궁예미륵이라는 이름을 붙이지 않았을 것이다. 건국 24년만인 918년 궁예는 왕건과 배현경, 복지겸, 신숭겸, 홍유 등에 의해 왕위를 찬탈당했다. 신라에 적대적이었던 궁예를 제거하고 왕건이 왕이 되자 신라는 쾌재를 불렀다. 그리고 신라와 고려는 세력을 키우던 후백제를 견제했다. 고려 세력이 경상도 지역으로 점점 확대되자 924∼925년에 견훤은 경상도 지역을 침공해 거창 고령 합천 문경 예천과 김해 창녕까지 석권했고, 927년 경주까지 진격해 경애왕을 자결케 했다. 《삼국사기》에는 경애왕이 포석정에서 왕비와 궁녀들과 연회를 즐기다 죽임을 당했다고 기록하고 있지만, 이때는 음력 11월로 포석정에는 물도 없었고, 연회를 즐길만한 상황도 아니었다. 김춘추와 김유신의 여동생 문희가 포석정에서 결혼식을 올린 것을 돌아보면, 경애왕이 여기서 국가의 안위를 비는 제사를 지냈던 것은 아니었을까?
▢ 고려와 거란의 전쟁
깊이 공부하지 않아서 그런지 거란, 여진, 말갈 이런 족속들은 제대로 와 닿지 않는다. 거란은 만주 북쪽에서 유목 생활을 하던 민족으로 학계에서는 퉁구스족 혹은 선비족, 몽골과의 혼혈족 등으로 보는데, 어쩌면 우랄알타이족, 몽골족이라고 하는 우리와도 계통이 다르지 않을 것이다. 10세기 초 중국도 혼란한 시기였다. 5대 10국의 혼란 속에 거란은 한족의 지배에서 벗어나 901년 야율아보기가 부족장이 되어 여진족을 정벌하고, 907년 황제를 자칭하면서, 926년에는 발해를 멸망시켰다. 그들은 15∼50세 남성은 모두 군에 편성시켰는데, 아버지와 아들, 형과 동생이 같은 부대에 배속되기도 했다. 혈연적 연대로, 밀집한 인간관계로 전투력 역시 상당히 뛰어났다.
고려의 입장에서는 발해가 망하자, 거란과 국경을 접하게 되었고 후당, 후진 등과 외교관계를 맺어 거란을 견제했다. 942년 거란의 사신 39명이 낙타 50마리를 끌고 우호를 도모하기 위해 고려에 왔다. 거란도 고구려의 후예라는 동족의식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사신을 보낸 것이다. 그러나 왕건은 사신을 섬에 유배시키고, 낙타는 만부교(萬夫橋)아래 매달아 굶겨 죽였다. 고려는 스스로 천하의 중심으로 생각해 거란을 “짐승의 나라”라고 이적시(夷狄視) 했던 것이다.
993년 여진족이 거란이 고려를 침략할 것이라는 정보를 알려주었지만, 고려는 무시했다. 거란 성종은 소손녕(蕭遜寧)을 대장으로 고려를 침공해 왔다. 고려는 박양유를 상군사, 서희를 중군사, 최양을 하군사로 삼아 봉산성에서 적을 막으려 했으나, 소손녕에게 대패했다. 하지만 이듬해 안융진에서 대도수 유방(庾方)이 거란군을 대파하자 적은 화의를 요청해 왔다. 소손녕은 고구려의 옛 영토 반환과 송과의 국교단절을 요구했는데, 서희는 거란과 통교하지 못하는 이유가 여진 때문이라며 여진을 축출하면 거란과 국교를 맺을 수 있고, 고려는 고구려의 후계인 만큼 고구려의 영토는 고려에 속한다고 주장하여 압록강 동쪽 6주를 고려땅으로 인정받았다. 이곳은 서경이 위협받는 요충지로 여진·송·거란·고려 모두에게 매우 중요했다. 서희의 외교담판으로 고려는 고토를 회복하고, 처음 거란과도 국교를 맺은 것으로 보아 거란의 고려침략은 고려가 송과 단교하기 위한 것임을 알 수 있겠다.
전쟁은 승패가 있고 왕은 언제나 전쟁만을 생각하고 있지 않다는 것은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거란의 공격 와중에도 4대 광종은 은진미륵으로 유명한 관촉사(灌燭寺)를 지었고(1006년), 이후에 고려는 몽골 침략에 맞서 팔만대장경을 만들었으니 말이다. 1010년 거란 성종은 고려 정변인 ‘강조의 정변’* 을 이유로 강동 6주를 돌려줄 것을 요구하며, 40만 대군을 동원해 고려를 침공했다. 현종은 나주로 파천했고, 1011년 1월 1일 거란군은 개경에 입성하여 궁궐과 민가를 불태웠다. 현종은 친조를 조건으로 화의를 제의했다. 거란군은 나주까지 추격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으며, 북쪽 통주·홍화·귀주 등을 완전히 장악하지 못한 상태였으므로 화의를 받아들여 1월 11일 철군을 시작했다.
그러나 고려군은 퇴각하는 거란군을 그냥 두지 않았다. 1월 17일 김숙흥은 귀주에서 거란군 부대를 공격하여 1만여 명을 사살하고, 19일에는 양규가 통주로 패주하는 2천 5백여 명을, 22일에는 김숙흥과 양규가 협공하여 1천여 명을 각각 사살했다. 하지만 28일 양규와 김숙흥은 귀주 남쪽 애전(艾田)에서 거란 성종이 이끈 본대의 역습을 받고 장렬하게 전사했다.
거란의 2차 침공은 그렇게 끝났지만, 1015년 거란은 사신을 보내 강동 6주를 돌려달라고 압박했다. 그러나 고려는 거절했다. 이후 거란은 10여 차례나 고려를 침공해 왔으나 성과를 거두지 못하자, 1018년 12월 소배압(蘇排押)이 10만 대군을 끌고 다시 개경을 목표로 침공했다. 그러나 당시 71세의 노장이었던 강감찬(姜邯贊)은 거란을 대파했다. 하지만 거란군은 곧장 개경으로 남진하였는데, 이번에는 현종도 파천하지 않고 개경에서 40㎞ 떨어진 신계에서 개경 사수를 결의했다. 결국 보급이 떨어진 거란군이 회군할 때, 귀주에서 강감찬과 김종현이 소배압의 군사를 전멸시켰다. 이것이 ‘귀주대첩’이다. 『고려사』에는 강감찬이 소의 가죽으로 강물을 막아 수공으로 적을 공격했다고 기록하고 있으나, 당시는 음력 12월로 강이 얼었을 가능성이 크고 얼지 않았더라도 물이 많지 않았을 것이므로 아마도 적이 강을 반쯤 건넜을 때 분리해 공격했던 것이 아닌가 싶다.
보급로를 제대로 확보하지 못해 고려 침공에 실패한 거란과는 이후 100여년간 평화 관계가 유지되었는데, 3차에 걸친 거란과의 전쟁으로 고려는 압록강까지 국경선이 확장되었고, 탐라와 우산국도 복속시켰다. 평화관계가 유지됨에 따라 고려 내부에서는 숭문정책(崇文政策)과 경제발전으로 아라비아 상인들과도 거래하는 등 크게 발전을 거두었지만, 무를 경시한 풍조로 무신정변을 야기하였고, 대외적으로는 거란과 고려의 평화 상태가 여진족이 세력을 확장하는 계기가 되었다. 여진족이 국가기반을 갖추면서 금(金)나라를 건국해 동북아 패권을 차지하기에 이르게 되고, 조선 시대 사신 누군가가 금나라 지역을 지나다 광개토왕비를 보았다는데, 그것이 금나라 황제의 치적을 쓴 것이라고 이해했다는 것을 어디서 본 것 같은데 무지가 아닐 수 없다는 생각이 든다.
