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3845
5월2일[성 아타나시오 주교 학자 기념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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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를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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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예수회 김정현 요셉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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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꼭 기억하십시오! 나는 존재 자체로 주님께 기쁨이랍니다!>
피정 센터 내에 휑한 공간이 있어, 어쩔까 고민하다가 예쁜 꽃나무 묘목을 몇 그루 사다가 심었습니다. 묘목을 구하기 위해 꽤 발품을 팔았습니다. 이리저리 시장을 다니던 중 제 눈길을 확 끄는 친구들이어서 제가 직접 선택했습니다.
뿐만아니라 제가 직접 자리도 고르고 구덩이도 파고 식재를 했습니다. 거름도 넉넉히 주고 매일 물을 주고 있습니다. 피정 센터 내에 수많은 나무가 있지만, 제가 직접 선택하고 심은 나무이기에 너무나 자연스럽게 더 큰 관심과 애정을 건네고 있습니다.
며칠 전 깜짝 놀랄 광경을 목격했습니다. 심은 지 불과 한 달밖에 지나지 않은 묘목이었는데, 봄비가 흠뻑 내리고 난 다음 날 아침 지나가면서 보니, 세상에 그 여린 줄기에 벌써 초록빛 이파리들이 새록새록 돋아나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죽지 않고 살아준 것이 얼마나 고마운지? 여리디여린 그 모습이 얼마나 사랑스러운지? 얼마나 대견스러운지? 오가시는 피정객들에게 늘 자랑하고 있습니다. 저 예쁜 묘목 보이죠? 제가 사 와서 제가 심은 나무랍니다. 정말 예쁘죠?
아마도 우리를 손수 창조하시고, 우리에게 생명의 숨결을 불어 넣어주신 우리의 주님도 똑같은 마음일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아마도 그분 눈에 우리 각자는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사랑스러운 존재일 것입니다. 누군가에게 자랑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은 존재가 바로 우리 각자일 것입니다.
이런 우리 주님의 마음이 오늘 요한복음에 잘 표현되고 있습니다.
“너희는 내 사랑 안에 머물러라. 내가 너희에게 이 말을 한 이유는,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고 또 너희 기쁨이 충만하게 하려는 것이다.”
보십시오. 우리 주님의 기쁨이 우리 각자 안에 있답니다. 보잘것없는 죄인인 우리, 내세울 것 하나 없는 한심한 우리 각자이지만, 주님께는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기쁨이랍니다.
세파에 지쳐 쓰러질 때마다, 사람들에게 이리저리 치이고 배신당할 때마다, 우리는 반드시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아무리 세상이 나를 배신해도 주님만은 언제나 내 편이라는 것을. 오늘 내 삶이 아무리 비참하고 부끄럽다 해도 나란 존재 자체가 주님께 기쁨이라는 진리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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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MFgvPDKqQ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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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신앙생활 잘하고 있는지 알아보는 법>
우리가 무언가를 지속하려고 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일까요? 기쁨입니다. 내가 기쁘면 다른 사람이 아무리 뭐라 해도 그만입니다. 어차피 행복해지자고 사는 인생, 지금의 삶이 기쁘다고 하는데 누가 뭐라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신앙도 그래야 합니다.
신자들을 보면 ‘고해성사’가 어려워서 신앙을 포기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고해성사는 저도 지금까지 어렵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그래도 하는 이유는 그 어려움을 감수할 만한 기쁨이 기다림을 알기 때문입니다. 십자가는 부활의 희망 없이는 질 수 없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신앙생활의 기쁨은 어떻게 찾을 수 있을까요? 오늘 복음에서 그 해답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내가 내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분의 사랑 안에 머무르는 것처럼,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머무를 것이다. 내가 너희에게 이 말을 한 이유는,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고 또 너희 기쁨이 충만하게 하려는 것이다.”라고 하십니다.
기쁨은 결국 주님의 계명에 순종함에 있습니다. 제가 십일조를 내는 것도 주님의 계명에 순종하는 것인데 그 기쁨이 지속되지 않는다면 지금까지 이어올 수 없었을 것입니다.
제가 공부에 흥미를 잃게 되었을 때가 있는데 바로 인정받지 못할 때였습니다. 유학 가서 성서 석사 논문을 쓰는데 많은 질책을 하는 지도교수 신부님이 좋게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어차피 인정받지 못하는 것, 여기서 끝내고 더는 공부를 이어서 할 생각이 없었습니다. 모두 저의 잘못인데, 저를 인정해 줄 분에게 순종하지 않고 나의 뜻을 고집했기 때문에 공부라는 것을 이어갈 수 없게 되었던 것입니다.
신부님도 논문 발표 때 낮은 점수를 주어 의욕을 완전히 꺾어주었습니다. 만약 주교님께서 강요하지 않으셨다면 저는 다시 유학을 나오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다시 공부해서는 새로운 지도교수 신부님께 인정받았습니다. 이전에 실패한 것을 생각하며 무조건 순종하기로 했기 때문입니다. ‘나의 논문이 아니라 교수님의 논문을 써 주자’라고 생각하니 모든 것을 그분 뜻대로 썼습니다. 다른 교수님들이 하라는 것도 군말 없이 했습니다. 그러자 그분들은 모두 저에게 좋은 점수를 주었고 저는 자신감이 생겼습니다. 그렇게 한국 와서 여러 책도 자신감 있게 쓸 수 있었습니다. 여기에는 저를 믿어주고 책을 내라고 하신 주교님의 인정도 있었습니다. 이런 기쁨이 모든 어려움을 이겨내게 합니다.
내가 진정 내가 하는 일에서 기쁨을 찾는지는 세 가지 정도로 측정해보면 됩니다. 내가 혹시 남을 부러워하지 않는지 살펴야 합니다. 그러면 지금 가는 길은 문제가 있습니다.
저는 일반 대학교 때 이휘재 씨를 부러워하였습니다. 같은 나이인 저와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잘 나갔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전혀 부럽지 않습니다. 그러면 사제로 살아가는 것이 행복하다는 말입니다.
그다음은 내가 하는 일이나 나의 삶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말하는 사람들에게 반응하지 않는
것입니다. 내가 그 사람들의 의견에 흔들린다면 충분히 나의 일에서 행복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저도 한국에 와서 책을 냈을 때 어떤 책에 대해서는 많은 비판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저는 그 책을 낸 것이 자랑스러웠습니다. 그래서 전혀 그들의 말에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계속 또 다른 책을 낼 수 있었습니다.
마지막으로는 나의 길을 가려는 사람이 있다면 기쁘다는 것입니다. 며칠 전에 갓 세례받은 청년이 사제가 되고 싶다고 했습니다. 제가 너무 착해 보여서 몇 번 이야기 했더니 마음이 동요된 것 같습니다. 조금 더 생각해 보라고는 했지만, 기뻤습니다. 왜냐하면 내가 나의 삶을 기뻐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신앙생활을 하면서 기뻐야 합니다. 그래야 어려움들을 이겨내고 앞으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기쁠 방법은 그분의 말씀에 순종하여 그분께 인정받아 그분 사랑 안에 머무는 길밖에 없습니다. 내가 진정 기쁜 신앙생활을 하는지 앞에 예시된 것들로 나 자신을 되돌아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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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성지순례에서 성모님의 발현이 있었던 곳엘 다녀왔습니다. 두 곳은 교회에서 성모님의 발현을 공적으로 인정한 곳이고, 다른 두 곳은 아직 공적으로 인정하지 않은 곳입니다. 루르드와 파티마는 교회에서 인정했기에 보편교회의 전례력에도 축일로 기념하고 있습니다. 루르드의 성모님 발현 기념일은 2월 11일입니다. 교회는 이날을 세계 병자의 날고 기념하기도 합니다. 루르드의 성모님은 자신을 ‘원죄 없이 잉태되신 마리아’라고 선포하였습니다. 파티마의 성모님 발현 기념일은 5월 13일입니다. 파티마의 성모님은 3가지 비밀을 알려주었다고 합니다. 그 중에 하나가 성인이 되신 요한 바오로 2세의 피격이라고 합니다. 파티마의 성모님은 자신을 ‘묵주기도의 마리아’라고 선포하였습니다. 1981년에 시작되었던 메주고리예의 성모님 발현은 교회에서 공적으로 인정하지는 않았지만 신자들이 순례하는 것은 허용하고 있습니다. 교황청은 이렇게 발표하였습니다. “메주고리예 순례에 대해서는, 그것이 개인적으로 하는 순례라면, 현재 교회의 조사가 진행 중이고, 지금까지 일어나고 있는 중인 사건으로, 입증되지 않은 상황이라는 점으로 미루어, 본 성은 순례가 허락된 것임을 지적합니다.” 1961년에 시작되었던 가라반달의 성모님 발현도 교회에서 공적으로 인정하지는 않았지만 신자들이 순례하는 것은 허용하고 있습니다. 성모님 발현의 공통적인 메시지는 ‘회개, 성경읽기, 묵주기도, 미사참례, 고백성사’와 같은 것입니다. 성모님 발현에 대한 공적인 인정은 보편교회의 권한입니다.
