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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예지 계간 [인간과 문학], 2020년 여름호
소설 '옹이가 있던 자리'를 발표했습니다.
<단편소설> 옹이가 있던 자리
이 관 순
잘 마른 가을 햇살이 집안의 깊은 정적 속으로 소리 없이 빨려들고 있었다. 산사 같은 적막감을 깔고 텅 빈 집안은 숨을 죽이고 있다. 한 시간이 넘도록 이렇다 할 기척도 없다. 이따금 자영의 신문 넘기는 소리가 사각거릴 뿐이다. ‘을숙도, 겨울철새가 안 보인다. 하구언 공사로 생태계 변화, 독수리 2년째 잠적, 민물 도요새도 묘연…’ 평소 같으면 관심을 부를만한 계절 기사였지만, 집중력을 잃고 중간 제목만을 겅중겅중 읽고 신문마저 덮었다.
돌아온 아버지…. 가출 10년 만에 명분 없는 행적만을 흩날리다 둥지라고 찾아 든 아버지. 자영은 끝내 부딪치고 만 아버지의 철늦은 귀가를 놓고 산이 무너지는 암담함 속으로 침몰돼 버렸고 그로부터 빚어지는 진통은 그녀에 있어선 생태변화 속의 한 마리 새처럼 처절한 자기 구원에 몸부림쳐야했다.
아버지의 귀가가 한 순간의 아픔으로 치유될 수만 있었다면 자영은 차라리 눈을 감았을는지도 몰랐다. 그러나 10년 세월이 남긴 그 엄청난 공백 앞에서 그녀는 주저앉고 만 것이다. 그 엄청난 아버지의 공백을 어떻게 건너뛰고 이제 와 함께 둥지를 틀며 살 수 있다는 것일까? 파괴된 생태계에서 생존이란 막다른 골목으로 쫓겨 변신할 수밖에 없었던 자영은 그 천공 같은 공백을 혈육이란 자만으로 재고 건너뛴다는데 스스로 용기를 잃었다.
"변화된 우리의 둥지엔 아버지의 자리는 없어져 버렸어요 이젠."
자영은 냉정하게 선언했었다. 장년의 한 남자로서 가정을 이끌어야 할 초로의 나이에, 철없이 벗어 던진 아이의 고무신처럼 훌쩍 가정을 등진 그 출발에서부터 자영의 가슴엔 간극이 생겨났다. 벌어진 틈으로 골이 패여 물이 흘러내렸다. 점점 굵어진 물줄기는 끝내 건널 수 없는 물굽이를 이루었고 자영은 그 거센 물결의 범람을 하루에도 수없이 마주봐 온 것이다. 그래서 도하란 애당초 불가능한 것으로 생각했다.
"강을 두고 마주설 순 있겠죠. 하지만 하늘의 별자리처럼 우린 그렇게 굳어져 버렸어요."
그렇게 수없이 깨물었던 자영의 신음은 어수선한 소문만 날려 보내며 미움의 강을 넓혔던 아버지가 돌아오면서 삼켜져 버렸다. 아버지의 귀가 앞에 보여준 가족들의 대응은 굳어진 표정과 숨소리마저 저미는 현기를 이고 오빠는 뜰에서 올케언니는 부엌에서 마치 휘어진 소나무 모습으로 슬프게 서 있었다. 천근의 무게로 닫힌 입, 빛바랜 얼굴, 어깨의 힘이 쏙 빠지는 것은 대청 위의 자영에게도 다를 바가 없었다. 다섯 살배기 조카 훈만이 어른들의 바짓가랑이 사이를 기웃거릴 뿐이었다. 자영은 숨 막히는 이 혼란의 소용돌이를 피해 외삼촌댁으로 자리를 비운 어머니가 차라리 다행스럽다고 생각했다.
그렇다고 그가 아버지란 권리 주장을 앞세워 당당히 찾아 든 것도, 또 남들처럼 부끄러운 얼굴을 떨군채 대문을 들어선 것도 아니었다. 마치 장기여행에서 돌아온 사람같이, 몹시 피곤한 얼굴로 그저 쉬고 싶을 뿐이라는 풀린 눈빛만을 흘리며 고모와 함께 돌아왔다.
"몸이 많이 상하셨다..... 아버지는 없고 빈 그림자만 돌아오신 것 같아...."
첫날 밤 오빠는 괴로운 듯 소주잔을 홀짝이며 넋두리를 했다. 올케 언니는 이마에 손을 괸 채 망연한 눈빛을 하고는 길게 숨을 쏟았다. 살집이란 찾아볼 수 없는 그래서 키만 더 껑충한 아버지의 그림자가 자영의 망막을 어지럽혔다.
"자영아, 이게 다 우리의 운명이려니 생각하고 내 가슴 내가 삭이며 살 밖에…. 어렵겠지. 하지만 우리가 부딪친 현실인 걸 어쩌겠니?"
"그럼 그동안 우린 가상현실을 살았나요?"
