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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멋대로 해라] 01
1. # 고아원 (해질 무렵)
소나무 숲이 있다. 가늘게 바람소리가 난다. 바람소리 속에 쇠사슬의 삐걱임이 묻어 나온다.
소나무 숲 너머 고아원 운동장 한 켠에 그네가 흔들린다. 그네의 쇠사슬 고리가 그네 프레임에 흔들리며 마찰음을 낸다.
열살 복수가 그네 위에 앉아 가벼운 발구름을 하고 있었다.
저만치에서 젊은 중섭이 고아원 원장에게 고개 숙여 인사를 마친 뒤, 원장을 그 자리에 놓아 두고 홀로 복수에게 다가온다.
젊은 중섭 : ... (그네에 앉은 채 무심한 복수를 물끄러미 바라본다) 간다, 아빠.
열살 복수 : ... (표정없이 가벼운 그네타기만 한다)
젊은 중섭 : (복수로부터 몇 발짝 멀어졌다 돌아서며 버럭 화를 낸다) ‘아빠, 안녕’ ...안하냐?
열살 복수 : ... (무반응)
젊은 중섭 : ... (어찌지 못하는 슬픔이 있다. 다시금 음색이 낮아진다) 3년만 참아. ... 아빠, 부자되서 올게. ...복수야.
열살 복수 : ... (무표정)
젊은 중섭 : ... 3년만 참아.
어렵게 등 돌린 중섭이 발걸음을 재촉한다. 이별길을 떠나는 감색 겨울 양복의 중섭 뒷모습이 손톱만큼 멀어지도록,
복수는 태엽감은 장난감처럼 표정없이 일정한 발구름만한다.
이제 중섭은 복수의 말이 들리지 않도록 멀어졌다.
열살 복수 : ... (나직이) 뻥까지 마아.
그네 철골은 요란한 소음을 낸다.
복수의 손등에 물방울이 한 올 떨어진다. 그와 동시에 빗줄기가 톡톡톡 떨어진다.
2. # 교도소 정문 앞 (새벽)
15년의 세월을 지나 굵은 비가 내린다.
열려지는 교도소 철문이, 앞선 그네 프레임의 삐걱임과 오버랩되며 덜컹인다.
우산을 쓴 채, 담벼락에 기대서서 담배를 태우던 중섭이 황급히 담배를 부벼 끄며 대문으로 달려간다.
15년 전, 복수를 두고 떠나던 그 날, 그 감색 양복에, 같은 와이셔츠에, 같은 넥타이다.
단지 세월만큼 바랜 옷매와 희끗한 머리칼이 다를 뿐이다.
문가로 바짝 다가서는 중섭의 눈에 복수가 보인다.
교도소 안 마당에서 걸어나오는 무리 중에 유독 열심히 뛰어 나오는 청년 복수다. 1등으로 문 밖으로 뛰어 나온다.
복수 : (숨을 고르며 히죽 웃는다.) 아빠.
중섭 :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볼을 꼬집는다. 마치 아기를 다루듯...) 두부먹자.
중섭이 한 켠으로 가 두부가 든 비닐을 건낸다. 복수는 참 맛나게 두부를 먹는다.
중섭 : 맛있냐?
복수 : 응.
중섭 : (복수가 허겁대며 먹는 두부를 빼앗아 든다. 툴툴댄다.) 아, 시늉만 해. 덤벼 들어 먹을거냐, 이게?
(얼핏 두부 냄새를 맡는다.) 쉰네가 나나?
복수 : 응.
중섭 : 그걸 왜 먹어, 이 놈아. (두부를 쓰레기통에 팽개치며 자신의 주머니를 뒤적인다. 궁시렁) 그깟 두부, 얼마나 헌다구,
날 지난 걸 속여 파냐?
복수 : 어디서 샀는데?
중섭 : 알면? (복수의 주머니에 만원짜리 몇 장을 찔러준다.) 일찍 들어 와.
복수 : 지금 일 나가게?
중섭 : (끄덕. 한 손에 접혀진 우산을 건낸다) 집 열쇤 있지?
복수 : (끄덕) 그러게 뭐 하러 새벽부터 와, 미안하게. 다음부턴 오지마.
중섭 : (눈길이 송곳같다.)...
복수 : (아차다.)...
중섭 : 다음에 너 또 여기 오면... 나, 죽어. (말꼬리에 슬픔이 묻어난다)
중섭, 뒤도 안 보고 휘적휘적 걸어간다.
이내 우산을 펼치려던 복수가 물끄러미 우산을 본다. 아직 상표도 떼지 않은 새 우산이다.
문득 걸어가는 아버지의 우산을 바라본다. 우산살 하나가 곱추등처럼 휘어져 있고 분홍바탕에 백설공주가 그려져 있다.
복수의 눈매가 서늘해진다.
복수 : (큰소리로) 아빠.
중섭 : (걸음을 멈춘다.) 왜.
복수 : (괜시리 미간을 찌푸린다. 턱으로 중섭의 우산을 가리키며) 우산이 유치하잖아.
중섭 : 남이사...
중섭은 걸음을 재촉한다.
복수는 물끄러미 중섭의 뒷모습만 바라볼 뿐, 우산을 펼 생각도 않는다.
3. # 공연장 (낮)
경의 밴드가 리허설중이다. 각자 조율을 하느라 불협화음이 이는 실내.
일군의 젊은이들이 무대 뒤에 행사 슬로건을 붙이고 있다. 슬로건... “모기박멸을 위한 투사들의 밤”
무대 밑에선 간이 의자들을 사이드로 치우고 있다.
이윽고 각자의 마이크를 당기는 경의 밴드. 경, 정국, 기홍, 연정. 그들 각자의 손이 하나씩 몽타쥬된다.
리드 기타리스트이자 보컬 연정이 손바닥으로 자신의 엉덩이를 하나, 둘, 셋, 넷, 치곤 키보디스트 경을 바라본다.
키보드가 첫 음절을 리드한다. 블루스 락 선율.
드러머 정국, 기타리스트 연정, 베이시스트 기홍의 연주가 따르고, 꾸밈음 없이 건조한 연정의 노래가 시작된다.
잠시 음악에 취해보는 밴드.
슬로건을 붙이고 있던 젊은이가 마무리를 함과 동시에 무대위에서 쿵하는 둔중한 소리가 난다.
무대 모서리에 부딪히며 무대 밑 바닥으로 떨어지는 연정의 기타. 기타줄이 끊어진다.
연정은 이미 무대 위에 누워있다.
놀라서 모여드는 밴드맴버들과 일하는 청년들.
연정, 장난스레 혀를 낼름 내민다. 그리곤 인상을 찡그리며 가슴을 부여쥔다.
4. # 경찰서 정문 (낮)
텍도 떼지않은 우산 옷을 손잡이게 묶어 단 채,
발랄한 표정으로 우산을 쓰고 경찰서 앞으로 씩씩하게 걸어와 서는 복수.
보초를 보곤 미소짓는다. 그리곤 경찰서 건물을 향해 당당하게 선다.
복수 : (경찰서 건물을 향해 고래 고래 고함을 지른다) 박 정 달. 나, 고 복수다. (숨 한 번 몰아 쉬고) 보고 싶었어.
그리곤 건물 안으로 힘차게 달려 들어간다.
5. # 경찰서 복도 - 강력계 앞 (낮)
다부진 표정의 복수가 멈춰 선 곳은 강력계 앞이다. 어깨와 눈빛에 힘이 생긴다.
6. # 강력계 (낮)
복수 : (박력있는 표정과 또박 또박한 발음) 박 정다...
정달 : (벼락같은 목소리) 어떤 새끼가 문짝을 부수고 지랄이야?
복수의 얼굴이 얼어붙는다. 직원들이 매섭게 복수를 노려본다. 복수가 당황한다.
정달 : (복수를 빤히 바라본다) 저 새끼 고 복수 새끼 아냐? 어? 야, 일루와 봐.
복수 : ...(민망하다)
정달 : (손짓을 하며) 일루 와, 일루 와. ...안와, 새꺄? 얼른.
복수 : (정달을 향해 가며 혼잣말) 아우, 쪽 팔려. 괜히 왔나봐.
정달 : (실실 웃는다) 아쭈. 야, 너 왜 벌써 나왔어? 이 새끼 이거, ...너 탈옥했냐?
복수 : (아직도 주눅 들었다) 나올 때가 됐지요. 2년 있었잖아, 형.
정달 : 형? 형? 말 까네, 나한테? 왜 그래, 너?
복수 : (능글대며 피식) 형두 참.
정달 : 미쳤나, 이게. 여긴 왜 왔냐?
복수 : 형보러 왔지, 뭐. (히죽히죽)
정달 : 왜?
복수 : 알잖어.
정달 : 뭐가?
복수 : (연신 히죽) 알잖어어.