오늘은 성 아타나시우스 주교 학자 기념일입니다. 아타나시우스 주교님은 아리우스 이단으로부터 교회의 신앙을 지켜낸 분입니다. 아리우스 이단은 알렉산드리아의 사제 아리우스로부터 발달하였는데 그는 그리스도께서 하느님이시라는 교회의 믿음에 반기를 들고 예수님의 신성을 적극 부인함으로써 반삼위일체론을 주장하였습니다. 교회는 325년 제1차 니케아 공의회를 소집하여 아리우스의 주장을 단죄합니다. 또 니케아 신경을 발표하여 성부, 성자, 성령 삼위가 완전한 신이라는 삼위일체설을 당당하게 고백하였습니다.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한때는 전통 교리를 따르는 교회보다 더 많은 교세를 유지기도 했던 아리우스파의 제자들에 의해 아리아니즘은 북부 게르만 민족에게 전파되었고 게르만족의 로마 진입과 더불어 로마 제국 전역에 퍼져나갔습니다. 7세기에 이르러서야 교회는 아리아니즘을 완전히 몰아낼 수 있었는데 이때 중추적인 역할을 하셨던 분이 오늘 기념일로 지내는 아타나시우스 주교 학자입니다. 그는 아리우스 이단을 단죄하고 파면하기로 결행한 니케아 공의회의 가르침을 지키려 혼신의 힘을 바쳤고 가톨릭교회의 정통 가르침을 지켜내셨던 분으로 교회사에 기억되고 있습니다. 성 아타나시우스 주교 학자의 기념일을 지내면서 어떠한 혼란과 암담한 상황 속에도 하느님께 충실하고 정통 가르침을 수호하는 사람이 결국 승리한다는 것을 보았습니다. 교회는 항상 영원한 시대를 살아가면서 다양한 환경과 사상 속에서 정통 가르침을 흔들려고 하는 많은 이단 사상들을 만나게 됩니다. 오직 정통 교회의 가르침을 따르고 지킬 때, 혼란스러운 사상과 이단적인 가르침이 정화될 수 있음을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교회의 식별은 공의회나 조사에 의해서 이루어집니다. 신앙인으로서 개인의 식별도 필요합니다. 이냐시오 성인은 영신수련 23항 ‘원리와 기초’에서 개인의 식별에 대해서 이렇게 이야기하였습니다. “사람은 하느님을 믿고 알아, 구원받기 위해서 태어났습니다. 이 세상 모든 것은 하느님께서 창조하셨습니다. 하느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라면 기꺼이 사용할 것이고, 하느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 아니라면 버릴 것입니다.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라면 부귀보다 가난함을 택할 수 있고, 건강보다 질병을 택할 수 있고, 오래 사는 것보다 단명함을 택할 수 있습니다. 이제 우리 삶의 기준은 ‘하느님의 더 큰 영광’에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식별의 기준을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다. 너희는 내 사랑 안에 머물러라. 내가 내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분의 사랑 안에 머무르는 것처럼,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머무를 것이다.” 주님의 사랑 안에 머물고, 주님의 계명을 지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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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요한 15,9-11: 너희의 기쁨이 충만하도록 너희는 내 사랑 안에 머물러라.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다. 너희는 내 사랑 안에 머물러라.”(9절) 주님께서는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 즉 사랑의 관계에서 아들에게 당신의 모든 것을 내어주시고 아들은 아버지께 모든 것을 드리는 그러한 사랑으로 우리를 사랑하신다. 아버지의 말씀을, 아버지의 뜻을 행함으로써, 우리도 아버지와 아들 사이의 관계에 참여하라고 하신다. 주님의 사랑 안에 머무른다는 것은 바로 그 사랑을 우리도 실천하며 아버지께 나아갈 수 있도록 하라는 초대이다.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분의 사랑 안에 머무르는 것처럼,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머무를 것이다.”(10절) 계명을 지키고 실천하는 것이 사랑의 가장 중요한 표지라면, 사랑이 없을 때는, 우리를 완전하게 하는 믿음과 계명들도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사랑이 없다면 계명을 지키고 의로운 행위를 하더라도 또한 은총의 놀라운 기적을 행하더라도 그 일들은 단지 자기만족을 위한 것이 되고 만다. 우리가 믿음을 갖는다는 것은 우리가 바로 그리스도를 닮으며, 그분과 같이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를 위해 돌아가신 분을 닮으려 노력하는 사람은 하느님께 대한 사랑과 순명을 변함없이 드리며 항상 감사한다. 이런 사람은 누구나 하느님으로부터 더 큰 사랑을 받을 것이다. 그리고 그들이 게을러지지 않도록 항상 깨어있어야 축복을 빼앗기지 않을 것이라고 하신다. 그래서 “그것으로 내 아버지께서 영광스럽게 될 것이다.”(8절) 하신 것이다.
“내가 너희에게 이 말을 한 이유는,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고 또 너희 기쁨이 충만하게 하려는 것이다.”(11절) 주님께서 아버지와 함께하시며 언제나 기쁨을 가지셨다. 우리도 하느님 안에 살며 충만한 기쁨을 가져야 한다. 주님 안에서 우리는 기쁨을 누릴 수 있다. 이 기쁨은 바로 그분과 우리의 나눔에서 나온다. 우리가 갖는 기쁨은 그분이 우리에게 주시는 은총이다. 그분께서는 영원으로부터, 즉 “세상 창조 이전에 우리를 선택”(에페 1,4)하실 때에도 이 기쁨을 두고 즐거워하셨다. 그것은 우리가 생겨나기 전에 이미 당신의 지혜로 우리를 보고 기뻐하셨다는 것이다. 당신의 예지 안에서 우리가 그분의 즐거움이었고 그 기쁨은 이미 충만했다는 것이다. 이제는 우리가 기쁨으로 충만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가 언제나 그분의 사랑 안에 머물러 있어야 한다. 그런데 그 기쁨을 차지하고 충만히 누리기 위해서는 나 자신과 싸움을 끝까지 해야 얻을 수 있다. 항상 주님의 사랑 안에 머물러 있을 수 있도록 나 자신과 끊임없는 싸움을 하여야 한다. 언제나 포도나무에 붙어있는 삶이 되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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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김혜윤 베아트릭스 수녀님(미리내 성모성심 수녀회)]
어제에 이어 오늘 독서와 복음에서도, 유다인들의 ‘옛 계명’과 그리스도인들의 ‘새 계명’이 대조됩니다. 독서는 ‘예루살렘 공의회’를 통하여, 그리스도를 새롭게 믿게 된 이들이 더 이상 유다인들의 외적 관습을 지킬 필요가 없음을 밝힙니다. “여러분은 왜 우리 조상들도 우리도 다 감당할 수 없던 멍에를 형제들의 목에 씌워 하느님을 시험하는 것입니까?”
복음은 유다인들의 옛 전통과 율법을 완성할 새로운 계명으로 ‘사랑’을 제시합니다. 인간은 율법의 준수로 구원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사랑으로 구원되는 것입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다. 너희는 내 사랑 안에 머물러라.” 특별히 이 말씀은 지금까지의 ‘비유’(참포도나무와 가지)와 달리 갑자기 명령형이 사용되고 직접 화법으로 강조됩니다. 그리고 이때 쓰인 동사 ‘사랑하다’(‘아가파오’)는 상대를 위하여 자신을 희생하는 의지적 행위를 말합니다. 그리스도교의 복음이 구원에 이르는 길로 제시한 사랑은 상대를 위하여 ‘죽는 것’, ‘목숨을 내어놓는 것’입니다.
