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도타기
정호승
눈 내리는 겨울밤이 깊어갈수록
눈 맞으며 파도 위를 걸어서 간다.
쓰러질수록 파도에 몸을 던지며
가라앉을수록 눈사람으로 솟아오르며
이 세상을 위하여 울고 있던 사람들이
또 이 세상 어디론가 끌려가는 겨울밤에
굳어 버린 파도에 길을 내며 간다.
먼 산길 짚신 가듯 바다에 누워
넘쳐 버릴 파도에 푸성귀로 누워
서러울수록 봄눈을 기다리며 간다.
다정큼나무 숲 사이로 보이던 바다 밖으로
지난 가을 산국화도 몸을 던지고
칼을 들어 파도를 자를 자 저물었나니
단 한 번 인간에 다다르기 위해
살아갈수록 눈 내리는 파도를 탄다.
괴로울수록 홀로 넘칠 파도를 탄다.
어머니 손톱 같은 봄눈 오는 바다 위로
솟구쳤다 사라지는 우리들의 발
사라졌다 솟구치는 우리들의 생(生)
-<슬픔이 기쁨에게>(1979)-
해설
[개관 정리]
◆ 성격 : 상징적, 의지적, 적극적
◆ 표현 : 눈의 이미지 변화(겨울눈 → 눈사람 → 봄눈)
평서형 종결어미를 통해 담담하고도 의지적인 태도를 드러냄.
◆ 중요시어 및 시구풀이
* 눈 내리는 겨울밤이 깊어 갈수록 → 혹독하고 냉혹한 현실
* 눈 맞으며 파도 위를 걸어서 간다. → 현실의 어려움을 고스란히 맞이하여 겪고
있는 화자의 모습
* 파도 → 눈의 파도 = 거친 눈발 = 냉혹한 현실
* 쓰러질수록 파도에 몸을 던지며 → 눈 위에서 쓰러질수록 오히려 눈 속에 온몸을
던지는 모습
* 가라앉을수록 → 고통이 더해 갈수록
* 눈사람 → 눈을 온몸에 뒤집어 쓴 사람, 고통에 굴하지 않고 희망을 잃지 않고
당당히 맞서 싸우는 사람
* 이 세상을 위하여 울고 있던 사람들 → 불합리와 모순과 폭압적인 권력에 대항하며
싸우던 사람들
* 굳어 버린 파도에 길을 내며 간다. → 냉혹하고 억압적인 현실을 개척하고자 하는 의지
* 바다 → 눈의 바다(눈바다), 눈밭
* 푸성귀 → 봄눈(희망)을 기다리는 화자의 작은 모습
* 봄눈 → 봄이 올 것을 알려주는 눈, '희망'의 상징
* 다정큼나무 → 장미과의 상록 활엽 관목
* 몸을 던지고 → 현실에 저항하다 희생된 모습
* 칼을 들어 파도를 자를 자 → 현실에 대한 극복 의지와 투쟁정신을 지닌 사람
* 저물었나니 → 잠들어 있는 모습
* 인간에 다다르기 위해 → 인간다운 삶에 대한 바람
* 눈 내리는 파도를 탄다. → 한겨울(냉혹한 현실)을 헤쳐나가는 화자의 몸짓
* 어머니 손톱 같은 봄눈 → 생각만 해도 정겨운 봄눈
* 솟구쳤다 사라지는 우리들의 발 → 한겨울을 헤쳐 나온 우리들의 수고는 잊혀질
것이다.
* 사라졌다 솟구치는 우리들의 생 → 그러나 그러한 우리의 몸짓은 계속될 것이다.
◆ 제재 : 파도타기 → 폭설이 내리는 한겨울을 헤쳐 나가는 시적 화자의 몸짓
◆ 주제 : 혹독한 현실의 극복 의지
[시상의 흐름(짜임)]
◆ 1~2행 : 혹독한 현실에 처함.
◆ 3~7행 : 고통의 현실에서 발견한 희망
◆ 8~10행 : 희망을 기다리며 살아감.
