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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 15: 4-6
여호와의 말씀이
1.본문 4-5절은
“④ 여호와의 말씀이 그에게 임하여 가라사대 그 사람은 너의 후사가 아니라 네 몸에서 날 자가 네 후사가 되리라 하시고
⑤ 그를 이끌고 밖으로 나가 가라사대 하늘을 우러러 뭇별을 셀 수 있나 보라 또 그에게 이르시되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 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하나님의 소원을 인정하셨다는 사실을 추론하게 됩니다.
또한 거기서 아브람은 이런 기도를 하도록 어떤 투신적인 감정으로 강요받은 것이 아닙니다 그에게 약속된 복을 향유하려는 경건하고 거룩한 소원에 의하여 그런 기도를 하게 되었다는 결론이 따르게 됩니다. 하나님은 그에게 씨를 약속해 주셨을 뿐만 아니라 큰 백성을 약속하셨으니 그들이 숫자 면에서 하늘의 별과 같게 될 것이라는 약속을 하셨기 때문입니다. 이 구절을 우화적으로 해석하는 자들은 하늘나라의 씨가 그에게 약속되었는데 그 씨는 별들과 비교가 되게 하려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면서 제법 자기들의 의견을 기뻐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는 보다 분명한 것을 주장하고 싶습니다. 아브람의 신앙이 하늘의 별들의 광경으로 증가되었다는 말입니다. 일단 하나님이 그 말씀으로 그들의 주의를 집중시킨 후에 그분의 백성을 더 깊이 감동시키려고 그리고 보다 그들의 마음 속 깊이 침투해 들어가시려고 여호와는 그들의 눈들이 서로 동의하게 하려고 외부적인 상징들로 그들의 눈을 집중시키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별의 광경은 불필요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다음과 같은 생각으로 아브람의 마음을 압도시키려고 의도하고 계시니 오직 말씀으로 갑자기 천군을 그토록 많게 하신 분이 그것으로 이전에 광활하고 황량한 하늘을 장식하셨습니다. 그렇다면 그분이 황폐한 내 집을 자손으로 번성시킬 수가 없을까 하고 그 자신에게 묻도록 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낮에는 우리가 볼 수 없는 별들이 그때 나타났을 것이기 때문에 밤에 된 환상이라고 상상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그 전체가 이상으로 나타났기 때문에 아브람은 자기 앞에 전개되어진 놀라운 광경을 보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광경이 그에게 감추어진 것들을 분명하게 계시해 주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비록 그가 한 걸음도 움직이지 않았을지는 모르지만 이 산 가운데서 그가 천막 밖으로 인도되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문제가 제기되고 있는 것은 그 약속이 무슨 씨를 가리키고 있는가에 관해서 입니다. 그리고 확실한 것은 이스라엘의 자손들이나 에서의 자손은 이 기록에서 관련되고 있는 것으로 여겨질 수는 없으니 그 이유는 합법적인 씨는 약속으로 말미암아 인정되어야 하며 하나님이 결정하신 그 씨는 이삭과 야곱 안에서 머물러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아직도 야곱의 후손에 관하여 동일한 의심이 일어나는데 육신을 따라서 그에게 태어난 후손들을 추론해 갈 수 있는 많은 사람들이 그들 자신들을 타락한 자손들이며 분리된 자손들로서 그들의 조상들의 신앙에서 잘라 내버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제시된 자손이라는 말은 가리지 않고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양자로 삼으신 모든 사람들에게까지 연장됩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그들의 불신앙으로 하나님과 불화되었기 때문에 우리는 그 정보를 얻기 위하여서는 그리스도께로 가야 됩니다. 그분만이 그런 불법적인 자들로부터 참되고 진정한 자손들을 구별해내시는 분이십니다.
이런 방법으로 추구해 가면 우리는 아주 소수로 축소된 아브람의 후손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것이 그분의 뜻이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이방인들이 모여들어 믿음으로 아브람의 몸에 접붙임을 받게 되며 그 결과로 합법적인 자손들 가운데 자리를 차지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 점에 관하여 17장에서 더욱 더 자세하게 언급할 것입니다.
