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3844
5월1일[부활 제5주간 수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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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를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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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youtu.be/w20yqgusFPA
[살레시오회 양정식 마르코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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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지금 하고 있는 이 일을 통해 내가 성장하고, 내가 성화됩니다!>
요즘 이런저런 육체노동을 자주 하면서 깨닫는 바가 참으로 많습니다. 일이라는 것, 얼마나 고마운 것인지? 가끔 왜 사나? 싶을 때, 우울감에 젖어들 때, 만사 제쳐놓고 육체노동에 한번 뛰어들어 보십시오.
일을 설렁설렁 그냥 하는 것이 아니라 온전히 몰입할 때, 완전히 헌신할 때, 거기서 오는 상쾌함이 얼마나 큰지요? 고통이나 슬픔을 극복하기 위한 가장 좋은 치료제는 가치있고 의미있는 일에 몰입하는 것임을 확신하고 있습니다.
곰곰이 생각해보니 일, 노동, 근로라는 것이 보통 중요한 것이 아니더군요. 눈만 뜨면 매일, 그리고 평생토록 되풀이해야 하는 일, 그 일이 정말 가치 있고 동시에 재미있으며, 더불어 동료 인간과 세상에 도움이 되고, 더 나아가서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는 일이라면, 또한 일한 만큼의 정당한 대우를 받는다면, 일하는 사람이 얼마나 보람되고 기쁘겠습니까?
인간은 그런 것 같습니다. 자신이 하는 일을 통해 자신의 존재 가치를 증명합니다. 일을 통해 한 존재로서 자부심과 자긍심을 느낍니다. 일로 인해 한 존재가 활짝 꽃 피어나며 충만한 인생을 엮어갑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 한국의 노동 현실을 살펴보면 너무나 암담하다 못해 참담합니다. 언제부턴가 우리 사회 안에서 점점 고착화되어가는 정규직 비정규직의 구분! 그로 인한 극도의 차별대우와 상실감! 틈만 나면 자행되는 해고! 살기 위한 눈물겨운 몸부림!
뿐만 아닙니다. 우리나라는 아직도 여러 측면의 계측에서 불명예를 독차지하고 있습니다. 국가별 노동시간을 따지면 최상위층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산업재해로 인한 사망률도 상상을 초월합니다. 이토록 참혹한 현실이 우리 한국의 자화상입니다.
더 우리를 힘겹게 하는 일이 한 가지 있습니다. 오늘날 이 땅의 젊은이들에게 있어 취직자리 구하기는 하늘의 별따기입니다. 얼마나 많은 청년들이 면접 트라우마로 인해 고통을 당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얼마나 많은 청년들이 삶과 죽음 사이로 난 아슬아슬한 벼랑길의 끝에 서 있는지 모릅니다.
고통과 슬픔은 취직하고 나서도 끊이지 않습니다. 상식이 통하는 직장, 모든 구성원들이 존중받는 직장을 꿈꿨지만 현실은 어디 그런가요? 근로자들은 경영인들의 부속품처럼 쉴새 없이 움직여야 합니다.
의아해 하실지 모르겠지만 노동에도 영성이 있습니다. ‘노동의 영성’입니다.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께서 사용하신 용어입니다.
‘노동의 영성’, 그 핵심은 아주 쉽습니다. 인간은 자신의 노동을 통해 창조주시며 구세주이신 하느님께 가까이 나아간다는 것입니다. 결국 인간은 자신의 일을 통해 인간과 세상을 위한 하느님의 구원 계획에 참여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열심히 노동하셨던 한 인간이셨습니다. 예수님은 출가하시기 전까지 양부 요셉을 따라 장인(匠人)으로서 매일 이마에 비지땀을 흘리며 사셨습니다.
인간은 자신의 일을 통하여 세상을 변화시켜나갈 뿐 아니라 자기 자신을 완성시켜나갑니다. 뿐만 아니라 하느님 창조사업을 계승합니다. 따라서 오늘 노동하는 우리에게 주어진 중요한 과제 하나는 자신이 하는 일에 대한 가치 부여입니다. 그 어떤 일에 종사하든 자신의 일에 중요성을 부여해야 합니다. 자긍심을 지녀야 합니다.
오늘 노동자 성 요셉 기념일을 맞아 세상의 모든 노동자들의 노고에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오늘 하루 노동자 성 요셉의 전구에 힘입어 은총 충만한 하루, 새로운 에너지를 충만히 부여받는 행복한 하루가 되셨으면 좋겠습니다.
여러분들이 하시는 모든 일들, 세상을 위해, 언젠가 도래할 하느님 나라 건설을 위해 꼭 필요한 일임을 확신하십시오. 어려운 일이 될지 모르겠지만, 내가 매일 되풀이하는 이 일을 통해 내가 성장하고, 내가 성화되며, 내가 하느님 창조사업에 참여한다는 의식을 지니시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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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el-aNGoxovQ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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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청을 위해 먼저 그분의 청에 집중해야 하는 이유>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은 포도나무이고 우리는 가지라고 하시며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내 안에 머무르고 내 말이 너희 안에 머무르면, 너희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청하여라. 너희에게 그대로 이루어질 것이다.”
우리가 청하는 것이 다 들어지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런데 조건이 있습니다. 그분의 말씀이 우리 안에 머물고 우리가 그분 말씀 안에 머물러야 합니다. 그분 말씀에 순종할 줄 알아야 청을 들어주시겠다는 말씀입니다. 결론은 간단합니다. 내가 원하는 것을 청하기 전에 그분의 청이 무엇인지 묻고내 안에서 이뤄지게 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전에 어떤 청년을 제가 도와주고 있었는데 그 청년은 점점 거짓말과 핑계로 일관하며 나아지는 모습이 없었습니다. 이번에도 작지 않은 액수를 청하기에 그 사실관계를 알아보았습니다. ‘거짓말’이었습니다. 사제에게 사기를 치는 것이었습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느냐고 하니까 이번에는 ‘핑계’를 대었습니다. 잘못하기는 하였지만, 절박한 상황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거짓말과 핑계는 아담과 하와 때부터 나아지기 싫다는 표현입니다. 그런 사람에게 청을 들어줄 수는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면 내가 바보 멍청이가 되고 그 사람은 교만함에 더 큰 사기를 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이런 상황이라면 그 사람이 돈이 없어서 교도소에 가야 한다면 그것이 오히려 그 사람에게 유익한 일이 될 것입니다.
주님 안에 머물기 위해서는 먼저 나 자신을 정화해야 합니다. 절대 거짓말이나 핑계가 있어서는 안 됩니다. 이것은 노력하면 되는 일입니다. 그래서 주님께 머물기 위해서는 먼저 말씀을 많이 읽고 묵상하여 정직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당신께 붙어있으라고 하시며 “너희는 내가 너희에게 한 말로 이미 깨끗하게 되었다. 내 안에 머물러라. 나도 너희 안에 머무르겠다.”라고 하십니다. 사탄은 거짓의 아버지입니다. 누군가에게 무언가를 청한다면 그 사람 앞에서는 절대 거짓이나 핑계가 있어서는 안 됩니다.
그다음에는 그 사람이 원하는 것을 들어 주어야 합니다. 저는 거짓이나 핑계를 절대 대지 말고 무언가 지금 할 수 있는 일부터 하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있었습니다. 그 사람은 내 말을 자기 마음에 담아놓기를 원치 않았습니다. 그러며 계속 자신이 원하는 것만 청합니다. 다급한 처지만 제시하면서.
파올로 코엘료의 ‘연금술사’에서 현자는 자신을 찾아온 사람에게 그가 원하는 것을 들어줄 테니 먼저 기름 두 방울이 든 숟가락을 들고 성을 한 바퀴 구경하고 오라고 합니다. 기름을 흘리지 않았다면 행복의 비밀을 알려주겠다고 합니다.
그 사람은 성을 돌다가 아름다운 정원과 조각품에 정신이 팔려 그만 기름을 흘려버립니다. 성주는 한 번의 기회를 더 줍니다. 그때는 이 사람이 기름을 흘리지 않습니다. 그러자 성주는 행복의 비밀은 기름 두 방울을 흘리지 않으며 세상을 즐기는 것이라 하였습니다.
먼저 나의 말에 순종할 수 있는 사람인지 알아보아야 하는 이유는 행복이 복권처럼 한순간에 이뤄지는 게 아니기 때문입니다. 지금 행복하여지려면 감사하면 됩니다. 그러나 매일 행복하려면 매일 꾸준히 감사일기를 써야 합니다. 그래서 꾸준히 감사일기를 쓸 사람인지 시험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은총을 주어도 쓸모없게 됩니다. 은총을 그렇게 소진할 필요가 없습니다.
저는 돈 걱정 없이 살고 싶은 마음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것을 하고 나서부터는 돈 걱정을 해 본 적이 없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십일조를 내는 일입니다. 내가 그 청을 위해 그분의 말씀이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분 안에 머무는 방법을 알아낸 것입니다.
