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장에도 체온이 있다
글을 쓰다가 문득 손을 멈춘다. 마음에 드는 낱말 하나가 떠오르지 않아서다. 지웠다가 다시 쓰기를 몇 번, 종일 붙들고 있던 문장이 끝내 마음에 들지 않는 날도 있다. 그런데 인공지능은 몇 초 만에 그럴듯한 글 한 편을 내놓는다. 어쩌면 나보다 문장을 더 잘 다듬을지도 모른다. 조금은 얄밉고, 조금은 부럽다.
시월의 어느 오후, 대구문화예술회관에서 열린 인문학 세미나를 찾았다. ‘인공지능 시대에 글을 쓰는 의미’라는 주제가 마음을 끌었다. 최재목 교수의 강연을 들으며 오래전부터 품어 온 물음 하나를 다시 꺼내 보았다. 나는 왜 글을 쓰는가. 강연장 화면에 라이너 마리아 릴케의 시가 떠올랐다. 인간의 존재와 상실을 생각하게 하는 문장들이었다. 시를 읽다가 엉뚱하게도 어머니 생각이 났다. 오래전 부엌에서 저녁을 짓던 어머니의 뒷모습. 굽은 어깨와 낡은 앞치마, 솥뚜껑을 열 때마다 피어오르던 하얀 김. 이제는 만질 수 없는 풍경이다.
인공지능에게 어머니를 그리워하는 글을 부탁하면 나보다 훨씬 아름답게 써 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문장을 읽는 순간 가슴 한쪽이 저려 오는 까닭까지 설명할 수 있을까. 그리움은 낱말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낱말을 불러낸 세월에 있을 것이다. 생각해 보면 내 글은 늘 조금 모자랐다. 어느 대목은 지나치게 길고, 어느 문장은 끝을 맺지 못한 채 망설였다. 젊은 날 쓴 원고를 펼치면 얼굴이 붉어진다. 그렇다고 모두 고쳐 쓰고 싶지는 않다. 그 서툰 문장 속에 그때의 내가 있기 때문이다. 삶도 그렇지 않은가. 지우고 싶은 날들이 있었지만 그날들이 빠진다면 지금의 나는 얼마나 낯설어질까.
우리는 누구나 한 권의 미완성 원고를 품고 산다. 어떤 페이지에는 웃음이 있고 어떤 페이지에는 차마 읽지 못할 사연이 있다. 삶에는 퇴고가 허락되지 않는 순간도 있다. 그래서 사람은 뒤늦게 후회하고, 용서를 배우고, 끝내 말하지 못한 마음을 글로 남기는지도 모른다.
인공지능이 두려운 것은 글을 잘 써서가 아니다. 어느 날 내가 생각하는 수고마저 귀찮아할까 봐서다. 쉽게 얻은 문장에 익숙해져 오래 바라보고 기다리는 즐거움을 잃어버릴까 봐서다. 글을 쓰는 동안 나는 자주 멈춘다. 창밖의 나무를 보기도 하고, 오래된 기억 속을 서성이기도 한다. 그 쓸모없어 보이는 시간이 내게는 글의 가장 깊은 자리다.
강연장을 나서니 가을이 한창이었다. 바람이 불 때마다 나뭇잎이 떨어졌다. 한 잎은 곧장 땅으로 내려앉고, 다른 한 잎은 한참을 허공에서 맴돌았다. 같은 나무에서 자랐어도 떨어지는 모양은 저마다 달랐다. 사람의 문장도 저러하면 좋겠다. 조금 비뚤어져도, 더디게 내려앉아도 제 삶의 바람을 품고 있다면.
집으로 돌아와 책상 앞에 앉았다. 쓰다 만 원고가 그대로 놓여 있었다. 다시 읽으니 여전히 어설펐다. 몇 군데를 고치다가 그냥 두었다. 문득 모든 문장을 반듯하게 세울 필요는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굽은 나무에도 그늘이 있고, 금이 간 그릇에도 오래된 손길이 남아 있지 않은가.
나는 앞으로도 인공지능의 도움을 받을 것이다. 모르는 것을 묻고 막힌 생각의 실마리도 찾을 것이다. 다만 내 마음까지 맡기지는 않으려 한다. 어머니를 그리워하는 일도, 낙엽 앞에서 공연히 눈시울이 뜨거워지는 일도 내 몫으로 남겨 두고 싶다. 밤이 깊었다. 원고지 위에 한 문장을 적었다가 지웠다. 다시 적었다. 이번에는 지우지 않았다. 조금 서툴렀지만, 그 문장에는 오늘 하루를 살아낸 내 마음이 묻어 있었다. 손끝으로 글자를 가만히 쓸어 보았다. 아직 따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