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뭐가 그리 어려우냐? 그냥 흘러가는 대로 살아라
흑사맹은 수많은 흑도방파의 모임이었다. 처음에는 그저 이익을 위해 모이기 시작했지만 지금에 와서는 애초의 이유와는 전혀 상관없이 맹 자체가 거대한 힘을 가지게 되었다.
현재 흑사맹은 흑도방파의 모임이라기보다는 하나의 커다란 사파라고 하는 것이 더 적당했다.
처음 흑사맹에 가입했던 방파들 중 큰 곳이나 요충지에 있는 곳은 흑사맹의 지부로 전락했다. 그 근처에 있던 작은 방파들도 모조리 흡수되어 버렸다.
흑사맹의 맹주는 그 모든 힘을 한 손에 쥐고 휘두를 수 있다. 참으로 매력적인 자리인 것이다. 현 흑사맹의 주인은 마염공(魔炎公) 동방극이었다.
동방극은 오로지 강한 무공 하나로 흑사맹주의자리에 오른 인물이었다. 저지하는 세력도 없었고, 수하도 없이 홀로 싸워 맹주 자리를 차지한 인물이었다.
그렇게 맹주가 되어 처음에는 힘겨운 시간을 보냈지만 지금은 맹의 모든 것을 장악해서 그야말로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둘렀다.
동방극은 의자에 비스듬히 기댄 채 수하의 보고를 듣고 있었다. 보고를 모두 들은 동방극은 나른한 표정으로 수하를 슬쩍 쳐다봤다.
그저 한 번 쳐다봤을 뿐인데도 보고를 하던 수하는 사색이 되어 지라에 그대로 엎어졌다.
"아주 처참하게 당했군. 그래서 마창관은 어떻게 되었나? 죽었나?"
"아직 입니다. 하지만 곧 죽을 것 같습니다."
동방극이 고개를 끄덕였다. 마창관을 대신할 사람은 얼마든지 있다. 하지만 조양은 그렇지 않다. 조양 같은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조양은?"
"지부를 수습 중입니다."
"그놈이라면 믿을 수 있지. 오대세가의 움직임은?"
"물밑으로 정신없이 움직이고 있습니다. 조만간 중소 무가들을 한데 모을 모양입니다. 이번 일이 계기가 되어 수많은 중소 무가들이 정협맹에 가입할 기세입니다."
동방극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표정만으로는 좋아하는지 그렇지 않은지 알 수가 없었다.
보고를 하던 사내는 조심스럽게 분위기를 살피다가 조금 안도했다. 사실 보고 내용을 확인하고는 목숨을 걸었다.
종종 보고를 올리다 반병신이 된 사람들도 꽤 되는지라 걱정을 많이 했다. 한데 오늘은 웬일인지 동방극의 표정이 평온했다.
"그나저나 뇌룡인지 뭔지에 대해서는 왜 보고를 안 하는 게냐?"
동박극의 갑작스런 말에 사내는 사색이 되어 말을 더듬었다.
"그, 그것이 종적이 너무나 묘연합니다. 게다가 나타났을 당시 얼굴을 본 사람이 한 명도 없는데다가 평소에 뇌기를 뿜으면 다니는 사람은 없는지라 찾아내는데 어려움이 많습니다."
"하긴 그렇겠지. 뇌룡이라, 뇌룡...... 감이 좋지 않아."
동방극은 한참이나 생각에 잠겼다. 그러더니 손을 몇 번 휘저으며 말했다.
"이만 물러가라."
"저......"
사내는 동방극의 말에도 물러갈 생각을 하지 않고 입을 열었다. 동방극의 눈썹이 한 번 꿈틀거렸다.
"하남지부에서 증원을 요청했습니다."
"증원? 그게 뭔 개소리냐?"
"그러니까 뇌룡을 상대할 만한 고수를......"
사내의 말에 동방극이 피식 웃었다.
"웃기는 놈이군. 수습이나 똑바로 하라고 전해."
"존명."
사내가 바람처럼 물러갔다.
동방극은 쏜살같이 도망가는 수하의 모습을 잠시 못마땅하게 쳐다보다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자리에서 일어난 동방극은 의자를 앞으로 당겼다.
그그그긍.
기관이 돌아가는 소리와 함께 의자 뒤 바닥에 구멍이 생겨났다. 동방극은 천천히 구멍 안으로 들어갔다.
"오셨소?"
"이렇게 대낮에 찾아오면 좀 곤란하지 않겠소?"
동방극은 눈을 빛내며 온통 흑의로 몸을 도배한 사내를 노려봤다.
고작 서른이나 됨직한 사내였지맘 몸에서 흘러나오는 기세는 감히 동방극도 경시하지 못할 정도로 대단했다. 동방극은 이 사내를 볼 때마다 가슴이 시려왔다.
'끝을 알 수 없는 놈.'
아마 싸우면 자신이 절대 이길 수 없을 것이다. 아직 싸워보지도 않은 상황에서 이런 패배감을 안겨주는 사람은 그가 처음이었다.
"무슨 일이오?"
흑의 사내는 동방극을 물끄러미 쳐다봤다. 물처럼 잔잔한 기세가 은은히 퍼져 나갔다. 동방극은 흠칫 놀라 걸음을 멈췄다.
"뇌룡은 잡을 수 있겠소?"
동방극은 사내의 말에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모욕감에 눈동자가 흔들렸다.
"나를 뭐라고 생각하는 거요? 난 흑사맹주요!"
뇌룡이라는 자가 아무리 대단한 고수라 하더라도 흑사맹 전체를 상대로 이길 수는 없다. 그것은 그 누구라도 마찬가지다.
설사 눈앞에 있는 흑의 사내라 하더라도 마찬가지다. 아니, 십대고수 중 세 손가락 안에 꼽히는 굉뢰번천장이라 하더라도 마찬가지다.
게다가 흑사맹주인 마염공 동방극도 십대고수 중 하나였다.
"은왕께서 뇌룡을 원하고 계시오."
은왕이라는 말에 동방극이 입을 다물었다. 은왕이라는 이름이 주는 긴장감에 몸이 조금씩 떨려왔다.
"은왕꼐서 그를 왜 원하시는 거요?"
"얼마 전 흡혈광마가 벼락에 맞아 죽었소."
사내의 말에 동방극의 눈이 커졌다.
"그럼 설마 뇌룡이......!"
"아직 확인된 건 아니요. 하지만 그럴 가능성이 높아졌소."