▢ 대몽항쟁(對蒙抗爭)
책에서는 〈몽골과의 전쟁〉이라고 하였지만, 우리 입장에서 보면 대몽항쟁이었다. 중국인들은 그들이 야만스럽다 하여 몽고(蒙古)라 불렀지만, 스스로는 용맹한 전사라 하여 ‘몽골’이라고 한다는 몽골하면, 생각나는 것이 유목민, 전사, 시력 좋고, 비단옷인데, 귀한 비단옷을 입었던 이유는 가벼워서 활동이 편한데다 화살이 잘 뚫지 못하기도 할 뿐 아니라 화살이 깊게 들어가지 않으며 또 쉽게 빠지기 때문이라고 한다. 몽골군 전투에는 지원부대가 따로 필요 없다. 전투식량을 스스로 챙겨 다니기 때문이었다. 알렉산드도 나폴레옹도 히틀러도 하지 못한 중앙아시아와 중동지역, 서쪽으로 폴란드, 남쪽으로 인도까지 진출해 가장 넓은 제국을 건설했던 몽골군은 보병부대가 없었던 만큼 산악전투와 수전에는 약했다.
1206년 칭기스칸이 등장해 부족을 통합하고 1209년 서하, 1218년에는 페르시아 그리고 여진의 금을 치고 1216년과 1218년에 고려를 침략했다. 1227년 칸이 죽고, 1231년 살리타이가 고려를 침입해 오면서 고려는 화의를 청했으나, 몽골의 지나친 요구를 받아들일 수 없었으므로 이듬해 강화도로 천도했다. 몽골군은 경상도까지 남하해 대구 부인사(符仁寺)에 있던 초조대장경을 불태우는 등 전국을 돌며 노략질을 일삼았다. 1256년부터는 지금까지 공성전을 버리고 해안과 섬을 공격하기 시작했는데, 강화도를 고갈시켜 항복을 유도하기 위해서였다. 강화도의 조정은 항쟁이 한계에 이르렀음을 알고, 1259년 고종의 아들인 태자 왕전(王倎)을 몽골에 인질로 보냈다. 태자는 그곳에서 쿠빌라이가 칸이 될 것을 알고는 접근했는데, 칸이 된 뒤에 왕전은 원종으로 책봉되었다. 이로써 포로 440여 명을 고려로 돌려보내는 등 우호관계를 맺었다.
오랜 기간 몽골의 침입이 계속된 것은 원나라의 대외정책이 상대국과의 외교관계를 수립하는데 있지 않고, 무력으로 굴복시키는 데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고려는 정치·경제적 예속관계를 받아들일 수 없었으며 강경 대응으로 일관해 장기전이 될 수밖에 없었다. 또한 최씨무신정권은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몽골과의 전쟁을 수행하는 길밖에 다른 길이 없었던 것도 한 이유였다.
흔히 몽골항쟁하면 삼별초를 떠올리게 되는데, 무신정권은 친위부대로 야별초를 만들었고, 이것이 좌별초, 우별초로 편성되고 몽골군에 포로로 잡혔다가 탈출한 이들을 신의별초(神義別抄)로 하여 ‘삼별초’가 된 것이다. 삼별초는 원의 침략에 맞서 출전하기도 했으나, 강화도에서 무신정권 보호하는 임무를 맡았던 만큼 큰 피해는 입지 않았다. 하지만 무신정권이 무너지면서 특권이 사라졌고, 이들을 탐탁치 않게 여기던 원종은 삼별초의 해산을 명하고, 명부 제출을 요구했다. 자신들의 이름이 알려질 경우를 우려하면서 반발하기 시작했고, 1270년 서남해안을 따라 남하해 진도에 용장성(龍藏城)을 쌓고 ‘승화후 온(承化侯, ?~1271 溫)’을 왕으로 추대했다. 진도는 세 번째로 큰 섬으로 물살이 거세기로 유명한데, 이순신의 명랑해전이 있었던 곳이다. 여기서는 몽골군을 막을 수 있을 것으로 보았다. 삼별초의 서남해 장악으로 조정은 물자 궁핍현상이 나타났는데, 고려조정은 김방경(金方慶)으로 하여금 진도를 공격하게 했으나 실패했고, 이듬해에도 회유했다. 하지만 삼별초는 항쟁의지가 강했던 만큼 일본의 가마쿠라 막부(鎌倉幕府)에 사신을 보내 일본과 연합해 원에 대항하기로 하기도 했다.
9월 원나라 아하이(阿海)와 김방경이 진도를 공격했지만 패했다. 그러나 이듬해 5월 다시 여원연합군이 공격해 함락시켰다. 이때 배중손(裵仲孫), 노영희(盧永僖)가 전사하고, 승화루 온은 참살당했다. 그렇지만 삼별초는 김통정(金通精)을 중심으로 제주도로 내려가 항쟁을 계속했다. 제주도는 일본·류큐·남중국 등과 교역해 자립할 수 있는 곳으로, 이문경(李文京) 등이 이미 기반을 확보해온 상태였다. 삼별초의 활동은 고려정부는 물론 일본 정벌을 계획하고 있던 원에게도 커다란 장애였다. 회유했지만 받아들이지 않자 대군을 제주도에 보내 공격했다. 20여 일 동안 항전하다가 결국 패했고 김통정은 자결했다. 원은 제주도에 ‘탐라총관부’를 설치해 직할령으로 삼았다.
삼별초의 해상활동과 관련해 고려는 해상왕국이었다는 사실과 박혁거세 건국을 도운 호공(瓠公)과 석탈해(昔脫解) 그리고 김수로왕의 배필 허황옥(許黃玉) 등의 모두 해상과 관련 있다. 허황옥은 인도 아유타국 아요디아에서 왔다고 보기도 하고, 타일랜드의 아유티야로 추정하기도 하며, 중국 쓰촨성에 살던 파족(巴族)의 중심세력인 허씨 가문의 딸로 허씨의 뿌리가 인도라는 주장도 있지만, 아무튼 허황옥은 가야 여인이 아니라 배를 타고 왔다는 사실이다. 신라 헌강왕 때 처용(處容)도 신라에 ‘거주를 허용한 이방인’이라는 설이 그 이름처럼 유력하다. 경주의 흥덕왕릉과 원성왕릉 앞에 있는 무인석은 신라인으로 보기 어려운 형상이다. 곱슬머리에 부릅뜬 눈, 오뚝하고 큰 코에 튀어나온 광대뼈가 영락없는 서역인이다.
신라말 청해진이 폐쇄되면서 신라 해적은 중국과 일본의 공물을 탈취할 정도로 세력이 강했다. 발해 역시 동경에서 동해를 건너 일본으로 가는 해상로를 장악하기도 했고, 고려는 해상을 중심으로 크게 발전했음에도 서남해상 세력이 삼별초에 동조해 왜구와 연대하는 것을 막았고 섬 주민을 쇄환(鎖還)하는 공도정책(空島政策)을 펼쳤는데, 해외 통상과 먼 바다로 나가는 것을 금지하는 해금정책(海禁政策)을 감행함으로써 해상왕국의 면모를 상실하고 섬이 비게 됨으로써 왜구의 침탈을 부추기는 결과를 가져왔다.
