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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년 다해 11월25일 금요일 [(녹) 연중 제34주간 금요일]
[수도회] 변화 가운데서 영원하신 주님을 만나기 -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작은 형제회(프란치스코회)
○ 제1독서 묵시 20,1-4.11─21,2
† 복음 루카 21,29-33
◈ 오늘의 묵상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무화과나무와 다른 나무들의 잎이 돋는
것을 보고, 여름이 가까이 온다는 것을 안다고 가르치시며, 이 시대의
징표를 읽을 줄 알아야 한다고 초대하십니다. 우리 주변에는 우리가
읽을 수 있는 시대의 징표가 너무나도 많이 깔려 있는데, 이를 올바로
보고 하느님의 시각으로 해석할 줄 아는 눈은 모두에게 주어진 것 같지
않습니다.
예루살렘의 멸망은 일반 사람들에게는 마치 세상의 종말과 같아
보였습니다. 예루살렘은 하느님의 거룩한 도시였기에, 마치 하느님의
왕국이 무너지는 것과 같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루카 복음사가는
반대로 이 도시의 멸망을, 묵시적 용어로 설명하면서, 이 세상에 새로운
하느님의 나라가 건설될 결정적인 계기로 봅니다. 실제로 이 사건은
협소한 의미의 하느님의 나라를 고대했던 이스라엘 백성을 각성시키고,
유다인 선민사상으로부터 탈출하게 합니다. 그래서 교회가 모든
민족들에게 문을 개방하도록 자극했고, 새로운 형태의 하느님의 나라가
시작될 수 있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세상의 현상을 하느님의 시각으로 바라보는
사람들입니다. 우리 삶 안에서 일어나는 일들 안에서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온 것을 발견하는 사람들, 그리고 하늘과 땅은 사라질지라도
주님의 말씀은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을 굳게 믿으며 희망하는
사람들입니다. 희망은 주어진 고난을 슬기롭게 이겨 내게 하는 힘이며,
오늘을 힘차게 살아갈 수 있는 원동력입니다.
(이정주 아우구스티노 신부)
- 매일 미사 -
◈ [인천] 세상에 그 어떤 것도 쓸모없지 않습니다.
2016년 다해 11월25일 연중 제34주간 금요일
제1독서
"그들은 저마다 자기 행실에 따라 심판을 받았습니다. 나는 새
예루살렘이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것을 보았습니다.
○ 요한 묵시록의 말씀입니다. 20,1-4.11─21,2
복음
"너희는 이러한 일들이 일어나는 것을 보거든,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온 줄 알아라."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21,29-33
여러분은 산타클로스가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아이들은 있다고 할
것이고, 어른들은 없다고 말씀하시겠지요. 그런데 어떤 책에서 인생을
산타클로스에 비유한 글을 하나 보게 되었습니다.
“인생 말이지. 너무 복잡하게 생각하지 마. 어찌 보면 간단해.
산타클로스를 믿다가, 믿지 않다가, 결국에는 본인이 산타 할아버지가
되는 거야. 그게 인생이야.”
정말로 그런 것 같지 않습니까? 어렸을 때에는 굳게 믿습니다.
산타클로스가 있어야 선물을 받을 수 있고, 또 실제로 선물을 받기도
하니까 산타클로스 할아버지가 계시다고 믿습니다. 하지만 점점 나이를
먹으면서 자신에게 선물을 가져다주는 분이 산타 할아버지가 아니라,
가족임을 깨닫게 되지요. 별로 크게 실망을 하지도 않습니다.
학교친구들 중에 몇몇이 산타할아버지는 없다고 힘주어 말하고, 점점
현실적으로 변하는 내 생각에 비추어 볼 때에도 산타할아버지는 가상의
인물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이제 본인이 성인이 되어 선물을 받기보다는 주어야 할 자리에 서게
됩니다. 어렸을 때 선물을 받았을 때의 기쁨, 반대로 선물을 받지
못해서 아쉬워했던 마음도 생각날 수 있겠지요. 그래서 선물을
구입하고, 본인 스스로 산타할아버지가 됩니다.