자영은 오빠의 말에 심한 이질감과 함께 구토를 느꼈다. 남자란 똑같은 속성. 같은 속물들이 구나…. 현실이란 너울을 쓰고 쉽게 접근하고 타협하는 저 동물 근성들. 애써 냉정해 지려는 오빠를 바라보면서 자영은 숨을 깊이 내쉬었다. 아버지의 귀가설이 나돌면서부터 알게 모르게 오빠는 동요되어 왔음을 자영은 알고 있었다.
오빠의 그 용기에 대해서는 비난하지 않겠어. 하지만 난 자신 없어. 우선은 나를 허물어뜨릴 만한 힘이 없어.
자신의 목소리가 낮게 떨리고 있음을 느꼈다. 그 날 이후 자영은 스스로가 회의한 대로 싸늘하게 자신의 체온을 식혀갔다. 그러면서 그녀는 어쩌면 그것은 아버지가 상대가 아닌 또 다른 강을 사이에 둔 자신과의 대치라는 생각으로 절망하기도 했다.
"전혀 식사를 못하시네, 식사 때만 되면 괴로워요 정말."
아버지의 귀가 이틀 만에 아버지 방에서 물린 저녁상을 들고 나온 올케가 벌써부터 힘들어하는 모습이었다. 국그릇만 약간 준 듯한 밥상을 내려다보던 오빠는 부엌을 나오며 담뱃불만 쩍쩍 빨아댔다. 그 때도 자영은 의식적으로 냉담해 보였다.
사흘째 밤낮 없이 주어진 공간만을 죽은 듯 지키는 아버지…. 생리적인 출입 외에는 철저하게 자신을 봉쇄하고 빗장을 질러놓고 있는 것이다. 급기야 외삼촌댁에 머물던 어머니가 나흘 만에 오빠를 앞세워 집으로 오던 날 자영은 가슴에 검을 대는 아픔을 느꼈다. 어머니의 저린 저 가슴을 어떻게 위안하고 보상해 드리나. 그러나 뜻밖에도 어머니는 담대하고 견고했다. 혼란을 예상했던 집안은 어머니의 담백한 감정과 단아한 자세로 아스라한 순간들이 위기처럼 모면되었다.
더욱 놀라운 일은 그 날 저녁이었다. 밥상을 물리고 저녁걷이가 끝날 즈음 그녀는 치맛자락을 얌전히 끌며 스스로 아버지 방으로 향했다. 10년 별리의 부부 해후를 목격하는 순간이었다. 모두가 피부의 잔털까지 쭈뼛 솟는 서늘함을 저마다 머금었다. 그러나 아버지의 방에서는 이렇다 할 말소리가 새 나오질 않는 것이었다. 자영은 감전된 순간처럼 몸이 굳어졌고 새가슴이 되었다.
싸아- 가을바람이 울타리에 치솟은 몇 그루의 후박나무 가지에서 부서지고 있었다. 높게 내 걸린 잎새들이 바람에 서걱대며 우윳빛 달빛을 빗질했다. 5분쯤 지났을까. 후박 잎새들이 몸을 비비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흔들릴 때 아버지의 방 미닫이가 열리며 어머니가 나왔다. 그녀를 바라보는 자식들의 눈빛은 차라리 두려움이었다. 그런데도 어머니는 달빛만큼이나 낮고 단아한 모습 그대로 자식들 앞에 섰다.
"다 들 좀 앉거라." 무슨 선언이라도 하자는 걸까. 자식들은 가슴을 여미며 어머니 곁으로 옹기종기 앉았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상기된 올케 언니가 자영의 손을 잡았다. 어머니는 잠시 호흡을 조정하는 것 같았다. 자영은 순간 어머니의 입가에 잠자리 날갯짓 같이 이는 미세한 경련을 보았다.
"내 눈치보고 살지들 말아라. 다 장성했으니까 언행을 맞추려고 할 필요도 없고…. 생활이 이 이상 어수선해져선 안 되겠기에 말이다."
어쩌면 저렇게도 자신을 용케 지탱해내시는 걸까. 해 꺼진 여름날 저녁 마당에 뿌리는 물처럼 어머니의 낮고 조용한 목소리는 정적을 깔며 환청처럼 귓가에서 흔들렸다. 감정이란 송두리째 여과해 낸 듯한 음성. 깊은 저수의 수면 같은 저 가라앉은 표정…. 그 앞에서 아버지는 어떠했을까. 자영은 어머니의 그러한 모습을 떠올리며 지난 10년을 이끌어온 어머니의 긴 치맛자락을 보는 것 같았다.
"어차피 넘어야 할 산이라면 내친걸음에 넘고, 아니면 담담하게 선 긋고 살면 그만이다. 아버지에게도 너희들한테 더 이상 부담주지 않는 것으로 얘기했다…. 나 이모네서 자고 오마."
어차피를 강조하는 어머니. 뛰어 넘을 사람은 누구이고 선을 그을 사람은 또 누군가. 자식들은 물에서 건져 낸 순한 양처럼 머리 숙인 채 듣는 입장에만 서 있었다. 군살 없는 말마디를 짧게 남긴 어머니는 뜰에 흔들리는 달빛처럼 치맛자락을 끌며 잠자리를 위해 이모네로 향했다.
