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10월 31일 연중 제30주간 금요일
너희는 자기 아들이나 소가 우물에 빠졌다면
안식일이라고 당장 구해 내지 않고 내버려 두겠느냐?"
(루가 14,1-6)
"Who among you,
if your son or ox falls into a cistern, would not immediately pull him out
on the sabbath day?"
말씀의 초대
바오로 사도가 필리피의 신자들에게 인사하며 그들을 위하여 기쁜 마음으로 기도한다고 전하고 있다. 그들이 늘 복음을 전하는 일에 동참하고 있기 때문이다(제1독서). 예수님께서 바리사이들의 한 지도자 집에서 식사하실 때 그분 앞에 수종 환자가 있었다. 예수님께서는 바리사이들에게 안식일에 그를 고쳐 주는 것이 합당한지 물으신 뒤 그를 치유하신다. 그리고 그들의 위선을 깨우쳐 주신다(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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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바오로 사도는 자신이 각별히 사랑했던 필리피의 신자들에게 감사와 격려의 소식을 보냅니다. 그들은 사도가 전한 신앙을 기쁘게 받아들이면서 복음을 전파하는 일에 참여하며 지지해 준 이들이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러한 신자들의 모습을 칭찬하면서도 그들이 그리스도인의 식별력과 순수함을 더해 가도록 격려합니다. 우리 또한 주님의 말씀을 받아들이고 신앙생활에 열심이더라도 영적으로 더욱 성숙해져 자신에게 다가오는 일들을 그리스도인의 눈으로 잘 분별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이러한 성숙의 길은 무엇보다도 진실한 기도를 통해서 가능합니다. 그런데 신실한 신자들도 기도를 제대로 하는 법을 모른다고 호소하는 이야기를 자주 듣습니다. ‘그림 읽어 주는 수녀’로 불리는 영국의 미술 평론가 웬디 베케트 수녀는 기도를 어떻게 배울 것인지를 『하루하루가 기도입니다』에서 그림을 보는 것에 비유하여 자상하게 알려 주고 있습니다. “미술 평론가가 일단 그림을 보는 일부터 시작하듯, 기도를 하고자 하는 사람은 기도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처음에는 그리 쉽지 않겠지만 언젠가는 쉬워질 때가 올 것입니다. 설령 그렇지 못하다 하더라도 그래도 처음보다는 쉬워지겠지요. 오래 잘 참고 견디다 보면 기도 습관이 몸에 밸 수도 있을지 모릅니다. 그렇지만 처음부터 그렇게 될 수는 없겠죠. 그것은 굳은 결심을 하고, 무질서의 쾌락을 누리고 싶은 마음을 꾹 참고 질서를 지키려고 노력하면서, 하느님의 편이 되는 데 필요한 일을 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됩니다. 기도가 습관이 되기까지 몇 년이 걸릴 수 있습니다. 하지만 진정으로 우리가 그렇게 하고자 한다면 분명 그렇게 될 것입니다.” 이 시월의 마지막 날에 주님 앞에서 고요히 기도하며 머무르는 시간을 가져 보면 어떨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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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께서는 율법 교사들과 바리사이들에게, “안식일에 병을 고쳐 주는 것이 합당하냐, 합당하지 않으냐?” 하고 물으신 다음, 거침없이 병자를 고쳐 주십니다. 안식일은 하느님께서 엿새 동안 세상의 모든 것을 만드시고, 이렛날에는 쉬시면서, 이날을 거룩한 날로 정하시어 복을 주신 것을 기념하는 날(창세 2,2-3 참조)입니다. 하느님께서 안식일을 제정하셨다 하여, 유다인들은 이날을 아무것도 하지 않고 오로지 기도하고 쉬는 날로 삼았지요. 그러나 시대가 흐르면서, 유다인들은 이날을 법률로써 공표하여, 이날에 일하는 사람들을 모두 죄인으로 여기게 됩니다. 안식일이 퇴색되고 형식화되는 순간입니다. 안식일은 쉬어야 합니다. 쉰다는 것은 다음에 할 일을 제대로 하려는 준비입니다. 쉴 때는 주님께서 쉬신 것처럼 거룩히 지내야 합니다. 거룩하게 지낸다는 것은 생명과 사랑의 의미를 제대로 깨닫는 행위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님께서는 안식일은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라고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쉰다는 것은 오로지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내려 주신 축복입니다. 우리는 주일을 어떻게 보내고 있습니까? 제대로 쉬고 있습니까? 제대로 쉬는 사람이 결국 제대로 일하는 사람입니다. 휴식을 취하면서 쉴 수 있도록 배려해 주신 주님께 감사드리고, 쉬지 못하고 일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기도해 줄 수 있어야 하며, 어려운 처지에 놓인 이웃에게 사랑을 실천해야 합니다. 주일을 지키지 않으면 고해성사를 보아야 한다는 법률적인 것에 얽매이지 말고, 주님께서 가르쳐 주신 합당한 몫을 다하는 것이 신앙인들이 해야 할 올바른 사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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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식일이라고 해서 병을 고치지 말라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환자를 치료하고 돈을 받는 의료 행위를 삼가라는 것이었습니다. 직업적인 활동을 금지했던 것이지요. 하지만 바리사이들은 달랐습니다. 그들은 치료 자체를 거부했습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율법을 ‘더 철저히’ 지키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을 지켜봅니다. 안식일에 ‘수종 앓는 이’를 고쳐 주실지 ‘아닐지’ 살피고 있습니다. “너희 가운데 누가 아들이나 소가 우물에 빠지면 안식일일지라도 바로 끌어내지 않겠느냐?” 정곡을 찌르시는 말씀입니다. 그들은 선뜻 대답하지 못합니다. 옛날 어떤 선비가 금을 너무 갖고 싶어 했습니다. 하루는 의관을 정제하고 금을 파는 상점에 들어갑니다. 그러더니 조용히 금덩어리를 들고 나오는 것이었습니다. 놀란 점원이 그를 붙잡고 외칩니다. “사람들이 쳐다보고 있는데 어찌 금을 훔치려 하십니까?” 그러자 선비 역시 놀라며 답합니다. “금을 가지고 나올 때는 사람은 보이지 않고 금만 보였다네.” 율법에 매달리면 율법만 보입니다. 사람도 보이지 않고 하느님도 보이지 않습니다. 율법의 ‘노예’가 된 것이지요. 안식일은 주님께 충실하고자 다른 일은 ‘잠시 접어 두는 날’입니다. 그런데 ‘본래 의도’는 생략하고 ‘껍데기’만 따지고 있습니다. 숲은 못 보고 나무만 보고 있는 셈입니다. 삶의 유연성을 상실하면 누구나 그렇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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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든두 살의 아버지와 쉰두 살 된 아들이 거실에 앉아 있습니다. 그때 참새 한 마리가 창가에 날아와 앉았습니다. 노인이 묻습니다. “저게 뭐냐?” 아들은 다정하게 말합니다. “참새예요, 아버지.” 조금 뒤 아버지는 다시 묻습니다. “저게 뭐냐?” 아들은 말합니다. “참새라니까요.” 조금 뒤 아버지는 또 묻습니다. 세 번째입니다. “저게 뭐냐?” 아들은 짜증을 냅니다. “글쎄, 참새라니깐요.” 한참 있다 아버지는 또 묻습니다. 네 번째입니다. “저게 뭐냐?” 아들은 그만 화를 냅니다. “참새라고요! 왜 자꾸 같은 질문을 반복하세요?” 한참 뒤였습니다. 아버지는 방에 들어가 때 묻고 찢어진 일기장을 들고 나옵니다. 그러곤 일기장을 펴서 아들에게 읽어 보라고 합니다. 아들은 읽습니다. 거기엔 자기가 세 살짜리 아기였을 때의 이야기가 있었습니다. “오늘은 참새 한 마리가 창가에 날아와 앉았다. 어린 아들은 ‘저게 뭐야?’ 하고 물었다. 나는 참새라고 답해 주었다. 그런데 아들은 연거푸 스무 번을 똑같이 물었다. 아들을 안아 주며 끝까지 다정하게 답해 주었다, 참새라고. 같은 답을 스무 번 해도 즐거웠다. 새로운 것에 관심 갖는 아들이 사랑스러웠다.” 세상의 부모 마음은 모두 같습니다. 예수님께서도 부모님의 마음을 지니셨습니다. 그분께서는 ‘수종 앓는 이’를 아버지의 시선으로 보셨지 심판관의 시선으로 보지 않으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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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큰 것과 작은 것을 제대로 구별하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다른 사람의 큰 병을 자신의 작은 병보다 못한 것으로 여길 때도 많습니다. 안식일일지라도 웅덩이에 빠진 소를 건져 내는 일은 당연한 것으로 생각하면서도, 고통 받는 사람을 도와주는 일은 계명을 어기는 일로 여기는 사람은 비단 바리사이들만이 아닌 것 같습니다. 우리는 더 큰 사랑의 의무를 소홀히 하였음에도 사소한 잘못만을 고백하고 “이 밖에 알아내지 못한 죄”로 처리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모든 것을 알고 계시는 하느님께 얼마나 부끄러운 일입니까? 크고 작은 것, 옳고 그른 것을 분별할 수 있는 은총을 청합시다
죽음의 시선
-박점례 수녀-
오늘 복음에서는 예수님의 두 질문과 그에 대한 율법 교사들과 바리사이들의 반응에 대해 언급하고 있습니다. 첫 번째 “안식일에 병을 고쳐 주는 것이 합당하냐, 합당하지 않으냐?”라는 질문에 바리사이의 우두머리들은 침묵하나 예수님은 ‘치유’라는 행위로 그것이 ‘합당하다’는 대답을 대신합니다. 두 번째는 왜 안식일에 사람을 살리는 것이 합당한지를 설명하는 질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너희 가운데 누가 아들이나 소가 우물에 빠지면 안식일일지라도 바로 끌어내지 않겠느냐?” 그러나 역시 바리사이들은 두 번째 질문에도 대답을 하지 못합니다. 이미 바리사이들의 태도는 예수님을 ‘지켜보고’ 있습니다. 이 지켜보는 태도는 곧 사람을 죽이는 태도임은 오늘 복음이 쓰인 문맥에서 충분히 감지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은 헤로데가 예수님을 죽이려 한다는 소식과, 하느님이 보내신 이들을 죽이기를 일삼는 예루살렘 성전이 버려질 것이라는 예수님의 예언에 곧바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영광이신 예수님께서 성전을 떠나실 것입니다. 그러나 그 전에 예수님은 병과 마귀와 온갖 죽음의 힘에 억눌리고 고통받는 사람들을 풀어 주시고 생명을 되돌려 주시며 건강을 되찾게 해 주시는 일을 계속하실 것입니다. “그 여우에게 전하시오. 오늘과 내일은 내가 귀신을 쫓아내며 치유를 끝장내고 사흘째는 내가 끝장납니다.”