이렇게 산타클로스에 우리 삶 전체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생각해보니
어디에는 없을까 라는 생각도 하게 됩니다. 조금만 의미를 찾으면
자그마한 사물 하나에서도 큰 의미를 발견할 수가 있다는 것이지요.
실제로 어느 화장실에 갔다가 이런 문구를 볼 수 있었습니다.
“화장실을 깨끗하게 사용해주세요. 이곳을 청소해주시는 분은
누군가에겐 전부인 사람입니다.”
별 것 아닌 것처럼 소변기 앞에 붙어 있었던 문구였습니다. 그러나
정말로 깨끗하게 사용해야겠다는 마음을 갖게 할 정도로 큰 울림이
있었던 글이었지요.
오늘 예수님께서는 “무화과나무와 다른 모든 나무를 보아라. 잎이
돋자마자, 너희는 그것을 보고 여름이 이미 가까이 온 줄을 저절로
알게 된다. 이와 같이 너희도 이러한 일들이 일어나는 것을 보거든,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온 줄 알아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사실
사계절이 뚜렷한 우리나라는 잎이 돋으면 이제 겨울이 지나 봄이
되었구나 라고 생각하지만, 이스라엘은 겨울과 여름으로 양분되는
지역인 것입니다. 따라서 나무에 잎이 돋으면 여름이 온 것이지요.
따라서 누구나 알고 또 체험하고 있는 당연한 말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이런 일을 보게 되면 하느님 나라가
가까이 온 줄로 알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무슨 의미일까요? 바로 우리
삶 안에 하느님 나라에 대한 표징이 계속 주어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표징을 바라보고 그 안에 담겨있는 주님의 뜻에 맞게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세상에 그 어떤 것도 쓸모없지 않습니다. 나름의 의미가 있음을
기억하면서 자그마한 것도 소중히 여길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진실로 강한 사람은 웃는 사람입니다(애쉴리 리퍼르트).
떨어진 낙엽을 보면서 무엇을 생각하시나요?
가장 가까운 곳에 존재한다
작은 배가 강풍에 시달리고 있었습니다. 몇 시간 후 바람이 잦아들고
바다도 고요해졌지만, 거친 풍랑에 시달리면서 엔진까지 고장 나
며칠간 표류하게 되었습니다. 급기야 마실 물까지 모두 바닥나
사람들은 목이 말라 위태로운 상태에 이르렀습니다. 그때, 멀리서 배
한 척이 다가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사람들은 갈라진 입술로 배를
향해 손짓하여 외쳤습니다.
“살려주세요! 물, 물을 주세요.”
어느새 다가온 배는 물을 달라고 절규하는 사람들을 향해 소리쳤습니다.
“물동이를 내려요! 여긴 강입니다!”
강에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바다에 있다는 생각 때문에 물을 마시지
못했던 것이지요. 만약에 누군가 한 명이라도 의심을 하고 그 물을
마셔봤다면 어떠했을까요? 마실 물을 발아래 두고도 목이 말라
고통스러워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우리 역시 마찬가지가 아닐까 싶습니다. 가까운 데에 해결 방법이
있었는데 그 방법을 발견하지 못하고 멀리만을 바라보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작년에는 여행도 많이 다녔는데, 올해는 어디도 못갔네요. ㅠㅠ
작년에 갔던 낙화암입니다.
- 인천교구 갑곶 성지 조명연 마태오 신부 -
◈ [수도회] 변화 가운데서 영원하신 주님을 만나기
- 기 프란치스코 신부
2016년 다해 11월25일 연중 제34주간 금요일 루카 21,29-33
"하늘과 땅은 사라질지라도 내 말은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루카 21,33)
변화 가운데서 영원하신 주님을 만나기
봄 가을이 따로 없는 팔레스티나에서는 나무에 잎이 돋우면 여름이
이미 다가온 것을 알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처럼 성전파괴와 같은
큰 재난이 나타나면 하느님 나라가 다가온 줄 알아차려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21,29-31).
우리는 우주만물의 변화 속에서, 빛의 속도로 발달하는 생명공학을
비롯한 과학과 정보기술, 다양한 문화와 종교현상, 빈부격차의 심화,
급격한 의식의 변화를 경험하며 살아갑니다. 변화와 발달의 끝이
어디일지 가늠하기 어려운 시대이지요. 이런 가운데서 우리는 이런
변화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요?