‘사랑 안에 머문다는 것’은 그저 가만히 멈춘 상태로 있는 것을 뜻하지 않습니다. 끊임없이 그 사랑의 본질에 다가가는 여정을 뜻합니다. 역설적이게도, 상대를 위하여 자신을 온전히 내주고 상대를 대신해서 죽을 때, 오히려 그 사랑은 온전히 살아나고 자신도 구원됩니다. 자신의 생명을 내어 준 만큼 영원한 생명으로 채워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랑은 실존하는 가장 큰 힘이며 신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그런 사랑을 받고 있음을 알려 주시고, 그 이유도 말씀하여 주십니다.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고 또 너희 기쁨이 충만하게 하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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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내가 너희에게 이 말을 한 이유는>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다. 너희는 내 사랑 안에 머물러라. 내가 내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분의 사랑 안에 머무르는 것처럼,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머무를 것이다. 내가 너희에게 이 말을 한 이유는,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고 또 너희 기쁨이 충만하게 하려는 것이다.”(요한 15,9-11)
1) 여기서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다.”는,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시는 것처럼 나도 너희를 사랑하고 있다.”인데, 전에도 사랑했고, ‘지금 이 순간에도’ 사랑하고 있고, 앞으로도 사랑하겠다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신앙인들)에 대한 당신의 사랑은, 아버지의 예수님에 대한 사랑과 같다고 말씀하시는데, 그 사랑은 ‘모든 것을 다 주는’ 사랑입니다.(요한 3,35) 신앙인들에 대한 예수님의 사랑도, 당신의 목숨을 내주셨으니(요한 15,13) 모든 것을 전부 다 주는 사랑입니다.
“그분께서 우리를 위하여 당신 목숨을 내놓으신 그 사실로 우리는 사랑을 알게 되었습니다.”(1요한 3,16ㄱ)
2) “너희는 내 사랑 안에 머물러라.”는 말씀은, “나의 사랑을 믿고 받아들여라.”라고 호소하시는 말씀이기도 하고, “나의 사랑 안에서 살아가라.”라고 당부하시는 말씀이기도 하고, 10절의 설명처럼 “내 계명을 제대로 지켜라.”라고 명령하시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내가 내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라는 말씀에서 ‘아버지의 계명’은 인류를 구원하시려는 ‘하느님의 뜻’을 가리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아버지의 계명을 지키신다는 말은, 인류 구원이라는 하느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모든 것을 다 바치신다는 뜻입니다. “그분의 사랑 안에 머무르다.”는 “아버지와 나는 사랑으로 일치되어 있다.”입니다. <하느님의 뜻과 예수님의 뜻이, 또는 하느님의 바람과 예수님의 바람이 완전히 일치되어 있고,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뜻만을 생각하고 그 뜻을 실현하는 일만 하시는 것이 바로 하느님과 예수님 사이의 사랑입니다.>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이라는 말씀에서 ‘내 계명’은, 믿고 회개하라는 ‘구원의 부르심’을 뜻하기도 하고, “서로 사랑하여라.” 라는 새 계명을(요한 13,34) 뜻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머무를 것이다.”라는 말씀은, “너희가 구원받기를 원하고 노력해서 구원을 받게 되면, 아버지와 나의 사랑에 참여하게 될 것이다.”라는 뜻이기도 하고, “서로 사랑하라는 내 계명을 실천하는 것은 너희에게 주는 나의 사랑에 응답하는 것이다.”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사실, 구원받기 위해서 노력하는 것은, 주님의 사랑을 받기 위해서 노력하는 것이고, 신앙생활은 사랑하는 생활이기 때문에, 이 두 가지 뜻은 사실상 한 가지 목표를 가리킵니다. 그 목표는 바로 하느님 나라에서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입니다.>
3) 요한 사도는 ‘믿음’에 초점을 맞추어서 ‘계명 실천’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예수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사람은 모두 하느님에게서 태어났습니다. 아버지를 사랑하는 사람은 모두 그 자녀도 사랑합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사랑하고 그분의 계명을 실천하면, 그로써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들을 사랑한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은 바로 그분의 계명을 지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분의 계명은 힘겹지 않습니다. 하느님에게서 태어난 사람은 모두 세상을 이기기 때문입니다. 세상을 이긴 그 승리는 바로 우리 믿음의 승리입니다.”(1요한 5,1-4) <이 말을 단순하게 줄이면, “믿음과 사랑은 하나다.”입니다. 우리가 믿음과 사랑을 실천하는 생활을 하는 것은 구원받기 위해서인데, 구원받기를 바란다면 당신의 계명을 실천하라는 것이 예수님의 가르침입니다. 그 계명은 바로 “서로 사랑하여라.”입니다.(요한 15,12)>
4) “내가 너희에게 이 말을 한 이유는”이라는 말씀에서, ‘이 말’은, 앞의 5절에 있는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다.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안에 머무르는 사람은 많은 열매를 맺는다. 너희는 나 없이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요한 15,5)라는 말씀을 가리킵니다.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고”라는 말씀은, “나는 너희에게서 기쁨을 얻기를 바란다.”, 또는 “나는 너희 때문에 기뻐하게 되기를 바란다.”라는 뜻입니다. “너희 기쁨이 충만하게 하려는 것이다.”라는 말씀은, “너희가 구원을 받아서 영원한 기쁨을 얻기를 바란다.”라는 뜻입니다. 여기서 ‘기쁨’이라는 말은, 구원받은 사람들이 하느님 나라에서 누리게 되는 영원한 생명, 영원한 행복, 영원한 평화 등을 총체적으로 나타내는 말입니다.
5) ‘기쁨’이라는 말에만 초점을 맞춘다면, 이 말은 ‘되찾은 양의 비유, 되찾은 은전의 비유, 되찾은 아들의 비유’에 연결됩니다. “양을 찾으면 기뻐하며 어깨에 메고 집으로 가서 친구들과 이웃들을 불러, ‘나와 함께 기뻐해 주십시오. 잃었던 내 양을 찾았습니다.’ 하고 말한다.”(루카 15,5-6)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이와 같이 회개하는 죄인 한 사람 때문에 하느님의 천사들이 기뻐한다.”(루카 15,10) “너의 저 아우는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고 내가 잃었다가 되찾았다. 그러니 즐기고 기뻐해야 한다.”(루카 15,32)
우리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서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은, 아버지와 예수님께 ‘큰 기쁨’을 드리는 일인데, 구원받은 당사자인 ‘나의 기쁨’이 가장 클 것입니다. 신앙생활은 그 크고 영원한 기쁨을 향해서 나아가는 생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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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한민택 바오로 신부님]
<주님께 의탁함에서 오는 평화>
“나는 너희에게 평화를 남기고 간다.”
우리 삶에는 시련과 고난이 끊임없이 이어집니다. 인생사가 이렇다보니 차라리 다 버리고 자연으로 돌아갈까, 생각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평화는 우리가 간절히 기대하고 기다리는 것이지만, 우리 마음처럼 쉽게 주어지지 않는 것도 사실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평화를 주십니다. 그분이 주시는 평화란 어떤 것일까요? 그분이 걸어가신 길에 그 실마리가 있습니다.
지금 주님 앞에는 수난과 죽음이라는 외로운 고난의 길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용기를 잃지 않으셨습니다.
비록 인간적 나약함으로 죽음 앞에서 번민하셨지만, 당신의 길을 끝까지 걸어가셨고 고난을 겪고 영광 속에 들어가셨습니다.
그분께서 주시는 평화란 고난과 시련을 교묘히 피해가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걷는 고난의 길에서 주님의 현존을 발견하고, 우리보다 먼저 고난을 겪으신 그분께 의탁하고 용기를 청하며, 한 걸음씩 앞으로 나아갈 때 주어지는 것이 아닐까요?
진정한 평화는 주님을 만나 알고 그분과 친밀한 관계, 마음이 오가는 관계를 맺음에서 옵니다.
우리가 버림받았다고 느끼거나, 병고를 겪으며 아무런 희망이 없다고 느낄 때조차, 용기를 잃지 않고 주님께 의탁하며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면, 주님의 평화 속에 머무는 우리를 발견할 것입니다.