흡혈광마는 구대흉마 중 하나다. 동방극은 구대흉마가 은왕의 수하라는 사실을 아는 몇 안 되는 사람 중 하나였다. 당연히 구대흉마가 얼마나 강한지도 알고 있다.
뇌룡이 규대흉마를 죽일 정도의 실력을 가지고 있다면 정말 상상을 초월하는 강자란 뜻이다.
"원한다면 오장로와 육장로를 붙여 주시겠다 하셨소."
동방극의 눈이 빛났다. 장로라는 것은 구대흉마를 뜻한다. 오장로는 혈영귀마고, 육장로는 고루흑마를 말한다. 더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 동방극의 고개가 위아래로 움직였다.
"감사하다 전해 주시오."
흑의 사내는 미미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품에 손을 넣었다. 다시 나타난 그의 손에는 작은 은갑(銀匣) 하나가 들려 있었다.
"청령환을 구해 온 것에 대한 상이오. 청령환보다 훨씬 나을 거요."
동방극의 눈이 희열에 물들었다. 동방극은 조심스럽게 은갑을 받아들었다.
뚜껑을 열자 안에서 은빛 광채가 쏟아져 나왔다. 은갑 안에는 엄지손가락 한 마디 정도 크기의 은빛 단환 하나가 놓여 있었다.
"은환(銀丸)......!"
은환은 은왕이 내리는 커다란 상 중 하나다. 이것을 먹으면 어마어마한 공력을 새로 얻을 수 있다. 구대흉마를 있게 만든 약이기도 했다.
흑의 사내는 동방극이 감격하는 모습을 가만히 쳐다보다가 이내 스르륵 사라져 버렸다.
동방극은 그가 사라진 것도 모르고 한참동안이나 어두컴컴한 지하 석실 안에서 은환의 광채를 온몸에 뒤집어 쓴 채 희열 가득한 웃음을 흘려댔다.
무영은 침상 앞에 있는 의자에 앉아 침상에 누워 잠든 서하린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서하린은 남자와 한방을 쓰는데도 아무런 경계심이 없이 잠들어 버렸다.
"후우, 이래도 되는 건지......"
서하린은 지금 가출을 한 상태다. 말만 한 처자가 무작정 집에서 나왔으니 얼마나 걱정을 많이 하겠는가.
"그나저나 정혼자는 어쩌고......"
남궁세가와 서가장이 서로 사돈을 맺을 거라는 소문이 벌써 낙양까지 파다했다.
서하린은 극구 부인했지만 이름난 무가의 혼례라는 것이 당사자의 감정을 고려하는 경우가 거의 없다는 것 정도는 무영도 알고 있었다.
서하린이 아무리 싫다고 해도 강력히 밀어 붙이면 그녀도 어쩔 수 없을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하니 가슴 한구석이 무거워졌다. 십 년 만에 다시 만난 서하린은 변한 것이 하나도 없으면서도 많이 변했다.
'그때도 제일 예뻤지.'
그때도 소주에서 가장 예뻤다. 비록 어렸지만 그녀의 미모는 눈부시게 빛났다.
서하린은 모두의 인기를 독차지했지만 언제나 무영을 챙겼다. 아주 어릴 때부터 그랬고, 무영이 사라지지 직전까지도 그랬다.
그리고 무영이 사라진 다음에도 잊지 않고 무영을 기다렸다. 세상에 어느 누가 그렇게 할 수 있겠는가.
무영은 따뜻한 눈으로 서하린의 얼굴을 바라봤다.
서하린은 깊이 잠들었는지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 그저 규칙적인 숨소리만 들려왔다. 그러던 서하린이 조금씩 뒤척이기 시작했다.
무영은 서하린을 불편하게 하는 뭔가가 있는지 살폈지만 그런 건 없었다.
서하린은 그렇게 뒤척이다가 슬며시 눈을 떴다.
"왜? 이상한 꿈이라도 꿨어?"
무영이 약간의 걱정을 담아 물었다. 서하린은 눈을 몇 번 깜빡였다. 그 모습이 어찌나 깜찍한지 무영은 자기도 모르게 미소 지었다.
서하린은 그렇게 정신을 차린 후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뭔가 불안해요."
"불안하다고?"
무영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감각을 사방으로 퍼트렸다.
무영이 몸에 가두고 있는 기운 덕분에 기감을 느끼는 것이 조금 둔하긴 했지만 그래도 웬만한 고수보다는 훨씬 날카로웠다.
"괜찮아. 걱정할 것 없어. 아무도 없어."
위협이 될 만한 존재는 없었다. 객잔이니만큼 수많은 사람들의 기척이 느껴졌지만 그들에게서는 미약한 살기나 작은 악의도 느껴지지 않았다.
서하린은 잠이 다 달아난 듯한 얼굴로 주변을 살폈다. 그녀 역시 기감을 퍼트려 근처에 누가 숨어 있지 않을까 살폈다.
하지만 아무것도 없었다. 그렇게 얼마나 살폈을까, 서하린의 안색이 살짝 변했다.
"누가 다가오고 있는데요?"
서하린의 감각에 걸린 사람은 빠르지도 노르지도 않은 속도로 객잔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그는 객잔에 들어서서 잠시 머뭇거리더니 서하린과 무영이 묵는 방을 향해 거침없이 다가왔다. 그리고 문 앞에서 멈춰 섰다.
"저 모용혜예요. 들어가도 되나요?"
놀랍게도 다가온 사람은 모용혜였다. 서하린은 그제야 자신을 불안하게 한 것이 무엇인지 깨달았다.
그녀의 표정이 살짝 떨렸다. 서하린은 무영을 바라봤다. 무영 역시 놀란 표정이었다.
"이런 늦은 시각에 왜......"
무영은 그렇게 말하면서도 문으로 다가가 문을 열어주었다. 이 늦은 시간에 온 것을 보면 중요한 일이 있을지도 모른다 생각했다.
"웬일이십니까? 이런 야심한 시간에."
무영의 말에 모용혜가 빙긋 웃었다. 그녀는 웃으면서도 방 안 상황을 살피는 것을 잊지 않았다.
"그런데...... 두 분이 한 방에서 주무시는 건가요?"
모용혜의 질문에 무영이 빙긋 웃으며 대답했다.
"예.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곤란하니까요."
무슨 일이 뭔지는 모르지만 모용혜는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유가장을 나올 때 유양벽에게서 받은 느낌이 심상치 않았다.
그녀가 확인한 무영의 능력은 무가나 무림문파라면 정말로 탐나는 능력이었다. 그런 자들이 무슨 짓을 할지 알 수 없으니 언제나 조심하는 것이 상책이었다.
