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년 만의 방문이었다. 아니, 1990년 가을, 동경생활을 청산하고 귀국하여 일년 후, 잠시 일본을 다녀 간 적이 있으니 13년 만이던가.
하여간 감회가 새로웠다. 더구나 배로 일본에 간다는 것은 처음이어서 설레기도 했다.
팬스타호가 서서히 부산항을 빠져나가고, 나는 선실을 빠져나와 배 위에 올라섰다. 부산 시내와 영도가 내 시야에서 멀어져갔다.
수학여행을 떠나는 학생들의 틈에서 잠시 나는 감상에 빠졌다.
질풍노도의 20 대, 나는 심해 잠수사 생활로 외국을 수 없이 드나들었고, 그 시절 누구도 경험해 보지 못한 것들을 접해 볼 수 있었다.
가족과 조국은 안중에도 없는 나만의 세상이었다. 동경에서 공부를 하다가 향수병에 결혼을 하고, 일본에서 첫째를 낳았다. 그것은 외로움을 빙자한 나만의 이기심 때문의 결혼이었다.
3년이 지나 귀국을 했고, 그 후 나는 고향에서 안주를 했다.
다시는 고향을 떠나지 않으리라 다짐을 했다.
나는 내 고향 강릉에서 아주 소박하게 가족과 함께 오순도순 욕심 없이 살기를 소망했다. 그리고 그렇게 살아왔다.
고향에 뼈를 묻으리라 다짐을 했다.
외로운 외국 생활을 알기에, 그래서 고향이 얼마나 좋은 곳인 줄 알기에 나는 스스로 행복하다고 생각했다.
물질의 행복이 얼마나 덧없는 것이라는 것을 20 대 시절에 이미 경험했기에, 나는 더욱 고향에 만족 할 수 있었다.
강릉의 산과 바다와, 가족과 친척과 친구들.......이런 것들은 내 행복의 일부였다.
주말에 등산을 하고 바다에 들어가 잠수를 하고, 건물 옆 지하 선술집에서 친구들과 소주를 마시고, 주말에 부모님 계시는 시골에 가서 농사를 도와드리고,......
게다가 나는 착하게 자라주는 사랑스런 아이들까지 있었다.
그런데, 나는 그 지겹던 일본으로 다시 떠나고 있었던 것이다.
내 젊은 시절 외로움의 片鱗들이 남아 있어, 아직도 동경의 쓸쓸한 골목골목과 무표정한 일본인들의 얼굴이 눈에 선한데, 나는 떠나고 있었던 것이다.
어쩌면 가슴이 설레다는 표현은, 나의 이런 외로운 기억을 달래기 위해 스스로를 속이는 감상일지도 몰랐다.
숙소에 짐을 풀자말자 오사카 최고의 상권 산사이바시로 향했다.
넘쳐 나는 사람들, 형형색색의 간판과 상품들, 비록 장기불황에서 막 빠져나온 일본이라지만, 강릉 시골 촌놈의 눈에는 전부 어이없는 것들 뿐이었다.
이제, 이 속에서 나의 돌파구를 찾아야 한다는 생각에 잠시 질리기도 했었다.
자본주의의 산물인 풍요로운 상품들이 사람들을 불러모으고, 그래서 상권이 생겨나고, 그 속으로 뚫고 들어와, 과거 우리 선조들의 보부상처럼 나는 이제 짐을 들고 바다를 건너 다녀야 하는 것이다.
몇 군데 소매상들을 둘러보고, 일본의 선술집 이자카야에서 자리를 잡았다.
새로운 시작이었다. 나만의 삶을 살아오다가 과거와는 다른 일본 생활의 시작이었다.
그 옛날 보부상처럼 돈을 벌어야 했다. 그것이 나를 슬프게 할 수도 있다. 그것이 나를 맥 빠지게 할 수도 있다.
이런 마음으로 잠시 처량할 수도 있다.
그러나, 어쩌겠는가. 삶이란 본래 이런 것이 아니더냐. 삶이 늘 행복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스스로 불행해지는 지름길이다.
