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샘통문 28]아름다운 사람(48)-『머내여지도』 제작팀
고산자 김정호와 <대동여지도>를 모르는 한국인들은 아마도 없을 것이다. 영화도 나왔다. 그런데 최근에 『우리 손으로 만든 머내여지도』(머내여지도팀 지음, 한울 2022년 펴냄, 374쪽)라는, 향토인문지리서에 比肩되는 책을 읽고 정말 깜짝 놀랐다. 정보화사회라는 21세기에 이런 책을 공들여내는 ‘公義로운’ 사람들이 있었다. ‘여지도輿地圖’가 목판 지도임은 알겠으나, 대체 듣지도 보지도 못한 ‘머내’는 무엇일까? 머내는 용인특례시 수지구의 고기동과 동천동을 통칭하는 옛 地名이자, 현재도 통용되는 순우리말 땅이름이다. 수도권에 사는 사람이라면 '음식타운'으로 유명한 고기동은 들어보거나 가보았을 것이다.
내 고향은 전북 任實 하고도 獒樹(개 오, 나무 수. 고려초 우리나라 최초의 반려견 ‘누렁이’가 불길에 우리나라 최초의 반려인인 주인 金蓋仁을 구하고 죽자 김개인이 슬피 울며 무덤을 만들고 노래를 불렀다. 그 노래가 ‘犬墳曲’인데 曲名만 있고 노랫말이 전해지지 않아 무척 아쉽다. 義犬墓는 조선 세조때문신 노숙동의 한시에도 나오듯, 유지 보전돼 있었다. 평소 몸에 지니고 갖고 다니던 지팡이를 무덤 가운데 꽂았는데, 그게 싹이 나 노거수가 되었기에 '개나무의 고을' 이라는 '오수' 지명이 된 것이다. 또한 1022년(임술년) 군민들이 힘을 모아 세운 義犬碑가 현존하고 있다.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의견비로 추정된다. 이 설화가 아닌 실화는 1254년 최자가 지은 <보한집>에 고스란히 나온다)이다. 제2의 고향은 42년 동안 산 서울일 것이나, 중고등학교를 다닌 全州를 치고 싶다. ‘머내’라는 땅이름을 알고 있었던 것은 아내의 집이 고기초등학교 옆에 있기 때문이다. 어떤 기대도 갖지 않고 머리말 ‘피어라, 머내여지도!’를 시작으로 300쪽이 넘는 유례가 거의 없을 듯한 ‘독특한’ 책을 읽어가는데, 5년이 넘는 세월에 걸친 제작팀 10여명의 발품과 수고로움에 경의를 몇 번이고 표했다. 솔직히 이건 보통 일이 아니고 하나의 ‘사건’이라 하겠다. 요즘 말로는 ‘대박’이다.
맨먼저 ‘머내’ 땅이름의 語源과 由來를 通時的으로 규명하는데, 조선시대 옛 지도에 ‘험천險川’ 또는 ‘원천遠川’ 등으로 표기돼 있음을 알게 된다. 그 노력도 가상한 일이지만, 丙子胡亂때 전투지(남한산성에 고립된 인조를 구하기 위해 근왕병들이 집결)로 후대에 세워 기렸다는 ‘위령비’를 찾아나서는 데에는 기가 질렸다. 제작팀들은 누구인가? 머내에 살고 있는 몇몇이 뜻을 모아, 수차례 회의와 답사 그리고 집필이 이렇게 짱짱하고 뜻있는 열매를 낳은 것이다. 이들을 ‘깨시민’들이라고 해야 할까. 이건 용인시에서 특별상을 줘도 모자란 판, 나라에서 큰 상을 줘야 마땅하다. 이들의 노력이 아니었다면, 이곳의 역사와 수많은 기억들이 영영 滅失되고 말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전국에 이런 곳이 무릇 기하일 것인가.