정달 : ...(빤히 바라본다) ...나한테 복수하러 왔냐?
복수 : 응.
정달 : 왜?
복수 : 에이, 선수끼리 왜 이래, 정달이 형?
정달 : (눈에 힘 준다) 형 형 하지마라.
복수 : (맹하게) 왜 하지 말라 그래?
정달 : 무슨 소리야, 임마. (소곤댄다) 왜 왔어?
복수 : 알잖어.
정달 : ...복수한다고?
복수 : 응.
정달 : ...내가 증거 조작했다고?
복수 : 응.
정달 : ...(손을 오르락 내리락) ...억울하면 고소해.
복수 : 싫어어. 어떻게 똑같이 드런 놈이 되냐?
정달 : (놀라서) 너, 미쳤냐, 진짜루?
복수 : ...사실은 전화 좀 쓰려구 왔어... (수화기를 들어 버튼을 누르기 시작한다)
요즘은 경찰서에서 우산도 빌려주고, 화장실도 가게 해주고 그런다며?
정달 : 그건 파출소지, 새꺄.
복수 : (이미 통화 시작됐다) 꼬붕이냐? ... 울긴 왜 울어, 이녀석아. ... (키득) 내가 그렇게 좋으냐?... 아니. 정달이 만났어.
......낫살 깨나 먹은게, 승질은 여전히 빠시시하다, 걘... (저 편에서 뭐라는지 계속 히히덕 댄다)... 그러게.
...가죽 장갑? (정달의 가죽 장갑을 보곤) ... 몰라. 제정신이냐? 지 패션 철학인가 봐. 한 여름에 장갑끼구 똥폼잡는게..
...드럽지 않냐? 손가락에 무좀 피우구... ...주제에 골프장갑이다, 야. ...걔? 걔, 골프도 못 쳐. ...그래.
...야, 야, 야. 작업복 갖구 나와라. ...쉴 새가 어딨어. 빨랑 벌어야지. ... 응, 그래, 정달이 한테 달렸던 거기.
...응, 응. 매표소 앞. ... (끊는다) 전화 잘 썼어, 형. ...자주 보겠네, 우리?
(나가려다말구 우산을 보여 준다) 나, 우산 샀다. (그리곤 나간다)
얼이 빠져 복수를 바라보던 정달. 담배불을 붙인다.
정달 : (약이 바짝 올라 담배를 피워 대더니 중얼댄다) ...지가 우산산게 나랑 무슨 상관이야? 약 먹었나, 저새끼?
(벌떡 일어서더니) 아, 약올라. 되지게 약 오르네. 이상하네. ...되지겠네, 약 올라서...
7. # 응급실 앞 (낮)
응급실 앞 처마밑에서 내리는 비를 보며 오롯이 쪼그려 앉아 담배를 피고 있는 셋.
경을 사이에 두고 양 쪽에 정국과 기홍이 앉아있다.
경의 꽃무늬 블라우스 목덜미엔 앙증맞은 리본이 달려있다. 리본단 고양이 꼴이다.
맹한 표정으로 담배를 피고 있는 셋.
정국 : 수술만 하면 괜찮대?
경 : 응.
기홍 : 장난하냐? 수술로 다 되게?
경 : 수술로 안되면?
기홍 : 가려 먹어야지.
경 : 그렇지. 라면같은 거...
정국 : (장난) 잘 됐네. 연정이 먹을 라면, 우리가 다 먹으면 되네, 뭐.
경 : (히죽) 술두.
정국 : (신났다) 삼겹살.
기홍 : ...오징어.
정국 : 우리 먹는게 거기서 왔다리 갔다린데... 아파 죽기 전에, 굶어 죽겠다, 연정이.
셋은 늘 이렇게 시시덕댄다.
기홍 : 근데. 심혈관이 좁아진 걸, 어떻게 넓힌다는거야?
경 : 혈관에다 풍선같은 걸 넣구, 혈관을 부풀린대.
정국 : 풍선? (웃는다) 사람 몸에?
기홍 : (비실비실) 풍선을 어떻게 거기다 넣어?
경 : (웃는다) 몰라.
기홍 : (장난스럽다) 터지면 어뜩해?
정국 : (장난질) 그게 아니라, 혈관에다 풍선을 넣었잖아.
근데, 연정이 입에다 바람을 불어 넣으면, 연정이두 풍선이 되는 거 아닌가?
경 : (웃는다) 선인장 기르면 안 되겠네.
기홍 : 난로 옆에두 가지 말라 그래.
정국 : (낄낄댄다) 근데, 의사가 그래? 풍선이라구? 그게 공식명이야?
경 : (미소) 예를 들어 그렇다는 거지. (담배 한 모금)
정국 : (경에게) 수술비는 얼마래?
경 : 비싸.
기홍 : 보험 안되나?
경 : 보험되두 비싸.
정국 : 연정 어머니 돈 없잖어? 노점하시면서 그거... 되겠어?
경 : (여유롭다) 우리 통장 있잖아.
기홍 : 헥. (아까운 듯) 일년 꼬박 모은건데...
경 : (거리낌이 없다) 일년 더 모으지, 뭐.
기홍 : (눈살 찌푸린다) 그럼 앨범은?
경 : (놀리듯) 날샜지. (그러면서 기홍의 찌푸린 미간을 손가락으로 펴 준다) 아까운가?
기홍 : ...(괜시리 성을 낸다) ...누나, 무슨 말을 그렇게 하냐? 내가 뭐라 그랬다구 그러냐? 내가 언제 아깝다 그랬냐?
정국 : (대뜸) 아깝긴 하지. 미안한 얘기지만...
기홍 : (대뜸) 그지?
경 : 언니 없으면 앨범도 못 낸다, 바보들아.
정국 : ...(생각, 수긍) 그러네.
기홍 : 그건 아니지, 노래야 뭐, 나두 하면 되고...
정국 : 니 노래가 노래냐? 주정이지.
기홍 : 에유 씨, 나 노래 잘 해.
경 : 어머니. (급히 담배불을 끄며 벌떡 일어선다)
둘도 덩달아 일어선다.
잰걸음으로 셋 앞으로 걱정스레 다가오는 연정의 어머니는, 한 눈에 가난이 보인다.
연정모 : 연정인? 괜찮다지?
경/정국/기홍 : (동시에) 네/네/아니요.
경과 정국이 기홍을 야린다.
놀라서 기홍을 보는 연정모.
연정모 : ...(확인하듯 기홍만 본다.)
기홍 : ...어? 내가 괜찮다 그랬는데...
8. # 병실 (낮)
병실에 앉아 엉엉 울어대는 연정모 탓에 모두들 벙쩌있다.
그닥 울 일은 아니라고들 생각한다, 환자를 포함해서 모두...
연정 : (사태 수습이 안 된다. 오버하는 엄마땜에 쪽 팔린다.) 엄마. 왜 이래? (셋을 보며) 우리 엄마, 왜 이러냐? 황당하네.
연정모 : 엉엉... 다니던 직장 때려치고 기타 사왔을 때, 딸년 머리채를 죄 뜯어 놓고, 기냥... 엉엉...
돈 안 벌고 기타나 치구 다닌다구 구박하구, 엉엉... 허구헌 날, 라면만 먹는 걸 기냥, 엉엉... 밥 한 낄 못해 맥이구, 엉엉...
에미라는 년이, 딸년 하구 싶은 거, 팍팍 밀어 주지두 못하구, 엉엉... 에미년이 후져 빠져서... 엉엉...
딸년이 아픈 것도 몰라주고... 엉엉.... 수술비도 없어서 애들 코묻은 돈이나 빌어쓰고...엉엉.
연정 : (어이가 없다) 초상났네, 아주. (연정모의 눈물을 손으로 닦아주며) 칼두 안대는 수술이래요.
(경에게) 뭐? 앤지오라 그랬나, 그 수술이? (다시 연정모에게) 한 마디루 수술도 아니야아.
연정모 : (더 서럽다) 혈관이 세 군데나 쪼그라 들었는데... 그게 말이 돼, 이년아?
연정 : 환장하겠네. (셋을 보며 다그친다.) 야, 뭐라구 좀 해봐.
정국 : (기홍의 옷자락을 흔든다) 빨랑...
기홍 : 어머니. 풍선 아시죠? 풍선만 넣으면 돼요.
연정모 : (의아하다) 무슨 풍선?
기홍 : ... (웃는다) 그걸 알면 제가 의사게요? (연정에게) 누나, 하드 먹을래?
연정 : 응? ...그래. (연정모에게) 엄마, 그 동안 엄마 잘 한거 없으니까, 하드나 사와.
연정모 : 잘났다, 이 년아. (일어서며) 근데, 하드 먹어두 돼?
연정 : 돼, 돼. 얼른 사와.
