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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부 "스바라시이(굉장해), 하치만타이!"
이틀을 묵었던 셀렉트 인 아오모리 호텔과 작별하는 날입니다. 아침을 먹고 각기 방에서 짐을 챙겨 나옵니다. 로비에 십여 명의 여학생이 세일러풍 교복 차림으로 서 있네요. 십대의 풋풋함이 우리를 흐뭇하게 합니다. 전형적인 고갸루(高ギャル·여고생)는 아니고 다소 촌스럽고 평범한 얼굴인데도 우리 눈에는 걸그룹처럼 보입니다.
출발 전에 제가 “오늘 점심 때 에키벤(駅弁)을 먹는 것은 어때?”라고 제안합니다. 에키벤은 ‘역(驛)벤토’의 줄임말로 역이나 기차 안에서 파는 도시락을 말하죠. 지역마다 특색 있는 재료와 조리법으로 만들어져 인기가 높습니다. 에키벤이 먹고 싶어 일부러 기차를 타거나, 기차를 탈 일이 없어도 에키벤만 사러 오는 사람도 있다고 합니다.
“오늘 우리가 가는 곳에도 제대로 된 식당이 없을지 몰라. 우리가 4일째 밤 아키타에서 묵기는 하지만 숙소가 역과 가까운지 먼지도 알 수 없을뿐더러 5일차 낮에는 온천을 가는 날이니 도시락 먹기가 적절하지 않을 것 같아. 그러니 오늘 아침 아오모리역에서 에키벤을 사서 점심 때 도와다 호수 트레킹하며 먹자.”
제 말을 들은 동규와 태성이가 “어제 저녁도 편의점 도시락 먹었는데…”라며 떨떠름한 표정을 짓습니다. 그래도 제가 쉽게 포기하지 않고 몇 가지 이유를 더 들어 재차 권유하니 영수가 “대장 말대로 하자”고 흔쾌히 동의합니다. 지루한 논쟁이 가이드 말 한 방에 정리됩니다.
아오모리역사 전경.
아오모리역 대합실의 상점에 들어가니 앞에 에키벤 진열대가 놓여 있습니다. 붙여 놓은 전단에는 종류가 다양한데 정작 파는 것은 몇 가지 없습니다. 가격도 1천 엔 남짓으로 만만치 않네요. “그래도 일본 원정 온 기념인데 먹어봐야지” 하는 마음으로 회와 생선까스가 담긴 도시락을 4개씩 8개 삽니다.
본격적인 출발에 앞서 제가 어제 산 청량과자 민티아를 몇 알씩 건넵니다. 입안이 시원하다 못해 얼얼할 지경입니다. 갑표가 “이것 먹으면 졸음이 싹 달아나겠다”고 찬탄합니다.
보조운전자 희용 대장이 1호차를 몰고 있다.
오늘은 보조운전자들이 핸들을 잡기로 했습니다. 저와 정형이도 8천500원 주고 국제운전면허증을 발급받은 만큼 써먹어 봐야죠. 시내를 빠져나와 한적한 곳에서 운전자를 교체합니다. 처음 우핸들 차를 몰아보는 것이라 불안하고 어색합니다. 옆에 앉은 영수가 자꾸 왼쪽으로 붙는다며 주의를 줍니다.
2호차 보조운전자 정형도 핸들을 잡았다.
첫 목적지는 오이라세(奧入瀨) 계류(谿流)입니다. 도와다코(十和田湖)에서 흘러내린 물이 울창한 숲을 뚫고 장장 14㎞의 계곡을 지나는데, 곳곳에 폭포와 소(沼)를 이뤄 절경을 만듭니다.
오이라세 계류에서 기념촬영을 하는 정형 대원.
오늘은 일요일이어서 그런지 차가 많습니다. 길도 좁은 데다 길 옆 트레일로 사람이 많이 지나다녀 운전하는 데 신경이 쓰입니다. 경치에도 수시로 시선을 빼앗겨 친구들이 깜짝깜짝 놀랍니다. 친구들을 불안하게 한 가장 큰 이유는 제가 운전에만 집중하지 않고 대화에 계속 끼어드는 겁니다. 영수가 “넌 참견하지 말고 운전만 해”라고 말합니다.
2호차 운전자인 갑표 대원이 오이라세 계류의 나무에 기대 서서 웃음짓고 있다.