* 시련과 고난 중에도 함께하시는 주님께 마음을 열고 의탁하고 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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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박상대 마르코 신부님]
<사랑실천과 계명 준수는 동시사건>
포도나무의 가지가 나무에 붙어있지 않고서 포도열매를 맺는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이렇게 누구나 쉽게 알아들을 수 있는 ‘포도나무와 가지’의 비유를 통하여 예수님께서는 당신과 제자들의 관계를 정립하시고, 제자들이 열매를 맺을 수 있도록 예수께 끝까지 머물러 있으라고 당부하셨다.(15,1-8)
오늘 복음에서도 전체의 흐름을 꿰뚫고 있는 모티브는 열매를 맺기 위한 포도나무와 가지의 뗄 수 없는 관계이다. 포도나무인 예수님께 가지인 제자들이 머문다는 것은 곧 예수님의 사랑 안에 머물러 있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무조건 당신의 사랑 안에 머물라고 명하시는 것은 아니다. 스승인 예수님께서 먼저 제자들을 사랑하셨고, 그 사랑은 아들을 사랑하신 아버지께로부터 배운 것이었다. 따라서 스승의 제자들에 대한 사랑은 아버지의 아들에 대한 사랑이 그 기초가 된다.(9절)
이제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사랑 안에 머무는 방법을 구체적으로 가르쳐 주신다. 그것은 계명을 지키는 것이다. 이것 또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무조건 요구하는 것이 아니다.
아들이 먼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 사랑 안에 머무는 것을 모델로 제시하신다. “내가 내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분의 사랑 안에 머무르는 것처럼,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머무를 것이다.”(10절)
예수님께서는 아들로서의 자신이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 사랑 안에 머물러 있는 사실을 대단히 기뻐하신다. 제자들이 스승을 따라 계명을 지켜 그 사랑 안에 머문다면 마찬가지로 기쁨이 보장될 것이며(11절), 이 기쁨은 아버지께서 아들을 통하여 제자들에게까지 베풀어주시는 기쁨이다.
계명을 지킴으로써 사랑 안에 머문다는 것은 사실상 동시에 일어나는 사건이다. 예수님께서는 이미 제자들의 발을 씻겨주시고 난 뒤 새 계명을 선포하셨다.
“내가 너희에게 새 계명을 준다. 서로 사랑하여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13,34)
이렇게 계명과 사랑은 서로 묶여 있다. 구약성경을 따르는 유다인들은 하느님의 계명과 사랑이 서로 별개의 것이며, 사랑이 계명에 종속되어 계명 중의 하나라고 생각했다.
신약성경 후기에 사는 우리에게도 구약의 율법은 있고, 이 율법으로부터 물려받은 십계명도 여전히 효력을 발생한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계명들 속에서 사랑을 솎아내어 계명 위에 세우셨고 모든 계명의 골자로 사랑을 제시하셨다.
그래서 모든 율법과 계명 중에 어느 계명이 가장 큰 계명인지를 묻는 율법학자의 질문에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대답하셨다.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정신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신명 6,5) 이것이 가장 크고 첫째가는 계명이다. 둘째도 이와 같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레위 19,18)는 것이다. 온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 이 두 계명에 달려 있다.”(마태 22,37-40) 이렇게 해서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은 동시에 사랑의 이중계명으로서 모든 계명의 핵심이요 골자다.
이제 계명을 지킨다는 것은 곧 사랑하는 것이다. 따라서 사랑하는 사람은 계명의 전부를 지키는 것과 같다는 결론이다. 그런데 사랑이 추상적이라는 데 문제가 있다.
사랑의 구체적인 모델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사랑한 것처럼’(13,34)이라는 모범 안에 들어 있다. 여기서의 사랑은 낙관주의자들이 생각하는 화사하고 달콤한 로맨스(romance)에 등장하는 낭만이 아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사랑한 모델은 곧 사람의 아들이 아버지 앞에 “당신 자신을 낮추시어 죽음에 이르기까지, 십자가 죽음에 이르기까지 순종하심으로써”(필리 2,8) 세상에 내어놓은 사랑이다.
그렇다고 예수님께서 당장 제자들의 목숨까지 요구하면서 사랑하라는 것은 아니다. 우선 ‘스승이 제자들을 사랑하신 것처럼’ 사랑하라는 것이다.
사랑의 교과서는 예수님이시다. 그러나 그 책 안에 들어 있는 사랑을 구체적으로 배워 실천하는 것이 우리가 해야 할 숙제이다. 숙제를 하면서 늘 지켜야 할 최소한의 규칙이 있다. 그것은 바로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 주어라.”(마태 7,12)는 황금률이 아니겠는가?
결국 사랑하는 동시에 계명 준수가 이루어진다. 물론 사랑한다는 것이 자칫 추상적인 관념에만 머물 수 있기 때문에 구체적으로 사랑을 실천했을 때 계명 준수가 이루어진다.
만약 사랑의 실천이 잘 되었는지, 그래서 계명 준수가 잘 이루어졌는지 알아보고 싶다면 자신의 마음을 들여다보아야 한다.
그리고 그 마음속에 기쁨이 동(動)하고 있어야 한다. 기쁨은 곧 만족감이며, 이 기쁨은 바로 예수님께서 베풀어주시는 기쁨이다.(11절) 이 기쁨으로 자신을 충만케 하려면 사랑의 실천이 일상의 습관이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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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이세형 유스티노 신부님]
오늘 아침에 가족들과 축복기도를 하셨나요? 어색함과 부끄러움을 벗어 던지고 축복기도를 반드시 하셔야 합니다. 이 기도가 우리 가족을 얼마나 사랑의 일치로 이끄는지 그 실례를 들려 들이겠습니다.
어느 날, 한 형제님과 미사 후에 대화를 나누다가 저에게 “신부님, 감사합니다. 신부님께서 시킨 대로 저는 매일 아침 출근하기 전에 아내와 자녀들에게 축복기도를 해줍니다. 간혹 잊어버릴 때는 문자로 축복을 꼭 보냅니다.
3개월 정도 했는데 우리 가정에 많은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우선 내 자신입니다. 아주 짧은 축복기도이지만 그 기도를 통해서 내가 주님께 축복받고 있다는 믿음이 생겼습니다.
그리고 집안 분위기입니다. 아침마다 전쟁터처럼 어수선했던 분위기가 차분해지고 따뜻해 졌습니다. 며칠 전에는 감동으로 울었습니다.”
“아니, 왜요?” 그 형제님은 지금도 벅찬 마음으로 말했습니다.
“신부님, 그게 말입니다. 며칠 전에 회사에서 언짢은 일이 있어서 술을 한잔하고 들어왔습니다. 전에는 제가 기분이 안 좋을 때는 인사만 하고 자기 방으로 들어가 아이들이 방에서 나오지 않는 것입니다. 그럴 때는 화가 더 납니다. 내가 누구 때문에 고생하고 있는데 하는 생각이 들면 서글퍼지기도 합니다. 녀석들이 미워지기도 합니다.
그런데 그날 제가 막 잠이 들려고 했는데, 녀석들이 제 방에 들어오는 겁니다. 아마 제가 자나보다 하고 생각했겠지요. 저는 눈감은 채 모른척했지요.
그런데 첫째는 제 오른손을, 둘째는 제 왼손을 살포시 잡고 축복기도를 하는 것입니다. 마음이 뜨거워지는데 꾹 참았어요. 아이들이 나가고 난 뒤 감동으로 펑펑 울었습니다. 아! 이것이 가족의 사랑이구나. 그래! 내일 아침에도 기쁘게 하루를 맞이해야지. 주님 감사합니다.”
그 형제는 신명나게 가족자랑을 했습니다. 저도 물론 형제처럼 기뻤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다. 너희는 내 사랑 안에 머물러라. 내가 내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분의 사랑 안에 머무르는 것처럼,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머무를 것이다. 내가 너희에게 이 말을 한 이유는,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고 또 너희 기쁨이 충만하게 하려는 것이다.”
사랑은 표현할 때, 열매를 맺습니다. 예수님도 끊임없이 당신의 사랑을 우리에게 표현하십니다. 그것은 우리의 기쁨이 충만하게 하려는 것이라고 하십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힘은 예수님의 사랑과 가족의 사랑입니다. 항상 예수님의 사랑 안에 머무르십시오. 그러면 기쁨이 충만할 것입니다.
기쁨의 충만으로 가족을 향한 사랑을 축복의 기도로 하루를 시작하십시오. 그리고 내가 몸담고 있는 일터로 확장시키십시오. 특히 지금 나와 불목의 관계에 있는 형제를 향해서 축복의 기도를 행하십시오.