기홍 : (연정모의 팔짱을 낀다) 어머니, 같이 가요. (정국의 손을 잡아끈다) 형두 가자.
연정모 : 몇 명이지? (눈물을 찍어내며 속셈을 하듯 손가락으로 사람들의 숫자를 꼽으며 문쪽으로 걸어간다.)
기홍과 정국에 이끌려 문앞까지 나간 연정모가 슬그머니 뒤돌아서며 다시금 물끄러미 연정을 바라본다.
연정모 : 연정아.
연정 : (귀찮은 듯) 왜 또?
연정모 : ...(어둡다) ...에미가... (이제 눈물은 없다)
연정 : ...
연정모 : ...(고개를 돌린다) ...면목이 없다. 너무, 가난해서...
순간, 적막해진다. 연정모, 쓸쓸한 뒷모습을 남기곤 정국일행과 함께 나간다.
연정, 어두워진다.
연정 : ...(쓴 침을 삼킨다. 이내 경에게) 담배폈냐?
경 : 응.
연정 : 냄새가 진동을 하네. ...끊어. 니네 땜에 나 이렇게 됐어. 알어, 너? (생트집이다)
경 : 왜?
연정 : 간접흡연.
경 : 끊지, 뭐.
연정 : ...예술을 한단 년이 그렇게 단순하냐? ...이래두, 응. 저래두, 응. (연정모 생각에 우울하다. 한숨이 난다.)
경 : ...(연정의 마음을 읽었다. 갑자기 가방에서 악보를 내민다) 언니. 언니가 지난 번에 썼던거, 그 가사에 곡 붙였다.
연정 : (곡을 들여다 보다가) 괜찮네. (멍하니 창 밖을 본다) 전 경.
경 : 음.
연정 : (멍하니 창 밖만 본다) 보컬, 기타, 구해라.
경 : ...
연정 : 나, 돈 벌래.
경 : ...
연정 : 저 아줌마... 저렇게 놔두면 안되겠다. ...마음이 ...쓰다.
경 : ...하지만...
연정 : ...
경 : ...그래두...
연정 : 뭐.
경 : ...(눈을 내리깐 채) 그러면, 우리... 언니 수술비 안 내줄래.
연정 : ...(어이가 없다) 뭐 이런게 다 있냐? ...
경 : ...(계속 눈을 내리깐 채, 악보를 가리킨다) 그거 한 번 불러 봐.
연정 : 싫다면?
경 : (울먹) 수술비 안 내 줘.
연정 : ...
경 : ...(울먹)
연정 : 가지가지다. ...히히, 또라이.
경 : ... (울먹)
연정 : (힐끔힐끔 경을 보며 립싱크를 하듯 작은 소리로 그러나 자세는 락커인 채로 한소절 씩 부르며 확인 받는다) 됐냐?
(다시 자세 나오고 한 소절) 됐냐? (다시 한 소절) 됐냐?
경 : ...(끄덕)
연정 : 좋군. (또 부르며) 됐냐? 인제 좀 웃어 보시지?
경 : (미소) 언니.
연정 : 아주 생쇼를 시켜라. 수술비 걸구...
경 : ... 우리...
연정 : ...
경 : (찬찬히 생각하듯 말한다) 우리 밴드 이름으루.... 앨범 딱 두 장만 내자. 첫 앨범, 칭찬 받으면, 뭐...
그 다음이야, 저절로 풀리지만... 막말루 몽땅, 우리꺼 별루다 그럴 수도 있어. 근데 첨부터 잘하기가 쉽나?
그래서... 앨범 한 장 더 해 보구.. 그때두 사람들이 꺼지라 그러면... 우리두 우리꺼 계속 쪽 팔리면... ...그 땐, 말자.
...될 때까지 하고 싶진 않아. 힘들어. (연정의 손가락을 만지작 댄다) 그 목표 하나만 세워 놓구, 조금만 여유 갖자.
...그 동안 게으름 피지 말구, 스폰서두 열심히 구하구, 앨범두 만들구, 공연장두 찾아보자.
...대신, 다 같이 아르바이트, 많이 해서, ...그 돈은 전부, 언니 어머니 드리자.
연정 : ...그 돈을 왜 우리 엄말 주냐?
경 : ...
연정 : ...(뚫어져라 본다) 그지냐?
경 : ...(고개 숙인다) ... 언니 엄마... 가난하잖아. ...미안해.
연정 : ...착한 년. (창밖을 보며 나직이) 뭐가 미안하냐? 돈 준다는데...
경 : (덩달아 창 밖을 본다) 비 그쳤다.
연정 : (우울하다) 우리 엄마, 뭐하니, 밖에서?
경 : ...하늘 봐. (목소리가 아득하다)
창밖 너머, 연정모의 모습이 조그맣게 보인다.
기홍과 정국이 아이스바를 빨며 연정모를 바라보고 섰고, 연정모는 손을 뒷짐지고 먼 하늘만 바라본다.
9. # 지하철 공중 화장실 (낮)
나란히 서서 넥타이를 묶는 복수와 꼬붕. 둘다 양복차림이다.
복수 : (목을 돌려보며) 좀 낀다.
꼬붕 : 살쩠구만.
복수 : 그러냐?
꼬붕 : (복수의 가슴을 만지작 댄다) 어유, 젖꼭지도 젖 만하네.
복수 : (꼬붕의 손가락을 앙 먹어버린다. 그리곤 이내) 비만인가? 대구리두 자주 아프구...
꼬붕 : 살 빼는 약 구해주까?
복수 : (젤을 짠다) 그딴거 마약이야, 임마. 뽕.
꼬붕 : 아니야아. 먹고, 살 빼서 날아다니는 새끼 봤어.
복수 : (젤로 머리를 넘긴다) 그거 뽕 아니면, 정달이 손에 장을 지진다, 내가.
꼬붕 : (낄낄) 형은 정달이 손가락이 무지하게 싫은가봐.
복수 : (거울을 보며 헤어 스타일을 다듬는다) 발가락이 잘렸어야 되는데, 밖에 못 기어 나오게...
꼬붕 : 형이 걔 손가락만 그렇게 안했어두, 지금처럼 미친개같이 굴진 않았을 거야, 정달이? 그지?
복수 : (젤 묻은 손을 씻으며) 지 운명이지, 뭐.
꼬붕 : 히히. 총두 못 쏠걸, 경찰놈이? 아닌가? 왼손으로 쏘나?
복수 : 꼬붕아.
꼬붕 : 응?
복수 : (점잖게) 너 왜 정달이한테 말까냐?
꼬붕 : ...
복수 : 너랑 나이차가 20년도 더 날거다, 아마? 한 25년?
꼬붕 : 형은?
복수 : 나야, 임마. 그 되져 죽일 놈의, 복수의 화신이니까 그러지. ...아저씨라 그래. 곰 아저씨. ... 호칭 좋잖니?
니 선배들이 다 알아서 만든 말이니까, 전통 지켜라.
꼬붕 : ...싫어.
복수 : 자꾸 말 시킬래? 나 오늘 지나치게 야부리 깠어. 목 아퍼.
꼬붕 : 아, 내 맘이야.
복수 : (바락 소리친다) 걔가 너한테 피해준 거 있어, 새꺄?
꼬붕 : ...(부르튼다)
복수 : 빵 한 번 안갔잖냐? 걔가... 너 쳐넣고 싶으면, 그걸 못 하겠냐?
꼬붕 : ...
복수 : 어지간하면 인간관계, 신경써. (등을 토닥인다) 넌 먼저 운동장에 가 있어. 형아가 빨랑 끝내고, 따라갈게.
그리고 가방 잘 챙겨. 우산 들었으니까...
꼬붕 : ...(우울하다) 그 새끼가 얼마나 드런 새낀데... 형은 몰라... (울상을 짓고 횡하니 나가버린다)
복수 : (걱정스런 표정으로 꼬붕의 등 뒤로 혼잣말) ...아저씨라 그러라니까...
10. # 매표소 광장 (낮)
복수가 화장실 밖으로 나와서자 매표투입구 쪽으로 꼬붕이 걸어간다.
이 때, 들리는 애국가. 투입구 쪽 벤치에 앉아, 신문으로 얼굴을 가린 정달의 핸드폰 소리다.
꼬붕 : (정달을 지나치며) 아저씨, 지나가던 똥강아지두 짭샌 줄 알구 짖어 대겠네..
나라사랑두 좋지만, 핸드폰으로 애국할 일 있습니까? (그리곤 투입구 안으로 들어간다)
정달 : (소곤댄다) 조 새끼가 봐줬더니... (핸드폰을 끄며 복수를 노린다)
잡지 판매대 앞에서 시계를 보며 서성이는 건장한 남자에게로 접근하는 복수.