우주만물은 끊임없이 변하고 국가도 흥망성쇠를 거듭하며 인간 또한
희로애락과 생노병사를 겪습니다. 그러나 모든 것을 있게 하는
하느님과 그분의 말씀은 영원합니다. 그런데 변화를 들여다보면 선과
사랑과 의로움을 담고 하느님을 향하여 변하는 것이 있는가 하면 그와
정반대의 변화도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모든 변화와 사건을 통해
영원성을 드러내시지요.
우리는 시대의 징표를 읽어야 합니다. 변화나 사건을 보며 영원하신
하느님의 뜻을 읽는 것이지요. 주님께서는 어떤 변화나 사건을
통해서도 늘 당신의 뜻을 드러내고자 하십니다. 심지어 악과 고통스런
사건들도 하느님 계획의 일부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긍정적 변화든
부정적 변화든 그 안에 담긴 하느님의 뜻을 읽을 수 있어야겠지요.
우리는 어떤 삶을 살다가 언제 어디서 어떤 모습으로 죽음을 맞을지
알 수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언제 어디서 무엇을 하든 사랑이신
하느님의 원의와 손길을 알아차리는 것입니다. 하느님을 향해가는
긍정적인 변화라면 그 안에 담긴 사랑의 메시지를 읽고 은총의 선물에
감사하며 그것을 공유하고 되돌려야 할 것입니다.
반대로 하느님의 자비와 선을 거스르는 변화라면 그 지점이 바로
회개의 시발점이요 하느님을 향한 반환점이 되어야 함을 의식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자주 그럭저럭 문제없이 살아가는 '거짓
안정성' 안에 머무르곤 합니다. 넘어졌다 하여도 곧바로 그 잘못을
인정하고 새롭게 시작할 수 있어야겠지요.
자신의 삶에 대한 성찰과 반성, 그리고 시대징표를 읽어 변화 가운데서
변하지 않는 하느님의 영원성을 찾아나가는 것이 신앙인의 태도입니다.
이를 위해 절실히 요청되는 것은 '해체를 허용하는 용기'입니다. 불의와
잘못된 구조와 타협하지 않고 과감히 맞서 해체함으로써 사랑과 정의의
질서를 바로 세울 필요가 있습니다. 자신의 해묵은 습관과 굳어버린
사고의 틀을 미련 없이 해체할 수 있어야 하지요.
한낱 먼지에 지나지 않은 인간이 권력과 돈의 힘이 영원하리라 믿는
것이야말로 얼마나 어리석은 일입니까! 영원하신 하느님을 믿는
우리는 그래서는 안되겠지요. 각종 사건들과 부정부패, 도덕적 타락,
비인간적 현실, 우상숭배 가운데서도 하느님의 영원성을 발견하도록
힘써야겠습니다.
오늘도 거짓 안정성에서 벗어나 자신을 해체하여 하느님의 눈으로
만사만인을 바라보고, 시대징표를 읽어 하느님의 영원성을
살려나갔으면 합니다. 지금이 바로 고통과 시련과 슬픔 가운데서도
말씀을 실행하고 사랑의 질서를 세우기 위한 세상의 해체에 나서야 할
때입니다.
-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작은 형제회)(프란치스코회)
강론채널 주소 : story.kakao.com/ch/francesco -
◈ [수도회] 알타반의 말씀사랑
2016년 다해 11월25일 연중 제34주간 금요일
"너희도 이러한 일들이 일어나는 것을 보거든,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온 줄 알아라." (루카 21,31)
요즈음처럼 황당스러운 일들을 겪게 되면 우리는 대부분
“이거 세상 종말이 다가오는 것 아냐?”
“허허 말세로다, 말세~~” 이렇게 말하곤 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관점은 다릅니다.
“이러한 일들이 일어나는 것을 보거든,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온 줄 알아라.”
세상의 종말이 아니라 하느님 나라를 보라는 겁니다.