질식할 것 같은 하루가 위태롭게 이어져 간다. 의식과 사고의 혼돈도 문제지만 그 틈바구니에서 용암처럼 치솟는 의식의 분란은 그녀에겐 가장 큰 고통이었다. 눈을 감고 이를 잠재우려 했지만 눈을 슴벅일 때마다 무너져 내리는 눈사태의 숨 가쁜 비명이 그녀의 가슴을 차고 달아날 뿐이다. 차라리 아버지가 회한에 절은 얼굴로 집안의 공백들을 살피고 자신의 자리를 챙기려 했다면 오히려 진통은 짧을 수도 있었을 텐데.
고생이 많았겠구나. 결혼식에조차 얼굴을 못 내밀고 이제와 며느리 보기가 민망스럽다. 아니면 덥석 어머니의 손을 잡고 석연치 않은 감정을 들썩이며 용서와 재출발을 다짐하는 쪽이었다면 차라리 현실적이었을 것이다. 그런데도 아버지는 철저하게 침묵했고 자신을 폐쇄한 채 이레째를 맞고 있었다.
집안에 돌던 윤기는 급격히 사그라졌다. 모두들 기름기 가신 얼굴로 숨을 죽였고 곁눈질만 키웠다. 그러한 집안이 어머니가 귀가하면서부터 다소 생기를 찾을 수 있었다. 도란도란 말문이 열리고 숨통이 트이는 듯했다. 그럴 때마다 가족들은 어머니가 이 집안을 버팅기고 있는 유일한 힘이란 것을 더 강하게 느꼈다. 어머니가 한복 가게에서 늦게라도 돌아오는 날이면 식구들은 목을 빼고 대문을 힐끔거리며 기다렸다. 그러는 가운데서도 여전히 아버지와 자식들 간의 대화 채널은 닫힌 그대로였다. 그러나 가끔씩 식사를 챙기는 올케 언니와 눈치껏 할아버지 방을 기웃대는 훈의 입을 모아보면 심상찮은 기류가 흐르고 있음을 자영은 감지했다.
확실한 것은 아버지는 늘 자리 깔고 누워 있다는 것이며, 내용을 알 수 없는 약 봉지가 휴지통에 쌓이고 있다는 점. 간간이 흘러나오는 기침 소리와 신음… 달밤에 빈 들판을 향해 컹컹 짖는 황구의 울음같이 휑하고 쓸쓸했다.
"웬일이냐 일요일에 집에 다 있겠다니? 집에서 속 끓이지 말구 바람이나 쐬지."
강의가 있고 없던 어두워야 집에 오던 자영이가 휴일에 그것도 혼자 집에 있겠다는데 어머니는 의아한 눈빛으로 외출하던 발길을 멈추었다.
"집에 있겠어요. 염려 마시고 다녀와요 엄마."
자영은 익히 알고 있었다. 오빠 내외는 이미 화장품 대리점으로 훈과 함께 나간 직후였기에 어머니까지 외출하면 집에는 아버지와 단둘이 남는다는 것을.
"그래 알아서 하렴." 어머니는 잠시 아버지의 방을 힐끔 바라보곤 잔잔한 걸음으로 나갔고 자영은 앉은자리에서 대문 닫히는 소릴 들었다. 갑자기 집안이 깊은 정적으로 함몰되는 듯한 느낌이었다. 점점 각질화 되어 가는 감정, 편협과 외곬으로 치닫는 미움…. 계속되는 의식의 분란 속에서 자영은 흡사 자신의 피를 말리는 행위에만 골똘해 하는 건 아닌지. 건영은 동생을 향해 자학 행위라고 설득을 했지만 어느 것도 그녀의 조갈을 채워줄 수는 없었다.
대청 깊숙이 들었던 햇살이 조금씩 빠져 달아나고 있었다. 잘 마른 바람이 그녀의 볼을 비비고 지나갔다. 괴괴한 정적이 짙게 눌린 울안에 또 다른 바람줄기가 기웃거릴 즈음 그녀의 귓가에 방문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자영은 반사적으로 눈을 감았다. 방안으로 몸을 숨길 기력도 챙기지 못할 만큼 오금이 저려 단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못했다. 신 끄는 소리가 점차 가깝게 들려왔다. 감은 두 눈의 망막 위에 검은 그림자가 얹힌 것은 그 순간이었다.
"혼잔 게로구나. 나 좀 나간다."
귀엣말처럼 나직한 목소리…. 순간 자영의 숨결이 끊겼고 잠시 후 그녀가 신음 같은 숨을 잘게 쏟을 때 대문 밀치는 소리가 들렸다. 눈을 뜨자 망막에 걸친 잔영도 걷혔다. 생체 해부에서 발견된 놀라움처럼 자영의 가슴은 박동하기 시작했다. 이레 만에 드디어 자리를 털고 일어난 아버지…. 자영은 변화의 징후 같은 예감을 떠올리며 귓가에 솔아 붙은 귀가 후 두 번째인 아버지의 음성을 생각했다.
