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현대사는 민족 정기를 바로 세울 기회를 놓쳐버렸다. 58년 전 친일파의 과오를 정리하고자 했던 반민특위(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1948년 10월∼49년9월)가 와해됨으로써 일제 때 득세했던 이들은 더더욱 권력의 중심부에서 위세를 떨쳤다. 반성을 생략한 그들의 출세는 진실의 은폐·왜곡을 낳았고 오늘날 과거사 논쟁의 원인(遠因)이 되고 있다. 해방 후 나라의 기틀을 잡고 경제 성장을 주도한 그들 파워엘리트의 공(功)은 공대로 평가하되, 이젠 감춰진 이력도 밝힐 때가 됐다. 그 시대를 증언할 사람들은 이제 얼마 남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에 세계일보는 민족문제연구소와 함께 ‘1∼3공화국 파워엘리트’의 해방 전 이력을 추적, 각종 기록물과 중국 옌지(延吉) 룽징(龍井) 등지에서 확인된 그들의 행적과 왜곡된 역사를 4회에 걸쳐 연재한다.‘파워엘리트 해방 전 이력 분석’은 해방 이후 권력을 향해 약진한 일제 협력 세력의 행로를 여실히 보여준다. 단연 눈길을 끄는 것은 박정희 전 대통령(이하 직함 생략)으로 대표되는 ‘만주 군맥’이다. 이들 대다수가 일본 괴뢰국인 만주국 군대에서 1945년 일제가 패망할 때까지 침략전쟁에 참여했다. 해방 후 귀국한 ‘만주 군맥’ 은 군부를 장악했으며, 1961년 5·16 군사쿠데타를 계기로 정치의 전면에 등장한다.
◆파워엘리트의 산실 ‘만주 군맥’
= “1932년 일본이 중국 동북지방을 점령한 뒤 세운 만주국은 조선인들에게 ‘기회의 땅’이기도 했어요. 많은 사람들이 돈을 벌려고, 또는 출세를 위해 압록강을 건너 만주로 향했지요. 박정희도 그 중 한 명이었습니다.” 중국 옌벤대 박창욱(79) 명예교수는 만주국에 대해 이렇게 설명했다. 이런 환경에서 만주 군맥이 형성됐다. 그 뿌리는 만주군 군관을 양성하던 봉천군관학교와 신경군관학교(정식 명칭은 ‘만주군 육군군관학교’)다.이 학교 출신 중 우수한 조선인 엘리트들은 졸업 후 일본 육사에 입학했다. 박정희(신경2기·일본육사 57기·만주군 중위)를 비롯해 정일권(봉천5기·일본육사 54기·만주군 헌병 대위), 백선엽(봉천9기·간도특설대 중위), 이한림(신경2기·일본육사 57기·만주군 중위), 김석범(봉천5기·간도특설대 대위), 신현준(봉천5기·간도특설대 대위) 등이 대표적이다. 원용덕(만주군관학교 교의·중령)과 김창룡 해방 후 이들은 모두 귀국해 권력을 향해 ‘돌진’했다. 가장 앞서간 사람은 정일권이다. 그는 일찌감치 육참총장(1950년6월∼51년6월, 54년2월∼56년6월)과 합참의장(56년5월∼57년5월)에 올랐다. 합참의장을 끝으로 예편했지만, 그의 ‘화려한 이력’은 5·16군사쿠데타로 박정희가 권력을 잡으면서부터 더해졌다. 그는 박정희 정권에서 외무부 장관(63년), 국무총리(64년), 국회의장(73년)을 지냈다.원용덕과 김창룡도 일찌감치 1공화국에서 군부를 주도했다. 헌병사령관 원용덕은 1952년 계엄사령관으로 임명돼 이승만 대통령1961년 5·16군사쿠데타에는 김동하(신경1기), 김윤근(신경6기), 박창암(간도특설대 출신) 등 만주 군맥이 참여했다. 박정희의 군관학교, 일본 육사 동기인 이한림은 1군사령관 시절 5·16에 반대하다 체포돼 강제 예편되는 등 시련을 겪지만 건설부 장관(69년)에 오르며 재기했다.만주군 출신들은 때론 견제하면서도 결정적 순간에 서로를 도우며 ‘권력 집단’을 형성해갔다. 육사 1중대장이던 박정희가 1948년 11월 남로당 활동 혐의로 체포돼 처형될 위기에 처했을 때 그의 구명을 위해 만주 군맥이 움직였다.1948년 ‘숙군’(군내 좌익세력 제거) 당시 여순반란사건
결국 박정희는 형(무기징역)집행정지로 풀려나 문관 생활을 하다 6·25발발 5일 뒤 현역에 복귀했다. 백선엽은 1959년 합참의장을 거쳐 1960년 예편한 뒤 교통부 장관(69년) 한국종합화학 사장(71년)을 지냈으며 현재(87세) 국방부 군사편찬자문위원장을 맡고 있다. 만주군 간도특설대 대위였던 신현준, 김석범은 각각 초대 해병대사령관, 2대 해병대사령관을 지냈다.