죽음이 삶의 끝처럼 보이지만 사실 새로운 삶의 시작이라는 것이
우리 그리스도인의 죽음을 바라보는 새로운 시각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신앙인은 희망의 사람들입니다.
한 해를 마무리하면서 개인적으로나 공동체적으로
실망스러운 부분이 많이 보이고 미래가 어두워 보일지도 모릅니다.
이제 더 이상 길이 보이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 때가 바로 희망할 때입니다.
어둡고 긴 터널을 지나면 밝고 아름다운 세상이 펼쳐집니다.
한 해의 끝자락은 새로운 희망의 시작이 되길 염원합니다.
- 프란치스코회 성심원장 오상선 바오로 신부 -
◈ [수원]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천 년 왕국
2016년 다해 11월25일 연중 제34주간 금요일
"그들은 저마다 자기 행실에 따라 심판을 받았습니다.
나는 새 예루살렘이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것을 보았습니다."
독서: 요한 묵시록 20,1-4.11-21,2
천 년 왕국
저는 성경이 ‘나에게 보내진 연애편지’와 같다고 생각합니다. 성경을
읽고 공부는 하지만 눈물이 나지 않는다면 나와 관계없는 이야기처럼
보기 때문입니다. 연애편지는 원래 남이 읽으면 유치하지만 당사자가
읽으면 가슴 뭉클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요즘 나오는 요한 묵시록의 내용들은 참으로 나와 상관없는
이야기처럼 들려서 어렵기만 한 것 같습니다. 저는 성경 어느 구절을
읽더라도 ‘그걸 통해 주님께서 나에게 직접 해 주시려고 하시는 말씀이
무엇일까?’를 물어봅니다. 따라서 자칫 묵시록이 미래에 관한 내용이고
내가 묵시록에 나오는 종말 이전에 죽는다면 나와는 상관없는 이야기가
되지 않도록 주의합니다.
오늘 독서에 나오는 ‘천 년 동안의 다스림’에 관한 내용은 특별히 나와
상관없는 내용처럼 보이는 것입니다. 그리고 천주교에서는 이 내용에
대해 배워본 적이 없고 개신교에서도 수많은 학설들만 내어놓지 수긍이
가는 내용은 좀처럼 찾아보기 힘듭니다. 크게 세 주장으로 나뉘는데 첫
번째는 예수님의 재림 이전에 이 세상에 펼쳐질 평화의 시대이고, 두
번째는 예수님의 재림 이후에 펼쳐질 하느님 나라이며, 세 번째는 이도
저도 아니라 이미 예수님께서 오셨기 때문에 교회 안에서 천 년 왕국이
실현되고 있다는 주장입니다.
그럼 본문을 잠깐 훑어보도록 하겠습니다.
우선 17-18장에 ‘대탕녀 바빌론’이 심판받는 내용이 나옵니다. 대탕녀
바빌론은 ‘세상’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는 19장에 하느님의
어린양과 교회를 상징하는 천상 예루살렘의 혼인잔치가 벌어집니다.
이것으로 주님의 심판이 완성된 것 같았는데, 이제 20장에는 ‘하느님의
말씀’이라는 이름을 지니신 분이 피에 젖은 옷을 입으시고 흰 말을 타고
오셔서 ‘옛날의 뱀’이라 불리는 사탄을 꽁꽁 묶어서 지하로
던져버리십니다. 그로부터 “예수님에 대한 증언과 하느님의 말씀
때문에 목이 잘린 이들의 영혼”이 첫 번째 부활을 통해 그리스도와
함께 천 년을 다스리게 됩니다.
그런데 천 년이 끝났을 때는 사탄이 감옥에서 풀려나 자신들의 무리와
함께 모든 민족들을 끌어들여 성도들과 하느님의 도성을 에워싸고
전투를 벌입니다. 그러나 하늘에서 불이 내려와 사탄과 그의 졸개들은
모두 불과 유황 못에 던져지게 됩니다. 그들은 영원무궁토록 고통을
받게 됩니다. 그 이후에 모든 이들이 모두 부활하여 주님의 어좌 앞에
나서게 되는데 이것이 두 번째 심판입니다. 교리적으로는
‘공심판’이라고 합니다. 이들은 저마다 자기 행실대로 심판 받게 됩니다.