"장성했구나." 자영의 꼿꼿한 시선 위에 꽃잎처럼 떨어진 귀가 첫날의 아버지 목소리는 차돌같이 단단하고 윤기 있던 예전의 것이 아니었다. 갈라지는 듯한 마른 쇳소리…. 그런데 지금의 음성은 더욱 사그라져 모래알 서걱대는 바람소리를 냈다.
자영은 몸을 벌떡 일으켰다. 강한 자력에 끌리듯 뜰로 내려섰고 다시금 가을 햇살이 반쯤 비켜 가는 미닫이 문 앞에 자영은 섰다. 폐가의 입구처럼 접근을 기피해 온 방. 지하실 창고에 쌓였던 책들과 아버지의 편린들로 들어 차 있을 그의 방 앞에서 자영은 심장의 박동을 느끼며 그렇게 유혹 받아온 미닫이문을 열었다. 찌들고 쉰 듯한 살내가 몰려나왔다. 순간 방안에서는 그림자 같은 눅눅한 잔영들이 벽으로 달라붙었다. 얌전히 개있는 이부자리와 그 위의 베개 하나, 오빠에 의해 정리되어진 책들, 책상으로 즐겨 썼던 아버지의 빛바랜 평상도 가로 놓여 있었다. 자영의 눈엔 어느 것 하나 낯설진 않았지만 체온 같은 것은 느끼지 못했다.
"오빠 지하실 책들은 왜 꺼내 올리곤 대체 왜 이래?"
지난 봄 오빠가 캐 묵은 먼지를 털어 내며 아버지의 용품을 풀어 방을 정리하려 할 때 자영은 그렁그렁한 눈으로 오빠를 바라보았다.
"집안 좀 정리해 놓으려구."
건영은 대수롭잖게 응했지만 그 때 자영은 오빠가 이제 와 새삼스럽게 아버지의 때 묻은 지문을 살려내려고 하는지 그 저의가 궁금했다.
"이제 좀 여유를 갖고 살자. 우린 너무 과거란 것에 옹색하게 찌들려 왔어."
어쩌면 저렇게 닮았을까. 자영은 가슴 한구석이 주저앉는 절망감과 함께 양손에 책을 들어 거풍작업을 하는 오빠의 느긋한 미소를 보며 낯익은 모습을 떠올렸다. 자영은 더 이상 반대할 기력도 무디어졌다. 부정에 대한 오빠의 향수 같은 것을 발견했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더구나 글쎄다…. 쟤가 왜 저러는 지 그 속을 알 수가 없구나. 하는 어머니의 소극적인 간섭에서도 자영의 경직된 입술은 풀려갔다.
방이 정돈된 후 이따금 그 방을 걸레질하는 듯한 그림자 같은 기척을 눈치 챘지만 그 때마다 자영은 눈을 감았다. 그 때부터 은밀하게 아버지의 귀가는 추진되어진 것이 분명했다. 자영은 전화벨 소리에 열었던 미닫이문을 닫고 돌아섰다. 전화를 받자 올케의 목소리가 낮게 들렸다.
"고모, 지금 뭘 하세요?"
"누가 말인가요? 직접 통화해 보실래요?"
고모, 왜 이러셔-. 언니의 목청이 빗방울처럼 후두둑 소리를 내며 지나갔다. 지금 외출 중이라고 자영이 짧게 말했다. 외출하셨다고요? 숨찬 목소리로 되받는 올케의 쫑긋해진 눈망울을 떠올리며 자영은 수화기를 놓았다. 지칭이 오갈 때마다 이질감을 때로는 크게 작게 느끼게 한 아버지란 지칭. 그때마다 미움인지 애정인지 헤아릴 수 없는 감정의 부스러기 앞에 자영은 현기를 타곤 했었다. 이번에도 자영은 가슴에서 발정 난 멧돼지같이 숨 가쁘게 달아나는 발자국 소리가 아련했다.
아버지는 부농이었던 할아버지 덕으로 열세 살 때부터 카메라를 만졌다고 했다. 그 시기에 카메라를 취미 삼았을 만큼 꽤나 유복한 환경에서 성장한 것이다. 천성이 감성적이고 자유분방한 그는 가정생활에서도 넘치는 사랑과 풍부한 정감으로 자녀를 키웠다.
"요 귀엽고 예쁜 칸나야. 이 세상에 우리 집처럼 행복한 둥지는 없단다."
그는 자영을 칸나로 불렀고 집을 늘 둥지로 표현하곤 했다. 자영은 커가면서 그러한 아버지를 무척이나 좋아했다. 스튜디오를 운영했던 아버지는 특별한 일이 없는 한 정확한 시간에 그들의 둥지로 돌아왔다. 어쩌다 술자리에 쫓겨 귀가가 늦은 밤이면 잠든 아이들의 볼을 비비며 아쉬워한 그였다.
"충무로란 곳이 원래 음험한 동네거든. 하지만 내가 이렇게 하고 나타나면 활기가 차오른단 말야."