지금 바로 나를 살리시는 분
- 박향숙 수녀-
율법이 최고였던 시대, 그래서 안식일에 어떠한 일도 해서는 안 되며 이 법을 어기면 죄인으로 치부하던 시대. 한 바리사이의 집에 예수님께서 식사 초대를 받아 가셨다. 음식을 잡수시는 예수님 앞에 수종을 앓는 사람이 있었다. 예수님은 그를 고쳐주신다.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에 사람을 살리신다. 안식일이 하느님을 위한 날, 거룩한 날이라면 하느님의 뜻은 어디에 있는가. 세상을 창조하시고 “보시니 참 좋았다.” 하시던 하느님의 마음으로 들어가 보자. 하느님께는 사람이 무엇보다 소중하다. 본문에 “누가 아들이나 소가 우물에 빠지면” 이라는 말씀을 자세히 바라보면 마치 ‘아, 바로 내 아들이 위급한 처지, 아니 죽음에 처해 있구나.’ 라고 하시는 것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내 아들이 우물에 빠져 있는데 어찌할 것인가 ? 이것은 생각할 것도 없다. 본능적으로 물에 뛰어들어가 아들을 살리고 본다. 이것은 다른 것으로 대체하거나 미룰 수 없는 것이다. 오늘 주님께서는 나를 바라보시면서 아들이라는 표현을 하고 있다. 나를 당신의 자녀로 바라보신다. 어쩌면 이 일 때문에 어려움을 당하실 수도 있고 당신의 목숨을 잃을 수도 있지만 아들을 살리시는 아버지의 마음을 어찌 다 헤아릴 수 있겠는가. 아들을 살려내고 싶은 것은 아버지의 큰사랑 !
나를 위해 살아가시는 분 나를 위해 계시는 분 나를 살리시기 위해 목숨을 던지신 분 지금 바로 나를 살리시는 분
하느님 안에서 안식을
-김찬선신부-
“안식일에 병을 고쳐주는 것이 합당하냐, 합당하지 않으냐?”
난감할 것입니다. 이런 질문을 받으면 누구나 난감할 것입니다.
그래서 다시 묻게 됩니다. 안식일에는 무엇이 합당합니까? 아무 것도 하지 말아야 합니까? 한다면 무엇을 해야 합니까? 반대로 무엇을 하지 말아야 합니까?
안식일은 쉬는 날이니 쉬는 것이 합당할 것입니다. 그런데 쉬는 것은 두 가지입니다. 하던 일을 그만 두는 것으로서의 쉬는 것과 하느님 안에 머무는 것으로서의 쉬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느님 안에 머무는 것으로서의 쉼이 아니라면 하던 일을 그만 두는 것으로서의 쉼은 빈둥거리거나 노는 것에 불과하고 쉬기를 강제하는 안식일 규정은 쓸데없는 억압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안식일은 하느님 안에 머무는 것이며, 하느님 사랑 안에서 안식을 누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매주일의 안식일은 영원한 하느님 안에서의 안식을 갈망하며 지금 여기서 미리 앞당겨 누리는 것이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안식일은 하느님 안에서 진짜 평안을 누리는 것이어야 합니다. 일을 쉬는 것이 아니라 세상의 근심 걱정을 쉬고, 일만 멈추는 것이 아니라 억압과 압박을 멈추고 일만 줄이는 것이 아니라 돈벌이의 욕심을 줄이고 일을 하지 않고 사랑을 하는 것입니다.
<독서> : 필리피 교우들을 위하여 사랑으로 간구하는 사도 바울로 -경규봉 신부-
“이 세상의 부모 마음 다 같은 마음, 아들딸이 잘되라고 행복하라고 마음으로 빌어주는 …”이라는 노래 가사가 있다. 자식이 잘되고 행복하기를 간절히 비는 마음이 곧 부모 마음이다. 부모는 자신보다 자식을 소중하고 귀하게 여기기 때문에 자식만큼은 잘되기를 간절히 빈다. 자식이 진실하고 올바른 사람, 착하고 정직한 사람이 되기를 원한다. 부모는 자식이 행복해 하는 것을 통해 행복을 느낀다. 그러한 마음이 부모의 마음이다.
그리고 그러한 부모의 마음이 곧 하느님의 마음이다. 하느님께서는 당신께서 창조하신 사람이 행복하고 잘되기를 원하신다. 하느님께서는 사람이 세상을 진실하고 복되게 살아서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를 원하신다. 그래서 예수님을 보내주셨고, 예수님을 통해 모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도록 하셨다. 하느님께서는 예수님을 통하여 참된 사랑을 보여주셨고, 사람이 예수님을 본받아 참된 사랑을 행함으로써 하느님께 영광과 찬양을 드리길 원하신다. 하느님께서는 사람이 행복하기를 원하시며, 사람이 행복한 것을 보시고 행복해 하시는 하느님이시다.
필립비 교우들은 사도 바울로를 통하여 하느님을 믿게 된 사람들이었다. 바울로는 필립비 교우들이 신앙 안에서 성장해가는 모습을 보면서 진심으로 감사했다. 자식이 성장하는 것을 보는 아버지의 마음이 감사와 감격에 가득하듯이 필립비 교우들을 바라보는 바울로의 마음은 아버지와 같은 감사와 감격의 마음으로 가득 찼다. 그리하여 그는 감사와 사랑이 가득한 마음으로 필립비의 모든 교우들을 생각하며 편지를 썼다.
먼저 그는 필립비 교우들이 어려운 가운데에서도 바울로가 복음을 전파하는데 적극적으로 협력한 점에 대해 감사드린다. 그들이 자신을 위하여 기도하고 헌금을 보냄으로써 물심양면으로 돕고, 자신과 함께 고통을 나눈 점에 대해 깊이 감사드린다.
그리고 그들에 대한 깊은 애정으로 그들을 위하여 하느님께 간구한다. 바울로는 먼저 하느님에 대한 그들의 사랑이 참된 지식과 분별력을 갖추기를 기도한다. 하느님을 더 깊이 알고, 악한 것과 선한 것, 중요한 것과 중요하지 않은 것을 분별하여 올바르게 행동할 수 있는 분별력이 더해지기를 간구한다. 그리하여 그들이 윤리 도덕적으로는 별 차이가 없어 보이는 것들 사이에서도 그리스도교의 정신에 따라 올바르고 온전한 것을 분별할 수 있기를 구한다.
그래야 하느님에 대한 사랑이 보다 건전하고 온전해지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그들이 진실하고 정직하며 깨끗한 마음을 가지고 그리스도의 재림을 맞이할 수 있기를 기도한다. 또한 그들의 믿음이 삶으로 드러나 사랑을 실천하기를 기도한다. 그들의 삶 속에 주님께서 함께 하심으로써 성령의 열매(갈라 5,22-23)가 그들 안에 풍성히 맺어지기를 기도한다. 그리하여 하느님께 영광과 찬양을 드리기를 기도한다. 즉 인간 창조의 목적이 그들을 통하여 이루어지기를 간절히 기도한 것이다.
사도 바울로의 마음은 곧 하느님의 마음이다. 사랑이신 하느님의 마음이 믿음 깊은 바울로의 마음속에 그대로 흘러 들어가 그의 마음은 아버지의 사랑으로 온통 채워졌다. 바울로는 사랑이 가득한 아버지의 마음으로 필립비 교우들에게 편지를 쓴 것이다.
오늘 하느님의 마음이 우리 마음속에 흘러 들어오기를 기도하자. 하느님의 사랑의 마음이 가득하여 사랑으로 살도록 기도하자. 사랑이 가득한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사랑이 가득한 마음으로 다른 이에게 귀 기울이며, 사랑으로 이웃을 만날 수 있기를 기도하자. 하느님의 그 사랑이 흘러넘쳐 우리가 만나는 사람들에게도 전해지기를 기도하자. 온 세상이 하느님의 사랑으로 충만한 세상이 되기를 기도하자. 그리하여 온 세상에 가득한 사랑이 하느님 아버지를 찬양하고 아버지께 영광을 드릴 수 있기를 기도하자..............◆
어제 인터넷을 검색하다가 깜짝 놀랄만한 기사를 보게 되었습니다. 즉, 어떤 유명 가수의 허리 사이즈가 공개되어 있었는데, 글쎄 18인치라는 것입니다. 순간 제 허리를 잡아볼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 정도가 몇 인치인데, 그렇다면 18인치면 어느 정도일까를 손을 잡아보면서 계산해보니 끔찍했습니다. 인터넷의 표현처럼 ‘개미허리’가 분명하더군요. 그러면서 이렇게 적혀 있습니다.
‘18인치 허리 등 완벽한 몸매를 가진 ***. 그녀의 몸매관리 비법은?’
사람들이 부러워하는 몸매가 이렇게 가는 허리인가 봅니다. 그래서 ‘완벽한 몸매’라고 표현했으며, ‘그녀의 몸매관리 비법은?’이라는 제목으로 사람들도 따라할 것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과거의 역사 안에서도 이러한 몸매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아름다움의 기준이 되었을까요? 아닙니다. 과거의 사진과 기록을 보면 오히려 통통한 사람들이 아름다움의 기준이 되었고, 또 사람들도 그러한 사람들을 좋아했습니다.
또한 지금 모든 사람들이 이렇게 가는 허리를 가지고 있는 사람을 좋아할까요? 그것도 아닙니다. 어떤 사람은 그렇게 가냘픈 모습을 좋아할지 모르겠지만, 튼튼한 몸매를 가지고 있는 사람을 좋아하는 분도 분명히 계십니다. 바로 현재의 모습 안에서도 아름다움의 기준은 사람마다 분명히 차이가 있는 것입니다.
사실 중요한 것은 어쩌면 이렇게 허리가 가늘도록 다이어트를 했다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말씀대로 제대로 살았는가가 아닐까 싶습니다. 다이어트를 했다고 구원되지 않지만, 주님의 말씀을 듣고 그대로 살면 분명히 구원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깨닫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래서 일부러 안식일에도 수많은 치유의 기적을 행하셨습니다. 물론 이 행위를 통해서 당시의 종교 지도자들과 대립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눈치를 보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사람들의 구원이었습니다.
오늘 복음에도 이 점을 분명히 하십니다. 수종을 앓는 사람이 예수님 앞에 있습니다. 사실 예수님께서는 바리사이들의 지도자 가운데 집에 초대 받아 가셨지요. 당시에는 주인이 손님의 자리를 정해서 앉혔던 관행을 기억할 때, 수종을 앓는 사람이 예수님 앞에 있다는 것은 일부러 그렇게 좌석배치를 한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즉,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치유를 하도록 유혹하려는 것이었지요.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마음을 아셨습니다. 자기에게 올가미를 씌우기에만 급급한 그들의 좁은 마음과 자신들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 지금 병으로 고통 속에 있는 사람까지 이용하는 그들의 닫힌 마음을 보신 것이지요. 그래서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이러한 질문으로 대신하십니다.
“안식일에 병을 고쳐주는 것이 합당하냐, 합당하지 않으냐?”
인간의 생명이 어떤 것보다 중요하고, 심지어 안식일과 같은 가장 거룩한 제도보다도 중요함을 강조하십니다.
우리 역시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모르고 잘못된 판단과 행동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이 새벽에 스스로를 반성하며,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중요한 것을 행하겠다는 다짐을 해봅니다.