이처럼 내가 원하는 게 있다면 그것을 위해 주님도 원하는 게 있음을 인식하십시오. 그리고 내가 청하는 것을 위해 주님께서 나에게 청하는 게 무엇인지 묻고 그것을 먼저 하십시오. 그러면 내 청원이 무엇이든 이뤄질 것입니다. 그분은 내가 죽고 당신의 모습으로 조금만 변화되려 노력하는 게 보인다면 당신 은총을 아끼지 않으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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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1996년 스페인 성지순례를 갔을 때입니다. 자유시간이 주어졌고, 모임 장소로 말 동상이 있는 광장에서 만나기로 했습니다. 자유시간을 보내고, 말 동상이 있는 광장으로 갔습니다. 그런데 일행이 오지 않았습니다. 나중에 확인하니, 그곳에는 말 동상이 있는 광장이 하나 더 있었습니다. 성격이 급한 저는 말 동상이라는 말만 들었고, 그 다음 말은 제대로 듣지 못했습니다. 성당 옆의 말 동상이 있는 광장이었습니다. 이번에도 비슷한 실수가 있었습니다. 성 야고보 사도의 유해가 있는 ‘샌디에고 꼼뽀스텔라’엘 갔습니다. 자유시간이 주어졌고, 모임 장소로 광장에서 만나기로 했습니다. 저는 자유시간을 보내고 광장에서 기다렸습니다. 시간이 되어도 사람들이 오지 않았습니다. 성격이 급한 저는 광장이라는 말만 들었고, 그 다음 말은 제대로 듣지 못했습니다. 성당 앞의 광장이 아니라, 성당 아래에 있는 광장이었습니다. 다행인 것은 광장이 서로 가까이 있었던 것입니다.
과학에서도 비슷한 경우가 있습니다. 인류는 ‘천동설’을 당연한 이치로 받아들였습니다. 지구를 중심으로 태양이 돈다고 생각했습니다. 지구를 중심으로 온 우주가 움직인다고 생각했습니다. 어찌 보면 우물 안의 개구리와 같은 생각입니다. 아침이면 해가 뜨고, 저녁이면 해가 지니 당연히 태양이 지구를 중심으로 움직인다고 생각했습니다. 교회도 ‘천동설’이 맞는다고 생각했습니다. 온 우주에 하느님을 닮은 인간은 지구에만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셨기 때문입니다. 갈릴래오 갈릴래이와 같은 과학자는 ‘지동설’을 주장했습니다. 코페르니쿠스와 같은 과학자는 ‘지동설’을 주장했습니다. 우리의 생각보다 우주는 훨씬 크다고 생각했습니다. 지구는 우주에 떠 있는 아주 작은 먼지와 같다고 생각했습니다. 지구는 태양을 중심으로 돈다고 생각했습니다. 교회는 지동설을 주장하는 과학자들을 단죄하였습니다. 천동설이 맞는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지동설’이 맞는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태양을 중심으로 지구가 돌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우주는 우리의 생각을 뛰어넘을 만큼 크고, 장대했습니다.
초대교회에도 비슷한 문제가 있었습니다. ‘할례’에 대한 문제입니다. 유대인들은 모세의 율법에 따라서 ‘할례’를 하였습니다. 하느님께서 아브라함에게 ‘할례’를 하라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유대교에서 개종했던 사람들은 당연히 ‘할례’를 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다른 민족에서 개종했던 사람들은 ‘할례’의 의미를 몰랐습니다. 초대교회는 할례가 신앙인이 되는 필수조건인지 고민했습니다. 다른 민족에서 개종했던 사람들은 할례의 의미도 몰랐고, 할례에 대해서 거부감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비슷한 문제로 ‘음식’에 대한 것도 있었습니다. 유대교에서 개종했던 사람들은 ‘음식’에 대한 규정이 있었습니다. 모세의 율법은 부정한 음식에 대한 규정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다른 민족에서 개종했던 사람들은 모세의 율법을 몰랐고, 음식에 대한 규정도 몰랐기 때문입니다. 이에 대해서 초대교회는 고민을 하였고, 예루살렘에 모여서 회의를 하였습니다. 이것이 최초의 공의회입니다.
교회는 ‘할례’와 ‘음식’에 대한 모세의 율법을 과감하게 버렸습니다. 중요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이었습니다. 중요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이었습니다. 제가 찾았던 광장이 모임 장소가 아니었듯이, 지구를 중심으로 태양이 도는 것이 아니었듯이, 할례와 음식은 구원을 위한 절대적인 조건이 아니었습니다. 교회는 유대교라는 ‘틀’에서 벗어날 수 있었고, 이방인들에게 유대교의 율법과 계명을 강요하지 않기로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고,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서 있는 것이었습니다. 새 술은 새 부대에 담는 것이었습니다. 제도와 관습도 중요하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제도와 관습을 뛰어 넘는 사랑과 믿음 그리고 희망입니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다.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안에 머무르는 사람은 많은 열매를 맺는다. 너희는 나 없이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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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요한 15,1-8: 내 안에 머무르는 사람은 많은 열매를 맺는다.
“나는 참포도나무요.”(1절) 아들은 우리가 아들 안에서 열매를 맺도록 우리에게 참포도나무가 되셨다. 예수님께서는 사랑하며 당신과 결합함으로써 우리가 얼마나 많은 것을 얻는지 보여주시고자 하신다. 당신을 포도나무라 하시며 그분과 결합한 이, 그분 안에 뿌리를 내린 이 그리고 성령 안에서 그분께 결합한 이들은 가지이다. 가지들은 포도나무와 연결됨으로써 포도를 맺는다. 아버지께서는 농부로서 말씀의 쟁기로 우리 마음을 갈아엎고, 계명의 씨앗을 뿌리고 열매가 맺히기를 기다리신다.
“열매를 맺지 않는 가지는 다 쳐 내시고, 열매를 맺는 가지는 더 많은 열매를 맺게 하신다.”(2절) 사랑에서 나오는 선행으로 우리가 단단히 결합하지 못하면 열매를 맺지 못하는 죽은 가지가 될 것이고, 쓰레기처럼 태워 버릴 것이다. 열매를 맺는 가지는 아버지의 세심한 보살핌으로 더 큰 열매를 맺을 수 있도록 하신다. “너희도 내 안에 머무르지 않으면 열매를 맺지 못한다.”(4절) 가지가 포도 줄기로부터 생명의 수액을 받지 못한다면 열매를 맺을 수 없다. 우리도 우리를 기르시는 분과 결합하여 있다면, 생명을 주시는 물과 같은 성령으로 열매를 맺을 것이다. 그러므로 그분 안에 머물러야 한다. 가지는 자신의 생명 수단이 되는 것을 나무에서 취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께서 제자들 안에 머무시는 것은 제자들을 위한 것이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다. 너희는 나 없이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5절) 우리는 나약하므로 우리가 선행하려 해도 선을 베푸시는 분 없이는 아무것도 완성할 수 없다. 자신의 나약함을 깨닫는 사람만이 하느님의 권능을 체험할 수 있다. 그때 그는 많은 열매도 적은 열매를 맺을 수 있다. 우리가 그분 안에 머무르고 그분의 말씀이 우리 안에 머무르면, 우리가 청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이루어질 것이라고 하신다(7절 참조). 우리는 언제나 그분의 말씀 안에 머물러야 한다.
“너희가 많은 열매를 맺고 내 제자가 되면, 그것으로 내 아버지께서 영광스럽게 되실 것이다.”(8절) 우리가 많은 열매를 맺고 그리스도의 제자가 될 때, 아버지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는 것이다. 하느님께 영광을 돌려드릴 때, 우리는 참으로 하느님의 자녀들이 될 것이다. 아드님께서 그렇게 사셨다. 예수님께서는 “너희의 빛이 사람들 앞을 비추어, 그들이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여라.”(마태 5,16) 하셨다. 선행이 인간의 힘만으로는 가능하다고 생각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아버지께서 영광스럽게 되시는 것은 우리가 많은 열매를 맺고 그리스도의 제자가 될 때이다. 그래서 “우리는 하느님의 작품입니다. 우리는 선행을 하도록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창조되었습니다.”(에페 2,10)라고 한다.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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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김혜윤 베아트릭스 수녀님(미리내 성모성심 수녀회)]
“너희는 내가 너희에게 한 말로 이미 깨끗하게 되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잡히시기 전 제자들에게 하신 ‘고별 담화’(요한 13—17장)의 한 부분입니다. ‘참포도나무와 가지’의 비유로써, 당신과 물리적으로 떨어져 있어도 참포도나무에 붙어 있으면 결국 풍성한 열매를 맺을 수 있음을 알려 주십니다.
