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희 목사 일가의 비극
한국역사 그 뒷이야기
평양신학교 14회 졸업생 중에 한경희 목사가 있다. 그는 1935년에 공산당원에게 총을 맞아 죽었고, 그의 맏아들 청옥은 공산당원으로 민족주의자에게 총을 맞았고, 둘째 아들 순옥은 해방 이후에 공산당원에게 피살당하였다. 한경희 목사 일가는 공산당원과 민족주의자들의 갈등으로 희생된 우리 민족 근대사의 한 생생한 실화이다. 그 배경을 하나하나 살펴보자.
한국과 남만주는 지리적으로 연결되어 있어서 역사적으로 언제나 교섭이 활발하였다. 더구나 일제치하에서는 일제의 착취와 생활의 곤고로 만주나 그 너머 시베리아 땅을 찾아 떠나는 이민의 행렬이 끊이지 않았다. 그곳에서는 독립운동, 특히 무장독립운동이 과격해서 일제의 군사적 대응이 극심하였기에 우리 동포들의 환난은 잠잘 날이 없었다.
우리교회는 그들의 아픔과 고난을 외면할 수 없어서 그들을 전도하면서 그들의 생활 안전을 위한 노력 또한 쉬지 아니하였다. 하지만 거기 따른 환난과 핍박도 우리 교회 역사를 피로 물들게 하고 있었다. 그래서 만주와 그 너머 시베리아에 관련된 우리 교회의 피눈물 나는 역사와 문학이 줄을 잇고 있다. 총회록이나 연회록에 그런 사건들이 즐비하여 눈물 없이 읽어 내려갈 수가 없다. 이광수나 박계주, 임옥인, 박종화, 안수길 그리고 전영택의 문학들이 그 대표적인 것들이다.
한경희 목사는 1914년 평양 장로회신학교 졸업 이전부터 남만주 전 지역 여러 곳을 순회하며 전도한 남만주 전도의 대사도였다. 더구나 그는 가는 곳마다 우리 겨레들의 비참한 살림을 목격하고는 농민공사, 기독교협진회, 농무조합, 한족동향회 등을 조직하여 생활안전이라든가 우리 겨레들의 단결에 힘을 기울였다.
그러다 보니 자연 민족주의를 고취하게 되었고 그래서 일경의 요시찰 인물로 항상 미행당하는 처지였다. 실제로 1924년 그는 장로교 총회에 참석하기 위해 압록강을 건너다가 일경에 체포되어 얼마동안 고생하였다. 그러다가 1928년에 다시 체포되어 신의주 법원에서 3여 년의 징역 선고를 받고 옥고를 치렀다.
그런데 그런 아픔이 계속되고 있는 동안 그의 가족에겐 또다른 비극이 시작된다. 그의 맏아들 한청옥이 민족주의자가 쏜 총을 맞고 죽게 된다. 한청옥은 아주 악명 높은 공산주의자로 알려져 있었다. 그는 만주의 관동군관학교를 졸업한 과격 공산주의자로, 한때 교회의 영수 일과 학교의 교감 일까지 보았던 인물이다. 다른 기록에는 만주의 비족에게 총을 맞았다고 되어 있으나 안광국 목사는 그것이 민족주의자였다는 기록을 남겼다. 공산주의자로서 민족주의자에 의해 죽은 것이다.
이런 슬픔을 안고 한경희 목사는 출옥 후 한 1년 동안 의산노회의 창성교회에서 목회하였다. 그러나 그는 결국 다시 만주로 되돌아간다. 만주의 동포들을 잊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1933년 겨울, 총회 전도부 파송 목사로 다시 간 것이다.
한경희 목사와 그 아들의 순교
한경희 목사의 순교에 대한 기록은 1935년도 제25회 장로교총회 총회록에 장장 11페이지에 걸쳐 자세하게 일대기 형식으로 게재되어 있다. 이런 일은 실로 예외적인 일이다. 한경회 목사가 출옥 후에 다시 찾아간 곳은 저 먼 북만주 지역이었다. 길림성 북지방이었는데 그곳은 공산주의자들이 대거 활동하던 험악한 지역이었다.
1935년 1월 1일 한경희 목사는 새해 신년 예배를 마치자마자 교인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일행 몇 사람과 함께 흑룡강 부근의 호림으로 떠났다. 설날의 기쁨을 누리는 것보다는 저 비참한 지역에서 눈물짓는 동포들을 위로함이 더욱 기쁘며, 주의 도를 전하다가 악당들에게 죽임을 당하는 것이 더 신성하다는 말을 남기고 떠났다. 거기까지는 무사했다. 그러나 그는 거기를 떠나 다시 다른 교회로 가던 중 오소리강을 건너게 되었는데 거기서 40여 명의 공산당원들에게 붙잡혀 순교의 길을 떠난다.
1935년 1월 4일 오후 2시경의 일이다. 한경회 목사가 건너가던 오소리강은 그 때 얼음이 얼어서 그 두께가 6척 이상이었다고 한다. 거기서 그는 40여 명의 공산당원들에게 붙잡힌다. 그의 큰 아들 청옥이 공산당원이었으니 혹시 이들이 한경희 목사를 알고 있었을 가능성이 전혀 없지 많았다. 그 아들은 악명 높은 공산당원이었기 때문이다. 이들은 한경희 목사를 붙잡고 일본의 스파이라는 누명을 씌웠다. 그리고 그 추위 속에서 두 시간 남짓이나 가진 악형을 다하며 고문을 하였다.
아무 증거도 찾지 못한 이들은 결국 그 두터운 얼음을 사람들을 집어넣을 만큼 깨고, 그 속에 한 목사를 그대로 던져 넣으려 했다. 그러나 다른 일행이 도망가려하자 결국 총살하고 그 시체를 얼음물 속에 집어넣었다. 만주 벌판 살을 베는 듯한 추위와 찬바람이 곡하듯 흘러갔다. 결국 그의 시체는 찾지를 못하였다. 그리스도를 위하여 그리고 이역 천만리에서 외롭게 지내는 우리 동포들을 위하여 우리 한경희 목사는 그렇게 영광의 하늘나라에 간 것이다.
이 순교의 사실이 알려지게 된 것은 두 주일이 지난 2월 25일의 일이었다. 그의 아들 순옥이 그의 삼촌에게 쓴 글에서 처음 그 사실이 드러 것이다. 그 글이 당시 총회장이던 이인식 목사에 의해서 기독신보에 전재된 것이다. 기독신보는 한경희 목사의 순교에 대하여 사설을 두 번씩이나 실었다.
한데 그의 둘째 아들 순옥 역시 해방 이후에 공산당원에게 총살된다. 그는 본래 공산당원이었다. 하지만 부친의 순교 이후에 만주신학원을 졸업하고 해방 이후에 목사가 되어 평안북도 용천에서 잠시 목회를 한 일이 있다. 그러나 그의 전력 때문에 그랬는지는 몰라도 공산당원에게 피살되어 행방이 요원해지고 말았다.
우리는 한경희 목사 일가의 뼈아픈 비극에서 한국 민족 근대사의 통절한 대본을 보는 듯하다. 두 사람은 공산당에게, 한 사람은 민족주의자에 희생되는, 그 비극이 예사이던가.
(한국장로신문 / 민경배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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