남자가 판매대 유리막 위에 걸린 연예 신문의 비키니 사진을 보는 사이,
복수가 남자 앞으로 슬쩍 서며 신문 한 장을 산다. 나머지 한 손은 동시에 등 뒤로 돌려 남자의 상의 단추를 연다.
복수가 신문을 사들며 돌아서더니 남자의 상의를 가리는 듯, 신문 밑으로 손을 넣어 남자의 상의 안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낸다.
그리곤 신문 안에 넣으며 신문을 접는다. 복수의 섬세한 손놀림이 느껴진다.
부리나케 복수를 향하여 걸어오는 정달의 미소.
복수도 여유있게 미소지으며 정달을 향해 걸어온다.
정달 : (허리춤에서 꺼낸 수갑을 꺼내며) 들켰지, 새꺄?
복수 : (정달이 수갑을 꺼내는 새, 신문 안에 있던 지갑을 정달의 주머니에 흘려 넣는다)
정달 : (수갑을 채우곤 신문을 뺏는다) 짜식아. 너두 물 갔다. (신문을 열어본다) 어?
복수 : (손을 내밀며 미소)
정달 : (얼이 빠졌다. 그리곤 복수의 주머니를 뒤져 보지만 없다)
복수 : (소곤댄다) 에유씨, 뭐해? 확 챙피준다, 시민들 앞에서? 풀어.
정달 : (마지못해 수갑을 푼다)
복수 : (가면서) 약 오르지, 빙신아? 니가 물 갔어.
복수, 유유히 투입구로 걸어 들어가고 정달, 매표소 앞에서 사라져가는 복수만 바라본다.
정달 : (얼굴이 발갛게 달아 오른다. 소리를 바락바락 지른다) 악. 악. 악. (주변 사람들이 바라보자) 뭘 봐, 씨.
(분을 삭이며 수갑을 주머니에 넣으려 하는데 복수가 턴 지갑이 잡힌다)
정달 앞에 어느새, 매표소 앞의 그 남자가 서 있다. 의아한 눈으로 자신의 지갑을 바라보는 남자. 서로 한참을 바라본다.
정달, 아무일 없다는 듯 지갑을 돌려주며 돌아서는데... 남자가 수갑을 꺼내, 정달의 손에 채운다.
남자 : (놀리듯) 나, 경찰이다. 이 도둑놈아.
11. # 중고음반사 (낮)
중고 CD를 뒤적여 보는 경. 경을 등지고 마주서서 음반을 고르는 남자, 동진이다.
좁은 통로라 부딪치기 십상이다. 결국 동진과 경이 부딪친다.
동진 : 미안합니다.
경 : (무심히) 저두요. (이내 CD 고르기를 한다. 손에 King Crimson의 앨범 [In the court of the Crimson King]을 집어든다)
동진 : (경의 어깨너머로 자켓을 곁눈질한다) 그 앨범은 너무 익숙하지 않나? Epitaph 좋아서 그러나 본데...
(같은 자리에서 CD를 뒤적인다) 킹 크림슨 앨범 중에 Red..Red.. (경은 아랑곳 않고 주절댄다.)
그 앨범에, 에피타프 보다 몇 배는 더 죽이는 곡 있어요.... Starless... (손가락을 들어 보인다) 12분 18초의 전율...
(다 뒤적이더니) 으응? 없네. (건너편 카운터 주인에게) 아저씨. 킹 크림슨, 레드 없어요?
주인 : 거기 없으면 없어요.
동진 : 없대네에. (아쉽다는 듯 경을 본다)
경 : ...(이런게 있나 싶어 그저 바라만 본다)
동진 : ...(빤히 바라보는 경의 눈길에) 무안하다아.
경 : ...
동진 : (머리를 긁적인다) 아아. 내가 잘난 척 했구나.
경 : 네. (다시 앨범을 뒤적인다.)
동진, 경의 옆모습을 보며 관심어린 미소를 짓는데,
이때, 하얗고, 털이 복실복실하고, 손바닥 만큼 작고 귀여운 강아지를 안고 들어오는 검은 정장의 세련된 여인.
동진에게 와서 강아지를 안긴다. 강아지의 머리엔 분홍색 리본이 달려있다.
동진 : (놀라며) 어, 자기야.
여자 : 개, 내려놔 봐. (동진이 개를 내리자 마자 동진의 뺨을 후려친다.)
동진 : (눈을 똥그랗게 뜬다)
여자 : (냉정하게 낮은 음성으로) 내가, 니 개, 똥이나 치워 줄 여자로 보이니? (이내 경을 뚫어지라 바라본다) 너니?
경 : 네?
여자 : (경의 뺨을 후려치곤 아래 위로 훑는다) 옷 꼴 좀 봐라. (경 앞섶의 리본을 툭 치며 강아지에게 턱짓을 한다) 셋트로 노냐?
(그리곤 동진을 본다) 니 수준도 참 그렇다. 저런 촌닭은 어디서 구했니? 찾아내는 것두 일이겠다.
(팩 돌아서 나가려다 다시 달려와 동진의 뺨을 한 번 더 후려치고 간다)
동진 : (창피해 실금실금 웃는다) 거참. (경에게) 미안해요, 저 여자가 오핼해서... 아가씨, 볼이 빨가네. (겸연쩍은 웃음)
그 여자 승질하곤... (그러더니 별일 아니라는 듯 뻔뻔스레 CD를 들고 카운터로 간다) 카드 되죠?
주인 : 네. (계산을 하며 눈치를 본다) 아프시겠어요.
동진 : 아뇨. 안 아파요. (카드를 돌려받고 나가며 경에게) 미안해요, 아가씨.
경은 갑작스런 사태에 전혀 대처할 수가 없이 멍하니 자기 뺨만 감싸고 서 있다.
동진이 나가자, 주인이 CD를 발견한다.
주인 : 아저씨. 이거 가져가세요. (바삐 뛰어나간다)
이 때, 경의 발밑에서 강아지가 혀를 내밀고 있다. 주인이 그대로 CD를 들고 돌아온다.
경 : 아저씨. 그 아저씨, 강아지 두고 갔는데...
주인 : 갔어요, 그 사람. 쪽팔렸나 봐. 막 뛰는데, 잡을 수가 있어야죠. (낄낄댄다) 바람폈나 봐요, 그 아저씨.
경 : (강아지를 건낸다) 그럼, 이거..
주인 : (경악한다) 왜 이래요?
경 : 그 분 거예요.
주인 : 어쩌라구요?
경 : 그 사람 오면 주세요.
주인 : 아, 싫어요. 난 개 무서워요. 아가씨가 갖구가요.
경 : 그 사람이 찾으면...
주인 : 안 올지도 모르잖아요.
경 : 찾으면 어뜩해요.
주인 : 모른다 그러죠.
경 : 나두 개 안 좋아해요.
주인 : 그냥 갖다 버려요, 그럼. (쓰레기 봉투를 내민다.)
경 : (갑자기 소리를 바락바락 지른다.) 왜들 이래요, 정말? 내가 그렇게 만만해요? 몰라요, 나.
(그리곤 주인 발밑에 강아지를 내려놓고는 뺨을 만지며) 아아... (신경질) 뭐, 그딴게 다 있냐?
주인 : (강아지가 발을 핥자 소리치며 도망간다) 악.
주인, 강아지가 무서워 악악대며 도망가고, 강아지는 주인을 따라가고, 주인은 상점안을 뛰어다니며 공포에 쩔었다.
입을 벌린 채, 그 광경를 바라보는 경.
12. # 야구장 (낮)
치어리더들이 꽃술을 들고 응원을 하고 있다.
미래는 치어리더 틈에 껴서, 응원도 않고 그 자리에 목석처럼 멈춰서 있다. 한 곳만을 응시하며...
표정이 난하다. 째려보는건지 유혹을 하는 건지... 강렬하긴 하다.
미래의 시선 끝에 복수가 있다. 복수 옆의 꼬붕은 헤벌레 미래를 바라본다.
옆에서 춤을 추는 리더가 미래의 팔을 툭 치며 응원을 종용한다. 신경도 안 쓴다.
미래, 강렬한 눈길을 한 순간도 거두지 않고, 급기야 단상에서 내려와 성큼성큼 복수에게 다가간다.
복수, 주변의 눈치를 살핀다.
미래, 한 손으로 복수의 머리채를 잡아채서 뒤로 젖힌다. 그리곤 키스.
관중들 조용해진다.
복수의 입술이 미래의 립스틱 자국으로 발갛게 범벅이 됐다.
미래 : (복수의 귀에 속삭인다.) 집에서 보자, 고 복수. (그리곤 귀볼을 앙 문다)
미래의 카리스마에 눌려 조용해진 관중석을 거쳐 다시 단상으로 오른 미래.
미래 : (강렬한 눈빛 그대로 머금고 주변 치어리더들에게 고개짓을 한다) 원, 투, 쓰리, 훠.