고종으로부터 공민왕까지 158년이라는 긴 기간 동안 몽골의 고려침략과 침탈은 서로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다. 특히 의식주에서 여러 가지 영향을 주었는데, 소주와 상추쌈 등이 몽골에서 왔다는 것은 이미 알려진 사실이지만, 몽골 공주가 고려의 왕비가 되면서, 궁중 용어에도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벼슬아치, 구슬아치, 장사치, 양아치 등은 원래 몽골의 말이었다. 궁궐 내에서 특히 몽골말이 많이 사용되었는데 수라, 최고 어른을 뜻하는 마마, 세자와 세자빈을 부르는 마누라(邸下), 소녀를 뜻하는 무수리 등이 그것이다.
얼마 전에 드라마로 방영되기도 했던 기황후는 1331년 고려의 대청도로 유배되었던 ‘토콘 테무르’가 황제 위에 오르면서 순제가 되었고, 고려출신 환관 고용보(高龍普)의 주선으로 기자오(奇子敖)의 딸 기순녀(奇順女)가 원 황실의 궁녀가 되면서 순제가 기순녀를 사랑했고, 황비 타나시리가 기순녀를 시기해 인두로 지지는 등 학대했으나, 얼마 뒤 황후의 형제들이 모반사건을 일으켜 타나시리가 처형되고, 순제는 기씨를 황후로 삼으려 했으나, 신하들의 반대에 부딪쳤고, 1337년 기씨가 아들 아이유시리다라를 낳을 즈금에 두 번째 왕비 바얀이 역모 사건으로 축출되자 결국 기씨가 황후가 되었다는 것이다. 역사는 그렇게 그렇게 흘렀지만...
▢ 홍건적의 난
몽골이 중국을 통일한 후에 대원(大元)이라고 나라 이름을 바꿨는데, ‘으뜸 우주의 근원’이라는 뜻이다. 쿠빌라이칸이 정한 이름이지만, 그의 사후에 지방 군벌이 발로하면서 하베이성(河北省) 등에서 한족이 주축이 된 농민반란군운동이 일어났다. 반란군들은 백련교(白蓮敎)의 불(火), 송나라의 운수인 불덕(火德)을 상징하는 붉은 띠를 머리에 둘러 ‘홍건적’또는 ‘홍두적’이라 불렀다. 비밀결사대인 백련교를 표방했는데, 백련교는 페르시아의 조르아스트교에서 비롯된 것으로 백련교와 미륵신앙이 겹쳐 원에 대한 강한 적대감으로 원정권 타도를 내세웠다. 원은 홍건적이 수도 베이징까지 넘보자 토벌을 시작했고, 원의 공격을 피해 고려로 넘어오게 된 이들을 고려가 가로막고 서북면에 대한 경계를 강화하자, 2차례 고려를 침공했다. 홍건적은 종교적 신념을 가진 집단으로 원에 대한 반란 세력이었던 만큼 반원 감정을 가진 고려로서는 이들을 공격할 이유가 없었지만, 궁지에 몰린 붉은 띠를 두른 도적의 모습으로 고려를 침공한 것이다.
1357년 공민왕은 자신의 측근인 김득배(金得培)를 ‘홍두외적방어지휘사’로 임명해 대비하였으나, 홍건적은 자신들에게 협조할 것을 요구하며 압록강을 건너 약탈을 일삼다 12월 8일 4만 명이 얼어붙은 압록강을 넘어 인주(麟州)까지 점령했다. 12월 20일에 총사령관 이암(李嵒)이 서경에 도착했으나, 2천여 명의 병력으로 홍건적을 막을 수는 없었다. 서경의 양식과 가옥을 모두 불태우는 청야전술(淸野戰術)을 계획하기도 했으나 오히려 남겨두자는 의견을 좇아 황주로 물러났다. 도원수 이승경(李承慶)이 군사를 정비해 홍건적을 공격하자, 홍건적들은 포로로 잡은 1만여 명을 학살하기도 했다. 이듬해 2월 15일 안우와 이방실이 함종으로 진격하여 홍건적 2만여 명을 사살하는 대승을 거뒀고, 16일에는 도망가는 1만여 명을 사살했다. 3월까지 이어진 전투로 도망간 3백여 명을 제외한 홍건적 대부분을 전멸시켰다.
원나라도 1360년 홍건적에 대한 대대적인 소탕 작전을 펼쳤는데, 퇴로를 차단당한 홍건적들이 이듬해 10월, 20만 대군으로 다시 고려를 침략했다. 11월 9일 고려군을 기습했고, 고려군은 절령(岊嶺)으로 퇴각했다. 이때 상장군 이엄과 조천주가 전사하고, 지휘사 김경제는 포로로 잡혔다. 절령이 무너지면서 개경이 위험해지자 공민왕은 안동(福州)로 피난했다. 저항없이 홍건적은 11월 24일 개경에 입성했고, 강화도는 물론 원주까지 휘젓고 다니면서 약탈을 자행했다. 안동에서 지방에 격문을 보내 병력을 모집한 공민왕이 20만 병력을 확보하고 1362년 1월 반격을 시작했다. 퇴로를 열어주면서도 10만의 홍건적을 사살했고, 홍건적들은 압록강을 건너 퇴각했다. 이런 예상치 못한 전쟁까지도 우리 땅에서 벌어졌을 때 민초들의 삶은 그야말로 불모지나 다름없었을 것이다. 어떻게 견뎌냈을까? 참으로 답답하다. 그러나 우리는 살아남았다.
쓰시마 정벌은 1419년 6월 19일 삼군도체찰사 이종무(李從茂)가 277척 배에 17,285명의 군사와 65일분의 식량을 싣고 쓰시마로 향했다. 두지포(豆知浦-土崎)에 도착한 조선군은 도주 소 사다모리(宗貞盛)에게 항복을 종용했으나 응하지 않자 이튿날 섬에 상륙했다. 조선군은 129척의 적선과 2,007호의 가옥을 불사르고, 114명을 참수했다. 조선군 포로 29명, 중국인 포로 131명을 구출하고 목책을 설치해 쓰시마 해안을 봉쇄했다. 조선군은 승리를 거두었지만, 오래 머물 형편은 아니었다. 사다모리가 화친하겠다는 뜻을 전해온데다 태풍을 우려 해 7월 3일 거제도로 돌아왔다. 쓰시마 정벌을 조선은 기해정동(己亥征東), 일본은 오에노가이코(應永外寇), 쓰시마는 지방 지명을 따서 누가타게노갓센(糠岳の合戰)이라고 부른다.