2. 본문 6절은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 입니다.
1) 바울 사도가 우리 앞에서 등불을 켜주지 않았다면(롬4:3) 이 말씀이 함의하고 있는 풍부하고 감추어진 중요한 의미를 아무도 알아내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영이 아주 큰 빛을 켜들고 계시는데도 아직 해석자들 가운데 대다수의 사람들이 눈을 감은 채로 마치 캄캄한 밤에 헤매듯이 방황하고 있는 것은 이상하고 특이한 일로 보입니다. 여기서 나타나고 있는 사실은 모든 시대에서 사단이 여기서 분명하게 표현되고 믿음으로 은혜스런 칭호를 받는 것을 없애버리고 완전히 질식시켜 버리려고 무진장 노력을 하고 있는 점입니다. 모세는 말하기를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 라고 했습니다.
첫째, 아브람의 신앙이 칭찬을 받고 있으니 그가 그 믿음으로 하나님의 약속을 받아들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로는, 그것으로 아브람이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함을 얻어서 그것을 전가시켜주심으로 그렇게 인정을 받았기 때문에 찬사를 받고 있습니다. 여기서 모세가 사용하고 있는 (카샵)이라는 말은 시편 106편 31절에서와 같이 하나님의 심판에 관련된 것으로 이해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시편의 말씀을 보면 비느하스의 열심히 그에게 의로 여겨졌다고 묘사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그 표현의 의미는 그것의 반대 표현과 비교함으로 더 충분하게 나타날 것입니다. 레위기 7장 18절에서는 화목이 이루어졌을 때 허물이 사람에게 ‘전가되지 않을 것’ 이라고 언급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다시 17장 4절에서는 ‘피흘린 자로 여길 것이라’고 되었습니다. 그리고 사무엘하 19장 19절에서 시므이가 “내 주여 원컨대 내게 죄 주지 마옵소서”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또한 그와 거의 동일한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는 표현이 열왕기하 12장 15절에서 “또 그 은을 받아 일꾼에게 주는 사람들과 회계하지 아니하였으니” 라고 되었습니다.말하자면 그들은 돈 계산을 요구하지 않고 다만 완전한 확신을 가지고 그들이 그 손을 처리해 주게 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그럼 이제 모세에게로 돌아가 봅시다. 죄가 전가되는 자들은 하나님 앞에서 죄인이라는 사실을 우리가 이해하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분이 의를 전가시켜 주신 자들은 그분이 정당한 사람으로 인정받는 것입니다.
아브람은 의(義)의 전가로 말미암아 바른 사람들의 수효와 계층으로 받아들여졌습니다. 바울은 이 의의 위력과 성질 또는 자질을 분명하게 우리에게 제시해 주려고 하나님의 천성의 법정에로 우리를 인도해 줍니다. 그러므로 이 말을 정직한 사람으로서 그의 특성에 적용하는 자들은 매우 어리석은 장난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말이 아브람은 인격적으로 바르고 의로운 사람이라고 주장하고 있는 의미인 것처럼 주장하고 있습니다.
또한 아브람이 여기서는 의의 영광을 하나님에게 돌리고 있다고 말하는 자들은 적잖은 기술로 본문을 잘못 해석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생각하기를 하나님이야말로 신실하시고 진실한 분으로 인정하고 그분의 약속을 묵종하려고 모험을 하는 자라고 여기며 그렇게 주장하고 있습니다. 비록 모세가 하나님의 이름을 분명하게 언급하지 않고 있지만 아직까지도 성경에서 말하고 있는 익숙한 방법은 모든 애매한 점을 제거하고 있습니다.
끝으로 아브람의 신앙이 하나님과 의로운 관계를 맺고 있는 자리에 들어오도록 영접된 것 외에 거기에다 다른 의미를 혼합시키는 것은, 즉 믿음이 그에게 의로 여겨졌다고 언급되고 있다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그런 고집을 부린다면 건방진 것에 조금도 못지 않은 무감각한 것입니다.
