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설화(佛敎說話)◑경허(惺牛 鏡虛) 선사
근세 한국불교의 중흥조로 첫 손가락에 꼽히는 분이 바로 성우 경허(惺牛 鏡虛) 선사. 만일 경허 큰스님이 없었다면 우리 나라 근세불교는 그야말로 얼마나 적막강산이었을까 하고 걱정할 만큼, 경허 큰스님은 꺼져가던 우리불교의 불씨를 되살려 횃불로 활활 타오르게 해주신 큰 스승이었다. 그래서 어떤 이는 경허 큰스님을 ‘한국의 달마대사’라 칭송하기도 하고, 또 어떤 이는 ‘제2의 원효대사’로 추앙하기도 한다. 만공(滿空), 혜월(慧月), 침운(枕雲), 수월(水月), 한암(漢岩) 등 실로 기라성 같은 거봉들을 문하에서 배출하여 한국불교를 화려하게 중흥시킨 경허 큰스님. 스님은 1849년 헌종 15년 8월 24일 전북 전주 자동리에서 여산 송씨(宋氏) 두옥(斗玉)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으나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신 바람에 가세가 기울어 형은 출가하여 스님이 되어 있었고, 9살의 나이에 어머니의 손에 이끌려 경기도 의왕시에 있는 지금의 청계산 청계사에 맡겨져 불문에 들었다. 그후 계허 스님 문하에서 5년간 글공부를 하고 속퇴하는 계허 스님이 천거하여 계룡산 동학사 만화(萬化) 스님께 보내니 이때 스님의 나이 겨우 14세였다. 동학사에서 9년 동안 모든 불교경전은 물론 유교와 노장(老莊), 선도(仙道)까지 섭렵하고 23세의 젊은 나이에 동학사 강사가 되었고, 은사를 만나기 위해 상경하던 중 호열자가 창궐한 어느 마을에 들렀다가 생사의 위기에 직면, 홀연 발길을 되돌려 동학사로 돌아와 학인들을 내보내고 비장한 각오로 참선에 돌입하여 3개월만에 오도하여 문을 박차고 나왔다. “홀연히 어떤 사람으로부터 고삐 뚫을 구멍 없다는 말을 듣고 몰록 깨닫고 나니 삼천대천세계가 이 내 집일레. 6월 연암산 아랫길에 들사람 일이 없어 태평가를 부르네. 사방을 둘러보아도 사람이 없어 의발을 누구에게 전할꼬 의발을 누구에게 전할꼬.” 이렇게 오도가를 부른 경허 큰스님은 이후 천장암, 개심사, 부석사, 해인사, 범어사, 오대산 월정사와 금강산을 거쳐 석왕사 등 천산만락(千山萬樂)을 누비며 때로는 기상천외한 법문으로, 때로는 기상천외한 기행으로 수많은 제자와 중생을 제도하며 꺼져가던 근세불교의 불씨를 되살렸다. <옷속 이 새 옷에 다 옮기고 입어> 경허 큰스님은 깨달음을 얻은 뒤 보임 공부를 위해 거처를 천장암으로 옮겼다. 마침 속가의 형이었던 태허 스님이 천장암 암주로 있었는데, 경허 스님은 천장암에서 좀 떨어진 산 속에 있는 지장암에 홀로 계시면서 보임 공부에 몰입해 있었다. 몇 달이고 옷도 바꾸어 입지 않고 세수도 하지 않았으므로 옷 속에는 말 그대로 이 떼가 득시글거렸다. 얼마나 많은 이 떼가 득시글거렸는지 스님의 온 몸은 이 떼에게 뜯겨 짓물러 있을 지경이었다. 하루에 한번 공양을 갖다드리던 사미가 보다 못해 헌옷을 벗으시고 새 옷으로 갈아 입으시라고 간청했지만 스님은 번번히 거절했다. 