삼국시대인 기원전 50년에 일본이 신라변경을 침략했다는 기록이 있고, 서기 60년, 73년에 목출도를, 121년에도 동쪽 변방을, 208년에, 232년 4월에는 금성을, 이듬해 5월, 287년에는 일례부(一禮部)를 습격했으며, 294년 장봉성(長峯城)을, 346년과 364년에도 신라를 침공했고, 394년에는 5일 동안 금성을 포위하기도 했다는 기록이 있다. 4세기 초반까지 변경을 침략하여 약탈하는 수준에 불과했지만, 462년 왜가 신라를 침략해 1천여 명을 사로잡아 갔다는 기록이 있는 등 대규모 침략도 있었음을 알 수 있다. 418년 박제상이 왜에 인질로 잡혀간 눌지왕의 동생 미사흔(未斯欣)을 구출하기 위해 왜에 가기도 했고, 601년에는 왜의 정세를 살피기 위해 신라가 가마다(迦摩多)를 쓰시마에 파견하자, 쓰시마에서 그를 사로잡아 왜에 보냈다는 것으로 보아 이때 벌써 쓰시마는 왜의 지배권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태종대 등대, 모자상 근처에 갈 때마다 느끼는 것이지만, 1만 년 전에 빙하가 녹아 해수면이 상승하면서 생긴 쓰시마는 남북 82㎞, 동서 18㎞, 면적 696.29㎢, 두 개의 큰 섬과 100여 개 작은 섬으로 되어 있고 일본의 하까다(博多)까지는 132㎞, 부산까지는 50㎞ 밖에 안 되는데, 우리가 왜 점유하지 못했는가 하는 안타까움에 그저 가슴이 저린다.
▢ 조선과 일본의 전쟁
임진왜란에 대하여는 「그들이 본 임진왜란」, 「광개토호태왕릉비」등에서 살펴보았다는 자만 때문인지 모르겠다만, 최근에 ‘왜란’이라 하지 않고 〈조·전쟁〉이라고 부른다는 것, 일본은 전쟁을 일으킨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우리가 이순신을 영웅으로 생각하는 만큼, 영웅시한다는 것도 알아야 할 것 같다. 다만, 이 책을 통해서 살펴볼 것은, 4월 14일 부산에 상륙한 왜군이 파죽지세로 한양으로 올라갔는데, 소식이 4월 17일 조정에 알려졌고, 조정에서는 이일과 신립을 방어사로 파견했고, 신립이 탄금대(彈琴臺)에서 배수진을 쳤지만, 대패해 전사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만약에 조령에서 막았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있다고들 말한다. 그렇다면 신립이 탄금대가 아닌 조령에서 막았다면 승리할 수 있었을까? 또 신립이 탄금대에서 싸워 승리했다면 조령에서 막지 않은 책임을 물을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생긴다.
조선의 패배 원인을 굳이 찾는다면 방어체제의 부실, 군역제도의 붕괴, 조총으로 무장한 일본군에 대한 정보의 부재 등 국방제도 전반에서 찾아야지 신립 개인에게 찾을 수는 없다는 것이다. 신립의 탄금대 방어는 한양으로 오는 길이 죽령, 추풍령 등이 존재하는 만큼 조령만으로 막을 수 없다고 생각했을 수도 있고, 오히려 왜군이 우회하여 조우된다면 고립될 수 있다고 생각했을 수도 있지 않았을까. 신립은 여진족과 싸워 여러 번 승리를 거두었고, 자신이 거느린 1만은 왜군보다 수적 열세를 극복하고 조선군의 장점을 살리기 위해 탄금대를 택했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신립의 패전 소식이 전해지자, 4월 30일 선조는 비가 오는 가운데 도성을 버리고 피난길에 올랐고, 5월 3일 한성이 함락되자 개성도 버리고, 7일 평양에 도착했다. 그러나 갈수록 전세는 악화되어 6월 10일 평양을 버리고, 13일 영변에, 22일에는 의주에 이르렀다. 이렇게 한 달도 안 돼 일방적 패배를 당한 상황을 당시 조선인들은 어떻게 이해했을까?
전쟁 전에 일본이 요구한 조선통신사 부사로 일본에 갔다 온 뒤 일본의 조선 침략은 없을 것이라고 했던 김성일(金誠一)은 일본의 침략으로 국가가 위기 상황에 놓인 것은 운이 나빠서라고 했다. 그는 패전을 거듭하는 상황에서도 문화국 조선의 자존심을 지키야 한다고 했으며, 류성룡은 예상 밖으로 일본군이 강했고, 조선의 준비가 부족하여 패배를 당할 수밖에 없었다며 조선의 군사력이 약화된 이유는 국방제도의 미비 등 국정을 담당한 자신을 비롯한 신료들에게 잘못이 있다고 하고, 군왕은 적극적으로 옹호했다.
1592년 임진년 1차 침략 시에 일본은 조선의 완전 점령을 목표로 했다. 동래를 점령한 후,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가 히데요시에게 보낸 글에 ‘조선의 관리들이 농민들을 가혹하게 다루기 때문에 우리가 관용을 보이자 조선 백성들이 일본군을 갈망한다.’고 했다. 그러면서 일본군은 관대하고 조선의 왕은 백성을 확대했기 때문에 침략을 받은 것이라고 선전하기도 했다. 파죽지세이던 일본군은 도성을 함락시키면, 조선이 항복할 것으로 생각했으나 오산이었다. 일본의 전쟁에서는 한번 패한 장수는 자결하거나 용서받아 승리한 상대 장수의 부하가 되었는데, 조선은 장수가 죽었다고 해서 전투가 끝나는 것이 아니었다. 한번 졌더라도 기회만 있으면 저항 세력으로 바뀌었다. 끈질긴 저항, 해전에서의 패배, 의병 등에 의한 보급로 차단 등은 전쟁 수행에 차질을 빚었다.
일본군에 사로잡혔다가 탈출한 팽창군수 권두문(權斗文)의 「호구일록(虎口日錄)」에 의하면, 일본군 이동 시에 짐을 진 사람 반 이상이 조선말을 사용했다고 한다. 일본군이 군수물자 이동 등에서 조선 백성을 이용했지만, 그들이 자발적인 것이 아니었다는 것을 짐작하게 한다. 히데요시는 조선 침략을 국내 통일전쟁의 연장선상으로 생각했고, 일본처럼 조선도 항복한 뒤 조세를 바칠 것이라고 예상했다. 조선인은 자신과 가족을 지키기 위해 어쩔 수 없이 협력하기는 했지만, 순순히 따르지 않았고 침탈이 가혹해지면서 원망하게 되고 항일의지가 살아난 것이다.
전쟁 무기는 일본이 나는 새도 잡는 조총(鳥銃-뎃포(鐵砲)이 있었다면 조선은 현대의 다연장로켓과도 같은 화차(火車)와 비격진천뢰가 있었다. 화차는 신기전(神機箭) 약통에 부착된 점화선을 한데 모아 불을 붙이면 동시에 15개씩, 차례로 한꺼번에 1백 발을 발사할 수 있었는데, 변이중(邊以中)은 이 화차를 개량하여 40개의 구멍에 승자총(勝字銃)을 넣고, 심지를 연결하여 연속 발사가 가능토록 했다. 변이중의 화차는 2천 3백명으로 3만 명의 일본군을 격퇴한 행주대첩(幸州大捷)에서 크게 쓰였다.
▢ 조선과 청의 전쟁
청나라는 여진족이 건국한 나라다. 두만강 북쪽 쑹화강과 헤이룽강을 따라 현재의 지린성과 헤이룽장성에 살던 민족들로 중국에서는 춘추시대에는 숙신, 한나라 때는 읍루, 남북조시대는 물길, 수·당대는 말갈, 송대에는 여진(女眞)으로 불렀고, 우리는 고려 시대에 여진족이란 명칭이 굳어졌다. 1115년 ‘아구다’가 금나라를 세워 세력을 떨치기도 했지만, 후에 원에 복속되기도 했다. 조선 시대에는 ‘호’라고 불렀는데, 1627년 정묘호란, 1636년 병자호란이 그것이다. 이 용어는 모두 조선이 우월하다는 입장을 표현한 것으로, 지금은 여진족이 건국한 나라가 존재하지 않지만, 당시 조선과 청이라는 국가간 전쟁을, 국가의 운명을 걸고 싸웠던 전쟁을 난으로 규정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생각해 볼 문제다.