2) 그러나 아브람이 그의 자손이 하늘의 별처럼 많게 될 것이라고 하신 말씀을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아야 했다는 것은 모호하게 보이는 듯합니다.
그것은 이것이 인간의 완전한 의를 위하여 절대로 충족될 수 없는 개별적인 특이한 신앙이 될 수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밖에 영원한 구원을 위하여 지성적이며 잠정적인 약속이 과연 무슨 도움을 줄 수 있겠습니까? 모세가 말하고 있는 ‘믿으니’ 라는 말은 여기서 언급되고 있는 단 한 구절의 약속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고 전체를 포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둘째로 아브람은 이 말씀에서만 그 약속된 자손에 대하여 그의 평가를 구성하지 않고 특별한 복이 첨가되고 있는 다른 말씀에서도 그의 평가를 형성하였다는 점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그가 어떤 일반적인 것이나 막연한 자손을 기대한 것이 아니고 그 안에서 이 세상이 복을 받게 될 자손을 기대했다는 것을 추론하게 됩니다.
누구나 아브람의 자손들에 대하여 일반적으로 언급되고 있는 그것을 그리스도에게 적용함으로 억지로 외곡시키고 있다고 끈질기게 고집을 부릴 수가 있겠습니까? 무엇보다 첫째로 하나님이 지금 다시 전에 그분의 종에게 하신 약속을 되풀이하여 그의 불만에 대하여 해답을 주고 계신다는 사실은 부인될 수가 없다는 점입니다. 그러나 아브람은 그 약속된 복에 대한 관심으로 자손을 그렇게 대단한 열정으로 소원하게 되었다고 우리는 말할 수가 있으며 그 내용 자체도 분명하게 입증해 주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약속이 그에 의하여 다른 것들로부터 구별하여 별도로 떼어 놓아진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다 생각해보기 위하여 우리는 반드시 여기서 다루어지고 있는 것이 무엇인가를 생각해야 되며 아브람의 신앙에 대하여 잘 판단하기 위하여 반드시 여기에서 다루어진 것을 고찰해야 한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하나님이 때때로 그분의 부성애적인 사랑을 체험하지 않고 있는 불신자들에게 특별한 혜택을 허용하신 대로 이것 저것은 오직 그분의 종에게만 약속하고 계시지 않습니다. 다만 하나님의 보호하심과 은혜를 의지함을 인하여 그에게 호의를 베푸시고 안전에 대하여 이를 확신시켜 주시겠다고 하나님이 선언하고 계십니다. 상속을 위하여 하나님을 모시고 있는 자는 시들어 가는 기쁨으로 기뻐하지 않고 다만 이미 하늘 나라를 향하여 승화된 자로서 영원한 생명의 견고한 행복을 누리기 때문입니다.
신실한 자들에게 하신 하나님의 모든 약속들은 하나님의 거저 베푸시는 긍휼로부터 넘쳐 나오는 것이며 부성애와 그런 은혜로운 양자(養子) 삼으심에 대한 증거들이라는 사실이 정말로 하나의 공리로서 주장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신실한 자들의 구원이 그 양자 삼으심에 근거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아브람이 태어날 자손에 관련된 한 마디를 붙들고 있기 때문에 의롭다는 칭의를 받은 것이 아니고 하나님을 그의 아버지로서 붙들고 있기 때문이라고 우리는 말합니다. 그리고 진실로 신앙은 우리를 하나님에게 화목시키는 것 외에 다른 이유 때문에 우리를 의롭게 하지는 않습니다. 신앙이 그렇게 역할을 하는 것은 그 자체의 장점으로 되어지는 것이 아니고 오직 약속에서 우리에게 제공된 은혜를 받아들이고 영생에 대하여 전혀 의심하지 않고 하나님에게서 그분의 아들로서 우리가 사랑을 받고 있다는 것을 충분히 납득하고 있기 때문에서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정반대로부터 믿음이 의로 여겨지는 자는 행위로 칭의를 받은 것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추리해내고 있습니다(롬4:4). 누구든지 행위로 의롭다 함을 얻는 자는 그의 장점이 하나님 앞에서 칭찬거리가 됩니다. 하나님이 값없이 우리를 그분 자신에게 화목 시킬 때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것을 우리는 파악하고 있습니다. 그것으로부터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게 될 때는 자연히 행위의 장점은 중단되는 것이라는 사실을 알 수가 있습니다. 