본문에서 눈에 띄는 것은 연이어 나오는 ‘깨끗하게’ 또는 ‘깨끗이 하다’라는 낱말입니다. 2절의 “깨끗이 손질하시어”로 옮긴 그리스 말 동사 ‘카타이로’는 3절의 “깨끗하게”(‘카타로이’)와 같은 어원에서 나왔습니다. 더 많은 열매를 맺기 위하여 가지를 쳐 내어 깨끗이 손질할 필요가 있듯이, 구원의 열매를 맺기 위하여 내면의 가지치기로 깨끗해져야 함을 가르쳐 줍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이 작업이 “내가 너희에게 한 말로” 이루어졌다고 하십니다. 이 선언은 유다인들의 통념과는 다른 그리스도교의 구원관을 제시하는 중대한 선언이라고 할 수 있는데, 당신의 ‘말씀’으로 우리가 깨끗해지고 구원됨을 알리기 때문입니다. 독서에도 비슷한 내용이 나옵니다. “그들 사이에 적지 않은 분쟁과 논란이 일어나, ……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들과 원로들에게 올라가기로 하였다.” 초대 교회가 정리하여야 하였던 ‘구원관 논쟁’이 시작되고 있음을 암시하는 것입니다. 사실 독서가 보여 주듯 유다인들은 ‘모세의 관습에 따라 할례를 받지 않으면 구원을 받을 수 없다.’고 주장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것이 구원의 길임을 선언하십니다.
외적인 표식(할례)이나 율법의 준수가 한 인간의 삶과 생명을 지배하지는 못합니다. 예수님만이 진리이신 “참포도나무”이시기에, 우리는 그분께서 하신 말씀을 듣고 간직하며 실행함으로써 깨끗해지고 구원의 열매를 풍성히 맺을 수 있습니다. 율법이 아니라 살아 있는 말씀이 우리를 생명으로 이끄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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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저 사람은 목수의 아들이 아닌가?>
“예수님께서 고향에 가시어 회당에서 사람들을 가르치셨다. 그러자 그들은 놀라서 이렇게 말하였다. ‘저 사람이 어디서 저런 지혜와 기적의 힘을 얻었을까? 저 사람은 목수의 아들이 아닌가? 그의 어머니는 마리아라고 하지 않나? 그리고 그의 형제들은 야고보, 요셉, 시몬, 유다가 아닌가? 그의 누이들도 모두 우리와 함께 살고 있지 않는가? 그런데 저 사람이 어디서 저 모든 것을 얻었지?’ 그러면서 그들은 그분을 못마땅하게 여겼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예언자는 어디에서나 존경받지만 고향과 집안에서만은 존경받지 못한다.’ 그리고 그들이 믿지 않으므로 그곳에서는 기적을 많이 일으키지 않으셨다.”(마태 13,54-58)
1) 여기서 “저 사람은 목수의 아들이 아닌가?”라는 말과 “그들은 그분을 못마땅하게 여겼다.”라는 말을 합하면, 나자렛 사람들은 예수님의 설교에 대해서 “목수는 목수 일이나 할 것이지, 감히 사람들을 가르치려고 하는가?”라는 반응을 보인 것으로 생각됩니다. 예수님은 ‘목수의 아들’이었고, 당신도 목수 일을 하셨습니다.(마르 6,3) 그리고 사도들의 직업을 보면, 베드로, 안드레아, 야고보, 요한은 어부였고, 마태오는 세리였고, ‘나타나엘’은(‘바르톨로메오’는) 율법학자였습니다. 바오로 사도의 직업은 천막을 만드는 일이었습니다.(사도 18,3)
예수님께서는 사도들을 뽑으실 때 그들의 직업이나 출신 같은 것은 보지 않으시고, 그들의 신앙과 열정만 보셨습니다. 그것은 직업에 귀천이 없음을 나타내는 것이기도 합니다. 창세기의 천지 창조 이야기를 보면, 하느님께서 일하시는 모습은 육체노동자가 일하는 모습입니다. “주 하느님께서 흙의 먼지로 사람을 빚으시고, 그 코에 생명의 숨을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명체가 되었다.”(창세 2,7)
예수님께서는 ‘포도나무에 관한 비유’를 말씀하실 때 “나의 아버지는 농부이시다.”라고 표현하셨습니다.(요한 15,1) 당시 사람들은 육체노동을 천시하고 노동자들을 멸시했지만, 그것은 어리석은 일이고, 죄가 되는 일이라는 것이 예수님의 가르침입니다. <직업에 귀천은 없지만, 분명히 직업 자체가 죄가 되는 ‘악한 직업들’은 있습니다. 범죄 조직과 관련된 직업들이 그 예가 되는데, 구체적으로 예를 들 것도 없이, 우리는 사회적으로 심각하게 문제가 되는 직업들이 무엇인지 알고 있습니다. 그런 일들을 직업으로 삼고 있는 사람들은 하루빨리 그 직업을 버려야 합니다.>
2) 창세기에 근거해서 말하면, ‘노동’은 “하느님의 창조 사업에 동참하는 일”이고, ‘노동자’들은 ‘하느님을 도와드리는 협력자들’입니다. 따라서 ‘노동’은 ‘선(善)’입니다.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은 ‘선’이기 때문입니다. <이 말을 반대로 생각하면, ‘악한 일’은 노동으로 인정할 수 없다는 뜻이 됩니다. ‘모든 노동’이 다 선한 것이 아니라, ‘선한 노동’만 노동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노동’은 ‘살리는 일’입니다. 하느님의 창조 사업은 생명을 창조하는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이 말을 반대로 생각하면, 죽이고 파괴하는 일은 노동으로 인정할 수 없다는 뜻이 됩니다. 사람을 죽이는 일도 그렇고, 자연을 파괴하는 일도 그렇습니다. 하느님의 창조를 거스르는 일은 ‘큰 죄’입니다.> 생계를 위한 노동을 단순하게 표현하면 ‘살기 위해서 하는 일’이니까 ‘살리는 일’입니다. 나도 살고, 가족들도 살고... 그리고 ‘사는 것’은 ‘혼자서’가 아니라 ‘함께 하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을 다 죽이고 혼자서만 사는 것은, 사는 것이 아닙니다. 마찬가지로 다른 사람들을 고통과 불행 속에 몰아넣고서 혼자서만 행복한 것은, 행복도 아니고 사는 것도 아닙니다.
3) 바오로 사도는 ‘노동’에 관해서 이렇게 권고합니다. “우리를 어떻게 본받아야 하는지 여러분 자신이 잘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여러분과 함께 있을 때에 무질서하게 살지 않았고, 아무에게서도 양식을 거저 얻어먹지 않았으며, 오히려 여러분 가운데 누구에게도 폐를 끼치지 않으려고 수고와 고생을 하며 밤낮으로 일하였습니다. 우리에게 권리가 없어서가 아니라, 우리 스스로 여러분에게 모범을 보여 여러분이 우리를 본받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사실 우리는 여러분 곁에 있을 때, 일하기 싫어하는 자는 먹지도 말라고 거듭 지시하였습니다. 그런데 듣자 하니, 여러분 가운데에 무질서하게 살아가면서 일은 하지 않고 남의 일에 참견만 하는 자들이 있다고 합니다. 그러한 사람들에게 우리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지시하고 권고합니다. 묵묵히 일하여 자기 양식을 벌어먹도록 하십시오.”(2테살 3,7-12) <그 당시에, 테살로니카 교회 신자들 중에는 종말이 곧 오니까 일할 필요가 없다고 주장하면서, 일은 하지 않고 사람들에게 폐만 끼치는 자들이 있었습니다. “일하기 싫어하는 자는 먹지도 마라.”라는 말과 “묵묵히 일하여 자기 양식을 벌어먹도록 하십시오.”라는 말은, 바로 그런 자들에게 하는 말입니다. 오늘날 노동자들이 파업을 할 때마다 ‘무노동 무임금’이라는 말이 등장하는데, 파업은 노동자들의 정당한 권리입니다. 파업을 막으려고 성경 구절을 함부로 악용하는 것은 성경을 모독하는 죄를 짓는 일입니다. ‘무노동 무임금’은 노동자들이 아니라 일부 정치인들에게 해야 할 말입니다. 일은 하지 않고 돈만 받아가는 정치인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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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이정민 토마스아퀴나스 신부님]
<사랑>
포도에 관련된 비유들이 성경 안에서 자주 발견됩니다. 포도가 성경의 땅인 이스라엘의 주된 농작물 중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도 당신을 오늘 포도나무에 비유하시며 그 나무에 붙어 있는 가지가 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래야만 많은 열매를 맺는다는 것입니다. 과연 가지에 싹이 돋고 잎이 나고 꽃이 피고 열매가 영글어가는 과정은 신앙인의 삶과 같습니다.
포도가 익어가려면 나무로부터 끊임없이 양분과 수분을 받아들여야 하는 것처럼 신앙인도 주님 안에서 자신의 성숙을 위한 양분과 수분을 얻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열매’는 무슨 뜻일까요? 포도나무의 열매는 물론 포도이지만 이는 비유적인 표현입니다. ‘열매’는 바로 신앙인의 삶의 거룩함입니다.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한 사람이 되어라”(레위 11,45)는 말씀처럼 우리 삶의 성화야말로 주님 안에 머무르는 삶의 참된 열매입니다.
