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는 매일 죽었다 다시 태어나 비진리의 바깥과 표면의 세계성 위에서 참혹하게 쓰이고 비평은 그 표면의 홈들을 만지며 적히지 않은 것들을 소환 해 낸다. 글자들로 이루어진 시의 고정된 원본성은 몇 번이고 다시 읽는 비평의 눈에 의해 흩어진다. 아날로그 레코드, 바이닐 (vinyl) 에 기록되는 시인의 언어는 비평의 귀에 의해 한 올 한 올 풀려 나간다. 비평은 재생의 퍼포먼스다. ¹³) 비평은 텍스트를 몇 번이고 반복 재생함으로써 재생의 고유한 감각을 생성해나간다. 이 과정 속에서 시는 시가 되고 비평은 비평이 된다. 시 한 편을 읽어보자.
장혜령의「번역자」는 시 읽기의 재생 (play)이 어떻게 이루어질 수 있는지 탁월하게 경험할 수 있는 작품이다. 시는 총 세 부분으로, 다시 말해 세 개의 장면으로 이루어 진다. S#1은 1연부터 3연까지, #2는 4연부터 6연, 그리고 #3은 7연부터 마지막 9연까지다. 시는 우리를 응시하지만 우리는 시를 응시할 수 없다. 시는 기다리고 있다. 달아나면서도 뒤를 돌아보며 우리가 쫓아오는지 재차 확인한다. 가령, 1연의 숲'은 무수히 많은 나무들이 울창하게 들어선 원경을 응시하게끔 한다. 그러다 조금씩 눈의 초점이 조절되면서 붉은 열매의 먼나무와 까만 흑송과 물푸레나무들로 하나하나 시선을 옮겨둔다. 나무들을 통과하면 저녁 빛에 반짝이는 푸른 잎사귀가 있다. 마치 카메라의 조리개가 지-잉하고 움직이는 것처럼 시를 보는 독자의 눈은 절로 시의 표면에 머무르지 않고 그것들이 발산하는 빛의 가시광선을 따라 시어들의 이면으로 내려선다. 잎사귀에 내려앉았던 빛은 S#2에서 새 그림자를 만들고 그 그림자는 "불타버린 누군가의 혼"이 되어 다시 멀어진다. 숲을 그저 응시하던 독자의 눈은 먼나무의 붉은 슬픔과 검은 새 그림자를 지나쳐 붉게 타올랐다 검게 스러진 누군가의 혼으로 내려앉는다. 여기가 7연까지다.
1연부터 7연, 그러니까 S#2 까지 표면에 머물러 있던 시는 다음 순간 돌연, 제 몸을 화자의 뒤로 숨긴다. "이 시각 / 돌이킬 수 없는 것이 / 이곳을 스쳐 지나가고 있다" 는 말은 시의 말이 아니라 다만 독자와 함께 이 숲을 지켜보고 있던 또 다른 누군가의 전언이다. 시를 만든 사람의 실루엣이 독자에게 선뜻 다가선다. 시는 다시 진행된다. 이제는 숲이 아니라 물속으로 들어간다. S#3에서는 표면에 그려진 시의 풍경이 아니라 레코드에 파인 홈, 표면의 아래에서 발생하는 소리 풍경 (soundscape)이 제시된다. 시각적 장면화가 거두어들여지고 목소리의 파동으로만 그려지는 장면, (8연의 목소리는 #2와 #3을 매끄럽게 이어주는 음악적연결고리다. "물위에 나를 적는 사람"이라 말하는 이 또한 '나'이기에 우리는 화자가 시인으로 올라서는 순간을 목도한다. 그렇다면 물위에 '나'를 적어 내려가는 일은 결국 시를 쓰는 일과 다름없다. "흔들리면서 / 내게 자꾸 편지를 보내는 사람" 역시 시인이며, "누구인지 알 것 같다"는 말과 함께 정체의 발견에 가까워지고 있는 '그' 또한 시인이다. 결국, 이 시의 화자는 시를 쓰는 '나'를 보고 있는 '나'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서 시를 물끄러미 바라보자, 먼 곳에 모여 있는 여러 수종의 나무들로 이루어진 숲의 원경에서 우리는 화자의 내면이 바라보게 되는 또 다른 '나'를 목격하는 아주 미시적인 단위로까지 내려간다. 시는 우리를 응시의 시선에 머무르지 못하게 괴롭힌다. 불가항력적인 힘이다. 작품 외부의 현실이나 외적 맥락의 개입 없이 오직 작품의 절대적인 내부에 있는 표면만을 따라 움직인다 해도 우리는 시가 바늘로 새겨둔 홈을 따라 미끄러질 수밖에 없기에 표면이 발생시키는 이면과 그 아래를 계속해서 굴착한다.
화자는 한 곳에 서서 숲과 붉은 열매와 검은 그림자와 혼, 그리고 써도써도 지워지는 물위에 계속해서 '나'를 기입하는 '나'를 만난다. 마치 한 자리에 뿌리내린 나무가 쓴 시와도 같다. '나'를 쓰면서 쓰는 '나'를 바라보는 시선은 나무들을 보는 나무의 시선이기도 하므로. S#1에서 근경으로 줌인(zoom in)된 시선은 젖어드는 슬픔의 빛과 함께 쓰는 이의 내면으로 스며든다. 그리고 '나'의 내부를 그렇게 관통한 시선은 S#3에서 시의 표면으로 올라선 '나'의 이면의 소리 풍경으로 확산된다. 나무처럼 이동하지 않는 듯 해 보이던 표면의 활자들은 읽기를 수행하는 눈 끝에서 발각된다. 제목의 일부인 '번역'은 말하는 '나'가 시를 쓰는 '나'를 알아보게 되는 과정을 지시 하는 듯하기도 하지만 동시에 시의 표면을 읽고 파인 언어의 홈을 더듬어 나가는 비평의 독자를 가리키는 듯도 하다. 반사되거나 투사되지 않은 '나' 를 '나'의 눈으로 볼 수 있다는 것은 복수(plural)의 '나'가 있다는 말, 김개미의 '시인'처럼 장혜령의 '그' 역시도 매일 참혹한 부활을 감행한다. "다른 세계로 통하는 문"은 현실의 표면에서 시의 표면으로 수평이동하는 문이자 시가 쓰인 후 사후적으로 건너가게 되는 타자들의 거주지로 이어지는 문이다.
표면과 이면,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을 더듬어 만지고 듣는 일, 비평 사이에는 탄성이 작용한다. 둘 사이에 작용하는 유체 역학에 의해 비평이 텍스트를 만날 때마다 그것의 탄성 계수는 변화한다. 작품의 물성은 작품마다 모두 다르고, 동일한 작품이라 할지라도 비평이 언제 어느 곳에서 어떤 각도로 그것에 다가가느냐에 따라 관계의 양상은 달라진다. 비평은 시가 언어로 새긴 음반을 재생하는 퍼포먼스의 수행이다. 시의 응시 불가능성 속에서, 죽어 버린 언어를 붙들고 그 죽은 말들의 읽기를 통해 삶을 소생시키는 부활의 작업이다. 시가 매일 아침마다 참혹하게 다시 태어날 수 있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전승민 제19회 대산대학문학상, 2021년 <서울신문> 신춘문예로 평론 등단.
14)장혜령,「발이 없는 나의 여인은 노래한다」, 문학동네, 2021.
13 ) " 결국 음반으로부터 음악의 가능성을 이끌어 낸 이들은 ' 재생을 괴포먼스화'했다."신 예슬, 위의 글, p. 170. 기획 특집 2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