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안 항일운동기념관
소안 항일운동기념관은 소안도 출신의 애국선열들과 항일 투쟁의 역사를 교훈으로 남기기 위해 2003년에 건립됐다. 일제강점기 독립 유공자 20인의 얼굴 조각을 전시해 추모하고 있으며 항일 운동 관련 영상을 상영하고 있다. 사립소안학교에서 사용한 교과서, 신문 기사 등 당시의 유물도 전시돼 있다.
소안도 사립소안학교
독립운동가 20명을 포함해 89명의 독립운동가를 배출한 완도 소안도는 항일의 땅, 해방의 섬이다. 소안도가 항일의 땅이라 불리게 된 본격적인 투쟁은 토지반환소송에서 시작된다. 1905년 을사늑약 체결 이후 일제는 조선 왕가의 환심을 사기 위해 소안면민들이 경작해오던 토지를 사도세자 5대손인 이기용에게 자작(子爵)이란 작위와 함께 소유권을 이전한다. 당시 이기용은 수조권만 갖고 있었고, 경작권은 주민에게 있었다. 소안도 토지의 소유권 이전은, 주민들에게는 '마른하늘에 날벼락'이었다. 이에, 소안도 면민들은 최성태 등 4명의 면민 대표를 뽑아 토지소유권 반환 소송을 벌인다. 13년간의 법정 투쟁 결과 1921년 2월, 소안도 6천여 면민이 승소한다. 당시 조선일보는 5월 17일자에 "소안은 집요한 토지계쟁사건에 귀가 익은 곳이다. 13년 동안 다투어 얻은 토지는 이미 민유지로 해결됐다"는 기사를 싣기도 했다.
소송에서 이긴 주민들은 이 일을 기념하여 1923년 사립 소안학교를 세운다. 소안도에는 1913년 설립된 소안 중화학원이 있었다. 소안도 면민들은 토지를 지켜내자 그 기념으로 중화학원을 정식 학교로 승격시키기 위한 자금 1만 454원을 모금하였는데, 지금 가치로는 1억이 훨씬 넘는 금액이다. 따라서 사립 소안학교에는 '배움만이 살길이고, 항일의 길'이라는 소안면민들의 열망이 묻어 있다. 사립 소안학교가 다른 사립학교와는 다른 특별한 이유다.
사립 소안학교는 일제의 통제하에 있는 공립학교와는 달리 민족의식을 깨우치기 위해, 한국의 역사와 국어를 중심으로 독립군가, 독립가, 청년가 등의 노래를 가르쳤다. 일제의 축제일에 휴교하지 않고 일본 국기도 게양하지 않았으며 일본의 국상(國喪) 기간에도 상장(喪章)을 붙이지 않았다. 사립 소안학교는 일제에게 눈엣가시였다. 이에 일제는 1927년 5월 사립 소안학교를 강제 폐쇄했다.
이에 소안면민은 거세게 항거했다. 당시 중외일보는 '군수와 시장이 출동하여 돌연 학교 폐쇄(중외일보 5월 16일자)', '호별 방문하여 의견 청취 결과 소안교 폐지 반대 절대다수(중외일보 6월 15일자)'. '사립 소안학교 복교동맹 조직, 동맹원 700여 명(중외일보 7월 6일자)' 등의 제목을 달아 보도했다. 그러나 1927년 11월 배달청년회 사건으로 소안도의 민족운동가들이 대량 구속되면서, 사립 소안학교 복교 운동은 좌절되고 만다.
지금의 사립소안학교(항일의 정신적 산실이며 현재는 도서관으로 활용 중이다)는 2005년 주민들의 기금으로 복원한 것이다.
[소안 항일운동기념관 & 사립소안학교] 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