그렇다면 많은 열매를 맺도록 우리를 성장시키는 양분과 수분은 무엇입니까? 바로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아니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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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회 류해욱 요셉 신부님]
<진짜 순 참 포도나무>
예수께서 말씀하십니다. “나는 참 포도나무요 나의 아버지는 농부이시다.”
여러분들, 포도나무 또는 포도덩굴이라는 말을 들으면서 어떤 이미지가 떠오릅니까? ‘내 고장 칠월은 청포도가 익어가는 계절’이라는 이육사의 싯귀가 떠오르는 분들도 있겠지만 대부분의 우리 한국 사람들에게는 그렇게 큰 느낌이나 별 이미지가 없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예수님 당시의 이스라엘 사람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어떤 이미지를 떠올렸을까요? 우리가 ‘나는 포도나무다’라는 예수님 말씀을 바르게 알아듣기 위해서는 이 말을 들은 이스라엘 사람들의 문화와 정서를 이해해야 하지요.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포도나무는 바로 그들의 상징이었습니다. 당시 이스라엘을 대표하는 상징이 있다면 머리에 쓴 빵모자나 가슴에 단 별이 아닙니다. 바로 포도나무였어요. 구약에서 수없이 이스라엘은 포도나무나 하느님의 포도원으로 묘사되고 있습니다. 대표적인 구절 몇 개를 듣기로 해요.
시편 80, 8입니다. “이집트에서 빼내어온 포도나무, 이 민족들을 쫓아내시고 그 자리에 심으신 후 그 앞에 땅을 가꾸시니 뿌리박고 널리 퍼졌사옵니다.”
이사야 예언자는 노래합니다. “임의 포도밭을 노래하는 사랑의 노래를 내가 임에게 불러드리리라. 나의 임은 기름진 산등성이에 포도밭을 가지고 있었네. 임은 밭을 일구어 돌을 골라내고 좋은 포도나무를 심었지. 한 가운데 망대를 쌓고 즙을 짜는 술틀까지 마련해 놓았네. 포도가 송이송이 맺을까 했는데 들 포도가 웬 말인가?”(이사 5, 1-3)
예언자 예레미야도 한탄합니다. “특종 포도나무를 진종으로 골라 심었는데 너는 품질이 나쁜 잡종으로 변했구나.”(예레 2, 21)
호세아 예언자도 참담한 심정을 토로합니다. “이스라엘은 무성한 포도덩굴, 열매를 맺기는 했으나 열매가 많을수록 제단만 늘어갔다.”(호세 10, 1)
예제키엘 예언자는 15장 전체를 ‘포도덩굴의 비유’로 할애하면서 이스라엘에 대한 경고를 외칩니다. “너 사람아, 포도덩굴이 무엇이냐? 숲 속에서 자란 포도덩굴을 땔감으로 불에 지어 넣듯, 예루살렘에 사는 자들을 나는 불에 집어넣으리라.”
이렇게 구약성서에서는 이스라엘을 포도나무에 비유했고, 포도나무는 바로 이스라엘을 상징하는 상징물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예언자들은 포도나무가 원래의 좋은 품성을 잃고 열매 맺지 못하는 잡종으로 변해가고 있다고 통탄하며 경고를 퍼붓고 있습니다. 원래는 좋은 포도나무, 진짜, 순, 참 포도 나무였는데 생명이신 하느님에게서 멀어져 가면서 변종되었다는 것입니다.
한편, 포도나무가 이스라엘 사람들의 상징으로 가장 잘 드러난 외적인 표징이 바로 성전 중앙에 있던 황금으로 만든 커다란 포도덩굴이었지요. 그들에게 가장 중요했던 성전의 중앙에 황금으로 만들어진 포도덩굴은 다시 한번 이룩할 이스라엘의 번영과 영광을 상징하고 있었지요.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바로 참 포도나무라고 말씀하십니다. 어쩌면 저 황금빛으로 번쩍거리는 포도덩굴이 아니라 사람들 눈에 힘없고 보잘것없어 보이는 당신이 바로 진짜 이스라엘의 영광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이 아닐까 하는 느낌이 듭니다.
우리말로 ‘참’으로 옮긴 희랍어 단어는 alethinos (에이레씨노스)인데 정통적인, 가짜가 아닌 진짜, 순수한 등의 의미를 지닌 낱말이지요.
우리가 참기름을 사려고 보면 ‘진짜 순 참기름’이라고 선전해 놓은 간판을 보지요. 알다시피, 가짜가 판을 치고 있는데 이 참기름은 가짜가 아닌 진짜 순수한 참기름이라는 말이지요. 그래도 사람들이 잘 안 믿어요. 예수님이 참 포도나무라고 말씀하실 때 가짜가 아닌 진짜, 진종의 포도나무라는 의미이고 여기서 ‘진짜’가 함축하고 있는 의미는 가짜가 판을 치고 있다는 것이지요.
바로 휘황찬란하게 보이는 성전의 황금으로 만든 포도덩굴은 가짜라는 의미도 함축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기도 안에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만이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 하셨을 말씀을 귀 기울이고 들어봅니다.
“그대들은 이스라엘인이라는 자부심을 갖고 있지요. 만일 그대들이 이스라엘이 하느님이 선택하신 백성이기 때문에 구원받으리라는 생각을 지니고 안심하고 있다면 그것은 오산일 뿐만 아니라 찬란한 착각을 하고 있는 것이라오. 그대들은 예언자들의 말을 귀담아 들어보시오! 하느님께서 좋은 참 진짜 진종의 포도나무를 심으신 것은 사실이지요. 시편 말씀대로 그 좋은 포도나무를 이집트에서 빼내온 것도 사실이고요.
그런데 말이오. 예언자 예레미야의 말대로 그대들은 점점 품질이 나쁜 잡종으로 변했어요. 예언자 호세아 애통해하면서 한탄한대로 열매가 많을수록 제단만 늘어갔구료. 하느님 아버지가 원하시는 것은 제단의 향이 아닌데 말이오.
예제키엘 예언자의 예언대로 마치 잘못 자란 포도덩굴을 땔감으로 불에 집어넣듯이 그대들이 불에 던져 질 것을 생각하면 내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소이다. 이제라도 그 불을 면하려거든 제발 아버지께서 보내신 나 예수를 믿으시오.
내가 참 포도나무입니다. 다시 말해, 내가 그대들을 구원한 진정한 구세주란 말이오. 그대들이 구원을 얻으려거든 모두 나에게 붙어 있어야 합니다.
사실 단순히 나에게 붙어 있을 뿐만 아니라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어떻게 해야 열매를 맺느냐고요? 내 말을 실행하는 것이지요.
다시 말해, 내가 여러 번 말씀드린 대로 서로 사랑하라는 내 계명을 지키는 것입니다. 더 이상 형식과 허례허식으로 전락한 율법, 그 중에서도 안식일 법, 정결례 법, 제사 등의 외적인 것에 매달리지 말고, 그대들 자신의, 그리고 서로의 내면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진정으로 서로 아껴주고 사랑하고, 가진 것을 나누고 정의가 강물처럼 흐르게 해야 합니다. 그것이 열매를 맺는 유일한 길이지요. 어떻게 사랑해야 하는지 모른다고요? 우선, 나와 함께 머무르시오.
가지가 나무에 붙어 있어야 생명을 유지하듯이 나에게 머물러야 사랑의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아버지는 바로 사랑이시고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아버지를 떠나서는, 다시 말해, 사랑을 떠나서는 아무 것도 소용이 없지요.
그대들이 서로 사랑하지 않으면 아무런 열매를 맺을 수 없습니다. 열매를 맺지 못하는 가지는 봄이 오기 전에 가지치기를 당할 수밖에 없지요.
사실 아버지께서 굳이 가지치기를 하지 않으셔도 나를 떠난 가지는 이미 잘려 나간 가지처럼 밖에 버려져 말라 버리게 마련이지요. 그러면 사람들이 이런 가지를 모아 불에 태워 버리게 됩니다. 불을 보듯 그것을 보는 내 마음이 얼마나 아픈지 아시오. 그러니 제발 그대들은 나에게 붙어 있어야 합니다. 내가 주는 자양분을 받고 열매를 맺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의 이런 애절한 마음을 느낄 수 있다면. 이 말씀들은 단지 이스라엘 사람들을 향한 말씀일 뿐만 아니라 바로 우리들에게 하시는 말씀이기도 하다는 것을 알아듣게 될 것입니다.
우리 이제 진정으로 그분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며 서로 다투지 말고 아껴주고 서로 시기하고 모함하지 말고 서로 사랑하기로 합시다. 제발 당신이 진짜 순 참 포도나무라고 외쳐야 하는 예수님의 심정을 헤아리기로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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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대교구 박병규 요한 보스코 신부님]
포도나무와 가지의 관계는 예수님과 신앙인의 관계를 드러내는 값진 비유입니다. 나무에서 떨어져 홀로 남겨진 가지는 불을 지피는 데 던져지거나 땅의 거름으로 사라져 가겠지요. 열매를 맺는 풍성한 수확을 생각하면 가지는 나무에 제대로 꼭 붙어 있어야 합니다.