“주님께 노래하여라, 영광으로 가득 차신 분! 주님은 나의 힘, 나의 굳셈, 나에게 구원이 되셨도다. 알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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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김두유 세례자 요한 신부님]
저는 가끔씩 길을 가다가 사람들을 쳐다보는 습관이 있습니다. 만나는 사람이 아니라 지나가는 사람을 쳐다보는 것입니다.
아주 잠깐이지만 상대방의 얼굴에서 느끼는 점은 아주 다양하게 나타납니다. 무슨 기준으로 생활이 어렵고 힘들게 사는 지에 대한 정답은 없지만 상대방의 얼굴에서 그 사람의 상태를 충분히 느끼게 합니다.
피곤한 얼굴인지, 상쾌한 얼굴인지, 기쁜 얼굴인지, 슬픈 얼굴인지를 느낍니다. 그 중에서도 연인의 얼굴을 쳐다보면 무엇이 그렇게 좋은지 항상 기쁜 얼굴을 보입니다.
아마도 사랑하는 관계에 있으면 제일 기쁜 얼굴이 아닌가 생각을 해봅니다. 그래서 얼굴 관리를 잘해야 하는데, 상대방의 좋은 얼굴을 기억하고 그대로 쫓아 사는 것이 좋은 일이 아니겠습니까?
저 또한 기쁜 얼굴을 지니는 사람이 되어야겠다고 생각을 하면서 하루를 시작하는데 그것이 뜻대로 잘 안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처럼 잘 안 되는 경우에는 오늘 복음을 묵상하면 기쁜 얼굴을 간직하며 살아갈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내가 내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분의 사랑 안에 머무르는 것처럼,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머무를 것이다.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고 또 너희 기쁨이 충만하게 하려는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이 서로 기쁜 것은 상대방에 대한 생각과 상대방이 기쁠 수 있도록 노력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사랑은 서로의 모자람을 채워주는 나눔과 일치가 있기 때문에 기쁜 생활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신앙인으로써 기쁜 생활을 하려면 주님 사랑 안에 머무르는 생활을 하면 됩니다. 그 사랑 안에 머무르는 모습은 다름이 아니라 예수님의 계명을 지키는 일입니다.
예수님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 되셨기에, 우리는 예수님의 계명을 지켜 “예수님의 마음에 드는 아들”이 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계명은 바로 “서로 사랑하여라”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요한 복음 13장 34절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랑하시던 제자들을 떠나시기에 앞서 사랑의 새 계명을 주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새 계명을 준다. 서로 사랑하여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우리가 서로 사랑하는 것은 하느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새로운 계명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이르시는 것은 세상이 주는 기쁨보다 더 큰 하느님이 주시는 기쁨을 누리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말하자면 우리가 당신의 영원한 삶을 함께 누리도록 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사람들에게 보여 주는 사랑은 아무런 차별 없이 개개인에게 맞는 사랑을 베푸시어 사람답게 살도록 해 주셨습니다. 죄인들에게는 사랑과 용서를, 병든 이에게는 마음과 몸의 치료를, 우는 이에게는 따뜻한 위로의 말씀을 통하여 모든 사람들에게 골고루 당신의 사랑을 주셨습니다.
결국 당신 사랑의 최고 표현은 십자가에 당신 목숨을 바치심으로서 우리에게 당신의 살과 피를 남김없이 주신 희생 제사였습니다. 그래서 우리 비천한 인간이 하느님과 함께 살 수 있는 기쁨을 주신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에게 모범을 보여주신 주님 사랑에 감사하며 우리 자신도 그분 모범을 따라 살아야 합니다. 사랑 안에 머물지 못하면 모든 단절을 가져옵니다.
사랑 안에 머물지 못하는 그 단절은 무관심과 미움을 초래하게 되고 우리 모두를 파멸의 길로 가게 만듭니다. 기쁨이 충만한 삶을 살아가기 위해 오늘도 노력하는 우리 신앙인이 되어야 합니다.
신앙인이라면 당연히 기쁜 모습으로 살아가야 되는 것입니다. 각자가 처해 있는 상황에서 사랑이 없는 생활을 하게 되면 우리의 하느님께서도 기쁜 얼굴로 살아가지 못할 것입니다.
오늘 하루 주님과 우리 이웃들에게 “서로 사랑하는” 기쁜 날이 되었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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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그리스도 고난수도회 김준수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너희는 내 사랑 안에 머물러라. 내가 너희에게 이 말을 한 이유는,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고 또 너희 기쁨이 충만하게 하려는 것이다.”(15,9.11)
잘 알려진 「사랑의 기쁨」이란 노래는 의외로 반복된 후렴구처럼 사랑의 기쁨보다 무척 슬픈 노래입니다. 『사랑의 기쁨은 어느덧 사라지고, 사랑의 슬픔만 영원히 남았네』라는 노랫말처럼 말입니다. 하지만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너희는 내 사랑 안에 머물러라. 내가 너희에게 이 말을 한 이유는,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고 또 너희 기쁨이 충만하게 하려는 것이다.”(15,9.11)라는 말씀은 순간적이고 감각적인 기쁨이 아니라 존재적 기쁨, 서로 사랑으로 하나가 된 존재의 영원한 기쁨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는 초대라기보다 인간에게 사랑으로 하나가 되고 싶다, 는 사랑의 애원이며 절규처럼 들려옵니다. 이를 위해 아빠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예수님께 이끄시고 예수님은 당신과 아빠 하느님과의 사랑의 일치와 친교에서 솟아나는 존재적 기쁨에 함께 하자고 애원하십니다. 깊게 친밀하게 서로 안에 함께 ‘머물기’ 위해 전제되는 것이 ‘이끄심’입니다. 그러기에 이끄심은 머묾을 위함이고, 머묾은 사랑의 친교를 통한 기쁨을 위한 것입니다. 사랑의 충만한 기쁨을 만끽하기 위해 예수님께서 그러기에 당신 사랑 안에 머물러라 하십니다. 그래야만 당신의 기쁨이 우리 안에 충만할 것이라 말씀하신 것입니다. 사실 기쁨이란 외부의 어떤 것에 의한 것이 아니라 마음에서부터 사랑받고 사랑하는 두 인격 사이의 하나 됨의 자각에서부터 솟구쳐 오르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기쁨이란 바로 사랑이신 아빠 하느님과 끈끈하고 친밀한 하나 됨입니다. “아버지와 나는 하나다.”(요10,30)라는 말씀처럼 존재적 하나 됨에서 기인하는 기쁨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사랑 안에 머물러야 하는 이유는 그것이 아버지의 뜻이고 우리에 대한 사랑의 초대이고 우리의 행복이고 구원의 길이기 때문입니다.
초대교회는 “예수님의 은총으로 구원을 받는다.”(사15,11)라는 복음의 기쁨에서 다른 민족 가운데에서 하느님께 돌아선 이들에게 낡은 관습이 아니라 진리인 하느님의 시선에서 그들의 멍에를 벗겨 줍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복음에서도 어제와 비슷한 톤으로 저희에게 당신의 사랑 안에 머물라 하십니다. 그렇게 주님의 사랑 안에 머물고 사랑을 넘치도록 받을 때, 당신의 기쁨이 저희의 기쁨으로 전환될 수 있다고 하십니다. 먼저 그리스도교는 본질적으로 기쁨의 종교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기쁨의 생활입니다. 기쁨이 없는 삶이란 그리스도인의 삶이 아닙니다. 그러기에 이 부활 시기를 지내면서 우리 모두 슬픔에서 기쁨으로 회개해야 합니다. 사랑의 원천인 하느님께 돌아가야 하고 사랑인 하느님 안에 온전히 머묾을 통해 기쁨을 누려야 합니다. 기쁨은 사랑 안에 머묾의 결실입니다. 기쁨은 이렇게 하느님의 사랑 안에 머물 때 사랑인 하느님으로부터 강물처럼 흘러나옵니다. 우리네 삶에 근심과 두려움, 고통과 어려움이 없을 수 없지만 슬픔은 우리 자신에 집중할 때 찾아오는 것이라면 그러한 상황 속에서도 사랑이신 하느님 안에 항구하게 머물 때 기쁨은 우리의 내면에서부터 솟아오르는 것입니다. 참된 기쁨은 외부 어떤 환경이나 상태에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마음 깊이 내주하고 계신 하느님의 현존을 자각하고 의식할 때 마음 깊은 곳에서 솟아오르는 것입니다. 큰 기쁨이 강물처럼 우리 삶에 활력을 가져다주는 것입니다.