물론 가장 보잘 것 없는 형제들에게 사랑을 실천하였지만 그것을
기억하지도 못하는 본성적으로 선하게 살아온 이들이 구원 받게
됩니다. 그들의 이름은 이미 생명의 책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마지막
공심판 때는 사탄이나 그의 졸개들, 그리고 구원될 이들이 최종적으로
심판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심판 때의 판결이 바뀌는 일은
없습니다. 여전히 사탄과 그의 졸개들은 주님께 반항할 것이며 주님의
말씀 때문에 자신 안에 있는 뱀을 죽여 머리가 잘린 이들은 주님의
백성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는 21장에 다시는 죽음도 고통도 없는 새
하늘과 새 땅의 창조가 완성되는 이야기가 나오는 것입니다.
천 년 동안 주님의 말씀 때문에 자신의 목을 자른 순교자들이 다스리게
된다는 말이 나옵니다. 다스린다는 말은 창세기 때부터 나오는
말입니다. 아담은 동물들을 다스려야 했습니다. 이름을 지어준다는
말과 같고 길들인다는 말과 같습니다. 길들인 짐승은 이름이 있고 그
짐승과 깊은 관계를 맺습니다. 다스린다는 말은 다른 말로 사랑의
관계를 맺는다는 뜻입니다. 관계 안에서 행복한 세상이란 뜻입니다.
루카 복음 19장의 미나의 비유에서 미나를 더 번 착실한 종들은 그
미나를 번 고을 수만큼 다스리게 됩니다. 마치 노아가 자신의 배에 탄
짐승들을 다스린 것과 같이 일곱 재앙을 통해 구원된 이들이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방주 안에서 자신들이 길들인 이들과 친교를
나누게 된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왜 공심판까지 천 년을 기다려야 할까요? 이는 ‘연옥’을
생각하지 않으면 해석이 절대 불가합니다. 세상이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멸망하더라도 연옥에서 그 벌을 받는 이들은 자신들의 기간이 다 차지
않으면 완전한 보속을 이룰 수 없기 때문에 천국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따라서 그 천 년이란 세상이 끝난 후에 그들 모두가 하나도 남김없이
천국에 오를 수 있는 수준이 될 때까지 기다리는 시기라 할 수
있습니다. 분명 황폐화 되어 있겠지만 지구는 존재할 것입니다.
그리고 새 하늘과 새 땅이 열리는 때는 우리가 상상하지도 못할 세상이
열릴 것입니다. 그렇게 기다리는 기간이 천 년 왕국입니다.
이렇게 본다면 이 성경도 남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주님이 오시면 바로
연옥이 사라지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빨리 순교자가
되어야합니다. 주님의 뜻에 우리 목이 잘려나가야 합니다. 우리 안에
있는 작은 사탄을 죽여야 합니다. 이것이 순교입니다. 그 순교자들 안에
들어서 그 시간 동안 연옥에 있는 것이 아니라 주님과 즐길 수 있는
삶을 지향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사는 유일한 이유는
황폐화 되고 결국은 사라지게 될 이 세상에서 내 자신이 주님과 함께
천 년 왕국부터 참 행복을 누릴 수 있는 참된 악으로부터의 순교자가
되는 연습을 하는 것입니다.
http://www.수원교구영성관.com/
- 수원 교구 영성관 관장 전삼용 요셉 신부 -
◈ [서울] 연중 제34주간 금요일
2016년 다해 11월25일 연중 제34주간 금요일
"너희는 이러한 일들이 일어나는 것을 보거든,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온 줄 알아라."
† 루카 21,29-33
성탄선물로 2권의 책을 받았습니다. ‘화성의 인류학자와
고구려6권’입니다. 올리버 섹스의 ‘감사합니다.’를 읽으면서 그분에
대한 관심이 생겼고, ‘화성의 인류학자’도 이웃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것 같아서 읽어보려고 합니다. 김진명 작가의 책은 빠짐없이 읽고
있습니다. ‘고구려’는 처음부터 읽었고, 6번째의 책이 나왔다고 해서
읽어 보려고 합니다. 덤으로 작은 책이 함께 왔습니다. ‘블랙홀과
시간여행’이라는 소책자입니다. 길지는 않지만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과
우주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는 책입니다.