사랑받는 일은 불타오름에 지나지 않으나 사랑하는 것은 마르지 않는 기름에 의해 빛남을 말한다. 그러므로 사랑받는 것은 사라져 버리지만 사랑하는 것은 오랫동안 지속한다.(릴케)
측은지심
- 신한열 수사-
인간은 본래 태어날 때부터 착한 마음을 지녔다는 성선설을 가르쳤던 맹자는 인?(仁)?에 대해 설명하면서 유명한 비유를 든다. 아이가 우물을 향해 기어가는 모습을 보면 누구든 달려가서 구하려는 마음을 가지지 않겠는가?? 누구에게 칭찬을 받거나 자신의 선행을 자랑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마음속에서 ‘측은지심’?이 솟아나기 때문이다. 인간의 마음이 착하고 이타적이라는 가르침이다.
어떤 법이나 정의의 명분으로든, 심지어 하느님의 이름으로든 인간의 생명을 가벼이 여기는 것은 결코 받아들일 수 없다. 역사상 얼마나 많은 범죄 행위가 법과 정의와 신의 이름으로 행해졌던가?? 불행히도 그리스도교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안식일의 주인이신 예수님은 인간을 옭아매는 법의 굴레, 종교적 계율의 굴레를 벗겨주신다.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서 있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리고 하신 그분. 참으로 인간적인 것은 진정 하느님을 향한 길과 상반되지 않는다는 것을 그분은 웅변하셨다. 성경은 사람이 하느님의 모습을 닮게 만들어졌다고 한다. 그 말은 사람 안에 하느님의 마음이 자리하고 있다는 뜻이리라. 아픈 사람을 보면 아파하고 슬픈 사람을 보면 슬퍼하는 마음이 얼마나 자연스럽고 인간적인가. 그런데 환경과 교육의 영향으로 그 본래의 마음 인?(仁)?을, 하느님의 마음을 잃어버리는 경우가 많다. 간혹 종교적 계율로 무자비한 행위를 정당화하는 무리를 보면 소름이 끼친다.
로마 시내 바티칸 교황청 가까이에 ‘레지나 첼리?(천상의 모후)’ 교도소가 있다. 요한 23세가 즉위한 해인 1958년 이 교도소를 방문했을 때의 일화는 유명하다. 1870년 이후 교황이 처음 로마 교구에 사목 방문한 곳은 ‘제수 밤비노?(예수 아기)’ 병원의 중환자 어린이들이었다. 그날은 성탄절이었다. 이튿날엔 레지나 첼리 교도소로 갔다. 당시 언론은 이 방문을 상당히 놀라운 것으로 받아들였다. 정부 관리와 사진 기자, 수감자와 교도관들이 사방에서 교황을 에워쌌다. 참으로 인간적이었던 그분은 수감자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여러분이 나를 찾아올 수 없기 때문에 내가 여러분에게 왔습니다. …?내가 (자유로운 몸으로) 밖에 있고 여러분이 이 안에 갇혀 있는 것은, 여러분이 나보다 훨씬 더 불운했기 때문입니다.” 교황의 이 말에 수감자들은 모두 뜨거운 눈물을 흘렸다. 교황은 어떤 사건으로 감옥 생활을 한 삼촌 얘기를 들려주면서 어떤 훈계보다도 사람에 대한 연민, 측은지심을 보여주었다.
단순 무식하고 도발적인 예수님!
-김찬선신부-
어제, 오늘 복음에서 주님은 계속 바리사이들과 상대하십니다. 어제는 예루살렘으로 향하는 길을 가지 말고 헤로데를 피해 다른 곳으로 가라는 바리사이의 얘기였다면 오늘은 예수님을 초대한 바리사이의 얘기입니다.
어제 바리사이에 대해서 제가 안 좋은 쪽으로 얘기를 하였는데 어제 하루 종일 그 바리사이에게 미안했습니다. 바리사이에 대한 나의 편견이 아닐까? 바리사이가 정말 좋은 뜻으로 예수님에게 다른 곳으로 떠나라 얘기했을 수도 있지 않았는가? 이런 생각들이 들었습니다. 오늘 복음을 보니 그런 생각이 더 들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바리사이 지도자 집에 가시어 식사를 하십니다. 누군가를 식사에 초대한다는 것은 사랑과 존경의 표시이고, 사랑과 존경까지는 아니라도 호의의 표시일 것입니다.
그래서 저 같으면 그 사람의 사랑과 호의를 생각해서 그가 꺼리는 일, 즉 안식일에 병 고치는 일은 삼갔을 것입니다. 남의 집에 초대받아 식사를 하면 초대에 고마워하며 먹는 동안 즐거운 얘기, 덕담이나 하는 것이 도리 아닙니까? 그러나 예수님은 뜬금없이 “안식일에 병을 고쳐주는 것이 합당하냐, 합당하지 않으냐?” 물으시고는 너무 도발적인 질문에 아무 대답도 못하니 병을 고쳐주십니다.
제가 생각하기에 예수님은 참 도전적이고 앞뒤를 가리지 않고 남의 눈치를 보는 분이 아니십니다. 규율과 계율도 거침없이 깨는 분이십니다. 오직 사랑만이 중요하니 단순 무식하십니다. 사랑이면 누가 뭐라 해도 하고 사랑 아니면 안 하십니다. 그래서 사람들을 적지 아니 당황하게 하고 혼란스럽게도 하십니다.
옛날에 걸레 스님, 중광의 얘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달마도로 유명한 화가 스님이었지만 괴짜 스님, 자유분방하고 파계를 밥 먹듯이 하는 스님으로 한 때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분이고 결국 불교계로부터 파문을 받은 분입니다. 그런 스님이 기차를 타고 가는데 옆자리에 곱추 여자가 앉았습니다. 얘기를 하다 보니 이 여자가 평생 남자 품에 안겨본 적이 없는 불쌍한 여자였습니다. 그래서 그 밤으로 육보시를 해주었다는 얘기입니다. 제가 20대 때 이 얘기를 듣고 참 멋있다는 생각과 괜히 도사인 척 하는 거 아냐 하는 생각이 같이 들었습니다.
예수님도 당시 이 정도의 파문을 일으키신 분이고 끊임없이 사람들에게 도발적이었던 분이셨고 끊임없이 사랑의 도전을 하는 분이셨습니다.
오늘도 저에게 단순 무식하게 사랑하라고 도전하십니다.
진실과 위선
-전삼용신부-
이번에 여행을 다녀왔는데 네덜란드의 암스테르담에도 갔었습니다. 지금까지 암스테르담 하면, 자유분방함이 지나쳐서 타락이 극도에 달한 도시로 생각되었었습니다. 그리고 그 모습을 보고 싶기도 하였습니다. 그리고 어떻게 윤리적으로 가장 타락한 암스테르담이 세계 도시 중 범죄율이 가장 낮은 도시가 될 수 있는지를 알고 싶기도 하였습니다.
세계에서 처음으로 동성애자들의 결혼이 합법화 되고 대마초와 같은 마약을 길거리에서 피며 다닐 수 있고 사창가가 관광하는 사람들이 한 번쯤은 보고 가야하는 문화가 있는 곳에 암스테르담입니다.
처음 네덜란드에 들어섰을 때는 그 자연 풍경의 평화로움과 넉넉함에 지금까지 생각해 왔던 이미지를 잊게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정작 도시에 들어서니 말로만 들어왔던 것이 하나도 틀리지 않았습니다.
카페 옆을 지날 때면 독한 대마초 냄새가 길거리까지 번져 나와 담배도 피우지 않는 저로서는 오랜 시간 역겨움을 느껴야 했습니다. 술과 마약과 매춘과 동성애로 들끓는 곳이 암스테르담이었습니다.
‘이런 소돔과 고모라와 같은 도시에 어떻게 이렇게 범죄율이 낮을 수 있을까?’
교육적인 면이나 우리가 보지 못하는 면이 물론 있기는 하겠지만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아마도 그들이 적어도 자신들을 감추며 살지 않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적어도 위선적인 모습으로 살고 있지는 않았습니다.
우리는 매춘거리가 어떤 곳인가 가보고 싶었지만 그것을 물어보는 것이 창피해서 물어보지도 못하고 있었지만 어떤 분은 길거리에서 당당하게 몇 번씩이나 지나가는 사람에게 그 곳을 물어보았습니다. 또 사람들은 스스럼없이 가르쳐 주었습니다.
어쩌면 우리 문화 안에서 내 안에 있는 창피한 것들을 감추는 것이 당연한 것처럼 교육을 받아왔지만 사실 그런 교육들이 나 자신을 솔직하게 드러내지 못하게 만들었던 것 같습니다. 내가 감추고 있는 솔직하지 못한 모습이 벌써 위선의 시작이 아닌가 싶었습니다.
신학생 때 착한 거짓말도 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 손들어 보라고 했을 때 저만 손을 들고 있는 것을 발견했을 때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우리는 어느 정도는 자신을 감추고 거짓말을 하며 살아도 된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살아가면서 거짓말을 살짝살짝 하면 살기가 참 편할 때도 있고 다른 사람을 위해 거짓말을 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작은 것에서부터 우리의 겉과 속이 서로 달라지고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할 것입니다. 누구도 한 순간에 위선자가 되는 사람은 없습니다. 사람은 조금씩 자신을 가리고 다른 모습을 드러내며 살게 되는 것입니다.
거짓말을 절대 해서는 안 된다는 성경 말씀은 수 없이 많습니다.
“내가 이렇게 여러분에게 편지를 써 보내는 것은 여러분이 이 진리를 몰라서가 아니라 진리를 알고 있기 때문이고 또 진리로부터 거짓말이 결코 나오지 않는다는 것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1요한 2,21)
하느님은 진리이시고 진리로부터는 거짓이 절대 나올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는 죄를 지으신 일이 없고 그 말씀에도 아무런 거짓이 없었습니다.” (1베드 2,22)
따라서 그리스도께서도 거짓말을 하지 않으셨습니다.
“사랑은 거짓이 없어야 합니다.” (로마 12,9)
바오로 사도는 사랑엔 거짓이 없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왜냐하면 거짓말을 하는 사람은 믿을 수도 그래서 사랑할 수도 없기 때문입니다.
아빌라의 데레사 성녀는 “내가 거짓말을 한 번 하느니 천 번 죽는 것이 더 낫습니다.”라고 하셨습니다. 왜냐하면 거짓말을 하는 사람은 결국 누구의 자녀인지 스스로 말해주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너희는 악마의 자식들이다. 그래서 너희는 그 아비의 욕망대로 하려고 한다. 그는 처음부터 살인자였고 진리 쪽에 서 본 적이 없다. 그에게는 진리가 없기 때문이다. 그는 거짓말을 할 때마다 제 본성을 드러낸다. 그는 정녕 거짓말쟁이이며 거짓말의 아비이기 때문이다.” (요한 8,44)
예수님께서도 안식일에 병자를 고쳐주시기 전에 아주 당연한 질문을 하시지만 사람들은 그 당연한 질문에도 대답을 못합니다.