이 의는 누구든지 믿음으로 그것을 소유하게 하면 하나님에 의하여 값없이 주어져야 되며 그분의 말씀에서 제공되어야 하는 것이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모세가 믿음은 아브람에게 의롭다 함을 받게 했다고 말할 때 이것을 보다 생생하게 묘사하기 위하여 그는 믿음이 ‘동인(動因)’이라고 불려지고 있는 의(義)의 첫째 원인이었다는 것을 의미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다만 ‘형식적인’ 원인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마치 아브람이 하나님의 부성애적인 사랑스런 은총을 의지하면서 자기 자신이나 자신의 장점들을 신뢰하지 않고 오직 그분의 단순한 선하심만을 신뢰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믿음이 다른 곳에서는 의를 빌리고 있다는 사실을 특별히 관찰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 의가 우리 자신 안에서는 결여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바울이 의롭게 되는 방법에 대하여 말할 때 행위에 상반되는 신앙을 내세우는 것은 헛되고 말 것입니다. 그 외에도 값없이 주신 약속과 신앙과의 사이에 상호관계는 그 제목에 대하여 전혀 의심을 남기지 않습니다.
4) 우리는 지금 ‘시간’ 적인 상황을 주목해야 합니다.
아브람은 하나님에게서 부름을 받은 후에 많은 햇수가 지나서야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었습니다. 그리고 자기 고향 땅을 떠나 자원하여 유배 생활을 시작한 후 자신을 인내와 자제의 괄목할 만한 본보기를 제시하고 나서, 그리고 또한 자신을 신성함에 전적으로 헌신하고 하나님을 영적으로 그리고 외적(外的)으로 섬기는 면에서 자신을 단련시킴으로 거의 천사와 같은 생활을 열망한지 많은 햇수가 지난 후에 그런 체험을 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심지어는 생명의 종말에서도 우리는 믿음의 의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나라로 인도되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에 대하여 많은 사람들이 너무도 몽매하게 기만당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사실상 죄인들에게 값없이 부여되며 무가치한 자들에게 제공되는 의는 오직 믿음으로만 받아진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있으나 이것을 시간적인 계기에 국한시켜서 처음에 신앙으로 칭의를 얻은 자가 후에 가서는 선행으로 의롭다 함을 받을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이 방법으로 믿음은 단지 의의 시작 외에 다른 아무 것도 아닙니다. 그러기 때문에 의(義) 자체는 계속적인 행위의 과정에 근거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장난을 일삼는 자는 전적으로 정신나간 사람이라는 사실이 틀림없습니다. 아주 많은 세월을 걸쳐서 한가지 똑같은 과정에서 신실하게 계발된 아브람의 천사같은 정직은 의를 얻기 위하여 믿음으로 달려가는 것을 막지 못했습니다. 그밖에 지상의 그 어디에서 하나님 앞에서 설 수 있는 완전함을 발견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이 사실이 아브람에게 언급된 때를 생각함으로 우리는 확실히 다음의 사실을 거두어 들이게 됩니다. 즉 행위의 의는 다른 사람이 시작해 놓았던 것을 한 사람이 완성시켜야 하는 방법으로 믿음의 의를 위한 대용물로 여겨진 것이 아니고 오직 거주한 사람들이 이 세상에 사는 동안에는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는다는 사실입니다. 만약 누가 아브람이 하나님의 부름을 받고 그분을 따르며 그분의 지도와 보호하심에 자신을 맡길 때 그 이전에 벌써 믿었다는 것을 반대하면 그것에 대한 해답은 간단합니다. 즉 아브람이 처음에 의롭게 되기 시작하고 하나님을 믿기 시작할 때가 언제인지는 여기서 언급되지 않고 있으나 이곳에서 그의 전 생애에 걸쳐서 어떻게 칭의를 받았는가를 선언하고 있으며 시사되고 있습니다. 모세가 아브람의 첫 번째의 소명에 관하여 즉시 그렇게 언급하였었다면 우리가 말했던 그 트집들은 더 그럴 듯 하게 들릴 것입니다.