포도나무와 가지의 이야기는 다른 두 지향점의 공존을 말하려는 것이 아니라 열매라는 하나의 목적을 위하여 서로 온전히 하나가 되어야 한다는 점을 분명히 합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을 포도나무로 소개하시는 것은, 당신께서 누구이신지 드러내시기보다는 당신을 따르는 신앙인들이 당신 안에서 또 다른 예수로 거듭나기를 바라시기 때문입니다.
두 존재가 하나로 거듭난다면 서로의 원의와 지향점도 하나가 될 것입니다. 우리 신앙인이 원하는 것이 무엇이든 청하면 이루어질 것이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우리 각자가 원하는 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되어야 한다는 점을 전제합니다.
예수님과 우리는 하나가 되어 하느님 아버지를 영광스럽게 합니다. 너무나 놀랍지 않습니까? 예수님께서는 지금 우리더러 당신이라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당신과 함께 아버지를 영광스럽게 하자고 우리를 초대하십니다. 요한 복음의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따라오라고 초대하시는 것이 아니라, 당신과 함께 아버지께 나아가자고, 어깨동무하자고 우리를 부르십니다.
그런 예수님을 두고 이것 해 달라, 저것 해 달라 청하는 것은 참 부끄러운 일이 아닌가 싶습니다. 신앙에 위험한 것들은 대개 하느님을 대상화하는 데서 시작됩니다. 대상화된 하느님, 자기 자신과 다른 하느님, 그리하여 늘 목적이 되어 버린 하느님은 그저 우상일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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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그리스도 고난수도회 김준수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다.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안에 머무르는 사람은 많은 열매를 맺는다."(15,5)
몇 년 전 마음먹고 친구와 함께 용산 국립박물관에서 열린 <오르세미술관전>을 관람했었습니다. 관람전의 부제로 ‘인상주의, 그 빛을 넘어’라는 제목이 붙어있었습니다. 눈에 보이는 빛을 넘어, 보이지 않는 빛을 표현하려고 했던 인상주의 화가들처럼 저는 오늘 복음의 말씀을 귀로 들으려 하기보다는 눈을 통해 비춰오는 빛을 보려고 했습니다. 그 풍경을 마음으로 보려고 했습니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다.”(15,5)라는 표현이 마치 ‘엄마 품에 안겨 젖을 물고 있는 어린아이’의 모습으로 저에게 보입니다. ‘포도나무와 가지’ 그리고 ‘엄마와 아기’에게서 발산하는 빛은 마치 부활 첫날의 빛처럼 화사하고 따뜻하고 포근하게 느껴집니다. 그 따뜻함과 포근함은 곧 사랑에서 발산되는 평화요 안식의 빛일 것입니다. 물론 아이가 엄마 품에 안겨 있듯, 엄마 등에 업혀있듯 상관없습니다. 그 빛을 넘어 느껴지고 보이는 것은, 두 상징, 곧 ‘나무와 가지’ 그리고 ‘엄마와 아이’ 사이의 포근하고 따뜻한 사랑의 일체와 부드러우면서도 강렬한 결합의 조화가 아닐까, 싶습니다. ‘포도나무와 가지’를 그림으로 상상하면서 바라본다면 어떤 빛을 보고 그리고 빛을 넘어서 무엇이 여러분에게 보입니까?
예수님의 포도나무 비유의 밑그림은 “나는 참 포도나무요 나의 아버지는 농부이시다.”(15,1)라는 말씀을 전제로 한 것입니다. 농부이신 하느님 아버지는 포도나무가 땅 깊이 뿌리(=하느님의 구원계획)를 내리도록 돌봐주고, 그렇게 해서 끝까지 나무에 붙어있는 가지가 열매(=생명과 사랑)를 풍성히 맺게 해 주신 분이시기에 예수님 또한 아버지께 신뢰하고 의지하는 관계입니다. 이러한 두 분 사이의 사랑의 관계를 전제로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다.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안에 머무르는 사람은 많은 열매를 맺는다.(15,5)라는 말씀이 파생되는 것입니다. 엄마와 아기 사이에서, 아기가 엄마의 품에 안겨 젖을 먹을 때 단지 젖만이 아니라 엄마의 사랑과 생명을 먹는 것이라 봅니다. 물론 아기는 젖이 필요하지만 단지 젖만이 아니라 젖보다 더 필요한 것은 젖을 물린 주체인 엄마라는 존재 자체일 것입니다. 엄마 품에 안겨서 젖을 먹는 아이에게 엄마는 자신의 생명을 지켜주고 보호해 주는 존재입니다. 그런 엄마에게 온전히 의존하고, 의탁하고 있는 상태에서 나오는 엄마와 아이의 모습은 가장 평화스럽고 안정적인 완전체라고 봅니다. 단지 살과 살이 맞닿아 있다는 것 이상으로 마음과 마음이 영과 영으로 하나가 된 존재 사이의 사랑의 관계성이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가르치고자 하는 본래의 의도가 아닐까, 상상합니다.
엄마와 어린아이의 관계처럼, 이해타산이 아닌 곧 젖을 물린 어머니와 젖을 빠는 아이 사이의 사랑으로 생명의 하나 됨과 결합처럼, 우리와 예수님과의 관계도 그렇게 밀접히 의지하고, 의탁하는 사랑의 관계가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과 우리와의 관계는 생명으로 연결되고 사랑으로 하나 되는 관계입니다. 우리가 하느님 아버지의 사랑을 의지하고 붙어있으면, 분명 포도나무인 예수님을 통하여 그 생명과 사랑이 우리에게 흘러넘쳐 올 것입니다. 그럴 때 가지인 우리는 말씀 혹 성령으로 ‘쳐 내치지 않고’ 오히려 ‘깨끗이 손질하여’ 더 많은 열매를 맺도록 하실 것입니다. 사도 바오로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들은 믿지 않아서 잘려 나가고 그대는 믿어서 그렇게 붙어있는 것입니다. 그대가 뿌리를 지탱하는 것이 아니라 뿌리가 그대를 지탱하는 것입니다. 그대는 잘려 나간 그 가지들을 얕보며 자만해서는 안 됩니다.”(로11,20.18) 농부이신 하느님께서 가지인 우리를 쳐내시지 않은 것은 우리가 나무와 그 뿌리인 주님의 뜻을 살려고 노력하심을 보시기 때문입니다. 그 갸륵함이 열매 맺도록 필요하지 않은 육적이고 세상적인 욕심인 잔가지를 깨끗이 손질해 주셔서 더 튼튼하게 자라도록 보살펴 주십니다. 그리고 마침내 더 많은 열매를 맺게 해 주심을 잊지 않고 감사하면서 주님께 매달리고 붙어있어야 합니다. 이토록 절절한 사랑의 고백을 어느 누가 하겠는가? 주님의 인간에 대한 이 간절한 사랑의 표현 ‘제발 내 사랑 안에 머물러 있어라. 너희에게 바라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오직 내 곁에 내 안에 머물러 있어다오.’라는 외침을 듣고 맛보아야 합니다. 사실 주객이 전도된 입장 아닌가요?
이를 위해 복음은 ‘참 포도나무인 예수님과 가지인 우리와 끈끈하고 친밀한 관계’가 중요함을 강조하고 있으며, 그 중심적인 어휘가 바로 8번이나 반복된 ‘머물다.’라는 표현입니다. ‘머물다.’라는 표현은 우선 일차적으로 가지가 나무에 붙어있다,(15,4)는 표현처럼 ‘가지가 나무에 붙어있을 때만이 생명의 수액을 공급받는다, 는 의미입니다. 이차적으로는 붙어있지만 않고 생명의 수액을 공급받을 때 열매를 맺는 가지가 될 것이며 그때야 비로소 참으로 ‘머물러 있다.’하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나에게 붙어있으면서 열매를 맺지 못한 가지는 잘려서 밖에 던져져 말라 버리고 불에 태워져 버리기 때문입니다.”(15,2,6) 나무가 가지를, 가지가 나무를 서로 믿고 의지할 때 포도나무는 많은 열매를 맺게 되며, “많은 열매를 맺고 내 제자가 되면, 그것으로 내 아버지께서 영광스럽게 되실 것입니다.”(15,8) 예수님 안에 밀접하게 머무는 믿은 이는 많은 열매를 맺을 것이고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참 생명을 공유하고 그분과 결합하여 하나가 된다는 사실입니다. 결국 머물다, 는 표현은 ‘상호 친밀한 관계’로 결합되어 있으며 ‘상호내주相互內住의 관계’를 표현하는 은유입니다. 얼마나 아름답고 거룩한 관계의 표현입니까?