“안식일에 병을 고쳐 주는 것이 합당하냐, 합당하지 않으냐?”
예수님은 대답이 없는 그들을 답답해하시며 그의 병을 고쳐주시고 돌려보내십니다. 그러면서 그들이 안식일이라도 가축의 물을 먹이고 일을 하는 것들을 들어 그들의 위선을 꼬집으십니다.
사실 유다인들이 만들어놓은 법 안에서는 예수님께서 안식일을 어기신 것입니다. 그러나 겉으로는 법을 어기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유다인들은 다 위선자들이었습니다.
어쩌면 암스테르담에서 윤리적인 법들을 어기고 있다고 손가락질하는 우리들이 더 위선적인 사람이 아닌가 생각이 들었습니다. 적어도 그들은 솔직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누구 하나 손가락질 할 수 없습니다. 그런 모습들이 분명히 내 안에 숨겨져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남을 심판하면서 자신까지 동시에 심판하게 되는 것입니다.
위선적이 되지 않으려면 진실해야 한다는 것은 아주 당연한 진리일 것입니다. 겉 다르고 속 다른 사람이란 소리를 듣기를 원치 않는다면 말과 행동에서 거짓이 없어야 함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 자신의 열등감이나 교만함 때문에 더 좋게 보이려하고 약점을 드러내지 않으려고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더 위선적인 삶을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저라면 아무런 능력이 없어도 솔직하게 자신의 부족함을 인정하고 그것이 자신의 모습임을 껍데기 없이 드러낼 줄 아는 사람이 있다면 저보다 훨씬 나은 사람이라고 존경할 것입니다. 저조차도 감추고 사는 것이 많기 때문입니다.
오늘도 조금 더 솔직해지고 조금 덜 위선적인 사람이 되도록 노력합시다. 솔직하여 내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다면 내가 무엇이 잘못되었는지조차도 깨닫지 못하고 남들 손가락질만 하며 살게 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내 코가 석자인데>
-양승국신부-
저는 너무도 부당하고 부끄럽지만 수도자 양성 책임을 맡은 지가 벌써 3년째 접어듭니다. 양성책임자로서의 역할은 참으로 힘겹습니다. 매월 적어도 한번씩은 양성중에 있는 형제들을 개별적으로 만나야 합니다. 그들이 하느님의 뜻을 찾아나가는 여정의 동반자로서 어려움이나 하소연을 주의 깊게 경청하는 것은 첫 번째 가는 의무입니다.
그리고 혹시라도 자신들이 제대로 보지 못하고 느끼지 못하는 취약점들이 무엇인지 늘 눈여겨보고서는 일일이 피드백을 해주어야 합니다. 내 코도 석자인데 너무도 괴로운 일이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느님께서 제게 맡겨주신 일이려니 하고 또 다시 용기를 내곤 합니다.
형제들을 주기적으로 만나면서 늘 듣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단지 외적으로 드러나는 현상만으로 판단하는 지도자가 아니라 영적인 눈으로 바라보고 기다릴 줄 아는 영적인 스승이 되어달라"는 요구입니다. 또 자주 듣게 되는 이야기가 "제발 편애하지 말아달라"는 충고입니다. 또한 "부성애를 진하게 느낄 수 있는 진정한 아버지가 되어달라"는 말입니다.
오늘도 한 그룹의 형제들과 한잔하면서 허심탄회하게 대화를 나눈 최종적인 결론은 부성애였습니다.
벌써 꽤 오래 전 일이네요. 한번은 제가 큰 접촉사고를 낸 적이 있었습니다. 제가 몰던 승용차와 부딪친 차가 바로 폐차장으로 갈 정도로 큰 사고였습니다. 물론 순식간에 자동차 보험 수가가 올라가서 책임자로부터 호되게 야단맞을 상황이었습니다.
다행히 하느님의 도우심에 힘입어 저나 상대편이나 두드러지게 신체적인 피해는 입지 않았습니다.
사고를 마무리하고 미안한 심정, 잔뜩 주눅든 얼굴로 맨몸으로 수도원으로 들어오던 길이었습니다. 무엇보다도 얼굴을 들 수가 없었습니다. 참으로 송구스런 생각뿐이었습니다.
잔뜩 주눅들어서 들어서는 제게 당시 원장 신부님은 오직 한마디 말씀만 하셨습니다.
"그래, 어디 다친 데는 없나?"
제 생애 안에서 참으로 잊혀지지 않은 순간입니다. 화가 잔뜩 날만도 하련만 "차가 얼마나 부서졌는지? 보상해주어야 할 금액이 어느 정도인지?"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하지 않으시고 제 걱정부터 해주셨습니다.
오늘 복음을 통해서 우리는 예수님께서는 무엇보다도 인간을 위한 존재라는 것, 바로 우리 각자의 구원을 위한 메시아였다는 것을 잘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영적인 존재, 신적인 인물이셨지만 그에 앞서 따뜻한 피가 흐르던 한 인간이셨습니다.
예수님은 인간의 언어, 따뜻한 인간의 마음을 지닌 분이셨습니다. 한 인간이 겪고 있는 슬픔과 좌절 앞에서 절대로 그냥 지나치지 못하던 분이셨습니다.
예수님은 한 인간의 슬픔 앞에 눈물 흘리시던 분, 한 인간의 고통 앞에 당신 역시 극심한 고통에 시달리던 분이셨습니다.
그분은 전혀 엉뚱한 길, 죽음의 길을 지척지척 걸어가고 있는 한 가련한 인생을 외면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들의 구원을 위해 밤낮으로 노심초사하시던 분, 무엇보다도 한 인간을 소중히 여기시던 분이 예수님이셨습니다.
무엇보다도 한 인간을 소중히 여기고 그를 구원하기 위해 동원할 수 있는 모든 노력을 다하셨던 예수님의 자비를 생각합니다.
오늘 하루 비록 우리가 비참하고 부끄럽지만 다시 한번 힘을 내고, 우리의 나약함에 다시 한번 의연하게 맞설 수 있는 힘을 청하는 하루가 되시길 기원합니다.
생트집
-서인덕 신부-
내가 무슨 말을 하든지, 무슨 일을 하든지 주위에서 트집 잡는 사람이 한두 명씩은 꼭 있습니다. 내가 좋은 일을 해도 그 사람 눈에는 좋게 보이지 않을 것이고, 내가 좋은 말을 할 때에도 그 사람 귀에는 좋은 이야기로 들리지 않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주위에는 많은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분을 존경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말도 안 되는 생트집을 잡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그 사람들에 대해 ‘눈에는 눈 ,이에는 이’ 작전이 아닌, 당신께서 몸소 모범으로 그들의 입을 막으시고, 가슴을 열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그런 작전을 쓰는 우리와는 차원이 다른 분임을 다시금 느낍니다. 무엇이 옳고, 좋은 일인지 각종 미사여구를 사용한 말씀이 아니라 당신의 올곧은 행동을 예수님은 보여주십니다. 사랑의 마음이 부족했던 지도자들에게 진정한 사랑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해주십니다. 예수님의 그 말씀과 행동을 저에게 비춰봅니다. 입으로만 사랑을 읖조렸던 제 자신을 돌아봅니다. 그리고 진정한 사랑이 무엇인지를 가슴속에 다시금 새겨봅니다. 나를 필요로 하는 곳에 기꺼이 그곳에 있을 수 있는 사람, 내 손길이 필요한 곳에 손을 담그고 있는 사람. 이런 사람이 되고자 다시금 결심해봅니다.
잠자코 있었던 사람들
-김인옥 수녀-
한 달 피정 중에 고해성사를 볼 수 있었다. 오랜 성찰 기간을 갖고 준비하다 보니 몇 년 전에 지나쳤던 한 가지 사건이 죄책감으로 떠올랐다. 나는 이번 기회에 성사를 보아야겠다고 생각하며 죄책감을 조금이라도 덜어보려고 그 일에 대하여 늦었지만 기워 갚아야겠다는 결심을 하게 되었다. 나름대로 나의 결심을 기특하게 여기며 성사를 보았다. 물론 알아낸 죄가 많았던 만큼 이 사건 말고도 여러 가지 고백을 했다. 내 이야기를 열심히 듣고 있던 신부님은 다른 내용은 다 젖혀놓고 기워 갚기로 했다는 나의 결심에 대해 갈라티아서를 인용하시며 수녀님이 추구하는 자유를 율법을 지킴으로써 이루어지는 것이냐고 되물으셨다. 잠시 어리둥절해하고 있는데 신부님이 그렇게 일일이 알아낸 소죄를 다 기워 갚으려면 평생 자유롭지 못할 것이라고 하시며 그 결심마저도 내려놓고 예수님의 자비에 의탁하라고 하셨다. 갑자기 예수님이 내가 메고 있던 짐을 멀리 던져버리시는 것 같은 자유로움이 느껴지며 나도 모르게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예수님이 내 빚을 거저 탕감해 주신 것이다. 율법주의의 잣대를 내게 적용시키고 남에게도 적용시키며 자유를 구속하던 나에게 내 빚을 탕감해 주심으로써 사랑이 무엇인지를 일깨워 주셨다. 예수님은 그런 분이셨다. 오늘 복음의 수종병자는 아마도 바리사이들이 예수님을 고발할 구실을 만들 양으로 그곳에 오게 되었을 것이다. 그러잖아도 자신이 앓고 있는 병 때문에 죄인이라는 죄책감으로 어깨를 움츠리고 있었을 것이다. 예수님은 바리사이들의 올가미와 속셈을 간파하셨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의 마음은 병을 앓고 있는 이에게 머물렀다. 아들이나 소가 우물에 빠져 안식일인지 아닌지 따질 겨를도 없이 허겁지겁 나서는 부모의 마음, 주인의 마음으로 수종 앓는 이를 자유롭게 해주셨다. 율법의 요구보다 사랑의 요구가 앞서시는 예수님 앞에서 누가 무슨 말을 할 수 있단 말인가? ●
새벽을 열며 요즘 많이 날씨가 쌀쌀합니다. 낮에는 느끼기 힘들지만, 새벽에는 기온의 변화를 확실하게 알 수가 있지요. 기도하러 경당에 들어갈 때, 방에서 입고 있는 복장을 그대로 하면 얼마나 추운지 몰라요. 그래서 저는 항상 두꺼운 옷을 하나 더 걸치고 경당에 들어간답니다. 그런데 문득 경당의 기온이 궁금했습니다. 경당 안의 온도가 도대체 몇 도 길래 이렇게 추위를 느끼는가 라는 의문이 생겼거든요.
17도. 경당 안의 온도계가 가리키고 있는 온도입니다. 분명히 여름의 기온보다는 낮은 기온이지요. 하지만 한 겨울에 비하면 엄청나게 높은 기온입니다. 왜냐하면 이 경당의 온도가 한 겨울에는 영하로도 떨어지거든요. 따라서 봄이 오면서 경당 안의 온도가 10도만 넘어도 얼마나 따뜻했는지 모릅니다. 더군다나 17도가 된다면? 그때는 더운 날씨죠.