충무로 토박이를 자긍으로 삼는 그가 술기운이라도 알싸하게 걸친 날이면 그 큰 키를 꾸부정히 꺾곤 어깨를 올려 방을 어슬렁거리는 것이었다. 그 때마다 두 남매는 깔깔대며 좋아했고 평소 말이 적고 차분한 어머니도 얼굴을 돌려 눈발 같은 웃음을 힐끗 날리는 것이다. 어머니가 흰 이를 내보일 때면 남매는 더욱 흥이 나 아버지 뒤를 쫓으며 흉을 내곤 했다.
사진하는 사람의 거개가 그렇듯 그는 여행을 즐겨했다. 그리고 가능한 한 가족들에게도 그 분위기를 권했다. 눈 쌓인 산곡이나 철 이른 바닷가…. 그는 한반도 구석구석을 신들린 사람같이 누볐다.
그만큼 다녔으면 좀은 지겹지도 않으세요? 언젠가 어머니는 사진 기재를 챙기는 아버지에게 좀은 난해한 표정을 지은 적이 있었다.
"당신은 모를걸. 그 곳에 터질 듯한 아름다움이 있다는 것을 말야."
싱긋 웃는 아버지의 미소도 고왔지만 노을같이 아름다운 그의 음색이 어린 자영에겐 달콤했다. 멋진 아버지. 중학생이 된 자영은 아버지의 그 같은 감성을 이슬처럼 빨며 남다른 감수성을 키웠었다. 까만 카메라 몸체를 그윽이 쓰다듬던 아버지가 조용히 일어나 어머니의 어깨를 그 큰손으로 잡을 때 자영은 영화의 한 장면을 보는 순간처럼 침을 꼴깍대며 자신도 모를 홍조를 볼에 피웠다.
"삼십여 년을 카메라와 더불어 살았지만 외로운 적은 없었어. 지루해 본 적도. 서둘러 일 끝내고 당신이 기다리는 둥지로 돌아올 거야."
긴 다리로 바람을 내어 어청어청 대문을 빠져나가는 아버지를 바라보던 어머니가 자영의 손을 살포시 쥐었다. 그 순간처럼 자영의 입안이 환해지던 감미로움은 없었다. 영원히 지울 수 없는 문신 같은 기억이었다. 그는 아내와 자식을 소재로 적지 않은 작품을 만들었다. 작품은 적당한 액자에 담겨 집안의 공간을 조명처럼 밝히곤 했다. 그러한 사진들이 하나 둘 공간에서 거두어지기 시작한 것은 자영이가 열다섯 되던 중2 때의 일이었다.
아버지는 뒤늦게 어머니 외에 한 여자를 사랑했다고 했다. 야릇한 소문이 낙엽처럼 흩날리더니 그 해 가을이 만조를 이룰 즈음 그는 마침 내 둥지를 차고 홀연히 집을 떠나고 말았다. 물론 이것은 가출이란 걸 상정해 놓고 연기처럼 피어난 추정이었다. 어디까지나 그랬을 것이라는 추측이었지 실체는 없었다. 그가 10년 후 귀가한 지금에도 이렇다 할 확증은 없었다.
어쨌든 아버지의 가출은 온상의 화초 같던 이들의 둥지를 한 순간에 소라껍질로 만들어 개펄에 내던졌다. 절망과 좌절이 해일처럼 숨 가쁘게 그들 가슴을 휩쓸었다. 사랑의 표본이었던 아버지, 생활 그 자체가 도덕적 규범이었던 아버지. 그래서 그들의 허망함과 한숨은 더욱 큰 컸다.
어머니는 그 가녀린 몸으로 생활전선에 뛰어들면서 극심한 실어증을 앓으셨고, 대학에 다니던 오빠의 성격이 자학적으로 기울었다. 집안이 암초에 걸릴 때마다 감수성이 예민했던 자영은 미움의 키를 높이며 단절과 폐쇄 속으로 자신을 길들여 갔다. 성장이란 굽이를 돌 때마다 때로는 부정이란 것에 연민을 갖기도 했지만 그녀는 모지락스럽게 싹이 오르지 못하도록 밟아버렸다.
10년이란 긴 세월의 길목 길목에서 그들은 눈발처럼 성기는 아버지의 소문을 들었다. 색깔도 진원지도 알 수 없는 선명치 못한 풍문이 일 년에 두어 번 유탄처럼 날아왔다. 처음 몇 년은 날아든 유탄에 심한 아픔과 조갈증을 보였지만 점차 자기 최면을 걸며 이를 빗겨서는 지혜를 터득했다.
오빠가 대학을 졸업할 때 특히 결혼식을 올릴 때 그들은 그 같은 최면에 자신을 잊으려고 무던히 노력했다. 죽은 나무 꽃피우기 같은 어머니의 심오한 희생으로 그들은 스스로 새로운 생활환경을 생성시켜 갔다. 오빠는 아들을 얻으면서 대를 이을 후사로서의 본능 같은 것에 눈뜨는 듯했고 올케언니는 주어진 틀을 체질화하려고 일찍부터 색채를 달리했었다. 이것은 놀라운 생태변화 속의 순응 같은 것이었다. 그런데도 유독 자영은 새장의 새처럼 그 공간에서 헤어나지 못했다.
