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인의 화석인 《룡곡사람》,《승리산사람》,《금천사람》은 인류학적으로 시초형의 신인으로,《만달사람》은 늦은 시기의 신인으로 확인되였다,
구석기시대 전기,중기,후기 유적들과 거기에서 발굴된 인류화석자료에 기초하여 학자들은 대동강류역이 원인-고인-신인 등 인류진화의 순차적단계를 거쳐오면서 우리의 옛 조상들이 아득한 태고로부터 태를 묻고 살아온 보금자리였으며 인류의 초기문화가 싹튼 유서깊은 력사의 성지였다는것을 확증하였다.
학자들은 또한 대동강류역이 이 고장에서 살던 구석기시대 후기의 신인에 연원을 둔 조선옛류형사람들의 본고장이며 그들의 창조적로동과 슬기로운 지혜에 의하여 농경문화를 위주로 하는 신석기시대문화와 높은 수준의 금속문화를 창조한 청동기시대문화가 매우 이른 시기부터 련면히 발생발전되여온 원시문화의 발원지,그 중심지였다는것을 확인하였다.
이에 대하여서는 평양시 삼석구역 호남리 남경유적과 표대유적,사동구역 금탄리유적,룡성구역 장촌유적,상원군 룡곡리유적,덕천시 남양유적,온천군 운하리 궁산유적 등 대동강류역의 곳곳에 분포되여있는 신석기시대유적들과 팽이모양의 질그릇을 썼던 청동기시대의 집자리들이 잘 말해주고있다.
대동강류역의 집자리유적들은 신석기시대에 이르러 조선옛류형사람들이 대동강류역의 광활한 대지에서 항구적인 정착생활을 하면서 농업을 위주로 여러가지 생산활동을 벌려나갔다는것을 보여주고있다. 여러 유적들에서 드러난 농업도구들은 조선옛류형사람들이 신석기시대중기부터 돌보습으로 갈이농사를 하였다는것을 말해준다.
이러한 생산활동과정에 객관세계에 대한 지식과 경험을 축적한 조선옛류형사람들은 석기를 더욱 세련시켰을뿐아니라 보통 석재와는 다른 광석에 열을 가하여 금속을 얻어내는 야금기술을 체득하였다.
그들은 야금기술에 토대하여 동에 주석을 합금하는 방법으로 순동보다 세기가 강한 청동을 만들어내였으며 마침내 새로운 청동기문화를 창조하게 되였다.
이것은 물질문화발전에서 커다란 변혁이였다.
평양시 삼석구역 호남리 남경유적과 표대유적,사동구역 금탄리유적,락랑구역 원암동유적,서성구역 와산동유적,황해북도 송림시 석탄리유적,평안남도 북창군 대평유적,덕천시 남양유적을 비롯한 팽이그릇집자리유적들은 층위상으로나 계승관계로 보아 이 일대에서 신석기시대문화를 창조한 조선옛류형사람들의 직계후손들이 남긴것이라는것이 밝혀졌다.
평양시 삼석구역 호남리 표대유적 제1기층 제12호집자리에서 나온 팽이그릇을 사료로 하여 그 년대를 측정한 결과 지금으로부터 5306년전의것이라는것이 확인되였다. 이 절대년대측정치는 대동강류역에서 청동기시대의 개시가 단군조선의 성립시기보다 훨씬 이른 시기인 기원전 4000년기후반기부터 시작되였다는것을 말해준다. 제반 사실은 매우 이른시기에 대동강류역에서 인류가 발생되여 조선옛류형사람으로 발전하였고 그들에 의하여 원시문화와 고대문명이 시작되고 발전하였다는것을 보여주고있다.
2.고대문화의 중심지-조선민족의 성지
《대동강문화》가 공고한 학명으로 되게 된것은 대동강류역이 고대문명의 발상지인 동시에 고대문화의 중심지였기때문이다. 우리 민족의 원시조인 단군이 기원전 3000년기초에 평양을 중심으로 하여 동방에서 처음으로 고대국가 고조선을 건립함으로써 이 강류역에서는 드디여 새로운 문명시대가 펼쳐지게 되였다.
이때로부터 대동강류역은 고대문화의 중심지-조선민족의 성지로 눈부신 빛을 뿌리였다.
대동강류역이 고대문화의 중심지였다는것은 단군조선시기의 문화를 대표하는 고인돌무덤과 돌관무덤이 이 강류역에 가장 많이 분포되여있는데서 찾아볼수 있다.
그것도 이 지역에서는 다른 지역에서는 볼수 없는 초기형으로부터 말기형에 이르기까지 여러 시기의 고인돌무덤이 다 있으며 특히 왕급의 지배계급들이 묻힌 특대형고인돌무덤이 다른 지역들보다 비할바 없이 많다.
그중에는 뚜껑돌의 넓이가 50여평방메터에 달하고 그 무게가 40∼70톤이나 되며 무덤칸의 높이가 2.7메터이상 되는 특대형고인돌무덤들이 적지 않다.이처럼 큰 규모의 고인돌무덤들이 집중분포되여있는것은 당시 평양일대에 권력과 재부를 독접한 특권층들이 모여살았으며 무덤축조에 큰 로력공수와 로동강도로 미루어보아 그것이 집단적인 노예로동과 권력의 산물이였다는것을 말해준다.