사도 바오로는 환난 가운데 기뻐하였습니다. 그가 기뻐할 수 있었던 것은, 기쁨은 좋은 성격의 결실도 아니고 자연적인 자질이나 인간적인 노력으로 획득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로부터 오는 것임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질그릇 같은 우리 속에 이 보화를 담아주셨습니다. 이것은 엄청난 능력이 우리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로부터 나온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1코 4,7) 그러기에 보물찾기하듯 숨어 있는 기쁨을 찾고 가꾸고 길들여 가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기쁨을 온전히 누리기 위해서 “언제나 기뻐하십시오. 끊임없이 기도하십시오. 모든 일에 감사하십시오.”(1테살 5,17)라는 사도 바오로의 권고를 명심하셔야 합니다. 기뻐할 때 기도하고, 기도할 때 감사하며, 감사하면 기쁠 수가 있답니다. 아울러 사도 베드로와 야고보처럼 다른 사람에게 ‘감당할 수 없는 멍에를 형제들의 목에 씌우기보다 풀어주고 덜어주는 삶을 통해 우리의 기쁨이 그들 안에서 충만하게 하는 하루를 살아갑시다. “주님은 우리의 기쁨이오니, 당신 안에서 참 기쁨을 누리는 오늘이 되게 하여 주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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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본다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특히 자기보다 큰 존재를 제대로 안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합니다.
어렸을 때의 일이 생각납니다. 개미집을 향해 과자 부스러기를 지고 개미를 우연히 보게 되었습니다. 이 개미를 도와주고 싶어서, 개미와 개미가 진 과자 부스러기를 함께 개미집 앞으로 이동해 주었습니다. 어떻게 되었을까요? 개미는 자기가 짊어졌던 과자 부스러기에는 전혀 관심을 보이지 않고 급하게 도망갑니다. 바로 앞에 자기 집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정반대로만 향합니다. 가는 길을 손으로 막으면서 개미집으로 들어가게 하려고 했지만, 나중에는 제 손을 기어 올라가서 도망갔습니다.
개미가 이런 저를 제대로 봤을까요? 보지 못했을 것입니다. 아마 ‘이게 무슨 일이야?’하면서 도망친 것이 아닐까요?
어린 자녀가 부모에게 아픈 말과 행동을 계속합니다. “엄마, 아빠가 내게 해준 게 뭐 있어?”라면서 습관적으로 말합니다. 그런데 이때는 부모의 마음을 제대로 알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아직 너무 작은 존재이기에 부모의 큰마음을 볼 수 없는 것입니다. 이 어린 자녀가 또 한 아이의 부모가 될 때 비로소 깨닫습니다.
“부모님이 나를 사랑하셨구나.”
우리는 과연 주님을 제대로 볼 수 있을까요? 나의 존재가 너무 작기에 볼 수 없는 것이 당연합니다. 우리가 큰 존재가 되어야 비로소 주님을 알아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자기 존재를 키우는 방법은 무엇일까요? 주님 안에 머무르면서 그 안에서 성장하는 것입니다. 가만히 있으면 저절로 성장할 수 없습니다. 성장하기 위해 영양소가 될 수 있는 것들을 먹어야 합니다. 바로 주님의 말씀을 먹으면서 그 말씀을 실천하면서 살 때 우리는 진정으로 성장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성장한 사람만이 그 크신 주님을 제대로 볼 수 있습니다. 그 안에서 큰 기쁨을 누릴 수가 있게 됩니다.
이런 이유로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내 사랑 안에 머물러라.”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말씀을 하신 이유를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고 또 너희 기쁨이 충만하게 하려는 것이다.”라고 하십니다. 다 우리를 위한 것입니다. 우리가 성장하기를 바라는 주님의 뜻을 잊지 않으면서, 나의 존재가 주님 안에서 성장할 수 있도록 온 힘을 다 기울여야 합니다.
주님 안에서 주님의 말씀을 먹고 자라는 우리는 영적으로 튼튼해집니다. 어떤 순간에서도 흔들리지 않으면서 큰 기쁨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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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내 사랑 안에 머물러라>
무슨 일을 하든 억지로 마지못해 의무감으로 하면 기쁨을 갖지 못합니다. 그러나 똑같은 일을 하면서도 자발적으로 하면 보람과 기쁨이 큽니다. 마찬가지로 사랑의 계명을 지키는 것을 명령이나 의무에 의해 한다면 진정한 사랑을 한다고 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기쁨이 없습니다. 그러나 계명을 내리는 분의 뜻을 알기 위해 또 그분과 하나가 되기 위해 지킨다면 그 의미가 풍요로워집니다. 사실 진정한 사랑을 한다는 것은 그만한 사랑을 받은 사람이 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의 사랑을 받은 것을 인식하는 사람이 많이 사랑할 수 있고, 하느님의 사랑을 받았다는 것을 생각하지 못하고, 실제적으로도 이웃의 사랑을 받지 못한 사람은 자기를 먼저 생각하는 부족한 사랑을 하게 됩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미 받은 사랑에 감사하고 또 많이 사랑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너희는 내 사랑 안에 머물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무조건 ‘머물러라’고 강요하는 것이 아닙니다. 먼저 그들을 위한 당신의 사랑이 선행되었습니다. 예수님은 먼저 아버지께서 당신을 사랑하신 것과 같은 사랑으로 제자들을 사랑하셨습니다. 끝까지, 목숨을 내놓기까지 사랑하셨습니다. 아버지께 받은 사랑은 제자들을 위한 사랑의 기초입니다. 아버지의 사랑을 아들 예수님께서 받으셨고 예수님의 사랑을 제자들이 받았습니다. 이제 제자들은 제자들 서로 간에 사랑을 하는 것에 머물지 않고 이웃 사람에게로 사랑의 손길을 펴게 되었습니다. 그리해서 그것을 보고 사람들이 그들이 예수님의 제자임을 확실히 알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모든 사람이 그것을 보고 너희가 내 제자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요한13,35)
우리 옛 속담에 “부모가 온 효자가 되어야 자식이 반 효자 된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자식은 부모가 하는 것을 보고 따라 하게 된다는 의미입니다. 하느님과 예수님, 그리고 제자들은 내리사랑 안에 머물렀습니다. 우리도 같은 사랑을 해야 합니다. “아버지의 품 안에는 아홉 자식이 있을 곳이 있지만, 아홉 자식의 어느 집에도 아버지가 있을 곳은 없다.” 는 격언이 마음을 아프게 하는 시대입니다.
예수님께서 사랑 안에 머물라고 당부하는 것은 ‘당신의 기쁨을 제자들에게 전해주고 그 기쁨이 충만하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그 기쁨은 주님의 계명을 지키는 사람만이 체험할 수 있었습니다. 오늘 우리도 계명을 지키는 것에서 충만한 기쁨을 얻게 될 것입니다. 혹 계명을 억지로 지키는 사람은 헛고생만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으로 계명을 지키십시오. “마음속 깊이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하느님도 그를 아십니다. 하느님의 사랑을 받을 채비가 갖추어져 있는 만큼 그는 하느님을 사랑합니다.”(디아도쿠스주교)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이웃을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누군가를 사랑하면 사랑할수록 더 사랑받는 존재가 됩니다.”(작은 거인들에서) 망설이지 말고 사랑을 위한 사랑을 함으로써 주님의 계명을 기쁘게 지키시길 바랍니다. ‘말로나 혀가 아니라 행동으로 진심으로 사랑합시다. 사랑에는 두려움이 없으며 완전한 사랑은 두려움을 몰아냅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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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사랑>
요한 15,9-11 (나는 참포도나무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다. 너희는 내 사랑 안에 머물러라. 내가 내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분의 사랑 안에 머무르는 것처럼,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머무를 것이다. 내가 너희에게 이 말을 한 이유는,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고 또 너희 기쁨이 충만하게 하려는 것이다.”
<사랑>
“너희는 내 사랑 안에 머물러라.”(요한 15,9)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머무를 것이다.”(요한 15,10)
사랑
받아요
그러하니
사랑
주어요
그리하여
사랑
되어요
그러도록
사랑
주어요
그럼으로
사랑
받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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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주님의 ‘평생 사랑의 학인(學人)’인 우리들>
“내 사랑 안에 머물러라”
“당신의 영광을 백성에게, 그 기적을 만백성에게 두루 알리라.”(시편 96,3)
하느님 사랑의 영광, 사랑의 기적을 알리라는 시편 화답송 말씀입니다. 이미 읽었던 내용도 새롭게 마음에 와 닿을 수 있습니다. 교황님 홈페이지를 여는 순간 와닿은 말마디들입니다.