"들어가도 되나요?"
"아, 들어오십시오."
모용혜는 무영을 향해 살짝 웃으며 방 안으로 들어섰다. 방은 그리 넓지 않았지만 둘이 하룻밤 자기에는 별 무리 없어 보였다.
"아무래도 남녀가 한방에서 밤을 보내는 것은 좋아 보이지 않는군요.
바로 옆방을 잡아 놨으니 화소협께서는 그곳에서 주무시는 것이 어떠까요? 이 방에서는 저와 서소저가 같이 자면 되니까요."
모용혜의 말에 무영은 멍한 표정을 지었다. 굳이 그렇게 할 필요를 느끼지는 못했지만 그녀의 말을 듣고 보니 또 그랬다.
그리고 모용혜가 함께 있어 준다면 서하린에게 무슨 일이 벌어지더라도 충분히 시간을 벌 수 있을 듯했다. 그 사이에만 달려오면 되지 않겠는가.
"그게 낫겠군요. 한데 아직 무슨 일로 찾아오셨느지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모용혜는 고개를 들어 무영을 똑바로 바라봤다. 그녀의 눈이 흔들림없이 무영의 시선을 응시했다. 모용혜의 시선은 왠지 도발적으로 느껴졌다.
"낙양에서의 일이 모두 끝나셨다고 들었습니다. 이제 어디로 가실 생각이신가요?"
"소주로 갑니다."
어려울 것도 없는 대답이었다. 무영의 답을 들은 모용혜가 환하게 웃었다.
"마침 잘 되었네요. 저도 소주에 가야 하는데, 동행을 해도 괜찮을까요?"
모용혜의 제안에 무영은 깜짝 놀랐다. 설마 그런 제안을 하러 왔을 줄은 몰랐다. 무영은 당황해서 서하린을 쳐다봤다. 서하린은 고개를 돌려 무영의 시선을 피했다.
"너, 너무 갑작스러운 말씀이로군요."
"여기서 소주까지 가까운 거리도 아니고, 저 혼자서 가다가 무슨 봉변을 당할지 알 수 없으니 조금 도와주세요."
모용혜의 말에 무영은 입을 다물었다. 조금 더 생각할 시간이 필요했다. 하지만 서하린은 황당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모용세가에서 최고 기재로 칭해지는 모용혜였다.
비록 여자라서 차후 모용세가를 이끌어 갈 수는 없었지만 그래도 세가의 중추를 담당하게 될 것이 분명한 사람이었다. 당연히 무공도 고강하고 따르는 사람도 많다.
그런 사람이 보호를 요청하니 기가 막힐 따름이었다.
"급히 답하실 필요 없어요. 내일 다시 얘기하죠."
무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래도 그래야 할 듯했다. 생각할 시간이 필요했다.
무영은 잠시 모용혜와 서하린을 번갈아 쳐다봤다. 그리고 속으로 한숨을 내쉬고는 방에서 나갔다.
무영이 나가자 모용혜는 빙긋 웃으며 서하린을 쳐다봤다.
"남궁세가의 소가주와 정혼하셨다 들었는데 이렇게 외간 남자와 함께 여행을 다녀도 되는 건가요?"
모용혜의 말에 서하린이 차가운 표정으로 고개를 살짝 틀었다.
"그 사람과는 절대 그럴 생각이 없으니 안심하세요. 원하신다면 그쪽이 남궁세가로 가시죠?"
서하린의 말에 모용혜가 더욱 환하게 웃었다.
"저렇게 훌륭한 남자를 두고 제가 왜 혼담조차 오가지 않았던 남궁세가로 가야 하죠?"
모용혜의 당당한 말에 서하린의 안색이 변했다. 모용혜가 왜 이곳까지 찾아와 동행을 요구했는지 스스로 말한 거나 다름없었다.
서하린은 입술을 깨물었다. 절대 물러날 수 없었다. 무영은 아주 오래전부터 자신의 남자였다.
"뇌룡이라...... 아주 멋진 별호예요. 그렇지 않은가요?"
모용혜의 말에 서하린은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았다.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슬며시 불안감이 솟아올랐다.
서하린의 시선이 자신도 모르게 무영이 머무는 옆방으로 향했다. 그렇게라도 해야 이 불안감이 조금이나마 가실 것 같았다.
다음 날, 무영은 결국 모용혜의 동행을 허락했다.
서하린은 조금 껄끄럽긴 했지만 무영의 결정을 반대하지 않았다. 결과적으로 모용혜는 모용세가라는 거대한 힘을 등지고 있다.
그런 거대한 힘을 뒤에 두는 것도 나쁘지 않은 선택이었다. 적어도 서하린은 그렇게 여겼다.
세 사람은 떠날 준비를 서둘러 마치고 객잔을 나섰다. 상당히 눈에 띄는 일행이었다.
무영이야 평범한 모습이었으니 그렇다 치고, 모용혜는 아름다운 얼굴을 가리지도 않아 사람들의 시선을 모았다.
그리고 서하린은 면사로 얼굴을 가렸지만 그 폭발적인 아름다움을 모두 가릴 수는 없었다.
게다가 두 여인은 허리에 검까지 찼으니 사람들의 시선을 모을 수밖에 없었다.
무영은 문득 이렇게 시선을 끄는 두 여인과 함께 약을 팔면 정말로 금방 팔아차릴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하다가 고개를 저었다.
'참으로 쓸데없는 생각이군.'
마음을 정리한 무영은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그들은 어느새 낙양의 번화가를 벗어나고 있었다.
무영의 눈에 번화가로 들어서는 몇몇 아이들이 보였다. 입고 있는 옷을 보니 거의 거지에 가까웠다.
얼굴은 추췌했고 몸은 비쩍 말라 한참 동안 제대로 먹지도 못한 모습이었다.
무영은 걸음을 멈추고 그들을 물끄러미 쳐다봤다.
"오라버니, 왜 그러세요? 아는 아이들인가요?"
서하린의 물음에도 무영은 아무런 말도 없이 그저 아이들을 바라봤다. 모용혜는 의아한 얼굴로 무영과 무영이 바라보는 아이들을 번갈아 쳐다봤다.
하지만 그녀가 보기에도 무영이 대체 왜 그러는지 알 수 없었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이내 아이들이 보이지 않는 곳까지 가버렸다. 그렇게 되고서야 무영은 간신히 입을 열었다.
"저 아이들...... 어디 사는 아이들일까?"
"예? 갑자기 그건 왜요? 아마 빈민촌에 사는 아이들이거나 거지겠죠?"