적당한 곳에 차를 세웁니다. 트레일을 따라 걸어 내려갔다가 다시 올라오기로 합니다. 경치는 괜찮은데 사람이 많아 걷기가 불편합니다. 트레일이 도로 바로 옆인 것도 마뜩잖네요. 어차피 차를 타고 오다가 다 본 경치여서 조금 걷다가 되돌아가기로 합니다.
오이라세 계류의 맑은 물줄기가 시원스레 흘러가고 있다.
승용차에 다시 오르려는데 영수가 “희용이 너는 대화를 주도해야 하니까 운전은 내가 할게”라고 말합니다. 수다를 떠느라 운전에 전념하지 못하는 제 모습이 영 불안해 보였던 모양입니다. 저도 핸들을 잡으니 경치도 제대로 못 보고 대화도 마음 편하게 못해 불편하긴 했습니다.
차에서 다시 이야기꽃을 피우는데 태성이가 불만을 털어놓습니다. “내가 운영하는 독서실이 지금 한계에 와 있어. 시대적 추세에 맞게 경쟁력을 갖추려면 더 투자를 해야 하는데 리스크도 높지. 그래서 독서실을 접고 다시 취직을 하는 방안도 심각하게 검토하고 있어. 이번 여행 때 힐링도 하면서 이 문제를 진지하게 고민하려고 했는데, 희용이가 총무를 하라고 해서 계획이 다 틀어졌어. 생각 좀 깊이 할 만하면 총무가 미리 가서 입장권 끊으라고 하고, 밥 먹고 나서 사색 좀 하려고 하면 밥값 계산하라고 하고. 잠들기 전에도 돈 계산 맞춰봐야 하고….”
제가 태성이를 달랩니다. “그래서 총무의 부담을 최대한 줄여주려고 했는데. 돈 계산 맞출 필요 없이 내가 준 돈에서 다 쓰고 남는 돈만 줘. 모자라면 내가 더 줄게. 지출 내역을 일일이 적을 필요도 없어. 그리고 오늘 밤 술자리에서 쓸데없는 얘기 빼고 네 고민에 모두 동참하기로 하자. 친구들이 머리를 모으면 해결책이 나올 거야.”
오이라세 계류는 일본을 다시 방문해 한적할 때 걷기로 하고 도와다코로 향합니다. 도와다코는 일본에서 세 번째로 큰 호수입니다. 둘레가 46.2㎞이니 백두산 천지(14.4㎞)의 세 배가 넘습니다. 깊이는 328m로 천지(384m)보다 조금 얕습니다.
내비게이션이 가리키는 데로 가보니 캠핑장입니다. 이곳은 우리가 원하는 곳이 아닌 것 같아 내비게이션에 도와다 신사를 찍고 다시 차를 몹니다. 주차장에 차를 세우니 유람선 선착장이 있는 곳이어서 식당이 즐비하고 관광객도 붐빕니다. 괜히 에키벤을 사온 것 같습니다.
아오모리역에서 사온 에키벤을 도와다코 공원에서 먹고 있다.
그래도 잔디밭의 벤치와 탁자가 놓인 곳에서 에키벤을 먹기로 합니다. 날씨도 화창하고 단풍도 간간이 보여 분위기가 괜찮습니다. 제가 챙겨온 볶음김치도 곁들여 먹습니다.
쌀밥 위에 사시미 몇 점이 놓인 에키벤.
도와다 신사 진입로에는 삼나무가 일품입니다. 두세 사람이 팔을 벌려 감아도 모자랄 만큼 굵고 하늘을 찌를 듯 높이 치솟은 나무가 빽빽합니다. 신사 전각도 고졸한 기품이 넘칩니다. 전각 앞에 참배객들이 일본 말 그대로 나라비(並び)로 서 있고, 주변에는 길흉을 점치고 난 제비 오미쿠지(御神籤)가 새끼줄에 빼곡히 매달려 있네요.
도와다 신사 입구에 도열해 있는 삼나무(위). 하늘을 향해 시원스럽게 뻗어 있는 삼나무(아래).
도와다 신사 본전 앞에 참배객들이 줄을 서 있다.
신사를 둘러보고 호수로 향하니 호숫가에 나부(裸婦) 두 명의 조각상이 보입니다. 시인이자 조각가인 다카무라 고타로(高村光太郞)가 부인을 모델로 삼아 제작한 오토메노조(乙女の像)입니다. 을녀는 우리가 갑남을녀(甲男乙女)라고 할 때처럼 평범한 여인, 혹은 불특정 여인을 가리키는 모양입니다.