치어리더들의 섹시버젼 치어가 시작된다. 환장하는 관중들.
13. # 은행 (낮)
은행 창구 앞에서 100만원 짜리 수표 다섯 장을 받아드는 경.
14. # 은행 앞 경의 집 앞 정류장 (낮)
정류장으로 걸어가던 복수와 꼬붕. 그들의 레이더에 경의 뒷모습이 보인다.
경은 디스크 맨을 귀에 꽂은 채, 둘러 맨 가방으로 신경을 곤두세운다. 계속 가방을 어루만지는 경.
이어폰을 통해 흐르는 킹 크림슨의 음악에 눈까지 감는다.
슬그머니 경의 뒷편에 선 복수. 경의 옆 켠 가방 쪽에 선 꼬붕.
경은 가방을 손으로 감싸 쥘 뿐, 그들을 의식하지 못한다.
복수의 손가락엔 어느새 면도칼이 쥐어져 가방 옆구리를 찢는다. 옆구리에서 빠져 나오는 경의 지갑.
이 때, 고개를 뒷 쪽으로 획까닥 돌리는 경. 복수와 눈이 정면으로 마주치고, 놀라서 똥그래진 복수의 눈.
복수, 가방 안에서 미처 손은 빼지도 않은채, 밑 쪽으로 지갑을 떨어뜨리면,
꼬붕은 눈 깜짝 할 새, 가방 밑 쪽으로 떨어지는 지갑을 받아 버스를 타고 떠난다.
이 때, ‘멍’하며 찢어진 가방 사이로 복수의 손을 물며 튀어 나오는 강아지.
복수가 놀라 뒤로 물러서면, 강아지는 가방 안에서 떨어져 도로로 깡충 뛰어간다.
경이 강아지를 향해 도로로 몸을 날리려 할 때, 복수의 눈에, 경을 향해 달려오는 버스가 보인다.
순간적으로 경의 손목을 잡는 복수. 그러나 경의 손목시계만 복수의 손 안에 들어오고,
경은 도로 위, 강아지에게 달려간다.
경을 향해 돌진하는 버스. 비명소리와 함께 눈을 감는 경.
역시나 눈을 감는 복수.
버스 타이어가 기분나쁜 소음을 낸다.
슬그머니 눈을 뜨는 복수. 경의 코 앞에서 멈춰선 버스.
안도의 한숨을 쉬는 복수.
버스를 바라보고 서서 멍한 경. 이내 뽕먹은 미소를 짓곤 꼴까닥 졸도한다.
버스기사가 내려서고, 군중에 휩싸인 경을 뒤쪽에서 돋음발로 바라보는 복수. 다행스런 표정으로 돌아서려는데,
어느새 강아지가 복수의 발 언저리에서 복수를 바라보고 있다.
발로 툭툭 경이 뻗어있는 안쪽으로 밀어넣으려 하지만 계속 복수의 발에 붙어 있다.
복수, 뒷걸음질치며 강아지를 계속 톡톡 차서 넣으려 하지만 소용없다.
마구 달리기 시작하는 복수. 복수를 따라 달리는 강아지.
15. # 병실앞 복도 (저녁)
의사 앞에 선, 경과 정국, 기홍. 경은 뒷통수에 반창고를 붙였다. 웃긴다.
의사 : (벽에 기대서서 팔짱을 낀 채) 글쎄, 뭐 당장 응급상황은 아니지만, 수술을 늦게 해서 좋을 건 없어요, 그죠?
게다가, 좁아진 혈관이 심장쪽 혈관이니까, 뭐 항상 응급이죠. 그렇지 않겠어요?
여유 부릴 일 아니예요... 심장병은 문제가 되면 단박에 가는 거니까... 하여간 무조건 빨리 합시다, 수술. 네?
(그리곤 바삐 차트를 보며 다른 병실로 들어간다)
한 쪽 귀퉁이로 가 서는 셋. 맥이 빠져 있다.
정국 : (궁시렁) 의사들은 꼭 저딴식으로 겁을 주드라.
기홍 : (발끈) 누난, 그 돈을... (궁시렁) 뒤집어지겠네.
경 : ... (한동안 말이 없다. 다시 다부지게) 되는대로 구해보자, 돈.
기홍 : 어떻게?
경 : 우리 아빠.
기홍 : 글렀어. 누나네 아빠면 안돼. (퉁퉁 불어서는 돌아선다) 부산 갔다 올께. (성큼성큼 복도 끝으로 걸어간다)
경 : ...동생한테 달래게?
기홍 : 안될 확률 90프로야. (코너를 돌아 사라진다)
정국 : (얼굴을 쓸어 내린다) 작업실, 그거 빼자. 수술비 반값은 나오잖어.
경 : 오빠, 잠은 어디서 자구...
정국 : 잠 안자면 되지, 뭐. 평생. ...수표 신고는 했지?
경 : 응... (한숨) ...강아지두 같이 잃어버렸어.
병실 문틈으로 연정의 모습이 보인다. 연정은 침대 맡에 엎드려 잠든 연정모의 머리칼을 어루만지고 있다.
걱정스레 연정을 바라보는 경.
16. # 미래의 집 - 거실 (저녁)
미래의 집 거실 바닥에서 잠을 자는 복수. 복수의 배 위에 강아지가 포개어져 잠을 자고 있다.
이 때, 문을 열고 들어오는 중학생 현지. 고개를 갸웃한 채, 누워자는 복수 앞에 선다.
한참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발로 복수의 배를 쿡쿡 찌른다.
복수가 뒤척이자, 강아지가 바닥으로 떨어진다.
현지, 복수가 깨어나지 않자, 다시 발끝으로 복수의 가슴을 쿡 찌른다. 역시나 깨어나지 않는다.
현지, 이번엔 발끝으로 복수의 똥꼬를 푹 찌른다.
화들짝, 놀라서 눈을 뜨는 복수. 누워있는 복수의 눈에 못마땅한 표정의 현지가 들어온다.
현지 : 너, 왜 여기서 자냐? 니네 집 놔두고...
복수 : (부시시 일어서며) 기집애, 오빠 보니까 반갑냐? 보자마자 앙탈을 부리네, 오빠한테...
현지 : 놀구 있네. ...밥은 먹었냐?
복수 : (배시시 웃는다) 아니. ...배고프다, 야.
시간경과.
현지가 거실 앉은뱅이 탁자 앞에서 밥을 먹는다. 혼자서 맛있게...
복수는 한 쪽 벽에 등을 기댄 채, 눈살을 찌푸리며 TV를 보고 있다. 연신 리모콘을 돌리고 있다.
현지 : 야, 테레비 고장나. 왜 채널은 줄창 돌려대냐?
복수 : 밥이나 먹어라. 돼지야.
현지 : 밥 안 줘서 삐졌냐?
복수 : 삐졌다, 돼지야. (투덜댄다) 오빠가 저를 얼마나 이뻐해 줬는데... 응? 이뻐해 주면 뭘해? 다, 소용없어, 다.
현지 : 누가 이뻐해 달랬냐? (강아지를 보며) 저 털장갑은 어서 훔쳤냐?
복수 : 너 줄려구 샀다. 고맙냐?
현지 : 내가 살찌워서 키워주면, ...가져가서 잡아먹게?
복수 : ...(놀라서 현지를 바라본다) 천재다, 천재. 생각이 어떻게 글루 솟구치냐?
존심 상해서 나, 그만 가련다. 잘 있어라, 돼지야. (강아지를 안고 벌떡 일어선다)
현지 : 너 혼자가라, 장갑은 두구...
이 때, 문을 벌컥 열고 복수를 향해 달려오는 미래.
미래가 복수를 향해 뛰어와 목에 팔을 두르고 다리까지 들어서 복수의 허리를 감으며 매달린다.
바닥에 나뒹구는 둘. 복수가 미래를 밀어낸다.
복수 : 현지 있잖아.
미래 : 어때? 쟤가 뭐 애야? (밥술을 뜨는 현지를 보며) 밥 먹냐?
현지 : 그럼 숟가락 먹겠냐?
미래 : (귀엽다는 듯 웃으며) 아이그, 싸가지. (복수에게) 오빤 벌써 다 먹었어?
복수 : (현지의 눈치를 보곤 고개 숙인다) 몰라.
미래 : ...(눈치깠다. 현지곁으로 가서 수저를 빼앗는다.) 야, 밥 갖구 와.
현지 : 밥 있잖어, 여기.
미래 : 형부 밥.
현지 : 형부가 누구야? 쟤?
미래 : (현지의 뒷통수를 냅다 갈긴다) 얼른.
복수 : (당황) 야. 먹었어. 아까 먹었어, 나.
미래 : (복수에게) 넌 닥치구 앉아있어. (현지에게) 갖구 와, 죽기 전에...
현지 : ...없어, 밥.