오늘 독서에서 바오로와 바르나바 그리고 유다에서 내려온 사람들 사이에 “모세의 율법에 따라 할례를 받지 않으면 구원을 받을 수 없다.”(사15,1) 라는 문제로 분쟁과 논란이 생깁니다. 이는 곧 ‘구원의 본질이 무엇이며 누가 구원하는가?’라는 근본적인 문제에 대한 갈등이었고, 이를 계기로 직면한 현안을 해결하기 위한 예루살렘 사도 회의가 소집되었던 것입니다. 사실 이방인들에게 선교를 성공적으로 마치고 돌아온 바오로와 바르나바에게는 무척 당황스런 상황이었지만, 중대한 문제를 독자적으로 결정하지 않고 원로들과 상의해서 해결하려는 지혜로운 처신과 함께 겸손한 행동을 함으로써 문제 해결을 위한 좋은 선례를 남기게 됩니다. 오늘 사도행전의 야기된 문제 해결을 위한 답을 복음이 전해 주고 있습니다. 한 마디로 모세의 관습에 따라 할례를 받아야 구원을 받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포도나무인 예수님 안에 항구히 머물러 있을 때 참된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를 복음의 표현으로 말하자면 “나는 참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다.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안에 머무르는 사람은 많은 열매를 맺는다. 너희는 나 없이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15,5) 구원은 오직 예수님께 대한 믿음으로 주어지기에, 모세의 율법도 아니기에 ‘누가 구원받을 수 있냐?’는 질문의 답은 바로 오직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율법이 구원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과의 사랑의 관계가 구원입니다. 성가가 기도라는 사실을 새삼 강하게 느끼게 하는 노랫말은 아마도 성가 35번이 아닐까, 싶습니다. 영혼을 다해 기도를 대신해서 바칩니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로다. 가지가 나무에 붙어있지 않으면 작은 열매도 맺을 수 없듯이 너희도 내 안에 머무르지 않으면 그러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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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옛날 사냥을 너무 좋아하는 어느 임금이 있었습니다. 이 임금이 어느 날 사냥 갔다가 손가락을 크게 다치게 되어, 곧바로 동행했던 주치의를 불렀습니다. 임금이 “어떤가?”라고 묻자, 주치의는 이렇게 말합니다. “좋은지 나쁠지 누가 알겠습니까?”
얼마 후, 임금의 상처가 덧나서 다시 주치의를 불러서 괜찮겠는지를 물었습니다. 주치의는 정성껏 치료하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좋을지 나쁠지 누가 알겠습니까?”
하지만 임금의 상처는 아물지 않았고, 결국 손가락을 자를 수밖에 없었습니다. 임금은 화가 나서, 이 돌팔이 주치의를 감옥에 가두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주치의는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좋을지 나쁠지 누가 알겠습니까?”
몇 주 후, 임금은 다시 사냥을 나갔습니다. 그런데 숲속에서 길을 잃고 헤매다가 그곳에 사는 미개한 원주민에게 붙잡힌 것입니다. 원주민들은 임금을 자기들 신에게 바치려고 했습니다. 바로 그 순간 제사장이 임금의 손가락을 보면서 이렇게 외칩니다. “가만, 저 사람은 손가락이 하나 없다. 신께 바칠 제물이 불경하구나. 그냥 풀어줘라.”
풀려나면서 임금은 생각했습니다. 잘려진 손가락을 하나의 불행이고 시련이라고 생각했는데, 오히려 행복을 가져다주는 고마운 것임을 깨달은 것입니다. 그래서 주치의를 풀어주면서 말했습니다. “좋을지 나쁠지 누가 알겠느냐는 너의 말이 멍청하다고 생각했는데, 이제 보니 그대가 옳았다. 미안하다.”
의사는 “무슨 말씀입니까? 감옥에 가두신 것이 오히려 제게 좋은 일이었습니다. 만약 사냥에 따라갔다면 제가 제물이 되었을 테니까요.”라고 웃으며 말했습니다.
좋을지 나쁠지 누구도 알 수 없습니다. 오로지 주님만이 그 결과를 알고 계시겠지요. 그래서 주님께 더 매달려야 합니다. 주님께 매달리는 사람만이 주님의 뜻을 새기면서 기다리는 삶을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당신을 “나는 참포도나무요 나의 아버지는 농부이시다.”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우리는 나무에 붙어 있는 ‘가지’라고 하시지요. 포도나무에 달린 가지처럼 참포도나무인 예수님과 하나 된 사람만이 하느님의 계획에 함께하면서 풍성한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많은 이가 주님 곁을 떠납니다. 섣부르게 판단하면서 지금 당장 해야 할 일을 하지 못하는 어리석은 삶을 살게 됩니다. 열매를 맺지 못하는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지금의 삶을 섣부르게 판단하지 마십시오. 대신 주님 안에서 기다리면서 주님의 뜻을 따르는 우리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어떤 경우에도 실망하지 않고 살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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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주님의 뜻대로>
우리는 흔히 기도한다고 하면 무엇을 청하는 것을 생각합니다. 끊임없이 무엇을 달라고 합니다. 나의 바람을 정해 놓고 그것을 꼭 이루어 달라고 하소연하고 내 것이 관철되었을 때 비로소 기도를 들어주셨다고 합니다. 그러나 기도하면서 알게 되는 것은 하느님께서 나를 한없이 사랑하신다는 것입니다. 기도 하면서 내가 만든 ‘신념’이나‘가치체계’에 머물지 않고 하느님과의‘사랑의 관계’안에 머물게 됩니다. 하느님의 뜻을 헤아리고 그분 마음에 드는 것을 실천하는 것에, 초점을 맞춰야 성숙한 기도라 할 수 있습니다.
레지오 마리애 선서문을 보면서 한 차원 더 높은 기도를 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선서문은 “지극히 거룩하신 성령이시여, 당신의 위대한 목적을 이루는 도구가 되게 하소서…제 영혼 안에 사랑의 불을 놓으시어 이 세상을 구하고자 하는 성모님의 사랑과 뜻에 일치하게 해 주소서…우리 주 그리스도께서 제 안에서도 자라시게 해 주소서…이 세상과 영혼들에게 그리스도를 모셔다드리게 해 주시고……복되신 성 삼위의 영광 안에 살게 해 주소서….당신께서 저를 받아 주시고 저를 써 주시며 저의 나약함을 굳센 힘으로 만들어 주시리라 확실히 믿으며 다짐 하나이다.” 하고, 이어서 충실한 봉사와 규율에 대한 엄격한 복종을 선서합니다. 개인의 욕망을 채우기 위한 기도가 아니라 봉헌의 기도요, 성령께 각별한 사랑을 드리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내 안에 머무르고 내 말이 너희 안에 머무르면, 너희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청하여라. 너희에게 그대로 이루어질 것이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결국 주님과의 일치를 통해서 효과적인 열매를 맺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달라고 매달리는 것도 필요하지만 먼저 그분을 사랑해야 합니다. 사랑이신 그분과 하나가 되려면 사랑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기도가 사랑으로 가득 차 있을수록 그만큼 더 가치가 있습니다. 성녀 마더데레사 수녀님은“나의 할 일은 성공을 위해 노력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 충성심을 바치는 것입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의 바람이 이루어지려면 먼저 타인 지향적인 자세가 필요합니다. 그리고 그 바람이 무엇보다도 예수님께서 바라시는 것과 일치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아버지와 사랑으로 철저히 하나가 되셨고 하느님의 영광을 위하여 당신 스스로 인간과 하나가 되셨습니다. 우리도 예수님처럼 하느님께 열려있고 그분과 하나 되어 살아간다면 우리의 모든 바람은 그대로 이루어질 것입니다. 내 뜻대로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불평하기 전에 그분과 일치의 상태를 살펴야 하겠습니다. 내 뜻이 이루어지지 않은 것이 오히려 감사할 때가 있습니다.
포도나무와 그 가지는 붙어있을 때 생명력을 지닙니다. 열매는 가지에 달리지만 가지가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몸통이 튼튼해야 가지의 열매도 튼실합니다. 포도나무는 전체고 가지는 부분입니다. 부분과 전체는 나뉠 수 없는 사이입니다. 스승과 제자 사이도 그렇습니다. 예수님과 우리의 관계도 그러합니다. 아버지와 아들, 아들과 제자의 관계를 이어주는 것은 ‘사랑’과 ‘순명’입니다. 우리의 관계도 그러해야 합니다. 주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도 그의 명을 좇지 않는다면 그는 참 제자가 아닙니다. 안 될 때 안 되더라도 최선을 다하여 예수님의 가르침을 좇아 살다 보면 우리 인생에 알찬 열매가 맺을 것입니다. 주님 안에 머물러 원하는 바를 다 이루시길 바랍니다.
