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대통령의 상징 標章은 봉황이다.
언제부터 국가 원수의 상징이 봉황이었을까?
조선시대는 용이었는데, 왜 지금은 용이 아닐까? 이런 의문들을 갖고 있었다.
그런데 최근 이와 관련된 논문을 찾아서 읽어볼 수 있었다.
김수진, <한국 봉황 표장의 기원과 정치학>, [한국학 그림을 그리다.]. 태학사, 2013년. 357~372쪽 .
이 논문을 읽다보니, 우리가 전통이라고 했던 것에 대한 많은 회의가 들었다.
이 논문의 주요 내용을 요약해 본다.
조선 임금의 상징은 일월오봉도라는 사실은 널리 알려져 있다.
조선 왕이 통치한 대상과 치세의 이데올로기를 시각적으로 응축된 이 그림은
16세로 거슬러 올라가며, 현재 약 30점 이상 유물이 남아있다.
일월오봉도는 국왕의 정무를 보는 궁궐 정전, 행사장 어좌, 빈전과 혼전, 영정 초상 뒤에도 놓였다.
왕의 존재를 표상하는 곳이라면 어디든 사용되었다. 궁중 기록화에 국왕을 직접 그리는 것이 금지되었기
때문에, 빈 어좌 뒤에 일월오봉도를 배치해 국왕의 존재를 대신하기도 했다.
일월오봉도는 국왕만이 전유할 수 있는 도상이었다.
그런데 일본 궁내청에 소장된 인정전 사진첨 가운데는 인정전에 일월오봉도가 아닌, 한 쌍의 봉황이 그려진
패널이 설치되어 있다. 이 그림은 현재 국립고궁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봉황도가 제작된 것은, 대체로 1908년에서 1917년 사이, 특히 1908년 전후일 가능성이 크다.
봉황은 온갖 상서로운 새들의 우두머리로, 상상의 새다. 동양에서 성군과 현인을 의미하고, 용과 함께
군왕의 상징으로 사용되기는 했다. 하지만 조선시대 봉황은 유일한 통치자의 상징은 아니었다.
국왕의 행렬 기물에서 봉황은 대형 교룡기 다음 차례에 작은 크기로 위치하면서,
청룡, 백호, 현무, 주작으로 구성된 사수기와 같은 지위를 가진 벽봉기로 제작되었을 뿐이다.
엄밀히 말해 조선시대에 봉황은 용보다 서열이 낮은 것으로, 단독으로 국왕을 상징한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인정전 봉황도는 조선 왕실 배부의 전통이 아닌, 일제의 선택이었다.
그런데 이런 봉황은 1956년 이승만의 3번째 대통령 취임식 때 봉황 한쌍이 도상으로 사용되기 시작했다.
해방 이후 창덕궁 인정전이 중요한 정치 거점으로 사용되었고, 국정과 외교의 장으로 기능했던 것이
원인이었을까?
1967년 제정된 조례 '대통령의 지위와 권위를 상징하는 표장'인 봉황은 새롭게 창조된 것이 아니었다.
조선시대 군왕의 존재를 상징한 일월오봉이 일제 강점기에 창덕궁에서 봉황 도안으로 대체되고,
이승만과 박정희 시대를 거치면서, 봉황이 국가 원수의 상징으로 자리잡은 것이다.
2008년 17대 대통령 취임식에서 대통령 상징으로 사용되는 청와대 봉황 표장 대신,
태평소와 북을 결합한 태평고 표장 을 만들었는데, 취임식 15일 전 숭례문화재가 발생하자,
봉황 포장을 없애려 했기에, 남방을 상징하는 남주작의 화신인 봉황이 남대문에 저주를 내렸다는 식의 비방이 일어나, 태평고 도안은 취임식에서 한 차례만 사용되고, 이후로 다시 봉황 표장이 사용되고 있다.
윤보선 대통령의 며느리가 남긴 회고담에는 청와대에서 사용한 무궁화와 태극 문양 식기도, 윤보선 대통령이 직접 디자인해 서울 시내 그릇 가게에 주문한 것이라고 한다.
봉황이 국가 원수의 상징이 된 과정은 역사적 검증이나, 체계적인 협의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 아닐 가능성이
높다. 봉황이 국가 원수의 상징이 된 것은 오래된 전통은 아닌 셈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