서하린이 대수롭지 않게 말하자 모용혜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가 보기에도 그런 아이들인 듯했다.
"빈민촌..... 이대로 가면 그리로 갈 수 있지?"
무영의 물음에 모용혜가 의아한 표정을 감추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
"어디 있는지는 제가 알아요. 한데 왜 그러시는 거죠? 설마 그들을 도와주기라도 할 생각이신가요?"
모용혜의 말에 무영이 쓴웃음을 지었다.
"제 주제에 누굴 돕겠습니까. 그저 가서 약이나 좀 팔아볼까 해서요."
무영의 말에 모용혜와 서하린이 입을 딱 벌렸다. 세상에 빈민촌에 가서 약을 판다는 게 말이 되는 소리인가.
빈민촌은 말 그대로 가난에 찌든 사람들이 살아가는 곳이다. 그들은 아무리 아파도 약을 먹지 않는다.
의원을 찾아가지도 않는다. 그저 앓다가 나으면 다행이고 그렇지 않으면 죽는다. 그것을 당연한 삶으로 여기며 살아간다. 그런 사람들이 무영이 파는 약을 사갈 리가 없지 않은가.
"화소협, 그러지 말아요. 그들은 약을 먹지 않아요. 차라리 소주로 가서 약을 파는 것이 어떤가요? 아니면 약을 모용세가에 납품하세요. 충분한 대가를 드릴 테니까요."
모용혜의 말에 무영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그런 말씀을 하시려면 소저께서는 먼저 소주로 가십시오. 전 이곳에서 꼭 약을 팔아야겠습니다."
무영의 말은 너무나 단호했다. 모용혜는 감히 그 말에 토를 달 수가 없었다.
"아, 아니에요. 좋을 대로 하세요. 하지만 후회하실 거예요."
모용혜는 한 발 물러나긴 했지만 그래도 자신의 생각을 꺾지 않았다. 그들이 무영이 파는 약을 사갈 리가 없다고 자신했다.
"일단 가죠."
무영의 말에 모용혜가 앞장을섰다. 그녀도 사실 빈민촌에 가본 적은 없었다. 그저 말로만 들었을 뿐이다.
하지만 찾아가는 길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낙양 외각을 조금만 돌아다니면 금세 찾을 수 있는 곳이었으니까.
무영은 빈민촌에 도착해서 마을을 대충 돌아봤다.
사실 빈민촌에 있는 사람들은 일거리가 없어서 못하는 형편이었다. 일거리가 있어도 힘만 들고 돈은 별로 안 주는 일이 대부분이었다.
당연히 그들의 삶은 피폐했고, 지저분했으며, 크고 작은 병을 달고 사는 것이 보통이었다.
마을을 모두 돌아본 무영은 심각한 얼굴로 다시 걸음을 옮겼다. 한 마디도 하지 않고 걷기만 하는 무영의 뒤를 두 여인이 조심스럽게 따라갔다.
"어디로 가시나요?"
모용혜의 물음에 무영이 고개를 들어 한 곳을 바라봤다. 모용혜도 무영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들었다. 그녀의 눈에 산이 보였다.
"저 산으로 가시겠다고요?"
모용혜의 눈이 커졌다. 무영은 고개를 끄덕이며 서하린을 바라봤다. 서하린은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아, 약초를 캐러 가시는 거로군요. 좋아요, 제가 도와드릴게요."
서하린의 말에 무영이 고맙다는 듯 빙긋 웃었다.
무영은 커다란 자루 하나를 서하린에게 넘겼다. 그 자루에는 앞으로 무영이 캐는 잡초가 가득 쌓일 것이다.
모용혜는 기쁜 표정으로 자루를 받아드는 서하린을 쳐다보다가 무영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저도 도와드릴게요. 이래 봬도 약초에 대해서는 조금 알고 있거든요."
모용혜의 말에 무영이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품에서 차곡차곡 접힌 자루 하나를 꺼내 펼쳤다. 서하린에게 준 것과 같은 크기의 자루였다.
"저도 이걸 들라고요?"
"재료가 좀 많이 필요할 것 같아서요."
무영의 말에 모용혜가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자루를 받아든 모용혜는 기대에 찬 얼굴로 무영을 따라갔다. 그녀는 무영이 만든 약이 얼마나 대단한지 잘 안다. 직접 효과까지 확인하지 않았던가.
그런 대단한 약을 어떤 약초로 만드는지만 알아도 큰 성과였다.
"그런데 저런 작은 산에서 제대로 된 약초를 얻을 수 있을까요?"
모용혜가 약간 걱정스런 표정을 물었다. 그 말을 들은 서하린이 씨익 웃었다.
"아마 보면 놀라실 거예요."
모용혜는 서하린의 말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하지만 이내 기대에 가득 찬 표정으로 무영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모용혜는 기가 막힌 표정으로 무영을 바라봤다. 무영 앞에는 잡초가 가득 담긴 자루가 세 개나 놓여 있었다. 날은 이미 깜깜했다.
"대체 이렇게 많은 잡초는 왜 뽑아 오신 거죠?"
모용혜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약초를 캐러 가서 잡초만 캐왔으니 당연하다. 하지만 서하린도 무영도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을 짓고 있으니 뭔가 있긴 있다는 뜻이었다.
그래서 더 답답했다. 그리고 서하린이 했던 놀랄 거라는 말의 의미도 이제는 충분하다 못해 질릴 정도로 알 수 있었다.
무영은 자루에 담긴 잡초들을 모두 쏟았다. 그리고 그것을 하나하나 말리기 시작했다. 무영의 손에 잡힌 잡초들은 빠직거리는 뇌전과 함께 바짝바짞 말라갔다.
모용혜는 그 광경을 보며 숨을 죽였다. 그녀는 무영의 손에서 번득이는 뇌전을 똑똑히 볼 수 있었다.
이렇게 자유자재로 뇌기를 다룰 수 있는 사람은 처음이었다. 아니, 그럼 무공이 있다는 얘기조차 들어본 적이 없었다.
'굉뢰번천장이라면......'
순간적으로 십대고수의 수위에 속하는 굉뢰번천장 강악이 떠올랐지만 이내 고개를 저었다.
아무리 강악이라도 이렇게 섬세하게 뇌기를 다룰 수는 없을 것이다. 강악의 성명절기인 굉뢰번천장은 패도적이고 강력한 힘을 발휘하긴 하지만 섬세한 조절은 불가능한 무공이었다.
모용혜는 과연 무영의 사문이 어디일지 생각해 봤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그것을 알 수 없었다.