지루하게 이어진 터널 속의 하루가 지나가고 있었다. 자갈밭에서 잃어버린 구슬 같은 자신을 찾아보고자 했던 휴일 하루는 덧없이 저물어 갔다. 동전의 양면처럼 자신의 얼굴만을 안타깝게 확인한 갈증의 시간외에는 득이 없었다. 서둘러 오겠다던 어머니는 밤이슬이 내릴 때야 돌아왔지만 의문의 첫 외출을 한 아버지는 자정이 되도록 연락이 없었다.
자영은 그날 밤도 매우 뒤숭숭한 꿈길을 쫓다가 이상한 기척에 눈을 떴다. 순간 머릿속을 스치는 야릇한 예감과 함께 조심스레 옆자리로 시선을 돌렸다. 창을 비켜 가는 달빛으로 그녀의 시야가 부옇게 살아나면서 자영은 숨을 멈췄다. 등을 돌려 누운 어머니가 울고 있다는 것을 직감하면서였다. 어머니의 어깨선이 불규칙하게 미동하다가 또 한 차례 무너지는 어머니의 탄식. 자영은 봐서는 안 될 것을 목격한 순간처럼 가슴이 진동했다.
엄마…. 불덩이 같은 뜨거움이 울컥 치밀어 올랐지만 이미 굳어진 그녀의 목줄을 흔들지는 못했다. 자영은 숨 쉬는 미라가 되어 누운 그대로 몸이 굳는 아득함을 느꼈다. 확인할 수 없는 고양이의 방뇨같이 아버지의 가출 이후 자영은 어머니의 눈물을 목도한 적이 없었다. 그것이 궁금해 때로는 살쾡이처럼 어머니의 뒤를 쫓아도 보았지만 궁금증만을 부풀린 채 돌아섰던 자영이었다.
무슨 일일까. 자영은 빛깔을 알 수 없는 불길한 예감이 섬광으로 스쳐갔다. 잠시 후 어머니는 살포시 일어나 조용히 방문을 열고 나가시는 것이었다. 자영은 그제야 차 오른 숨을 내쉬었다. 얼마 후 어머니는 가슴을 진정시키고 자리로 돌아왔지만 자영은 입이 굳어진 채 쉴 새 없이 지나치는 기차소리로 꼬박 밤을 밝혀야 했다.
가을 아침은 유난히도 신선했다. 드높게 열린 하늘에서 쏟아지는 뽀송한 햇살을 받으며 집안은 다시 꿈틀거렸다. 외관상으로는 아버지의 방이 비어 있는 것 외에는 달리 변화랄 것이 없었지만 자영은 세수하는 어머니의 어깨가 유난히 처지고 왜소하다는 생각을 했다.
더 이상 숨겨둘 일이 아니구나. 아침상을 거둔 직후 어머니는 자식들을 불러 앉혔다. 어머니의 얼굴은 서리 맞은 호박잎만큼이나 검게 숨죽여 있었다. 엄청난 봇물이 터져 나올 듯한 아스라함 속에서 자영은 몸을 웅크렸다. 어머니의 마른 입술이 파르르 떨리듯 열렸다.
"혹시나 했는데, 어제 대학병원서 판정이 났다. 암이 깊단다…."
선고 같은 어머니의 한마디에 오빠의 고개는 떨구어졌고 언니의 시선은 위로 향했다. 자영은 감았던 눈을 떴다. 어머니는 어느새 특유의 냉정한 얼굴을 되찾고 있었다.
"병원에선 수술할 때가 지났다고 하는 구나. 그보다 수술을 원치 않으셔."
결국 그랬었구나. 깡마른 아버지 모습이 연처럼 떠올랐다. 뼈대만 앙상한 그래서 마른 수수깡 같던 아버지의 영상이 그녀의 시야에서 서걱대며 바람을 잘게 일으켰다. 불쌍하신 어머니. 자영은 담대한 눈빛으로 어머니를 정면으로 바라보았다. 자영의 두 눈에는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구멍 난 고무풍선같이 그녀의 가슴은 순식간에 비어져 갔다. 그제야 자식들은 어저께 있었던 아버지와 어머니의 외출이 무관하지 않은 것임을 이해할 수 있었다. 시차를 두고 전혀 딴 일처럼 각기 나갔던 외출. 자영은 그 의문의 외출에 대해 확연치는 않지만 어렴풋이 어머니의 깊은 속살을 알 듯도 했다.
"난 알고 있었다. 운이란 타고나는 게고 명은 재천이라 했지. 어미로서 바라는 것은 동요되지 말고 스스로 판단해서 자기 도리를 세워 가라는 거야."
점자를 짚듯 필요한 요점만을 또박또박 짚어 가는 어머니의 낮은 음성이 빗소리로 들려왔다. 모든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침묵해 온 어머니. 그 무거운 짐을 어떻게 가슴을 홀로 담아 온 것일까. 자영은 거칠게 범람하는 강 물결로 몸이 풀리어 갔다.