1588년 ‘누루하치’가 경제력을 바탕으로 여진을 통합하고 조일전쟁이 한창이던 1593년과 1598년 2차례나 2만 명의 파병을 제의했지만, 조선은 이민족이 조선에 들어왔을 때 생길 불상사를 우려해 이를 거절했다. 이에 여진이 세운 후금은 조선과 명의 견제가 없는 틈을 타 누루하치가 세력을 확장 크게 했다. 1595년 여진족이 조선 땅에서 인삼을 캐다 조선 군인들에게 죽임을 당한 일이 있었는데, 이때 조선을 침략하려 했지만 조선에서 먼저 사신을 보내 해명하여 긴장을 풀기도 했다. 1605년에는 누루하치가 국왕을 자처하고 대금(大金-후금)이라고 했다. 이때 조선 내부는 광해군의 외교정책이 부모같은 명의 은혜를 모르는 패륜 행위로 매도하였는데, 명을 저버리고 청을 따르려는 것에 반발한 것이었다. 1619년 광해군은 명 황제의 칙서를 받고 부득이 강홍립(姜弘立)을 후금을 치기 위해 보냈으나 후금과의 전투에서 9천여 명이 전사하는 피해를 입었고, 강홍립은 후금에 투항했다. 강홍립의 투항은 광해군의 밀지가 있었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밀지설’은 인조반정 세력이 광해군을 폄하하기 위해서 만든 방책이었다는 설도 있고, 1만 명의 군사 중 9천 명을 잃고, 어쩔 수 없는 투항이라고 보는 설도 있다.
서인 세력은 강홍립을 강로(姜虜-오랑캐), 반적(叛賊)으로 매도했지만, 광해군은 명과 후금 사이에서 실리외교를 폈는데, 1621년 후금이 선양을 점령하자 명은 조선에 군사·선박·군량 등을 요구했으나, 광해군은 이를 거절했다. 이에 신하들은 은혜를 모르는 처사라며 들고 일어나기도 했다. 오랫동안 재위하였으나 몹쓸 임금으로 평가하고 싶은 선조는 2명의 비와 6명의 후궁에게서 14남 11녀의 자녀를 두었다. 조선 최초로 후궁에게서 난 손자가 왕위를 계승했던 선조는 덕흥군의 아들로 덕흥군은 중종의 후궁 창빈 소생이었다. 선조는 자신이 방계였던 만큼 적장자를 왕위에 올리고 싶었다. 아끼던 신선군을 왕위에 올리려고 했지만, 일찍 죽음으로써 부득이 18세 후궁 소생인 광해군을 세자로 삼았다. 광해군은 의병봉기를 독려하는 등 분조로서 활약이 컸다. 피난지에만 머물렀던 선조는 위신이 땅에 떨어지자 광해군을 경계하기 시작했고, 명나라 분위기도 광해군에게 불리했다. 13년에 걸쳐 5차례나 세자책봉을 위한 사신을 명에 보냈지만 모두 거절당했다. 후비 인목대비가 영창대군을 낳자 세자를 바꿀 생각을 하게 된 것이다.
선조의 죽음으로 16년간 세자였던 광해군이 왕위에 올랐으나 명은 적장자가 아니라는 이유로, 형인 임해군을 제치고 왕이 된 것을 따지며 책봉을 미루었다. 명은 후금을 견제하기 위해 조선이 필요했고, 후금도 배후의 안전을 위해 조선과의 우호가 필요했다. 광해군은 청과 명 사이에서 중립 외교를 펼치면서 국가 안전을 최우선으로 삼았다. 하지만 명이 요동을 상실하자 광해군은 명과 거리를 두었다. 명나라가 선물과 칙서를 보내왔지만, 거부하자 서인들의 반발했고 심지어 선조를 독살했다는 유언비어까지 유포했다. 광해군은 형인 임해군과 영창대군을 귀양보내 살해하고, 인목대비를 경운궁에 유폐시켰다. 소문이 흉흉해지자 조카 정안군을 강화도에 위리안치시켰으며, 능창군은 목을 매 자살했고, 정안군도 화병으로 죽었다. 연이은 옥사, 경희궁 건립 등 대형 토목공사는 서인에게 정변의 명분을 주었다. 1623년 인조는 서인과 함께 군사행동을 통해 집권했다. 광해군은 강화도로 유배되었고, 그곳에서 청이 조선을 침공한 것을 지켜보았다. 청이 조선을 점령한 후 광해군을 다시 왕으로 세울 것을 염려한 서인들은 강화도 교동에서 제주도로 옮겼고, 1641년 7월, 광해군은 나이67세로 일생을 마쳤다.
후금의 1차 조선 침략은 1626년 누루하치가 죽고, 홍타이지가 태종으로 등극하면서 시작되었다. 1월 8일부터 파죽지세로 황주까지 밀고와 복종할 것을 제의했다. 전쟁이 장기화 할 경우 명의 배후 공격을 염려한 때문이었다. 이듬해 3월 3일 조선은 후금의 아우가 되기로 정묘화약을 맺었다. 그러나 조선은 비록 후금과 형제의 맹약을 체결했지만 내면적으로는 명과 동맹을 강화하여 후금을 견제했다. 여진족을 노적(奴賊)·호인(胡人)·호로(胡虜)·달로(㺚虜)라고 부르며 멸시했던 조선이 후금에 복종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홍타이지가 와중에 원의 옥쇄를 얻고는 국호를 대청, 연호를 숭덕(崇德)으로 바꾸고, 형제의 맹약을 군신관계로 요구했다. 강경 분위기였던 조선은 청의 침략을 피할 수 없었다.
1636년 12월 1일 홍타이지는 청병 7만 8천, 한병 2만, 몽골군 3만 등 12만 8천명의 군사로 압록강을 건넌지 불과 6일만에 한성에 도착했다. 1차 침입 때 남한산성에 수어청을 신설하고, 훈련도감을 개편하는 등 준비를 마쳤으므로 인조는 지구전을 계획하고 종실 가족들은 먼저 강화도로 보내고 자신도 피난하려고 했지만, 이미 청군이 행주산성과 양화진까지 진출해 차단하고 있어서 남한산성으로 들어갔다. 이후의 이야기는 김훈의 소설 「남한산성」과 같은 제목 영화에서 상세히 이야기되었듯이 청군이 13만인 데 비해, 우리 군은 많아도 2만을 넘지 않았고, 성안에는 식량도 50일분에 불과했다. 또한 종친인 능봉수(綾峯守)를 인조의 동생으로 속여 화친사로 보냈으나, 능봉수가 동생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되자 세자를 보내지 않으면 화친을 맺지 않겠다고 하여 화친은 깨졌으며, 이에 청군은 여러 차례 남한산성을 공격했으나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하자, 조선군을 고립시킬 작전에 돌입했고, 지방에서 또는 의병이 청군과 싸웠지만, 중과부적이거나 화약 등 보급이 미진하여 대부분 실패하고, 강화도로 피란했던 봉림대군 등 종실들은 강화유수 김경징의 판단 착오로 강화 내성이 함락되자 항복해 삼전도에 있던 청태종의 본진에 잡혀있었다. 강화도가 함락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인조는 세 번 무릎을 꿇고 아홉 번 머리를 조아리는 삼궤구고두례(三跪九叩頭禮)를 행해야 했고, 청은 그것을 기념해 ‘대청황제공덕비’를 세웠는데, 이것을 우리는 흔히 삼전도비라 부른다. 삼학사로 불리는 오달제(吳達濟)·윤집(尹集)·홍익한(洪翼漢)은 선양으로 끌려갔으며, 회유를 거부하자 모두 참살당했다. 책에는 시신 없이 요대와 주머니만 묻었다고 하는 오달제의 무덤 사진도 있다.