뇌기를 다루는 무공은 드물고, 그것을 능숙하게 다루는 사람은 더 드물다. 당연히 뇌기와 관련된 문파 자체도 거의 없다.
그런데도 무영의 사문을 짐작하기 어려웠다.
'모래알같이 수많은 은거기인들이 있다더니......'
모용혜는 그런 생각을 하며 무영이 잡초를 말리는 모습을 하나도 놓치지 않고 살폈다.
무영은 그 많은 잡초를 모두 바짝 말렸다. 잡초 하나 말리는데는 그야말로 순식간이었지만 그것이 세 자루나 있으니 모두 말리는데 걸린 시간도 만만치 않았다.
잡초를 모두 말리고 나니 벌써 한밤중이었다.
"잠은 어떻게 하죠?"
모용혜의 물음에 무영은 그제야 허리를 펴고 주변을 둘러봤다. 산에서 내려오자마자 재료부터 말렸기 때문에 아직 산 아래 공터였다.
"여기서 대충 노숙을 하죠."
무영은 대수롭지 않게 말했지만 모용혜는 불만어린 표정을 지었다.
"최소한 잠은 편안한 곳에서 자는 게 어때요? 경공을 쓰면 객잔까지 금방일 텐데."
모용혜의 말이 무영이 고개를저었다.
"전 아직 할 일이 남았습니다. 그럼 모용소저는 객잔으로 가서 주무시죠. 하린도 같이 가."
무영의 말에 서하린이 당황하며 고개를 저었다.
"아뇨. 전 여기 있을 거예요. 모용소저 혼자 가세요."
서하린의 말에 모용혜의 얼굴이 살짝 구겨졌다. 결국 모용혜도 고개를 저었다. 혼자 객잔에 가서 편히 잘 수는 없었다. 어쨌든 함께하기로 했으니까.
"후우, 그럼 노숙을 하기로 해요."
모용혜는 그렇게 말한 후 노숙할 준비를 대충 시작했다.
오늘은 밥도 제대로 먹지 못해 말도 못할 정도로 허기가 졌다. 대충 근처에서 나뭇가지를 모아 불을 피우고 나니, 피로가 몰려왔다.
"배고프시죠?"
모닥불가에 앉은 모용혜에게 서하린이 다가가 물었다. 모용혜가 물끄러미 쳐다보자 서하린은 품에서 육포를 몇 조각 꺼내 내밀었다. 모용혜는 그것을 받아 열심히 씹어 삼켰다.
무영은 어디서 구해 왔는지 커다란 통 하나를 앞에 놓고 뭔가를 열심히 했다. 자세히 살피니 말린 재료를 손으로 비벼 가루로 만들고 있었다.
모용혜는 눈을 부릅뜨고 무영이 손을 비비는 모습을 뚫어져라 쳐다봤다. 역시 손가락 사이에 뇌전이 번득였다.
"신기하죠?"
모용혜는 갑자기 들려온 말에 흠칫 놀라 고개를 돌렸다.
서하린이 그녀를 보며 빙긋 웃고 있었다. 면사를 벗고 미소를 머금은 서하린의 모습은 모용혜가 보기에도 가슴 떨릴 정도로 아름다웠다.
"그러네요. 화 소협은 대체 어떤 사람이죠?"
모용혜의 질문에 서하린이 미소가 약간 씁쓸해졌다.
"저도 모르겠어요. 아직까지는......"
서하린의 뒷말은 약간 공허하게 느껴졌다. 모용혜는 분명히 그렇게 느꼈다.
모용혜는 다시 고개를 돌려 무영을 바라봤다. 점점 밤이 깊어갔다. 하지만 무영은 마치 잠을 안 잘 것처럼 열심히 손가락을 비벼댔다.
모용혜와 서하린은 차마 잠을 잘 수가 없었다. 두 사람은 그렇게 날이 샐 때까지 무영의 모습을 가만히 지켜봤다.
"그런데 정말로 약을 파실 건가요? 아니, 그보다 그 약이 정말로 신선단이에요?"
모용혜는 궁금하기 짝이 없다는 표정으로 연방 질문을 던졌다. 무영은 모용혜의 그 모든 질문에 차분히 답을 해주었다.
"정말로 팔 겁니다. 그리고 이 약은 신선단이 맞습니다. 소저가 먹은 약도 이렇게 만든 겁니다."
모용혜는 믿을 수 없단느 표정을 지었다. 그녀는 자신이 먹은 약이 얼마나 대단한지 알고 있다. 그리고 무영이 약을 만드는 모습을 하나도 빼놓지 않고 지켜봤다.
무영은 오로지 잡초만 사용해서 약을 만들었다. 다른 비전의 재료를 넣거나 하지 않았다. 무영이 만든 약은 그저 잡초를 말리고 가루로 빻아 단환으로 만들었을 뿐이었다.
"믿을 수 없군요. 그렇게 대단한 약효를 가진 약을......"
모용혜는 무영의 등을 슬쩍 쳐다봤다. 무영은 등짐을 한가득 짊어지고 있었다. 그 안에는 신선단과 신선고가 가득했다.
"소저가 먹은 약하고는 약효가 조금 다릅니다. 이건 무공을 익힌 사람들한테는 별 효과가 없어요."
모용혜는 그제야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이 먹은 약은 뭔가 다른 비법이 들어간다고 여겼다.
무영은 그렇게 자기 좋을 대로 이해하는 모용혜의 모습을 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이건 아무리 설명해도 이해하기 어려울 것이다.
어느새 세 사람은 빈민촌 한가운데 도착했다. 아직 대낮이었고, 사람들의 모습도 보였다. 빈민촌 사람들은 경계와 호기심이 뒤섞인 눈으로 무영 일행을 쳐다봤다.
그들이 보기에도 서하린과 모용헤는 천상의 선녀처럼 아름다웠다.
게다가 허리에 검을 차고 있으니 절대 평범한 사람은 아니었다. 그런 사람들이 나타났으니 경계를 할 수밖에 없었다.
무영은 주섬주섬 좌판을 깔았다. 신선단과 신선고를 잔뜩 깔아놓은 후 주변을 슥 둘러봤다.
무영이 좌판을 까는 동안 몇몇 사람들이 호기심 어린 눈으로 모여들기 시작했다.
"자자, 날마다 오는 기회가 아닙니다. 선계에 계신 제 스승님으로부터 직접 전수받은 비법으로 만든 신선단을 살 수 있는 기회가 왔습니다. 자자, 어서 오세요!"