◆ 11~15행 : 현실 극복에 대한 강렬한 의지
◆ 16~ 끝 : 치열하게 살아가는 현실의 삶
[이해와 감상의 길잡이]
이 시는 '겨울 눈'이 지닌 혹독한 현실이라는 이미지를 사용하여, 현실 극복의 의지를 형상화하고 있다. 이 시에서 '파도타기'는 폭설이 내리는 한겨울을 헤쳐 나가는 시적 화자의 몸짓을 의미한다. 폭압적인 현실이 밀려와 시적 화자를 가로막더라도 밝은 미래에 대한 믿음과 희망을 가지고 극복해 나가겠다는 것이다. 이 시에서 말하는 극복된 현실은 바로 '인간에 다다름'이라고 볼 수 있는데, 이는 인간다운 삶과 정의로운 사회를 의미하는 것이다. 현실 상황은 이러한 올바른 사회를 이루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들을 어디론가 끌고 가고 있지만, 힘이 약한 자들이나 굳센 의지를 가진 자들 할 것 없이 자신의 모든 것을 내던지고 부조리한 사회와 싸웠음을 기억하며, 시적 화자도 의지를 불사르고 있다.
[작가소개]
정호승 Jeong Ho-seung시인
출생 : 1950. 1. 3. 경상남도 하동
학력 : 경희대학교 대학원 국문학 석사
수상 : 2008년 제23회 상화시인상, 2001년 제11회 편운문학상,
2000년 제12회 정지용문학상, 1989년 제3회 소월시문학상
작품 : 도서, 오디오북, 공연
1950년 경남 하동에서 태어나 대구에서 성장했다. 경희대 국문과와 동 대학원을 졸업했다. 1972년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동시 「석굴암을 오르는 영희」가, 1973년 대한일보 신춘문예에 시 「첨성대」가, 1982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단편소설 「위령제」가 당선돼 작품활동을 시작했으며 ‘반시(反詩)’ 동인으로 활동했다.
시집으로 『슬픔이 기쁨에게』, 『서울의 예수』, 『새벽편지』, 『별들은 따뜻하다』, 『사랑하다가 죽어버려라』, 『외로우니까 사람이다』, 『눈물이 나면 기차를 타라』, 『이 짧은 시간 동안,』 『포옹』, 『밥값』, 『여행』, 『나는 희망을 거절한다』등이,
시선집으로 『내가 사랑하는 사람』, 『흔들리지 않는 갈대』, 『수선화에게』 등이, 동시집 『참새』, 영한시집 『부치지 않은 편지』, 『꽃이 져도 나는 너를 잊은 적 없다』,
어른을 위한 동화집 『항아리』, 『연인』, 『울지 말고 꽃을 보라』, 『모닥불』, 『기차 이야기』 산문집 『내 인생에 힘이 되어준 한마디』, 『내 인생에 용기가 되어준 한마디』, 『당신이 없으면 내가 없습니다』, 『우리가 어느 별에서』, 『소년부처』 등이 있다.
소월시문학상, 정지용문학상, 편운문학상, 가톨릭문학상, 상화시인상, 공초문학상, 김우종문학상, 하동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언제나 부드러운 언어의 무늬와 심미적인 상상력 속에서 생성되고 펼쳐지는 그의 언어는 슬픔을 노래할 때도 탁하거나 컬컬하지 않다. 오히려 체온으로 그 슬픔을 감싸 안는다.
오랜 시간동안 바래지 않은 온기로 많은 이들의 마음을 치유하는 그의 따스한 언어에는 사랑, 외로움, 그리움, 슬픔의 감정이 가득 차 있다.
언뜻 감상적인 대중 시집과 차별성이 없어 보이지만, 정호승 시인은 ‘슬픔’을 인간 존재의 실존적 조건으로 승인하고, 그 운명을 ‘사랑’으로 위안하고 견디며 그 안에서 ‘희망’을 일구어내는 시편 속에서 자신만의 색을 구축하였다.
‘슬픔’ 속에서 ‘희망’의 원리를 일구려던 시인의 시학이 마침내 다다른 ‘희생을 통한 사랑의 완성’은, 윤리적인 완성으로서의 ‘사랑’의 시학이다. 이 속에서 꺼지지 않는 ‘순연한 아름다움’이 있는 한 그의 언어들은 많은 이들의 가슴에서 지워지지 않을 것이다.
첫댓글 눈 내리는 파도
감사합니다.
무공 김낙범 선생님
댓글 주심에 고맙습니다.
오늘도 성큼 다가온 가을의
초미에서 건필하시길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