▢ 개항과 쇄국
1876년 개항 시기 혹은 갑오경장 이후를 근대로 보는 경우가 있는데, 외국이 조선에 처음 개항과 통상을 요구했던 것은 1832년 6월 영국의 ‘로드 암허스트’가 황해도 장연에 내항한 때였다. 산업혁명에 성공한 서양 세력들은 원료공급처와 상품 판매처가 필요했던 것이다. 조선에는 이 무렵 중국을 통해 들어온 프랑스 선교사 12명이 활동하고 있었는데, 천주교를 이적시한 조선이 이들 중 프랑스 선교사 9명을 처형하자 1866년 9월 11일 프랑스 군함 3척이 아산만에 도착해 한강을 거슬러 올라와 18일 함포사격을 개시했다. 그러나 그들은 함대가 들어가기는 곤란하다는 것을 알고, 9월 23일 청으로 돌아갔다. 로즈 함장은 일본 요코하마에 주둔 중이던 군함 7척과 1천5백 명의 병력을 이끌고 10월 3일 다시 조선으로 와 6일 강화도에 상륙 강화읍성을 점령하고 조선인 9천 명을 죽일 것이라고 협박했다. 18일 강화문수산성에서 조선군과 맞붙었는데, 프랑스군 3명을 사살하고 2명에게 부상을 입히는 전과도 거두었으나, 무기의 열세로 퇴각했다. 프랑스군은 성곽을 파괴하고 민가 30여 호를 불살랐지만, 예상치 못한 항전에 고전했다.
이 전투를 두고 프랑스는 약간의 약탈물을 획득했어도 ‘치명적인 실패’라고 규정했는데 소득이 없었다는 것이다. 북경주재 프랑스 공사가 대조선 공격을 주장했으나 본국으로부터 거부당하자 독일 상인을 고용해 대원군의 부친 남연군의 묘를 도굴하는 만행을 저지르기도 했다. 그러나 묘가 견고하여 도굴에 실패한 소식이 프랑스 정부에 알려지자 조선에서 탈출한 선교사 페롱을 본국으로 소환했다. 하지만 프랑스군은 철수하면서 강화도 궁전·관아·군사시설을 파괴하고, 80여문 대포, 6천여 정 화승총, 은괴 887.55㎏과 외규장각에 보관 중이던 189종 340여권의 의궤를 약탈해 갔다.
조선과 미국의 첫 접촉은 제너럴셔먼호 사건으로 시작되었다. 배에는 미국인과 영국인 24명 정도가 타고 있었는데, 1866년 7월 1일 백령도 두모포(豆毛浦)항에 정박하다가 6일 평안도 용강 앞바다에 나타나자 황주목사가 돌아갈 것을 권고하였으나 이들은 대동강으로 올라와 통상을 요구했다. 7월 12일 조선인 2명을 죽이고, 부녀자를 능욕했으며, 평안도관찰사 박규수(朴珪壽)가 파견한 이현익을 구금하기도 했다. 15일에는 배에 타고 있던 영국인 토마스가 상륙하여 관리들이 이에 항의하며 대포와 소총을 난사했다. 7월 20일에는 셔먼호가 지나가는 상선을 약탈하고 총을 발사해 평양군민 7명이 죽고, 5명이 부상당했다. 그러자 박규수는 유황과 염초로 화공을 퍼부어 배를 불태우고 선원 전원을 몰살시켰다. 견고한 함선에 신식무기를 장착했지만, 강물에 배가 좌초하면서 속수무책으로 당한 것이었다. 미국은 이듬해 군함 셔난도어호를 파견해 대동강 입구에서 진상을 조사했다. 이를 조선은 영토침략으로 규정해 포격을 가했다. 미국은 보복을 경고하면서 철수했다.
1871년 3월 나가사키에 모인 미국 함대 콜로라도호 등 5척의 군함과 1,230명의 군대가 조선을 들어왔다. 미군은 강화도 손들목, 덕진포 등에서 수로 측정 등을 했는데, 이에 조선은 영토 침입이라고 한 반면, 미국은 평화적 사명을 띤 탐측활동이라고 해 상반된 입장차를 보였다. 4월 23일 초지진에 상륙한데 이어 이튿날 덕진진을 점령하고 광성보를 공격했다. 조선군을 결사적으로 항전했지만, 350여명이 전사했고 미군은 3명 전사에 10여 명 부상에 그쳤다. 미군은 자신들의 위력을 과시한 만큼 조선정부가 협상에 응할 것을 기대했다. 그러나 조선은 거부했고 5월 16일 나가사키로 돌아갔다. 미군이 스스로 물러나자 조선은 이를 승리라고 생각했다. 이로써 ‘화친을 주장함은 곧 나라를 팔아먹는 것과 같다’는 척화비를 전국에 세웠다. 한편 미군은 프랑스군과 달리 전쟁 중 사망자를 묻어주고 부상자를 치료해 주었으며, 민간인을 약탈하는 등 피해도 주지 않았다.
어떤 의미에서는 이후에 있은 일본의 침략이 가장 가장 뼈아프게 느껴지는데 그것은 그 침략이 식민 지배로 이어졌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1875년 8월 21일 일본의 운요호(雲揚號)가 강화도 난지도 부근에 도착했다. 함장 이노우에 료우스케(井上良馨)는 담수를 구한다는 핑계로 초지진에 접근했다. 그러자 초지진 수병들이 일제히 사격을 가했다. 그러나 물이 얕고 뻘이 깊어서 운요호는 8월 29일 나가사키로 귀환했는데, 이를 운요호 사건 또는 강화도 사건이라고 부른다. 이해 연말에 일본은 공관과 거류민 보호를 구실로 다시 부산에 입항하여 1주일 정도 머물다 인천에 도착해 조선정부에 협상을 요구했다.
이듬해 1월 5일 신헌(申櫶)을 접견대사, 윤자승(尹滋承, 1815~?))을 접견부관으로 임명해 회담을 시작했다. 1월 17일 첫 번째 회담이 열리기 전에 일본은 텐노 즉위를 기념한다며 함포 90발을 발사하는 등 공포 분위기를 조성하고 위협했으며, 2월 27일에 ‘강화도조약’이 체결되었다. 이로써 삼포에 이은 부산·인천·원산 개항과 해안측량권 인정, 미곡수출 허가, 일본 화폐 유통 등을 규정하게 되어 일본의 조선 침략 발판을 제공했다.
▢ 한국전쟁(6.25동란)
6.25동란 또는 6.25사변이라고 하였는데, 근래에는 「한국전쟁」이라고 한다. 이 전쟁은 내전이라는 견해와 국제전이라는 시각이 대립하고 있다. 내전적 성격이 강하지만, 국제적인 냉전 영향이 복합되면서 국제적 내전이라는 주장도 있다. 내전으로 출발했지만, 미국·UN·중국·소련이 개입함으로써 내전에서 국제전으로 전환했다는 견해도 있다. 전쟁으로 38선이 그어지고 분단이 고착화되었다고 생각하지만, 1894년 농민반란으로 혼란이 가중되어 청나라와 일본이 대립하고 있을 때 영국이 서울을 중심지대로 하고 북쪽은 청나라가, 남쪽은 일본이 점령하는 공동점령안을 내놓은 바가 있다. 하지만 일본이 거절하고는 청일전쟁을 일으켰고, 아관파천 후에는 북쪽은 러시아가, 남쪽은 일본이 점유하는 방안도 있었지만, 이번에는 러시아가 거절함으로써, 실현되지는 못했다. 38선을 중심으로 한 분할안은 광복 이후에 구체화 되었다.