간밤에 고모부와 함께 지냈다는 아버지는 오후가 돼서야 고모의 부축을 받으며 돌아왔다. 암울한 그림자를 무겁게 끌며 곧장 방으로 들어갔고 그 뒤를 몇몇의 낯익은 얼굴들이 풀기가신 낯빛을 성기며 따랐다. 오빠 내외와도 사이를 두고 자영이가 맨 끝으로 들어섰을 때 아버지는 허옇게 마른 입술을 벌린 채 숨을 고르고 있었다.
"할아버지 많이 아파?"
훈이가 아빠와 할아버지 사이를 비집고 앉으며 또랑거린다. 손자의 손을 잡으며 내놓은 아버지의 잇속이 잘라진 박 속 같이 차갑고 썰렁해 보였다.
"나가서들 일봐․" 침잠된 아버지의 목소리가 쇠잔하게 흔들릴 때까지 자영은 그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이상한 것은 그토록 쉽게 타오르고 발열하던 그녀의 감정이 이 순간 기가 숙여지는 것이었다. 그랬었구나. 어쩌면 그 흰 약봉지는 진통제였겠구나. 자영의 얼굴이 핏기가 가시면서 경색되어져 갔다. 자영은 더 이상 버틸 힘을 잃은 채 자리에서 일어서고 있었다. 오빠가 아버지의 손을 잡고 있는 모습이 옆 시야로 스쳤다.
저녁부터 한약 달이는 냄새가 폴폴 나기 시작했다. 약 냄새는 저녁연기처럼 깔리며 집안 구석구석으로 배어들었다. 발길이 끊겼던 친척들의 그림자가 하나 둘씩 찾아들기 시작했다. 죽었던 세포들이 되살아나는 것처럼 아버지에 의해서 집안은 사람들의 소리로 자박거렸다. 그들이 쏟아 놓은 잔웃음과 말마디가 깊은 잠에 빠져있는 집안을 일깨우고 그들이 흘리는 체온과 숨결이 생경했지만 그렇다고 낯설지도 않았다. 그것은 참으로 이상한 현상이었다. 그들 중에는 어머니를 서방 잡아먹은 여자로까지 험담한 얼굴도 끼어 있었지만 예전의 미움이나 서러움은 동하지 않았다.
언니가 만절을 지키니까 그래도 이런 끝이 있구랴. 언니 내가 나쁜 년이우."
유난히도 어머니를 험담했던 막내 고모의 비위 좋은 넉살에도 자영은 그전 같이 서럽지가 않았다. 대꾸 없이 잔 미소만 씁쓸히 흘리는 어머니도 속살이야 에겠지만 넉넉하게 그들을 대했다.
"모양일거야 없지만 모여 있으니 사람 사는 것 같네. 동서 어쩌겠나. 힘내우."
어머니를 위로하던 큰어머니의 말끝이 자영의 눈에 밟혔다. 이런 것이 사람 사는 모양일까. 자영은 그들이 들고 와 먹고 버린 집안 구석구석에 굴러다니는 캔 음료를 치우며 수긍도 부정도 할 수 없는 큰어머니의 말을 되살리곤 했다. 아버지의 심상치 않은 병환 속에서도 확실히 집안은 변하고 있다는 것을 자영은 느끼고 있었다. 그동안 더듬이 없는 감정으로 응고되었던 집안의 기류가 침잠에서 깨어나고, 물이 구석을 채우며 수면을 고르게 하는 것처럼, 쉼 없이 시간은 아버지의 복원을 준비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아버지의 병세는 급작스레 떨어져갔다. 간간이 넘겼던 미움마저 토하기 시작했다. 살집이란 살집은 깡그리 증발되어 혈관과 뼈마디가 불퉁 그려질 것 같은 참담한 육신을 아버지는 가까스로 링거수액으로 버텨 가고 있었다. 잘못 손대면 찢겨질 듯한 빛이 바랜 창호지 같은 얇은 살가죽을 하고도 아버지는 생명의 미련을 처음과는 달리 보이는 듯했다. 떨어지는 수액의 간격을 정확히 셈했고 썩은 굼벵이 가루를 물에 타 삼키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다.
마지막 봉사라고 생각한 것일까. 어머니는 아버지가 원하는 것이라면 할 수 있는 한 다 해보려고 했다. 몸이 곤하더라도 웬만하면 자식이나 며느리에 위탁하지 않고 스스로 해결하려는 노력이 역력했다. 신기하게도 아버지의 쇠잔한 생명은 스스로를 구심점으로 가족들의 결집을 상처 속의 새살처럼 살려내고 있었다. 그런 가운데 어머니의 모습은 근자에 들어 급격히 수척해졌다.
"이러다 어머니까지 안 되겠어요. 좀 쉬세요."
"그래요 어머님."
아들 내외의 염려에도 어머니는 자신의 건강에 대해선 개의치 않는 것 같았다. 계속된들 얼마나 갈까…. 어머니는 끝내 가슴의 말을 털어놓았다. 방안은 갑자기 숙연해졌고 한동안 침묵이 흘렀다.
"자영아 이제 너도 마음 돌이켜라. 사람 떠나면 미움이나 증오가 무슨 필요가 있겠니. 눈빛이라도 따뜻하게 가지렴."