똑같은 17도입니다. 봄에 느끼는 17도와 가을에 느끼는 17도의 차이는 왜 이렇게 다를까요? 즉, 봄의 17도는 더운 반면, 가을의 17도는 왜 춥다고 느낄까요?
우리들의 삶 안에서도 이런 차이는 분명히 있습니다. 똑같은 고통과 시련을 당하지만, 어떤 사람은 그 순간을 견디기 힘든 시간으로 여기는 반면, 또 다른 사람은 오히려 은총과 감사의 순간으로 생각하더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다름을 느끼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주님께서 계시고 안계시고의 차이일까요? 아닙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들 곁에 항상 가까이 다가오셨고,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들 곁에서 우리를 지켜주시는 분이십니다. 우리들처럼 어떤 날에만 가까이 하고, 또 어떤 날에는 멀리하시는 분이 아니지요.
오늘 복음만 보아도 알 수가 있지요. 사람들은 안식일이라고 해서 치료하는 것을 거부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이라는 이유를 들어서 치료를 거부하지 않습니다. 그러한 행동으로 인해서 당신이 오히려 더 큰 고통과 시련을 당하게 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에 수종병자를 고쳐 주십니다. 안식일이라고 해서 사람들 곁을 떠나야 한다면 사람들이 겪는 고통과 시련이 너무나 안쓰러웠던 것이지요.
우리들의 고통과 시련을 느끼는 그 차이는 바로 나의 마음에 있었습니다. 결코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지 않았기 때문에 고통과 시련을 느끼고, 당신께서 함께 했기 때문에 고통과 시련을 이겨낼 수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바로 주님을 느끼고 함께 하려는 마음이 내 안에 있느냐 없느냐가 우리들에게 가장 중요했던 것입니다.
이제는 괜한 분에게 원망을 하지 맙시다. 주님께서 나와 함께 하시지 않는다고, 내가 이렇게 힘들어하는데 왜 나를 이렇게 각박하고 험한 세상에 그냥 내치시냐고……. 정말로 사랑의 하느님이라면 나의 이 고통과 시련을 제발 좀 없애달라고……. 하지만 가장 근본적인 문제는 내게 있었습니다. 내 안에 있는 이기심으로 인해서 주님을 느끼지 못했기 때문에, 이 세상 것에 대한 욕심으로 주님의 자리를 내 안에 만들지 못했기 때문에, 자그마한 고통과 시련에도 쉽게 넘어질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들을 절대로 배신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당신에게 고통과 죽음을 가져오게 할 안식일 치유도 거침없이 행하셨던 것입니다. 오히려 주님을 배신하고 있었던 우리들이었습니다. 이제는 배신해서는 안 됩니다. 이제는 주님께서 가장 원하시는 사랑의 실천을 통해서 주님을 배신하지 않고 주님과 진정한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그때 우리들은 어떤 고통과 시련을 경험해도 감사와 기쁨을 간직할 수 있을 것입니다.
주님을 배신하지 않는 멋진 하루를 만들어 봅시다.
빠다킹 신부
예수님 먼저
-장재봉 신부-
오늘 복음의 주인공은 병을 치유받은 수종병 환자입니다. 특이한 것은 예수께서 그 사람을 치유하신 후 곧바로 돌려보내셨다는 대목입니다. 예수님은 치유를 받은사람에게 격려하고 칭찬도 아끼지 않으시는 분이신데 어쩐 일일까 싶습니다. 오늘 “안식일에 병을 고쳐주는 것이 합당하냐?”고 하시는 예수님 물음의 답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오늘 내 삶 안에 깊숙이 들어오셔서 물으시는 그분께 답해드릴 행위는 마련하셨는지요? 사는 것이 너무 분주해서 예수님을 찾는 일을 미루게 되는 경우도 허다합니다. 그러나 오늘 수종병 환자의 경우에서 볼 수 있듯 어려울수록, 힘이 들수록 그리고 도저히 감당하기 벅찬 일이 가로막을 때 먼저 예수님께 나아가야 한다는 사실을 기억해야겠습니다. 힘든 환자의 몸으로 예수님 앞에 나왔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예수님께서는 그를 낫게 하시고 다른 이들보다 먼저 돌려보내셨습니다. 어려운 중에 최선을 다해 예수님께 나왔던 그에게는 더 이상 설명할 것이 없다는 뜻은 아닐까요. 우리도 온갖 세상 것에 갇혀 있는 사람을 위해 복음을 수호하고 확증하여 은총에 동참하게 되길 진심으로 바랍니다. 그야말로 먼저 이웃의 손을 잡고 그 아픔을 위로하는 일이기 때문이기도 하고, 또 오늘 예수님이 행하신 모습대로 살아내는 복음의 삶인 까닭이기도 합니다. 무엇이 더 옳고 정의로운 것인지 분별하여 행동하는 사랑의 지혜는 우리네 삶의 수순을 언제나 ‘예수님 먼저’가 되도록 이끌어줄 것입니다.
나에게 질문하신다면
-김희자 수녀-
복음에서 예수님은 자주 질문을 던지신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 “시몬아,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누가 강도를 만난 사람에게 이웃이 되어주었다고 생각하느냐?” 오늘도 “안식일에 병을 고쳐주는 것이 합당하냐, 합당하지 않으냐?” 하고 물으신다. 질문은 사람의 마음을 들여다보는 시간을 갖게 한다. 그러나 보통 자신과 관련된 문제에 부딪쳤을 때 잘 보려 하지 않고 침묵을 지킬 때가 있다. 무엇을 결정하는 것보다 적당히 살아가는 것이 더 편하다는 생각으로 문제점을 제대로 지적하지 않고 모른 체 지나치기도 한다. 그러나 예수님이 “너는 어떤 것이 올바르다고 생각하느냐?”라고 질문하신다면 완벽한 답변은 못할지라도 늘 자신이 자유로울 수 있는 답을 할 수 있으면 좋겠다. 예수님은 무엇이 옳은지 생각할 틈을 주시면서 소신있게 말씀하신다. 말이란 이기는 수단이 아니라 승복시키는 수단이다. 자신의 의견을 정직하게 표현하되 상대방을 얕잡아 보시지 않는 예수님의 교육방법은 늘 나를 경각시킨다. 자신이 알고 있는 지식을 과시하기 위해 강압적인 방법을 쓴다면 듣는 이가 상처를 받을 수도 있다. 예수님은 고통을 겪는 사람들을 볼 때마다 측은한 마음이 드셨다. 그들의 슬픔이 얼마나 깊은지 느끼셨던 것이다. 하느님의 진정한 신비는 하느님께서 우리의 고통과 고난을 없애주시는 것이 아니라 먼저 이러한 고통을 우리와 함께 나누고자 하신다는 점이다. 오늘 복음에서 수종병자를 보신 예수님은 안식일 다음날까지 미루지 않고 즉시 낫게 해주신다. 이렇게 하는 것이 사람들의 비판을 받고 단죄받게 될 것을 아셨지만 예수님은 전통을 따르기보다 그 자리에서 선과 자비를 행하시어 사랑이신 아버지의 뜻을 따르신다. 그래서 율법의 목적은 봉사요 연민이며 사랑임을 가르쳐 주신다.
연중 제30주간 금요일 - 서진영 신부 -
지금 운전하고 계신 분들 있으시죠? 도로에 나가면 가장 무서운 것이 무엇입니까? 갑자기 끼어드는 차량입니까? 아니면 성가신 오토바이입니까? 아니면 대책 없는 자전거입니까? 그러나 이런 것 외에 정작 무서워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교통 단속입니다. 어느샌가 나타나는 교통 경찰과 언제 찍혔는지도 모르는 채 받게 되는 범칙금 납부 고지서입니다.
그래서 교통신호는 안 살피고, 경찰과 카메라만 보는 사람도 있습니다. 규정 속도 지키고, 신호 위반 안 하면 단속에 걸릴 일도 없다는 것은 알지만, 세상에 규정만으로 살 수 있는 것은 아니고, 항상 지키기에는 어려운 경우도 있습니다. 내리막길 자칫하면 규정 속도 넘기게 됩니다. 그렇다고 속도를 줄이면 뒤차와 접촉사고 납니다. 알면서도 달리고 있는데 앞에 교묘히 설치된 이동식 카메라가 보입니다. 그 순간 앗차 함정이다라는 생각이 듭니다.
이것만이 아닙니다. 고속도로 휴게소 출구에 설치된 카메라도 있습니다. 규정 속도로 나올 수가 없는 상황인데도 단속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정말 사고가 예방되는지 정말 사고 다발 지역에서의 예방 차원의 단속인지, 실적 올리기인지 모호할 때가 있습니다. 심하면 카메라가 예방이 아니라 사고 유발의 원인이 될 수도 있다고 지적을 받기도 합니다. 그래서인지 그다지 카메라를 달가워하지 않습니다. 내가 보호받는다는 생각보다 감시당한다는 생각을 하게 합니다. 자연히 거부감을 가지게 하고, 교통 안전보다 성가시다는 생각을 들게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안식일법’ 규정을 들먹이는 바리사이들에게 너희들 너무 한다고 항변하십니다. 이 모습은 거의 교통 경찰에게 항변하는 운전자와 같습니다.
일단 예수님께서 지적하신 안식일 위반의 경우를 보겠습니다. 규정속도 준수가 운전의 기본 중의 기본인 것처럼, 안식일은 쉬는 날이므로 안식일에 일하지 말라는 것은 말이 필요 없는 기본 중의 기본입니다. 다만 정속 유지가 사고 예방에는 도움이 되지만, 눈 앞의 사고를 보면서 충분히 피할 수 있는 상황에서도 고지식하게 규정을 따지는 운전자는 몇이나 되겠습니까?
안식일에 노동하지 말라는 규정으로 피할 수 있는 사고를 그냥 지켜 보고 있어야 한다는, 고통 받는 이들을 위한 손길까지 거두어야 한다는 것은 억지가 아닐까요?
안식일의 치유, 규정대로 하면 위반이 맞습니다. 그러나 왠지 심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형평성 없는 법적용이 법과 규정의 취지를 흐리게 하듯, 자비 없는 계명은 하느님의 뜻을 멀어지게 합니다. 사람들로부터 멀어져 가는 하느님의 마음에서 예수님은 화가 나신 것입니다.
안식일이 하느님을 위한 감사의 날이라면, 그래서 쉬는 날이라면, 이 거룩한 날, 왜 남의 꽁무니나 쫓으며 흠집이나 잡냐고 항의하신 것입니다. 만약 우리도 내가 그 사람보다 옳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그 사람 흠집이나 잡으려 한다면, 오늘 예수님께서 하신 질타를 면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내가 다른 이들에게 보여주는 열심과 봉사는, 다른 사람을 못난 사람으로 만드는 것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특히 그렇게 못하는 이들에 대한 비난이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나는 타인을 향한 감시 카메라가 되어선 안됩니다. 부디 배려하는 마음으로 함께 갈 수 있도록 하십시오. 아멘.