“아버지, 제가 기도할 때 더 많은 것을 바라고 구하기보다 문간에 있는 것들, 곧 먹을 것과 마실 것, 부드러운 비, 드맑은 하늘, 가정과 친구, 평화와 기쁨, 무엇보다 사랑에 감사하도록 가르쳐 주십시오. 모든것은 당신의 것, 오로지 당신의 뜻대로 그것들을 처리하소서.”하고 기도하며 오늘을 봉헌합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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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일하는 사람>
마태오 13,54-58 (나자렛에서 무시를 당하시다)
예수님께서 고향에 가시어 회당에서 사람들을 가르치셨다. 그러자 그들은 놀라서 이렇게 말하였다. “저 사람이 어디서 저런 지혜와 기적의 힘을 얻었을까? 저 사람은 목수의 아들이 아닌가? 그의 어머니는 마리아라고 하지 않나? 그리고 그의 형제들은 야고보, 요셉, 시몬, 유다가 아닌가? 그의 누이들도 모두 우리와 함께 살고 있지 않은가? 그런데 저 사람이 어디서 저 모든 것을 얻었지?” 그러면서 그들은 그분을 못마땅하게 여겼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예언자는 어디에서나 존경받지만 고향과 집안에서만은 존경받지 못한다.” 그리고 그들이 믿지 않으므로 그곳에서는 기적을 많이 일으키지 않으셨다.
<일하는 사람>
“저 사람은 목수의 아들이 아닌가?”(마태 13,55)
일하는 사람이
거룩한 까닭은
일하시는 하느님을
닮았기 때문입니다
일하는 사람이
아름다운 까닭은
창조질서를 아름답게
가꾸기 때문입니다
일하는 사람이
진실한 까닭은
땀 흘려 일한만큼
거두기 때문입니다
일하는 사람이
놀라운 까닭은
나날이 스스로를
이루기 때문입니다
일하는 사람이
소중한 까닭은
몸과 맘으로 벗들을
섬기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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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내 안에 머물러라”>
-관상기도의 훈련과 생활화-
어제 4월의 끝은 오늘 5월 성모성월의 시작입니다. 신록으로 빛나는 파스카 축제가 계속되는 5월입니다. 끝은 시작입니다. 11월 배밭 농사가 끝나면서 시작된 전지와 거름 구덩이를 보면서 끝은 새로운 시작임을 깨달았던 기억이 새롭습니다. 1998년 26년 전 당시는 거름을 구덩이에 넣었으며 그때 이를 보며 써놨던 시입니다.
“살수록 힘들구나
끝이 보이지 않는다
하루하루 산다
다시 시작된 배농사
가지런히 파진 구덩이
든든하다
끝은 시작이다
삶은 엄숙하다
삶은 반복이다
새로운 반복, 거룩한 반복이다
묵묵히 생명의 품되어
흙으로 산다.”-1998.11.1
흙처럼 겸손히 살라고 사람입니다. 사람(homo)과 겸손(humilitas)의 어원이 흙(humas)에서 기원합니다. 하루하루 산다는 생각은 이미 수도원 초창기부터 였습니다. 이때는 잘살고 못살고가 아닌, 하루하루의 생존(生存)이, 살아남는 것이 우선이었습니다. 더불어 제가 늘 되뇌이는 지론도 생각납니다.
“넘어지는 것이 죄가 아니라, 절망의 자포자기로 일어나지 않는 게 죄다. 넘어지면 곧장 다시 일어나 새롭게 시작하는 것이다. 끝이 새로운 시작이듯 늘 새로운 시작의 삶을 사는 것이 바로 파스카의 삶이다.”
바로 파스카의 축제시기이자 신록의 계절 성모성월인 5월의 삶의 자세이기도 합니다. 5월 교황님의 기도지향은 “남녀 수도자의 양성에 대해서”인데 수도자뿐 아니라 평생, 하느님의 사람, 그리스도의 사람, 교회의 사람, 신자가 되어가는 우리 모두에게 해당된다 싶어 일부 나눕니다.
“양성은 특별한 한 순간에 끝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평생 지적으로, 인간적으로, 감정적으로, 영적으로 계속 통합시켜 가는 과정이다. 준비는 공동체 안에서의 삶을 통해 계속된다. 공동체내에서의 삶은 비록 때로 힘들지라도, 매우 풍요롭다. 더불어 삶은 공동체내에서의 삶과 똑같은 것은 아니다. 획일성의 일치가 아니라 다양성의 일치이다. 성소의 여정중에 끊임없이 성장하도록 기도하자.”
비단 성직자, 수도자뿐 아니라 믿는 이들 모두가 자기 성소의 여정에, 참 신자가, 참 사람이 되는 가는 여정에 항구하고 충실해야 함을 배웁니다. 평생 성소의 여정, 교육의 여정, 양성의 여정에 매일미사보다 더 좋은 수행은 없을 것입니다. 바로 이런 더불어 성소의 여정에 오늘 복음은 참 적절한 도움이 됩니다.
“나는 참 포도나무요 나의 아버지는 농부이시다. 나에게 붙어 있으면서 열매를 맺지 않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다 쳐내시고, 열매를 맺는 가지는 모두 깨끗이 손질하시어 더 많은 열매를 맺게 하신다.”
무수한 가지들이 하나로 붙어있는 참 포도나무인 예수님이 상징하는바 교회의 한몸 공동체입니다. 그리스도의 몸인 참 포도나무 공동체입니다. 흡사 배밭 전지가 연상됩니다. 공동체이든 개인이든 주님과 함께 끊임없이 내외적 ‘삶의 가지치기(전지;剪枝)’를 통해 삶의 중심과 질서를 잡고 삶을 단순화해야 함을 배웁니다. 중심을 잃고 무질서한 삶중에 내적으로 무너지기 시작하면 대책이 없습니다.
“너희는 내가 너희에게 한 말로 이미 깨끗하게 되었다. 내 안에 머물러라. 나도 너희 안에 머무르겠다. 너희가 내 안에 머무르지 않으면 열매를 맺지 못한다.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안에 머무르는 사람은 많은 열매를 맺는다. 너희는 나없이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
이 대목을 묵상하면서 저는 제가 오랫동안 해왔고 때로 지도해왔던 명상기도가 생각났습니다. 주님 안에 머무르는, 더 구체적으로 주님 사랑 안에 머무르는 집중적 관상의 훈련이 바로 명상기도요 명상기도의 습관화가 우리를 내외적으로 단순하고 순수하게 해주고 주님과의 일치, 공동체와의 일치, 나와의 일치를 견고히 해준다는 것입니다. 오늘 옛 어른의 사랑에 관한 말씀도 공감이 갑니다.
“사랑은 참다운 사람이 되기 위한 근본이자 길이다.”<다산>
“사랑은 곧 사람이다. 사람과 사랑이 합해지면 그것이 바로 도다.”<맹자>
참으로 주님 사랑안에 머무르는 관상기도와 더불어 위로와 치유, 정화(淨化)와 성화(聖化), 일치와 성장이요, 주님과 상호내주(相互內住)의 일치와 더불어 풍성한 사랑의 열매를 맺게 된다는 것입니다. 사랑의 힐링에 주님 사랑 안에 머무르는 관상 수행을, 미사전례를 능가하는 것은 없습니다. 이어지는 대목이 주님 안에 머무름은 그대로 기도임을 깨닫게 됩니다.
“너희가 내 안에 머무르고 내 말이 너희 안에 머무르면, 너희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청하여라. 너희에게 그대로 이루어 질 것이다.”
주님 사랑안에 깨어 머무르는 관상기도중 강조하는 것이 하느님 말씀인 성구를 호흡에 맞춰 반복하라는 것입니다. 많이 강조하는 성구가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자비송입니다. “하느님의 아드님, 주 예수 그리스도님, 죄인인 저희에게 자비를 베푸소서” 네 단락의 성구를 호흡에 맞춰 소원을 담아 기도로 바친다면 그 사랑의 기도는 다 이루어 주신다는 것입니다.
참으로 주님 사랑 안에 머무르는 관상기도의 집중적 훈련과 습관화가 요즘 물질주의, 활동주의에 빠져, 삶의 중심을 잃고, 자기를 잃고 뿌리없이 표류하는 불행한 현대인의 치유에 참으로 필요한 기도임을 깨닫습니다. 참 죄도 많고 병도 많은 세상이니 희망이자 길이요, 생명이자 진리요, 빛이신 주님을 잊었기, 잃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영혼이 “살기위해” 이런 주님 사랑 안에 머무르는 관상기도는 절박할 수 뿐이 없습니다.
넓이보다도 깊이를, 채우기 보다는 비움을, 모으기 보다는 버림을, 행함의 기쁨보다는 존재의 기쁨을 , 주님과의 일치를 추구하는 참으로 우리에게 초연한 자유를 선사하는 관상기도 훈련입니다. “세상 안”에 머물러 표류하는 삶이 아니라 “주님 안”에 머물러, 주님 중심에 날로 믿음의 뿌리를 깊이 내리는 관상기도입니다. 우리의 정주생활에 참 좋은 도움이 되는 관상기도입니다.