오빠 내외가 거들며 자영의 대답을 듣고자 했지만 그때도 자영은 입을 열지 않았다. 내심에는 이미 균열이 가고 있었지만 그러한 자신을 내놓고 설명하고 싶지는 않았다. 미움도 인력으로 되는 게 아니라는 어머니의 잔 음성을 요령처럼 귓전에 매달고 자영은 밖으로 나왔다. 기류에 몸을 실은 날벌레같이 정처 없이 표류하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택시가 교외로 벗어나는 길모퉁이를 돌아설 때까지 자영은 많은 사람들을 떠올렸다. 화장 속에 감춰진 늙고 구겨진 얼굴들. 합리주의를 가장한 위선된 얼굴들. 그녀의 머릿속에서 들추어진 것은 모든 게 사람의 치부뿐이었다. 그 같은 사람의 속성을 벗어 던지지 못한 자신까지도 이 순간은 미움의 대상이었다.
가을 언덕은 햇빛 투성이었다. 자영은 심호흡을 하며 보랏빛 들국화와 여덟 잎 코스모스가 가을을 티 없이 흔드는 야트막한 구릉을 밟아 올랐다. 투명하게 열린 하늘아래 아른거리는 고추잠자리를 보며 자영은 약간의 평정을 되찾았다. 자영은 오르던 발길을 세우고 언덕 아래 마을 골목으로 깊게 이어진 전선 위로 시선을 모았다. 제비 떼가 까맣게 몰려 앉아 있었다. 떠날 때가 됐구나…. 자영은 굳어지듯 그 자리에 서서 강남이란 긴 여정을 가늠하고 있는 제비들의 눈매를 떠올렸다.
말도 표정도 없는 아버지…. 진실로 강남보다도 더 머나 먼 영겁의 길을 떠나야 할 만추의 전선 위에 앉은 불쌍한 남자를 생각했다. 그 가슴엔 어떤 회한의 앙금이 엉키고 있을까. 그동안 가슴에서 수없이 교차되고 교란되었던 어둠과 빛들. 빛의 그늘로 깔렸던 어둠과 거대한 어둠에 묻히던 빛의 속성은 이질적일까 동질적일까…. 자영은 경서의 어느 편절보다도 설교인의 뜨거운 말씀에서보다도 이 순간 마주친 자영의 한 모서리 풍경에서 자연과 화해하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육신이란 껍데기를 벗고 떠나는 사람에게 부부란 부녀란 관계는 더 이상 무슨 의미가 있을까.
아버지의 신음도 잠간이었다. 뜰의 국화송이 위로 첫서리가 내리던 날 아침 아버지의 팔뚝을 유린했던 수액의 주사 바늘은 거두어졌다. 그토록 안쓰럽게 목에서 끓던 가래를 동전처럼 뱉어내곤 아버지는 해묵은 수면보다 깊디깊은 정적을 두르고 가라앉고 말았다.
처음으로 온 가족이 한 자리에 모여 눈물을 흘렸다. 회한과 미움, 연민으로 엉킨 눈물들이 저마다의 볼을 타고 흘렀다. 자영도 꽃잎처럼 눈물을 떨구었다. 임종 하루 전 들어선 딸의 손을 잡던 앙상한 뼈마디와 싸늘한 아버지의 체온이 마지막이었다.
상여가 나가던 날 자영은 쓰러질 듯한 어머니의 맥 풀린 손을 잡고 서 있었다. 몸의 온기라곤 잡히지 않는 어머니와 함께 그들의 둥지를 빠져 밖으로 운구 되는 아버지의 시신을 따르던 자영은 대문간에 기대어 오열하는 소복한 한 여인을 보았다. 자영은 직감으로 아버지의 여인임을 느꼈다. 사실이었구나. 어머니가 그 여자를 스쳐갔다. 자영도 스쳤다. 셔터의 누름처럼 누구의 불행이라고 단정하기 어려운 상황이 순간적으로 여닫혔다.
코스모스 꽃길을 좇아 영구차가 흔들릴 때마다 차창에 따라오던 산도 흔들렸다. 한참을 지나 자영은 어머니를 따라 시선을 거두고 버스에서 내렸다. 내려 보니 산은 간 데 없고 허허롭게 서있는 자신만 보였다. 다 두고 가셨구나…. 밭뙈기를 가로질러 마지막 운구가 시작될 무렵, 자영은 비탈을 타고 둥글게 원을 그리며 내려오는 청정한 바람을 보았다. 가을의 어진 바람이 쓸쓸한 운구 행렬을 쓸고 지나갔다. 푸른 옹이로 가득 찼던 자영의 가슴에도 바람은 정성을 다해 정갈한 비질을 시작했다.(*)
작가소개 / 이관순
1982년 월간문학 신인상(소설)으로 등단. 전 유한대 교수
창작 소설집<우화기의 날개> <옹이가 있던 자리>, 장편소설<길 없는 길>산문집<괜찮아, 잘 될 거야>, 평전<한국 자본주의의 개척자들(월간조선사)>, 20여권의 전기 기업사 집필.
Daumcafe/ 이관순의 손편지(leeletter) 운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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