-김영덕 신부 -
얼마 전 본당에서 많은 신자들과 따뜻한 식사를 나누는 자리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한 아기 엄마가 자신의 입에 음식을 넣어 잘게 으깨어서 아기에게 먹이는 장면을 보았습니다. 아직 이가 나지 않은 어린아이를 먹이기 위해 엄마는 기꺼이 그런 행동을 취한 것입니다. 이런 엄마를 보고 우리는 결코 미개하다거나 비위생적이라고 손가락질 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아이를 향한 엄마의 극진한 사랑의 행위요, 마음이 담긴 표현이기 때문입니다. 아이를 사랑하는 엄마는 남의 시선 따위는 의식하지 않습니다. 이처럼 사랑은 부끄러워하지 않으며 상대를 위해 고생을 기꺼이 받아들이는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다.
또 옆에 한 어머니가 어린 아들에게 먹일 밥을 후후 불어 식혀 먹이는 장면도 기억에 남습니다. 엄마는 아이 입에 뜨겁지 않도록 밥을 식혀서 천천히 먹입니다. 아이를 사랑하기에 아이의 입장에서 음식의 온도를 적절히 맞추어 먹이는 것입니다. 이 모습에서도 우리는 항상 상대방의 입장에서 먼저 생각하는 사랑의 소중한 원리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사랑하는 사람은 주변의 편견이나 시선을 의식하지 않으며 상대방의 입장에서 그 사랑을 표현합니다. 이러한 사랑의 원리가 오늘 복음에서 드러나는 예수님의 사랑 방식을 이해하는데 있어 좋은 열쇄가 됩니다.
오늘 복음은 어떤 형식이나 율법에 얽매이지 않는 예수님의 사랑 법을 들려줍니다. 예수님께서 한 바리사이 지도자의 집에서 음식을 잡 수 실 때 맞은 편에 앉은 병자를 고쳐 주셨습니다. 율법을 철저히 지키던 바리사이들은 안식일에 병을 고치는 일조차도 못하게 하였지요. 그런 바리사이들의 지도자가 집주인인 장소에서 그런 치유 행위를 하기는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편견과 반대를 무릅쓰고 그를 고쳐주신 것이지요. 실제로 안식일에 행하신 예수님의 이러한 행위가 나중에 당신을 십자가의 길로 들어서게 하는 큰 원인이 됩니다. 즉 예수님은 죽음을 무릅쓰고 이런 사랑의 행위를 하신 것입니다. 바로 예수님은 형식이나 율법, 주위의 따가운 시선에 개의치 않고 그분 앞의 병자에게 사랑과 관심을 집중하셨습니다. 또한 사랑하기에 그의 아픔을 정확히 아시고 다른 기타의 도움이 아니라 바로 그 병을 고쳐주셨습니다. 그가 필요로 하는 도움을 주신 것입니다. 이는 마치 다른 이의 시선을 개의치 않고 아이에게 음식을 잘 개 으깨어 먹이는 엄마의 사랑, 아이의 입에 맞는 적절한 온도의 음식을 먹이는 어머니의 따뜻한 사랑과 비슷합니다. 십자가의 온갖 수고를 감수하고 자녀인 우리를 구원하신 예수님은 이러한 큰 사랑으로 우리에게 다가 오셨던 것입니다.
형제자매여러분! 우리가 우리의 자녀들을 귀하게 여길 줄 알고, 또 내 소유물을 아껴 쓸 줄 안다면 바로 우리 곁에 있는 이웃의 아픔도 돌볼 줄 알아야하겠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너희 가운데 누가 아들이나 소가 우물에 빠지면 안식일일 지라도 바로 끌어내지 않겠느냐?” ‘이웃을 자신처럼 사랑하라’고 명하신 것입니다. 오늘 하루 잊지 마십시오. 남의 시선이나 어떤 형식에 신경 쓰기보다는 예수님처럼 상대방의 입장에서 그들을 사랑해야 하겠습니다. - 아멘 -
“안식일에 병을 고쳐주는 것이 합당하냐, 합당하지 않으냐?”
-양승국신부
<그 사랑이 언제 떠나갈지 모르는데도>
사랑했던 사람의 떠난 빈자리는 너무나 큰 것이기에 홀로 남게 된 사람들은 아무리 세월이 흘러도 좀처럼 마음의 갈피를 잡지 못합니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았던 딸을 먼저 떠나보낸 아버지는 쓰라린 가슴을 달래보려고 전국산천을 다 헤매 다녀보지만 절대로 쉬운 일이 아닙니다. 끔찍이도 챙겨주던 부인과 백년해로한 후 사별한 남편이지만, 부인이 없는 이 세상은 세상도 아닙니다. 사는 게 사는 게 아닙니다.
가장 못 견딜 일은 그가 더 이상 이 세상에 없는데도 세상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잘만 돌아간다는 것입니다. 야속하게도 어제와 조금도 다름없는 하루를 살아야 합니다. 그가 없는데도 나는 살아야 합니다. 또 다시 일상을 엮어가야 합니다. 또 다시 밥숟가락을 들어야 합니다.
슬슬 부고(訃告)를 전달받는 일이 늘어갑니다. 점점 먼저 떠나가는 사람들이 많아집니다. 축의금보다는 조의금 지출이 늘어갑니다. 나이를 먹어간다는 표시겠지요.
위령성월을 시작하면서 먼저 떠난 사람들을 떠올려봅니다. 어떤 사람은 생각만 해도 미안한 마음이 앞섭니다. 살아있을 때 조금 더 잘할 걸, 한 번 더 찾아가봤어야 했었는데, 떠나기 전에 이 말을 꼭 했어야 했는데...하는 아쉬움으로 밤잠을 설치기도 합니다.
우리는 늘 이렇습니다, 나중에야 깨닫게 됩니다. 무엇이 가장 중요한 대상인지, 무엇이 가장 중요한 일인지를.
우리는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들, 그래서 절대로 양보할 수 없는 것들에 대해서는 하늘이 두 쪽 나도 확실히 챙기고 넘어갑니다. 중요한 자료에 대한 보안, 업무 업그레이드, 회의, 세미나, 꼭 챙겨야할 관계, 거래처, 취미활동...
그러나 정작 가장 가까이 있는 사랑하는 사람들을 잊고 삽니다. 그 사랑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그 사랑이 우리의 사랑을 얼마나 갈구하고 있는지, 그 사랑이 언제 떠나갈지 모르는데도 말입니다.
결국 가장 중요한 것은 일이 아닙니다. 업적이 아닙니다. 사람입니다. 우리는 인간 존재 그 자체로 이 세상에서 가장 존귀하며 그 어떤 제도나 법조문, 가치나 사상, 일이나 사물 그 위에 있습니다. 우리 인간 각자는 세상의 중심이며 우선적 가치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한 바리사이 지도자의 집에 들어가 식사를 하시다가 당신 눈앞에서 서성대고 있는 수종병자 한 사람을 발견하십니다.
우리는 보통 어떻게 식사를 합니까? 최대한 편안하고 부드러운 분위기 속에서 식사를 합니다. ‘밥 먹을 때는 개도 안 건드린다’며 식사 시간만큼은 스트레스 안주려고 최대한 노력합니다. 누군가가 식사 중에 일과 관련된 대화를 던지면 ‘자 지금은 식사시간입니다’며 애써 그런 대화를 피합니다. 바람직한 모습이지요.
그런데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식사하시다가 자리에서 일어서십니다. 수종병자를 치유하시기 위해서.
바리사이들은 깜짝 놀랍니다. ‘식사시간에 식사하다말고 사람을 치료하다니. 더구나 오늘은 안식일이 아닌가? 이건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야’라며 예수님을 노려봅니다. 그런 분위기를 감지하신 예수님께서 정곡을 찌르는 말씀 한 마디를 던지십니다.
“안식일에 병을 고쳐주는 것이 합당하냐, 합당하지 않으냐?”
바리사이들이 처음에는 좋은 취지로 시작한 안식일 규정이 나중에는 사람을 꼼짝 못하게 속박하는 올가미로 바뀌고 말았습니다. 최종적으로 도달한 안식일 규정은 안식일 날 사람들이 시체처럼 방안에 드러누워 있게 만들었습니다.
개개인이 처한 특수한 상황, 그가 안고 있는 구체적인 어려움은 전혀 고려하지 않은 채 오로지 한 가지 잣대만을 들이대며 일방적인 준수를 강요하는 안식일 규정은 사람을 살리는 규정이 아니라 사람에게 스트레스를 쏟아 붓은 사람을 죽이는 규정이 되고 만 것입니다.
우리가 믿는 종교가 올바른 신앙인지 아닌지 구별하는 잣대가 한 가지 있습니다. 사람을 살리는 종교인지 죽이는 종교인지가 그 기준입니다. 이웃, 특히 가장 가까운 이웃, 내 혈육과 피붙이들을 끊임없이 사랑하게 만드는 종교인지 아닌지 하는 것이 그 기준입니다.
안식일과 일요일
-이기양 신부-
성경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어떤 사람도 용서하시고 받아주시며, 병든 이웃을 마음 아파하시며 치유해 주시는 자비로우신 분이십니다. 그런데 유독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과는 끊임없이 충돌하시고 다투시며 야단치시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계속되는 갈등과 대립은 결국 극한으로 치달아 예수님은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에 의해 죽음으로까지 내몰리는 상황이 되셨습니다. 도대체 예수님과 그들이 그토록 부딪히게 된 사건의 발단은 무엇이었을까요?
그렇습니다. 오늘 복음에 나와 있는 대로 안식일에 대한 규정 때문이었습니다. 도대체 안식일이 무엇이기에 예수님과 반대자들은 그토록 끊임없이 대립해야 했으며 결국 죽음에까지 이르게 되었는지 궁금해집니다. 안식일이 어떤 의미이며,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이 가르치는 안식일과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안식일이 어떻게 달랐는지 오늘 다함께 묵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안식일?‘은 무슨 날입니까? 우리 시대로 말하면 주일, 즉 ??주님의 날?‘을 말합니다. 유다인에게 있어서 안식일은 믿지 않는 사람들이 일요일이라고 부르는 ??쉬는 날?‘과는 그 개념 자체가 다릅니다. 유다인들에 있어서는 너무나도 중요한 날로 이 날은 오롯이 하느님께 바쳐 드리는 하느님의 날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유다인들은 왜 이렇게 끊임없이 안식일에 큰 의미를 두었으며 어째서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의 규정을 놓고 죽음에 이르기까지 이들과 대립하셔야 하셨을까요? 오늘 우리는 안식일이 내포하는 두 가지 의미를 찾아볼 수가 있습니다.
첫 번째 의미는 창세기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6일 동안 이 세상을 창조하시고 7일 째 되는 날은 쉬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하시던 일을 이렛날에 다 이루셨다. 그 분께서는 하시던 일을 모두 마치시고 이렛날에 쉬셨다. 하느님께서 이렛날에 복을 내리시고 그 날을 거룩하게 하셨다. 하느님께서 창조하여 만드시던 일을 모두 마치시고 그 날에 쉬셨기 때문이다.?“(창세2,2-3)
안식일의 첫 번째 의미는 창조주 하느님께 대한 ??감사?‘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6일 동안은 나와 가족을 위해서 일하고 7일째는 하느님께 감사를 드리며 하느님을 찬미하고 거룩하게 하루를 보냅니다. 하느님을 모르는 사람들이 생각하는 일요일과는 개념 자체가 다른 것입니다.