이를테면 믿음의 의(義)는 단지 ‘시작’ 에 불과하며 항구적인 것이 아니라고 하는 그들의 트집이 더 그럴싸하게 보였을 것이라는 말입니다. 아직도 이제 이런 큰 진보 후에도 그는 아직도 믿음으로 의롭게 되었다고 언급되어 있으므로 거기에서 성도들이 심지어는 죽음에 이르러서도 의롭게 된다는 사실을 나타내 주고 있습니다. 신자들이 하나님의 영으로 거듭난 후에는 의롭게 되는 방법이 어떤 면에서 전자와는 다릅니다. 하나님이 육(育)으로 태어난 자들과 모든 선을 연결하고 있는 자들을 자신에게 화목시키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그들 가운데서 다른 가치 있는 것은 전혀 발견해 내지 못하시고 오직 무서운 죄악의 덩어리만 있는 것을 보시기 때문에 죄의 전가에 의해서 그들을 의롭다고 여겨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분의 거룩하고 의로운 성령을 나누어 주십니다.
그런데도 그들의 선한 행위들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기 위하여 그 행위들 자체가 은혜로운 전가로 의롭다 함을 받아야 되는 것이 필요합니다. 하지만 그런 중에도 그들 속에는 아직도 악들이 잠재해 있는 것입니다. 한편 인간들이 하나님 앞에서 의롭게 되는 것은 행위로 되는 것이 아니고 오직 믿음으로써 은혜를 얻었다는 것은 확정된 사실입니다. 인간들이란 행위에 대한 보상을 받을 자격이 없기 때문입니다. 바울도 아브람이 할례 전에 받았던 그 의를 행의받은 것이 아니라고 주장하고 있는데, 그렇다고 그의 주장이 위에서 언급되어 있는 교리를 배격하는 것이 아닙니다. 바울의 논증은 아브람의 할례(割禮)는 시간상의 순서에서는 그의 칭의보다 앞서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할례가 절대로 칭의의 원인이 될 수가 없다는 것이니 그 이유는 필연적으로 원인이 결과에 선재하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이 때문에 율법의 언약 하에서를 제외하면 행위는 전혀 가치가 없는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는 것에 동의하고 있습니다. 그 언약에 속한 할례는 증거나 상징으로서 제시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이 여기서 할례를 하나님의 순수하고 참된 제도로서 보면서 그것의 위력과 성질을 정의하지 않고 단지 지금 그가 상대하고 있는 자들이 부여해 놓은 의미에 관해서만 논쟁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하나님이 전에 아브람과 맺으셨던 언약에 대해서는 암시하지 않고 있습니다. 현재 하고 있는 그의 논쟁에서는 그것을 언급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두 가지 논증들이 위력을 지니고 있으니 첫째는 아브람의 의가 할례보다 선행하기 때문에 율법의 언약에 귀속시킬 수가 없습니다. 둘째로 가장 완전한 사람들에게 속한 의라고 할지라도 그것은 영구적으로 믿음에 근거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아브람이 날마다 심지어는 두드러지게 하나님을 섬기는 생활을 했습니다. 그리고 탁월한 덕성을 지니고 있는 그였지만 그 행위로서가 아니고 오직 그의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한 사람에 관하여 여기서 설명하고 있는 것은 하나님의 모든 자녀들에게 적용될 만한 것이라는 사실을 맨 마지막에 관찰해 볼 가치가 있습니다.그것은 그가 모든 믿는 자의 조상이라고 불려진 것이 괜히 이유 없이 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한 걸음 더 나아가서 구원을 얻은 오직 한가지 방법이 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이곳에서 곧 개인적인 의가 아니고 참된 의가 묘사되어 있다고 적절하게 가르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