누구나 삶의 무게에 짓눌려 사는 것이다. 어쩌면 인생이란, 행복한 일보다 불행한 일들이 더 많은 것인지도 모른다.
다음날, 사카이스지 부근의 도매상을 몇 군데 돌아 보았다.
다시 너무나 많은 상품들에 기가 질렸지만, 서서히 마음의 안정을 찾아가고 여유가 생겼다.
이 속에서 내가 찾아야 할 아이템과 그로 인해 생겨날 여러 가지 일들이 어렴풋이 다가 왔다.
그것이 무엇이든, 이제 앞으로 나갈 수 밖에 없는 것이다.
다시는 외국 땅을 밟지 않겠다고 다짐한 인간이, 다시 외국에 왔을 때는, 막다른 골목길이 아니겠는가.
저녁에 숙소에서 오사카 친구 한국인과 술자리를 가졌다.
오래전 친구, 새로운 만남이었다. 일본어로 후레아이였던가. 후레아이,.....만남.......
인생은 만남의 연속이다. 늘 만나고 헤어진다.
그 속에서 슬픔과 기쁨을 느끼고, 그렇게 인생은 흘러간다.
오랜만의 만남이었다., 이것 또한 만남이다. 후레아이다.
우리는 만남에서 사람만 만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정보도 만난다.
情報, 정보에는 한자를 보듯이 정이 있어야 한다. 정, 사람간의 따스한 정, 사랑, 이런 것들이 정보에 포함 되어 있어야 한다.
단순히 인포메이션을 커무니케이션 하는 것이 아니라, 정을 주고 받는 속에 정보도 오가는 것이다.
그래서 일본어로 만남을 후레아이라고 하는가.
우리의 만남은 앞으로 우리가 해야 할 새로운 세상과 일들에 대한 정보의 만남이다.
만남은 새로운 사람과 세상과 정보의 만남일 것이다. 그것은 곧 우리들의 희망일 것이다.
오사카 성에 갔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황금성이 오사카 시내를 내려다 보고 있었다.
오다 노부나가의 하인으로 있다가, 천하를 통일하고 임진왜란을 일으키고, 그 휴유증으로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패하고, 그를 영웅이라 사람들이 말하겠지만, 그의 욕심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피를 흘렸는가.
어마어마한 성을 쌓기 위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동원되었겠으며, 그가 일으킨 전쟁으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살육 당했겠는가.
역사는 늘 이래서 강자의 합리화된 기록인가. 그래서 영웅 뒤에서 쓸쓸히 사라져간 힘 없는 민중들의 삶은 역사의 이면에서 잊혀져 가는가.
어쩌면 과거의 영웅을 대신하는 것이 자본일런지도 모른다. 자본이란, 사람들을 풍요롭게 하기도 하지만, 얼마나 많은 인간성을 상실하게 만드는가. 돈이면 다 되는 세상, 어쩌면 칼이면 다 되었던 춘추전국 시대의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황금성과 무엇이 다른가.
부산항에 도착해서 지하철을 타고 부산 시내로 왔다. 집에 전화를 했다. 아이들과 아내의 목소리가 반가왔다. 이제 가족의 품으로 돌아 온 것이다.
가족은 나의 힘이고 희망인 것이다.
내가 일본에 다시 간 것은 가족 때문인 것이다. 비록 삶의 무게가 나를 짓누르고, 외로운 외국 생활을 다시 할지라도 가족이 내게 있는 것이다.
바다를 오가는 보부상처럼 처량한 신세일지라도 아이들의 목소리에 나는 힘을 얻을 것이다.
말년의 내가 불쌍할 지라도 가족이 있어 외롭지 않는 것이다.
어쩌겠는가 삶이란 원래 외롭고 불행한 것이 아니던가. 그렇게 생각하고 살자!
삶이란 원래 어깨부터 짓눌러져야지 단단해지는 것이라고 여기고 살자!
돌아오는 길, 동해안 7번 국도는 아름다웠다.
역시 고향의 바다가 좋았다. 강릉은 따스한 늦은 봄날이었고,
단오제가 막 시작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