미래 : (한참을 야리더지 부엌으로 가서 전기 밥솥을 가져온다) 이 큰 솥에 달랑 한 그릇 한거야?
현지 : 응.
미래 : 왜?
현지 : 나혼자 먹을라구.
미래 : ...
현지 : (바락) 쟤는 쟤네 집 가서 먹으라 그래.
미래 : (밥통으로 현지의 머리를 통통 때린다) 야, 꺼져.
현지 : 왜?
미래 : (밥 그릇을 빼앗아, 복수 앞에 상을 갖다 놓는다) 오빠, 먹어.
복수 : ...아니야. 현지 줘.
미래 : (화가 나서 견딜 수가 없다) 먹으랄 때, 쳐 먹어. (현지에게 숟가락을 던져 주며) 넌 숟가락이나 먹던가.
(피식 웃으며) 저 기집애 승질이면, 숟가락도 뜯어 먹을거야.
현지 : (이를 앙물며 숟가락을 뜯는다. 그러다 입술에서 피가 찍 난다. 엽기다.)
미래 : (놀래서) 야.
복수 : (놀란 표정으로 일어서며) 나, 안 먹을래. 무서워서 못 먹겠어.
현지 : (일어서며 제 방으로 향한다) 너 또 오면, 다음엔 칼 먹을거야. (문을 쾅 닫고 들어간다)
복수 : ... (숨을 몰아 쉰다) 나, 그냥 갈래.
미래 : (피식 웃으며) 오빠, 쟤 되게 웃기지? 근데 저거, 공부되게 잘 한다. 전교 1등이야. 천재야, 쟤.
복수 : 천잰건 알어. 아까 봤어, 천재. 갈게.
미래 : 자구 가, 오빠.
복수 : 야. 미래야. 너 왜 자꾸 오빠라 그래?
미래 : 그럼?
복수 : 너, 나보다 두 살 많다며?
미래 : ...
복수 : 주민등록증 나이, 그거 3년이나 늦게 올린 거라며?
미래 : ...
복수 : (곁눈으로 웃으며) 지가 누나면서...
미래 : ...누가 그래? (의심어린 시선을 현지의 방문쪽으로 꽂는다)
복수 : (배시시 웃는다)
미래 : (아무렇지도 않은 듯 미소) 아니야. 뻥이야, 저 기집애.
복수 : (놀리듯) 누나.
미래 : (웃는다) 뻥이라니까.
현지 : (E) 진짜야.
미래 : (계속 미소) 아니야.
현지 : (E) 진짜야.
미래 : (얼굴이 일그러진다) 죽어 봐, 너. (현지의 방문을 향해 달려간다)
복수 : (미래의 허리를 감으며 말린다) 야아. 그래두 어려보여, 너.
미래 : (숨을 돌리며) 진짜?
현지 : (E) 뻥까지 마. 엉덩이가 흐물흐물해, 늙어서.
미래 : (복수를 밀어젖히며) 비켜. (현지 방문을 열려하지만 잠겼다.
그러더니 열쇠꾸러미를 가져와서 이것저것 열쇠를 맞추어 본다)
복수 : (피곤하다. 강아지를 들고) 나, 간다.
미래 : 응, 잘가. (열쇠에 신경쓰느라 정신없다)
현지 : (이 때, 문을 발칵 열며 나온다) 야. 복수,
미래 : ...
현지 : 장갑 두구 가. (복수에게 와서 강아지를 빼앗아 들고 들어간다)
벙쪄서 현지를 바라보는 둘.
17. # 버스 정류장 (밤)
복수의 팔짱을 낀 채, 버스를 기다리는 미래.
복수 : 들어가지.
미래 : (애교) 집까지 쫓아 갈거야.
복수 : 현지 자꾸 혼자 두지 마라. 외롭다. 얼른 가.
미래 : ... (눈길이 따스해진다)
복수 : 왜?
미래 : 현지, 안 밉지?
복수 : (무심하게) 이쁘게 생겼잖아, 기집애.
미래 : 나 닮았어, 그지?
복수 : 닮진 않았지. ...(눈도 마주치지 않고) 넌 몸이 죽이지.
미래 : ...그게 더 매력적이지, 응?
복수 : 글쎄, 뭐. 늘 그런 건 아니지 않나? 어? 차 왔다. 갈게.
(차에 오르려다 말고) 아, 참. 이거 가져. (경의 시계를 주곤 재빨리 차에 오른다)
미래 : (시계를 바라보곤) 오빠, 잘 가. (차가 떠난다)
떠나는 차를 바라보는 애잔하고 행복한 눈빛의 미래. 차가 멀어지도록 그 자리에 섰다.
차창 밖으로 오랫동안 그 자리에 선 미래를 바라보는 복수의 얼굴에 미소가 감돈다.
아주 멀어진 버스를 향해 자꾸만 걸음을 옮기는 미래.
이제, 버스는 보이지 않는다. 멈춰서 있는 미래.
미래 : (시계를 바라보는 눈가에 슬픔이 인다. 나직이) ...자구 가지. ...(눈물이 그렁) ...그냥 가냐, 섭섭하게...
미래는 그 자리를 떠나고 싶지 않다. 손목시계와 함께 그 자리에 붙박히도록, 미래는 밤거리를 지키고 있다.
18. # 복수의 집 - 방 (밤)
복수를 기다리느라 문밖으로 얼굴을 내밀며 서성이는 중섭.
열쇠 돌리는 소리가 난다. 중섭, 얼른 담배를 끄고 이부자리로 들어간다. 자는 척....
복수, 중섭이 깰까싶어 조심조심 중섭 옆에 깔린 이부자리로 들어 온다. 그리곤 등돌린 중섭과 마주 등돌린 채 이불을 덮는다.
복수 : 아빠.
중섭 : (가늘게 코곤다)
복수 : 자?
중섭 : (여전히)
복수 : 아빠, 코 안 골았잖아.
중섭 : (조용)
복수 : 담배불 안 꺼졌어. 불 나겠다, 집.
중섭 : (여전히 자는 척 하면서 복수 몰래 조심조심 재떨이 쪽으로 손을 뻗는다)
복수 : (그 자리에 자신의 손을 들이민다)
중섭 : (눈을 뜬다)
복수 : (중섭의 손등을 토닥이곤) 잘 자. (눈을 감는다)
중섭 : (수줍다) ...너두.
복수 : ...(등돌린 채) 다신, 빵엔 안 갈게.
중섭 : ...(말문이 막힌다) 고맙다.
복수의 작고 허름한 집에 밤이 깊다.
19. # 경의 집 - 식탁 (아침)
아침상을 차리는 미선과 식탁에 수저를 올리는 경.
미선 : 아가씨. 아버님 수저, 그거 아니예요.
경 : ...
미선 : (칠보가 입혀진 은수저를 올린다)
경 : 은수저네. 이쁘다. 비싸겠다.
미선 : (눈살) 이쁘긴 한데, 닦아대는게 수월찮아요. (거실쪽으로 고개를 돌리며) 진지드세요, 아버님.
신문을 들고 식당으로 들어오는 경의 부, 전 낙관. 그리고 경의 오빠 전 강.
파자마에 런닝만 입은 낙관은 자리에 앉으며 마뜩찮은 눈으로 경을 본다.
낙관 : 웬일이냐? 밤귀신이 아침상엘 다 나타나구...
경 : (주눅들어 고개를 숙인다)
미선 : (웃으며) 그러게요.
강 : ...(미선에게) 야. 기도나 해.
미선 : 네에.
미선, 혼자 기도하는 사이, 세 사람은 아랑곳 않고 수저를 든다.
낙관, 신문을 펴들고 밥을 먹는다. 강도, 경제 신문 하날 들고 밥을 먹는다.
경, 식구들의 눈치를 보며 깨작깨작 밥을 먹는다.
낙관 : (미선에게) 언제 온다구, 니 어머니?
미선 : (아직도 기도중이다)
경 : 내일 오신데요.
낙관 : (여전히 밉살스레 경을 본다) 니가 그걸 어뜩케 알어?
강 : ...(슬쩍 경을 보며 거든다) 쟨 우리 식구 아닌가요? 알건 알죠.
낙관 : (경에게) 너, 우리 식구 맞어?
경 : ...(아버지가 무섭다)
강 : (경이 답답하다) 말을 해. 벙어리냐?
경 : ...
낙관 : (눈살을 찌푸린다) 아니라잖어.
미선 : (어느새 기도를 마쳤는지) 아가씨. 인제, 아침에 밥 같이 먹어요. (밥술을 뜨며) 식구들, 오랜만에 다 모였네.
아, 어머니가 빠졌다아. (수다다) 한 명 채우면 한 명이 비구, 다른 한 명 채우면, 또 다른 한 명이 비구...