무영의 입에서 슬슬 말이 풀려나오기 시작했다. 호기심어린 눈을 하던 사람들이 점점 더 많이 모여들었고, 구경꾼이 꽉 들어차자 무영은 열심히 신선단의 약효에 대해 떠들었다.
"자, 어떻습니까. 이렇게 대단한 약이 단돈 한 푼입니다."
무영의 말에 근처에 서 있던 모용혜와 서하린의 눈이 동그래졌다. 무영의 신선단은 고작 한 푼에 팔아도 되는 약이 아니다. 이렇게 효과가 좋은 약을 어찌 한 푼에 판단 말인가.
예전 모용혜는 그 약을 은자 백 냥에 팔라고 말한 적이 있었다. 물론 이 약과 그대의 약은 조금 다르지만 그래도 마찬가지였다.
"소, 소협, 그건......."
모용혜는 뭔가 말을 하려다가 결국 입을 다물었다. 무영의 태도가 너무나 단호했기 때문이다.
"자자, 오늘이 지나면 더 이상 기회가 없을지도 모른다니까요?"
무영이 다시 외치자 사람들이 머뭇거리기 시작했다. 한 푼이라면 거저 주는 거나 다름없다는 걸 잘 안다.
하지만 그 한 푼의 돈이 아쉬운 사람들이 바로 이곳 빈민촌 사람들이었다. 약효가 진짜 있을지 없을지도 모르는 약을 선뜻 사기는 어려웠다.
"그 약을 먹으면 정말로 허리가 낫는가?"
한 사람이 묻자 무영이 자신 있게 대답했다.
"그럼요. 얼마나 아프냐에 따라 다르지만 그저 쑤시는 정도라면 한 개만 먹으면 다름 날이면 말끔해집니다. 하지만 움직일 수 없을 정도로 아프다면 닷새는 먹어야죠."
무영의 말에 질문을 했던 사람은 고개를 숙이며 고민에 들어갔다. 무영은 그 사람이 고민하는 동안 신선단 다섯 개를 잘 쌌다.
"자, 결정하셨습니까?"
"그 말 확실하겠지?"
"그렇다니까요. 자, 여기 있습니다."
무영의 손에서 약을 받은 사내는 무영에게 다섯 푼을 건넸다.
그들의 입장에서는 결코 적은 돈이 아니었다. 주변에 구경하던 사람들이 놀란 표정으로 그 사내를 쳐다봤다. 그리고 손으로 혀를 찼다.
'쯧쯧, 그런 약이 세상에 어디 있어? 멍청하긴.'
'하이고,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인 건 이해하겠지만......'
사람들의 생각은 부정적이었다. 무영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사람들의 반응에 전혀 개의치 않았다.
그날 무영은 하루 종일 약을 팔아 달랑 여섯 푼을 벌었다. 모용혜와 서하린은 안쓰러운 눈으로 무영을 바라봤다.
"그렇게 제가 안 될거라고 했잖아요."
모용혜의 말에 무영은 그저 빙긋 웃었다. 어차피 이렇게 될 줄 알고 있었다. 그리고 원래 진짜는 내일이다.
"오늘은 편안하게 객잔에 가서 잘까요?"
무영의 말에 모용혜와 서하린이 반색했다. 어제는 잠도 제대로 못 자서 피부도 푸석푸석하고 너무나 피곤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하루가 지났다.
다음 날, 무영은 두 여인이 자리에서 일어나기도 전에 객잔에서 나왔다. 워낙 조용하고 은밀히 움직였기 때문에 모용혜와 서하린은 아무런 기척도 느끼지 못하고 잠에 빠져 있었다.
무영은 새벽부터 일어나 재빨리 빈민촌으로 향했다.
어제와 같은 자리에 도착한 무영은 일단 좌판을 깔았다. 그리고 조용히 서서 기다렸다.
해가 떠오르기 시작하자 그와 동시에 사람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들은 무영을 발견하고 깜짝 놀랐다. 그러더니 우르르 몰려뜰었다.
"그 약을 사겠네!"
"아, 내가 먼저야!"
갑자기 몰려온 사람들이 서로 밀치며 싸우기 시작하자 무영은 빙긋 웃으며 입을 열었다.
"자자, 약은 충분합니다. 그러니 밀지 마시고 한 분씩 사십시오."
모여든 사람들은 저마다 돈을 꺼냈다. 그들이 가지고 있는 돈에는 한계가 있었기 때문에 많은 약을 한꺼번에 살 수는 없었다.
설혹 그럴 능력이 있다 해도 무영은 절대 한 사람에게 많은 약을 팔지 않았다.
매번 증상을 물어보고 그에 꼭 맞을 정도로만 약을 팔았다. 그래야 최대한 많은 사람들이 약을 사갈 수 있을 테니까 말이다.
상당히 많은 약을 가졌왔는데도 그것이 모두 동나는 데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무영은 흐뭇한 표정으로 텅텅 빈 좌판을 쳐다봤다. 사람들은 어느새 모두 흩어졌다.
무영은 주섬주섬 좌판을 정리했다. 좌판을 모두 정리한 무영의 눈에 공터 끝 골목길에서 고개만 빼꼼히 내밀고 있는 꼬마아이 하나가 보였다.
무영은 자리를 뜨려다가 그 꼬마를 보고 다시 등에 진 좌판을 내려놓았다.
"거기서 뭐해?"
무영은 꼬마를 향해 웃으며 물었다. 꼬마는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무영은 그런 꼬마아이가 너무 귀여워 손짓을 했다.
"이리 와 봐. 나한테 할 말이 있는 것 같은데? 아니야?"
무영이 계속 웃으며 말하자 꼬마아이는 용기가 났는지 조심스럽게 다가왔다. 얼굴과 키를 봤을 때, 대여섯 살 쯤 되어 보였다.
"몇 살이야?"
꼬마아이는 무영의 물음에 손바닥을 쫙 펴고 다른 손으로 손가락 하나를 폈다.
"여섯 살이구나. 그래. 나한테 하고 싶은 말이 뭐야?"
무영은 최대한 부드러운 말투로 물었다. 꼬마아이는 무영의 물음에도 계속 머뭇거리며 말을 못했다.
무영은 참을성 있게 꼬마아이의 말을 기다렸다. 결국 꼬마아이는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엄마가 아파요......"
꼬마아이의 말에 무영이 환하게 웃었다.
"그래서 약을 사다 드리려고 온 거야?"
꼬마아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다시 고개를 숙인 채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왜? 돈이 없어?"