다카무라 고타로가 조각한 을녀상.
두 명이 마주보고 있는데, 면대칭이 아니라 점대칭을 이루고 있어 왼쪽 손바닥을 서로 대고 있습니다. 서울 마포구 상암동 MBC 사옥 앞에 유영호 작가가 조성한 ‘미러맨’은 거울을 사이에 둔 것처럼 한 사람은 왼손 검지, 다른 한 사람은 오른손 검지를 내밀고 있죠.
오토메노조는 눈에 눈동자가 없이 구멍만 뚫린 것이 특징이죠. 어느 쪽에서 보거나 을녀상이 관람객을 응시하는 것처럼 느끼도록 하기 위한 것이라고 하네요. 조각상을 감상한 뒤 호숫가를 따라 걷습니다. 바로 얼마 전 천지를 답사한 문재인·김정은 내외가 생각나기도 합니다.
도와다 호숫가에서 촬영에 열중하고 있는 병래 대원.
다시 차에 올라 도로를 따라 달리니 도와다코를 내려다볼 수 있는 전망대가 나타납니다. 도와다코에는 두 개의 반도가 길게 돌출돼 있어 어디에서도 한눈에 호수 전체가 들어오지 않는다고 합니다. 하늘과 구름과 산과 호수가 적절히 배치돼 멋진 그림을 만들어냅니다.
오늘의 마지막 목적지는 아오모리 현 남쪽 아키타와 이와테현에 걸쳐 있는 하치만타이(八幡平)입니다. 방패를 엎어놓은 형상의 전형적인 순상화산(楯狀·아스피테)으로 해발 1,613m가 최고봉이죠. 습지가 많아 야생 식물의 보고로 꼽힌답니다. 이곳 역시 일본 100대 명산에 듭니다.
하치만타이 등산로 입구에 선 희용 대장
아스피테 라인이라고 명명된 산복 도로를 따라 1,541m 높이의 고갯마루에 올라선 뒤 주차장에 차를 대고 트레킹을 시작합니다. 아스피테 라인은 드라이브 코스로도 유명하답니다. 첫눈이 내리는 11월 말 폐쇄된 후 이듬해 4월에 개통되는, 한동안은 3~4m 높이의 설벽 사이로 길이 이어지는 장관이 펼쳐집니다.
가랑비가 흩뿌리자 너도나도 우의를 꺼내 입습니다. 영수는 우산을 펴듭니다. 전 땀이 많이 날까봐 우의를 입지 않고, 스틱을 짚어야 하니 우산도 없이 그냥 걷기로 했습니다(사실 우산은 비가 오면 현지에서 사려고 했는데 살 곳이 없었습니다).
우의를 입고 하차민타이 트레킹에 나선 병래 대원.
상철이가 우의를 입으며 걱정스럽게 말합니다. “내가 우의를 입으면 꼭 비가 금세 그치더라. 우의를 배낭에 넣으면 다시 비가 오고.” 누구나 그런 경험이 있죠. 겨울 산길에서 아이젠을 꺼내 신으면 이내 흙길이 나오고, 아이젠을 벗으면 금방 빙판이 시작되는 머피의 법칙 말입니다.
하차민타이 등산로에 깔려 있는 나무 데크.
키만큼 자란 조릿대 사이로 등산로가 나 있습니다. 습지가 많아 침목처럼 생긴 나무를 길게 깔아놓았습니다. 물웅덩이 위로 다리를 놓은 곳도 많습니다. 시간 여유가 없어 정상은 포기하고 산장까지만 걷기로 합니다. 날씨가 흐려 전망은 좋지 않지만 고원 지대를 걷는 맛이 괜찮습니다.
조금 더 지나니 그래도 오르막길이 나타납니다. 고바이(勾配·경사)가 심하지는 않은데 돌길이어서 걷기가 불편합니다. 이마에 땀이 송글송글 맺힙니다. 산장에는 아무도 없고 문이 닫겨 있습니다. 눈이 많이 오는 탓인지 1층을 바닥에서 높이 띄워놓은 것이 인상적이네요.
하치만타이 무인 산장에서 셀카를 찍는 대원들. 맨 왼쪽부터 시계 방향으로 갑표 희용 상철 정형 태성 동규 영수.