안식일의 두 번째 의미는 ??해방?‘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집트 노예살이에서 해방시켜 주신 하느님과 시나이산에서 계약을 맺습니다.
?’주님께서 이르신 모든 것을 우리가 실천하겠습니다.?“(탈출19,8)
이렇게 하느님의 백성이 될 것을 맹세한 이스라엘 사람들은 모세를 통해서 십계명을 받게 되는데 이때에도 안식일에 대한 명확한 말씀이 내려집니다.
?’그러나 이렛날은 주 너의 하느님을 위한 안식일이다. 그날 너와 너의 아들과 딸, 너의 남종과 여종, 그리고 너의 집짐승과 네 동네에 사는 이방인은 어떤 일도 해서는 안 된다. 이는 주님이 엿새 동안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을 만들고, 이렛날에는 쉬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주님이 안식일에 강복하고 그 날을 거룩하게 한 것이다.?“(탈출20,10-11)
이렛날은 야훼께서 축복하시고 거룩한 날로 삼으셨으므로 하느님의 날로 바쳐 드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사람들은 안식일에는 노예도 쉬게 하고 가축들도 일을 시키지 않았습니다. 자기들이 노예살이를 했던 그 상황을 기억하면서 해방의 날로 그 날을 축복하였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안식일은 창조에 대한 감사의 날이요, 노예살이에서의 해방을 기념하는 민족사적인 축제의 날이자 하느님의 날이었습니다. 안식일의 이 의미를 제대로 지킬 때 우리 삶의 모든 것은 자리를 잡게 됩니다. 개신교 교파 중에 제 7안식교라는 교파가 있을 정도로 안식일은 그 의미가 큽니다. 안식일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으면 다른 것 또한 무너지고 맙니다. 우리 신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주일미사는 우리 신앙 생활에 있어서 주춧돌 역할을 합니다. 주일미사를 한 번 빠지기 시작하면 신앙 자체가 무너지기 쉽습니다. 한 번이 두 번이 되고 두 번이 몇 달이 되며 몇 달이 몇 년이 되는 것을 우리는 주변에서 쉽게 볼 수 있습니다. 그 만큼 안식일은 우리에게 중요한 부분입니다.
이렇게 감사와 찬미, 또 시나이산의 계약을 기억하는 축제일로 지내오던 안식일에 서서히 법규들이 생겨나기 시작했습니다. 물론 처음에는 안식일을 제대로 잘 지키기 위해서 만들어낸 규칙들이었지요. 그런데 이 법규가 점차 세분화되고 아주 세세한 부분까지 만들어지면서 서서히 사람들을 제약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리고 규칙을 만들어낸 사람들, 즉 율법 학자들의 의견이 절대적인 세상이 되었지요. 또 그 법을 실행했던 사람들인 바리사이들의 목소리가 커지기 시작했습니다. 세분화된 율법과 그 율법을 만들어내고 실행했던 율법 학자, 바리사이들이 하느님 못지않은 자리를 차지하기 시작하면서 무소불위의 권력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면서 힘을 얻은 사람들은 율법 본연의 정신보다는 법규의 복종만을 요구했습니다. 마음대로 사람들을 제약하고 자신들의 뜻을 합리화시키는 방법으로 안식일의 법이 변질되기 시작한 것이지요.
이러한 부조리를 너무나도 잘 아신 예수님께서 그들의 안식일법을 강하게 질타하시고 꾸짖으시며 바로 잡기를 요구하신 것입니다. 성경에는 안식일법에 얽힌 예수님과 율법 학자, 바리사이들의 대립이 여러 군데 묘사되어 있습니다. 대략 다섯 군데가 발전적으로 이어지고 있는데 살펴보면 이렇습니다.
첫 번째는 안식일에 카파르나움 회당에서 마귀 들린 사람을 고쳐 주신 예수님의 이야기를 들 수가 있습니다. 갈릴래아의 한 마을 카파르나움에서 예수님께서는 마귀가 들린 사람을 고쳐 주셨는데(루카 4,31-37) 마침 그 날이 안식일이었지요.
?’마침 그 회당에 더러운 마귀의 영이 들린 사람이 있었는데, 그가 크게 소리를 질렀다. ??아! 나자렛 사람 예수님, 당신께서 저희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저희를 멸망시키러 오셨습니까? 저는 당신이 누구신지 압니다. 당신은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십니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조용히 하여라. 그 사람에게서 나가라.?‘하고 꾸짖으시니, 마귀는 그를 사람들 한가운데에 내동댕이치기는 하였지만, 아무런 해도 끼치지 못하고 그에게서 나갔다. 그러자 모든 사람이 몹시 놀라, ??이게 대체 어떤 말씀인가? 저이가 권위와 힘을 가지고 명령하니 더러운 영들도 나가지 않는가??‘하며 서로 말하였다.?“(루카4,33-36)
안식일에 권위와 능력을 보이시며 더러운 귀신들을 쫓아내신 예수님의 소문은 삽시간에 퍼져나갔습니다.
안식일에 관한 두 번째 장면은 마르코 복음 2장 28절, 마태오 복음 12장 8절, 또 루카 복음 6장 1절에서 볼 수가 있습니다. 안식일에 예수님의 제자들이 밀 이삭을 잘라서 손으로 비벼먹었던 것입니다. 이것을 본 바리사이들이 예수님께 항의를 합니다.
?’당신들은 어째서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하오??“(루카6,2)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대답하시지요.
?’사람의 아들은 안식일의 주인이다.?“(루카6,5)
안식일법을 어기는 예수님의 행위가 방방곡곡으로 퍼져나가고 이제는 예수님께 사람들이 항의를 하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대립은 점차 극으로 달려가지요.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팔이 오그라진 사람을 고쳐 주시는 것을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이 노려보기 시작합니다. 소문대로 안식일법을 무시하고 있는 예수님을 목격한 이들은 예수님을 고발할 것을 모의합니다. 이것이 안식일법의 갈등에 대한 세 번째 국면입니다. 고발할 구실을 찾으려는 사람들이 예수님께 묻습니다.
?’안식일에 병을 고쳐 주어도 됩니까??“(마태12,10)
그들의 함정을 간파하신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이라도 착한 일을 하는 것은 법에 어긋나지 않는다고 말씀하시며 병자를 고쳐 주시지요. 그러자 바리사이들은 물러가서 어떻게 예수님을 없애버릴까 하고 모의합니다.
네 번째는 18년 동안이나 허리가 굽었던 여인을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치유하신 장면입니다. 지켜본 회당장이 트집을 잡자 예수님께서 이렇게 꾸짖으시지요.
?’위선자들아, 너희는 저마다 안식일에도 자기 소나 나귀를 구유에서 풀어 물을 먹이러 끌고 가지 않느냐? 그렇다면 아브라함의 딸인 이 여자를 사탄이 무려 열여덟 해 동안이나 묶어 놓았는데, 안식일일지라도 그 속박에서 풀어 주어야 하지 않느냐??“(루카13,15-16)
예수님의 이 말씀에 반대하던 자들은 모두 망신을 당하고 군중은 기뻐했다고 성경은 전합니다.
다섯 번째 안식일 논쟁이 바로 오늘 복음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역시 안식일에 수종병자를 고쳐 주고 계십니다. 물집이 생기는 수종병자를 이스라엘 사람들은 특히 부정한 병으로 여기고 터부시 했습니다. 못마땅하게 지켜보는 바리사이들에게 예수님께서 물어보시지요.
안식일에 병을 고쳐 주는 것이 합당하냐, 합당하지 않으냐??“(루카14,3)
그들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고 예수께서는 병자를 고쳐주셨습니다.
이렇게 안식일법에 대한 다툼은 결국 예수님을 죽음으로 몰고 가는 극한 대립으로 결말이 납니다. 자기들이 만든 규칙과 자신들의 편의를 위해서는 율법을 변용하기도 한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은 남들한테는 혹독하게 법들을 적용하였고 그 결과 사람을 살리는 법이 아니라 사람을 죽이는 법으로 안식일법을 사용하였습니다.
그에 비해서 예수님께서는 안식일법을 무엇보다도 사람을 자유롭게 하고 살리는 법으로 해석하셨습니다. 법이나 규칙을 정할 때 사람을 살리려는 법이 있고 사람을 죽이려는 법이 있습니다. 부모가 자식을 교육시키며 지키라고 내세우는 법은 어떻습니까? 자녀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이것저것을 규제하지요. 자녀를 죽이기 위해서 규칙들을 적용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원수가 상대방에게 들이미는 법은 살리는 법이 아니라 죽이기 위한 법입니다. 똑같은 법도 어떤 마음을 갖고 사용하느냐에 따라서 사람을 살리기도 하고 죽이기도 하는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법이 사람을 위해서 있는 것이지 사람이 법을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라고 명확하게 말씀하십니다. 안식일법도 마찬가지이지요. 인간을 억누르고 따돌리는 모든 법은 하느님의 뜻에 위배되는 법입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가끔 이것을 놓칠 때가 있습니다. 그 어떤 경우에도 법은 사람을 살리고 사랑하는 방향으로 적용되어야지 죽이는 법이 되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우리 시대는 바리사이들이 적용했던 이 안식일 법도다도 더 나쁜 풍조가 있습니다. 재물 숭배가 그것입니다. 사람보다는 재물을 더 우선시하는 사회 분위기가 많은 문제들을 야기하고 있지요. 지금 예수님께서 오신다면 바리사이 사람들 못지않게 크게 혼날 부분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어떤 경우에도 사람이 우선임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모든 법의 적용은 근본적으로 사랑을 담고 사람을 살리는 쪽으로 가야한다는 것을 기억하고 실천하는 우리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관상의 지혜
-이수철신부-
대부분의 인간사랑은 이기적이요 맹목적입니다.
눈 먼 사랑, 눈이 없는 사랑입니다.
끊임없이 정화되고 성숙되어야 할 사랑이요,
지혜의 눈을 지녀야 할 사랑입니다.
인문학 위기의 시대,
책을 읽지 않는 시대라지만 새삼 공부의 필요성을 절감합니다.
세상적 지식 축적의 공부라기보다는 지혜의 눈을 뜨게 하는 공부입니다.
서방 수도생활 특징 중의 하나가 공부였습니다.
성서에 대한 깊은 연구와 공부로 결국은 하느님 공부였습니다.
이런 면에서 다음 바오로의 고백에 공감이 갑니다. “내가 기도하는 것은
여러분의 사랑이 지식과 온갖 이해로 더욱 풍부해져
무엇이 옳은지 분별할 줄 알게 되는 것입니다.”
하늘에서 뚝 떨어지는 분별의 지혜가 아니라,
우리의 사랑에다 기도 안에서 끊임없는 노력으로
지식과 온갖 이해로 풍부히 할 때
비로소 은총처럼 주어지는 분별의 지혜입니다.