◆ 친일 명문가의 탄생
= 일제 협력자 중에선 대를 이어 일본 정부에 협력한 경우가 더러 눈에 띈다. 이런 집안 중 상당수는 일제 때 내내 영화를 누렸고 해방 후에도 선대의 부를 기반으로 ‘권문세가’가 됐다. 친일이 ‘가문의 영광’을 가져온 셈이다. 일제 때 경성복심법원(현 서울고법) 판사로 재직한 민복기 전 대법원장은 1910년 한일 병합조약조선은행장군의 아들
◆ 군·경찰
= 군·경 수뇌(합참의장·육참총장·경찰총수)의 경우 항일 경력자 비율이 2.1%로 가장 낮다. 전체 48명 중 1950년 두 달간 치안국장을 지낸 장석윤(임시정부 연락관) 한 명뿐이다. 반대로 직업상 침략전쟁과 식민통치의 최일선에 섰던 일제 군인과 경찰이 해방 후 대거 그대로 기용된 점을 감안할 때 일제 집행·협력기관 이력자 비율은 가장 높을 법하다. 하지만 분석 결과는 달랐다. 일제 집행·협력기관 이력자 비율은 39.6%(19명)로 전체 평균(45.1%)에 못 미쳤다.
이는 군과 경찰을 분리해서 보면 이유가 확연해진다. 우선 군 수뇌 27명 중 일제 집행·협력기관 이력자 비율은 56%(15명)로 전체 평균보다 높다. 반면 경찰총수(치안국장)의 경우 전체 21명 가운데는 19%(4명)로 비율이 가장 낮았다. 노덕술과 같이 악명 떨치던 고문 경찰관이 해방 후 그대로 기용돼 출세가도를 달리던 당시 현실과 동떨어진 통계다. 이는 해방 전 이력이 여러 기록들로 확인되는 군과 달리 경찰의 경우 기록 멸실 등으로 해방 전 공직 이력 자체가 확인되지 않는 인사가 수두룩하기 때문인 것으로 분석된다. 경찰 수뇌의 66.7%(14명)는 해방 전 행적이 제대로 파악되지 않았다. 예를 들면 치안국장 김장흥(1954∼56)은 똑같은 한자 이름 ‘金長興’이 1932·33·37년도 일제 경찰직원록에서 ‘종로서 순사’로 재직한 기록이 발견됐으나, 동일인 여부를 확인할 수 있는 추가 자료가 없어 ‘0’(행적 미확인)으로 분류할 수밖에 없었다.
= 만주국엔 ‘대동학원’이란 고등교육기관이 있었다. 이 학교 졸업장은 만주국 정부의 고급관리 임명장이나 마찬가지여서 1930∼40년대 중국, 일본, 조선 수재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고 한다. 최규하 전 대통령도 이 학교를 다녔는데, 졸업만 했을 뿐 관리로 임명된 기록은 없다. 일단 최규하 측은 “결코 친일이 아니다”는 입장이다. 일본의 대륙침략 정책과 연결된 대동학원을 나온 것은 사실이나 관리로 임용될 수 있는 특권을 스스로 포기했다는 주장이다. 하지만 박창욱 교수는 “최규하가 대동학원 졸업 후 귀국해 조선총독부의 촉탁이 됐다는 얘기를 최씨 친척으로부터 직접 들었다”며 “그가 ‘만주국 친일파’는 아니지만 귀국 후 친일 여부는 규명돼야 한다”고 말했다.
특별취재팀=류순열·김태훈 기자
2006년 8월 6일 (일) 20:04 세계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