꼬마아이는 무영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꼬마아이의 눈에 살짝 물기가 스치는 것을 무영은 분명히 보았다.
"흐음, 그건 좀 곤란한데......"
무영의 말하자 꼬마아이의 얼굴에 급격히 실망이 번졌다. 하지만 이내 입을 앙다물고 자신의 몸을 뒤적거리며 뭔가를 꺼냈다. 그리고 두 손을 모아 내밀었다.
무영은 꼬마아이의 손에 들린 것을 바라봤다. 그것은 작은 조약돌이었다. 어디서 구했는지 모양도 예쁘고 색깔도 제법 매끈했다.
"내가 제일 아끼는 돌이에요."
무영은 아이의 말에 미소를 지었다. 처음에는 그저 꼬마로만 보였지만 자세히 보니 꽤 귀엽게 생긴 여자아이였다.
"아주 귀한 거로구나!"
무영은 손가락으로 조약돌을 집었다. 그리고 품에서 신선단 하나를 꺼내 꼬마아이의 두 손에 살며시 올려놓았다.
꼬마아이의 눈이 동그래졌다.
"집에 가자마자 어머니 입에 넣어드려. 알았지?"
"어, 엄마 지금 자고 있을 텐데......"
무영이 씨익 웃었다.
"괜찮아. 자고 있으면 더 잘 됐네. 그냥 입을 벌리고 안에다 넣어드려."
"그, 그럼 엄마 이제 안 아파요?"
무영이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무영의 고갯짓에는 자신감이 넘쳐흘렸다.
"물론이지. 한숨 푹 자고 일어나면 너무 건강해져서 주체하지 못하실 거다. 하하하."
무영은 웃으며 좌판을 다시 짊어졌다. 그리고 멍하게 자신을 쳐다보는 꼬마아이를 향해 손을 흔들어 주었다.
무영의 몸이 안개처럼 흩어졌다. 꼬마아이의 눈이 놀람으로 커졌다. 하지만 이내 꼬마아이는 환하게 웃으며 집으로 달려갔다. 엄마가 다시 건강해지는 모습을 상상하며.
무영이 다시 객잔에 돌아왔을 때는 해가 중천에 떴을 무렵이었다. 무영은 화가 나서 새치름한 눈으로 자신을 쏘아보는 두 여인을 보고 어색하게 웃었다.
"일찍 일어났네."
무영의 말에 어이가 없어진 두 여인은 허탈한 표정으로 무영을 바라봤다.
"오라버니, 대체 어디 갔다 오신 거예요? 얼마나 걱정을 했는지 아세요?"
서하린의 말에 무영이 빙긋 웃었다.
"미안. 조금 서둘러야 할 일이 있어서."
무영의 말에 서하린과 모용혜는 무영의 등에 매달린 짐을 쳐다봤다.
"설마......"
무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약 다 팔았다. 하하하."
무영의 말에 서하린과 모용혜가 어이없는 표정으로 멍하니 입을 벌렸다.
세 사람은 간단히 식사를 마치고 객잔을 나섰다. 드디어 낙양을 떠나는 것이다.
부지런이 걸어 낙양에서 벗어난 세 사람은 곧장 소주를 향해 방향을 잡았다.
낙양에서 벗어나 인적이 아예 없는 관도로 접어들자 서하린이 궁금하다는 듯 물었다.
"그런데 오라버니, 왜 그러신 거예요?"
"응? 뭐가?"
"빈민촌에 약 파신 거요?"
서하린의 말에 모용혜도 고개를 끄덕였다. 도와주려면 차라리 돈을 주는 게 훨씬 낫다. 약을 한 푼에 파느니 차라리 공짜로 나눠 주는 게 나았다.
무영은 그 말에 대수롭지 않다는 듯 대답했다.
"약장수가 약을 파는 게 뭐가 어때서?"
"그게 아니라...... 하아."
서하린은 뭔가 더 말을 하려다가 한숨을 쉬며 입을 다물었다. 틀린 말은 아니지 않은가.
약장수가 약을 파는 것이 잘못된 것은 아니다. 서하린은 그렇게 한 발 물러났지만 모용혜는 그럴 마음이 없었다.
"그들을 도와주시려면 차라리 무상으로 약을 나눠 주는 게 낫지 않아요? 굳이 애써서 약을 팔 이유가 없지 않겠어요? 더구나 첫 날은 그냥 시간만 낭비했잖아요."
모용혜도 오늘 약을 팔면 순식간에 다 팔 수 있다는 건 충분히 예상했다.
어제 하나도 약이 안 팔렸다면 모를까 여섯 개나 팔렸다. 물론 사간 사람은 둘뿐이지만 그 약효가 얼마나 대단한지는 모두가 알았을 것이다.
결국 하루를 낭비한 거나 다름없었다.
"그곳에 다시 가서 약을 파실 생각인가요?"
모용혜의 말에 무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팔긴 팔겠지만 지금은 아닙니다. 한참이 지난 후에야 다시 팔겠지요. 그때까지 그들이 날 기억할지는 모르겠지만."
무영의 말에 모용혜도 한숨을 쉬며 고개를 저었다. 무영의 생각을 알듯 말듯 했다. 하지만 완전히 이애할 수는 없었다.
무영은 굳이 모용혜나 서하린을 이해시킬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그저 묵묵히 걸음을 옮겼다.
무영은 말없이 걸으며 예전 스승과 함께하던 시절을 떠올렸다.
무영의 스승인 천복은 정말로 신선 같은 사람이었지만 거리에서 약을 팔 때는 영락없는 약장수였다. 아직 무영은 스승처럼 될 수는 없었다. 하지만 언젠가는 그렇게 되고 싶었다.
예전 스승님과 함꼐 다닐 때는 곳곳에 있는 빈민촌을 돌며 약을 팔았다. 어제오늘 무영이 행한 것과 같은 방법으로 그들에게 약을 팔았다.
빈민촌의 수는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았고, 정말로 막대한 양의 신선단이 빈민촌에 풀렸다.
하지만 약에 대한 소문은 전혀 나지 않았다. 그저 가난한 사람을 위해 약을 선물하는 신선이 돌아다닌다는 소문만 잠깐씩 돌 뿐이었다.
무영의 스승은 세상에 이름도 알려지지 않은 사람이다. 하지만 다른 이름으로는 세상에 꽤 알려진 사람이었다.
무영의 스승은 빈민촌을 중심으로 약선이라는 별호로 불렸다. 가끔 몇몇 무림인들이나 돈 많은 사람들의 귀에도 들어가긴 했지만 그들은 약선을 결코 만날 수 없었다.