하여 순수하고 나무랄 데 없는 사람으로 그리스도의 날을 맞이하게 되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의로움의 열매를 가득히 맺어,
하느님께 찬양과 영광을 드릴 수 있습니다.
새삼 분별의 지혜가 얼마나 중요한 덕인지 깨닫게 됩니다. 비단 책만의 공부가 아니라,
일상의 삶과 자연이 모두 하느님을 알게 하는
살아있는 책이요 공부의 대상입니다.
성독(Lectio Divina)의 대상입니다.
사실 성독도 여기까지 이르러야 비로소 성독의 완성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읽고,
묵상하고,
기도하고,
관상해야 할 대상이 일상의 책이요 자연의 책입니다.
이런 관상의 삶에서 샘솟는 분별의 지혜요,
바로 오늘 복음의 예수님이 이의 모범입니다.
“안식일에 병을 고쳐 주는 것이 합당하냐, 합당하지 않으냐? 너희 가운데 누가 아들이나 소가 우물에 빠지면
안식일일지라도 바로 끌어내지 않겠느냐?”
이미 질문 안에 답이 드러나는,
본질을 꿰뚫는 지혜로운 질문에
율법 교사들과 바리사이들은 대답을 하지 못했다 합니다.
관상의 지혜로
언제나 사랑 실천을 통해 본질적 삶에 충실하셨던 주님이셨습니다.
오늘도 이 거룩한 미사의 렉시오 디비나 시간을 통해서
주님은 당신의 사랑과 더불어 지혜를 선사하십니다.
“주님, 주님께는 생명의 샘이 있고,
주님 빛으로 저희는 빛을 보나이다.”(시편36,10).
아멘.
나와 남을 똑같이
-상지종신부-
생명이 위독한 경우라는 전제 조건 하에 안식일에도 병자를 치료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과연 어떠한 경우가 생명이 위독한 경우일까요? 어디까지가 생명이 위독한 경우이고 어디까지가 그렇지 않은 경우일까요? 누가 그것을 판단할까요?
사실 생명이 위독하다는 기준 자체가 애매모호한 것입니다. 똑같은 경우라도 나와 직접적으로 관련이 있는 경우와 그렇지 않은 경우에 나에게 다가오는 의미가 다르기 때문입니다. 자기 자식이 아프면 열 일 다 제쳐놓고 달려가지만, 남의 자식이 그보다 더 심하게 아프더라도 자신의 일을 핑계삼아 눈길 한번 주지 않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생명이 위독한 경우라는 애매한 기준이 아니라 '아픈 사람을 고쳐 줄 것이냐? 그렇지 않느냐?' 라는 기준이 사람을 살리기 위해 하느님께서 마련하신 안식일 규정에 타당한 기준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이 애매한 전제 조건 자체를 없애십니다. "안식일에 병을 고쳐 주는 일이 법에 어긋나느냐? 어긋나지 않느냐?" 예수님의 이 질문은 나에게 적용하는 기준과 남에게 적용하는 기준을 달리하는 이중적인 모습에 대한 질책이면서 동시에 이 이중적인 기준을 하나로 모아 안식일 법을 사람을 살리는 법으로 다시 세우시는 선언입니다. 그러기에 나와 남을 구별하지 않고, 모두가 소중한 하느님의 사람임을 깨닫고 다른 이를 보듬어 안는 것이 오늘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르는 삶입니다.
주님의 말씀을 묵상하면서 다른 이들이 안타까운 처지에 놓여있는 나를 이해주기를 바라면서도 나는 정작 똑같은 처지에 놓여있는 그들을 이해하지 못하고 몰인정하게 대하지는 않았는지 돌아봅니다.
안식일의 인격적 의미
-박상대신부-
어느 바리사이파 사람이, 그것도 바리사이파의 한 지도자가 예수님을 자기 집 식사에 초대했다는 이야기는 4복음서를 통틀어 루가복음에만 보도된다. 루가는 사실 세 번에 걸쳐 바리사이파 사람이 예수를 초대하여 음식을 대접한 일을 보도하고 있다.(7,36; 11,37; 14,1) 예수께서는 바리사이파 사람이 베푸는 식사에 손님으로 가실 때마다 그 자리에 함께 초대받은 바리사이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에게 새로운 가르침을 주셨다. 루가는 오늘 복음의 식사초대가 안식일에 일어난 일로 소개함으로써, 분명히 예수와 반대자들 사이에 논쟁이 있을 것을 암시한다. 음식을 잡수시는 예수를 사람들이 지켜보고 있었던 것이다.(1절) 아니나 다를까 그때 마침 수종(水腫)으로 온 몸이 부어 고통 받는 병자 한 사람이 예수님의 시야에 들어왔다.(2절) 이제 문제는 안식일 법에 관한 문제로 비약된다.(3절)
안식일 법의 기원은 하느님의 창조질서에 있다.(창세 2,2-3) 이것을 근거로 율법은 안식일에 철저한 파공(罷工)을 규정한다.(출애 23,12; 34,21; 레위 19,3; 23,3; 신명 5,12-14) 예수님 당시에 바리사이파 율법학자들은 안식일 법과 관련하여 39개의 금지조항을 가지고 있었다. 그것을 열거하면, 1) 씨 뿌리지 말 것, 2) 밭을 갈지 말 것, 3) 곡식 단을 묶지 말 것, 4) 곡식을 거두지 말 것, 5) 곡식을 타작하지 말 것, 6) 곡식을 까불지 말 것, 7) 곡식을 갈아 가루로 만들지 말 것, 8) 곡식을 찌지 말 것, 9) 채질하지 말 것, 10) 반죽하지 말 것, 11) 굽지 말 것, 12) 털 깍지 말 것, 13) 빨래하지 말 것, 14) 때리지 말 것, 15) 염색하지 말 것, 16) 실 짜지 말 것, 17) 밧줄 끌지 말 것, 18) 두 끈을 만들지 말 것, 19) 두 실을 짜지 말 것, 20) 두 실을 가르지 말 것, 21) 매듭을 짓지 말 것, 22) 매듭(끈)을 풀지 말 것, 23) 바늘로 두 번 깁지 말 것, 24) 두 뜸을 깁기 위해 찢지 말 것, 25) 사슴을 잡지 말 것, 26) 죽이지 말 것, 27) 껍질을 베끼지 말 것, 28) 소금 치지 말 것, 29) 그 가죽을 만들지 말 것, 30) 머리털을 밀지 말 것, 31) 그 것을 깍지 말 것, 32) 두 글자를 쓰지 말 것, 33) 두 글자를 쓰기 위해 지우지 말 것, 34) 집 짓지 말 것, 35) 헐지 말 것, 36) 망치로 납작하게 때리지 말 것, 37) 불을 끄지 말 것, 38) 불을 켜지 말 것, 39) 한 집에서 다른 집으로 물건을 옮기지 말 것이다. 사실은 이 조항들만이 전부가 아니다. 이들은 최소한의 조항으로서 이들 보다 더 힘들고 복잡한 육체적 노동은 안식일 규정의 본 의미인 파공(罷工)이 금하고 있다. 어떤 랍비들은 모두 41개의 금지조항을 만들고, 각 조항에 6가지 세칙을 붙여 한껏 복잡하게 만들기도 했다.
따라서 안식일 법을 잘 지키기 위해서는 안식일 전날까지 모든 음식을 준비해야 하고, 먼 거리를 걷기 않기 위해 갈 곳에 미리 도착하여 있어야 하며, 거의 모든 일에서 손을 떼고 쉬어야 했다. 참고로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예수님의 시신도 안식일 전에 매장되었고(마르 15,42), 여인들도 예수님의 시신에 도유할 향료와 향유를 안식일 전에 마련하였던(루가 23,56) 것이다. 물론 안식일에 밀이삭을 자르는 일(루가 6,1; 마르 2,23-24), 죽음의 위험에 처하지 않은 사람을 도우거나 그 병을 고쳐주는 일(루가 6,6-11; 13,10-17), 물건을 운반하는 일(요한 5,9-10), 긴 여행을 하는 일(사도 1,12) 등은 금지되었다. 그런데 재미있는 일은, 엄밀히 따져볼 때 제사장들은 안식일 법을 밥 먹듯이 어겼다는 것이다. 안식일이 제사를 준비하고 올려야 하는 그들에게 어느 날보다 바쁜 장날이 아닌가 말이다. 그래서 율사들은 안식일에 ‘제사장들이 번제물을 준비하는 일’, ‘자기방어’, ‘죽을 위험에 있는 병자를 치료하고 구하는 일’, ‘생후 8일 만에 받아야 하는 할례예식’(창세 17,12; 21,4; 레위 12,3) 등은 별도로 허용하였던 것이다.
그렇다면 이유야 어찌 되었든 바리사이파 사람들도 사람이 죽을 위험에 처하면 안식일이라 할지라도 만사를 제치고 사람의 목숨을 구해야 하는 것이 율법의 정신임을 인정하고 있다는 결론을 얻을 수 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율법의 정신을 다시 세우신다. 즉, 안식일 법보다 사람을 더 중요하게 여기신다는 것이다. 사람이 중요하다는 것은 그 생명의 위독함과 무관하다. 어떤 처지에서든지 사람이 법보다 우선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이미 루가복음에서 안식일 법에 대한 예수님의 새로운 해석을 배웠다.(안식일에 손이 오그라든 병자를 치유함: 6,6-11; 안식일에 회당에서 곱사등이 부인을 치유함: 13,10-17) 예수님은 안식일에 선행할 기회를 피하는 자체가 악행을 방조하는 것으로 보시는 것이다.
예수께서 말씀하시는 안식일, 일곱째 날의 의미는 어떤 것일까? 일곱째 날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주일(主日), 즉 일요일을 말한다. 주일은 하느님과 인간 사이에 유효한 하나의 표지이다.(창세 2,3) 좋고, 거룩하고, 축복의 날인 일곱째 날, 이 날 하느님께서는 모든 창조를 완성하셨다. 이같이 일곱째 날 하느님께서는 우리들의 여섯 날들을 완성해 주신다. 우리의 모자라는 것이 이 날 하느님을 통해 거룩해지고 충만해지는 것이다. 일곱째 날! 이 날은 하느님께서 아직 당신을 찾지 못했거나 망각해 버린 세상에 하늘을 열어 보이는 날이다. 이 날은 예수님께서 고통과 고독 속에서 어찌할 바를 모르는 한 인간에게 삶과 생명의 소중함을 일깨워 주는 그런 날이다. 일요일은 그래서 세상을 위한 하나의 표지요 축복이며, 선물이다. 우리를 이러한 의미에로 초대하고 유인하는 그런 표지인 것이다. 따라서 일곱째 날은 일곱 날들 중 하나의 날이 아니라 인격적(人格的)인 날이다. 그것은 예수께서 안식일의 주인이시기 때문이다. 따라서 유대인들에게는 안식일이 사람과 하느님이 만나는 날이며,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주일(主日)이 우리가 하느님과 영교(靈交)하고 거룩함을 누리고 축복을 받는 날이며, 묵은 것과 죽은 것을 벗어 던지는 부활(復活)의 날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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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고맙습니다
감사 합니다. 행복 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