지구가 둥글다는 사실을 아는데 오랜 시간이 걸렸습니다. 지구가
우주의 중심이 아니라, 태양의 주위를 도는 작은 행성이라는 것도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을 바탕으로 시간과
공간에 대한 이해를 새롭게 하고 있습니다. 시간을 되돌릴 수도 있고,
공간을 늘리거나, 줄일 수도 있다고 이야기 합니다. ‘인터스텔라’의
이야기가 가능할 수도 있다고 이야기합니다. 중력은 우리를 자유롭게
하지 못하는 면도 있지만 중력은 우리가 어느 곳에 속한다는 사실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마치 연과 연줄과 같은 관계입니다. 언젠가
시간여행을 할 수 있고, 공간이동도 할 수 있는 날이 올지 모르겠습니다.
저자는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우리 우주의 복잡성을 해명하고, 궁극적
간결성과 우아함 그리고 그것을 지배하는 근본 법칙의 영광스러운
아름다움을 드러내는 인간 정신의 놀라운 능력, 난관을 뛰어넘는 인간
정신의 놀라운 능력을 배우면 좋겠습니다.’
과학의 영역은 아니지만 신화와 종교는 이미 시간과 공간의 영역을
뛰어넘는 삶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산에서 잠시 바둑을 두는 것을
보고 집에 왔는데 1000년의 시간이 지났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아마도 블랙홀을 지나온 느낌일지 모르겠습니다. 시편의 저자는 주님과
함께하면 천년도 마치 지나간 어제와 같다고 표현합니다. 오늘
묵시록은 ‘새 하늘과 새 땅’을 이야기 합니다.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사람은 사랑이 가득하신 하느님의 품에서 새로운 삶과 세상을 볼 수
있을 거라고 이야기 합니다. 예수님께서도 말씀하십니다. 지금 우리가
보고, 듣고, 체험하는 세상은 사라질지라도, 주님과 함께하는 삶은
영원한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늘과 땅은 사라질지라도 내 말은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입니다.’
인간 정신의 놀라운 능력은 그래서 중요한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숨’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다섯 가지 특징을 지닌
존재라고 합니다.
첫째, 인간은 욕망을 지닌 존재이지만, 그 욕망은 절제되어야 합니다.
둘째, 인간은 모순된 삶을 살아가는 존재입니다. 하지만 그 모순된 것을
극복하고자 하는 삶을 살아갑니다. ‘사랑하니까 헤어지는 것’도
인간이고, 남을 위해서 자신의 목숨을 던지는 것도 인간이고, 자신의
욕심 때문에 타인을 죽이는 것도 인간입니다.
셋째, 인간은 사이에 있는 존재입니다. 선과 악 사이에 있고, 인간과
인간 사이에 있는 존재입니다. 혼자서 살 수 없고, 함께 더불어
살아가는 존재입니다.
넷째, 인간은 육체의 한계를 넘어서 영원을 생각하는 초월적
존재입니다. 명상과 묵상을 통해서 하느님의 뜻을 찾아가는
존재입니다.
다섯째, 그래서 인간은 나그네와 같은 삶을 살아가는 존재입니다.
나그네가 언젠가 집으로 돌아가듯이, 인간은 삶의 여정을 통해서
죽음이라는 문을 넘어서야 하는 존재입니다.
인간은 유전자의 전달기계가 아니고, 인간은 이기적이거나 이타적인
존재가 아닙니다. 인간은 시편 8장에서 말하는 것처럼 ‘천사보다는
못하게 만들어졌어도 하느님께 사랑을 받는 귀한 존재입니다.’ 인간은
하늘과 땅 사이에 있고, 선과 악 사이에 있으며 중간자입니다. 또한
인간은 천성을 따르는 존재입니다. 천성을 따르는 사람은 인성을 갖는
것이고, 이 인성을 잘 닦는 것이 道입니다. 이 도를 알아 가는 과정은
敎라고 말을 합니다. 인간은 단순히 유전자를 전달하는 유기체가
아니라, 하늘의 뜻을 따라서 도를 공부하는 성품을 지닌 존재입니다.