'대체 스승님은 지금 어디 계시는 걸까.'
무영은 문득 스승이 그리워졌다. 지금 자신이 잘 하고 있는지 묻고 싶었다. 벌써 두 번이나 무림인들과 얽혔다.
게다가 그렇게 하면서 그간 해오던 일을 등한시했다. 스승과는 전혀 다른 길을 가고 있는 것이다.
스승님을 만나는 일은 아마 어려울 것이다. 스승님이 원하지 않는 한 절대 만날 수 없을 것이다.
사실 답은 벌써 알고 있었다. 스승님을 만나 자신의 상황을 묻는다면 스승님은 분명 이렇게 대답하실 것이다.
"뭐가 그리 어려우냐? 그냥 흘러가는 대로 살아라."
무영은 그 답을 떠올리고는 피식 웃었다.
'분명히 그렇게 말씀하시겠지.'
흘러가는 대로 살라는 말은 지난 무영의 십 년 세월 동안 스승이 그에게 남겨준 화두였다. 그 화두가 자라 벼락 맞은 무영을 살리고 신선단을 만들 수 있는 능력을 주었다.
무영은 왠지 무거운 짐 하나를 내려놓은 듯했다. 마음이 가벼워졌다. 마음이 가벼워진 만큼 걸음도 경쾌해졌다. 무영은 성큼성큼 앞으로 나아갔다.
모용혜와 서하린은 갑자기 변한 무영의 걸음에 눈을 동그랗게 뜨고 서로를 한 번 바라봤다. 무영의 몸에서 흘러나오는 기질이 순식간에 바뀐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두 여인은 서로의 눈을 바라보다가 화들짝 놀라 다시 앞을 바라봤다. 무영은 어느새 저만치 멀어지고 있었다. 그저 경쾌하게 걷고 있을 뿐인데 마치 경공을 펼치는 것처럼 빨랐다.
모용혜와 서하린은 당황하며 경공을 펼쳤다. 그녀들은 경공을 펼친 후에야 그를 따라잡을 수 있었다.
믿을 수 없게도 무영과 나란히 걷기 시작하자 경공을 펼치지 않고도 그와 같은 속도로 걸을 수 있었다.
두 여인은 마치 무영과 동화되는 듯한 느낌에 한편으로는 당황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말할 수 없을 정도의 안정감을 느꼈다.
세 사람은 걸어갔음에도 부룩하고 단 하루 만에 정주에 들어섰다.
낙양 외각에 위치한 빈민촌에서도 가장 구석진 곳에 다 쓰러져 가는 작은 집이 한 채 서 있었다. 그 집으로 한 꼬마아이가 두 손으로 뭔가를 조심스럽게 감싼 채 달려갔다.
꼬마아이는 숨을 헐떡이며 집으로 들어가 방문을 조심스럽게 열었다. 집에는 방이라고는 달랑 하나였고, 그 방에서 모녀가 함께 잠을 자고 생활을 했다.
꼬마아이가 문을 열자 침상조차 없이 바닥에 누워 있던 여인이 부스스 눈을 떴다.
"예령이니?"
"엄마."
예령은 방으로 들어섰다. 차디찬 바닥에 누워 있는 엄마에게 쪼르르 달려가 조심스럽게 손을 내밀었다.
예령의 엄마는 꾀죄죄한 몰골이었지만 눈빛만큼은 별처럼 빛났다. 얼굴의 모든 부분을 가리고 눈만 본다면 천하의 절색이라고 믿을 정도였다.
"그게 뭐니?"
힘없는 질문에 예령이 눈을 빛내며 자랑스럽게 말했다.
"약이에요."
"약?"
순간 예령 엄마의 눈이 살짝 매서워졌다.
"네가 어떻게 약을 구한 거니?"
엄마의 말에 담긴 질책에 예령이 당황하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에요. 이 약은 그런 게 아니에요. 약장수 아저씨한테 샀단 말이에요."
예령의 말에도 엄마의 눈은 더욱 매서워질 뿐이었다.
"네가 돈이 어디 있어서 약을 샀단 말이니? 그리고 약장수를 네가 어떻게 만나? 이런 곳에 어떤 약장수가 온단 말이니?"
엄마의 말에 예령이 다급히 고개를 저었다.
"정말로 샀엉. 제가 아끼던 돌을 주고 샀단 말이에요. 정말이에요."
예령은 엄마가 자신의 말을 믿지 않자 눈물까지 글썽였다. 예령 엄마는 그런 딸의 모습을 애처로운 눈으로 바라봤다. 그리고 상황을 대충 짐작했다.
마을에 떠돌이 약장수가 왔을 것이다. 그가 예령의 모습을 보고 적선하듯 약을 준 것이이라. 이런 빈민촌에서 팔겠다고 가져온 약이 제대로 된 효과가 있을 리 만무하다.
엄마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자 예령은 그제야 힘을 얻은 듯 조심스럽게 약을 엄마의 입으로 가져갔다.
예령 엄마는 천천히 입을 벌렸다. 어떻게 만들었는지도 모르는 약을 먹을 수는 없었지만 딸을 속일 수는 없었다. 약을 삼키지만 않으면 괜찮으리라 생각했다.
사실 그녀의 병은 상당히 심각했다. 그녀는 자신의 병이 왜 생겼는지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이런 약으로 그것을 절대 고칠 수 없다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 입을 벌리는 그녀의 눈에 살짝 물기가 어렸다.
예령의 손에 있던 신선단이 엄마의 입으로 들어갔다. 예령은 환하게 웃었다. 약을 먹었으니 이제 엄마의 병이 나을 거라는 희망이 생겼기 때문이다.
예령의 환한 표정을 본 예령 엄마의 눈이 더욱 슬프게 물들었다. 그녀는 입에 들어온 신선단을 씹으려 했다.
하지만 그럴 필요가 없었다. 신선단은 마치 물처럼 녹으며 그녀의 목구멍으로 스며들 듯 사라져 버렸다. 그녀의 눈이 커다래졌다.
뜨거운 기운이 목구멍에서부터 아랫배까지 이어졌다.
그리고 그 기운은 그녀의 사지백해로 힘차게, 하지만 부드럽게 뻗어 나갔다. 그녀의 눈이 점점 더 경악으로 물들어갔다.
|
첫댓글 약장수 정말 좋은 일 하셨네요,
16.12.18
참으로 재밌게 읽고감니다
잘봅니다..~~
감사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즐감
점점 재밌네요^^
고맙게 잘보고 있어요~~~
즐감
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