날이 금방 저물 것 같아 서둘러 하산합니다. 팔이 가장 긴 갑표가 폰카를 쭉 내밀고 나머지는 좁은 화면 안에 옹기종기 얼굴을 들이밉니다. 병래는 중간에 먼저 주차장으로 내려갔습니다. 어둑어둑해지고 있는데 뒤가 급해진 한 대원이 큰 볼일을 보겠다고 합니다. 헤드랜턴을 챙겨온 정형이가 남았다가 함께 내려오기로 합니다. 주차장에 도착하니 기다리고 있던 병래가 “캄캄한 데 혼자 있으니 무서워서 혼났어”라고 말합니다.
태성이가 급했던 그 대원에게 속이 편안해졌는지 묻고 난 뒤 SBS 라디오 ‘두시 탈출 컬투쇼’에서 소개된 청취자 사연을 들려줍니다.
“어떤 사람이 급해서 산에서 똥을 눴대. 누가 밟을까 봐 돌로 덮어놨는데 나중에 와 보니 다른 사람들이 거기에다 자꾸만 돌을 쌓아 올리더래. 한참 만에 다시 왔더니 그 돌무더기가 큰 돌탑으로 변해 있고, 사람들이 그 앞에서 기도를 하더라는군. 너도 나중에 와 보면 그 자리에 돌탑이 생기고 등산객들이 절을 할지 몰라.” “나는 산장 화장실에서 볼일 봤는데?” “그래? 아깝다.”
오늘 숙소는 하치만타이 인근 이와테 스키 리조트에 있는 호텔입니다. 영수 말에 따르면 당초 ‘아피(安比) 힐즈 시라카바노모리(白樺の森)3’에 예약했는데 예약자가 너무 없어 영업을 하지 않으니 바로 옆의 ‘아피 그랜드 호텔’로 바꿔주겠다고 했답니다. 같은 가격에 3성급에서 4성급으로 업그레이드된 겁니다.
참고로 아피는 이곳이 위치한 고원(高原) 이름이고 시라카바(白樺)는 자작나무라고 합니다. 실제로 이 일대는 자작나무가 많습니다.
제가 지난해 여름과 올 1월 시베리아 횡단열차를 타고 취재여행을 할 때 온통 자작나무 숲이어서 분위기에 맞춰 보드카를 ‘스스로 따라 마시던’ 기억이 납니다. 아재들은 무슨 얘기인 줄 금방 알아 들으셨죠?
딸에게 들은 아재 개그도 대원들에게 들려줍니다. 몇 해 전 딸이 대학 친구들과 일본 간사이(關西) 지방을 여행하다가 나고야(名古屋)를 들렀을 때랍니다. 한 친구가 모일 때마다 늑장을 부리자 제 딸이 “너 계속 그러면 나고야에서 낙오야!”라고 했답니다. 그 얘기를 제게 전해주며 “아빠에게 옮았나 봐”라고 하더군요.
아피 그랜드 호텔의 방 내부. 널찍하고 고급스럽다.
숙소에 도착하니 방이 말 그대로 그랜드하고 럭셔리하기까지 합니다. 10여 차례 일본에 와 봤어도 이처럼 고급스럽고 널찍한 방에 묵어보기는 처음입니다. 무료 목욕 쿠폰도 줍니다. 중국 단체 여행객이 많은 것 말고는 흠잡을 데 없습니다. 벽장에는 유카타(浴衣)에다 위에 겹쳐 있는 단젠(丹前)까지 걸려 있더군요. 룸메이트는 태성의 제안에 따라 바꾸지 않기로 합니다.
짐을 부려놓고 저녁을 먹으러 나갑니다. 영수가 지도를 보고 난 뒤 걸어가도 될 것 같다고 하는데 길을 못 찾겠습니다. 도로를 따라 가면 한참 걸릴 듯합니다. 다시 주차장으로 올라와 내비게이션이 가르쳐주는 대로 가봤더니 호텔 온천탕이 나옵니다. 여기도 식당이 있는데 영업 시간을 넘겼네요. 종업원에게 우리가 찾는 식당을 물어보니 영업을 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물샐틈없던 영수의 계획이 여기서 ‘삑사리’가 납니다. 여행을 하다 보면 이런 일이 비일비재한 게 정상이죠.