“인내는 그리스도의 사랑에 대한 확실한 증거를 제공한다.”
“교만은 겸손으로 싸워라.”
“모든 것은 믿음의 인내로 가능하다.”
이 모두의 뿌리에는 사랑이 있습니다. 사랑의 인내, 사랑의 겸손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옛 어른 다산의 말씀도 결국은 사랑으로 귀결됩니다.
“가까운 사이일수록 애틋하게 여기고, 익숙한 사이일수록 어려워하라.”
“수양의 근본은 효우(孝友;부모에 대한 효도와 형제에 대한 우애)이니, 여기에 본분을 다하지 않는다면, 아무리 학식이 높고 글재주가 좋더라도 흙담에 색칠하는 것이다. 아주 예전에 써놨던 사랑이란 두편의 시도 생각납니다.
1.“사랑은
하느님 안에서
제자리를 지켜내는
거리를 견뎌내는
고독의 능력이다
지켜냄과 견뎌냄의 고독중에
순화되는 사랑
깊어지는 사랑
하나되는 사랑이다”-1997.3
2.“나무는 넉넉한 품
언제나 거기 있어
날아 오는 새들 모두 안아 들이는
넉넉한 품
새들은
나무에 자취를 남기지 않고
나무는
새들에 집착하지 않는다
사랑은 이런 것”-1997.3.
서로의 거리를 존중하는 사랑, 배려하는 사랑, 집착없는 초연한 사랑, 자유롭게 하는 사랑, 생명을 주는 사랑을 강조한 것입니다. 주는 사랑, 나누는 사랑, 섬기는 사랑, 돌보는 사랑을 강조한 것입니다.
수도공동체 형제들의 신원을 저는 주님의 형제, 주님의 전사, 주님의 학인으로 세차원에 걸쳐 설명하곤 합니다. 더불어의 공동체 삶이기에 형제애, 전우애, 학우애의 균형과 조화의 공동체가 참 좋은 공동체라 정의하곤 합니다. 역시 뿌리에는 사랑이 있습니다.
사랑해서 사람입니다. 하느님의 모상대로 창조되었다는 것은 사랑이신 하느님을 닮았다는 것입니다. 사람의 본질은 허무도 무지도 탐욕도 아닌 사랑임을 깨닫습니다. 만민의 공통보편언어가 사랑입니다. 만병통치약이 사랑이요, 만병의 근원이 사랑결핍임을 깨닫습니다. 온갖 정신질환의 뿌리에는 사랑 결핍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사랑과 더불어 자존감 높은 사람이요 또렷한 신원의식입니다. 도대체 사랑을 대체할 수 있는 것은 세상에 아무것도 없습니다. 배는 밥으로 채울수 있어도 무한한 가슴은 사랑만으로 채울 수 있습니다.
그래서 사랑밖에 길이 없다, 사랑밖에 답이 없다 고백하는 것입니다. 우리 수도공동체 역시 ‘섬김의 학교’라 하는데 사랑의 학교라 할 수 있습니다. 평생 공부해도 졸업이 없는, 늘 공부해도 여전히 초보자처럼 느껴지는 사랑입니다. “사랑은 아무나 하나?” 사랑도 평생 보고 배워야 함을 깨닫습니다. 늘 해도 늘 부족한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그 오랜 세월 사랑을 주제로 강론해왔지만 늘 부끄러움을 느낍니다.
해도해도 끝이없는 사랑입니다. 사랑없는 인생이라면 참으로 무의미하고 허무한 삶일 것입니다. 사랑해서 사람이요 사랑은 모두라할 수 있습니다. 사랑하라 선물로 주어진 인생이요, 마지막 죽음을 앞두고도 여전히 목마른, 배고픈, 못다한 사랑일 것입니다.
오늘 강론 주제도 사랑입니다. 어제는 “너희는 내 안에 머물러라” 였는데, 오늘은 사랑이 더해져 “너희는 내 사랑 안에 머물러라” 더욱 분명해졌습니다. 순식간에 읽혀지는 오늘 복음 전문입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다. 너희는 내 사랑 안에 머물러라.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그분의 사랑 안에 머무르는 것처럼,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머무를 것이다. 내가 너희에게 이 말을 하는 이유는,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고 또 너희 기쁨이 충만하게 하려는 것이다.”
아빌라의 성녀 데레사의 “슬픈 성인은 불쌍한 성인이다”라는 말마디에 공감합니다. 사랑도 배워야 함을 봅니다. 사랑에도 기준이, 모범이 있습니다. 아버지께서 사랑하신 것처럼이 예수님의 사랑법입니다. 사랑이신 하느님은 예수님의 롤모데입니다. 마찬가지 우리도 예수님으로부터 예수님의 계명을, 사랑법을 배워야 합니다. 평생 아버지께 순종의 사랑을 다한 예수님은 우리의 롤모델입니다.
이런 사랑의 평생 수행과 더불어 비로소 주님 사랑 안에 머무르는 삶이, 날로 예수님을 닮아가는 삶이 가능하겠고, 이것이 우리 인생의 유일한 목표일 것입니다. 바로 이런 사랑의 계명을 지키는 데 원천이 주님의 사랑입니다. 참으로 마르지 않는, 끊임없이 샛솟는 “사랑의 샘”인 주님과 하나로 일치되어 있을 때 비로소 지치지 않는 사랑의 수행일 것입니다.
바로 이런 사랑의 모범이, 믿음의 모범이, 오늘 기념미사를 봉헌하는 알렉산드리아 성 아타나시오 주교 학자입니다. 정말 백절불굴의 믿음의 투사, 사랑의 투사, 성 아타나니오 주교 학자입니다. 아리우스 이단에 대항하여 끝까지 정통교리와 교회를 지켰고 이런 와중에 다섯 번이나 유배와 죽을 고비를 넘기면서 그 옛날에 78세까지 장수하셨으니, 새삼 인명은 재천임을 깨닫습니다. 알렉산드리아 교회 신자들에게도 참으로 사랑받았던 목자였습니다.
성 대 바실리오,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 성 나지안주스의 그레고리오와 함께 동방 4대 교부에 속한 분이며 당신 수도승들의 교과서 같던 “안토니오의 생애”를 저술한 분입니다. 사막 유배중 안토니오와 빠코미오에게 많은 영향을 받았던 참 각별한 성인입니다. 역시 이런 배절불굴의 신앙에 뿌리에는 하느님께 대한 사랑, 하느님 백성들에 대한 목자적 사랑이 자리하고 있음을 봅니다. 아타나시오를 비롯한 교회 하늘에 무수히 각양각색으로 영롱한 빛을 발하는 별같은 성인들은 바로 우리 삶의 길잡이가 됨을 깨닫습니다. 문득 떠오른 민들레꽃 시입니다.
“어! 땅도 하늘이네
구원은 바로 앞에 있네
뒤뜰 마당 가득 떠오른 샛노란 별무리
민들레꽃들!
땅에서도 하늘의 별처럼 살 수 있겠네”-2001.4.18.
지금도 눈에 선한 옛 수도원 본원 건물 소박한 한옥 뒤뜰 마당에 눈부시게 피어난 민들레꽃들을 보며 쓸때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합니다. 땅에서도 하늘의 별처럼 살았던 사랑의 성인들이요 우리 또한 그러합니다.
사랑은 분별의 잣대입니다. 오늘 제1독서 사도행전의 베드로와 야고보 사도가 그 모범입니다. 예루살렘 교회의 두 인물이 누구입니까? 예수님의 직제자가 아닙니까? 예수님의 사랑을 보고 배웠기에 이런 사랑에 의한 지혜로운 분별일 것입니다. 베드로의 감동적인 고백입니다.
“사람의 마음을 아시는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하신 것처럼 그들에게도 성령을 주시어 인정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믿음으로 그들의 마음을 정화하시어, 우리와 그들 사이에 아무런 차별도 두지 않으셨습니다. 그런데 지금 여러분은 왜 우리 조상들도 우리도 감당할 없던 멍에를 형제들의 목에 씌워 하느님을 시험하시려는 것입니까? 우리는 그들과 마찬가지로 우리도 주 예수님의 은총으로 구원을 받는다고 믿습니다.”