해방 후는 혼란 속에 우익과 좌익의 갈등이 심했다. 1945년 12월 27일 동아일보가 ‘미국은 한국의 즉시 독립을 주장한 반면, 소련은 남북 전체에 신탁통치를 주장한다.’고 보도했는데, 확실치 않은 이 보도가 소련이 우리나라를 신탁통치하려는 것으로 인식되면서 반소·반공 분위기가 고양되었다. 우익은 반탁, 공산당은 반탁을 반대하는(찬탁) 모스크바의 결정을 지지한다는 입장이었다. 반탁은 애국, 찬탁은 매국이라는 등식이 성립된 것이다. 이렇게 신탁통치를 둘러싸고 대립이 극에 이르자 ‘미소공동위원회’에서 이 문제를 해결키로 했으나, 미국이 인구비례에 의한 결정을 주장하면서, 인구가 남쪽의 1/2에 불과했던 북쪽이 받아들이지 않았다. 또 소련은 미·소 양군의 철군을 주장했지만, 북쪽에 비해 군대가 확립되지 않았던 남측과 미국이 받아들이지 않았다.
결국 1947년 9월 미국은 한국 문제를 UN에 이관했고 ‘가능한 지역에서만의 총선거’안이 찬성 32, 반대 2, 기권 11로 통과되었다. 이듬해 4월 김구와 김규식이 평양으로 가 김일성을 만났으나 성과를 거두지 못했고, 남한 단독선거 반대, 미군 철수, 극우테러 반대 등을 내건 투쟁이 제주도에서 일어났다.(4.3제주 항쟁), 5월 10일 총선거, 8월 15일 대한민국 건립, 9월 9일 북쪽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수립하여 분단이 고착되고 말았다.
한국전쟁 전 상황은 언제봐도 지금보다도 더 복잡한 것 같다. 그런데 북한은 남쪽이 북침했다고 주장하는데, 그것이 무슨 근거가 있을까? 그렇게 믿는 남쪽 사람은 아무도 없겠지만, 김일성이 스탈린과 모택동을 찾아가 조국통일을 위해 남쪽과 전쟁테니 만약에 미국이 개입해 북한이 위기에 처할 경우에는 지원해 줄 것을 요청해 승인을 받을 무렵, 1949년 2월 이승만은 북진통일을 의사를 밝혔다. 7월 국방부 신성모(申性模) 장관은 대통령의 명령만 있으면 하루 안에 평양과 원산을 점령할 수 있다고 호언장담했다. 10월 7일 이승만이 3일 안에 평양을 점령할 수 있지만, 미국의 경고로 참고 있다고도 했다. 미국은 북진을 우려해 한국군을 10만 명 선으로 제한했고, 공군 창설을 반대하고 무기도 제공하지 않았다. 이승만과 김일성 모두 한반도 전체를 자신의 영향권 아래에 두려고 했던만큼 이제 전쟁은 피할 수 없게 되었다.
태풍 엘시로 비바람이 내려치던 6월 25일 새벽 4시, 북한군 7개 사단 11만 명과 기갑여단 240대 전차가 남쪽으로 내려왔다. 38선 근처에서는 그 이전에도 수시로 교전이 있었으나, 이번에는 먼저 옹진반도에서 포를 쏘기 시작해 남측의 공격을 유도한 다음에 북침의 구실로 삼으려 했다. 그러나 여의치 않자 개성, 의정부, 춘천, 강릉 방면에서 전면전을 감행해 온 것이다. 전쟁이 일어나면 점심은 평양에서 저녁은 신의주에서 먹겠다고 큰소리쳤던 이승만은 이날 10시에도 한강에서 낚시를 즐겼다. 상황이 급박함을 깨닫자, 녹음방송으로 ‘서울사수, 북진공격’을 외쳤고, 27일 02시에 서울을 탈출해 수원-대전을 거쳐 7월 1일 새벽에 다시 부산으로 향했다. 그것도 북한군 출현을 염려해 익산-목포를 거쳐서 배로 2일 밤에 부산에 도착했다. 대통령이 없는 가운데 육군참모총장 채병덕은 6월 28일 새벽에 한강철교와 인도교, 광진교의 폭파를 명령했고, 이로 인해 병력과 장비 후송은 물론 4천여 명의 서울시민이 폭사하거나 물에 빠져 죽었다.
6월 25일 08시 북한군 남침소식을 접수한 미국대사 무쵸는 9시경 미국국무부에 보고했다. 국무부는 2시간도 채 되지 않아 한국 문제를 UN을 통해 해결한다는 입장을 정리해 26일 UN 긴급안전보상이사회가 열렸다. 소련이 불참하고 유고슬라비아는 기권했지만, 나머지 9개국의 찬성으로 북한은 38도선 이북으로 퇴각하라고 결정했다. 소련이 참석하지 않은 이유에 대해 여러 가지 설이 있지만, 거부권을 행사할 경우 소련이 북한과 공모했다는 인상을 주지 않기 위해서라는 것이 설득력이 있는 것 같다. 27일 극동군사령관 맥아드가 현지조사단을 파견하고, 29일 자신이 직접 수원비행장에 왔다. 상황을 살핀 뒤에 도쿄로 돌아가 트루먼 대통령에게 지상군 파견을 건의했고, 7월 1일 최초의 미 지상군이 부산에 상륙했다.
우리는 흔히 UN 회원군 16개국이 전쟁에 참여한 것으로 알고 있지만, 이들 국가는 전투병을,다른 5개국(노르웨이·덴마크·스웨덴·이탈리아·인도)은 의표지원단을 파견했다. 그러나 육군 50.3%, 공군 93.9%, 해군의 85.9%가 미군이었던 만큼 사실상 연합군은 미군이나 다름없었다. 타이완에서도 3.3천 명 지상군을 파견하겠다고 했으나, 정치적 문제를 고려하여 미국이 거부했다. 전쟁이 끝난 뒤에 빨치산이라는 말이 생겼는데, 잔류 인민군들이라고 생각하지만, 북한군이 퇴각한 뒤 북한에 협력했던 자들을 처벌하자 이들이 보복을 피해 산으로 피신하여 유격대와 합류해 빨치산이 되었던 자들도 무수히 많다.
9월 15일 261척의 함대와 7만 5천 명의 병력을 지휘한 맥아더 장군은 인천상륙작전을 감행했고, 9월 28일에 서울을 수복했다. 이승만 정부는 폭파한 한강 다리를 건너 피난 갔던 사람은 공산주의에 반대했던 사람으로 인정했지만, 피난도 월북도 하지 못한 사람들은 부역자로 인정해 처형하거나 심한 차별을 주었다. 피난을 사실상 불가능하게 하고도 그 책임은 서울에 남은 사람들에게 덧씌운 것이다. 9월 30일 맥아더는 북한에 항복을 권고했지만, 김일성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튿날 국군 3사단이 38도선을 넘어 북진을 시작했고, 미 8군도 10월 3일 진격했다. 국군이 북으로 진격한 그 날이 바로 국군의 날로 기념하는 날이다.