교회일두 꼭 그런 식이 되드라. 그래서 한 자리에 사람 모으는게 일이예요. 접 때, 신방 갔을땐, 한 번두 안 나오던 신도가
나왔길래, 내가 그랬어요. 누구 하나 빠지겠다. 그랬드니, 역시나 한 번두 걸러본적 없는 신도 하나가...
강 : 시끄러. 니 얘기 듣는 사람, 없어, 여기. (다시 신문을 본다)
미선 : (푼수답게 웃는다) 그러네. 아버님, 조기 드세요.
낙관 : (경의 밥 먹는 품을 탓한다) 넌 숟가락 없어? 왜 젓가락만 들고 밥을 찔러대? 숟가락으로 밥 뜰 줄 몰라?
강 : (달랜다) 아빠, 쟤 그만 보시구, 신문이나 보세요.
경 : ...(어렵게) 드릴 말씀이 있어요.
낙관 : 누구한테?
경 : (여전히 자신없다) 아빠한테요.
낙관 : 어쩐지? ...아쉬운게 있으니까 내 눈 앞에 알짱대지. ...뭔데?
경 : ...아침 드시구요.
낙관 : 얘기 해, 지금...
경 : (반항적이진 않다) 밥부터 드세요. 아빠, 밥맛 떨어질 얘기니까...
낙관 : ...(가만히 경을 바라본다) ...돈 없어.
경, 아무말 않고 밥만 먹는다. 낙관도 신문을 펼쳐든다.
20. # 안방 앞 (아침)
심호흡을 하는 경. 방문을 두드린다.
21. # 안방 (아침)
문을 열고 들어오는 경. 낙관은 넥타이를 올리고 있다.
(낙관의 넥타이는 섬유제품이 아니라, 끈달린 메달같은 건데... 명칭은 모르겠다. 텍사스 석유부자들이 잘 하고 다니는 거다)
낙관 : (힐끔본다)
경 : 아빠.
낙관 : 니 돈 니가 벌어서 살겠다며?
경 : ...친구가 수술을 해야 하는데, 형편이 어려워요.
낙관 : 너 살 궁리나 해. 남 걱정말구...
경 : ...(사정한다) 갚을께요, 아빠. ...지금 좀 급해요. 수술을 빨리 해야...
낙관 : 시건방을 떨구 앉았네. 니 입에, 내 집 쌀 들어가는 것두 아까워. 내가 미쳤어, 그런 것들 도와주게? (나가려 한다)
경 : 아빠.
낙관 : 꼭 그지같은 것들이랑 어울려 다니드라.
경 : ...(나직이) 아빠 호텔에 드나드는 깡패들 줄 돈으로, 그지들 몇 푼 도와주면 안돼요?
낙관 : 난 그지보단 깡패새끼들이 천배는 좋아. 왜냐? 걔넨 돈만 된다면, 물불을 안가려. 내 철학도 그래. (나가려 한다)
경 : (슬프다) 열심히 일을 해두, 가난할 수 있어요, 아빠. 가난하다구 다 그지는 아니지요.
낙관 : 이 같잖은 새끼야. 누군 첨부터 부자였어? 너, 몰라? 내가 죽을똥 살똥 어떻게 돈을 뫘는지?
...제대로 고생을 했으면, 왜 아직도 궁상을 떨구 살아? 다 지들 탓이지.
경 : (싸늘하다) 공무원한테 뇌물주고, 사채놀이해서 깡패 동원하구, 그렇게 살아서 좋으시겠네요.
낙관 : 것도 능력이야.
경 : 그러니까 어딜가두, 무식한 졸부 취급을 받죠.
낙관 : (경의 뺨을 때린다) ...어딜 기어 올라. (그리곤 머리채까지 잡아채서 마구 때리곤 구석으로 집어 던진다.)
경 : (엉클어진 머리칼 탓에 표정이 보이지 않는다)
낙관 : (분에 겨워 한동안 숨을 몰아 쉬면서, 한 쪽 구석에 쳐박힌 경을 한참 동안 쏘아보곤 나가려 한다)
경 : (낙관의 바지자락을 잡는다. 가늘게 목소리가 떨린다) 아빠. 돈 좀 주세요, 네? ...한번만 도와주세요.
낙관 : (한심한 듯 숨을 몰아쉰다) 벨두 없냐, 이 새끼야?
낙관, 냉정하게 뿌리치고 나간다.
경, 고개만 숙인 채, 바닥에 꼼짝도 않고 앉아있다. 휑한 표정이지만, 결코 눈물 흘리지 않는다.
22. # 마을 버스 (낮)
마을 버스를 운전하는 중섭. 정류장에서 문이 열리면, 정달이 탄다.
정달, 빙글 웃으면서 풀썩 올라탄다. 중섭, 정달을 보니 기분 잡친다.
정달 : (중섭의 뒷 쪽 좌석에 앉아있는 할머니를 보며) 할머니, 저 뒷 쪽 자리로 좀 옮겨 앉으세요.
여긴 사고 나면 젤 먼저 골로 가는 자리예요.
노파 : (아래 위로 훑는다) 어딜 찝쩍대, 이놈아.
정달 : ...아구, 정정하시네.
건들대는 정달의 모습을 백미러로 보고 있는 중섭.
정달 : (결국 중섭 옆 기둥 손잡일 잡고 선다) 서서 가야겠네. 왜 안 가요? 오라이.
중섭 : 요금 내셔야지.
정달 : (수표를 꺼낸다) 이거 밖에 없는데...
중섭 : 통에 집어 넣어요.
정달 : 거스름 돈 있어요?
중섭 : 그 자리에 서서... 차타는 사람들 내는 요금이나 챙기슈. 그걸루 거스름 돈 모으면 되지, 뭐.
하루죙일, 걷어야겄네. ...한가하셔?
정달 : 아, 짜게 군다. 아드님이 돈두 잘 벌면서...
중섭 : (급출발을 한다)
정달 : (휘청)
중섭 : ...
정달 : 복수 뭐 해요?
중섭 : 집에서 자요.
정달 : 일은 언제하구?
중섭 : ...우리 복수, 인제 일 안해요.
정달 : (냉소) 헤. 그럼 뭐 해요?
중섭 : 공부. 대학 공부.
정달 : 헤. 경찰대학을 보내지 그래요. 전공도 살릴겸...
중섭 : 안될 거 없지요.
정달 : 지가 그래요? 일 안한다구?
중섭 : 예.
정달 : 지 맘대루 되나? 손가락이 저절로 돌아가는데?
중섭 : 진지하게 그럽디다. 깜빵은 다신 안 간다구.
정달 : 얘기가 다르네. 빵에 안 간다 그랬지, 일 안한단 말은 아니네.
중섭 : 그게 그 말 아니요?
정달 : 다르지요. 일은 하고, 들키진 않겠다. 난 그렇게 접수했는데...
중섭 : ...
정달 : 자식새끼 하나 있는게 고생하는 에비 맘도 몰라주고... 지 아버진 이렇게 점잖은데...
중섭 : ...니 에비두 안됐다.
정달 : ...
중섭 : 아무한테나 촐싹대다가, 아구창 여러번 나갔겠다, 너두.
정달 : ...(매섭다) 나 꼭지돌면, 지금 같지 않아.
중섭 : (한손으로 사물함을 뒤지더니 약병 하나를 정달에게 건낸다)
정달 : 뭐요?
중섭 : 손에 무좀 걸렸다며? 내 발가락에 바르던 거야. 댁 써.
정달 : ...(눈빠지게 야리더니) 자식 사랑 그 딴 식으로 하면 못써, 당신. (문을 탕탕 친다) 문열어.
중섭 : (달리는 차를 순순히 세워서 문을 열어 준다)
정달 : (다시 한 번 쏘아본다) 복수가 가는 곳이면, 똥통에두 따라 들어가, 나. (내린다)
중섭의 눈매가 서글프다. 한동안 차창밖을 바라본다. 한숨 한 번 뱉고 출발한다.
23. # 동대문 두타 야외 공연장 (낮)
정국과 함께 무대 위에 키보드를 옮기는 경.
정국 : 얼마나 받는다구 이 고생을 하냐?
경 : 꽤 돼.
정국 : 한 십만원 준대?
경 : 응. 무대경험두 쌓구 좋지, 뭐.
정국 : (날샌 표정) 니가 무대경험 없어서? 몇 곡이나 하는데?
경 : 키보드 들어가는 게 두 곡? 연달아 했으면 좋겠는데... 두 곡이 떨어져 있어서, 공연 끝까지 있어야 돼.
정국 : 재미도 없는 팝송이나 연주하구, 지겹겠다, 야.
경 : 부담없잖아.
정국 : 기홍인 동생한테 돈 못 빌렸대. 어쨋건 병원에서 만나기로 했다. 연정 어머닌 돈 구하러 강원도 가시구...