율법이 아닌 사랑이 분별의 잣대입니다. 참으로 주님 사랑 안에 머무르는 수련이 우리를 자유롭게 할뿐 아니라 지혜로운 분별을 가능하게 합니다. 사랑과 지혜는 함께 가며 오늘 사도행전에서 제기되는 할례의 문제도 말끔히 해결할 수 있습니다. 결론하여 율법을 지켜서, 할례를 받아서 구원이 아니라 주님 사랑 안에 머물러 올바른 분별의 지혜를 발휘해야 구원이라는 것입니다. 안티오키아 교회는 이 난제를 해결하기 위해 바르나바와 바오로를 예루살렘 모교회의 파견했고 사도들과 원로들은 사랑의 분별, 분별의 지혜로 답을 줄 것입니다.
날마다 주님 사랑 안에 머물러 봉헌하는 미사은총이 주님 안에서 공동체의 일치를 견고히 해주고 분별의 지혜를 발휘하며 살게 합니다. 주님 사랑 안에 머무르는 사랑의 관상기도 시간이 바로 우리가 평생 날마다 바치는 이 거룩한 미사와 더불어 시편공동전례기도요, 관상의 일상화, 관상의 생활화를 이뤄주는 이 거룩한 미사은총입니다.
“너희가 많은 열매를 맺고 내 제자가 되면, 그것으로 내 아버지께서 영광스럽게 되실 것이다.”(요한15,8).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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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회(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환난 각오>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않으면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는 것처럼, 너희도 내 안에 머무르지 않으면 열매를 맺지 못한다."
오늘 주님께서는 주님 안에 머무는 사람, 자기 안에 주님을 모시는 사람은 많은 열매를 맺고, 그렇지 않은 사람은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고 하십니다.
그런데 결론처럼 얘기하면 아무리 주님 안에 머물러도 주님을 자기 안에 모시지 않는 사람이 있고 그런 사람은 아무리 주님 안에 있어도 아무 열매를 맺을 수 없습니다.
제 생각에 우리 인간은 싫건 좋건 주님 안에 머뭅니다. 그러나 무신론자가 주님을 자기 안에 모시지는 않지요.
그것은 공기 안에 머무는 것과 같습니다. 그런데 공기 안에 있으면서도 공기를 들이켜지는 않는.
그런데 왜 주님을 자기 안에 모셔 들이지 않습니까?
그 이유는 간단하고 분명합니다. 주님이 싫거나 사랑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아니면 다른 것을 더 좋아하고 사랑하여 그것이 내 안방을 차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러면 어떻게 되겠습니까?아무것도 할 수 없고 심지어 죽겠지요.
그러므로 우리는 깨달아야 합니다. 먼저 우리는 주님 안에 있다는 것부터. 세상이 아니라 주님 안에 있다는 것을. 사실은 세상도 주님 안에 있다는 것을. 하느님께서 세상을 만드시고 좋다고 하셨다는 것도.
이것들을 깨달았어도 그다음 모셔 들이는 것이 뒤따라야 합니다. 아무리 이런 사실을 깨달았어도 주님을 모셔 들이기 싫다면,앞서 봤듯이 그것은 공기 속에 있어도 공기가 싫은 것과 같고 바닷속을 휘젓고 다녀도 그 물을 들이켜기 싫은 것과 같습니다.
그런데 우리말에 ‘죽어도 하기 싫어’라는 말이 있는데 주님을 모셔 들이는 것이 진정 죽어도 싫습니까?
그렇지 않겠지요. 죽어도 하기 싫다는 말은 과장법이고, 주님을 모셔 들이지 않으면 죽게 된다는 것을 알게 되면 모셔 들일 것입니다.
사실 우리는 주님을 모셔 들이지 않아도 당장 죽지 않기에 주님이 내 안에 아니 계셔도 살 수 있고 젊었을 때는 내 힘으로 할 수 있다고 생각하곤 합니다.
그런데 사실을 얘기하면 생명 연장이고 시간 유예입니다. 잘린 가지나 수액 공급이 끊긴 가지도 가지 안에 아직 남은 수액으로 생명 유지를 얼마간 하지요.
그런데 이것이 실은 주님의 시간 유예에 의한 생명 연장입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시간을 벌어주신 것입니다. 주님께서 비유를 드신 적이 있지요.
어떤 나무가 열매를 맺지 않자 주인이 농부에게 그 나무를 베어버리라고 합니다. 그러자 농부가 한해만 시간을 더 주면 자기가 열매 맺게 해보겠노라고 청한다는 비유 말입니다.
여기서 주인은 하느님 아버지시고 농부는 주님 당신 자신이시지요. 이 비유 말씀처럼 농부이신 주님은 우리를 깨우치려고 애쓰십니다. 온갖 비유와 말씀을 가지고 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두 번째로 깨달아야 할 것은 당신을 모셔 들이지 않으면 죽게 된다는 주님 말씀을, 주님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주님 말씀을, 그저 엄포라고 무시하지 않고 정말 그런 것임을 깨달아야 하고, 깨달았다면 주님과 함께 주님 말씀도 모셔 들여야 합니다.
그래서 주님은 오늘 이렇게도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내 안에 머무르고 내 말이 너희 안에 머무르면”
주님 말씀은 엄포가 아니라 진실이고 진리임을 다시 한번 묵상하고 모시는 오늘 우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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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안에 머무르는 사람은 많은 열매를 맺는다."(요한15,5)
<성모성월!>
오늘 복음(요한15,1-8)은 지난 부활 제5주일의 복음으로 들었던 '참포도나무와 가지의 비유'입니다.
4월을 뒤로 하고, 어머니의 달이요 가정의 달인 5월입니다. 그리고 오늘은 5월 성모성월의 첫 날입니다.
우리는 성모 마리아를 공경합니다. 그리고 사랑합니다.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루카1,38)
성령의 힘으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낳아주신 '주님의 어머니'이시기 때문입니다.
"내 안에 머물러라."(요한15,4)
주님의 어머니가 되신 후 한 생을 아들 예수님 안에 머물러 계셨기 때문입니다. 당신 자신을 드러내지 않으시면서 예수님의 삶에 끝까지 함께 하셨기 때문입니다.
"이분이 네 어머니시다."(요한19,27)
그리고 또한 예수님의 이 말씀으로 성모 마리아가 우리의 어머니가 되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주님의 어머니요 우리의 어머니이시며, 신앙의 모범이신 성모 마리아를 공경하고 사랑합니다.
그리고 오늘은 성모 마리아의 배필이며 예수님의 양아버지인 요셉, 직업이 목수였던 '노동자들의 수호성인인 노동자의 요셉'을 기억하는 날입니다.
"나는 참포도나무요 나의 아버지는 농부이시다."(요한15,1)
"하느님께서 보시니 손수 만드신 모든 것이 참 좋았다."(창세1,31)
농부의 기본 모습은 '성실과 땀'입니다. 농부이신 하느님께서는 이 땅에 존재하는 모든 것을 창조하셨고, 지금도 당신의 자녀들을 통해서 당신의 창조사업을 계속하고 계십니다.
5월 성모성월을 맞이하여, 성모 마리아의 삶을 본받아 살아갈 수 있는 힘과 은총을 주님께 청하고, '구원의 전구자'이신 성모 마리아의 전구로 보다 더 예수님 안에 머물러 있으려고 애쓰는 하느님의 성실한 자녀들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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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www.youtube.com/watch?v=0Nd2TkQGBX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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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나는 참포도나무요 나의 아버지는 농부이시다."(요한 15, 1)
싱그러운
5월의 초록이
어머님의
손길처럼
설레이는
마음을 낳는
오월의
첫날입니다.
농부는
참포도나무를
통하여
농부의 길을
냅니다.
농부와
참포도나무는
다르지 않습니다.
참포도나무는
있어야 할
자리에 있으면서
구원의 열매를
맺습니다.
생명의
기쁜 소식이
복음이라면
복음은
사랑을
선택한
이들이 갖는
사랑의 참된
실천입니다.
농부는 농사로
말합니다.
농부는
마지막까지
밀고 나가야 할
농부의
참된 정신이
있습니다.
농부는
참포도나무를
떠나지 않고
참포도나무도
각별한 관계인
농부를 떠나지
않습니다.
참포도나무처럼
사는 사람들이
많아지길
기도드립니다.
우리모두
좋은 땅에
뿌리내릴 수
있다는 것은
은총입니다.
무엇보다도
생명의 근원과
삶의 본질을
직시할 수 있는
신앙은
꼭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압니다.
참포도나무이신
예수님을
우리들에게
손수 심고
보내신
아버지
하느님의 뜻안에
꼭 필요한 것이
믿는 마음임을
깨닫습니다.
마음을 담아야
참된 열매입니다.
농부와
참포도나무의
관계처럼
도움을 주는
참된 마음의
관계처럼
삶의 참된
의미를 깨닫는
오월되시길
진심으로
기도드립니다.
구원의 역사를
만들어가시는
하느님께
이 싱그러운
설레임을
봉헌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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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묵상글 나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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