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사가 모자를 쓴 채 강단에 올랐다. 대머리라고 생각했다.
하모니카를 불고 춤꾼들이 춤도 추고 시 낭송을 한다
○ 돌아보면 모두가 사랑이더라
추색의 주조음처럼 가슴 스며드는 모두가 사랑이더라.
봄날 멍울 터트리는 목련꽃처럼 모두가 사랑이더라.
여름밤 후두둑 떨어지는 별똥별처럼 모두가 사랑이더라.
겨울날 곱게 가슴에 쌓이는 눈꽃처럼 모두가~ 사랑이더라.
가도 가도 세상은 눈부시도록 아름답기만 하더라.
가도 가도 세상은 눈물겹도록 사랑스럽기만 하더라.
돌아보면 모두가 사랑이더라.
돌아보면 모두가~ 그리움이더라.
○ 황진이의 풍류
황진이는 ‘노류장화’라 부르고, ‘말을 알아듣는 꽃’이라 하여 ‘해어화’라 하지만, 기생이라 이름을 드높일 수는 없었다. 황진이의 본명은 황진(黃眞)이다. 어머니 진현금은 어느 날 빨래를 하는데 황진사 아들과 눈이 맞아 황진이는 황진사의 서녀로 태어났다. 당대 명기였지만, 신분과 남녀의 벽을 넘지 못했다. 시‧서‧화‧창‧무(詩‧書‧畵‧唱‧舞)는 물론 뛰어난 재능과 교양을 갖춘 예술인이었다.
30년 연하, 백호 임제가 평안도로 부임하는 길에 풍류호걸 황진이를 만나고 싶어 술 한 병을 들고 황진이의 무덤에서 통곡한 후 황진이를 그리는 시 한 수를 읊었다.
청초 우거진 골에 자난다 누웠난다.
홍안을 어듸 두고 백골만 무첫는다.
잔 잡아 권할 이 업스니 그를 슬허하노라.
황진이의 첫 남자는 옆집 총각이었다. 황진이를 연모하다 상사병으로 죽어 백 상여에 태워 장례를 치렀다. 상여가 황진이 집 앞에서 멈춰서 움직이지 않았다. 이를 들은 진이는 입었던 치마를 벗어 상여 위로 던졌더니 상여는 움직였다.
두 번째 남자는 개성유수 송공이다. 그가 개성 유수로 부임했을 때 잔치를 베풀었다. 이 자리에 황진이가 왔는데, 송공은 황진이의 빼어난 모습을 보고 한눈에 반했다.
세 번째 남자는 선전관(宣傳官) 이사종이다. 이사종는 명창이요 풍류객이라 무뚝뚝하게 황진이를 대한다. 6년간 살되, 3년씩 상대방의 집에서 번갈아 살기로 하고 생계 또한 집주인이 책임지는 방식이었다. 계약 동거로 이사종의 집에서 첩살이를 자청했다.
네 번째 남자 소세양은 과거에 급제, 나중에 대제학을 지냈는데, 그 또한 당대의 풍류 남아로 여색에 혹함은 남자가 아니다! 황진이와 30일을 지내고 깨끗이 끝내겠다.”라고 호언장담했다. 두 사람은 한 달을 기약하고 동거를 했다. 황진이는 헤어지면서 시 한 수를 읊었다.
‘내일 아침 우리 이별한 뒤라도 그리는 정은 푸른 물결처럼 끝없으리니’
다섯 번째 남자는 왕족 벽계수이다. 벽계수의 본명은 이종숙(李琮淑). 세종의 17번째 아들인 영해군의 아들 이의(李義)의 셋째 아들로, 세종의 증손자가 된다. 벽계수가 황진이를 만나기를 원하였으나 ‘풍류 명사가 아니면 어렵다기에 이달(李達)에게 물었다. 그대가 소동으로 거문고를 가지고 뒤를 따르게 하여 황진이의 집 근처 루에 올라 거문고를 타면 황진이가 나와서 그대 곁에 앉을 것이오. 그때 본체만체하고 일어나 재빨리 말을 타고 가면 황진이가 따라올 것이오.
취적교(吹笛橋)를 지날 때까지 뒤를 돌아보지 않으면 일은 성공이고, 그렇지 않으면 성공하지 못할 것이오”라고 했다. 벽계수는 기생 따위의 유혹에 넘어가지 않을 자신이 있다고 호언장담했다. 황진이는 벽계수의 시험하기 위해 그가 지나가는 것을 기다렸다가 시조를 읊었다. 황진이 모습에 고개를 돌리다, 나귀에서 떨어졌다.
청산리 벽계수(靑山裏 碧溪水)야 수이 감을 자랑 마라.
일도창해(一到蒼海)하면 돌아오기 어려우니
명월(明月)이 만공산(滿空山)하니 쉬어간들 어떠리.
여섯 번째 남자는 정승의 아들인 이생은 황진이를 만나 함께 금강산 유람을 가자고 권했다. 황진이와 함께 유람 길에 올랐다. 두 사람은 금강산 일만이천봉을 다니며 빼어난 경관에 넋을 잃었는데, 구경이 끝나기도 전에 노잣돈이 떨어져 이 절 저 절을 다니며 얻어먹어야 했고, 나중에는 황진이가 몸을 팔아 끼니를 해결하기도 했다. 여행이 끝나고 두 사람은 미련 없이 헤어졌다.
일곱 번째 남자는 지족선사(知足禪師)이다. 면벽(面壁) 수련 30년 지족선사가 황진이의 눈웃음 한 번에 넘어가 파계(破戒)를 했다 어느 날 황진이가 소복을 하고 지족암을 찾아갔다. 지족선사는 깊은 암자에서 불도만 닦고 살았기에 관세음보살이 현신하여 자신의 수행을 시험해 보는 것이 아닌가. 여인의 아름다움에 취해 필시 관세음보살이 아니라 둔갑한 여우가 틀림없어!
두려운 생각에 지족선사는 속으로 쉴 새 없이 염불을 했다. ‘십년공부 나무아미타불’이라더니 30년 공든 수행이 무너져버린 선사는 실성한 사람이 되어 황진이를 만나려고 송도 거리를 방황하다 어디론가 사라져버렸다 한다. 허균의 지소록에 있는 글이다
오직 황진이가 존경하고 사랑한 사람은 화담 서경덕이다. 화담은 개성 박연폭포로 가는 길가 서사정(逝斯亭)에서 후학들을 지도하며 은거하고 있었다. 황진이는 서경덕을 유혹하였으나 이르지 못하고 제자로 받아줄 것을 부탁했다.
후대 사람들은 '서경덕, 황진이, 박연폭포'를 송도삼절(松都三絶)이라 하였고 자신이 죽으면 송도 모래밭에 던져 까마귀밥이 되게 해 방탕한 이들에게 경계로 삼으라고 유언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