역시 명불허전, 그 스승 예수님이 그 수제자 베드로 답습니다. 하느님 사랑과 목자적 사랑이 하나된 베드로의 고백에, 다소 베드로보다 후퇴한 느낌이지만, 야고보가 역시 분별의 지혜로 율법의 요구를 최소화하여 결론을 내려줌으로 예수님의 제자이자 사도로서 참 어른의 진면목을 보여줍니다. 날마다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예수님을 닮아가는 사랑의 여정에 항구할 수 있도록 결정적 도움을 주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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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회(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잘 익은 벼로, 잘 익은 밥을!>
아시다시피 초대교회는 몇 번 위기를 맞았습니다. -사도행전 6장에서 음식을 분배하며 차별 문제가 발생했을 때 -11장에서 베드로가 할례받은 사람들과 음식을 먹은 것 때문에
유대인들이 들고일어났을 때 -15장에서 유대인들이 안티오키아까지 와서 할례받지 않으면 구원받을 수 없다고 가르쳐 바오로 바르나바와 갈등이 생겼을 때입니다.
이 세 경우 모두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에 유대 중심적인 차별 때문에 그리스도교 공동체가 분열의 위기에 처했던 것인데 특히 어제와 오늘 유대인들의 그리스도교와 이방인들의 그리스도교로 갈라설 수도 있는 위기 상황을 앞두고 초대교회는 예루살렘 회의를 개최하고 현명히 대처합니다.
요즘 우리가 시노달리따스(Synodalitas)라는 말을 많이 하는데 예루살렘 회의가 바로 이 시노달리따스의 원형인 셈이기에 이참에 저는 오늘 우리 공동체들이 어떻게 합의와 일치를 이루어갈 것인가 성찰하고 싶습니다.
그런데 합의와 일치를 이루어가는 성숙한 공동체의 여러 요소가 있겠지만 ‘겸손과 자기를 내려놓는 것’ 이것을 저는 첫째로 꼽고 싶습니다.
어렸을 때 선생님이나 어른들이 자주 해주시던 말씀이 있습니다. 벼는 익을수록 머리를 숙인다!
이 말씀을 어렸을 때는 명심하며 살았는데 한동안 잊고 살았습니다. 한동안 많이 교만했다는 반증입니다.
요즘 합의와 일치를 잘 이루지 못하는 이유가 바로 이 교만 때문입니다. 교만 때문에 오래 숙고하지 않고 설익은 자기주장을 내놓기 때문입니다.
숙고(熟考)와 성숙(成熟)은 같이 가는 것이고 숙고할 때 성숙하게 합의와 일치를 이루어낼 수 있습니다. 여기서 ‘숙(熟)’이라는 한자가 ‘익다’라는 우리말에 해당하지요.
겸손한 사람은 자기주장을 펴기 전에 숙고를 많이 하고, 거기서 내려놓을 것과 내놓을 것을 가릴 것입니다. 자기는 내려놓고 공동선을 위한 것은 내놓을 겁니다.
두 번째로 제가 꼽고 싶은 것은 사랑과 이웃 존중입니다. 밥은 익어야 맛있고 그러기 위해서 익을 때까지 솥뚜껑을 열지 말아야 하고 뜸을 한참 들여야 합니다.
숙고에 숙고를 거듭한 나의 익은 의견을 겸손하게 제의한 다음 그것을 받아들일 이웃의 시간을 존중하며 한참 뜸 들이는 것입니다.
제의하는 나에게 숙고의 시간이 필요했던 것처럼 받아들일 그에게도 숙고의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을 존중하는 것입니다.
줄탁동시同時 또는 줄탁동기라는 말이 있습니다. 줄(啐)과 탁(啄)이 동시에 이루어져야 한다는 말이고, 그것이 동시에 이루어지지 않으면 깨진다는 말이지요.
이것은 새끼가 알을 깨고 나올 때 새끼가 안에서 껍질을 톡톡 쫄 때까지 기다려야지 그 이전에 어미 닭이 성급하게 껍질을 깨버리면 새끼는 죽을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인간의 경우 미숙아로 나오면 인큐베이터에서 한동안 성숙을 돕지요.
아무튼 이때 새끼가 안에서 쪼는 것을 줄(啐)이라고 하고 밖에서 어미 닭이 쪼는 것을 탁(啄)이라고 한다고 하는데 그의 시간이 될 때까지 기다리지 않고 나의 제의에 대한 그의 동의를 강요하지 않는 것입니다.
함부로 날 선 공격을 하지 않음은 물론 숙고 되지 않은 말도 하지 않아야 하고, 공동선을 위한 겸손한 나의 말이 받아들여질 때까지 이웃의 시간을 기다리며 이웃의 의견을 존중할 때 공동체의 합의와 일치는 이루어짐을 깊이 생각하는 오늘 우리입니다.
잘 익은 벼로 잘 익은 밥을 지어야지요. 덜 익은 벼로 설익은 밥을 짓진 맙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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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다. 너희는 내 사랑 안에 머물러라."(요한15,9)
<하느님의 사랑!>
오늘 복음(요한15,9-11)도 '참포도나무와 가지의 비유'입니다. '예수님 사랑 안에 머물고, 그 머뭄의 구체적인 행위가 예수님의 계명을 지키는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기쁨이 우리 안에 있게 되고, 우리의 기쁨이 충만하게 된다.'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사랑하신 하느님 아버지의 사랑을 먼저 언급하십니다. 그리고 하느님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분의 사랑 안에 머무르신 당신을 언급하십니다. 그러니 우리도 예수님의 계명을 지켜 예수님 사랑 안에 머물러 있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너희가 나를 뽑은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뽑아 세웠다."(요한15,16)
하느님이신 예수님께서 우리를 뽑으셨고 선택하셨습니다. 우리는 그렇게 뽑힌 사람들, 선택된 소중한 사람들입니다. 주님 부르심에 "예!" 라고 응답한 사람들입니다. 이 응답은 우리도 예수님의 계명을 지켜 그분 사랑 안에 머무르면서 기쁘게 살겠다는 응답입니다.
삼위일체이신 하느님과 영원한 생명을 희망하면서 살아가고 있는 모든 그리스도인들, 곧 성직자들과 수도자들과 신자들은 예수님을 통해서 드러난 하느님의 사랑, 곧 예수님의 육화(탄생)와 땀(공생활)과 수난과 죽음을 통해서 드러난 하느님의 사랑을 따라가는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을 통해서 드러난 사랑, 이 사랑 때문에, 이 사랑이 너무 좋아서, 이 사랑을 살고 싶고, 삶으로 증거하고 싶어서, 이 길을 걸어가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것도 기쁘게 그리고 겸손하게.
성직자는 성직자로서,
수도자는 수도자로서,
신자는 신자로서,
각자의 자리(성소)에서 예수님의 계명을 삶으로 잘 따라가고 있는지, 그래서 예수님 사랑 안에 머물러 있고, 기쁨 안에 머물러 있는지 성찰해 보는 복된 하루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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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youtu.be/GAHeFp9PF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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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머무를 것이다."(요한 15, 10)
계명이란
다름 아닌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하느님의
가장 좋은
생명입니다.
계명은
우리를 살리는
생명을
지향합니다.
계명을 지켜야
하느님 사랑 안에
우리가
머무를 수 있습니다.
계명은
사랑의
생활입니다.
그래서
계명을 지키는
실천은
사랑의 참된
완성입니다.
생활태도와
실행의 자세는
사랑의 기본
발동입니다.
사랑이
오래 가지
못하는 것은
계명을 지키지
않기 때문입니다.
계명으로
우리는
고귀한 존재임을
깨닫게 됩니다.
더 나은
삶을 위해
필요한 것이
계명입니다.
계명을
지킨다는 것은
우리가
내외적(內外的)으로
하느님께
정직하고 진실한
존재로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삶의 기본에
충실할 때
사랑의 가치를
지키고
실현할 수
있습니다.
계율을 지키는
사랑의 삶은
지켜야 할
소중한 것이
무엇인지를
알게합니다.
그것은
사랑의 관계이며
사랑의 가치입니다.
지키고 머물러야
우리의 악습과
악행을 태워버리는
회개의 삶으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회개의 삶은
서로가 서로에게
좋은 영향력을
주는 원만한
인격을
갖추게 합니다.
가장 좋으신
하느님
사랑 안에
머무르는
가장 좋은 날
되십시오.
지키고 머물러야
익어가는 사랑의
참된 진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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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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