‘특별상’ 이유는 여러 개가 있겠지만, 그중에도 가장 돋보이는 건, 100년만에 새로운 자료와 주민들의 口述로 복원된 1919년 3·1만세운동이다. <머내만세운동>으로 불리는 이 사건은 3월 29일 지역주민들이 자발적으로 계획하여 일으킨, 아마도 전국적으로도 사례가 없을 듯하다. 槪要만이라도 살펴보자. 3월 29일 아침, 현재의 고기초교에서 한 집에 한 명씩은 동참하자는 구장(현재의 이장)의 권유로 100여명이 모여 동천동 등 여러 마을을 거치며 용인군 중심지(현재의 읍삼면)를 향해 10km가 넘는 길을 행진하는데, 시위대가 점점 불어나 마지막 해산지점에서는 1500-2000명에 이르렀다고 한다. 태극기는 부녀자들이 집안에서 일일이 만들었다고 후손들이 생생하게 증언하고 있다. 시위대를 해산시키는 과정에서 2명은 총격으로 사망하고, 實刑을 살기도 하고 16명은 태형(笞刑) 90대를 맞고 풀려나기도 했다. <범죄인명부>라는 명칭의 문건이 2018년 11월 용인시 수지구청 문서고에서 발견돼 그 실상이 100년만에 밝혀져 2019년 3월 1일 15명이 대통령표창을 받게 됐다. 머내지역 곳곳에 기념표지석들이 세워진 것도 그 덕분. 드라마틱한 이야기이지 않은가. 이 지역주민들은 해마다 그날(3월 29일) 그 길(만세행진 길)을 그대로 따라 걸으며, 선인들의 고귀한 운동을 기린다고 한다.
아무튼, 제5부 <머내열전>의 이우철 신부 이야기 ‘머내 천주교의 개척자’는 종교와 흥미를 넘어 숙연해지기까지 했다. ‘이우철 평전’ 등을 펴냄으로써 전국민이 이우철 신부의 거룩한 삶을 알게 해야 할 것이다. 삼전도비를 쓴 이경석 선생과 그의 후손들 이야기도 들어봐야 하지만, ‘머내의 화타’ ‘머내의 싸움꾼’ ‘100년 전 동막골 한의사’ 이야기는 휴먼 스토리로 압권이다. 이 책은 故鄕으로 귀향한지 6년차인 나에게 내가 할 일이 무엇인지를 깨우치게 하는 것같다. 나로 하여금 ‘무능력’을 자꾸 한탄하며, 한숨을 쉬게 했다. 유홍준 선생이 ‘우리나라는 전국토가 박물관’이라고 하지 않았는가. 그렇다. 이 모든 이야기와 자료들이 사라지기 전에 우리는 후손들에게 이를 전해야 할 의무가 있지 않은가. 지금, 여기, 우리의 이야기가 기록돼야 할 當爲는 얼마든지 있다.
대부분의 수도권지역, 난개발의 대명사가 된 신도시 아파트촌에도 이런 역사와 사람의 숨결이 생생히 살아 숨쉬고 있었고, 지금도 숨쉬고 있다는 것을 기록한 이런 문건이 값진 까닭이다. 아, 어쩌면 현재 인구멸실 위기에 몰린 이 땅의 농촌지역 역사와 기록이야기가 더 시급하고 더 중요하지 않을까 싶다. ‘記憶과 記錄 ’의 관계는 언제나 멀기도 하고 가깝기도 하다. 노무현 대통령이 “기록은 역사입니다”라고 쓴 葉書를 지금도 나는 갖고 있다. 거듭 ‘여지도’ 제작팀들의 노고에 찬사와 경의를 표한다. 특히 본인은 겸손하게 아니라고 하지만, 틀림없이 대표집필한 이는 제작팀의 언론인 출신 김창희씨일 듯하다. 그는 아홉 살때 돌아가신 아버지의 궤적을 찾아 6년 동안 온갖 지역을 더트고, 아버지를 기억하는 수많은 사람들의 증언을 듣고, 아버지가 찍은 수많은 사진자료를 찾아내 『 아버지를 찾아서』라는 멋드러진 효도책을 낸 저자이기도 하다. 좌우지간 “머내여지도” 짱!
전라고6회 동창회 | [찬샘통문 23]아름다운 사람(47)-아버지를 살려내다 - Daum 카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