하느님의 보다 큰 영광을 위해서 살아야 하는 존재입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서울 대교구 성소 국장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
◈ [청주] 혜안을 가진 이는 행복하다 |반신부의 복음 묵상
2016년 다해 11월25일 연중 제34주간 금요일
"너희는 이러한 일들이 일어나는 것을 보거든,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온 줄 알아라."
† 루카 21,29-33
혜안을 가진 이는 행복하다.
예수님께서는 무화과나무의 비유를 통해서 새로운 싹이 트면 계절의
변화를 느끼듯 세상의 여러 혼돈과 징표를 보거든 그것의 의미를
알아들어야 한다고 가르치십니다. 하나의 혼돈은 새로운 질서를
세우는데 꼭 거쳐야 할 과정입니다. 우리나라의 현실도 마찬가지입니다.
100만 명의 촛불집회가 헛되지 않으리라 확신합니다. 하나의 풍파가
몰아치면 그것을 계기로 새로운 틀이 만들어집니다. 그러므로 “혼돈과
어둠 속에서 움터 오르는 새 하늘, 새 땅의 창조와 광명을 내다보는
눈”(이현주목사), 혜안을 가진 이는 행복합니다.
주님으로 말미암아 세상의 혼돈은 사라지고 하느님의 나라가 우뚝
선다는 것이 우리에게는 큰 기쁨입니다. 또한 구원 받을 때가 가까이
왔다는 것이 마음 설레게 합니다. 그러나 솔직히 마음 한구석엔
두려움이 있습니다. 마음을 꿰뚫어 보시는 하느님께서 ‘각자가 행한
대로 갚아 주신다.’고 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성직자나 수도자를
떠 바쳐 위하고 거룩하게 보지만 그들 또한 부끄러움이 있고 자비가
필요한 사람입니다. 신분을 떠나서 모두가 맑고 깨끗한 주님을 닮은
마음의 소유자로 부끄러움이 없기를 희망합니다.
주님께서는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하늘과 땅은 사라질지라도
내 말은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이 말씀은 주님께서 하신 약속의
말씀들은 언제나 살아있다는 말씀으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말씀을 가슴에 담고 살아야 합니다. 말씀을 들었으면 그에 걸
맞는 삶으로 응답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도 모든 것이 사라질지라도
가슴에 남는 말씀을 전해야 합니다. 세상 것은 사라지지만 주님의
말씀을 차지한 사람은 영원합니다. 은혜를 풍요롭게 하는 것은 담을
그릇을 준비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분명, “누구든지 가진 자는 더
받고, 가진 것이 없는 자는 가진 것마저 빼앗길 것이다”(루카19,26).
하셨습니다.
우리가 일상 안에서 내 마음 내키는 대로 하면 뻔한 결과를 초래한다는
것을 압니다. 그러면서도 걸려 넘어지고 나서야 후회를 하고 새로운
다짐과 시작을 합니다. 마지막 날이 언제 올 것인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분명한 것은 “그 날이 오고 있다”는 것을 인식하는
것입니다. 아니 그 날이 오늘 이라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
마지막 때에 바로 지금 주님을 떳떳이 만날 수 있느냐가 문제입니다.
그러므로 앞을 내다볼 수 있는 영적인 눈을 지녀야 하겠습니다. 어떤
이는 건강을 자신했는데 생각하지도 못한 사고로 주님 앞에 서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야말로 우리의 삶은 주관자는 하느님이십니다.
하느님 앞에서 언제나 당당해야 하겠습니다.
어떤 처지에서든지 말씀 안에 자유를 누릴 수 있기를 청합니다. 언제
어디서나 내 마음 안에서 주님의 말씀이 살아 있기를 희망합니다.
주님으로 말미암아 가슴이 벅찰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주님,
“당신 말씀은 제 발의 등불, 저의 길에 빛”(시편 119,105)이기
때문입니다. 야고보 사도의 말씀으로 마무리하겠습니다. “말씀을
실행하는 사람이 되십시오. 말씀을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사람이
되지 마십시오”(야고1,22). 미루지 않는 사랑을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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