(눈치를 살핀다) 아버지한테 말씀 드려 봤어?
경 : ...아니. ...이거 끝나구 갈게. 머리 한 번 굴려보자.
정국 : 연주 잘해.
경 : 응. 가, 오빠.
경, 코드를 정리하곤 건반소리를 시험해 본다. 얼추 맞췄는지, 주머니에서 껌을 꺼내 씹는다.
아침의 그 사건에도 불구하고 표정엔 큰 동요가 없다. 단지, 눈매가 쓸쓸할 뿐이다.
24. # 치킨집 (낮)
치킨 집 구석 쪽방 문턱에 유순의 아들 성호가 앉아서 유순과 복수를 바라보고 있다. 성호 나이는 열살 남짓.
유순 : (토라져서 밀가루 통을 옮기며 복수에게) 얘 왜 이래? 필요없다잖아. 비켜. 걸구쳐.
복수 : (유순의 밀가루 통을 채며) 에이, 엄마. (발랄하게) 이거 엊다 옮기게?
유순 : (다시 통을 빼앗는다) 가, 가, 가. 가라니까...
복수 : (다시 통을 채가며 화로 옆에) 여기다 놔?
유순 : (미간에 짜증이 배어있다) 반죽 만들어야 되는데, 그걸 왜 겆다 놔? 물통 있잖아, 거기. 응. 그 옆에 놔.
(냉장실에서 닭을 꺼낸다)
복수 : 반죽도 해 드릴까?
유순 : 니가 뭘 안다구 반죽을 만드니? 되두 않는 소릴 하구 있어. 더워 죽겠는데...
복수 : 엄마. 그만 화 좀 풀지.
유순 : 너만 없으면 돼. 니 낯짝 보고 난 화야.
복수 : 아, 잘못했다잖아.
유순 : 도와 줄거면 확실하게 도와 주든가... 아님 말든가.
복수 : ...그렇게 힘들었어? 나 없는 동안?
유순 : ...(어린 아들을 본다) 애가 크니까, 돈도 쏠쏠히 나가구... (하던 일을 하며 투덜투덜) 요즘은, 인간들이 닭두 잘 안 먹나 봐.
뭐 좋은 걸 쳐먹고 사는지, 장사가 되야 말이지. 어디서, 닭고기가 몸에 해롭다, 광고라두 하구 다니나?
복수 : 인제, 나 왔으니까 한시름 놔요. 이거... (손가방을 내민다)
유순 : (대뜸 앞치마에 손을 닦으며 가방을 열어보면 만원짜리 지폐가 다섯덩이다) 얼마야?
복수 : 오백.
유순 : ...수표루 가져 오잖구... 무겁게...
복수 : 어. 원래는 수표였는데 잽싸 현금으로 바꿨어.
유순 : 무슨 소리야?
복수 : 아냐. ...일단 이걸루 다시 적금 들어.
유순 : (돈을 챙기며) 나, 뻔뻔하다구 욕하지 마라.
복수 : ...
유순 : 니가, 너 좋아서 나 찾아냈고, 너 좋아서 돕겠다구 설쳤으니까... 돕겠다는데 누가 말려. 사는게 힘들어 죽을 지경인데...
복수 : 알어. ...엄마, 고생하는 거 질리도록 봤는데... 엄마. 나 보고싶진 않았어? 응?
유순 : ...(무심한 표정으로) 너, 어디 갔다 온거야? 군대 갔었니?
복수 : 응.
유순 : (툴툴) 갈려면 말을 하고 가든가. 적금은 들어 놓고, 돈을 낼 수가 있어야지.
(가방을 챙겨 방으로 들어가며 뚱하게) 밥 먹구 갈래?
복수 : ...아니.
유순 : (야박하게) 그럼 가. (어린 아들에게) 형한테 인사해.
성호 : (고개를 꾸벅 숙인다)
복수 : 형아 또 올게.
복수, 씁쓸한 표정으로 유순의 뒷모습을 보곤 밖으로 나간다.
25. # 동대문 시장 (밤)
양복차림의 복수와 꼬붕이 등장했다. 복수와 꼬붕, 어깨에 싸구려 인조 가죽 가방을 매고 있다.
둘, 팔짱을 끼고 지나치는 여자들의 숄더백을 보며 여유있는 미소를 짓는다.
표적 발견. 표적이 된 여자를 따라가던 둘.
음악소리가 들리기 시작한다. 이 때, 갑자기 야외무대의 불빛이 환하게 밝아진다.
표적 여자가 갑자기 무대쪽으로 뛰어간다.
26. # 두타 야외공연장 (밤)
얼떨결에 여자를 쫓아가는 복수. 여자가 발돋움을 하며 공연장을 바라볼 때, 복수는 여자의 숄더백만 바라본다.
여자가 왼쪽 어깨에서 오른쪽 어깨로 숄더백을 바꾸어 매는 그 틈에,
여자의 어깨위에 자신이 들고 온 인조가죽 가방 끈을 걸친다.
여자는 무심히 자신의 어깨에 둘어진 가방끈을 자신의 숄더백 끈으로 착각하고, 가방을 옮겨매던 손에서 가방끈을 놓는다.
자연스레 복수의 손으로 옮겨지는 여자의 숄더백.
이 때, 키보드 독주소리가 울리고 조명이 키보디스트 경에게 쏟아진다.
복수의 눈이 경을 향해 놀라워하고 있다.
경은 무심한 표정으로 껌을 씹으며, 익숙한 외국곡을 연주하고 있다.
복수, 경의 모습에 호기심이 생긴다. 여자의 숄더백이 바닥으로 떨어진다.
여자가 문득 자신의 발밑에 떨어진 백을 발견하고, 자신의 어깨에 걸쳐진 복수의 가짜 가방을 바라본다.
등뒤로 얼굴을 돌리는 여자. 그러나 복수는 사라졌다.
복수, 어느새 무대 앞 켠, 경 가까이에 와 있다. 한참을 경만 바라보던 복수.
이윽고 경을 향했던 조명이 리드 기타로 옮겨진다.
경, 악보를 뒤적이고 있다가 문득 핸드폰을 받는다. 음악 소리때문에, 잘 들리질 않는 듯.
복수, 여전히 경만 바라보고 섰다.
경. 한 쪽 귀를 막아가며 핸드폰에 귀를 기울인다.
27. # 병원 복도 (밤)
새하얀 병원 벽에 기대선 정국의 모습.
정국 : (흰 벽에 기댄 채) ...연정이 죽었다.
28. # 두타 야외 공연장 (밤)
핸드폰을 든 채, 얼어붙은 경의 모습을 의아하게 바라보는 복수.
29. # 병원 (밤)
정국 : 아주, 갑자기... 단박에... 의사말대루야. ...겁 준거 아니였어. ...어머닌, 아직 안 오셨어, 강원도에서...
30. # 두타 야외 공연장 (밤)
화려한 연주가 계속 되는 가운데, 핸드폰을 끊고 멍하니 넋을 잃은 경. 아무도 경의 표정을 읽은 이는 없다.
기타와 베이스, 드럼의 연주 대목이므로...
복수, 의아한 눈빛으로 경을 바라본다.
경, 눈을 깜박이며 키보드 옆에 놓여진 담배갑을 든다. 흔들리는 손가락. 담배 한 개비를 입에 물고 담배불을 붙인다.
복수, 그런 경의 모습이 흥미로와 미소짓는다.
이제, 키보드 독주로 전환되는 순간이다. 조명이 경에게 쏟아진다.
반주를 리드하는 드럼 소리만 들리고 키보드는 연주되지 않는다.
싸늘해진 무대. 사람들의 시선이 경에게로 향한다.
31. # 병원 (밤)
연정의 하얀 얼굴이 푸른 천에 덮인다.
기홍과 정국이 연정 앞에 섰다. 푸른 천 사이로 나온 연정의 파리한 손을 정국이 푸른 천 안에 넣어준다.
고개 숙인 채, 말없는 기홍과 정국. 눈물조차 없다.
이 때, 문 앞으로 달려와 서는 연정모. 차마 가까이 다가오지도 못한 채, 문 앞에 서서 주저앉는다. 넋을 잃은 채...
32. # 두타 야외 공연장 (밤)
경을 향해 꽂혀진 시선으로 공연장은 얼어 붙었다.
담배를 문 채, 굳어져 버린 경에게서 복수의 눈길은 벗어 날 길 없다.
이윽고, 경의 눈가에서 눈물이 흐른다. 경의 손가락이 힘없이 키보드 위에 떨어진다.
키보드 위에 아무렇게나 놓여진 경의 손등은 공연장을 불쾌한 소음으로 이끈다.
그리고 그 소음 위에, 경의 가는 흐느낌이 맴돈다.
눈물 머금은 눈으로 고개 돌리는 경, 그리고 그런 경을 바라보는 복수. 포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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