▢ 베트남 전쟁
중국은 베트남을 남쪽의 오랑캐라 하여 남만(南蠻)이라고 불렀고, 우리나라를 동이(東夷)라 하여 동쪽의 오랑캐라고 했다. 같은 몽골계로 유교를 받아들여 3년상을 치르기도 했으며, 고려와 조선이 소중화(小中華)를 자처했던 것처럼, 청나라는 ‘변발한 이적(夷狄)의 나라’라고 하고, 스스로 대남(大南)이라고 했던 베트남이다. 프랑스 식민지와 일본 지배를 받았던 것도 우리와 별로 다르지 않다.
한국전쟁 때 미국은 바로 지상군을 파견했지만, 1945년부터 1975년까지 30년간 지속된 베트남 전쟁에서 미국은 지상군 투입을 자제하면서 문제를 해결하려다 실패하자, 전면전으로 나선 차이가 있고, 어느 국가가 다른 국가를 침공한 침략전쟁이 아니라는 점에서 한국전쟁과는 다르다. 그러나 베트남은 통일을 이룬 반면, 우리는 아직도 분단상태가 고착되어 있다는 점은 다르다. 베트남 영토는 한반도의 1.5배인 33만㎢이고 국도의 73%가 산악지대이고, 남북의 길이가 1,650㎞로 우리의 2배다.
베트남 역사는 기원전 214년 진시황이 베트남을 통치하기 시작한 이래 천 년 이상 중국의 지배를 받다가, 938년 백등강 전투에서 승리해 이듬해 응오 꾸엔(吳權)이 독립왕조를 세우면서 중국으로부터 자립했다. 18세기 메콩델타 지역으로 확대하고 19세기에 남북으로 길고 가늘게 뻗은 형태가 되었다. 1858년 프랑스는 기독교 탄압을 방지한다는 목적으로 베트남을 침공했고, 1899년 베트남, 캄보디아, 라오스는 인도차이나 연방을 구성해 대응했으나, 1940년 일본이 인도차이나를 점령하면서 일본의 지배를 받기도 했다. 1941년 공산당이 중심이 되어 프랑스와 일본에 대항하기 위한 통일전선인 ‘베트민’이 미국의 지원을 받아 결성되었는데, 이들이 훗날 미국의 상대가 될 것을 미국은 예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일본이 패배하고 1945년 9월 2일 독립했으나, 국제사회의 승인을 받지 못했는데 연합국이었던 프랑스가 베트남 지배 의지를 버리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결국 포스탐회담에서 한국의 38도선이 상정된 것과 같이, 16도선 남쪽은 영국이, 북쪽은 중국이 점령하기로 했다. 프랑스는 영국의 지원을 얻어냈다. 하지만 프랑스와 인도차이나 간에 전쟁이 발발했다. 프랑스는 미국에 지원을 요청했지만, 미국은 한국전쟁 참전으로 형편이 아니었다. 프랑스가 쉽게 이길 것으로 예상했으나, 베트민의 저항도 만만치 않았다. 제네바협정으로 17도 위쪽은 호쩌민 정부가, 남쪽은 프랑스가 통치토록 결정됐다. 1956년 7월 총선거를 실시했지만, 미국은 베트남 절반이 공산화될 경우, 중국의 세력이 확대될 것을 염려해 협정에 서명하지 않았다.
미국이 베트남전에 개입한 것은 전략적·경제적 가치 때문이 아니었다. 미국은 사회주의 세력을 무력화하기 위해 불가피하다고, 베트남 내전에서 공산주의 세력이 승리할 경우는 인도차이나가 차례로 공산화될 것이라는 도미노 이론과 중국 팽창을 막고, 일본의 공산화를 방지하려면 베트남의 존재가 필요했다. 1955년 남베트남은 미국의 지원을 받아 응오 딘 지엠(吳廷琰)정권이 수립되었다. 지엠은 족벌정치, 언론탄압, 결사자유 탄압 등 독재정치를 폈지만, 철저한 반공정책으로 미국의 지지를 받았다. 그러나 견디다 못한 민중들은 1960년 1월 대규모 봉기를 일으켰고, 남베트남에는 민족해방전선이 결성되었다. 이들 비엣 콩을 비하하여 ‘베트콩’이라고 하며, 11월 쿠데타로 지엠은 손이 뒤로 묶인 채 살해됐다.
통킹만 전투, 크리스마스 폭격 등 수많은 전투가 있은 뒤, 1975년 3월 티우에 대통령은 금괴 2톤을 가지고 미국으로 도망갔다. 4월 28일 쯔엉 반 민(楊文明) 대통령은 미국이 베트남에서 떠날 것을 요구했고, 이틀 후 무조건 항복을 선언해 전쟁은 끝났다. 자신들이 참전한 전쟁 중에 가장 긴 전쟁을 치르고도 패전의 불명예를 기록했다. 베트남 전쟁은 2차 세계대전에서 연합군이 사용한 폭탄의 1.5배, 히로시마에 원폭 600개에 해당하는 폭탄과 다이옥신 고엽제를 비롯한 생화학 무기 사용으로 베트남인 360만이 사망했다. 미국의 피해도 막대했는데, 미군 5만 6천, 부상 36만, 70여만 명의 정신이상, 8만여 명의 고엽제 후유증 환자, 비행기 3,719대, 헬리콥터 4,869대가 파괴됐다. 전쟁 비용 1,400억 달러는 한국전쟁의 3배, 2차 세계대전의 4배가 넘는 액수다.
미군 다음으로 거의 유일하게 가장 많은 군대를 파견한 한국군은 1965년부터 1973년 사이에 325,517명을 파견했고, 그중 5,099명이 전투 등으로 사망했다. 하지만 당시 한국군의 대우는 참전국 중 가장 낮은 수준으로 소장의 월급이 354달러였는데, 타일랜드 소위가 389달러, 핀리핀 소위는 442달러였다. 이는 한국의 1인당 GNP가 105달러 수출액 1억 1,900달러에 불과해 이들 국가보다도 적었기 때문이다. 미군 병사 1명의 유지비용으로 한국군 43명에게 월급을 줄 수 있었다. 하지만 이 수입으로 한국경제는 도약을 기틀을 마련했다.
전후 회복이 필요한 베트남에 한국은 병원과 학교를 지어주었다. 평화마을을 건립하여 우호증진을 위해 노력하고도 있다. 민간이나 언론에서는 베트남인 학살에 대한 진상규명을 주장하지만, 국가차원에서 공식조사를 수행하지는 않고 있다. 물론 베트남 정부는 1992년 12월 22일 우리나라와 수교하면서 “베트남은 전승국이기 때문에 한국의 사과를 받을 필요가 없다”며 배상문제를 언급하지 않았다. 또 “과거를 딛고 미래를 보자”며 과거사에 대한 논의에 반대했다. 그렇다고 베트남인들이 우리 정부가 사실을 확인하고 사죄하는 것까지 포기한 것은 아닐 것이다. 우리는 일제 강점기 가해자와 피해자 관계를 들추며 일본에 대한 원한을 잊지 못하고 있다. 또 노근리 사건에 대한 진상규명과 미국의 사죄를 요구하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베트남에 어떤 자세여야 할까? 고민하고 용서를 빌어야할 문제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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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우표 없는 편지 원문보기 글쓴이: 청풍명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