모두 막막해 하고 있는데, 상철이가 호텔 식당으로 가자고 제안합니다. 호텔 등급에 걸맞게 값이 비싸면 어쩌나 걱정하며 선뜻 말을 못 꺼내고 있었거든요. 상철이는 믿는 구석이 있는지 당당하게 앞장섭니다. 다행히 가쓰동의 가격이 적당해 시켰는데, 양도 푸짐해 모두 만족합니다. 느긋해진 마음에 아사히 생맥주도 한 잔씩 시켜 마십니다. 상철이의 빠르고 바른 판단에 모두 엄지를 치켜듭니다.
기모노를 입은 호텔 식당 종업원에게 상철 대원이 자신 있게 주문하고 있다.
알뜰한 태성 총무가 제안합니다. “여기서 온천욕을 공짜로 할 수 있으니 내일 온천을 따로 가지 않는 것은 어떨까? 비용도 시간도 절약할 수 있잖아.” 태성이의 의견이 거의 받아들여지려는 순간 반전의 명수 정형이가 나섭니다. “그래도 여기까지 와놓고 안 가면 아깝잖아. 일본에서도 그렇게 유명하다고 하는데. 여기 온천은 호텔 온천이니까 크게 별다를 건 없을 것 같고.”
분위기가 급격히 바뀌어 모처럼 원정 와서 돈을 아끼느라 예정했던 곳을 빼먹는 건 아니라고 결론을 내립니다. 오늘 빗속에 산길도 걸었고 호텔 온천이 공짜라고 하니 오늘 밤 목욕할 사람은 목욕하고 나서 밤 11시에 모이기로 합니다. 술자리를 하루 거르자는 얘기는 아무도 꺼내지 않습니다.
영수와 정형이는 방에서 쉬겠다고 하고, 나머지 6명이 호텔 온천에 모여듭니다. 노천 온천도 있고 앉아서 때를 밀 수 있는 자리도 갖춰져 있습니다. 따뜻한 물에 몸을 담그고 밤하늘을 바라보니 세상 근심이 사라지네요.
다시 방에 모입니다. 영수와 제가 유카타 차림으로 나타나니 ‘우키다(웃기다) 상’이라고 놀립니다. 제가 소파에 앉다가 앞섶이 벌어져 허벅지가 드러나니 ‘야하다 상’으로 이름이 바뀝니다. 사실 저는 어릴 적 일본 이름이 있었습니다. 나카무라(中村)입니다. 낯이 까맣다고(지금은 많이 뽀얗게 변했지만) 붙은 별명이죠.
유카타를 입고 술잔을 부딪치는 영수 대원(왼쪽)과 희용 대장.
오늘은 정형이가 가져온 밸런타인 15년산 위스키를 비우기로 합니다. 저의 제안 설명에 이어 태성이가 승용차에서 털어놓았던 고민을 다시 꺼내놓으니 저마다 조언 겸 자기 고민을 말합니다.
공공기관 광고 대행과 판촉물 제작 업체를 경영하는 병래는 “나도 직원들은 회사를 자꾸 키우자고 해. 이대로 가면 뒤처질 수밖에 없다는 거지. 맞는 말이기도 하고 직원 입장에서는 회사를 키우는 게 좋겠지. 아직 사업을 접을 수는 없지만 나이도 있고 투자를 하는 게 불안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고민이야.”라고 말합니다.
치과의원을 운영하는 동규도 “개업한 지 10년 정도 되다 보니 장비를 교체할 때가 됐더군. 치과도 경쟁이 갈수록 치열해져 투자를 해야 하는데 그러기도 쉽지 않고…”라고 거들더군요.
월급쟁이인 저나 정형이도 정년이 코앞에 닥치니 이런저런 고민이 많습니다. 그래도 우리 고민까지 풀어놓으면 생각을 정리하는 데 보탬이 되지 않을 것 같아 태성이가 닥친 고민에 해법을 제시하는 데 집중하기로 합니다.
대체적인 의견이 “그래도 이 나이에 월급쟁이를 다시 하려면 마땅한 일자리도 없고 쉽지도 않으니 좀 더 버텨 봐라”라고 권유하는 쪽으로 모아지는 차에 밖에서 담배를 피우고 온 정형이가 “과감히 때려치우고 쉬는 것도 괜찮다”며 분위기를 확 바꿔놓습니다. 과연 태성이는 돌아가서 어떤 선택을 할까요?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