이렇게 몇 달이 지나고 보니 입고 있던 옷이 땟국물과 이 떼로 범벅이 되어버렸다. 더 이상 사미의 간청을 뿌리칠 수 없게되자 마지못해 경허 스님은 새 옷으로 갈아입기로 했다. 그런데 스님은 그 많은 이들을 새 옷에 다 옮긴 후에야 갈아입었다. 불살생, 자비…. 우리 중생들은 흔히 불살생, 자비를 가르침 속에서만 만나고 있지는 않을까. 경허 스님이 천장암에 계실 때의 일이었다. 어느 여름날 밤, 제자 만공이 등불을 켜들고 큰방으로 들어가니 경허 스님께서 누워 계셨다. 그런데 불빛에 비춰보니 경허 스님의 배 위에 시커먼 독사가 또아리를 틀고 있는 게 아닌가. 제자 만공이 소스라치게 놀라 소리를 질렀다. “스님, 스님 배위에 독사가 앉아 있습니다요 스님!” 그러나 경허 스님은 눈 한번 깜박이지 않으신 채 담담히 대답했다. “실컷 놀다가 가게 그냥 내버려두어라.” 만공은 어쩔줄 몰라 절절 매고 있었는데 이윽고 독사가 스스로 또아리를 풀고 슬슬 배위에서 내려와 뒷문으로 사라졌다. 나중에 경허 스님께서 만공에게 이르셨다. “이런 일을 당했을 때 적어도 마음에 조금도 동요됨이 없어야 공부가 되느니라.” <불살생·자비 실천 모범> 경허 스님이 오랫동안 주석했던 천장암은 지금도 가난한 작은 암자라 신심 깊은 불자들만 참배할 뿐 관광객은 별로 찾지 않는다. 최근에는 천장암으로 올라가는 길이 잘 다듬어져서 참배객들에게 별 불편을 주지 않지만, 경허 스님께서 머무시던 조선조 말에는 그야말로 벽촌 오지에 자리잡고 있는 천장암이라 신도도 그리 많지 않았고 절 살림도 어렵기 그지없었다. 걸핏하면 조석 끓일 양식이 떨어질 지경이었다. 더더구나 유교를 숭상하고 불교를 배척하는 시대였고 백성들의 살림 또한 초근목피로 연명하던 시절이었으니 시주금이 넉넉히 들어올리 없었고 공양미인들 넉넉히 가져올리 없었다. 그래서 그때 천장암에 계시던 스님들은 누구나 바랑을 메고 멀리 해미읍까지 탁발을 나가시곤 했었다. 물론 경허 스님도 직접 탁발을 나가셨는데 하루는 경허 스님이 해미읍 어느 솟을대문 앞에서 탁발을 하기 위해 목탁을 치며 염불을 하고 있었다. 이윽고 밥술 깨나 먹고 삼직한 솟을대문이 열리더니 행세 깨나 하고 사는 양반이 거드름을 피우며 경허 스님께 힐문하는 것이었다. “우리 집 대문 앞에 와서 목탁을 치는 것을 보니 곡식이라도 좀 얻어가자는 것 같은데, 그대는 과연 중이란 말인가, 거렁뱅이란 말인가?” 경허 스님은 합장하여 예를 갖춘 후에 나직히 대답했다. “절에서 살며 수행하고 있으니 중이 분명하옵고, 오늘은 양식을 탁발하러 왔으니 거렁뱅이 또한 분명한가 합니다.” 경허 스님이 이렇게 대답하자 그 양반은 그만 할말을 잃고 범상치 않은 스님의 기품에 눌려 무례를 사죄하고 극진히 안으로 모셔 크게 시주하였다. 이렇듯 억불숭유정책의 시절에도 홍성, 해미 인근의 유생들이 경허 스님의 덕화에 감동하여 천장암 중창불사에 크게 동참한 기록들이 오늘까지 전해지고 있으니, 스님의 기품이 어떠했는지 미루어 짐작할 수 있으리라. 출처 법보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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