학자들은 고인돌무덤건축에 높은 수준의 정신로동의 흔적이 비껴져있다는것을 밝히면서 당시 고조선사람들이 암석의 구조석리상태를 파악하고 일정한 간격으로 뚫은 구멍들에 누름압력을 조성하여 고인돌부재를 떼냈으며 무덤축조에서 구조력학적으로 안전률을 훌륭히 보장함으로써 고인돌무덤이 오늘까지도 잘 전해지게 된것으로 보고있다.
대동강류역에서는 고인돌무덤과 함께 돌관무덤이 다른 지역보다 많이 드러나고있다.
최근에도 평양시 강동군 강동읍,순창리,송석리,태잠리,평안남도 성천군 금평리,증산군 룡덕리,평성시 경신리 등 여러 지역에서 돌관무덤떼들이 발굴되였다.
돌관무덤들에서 당시 사치와 부귀영화를 누린 지배계급들만이 소유할수 있었던 금동 또는 순금으로 만든 귀걸이와 목걸이,가락지,청동띠고리들과 회색도기들이 나온 사실은 대동강류역이 고대문화의 중심지였다는것을 생동하게 실증해준다.
나라의 방위를 목적으로 축성한 평양시 강동군 남강로동자구의 황대성,봉산군 지탑리토성,온천군 성현리토성 등도 이 강류역이 매 이른 시기에 국가가 형성된 고대문화의 중심지였다는것을 실증해주는 뚜렷한 실례로 된다.
특히 강동군 남강로동자구 황대마을 앞산에서 발굴된 황대성은 지금으로부터 5000년전경에 축조된것으로서 우리 나라 중세기에 쌓아진 토석혼축의 성과 비슷한것이였다.
이러한 토성유적들은 대동강류역에 이미 그때에 벌써 상비군과 방어수단을 가진 고대국가가 존재하였으며 성의 축조술과 형식도 발전된 수준이였다는것을 말해준다.
대동강류역에서는 도시를 방불케 하는 큰 부락터유적들도 많이 드러났다.
고고학자들은 최근 약 15만평방메터에 달하는 평양시 삼석구역 호남리 표대유적을 비롯하여 승호구역 봉도리유적,리천리유적,순안구역 석암유적,평안남도 덕천시 남양유적,황해북도 황주군 고연리유적 등을 발굴하였다.
이 유적들은 100-150여호의 팽이그릇시기의 집자리들로 이루어진 대규모의 부락터유적이였다.
이러한 큰 규모의 부락들이 집중되여있는것은 고대문명의 중심지에서만 볼수 있는 현상이다.
학자들은 대동강류역에서 발굴된 청동기유물들과 금,도기,철기제품들에 대한 연구를 통해서도 이 일대가 발전된 고대문명의 중심지였다는것을 확인하였다.
종전에는 비파형창끝이 비파형단검과 같이 쓰인것으로 보면서 그 상한이 기원전 1200년이전으로는 올라가지 못하며 비파형단검문화의 발원지와 중심지가 료동지방이라고 간주하여왔다.
그러나 대동강류역의 고인돌무덤과 팽이그릇집자리에서 기원전 2600년경의것인 비파형창끝이 발굴됨으로써 비파형단검문화의 발원지와 중심지가 대동강류역이라는것이 새롭게 밝혀졌다.
비파형창끝과 같이 세련된 청동제무기는 발전된 청동 주조기술과 가공기술에 의해서만 만들수 있는것이므로 대동강류역에서 청동기생산은 이보다 훨씬 이전인 기원전 4000년기후반기부터 시작되였다고 볼수 있다.
상원군 장리 1호고인돌무덤에서 청동2인교예공예품과 청동방울들이 나온것도 특이한것이다.
이 청동기유물들에 반영되여있는 공예미술적내용들은 당시 음악과 무용,교예 등 예술이 상당히 높은 수준에서 발전하고있었다는것을 보여준다
주목되는것은 또한 우리 나라에서 단군조선시기부터 금제품을 생산하기 시작하였다는것이다.
학자든은 강동군 순창리 2호,5호 돌관무덤들에서 나온 금귀걸이는 절대년대가 지금으로부터 각각 4376년전,4425년전의것이며 그것이 판금법과 아말감법에 의하여 제작된것이라는것을 밝혀냈다.
여러 돌관무덤들에서 금제품과 함께 발굴된 기원전 2500∼2400년기에 만들어진 도기들과 기원전 1104년경에 만들어진 쇠거울,철기들도 대동강류역을 중심으로 도기문화와 철기문화가 발생발전하였음을 실물로 전해주고있다.
평양을 중심으로 한 대동강류역에서는 세계적으로 가장 이른 시기에 벼를 비롯한 조,콩,기장 등 오곡농사와 이웃나라의것과는 완전히 다른 석잠누에치기를 하였다는것을 보여주는 물질적자료들도 나왔다.
또한 뚜껑돌겉면에 홈구멍을 파놓은 고인돌무덤이 200여기나 발견되였다.
학자들이 조사연구한데 의하면 이 홈구멍들은 별자리들을 표시한 성좌도였으며 그것은 세계적으로도 가장 이른 천문학의 시원로 되는것이였다.
대동강류역에서 발견된 고인돌무덤뚜껑돌에 묘사된 별자리들은 상당히 정확하고 이동척도의 차이가 크게 없다. 이러한 사실은 고조선사람들의 천문지식이 비상히 높은 수준에 있었으며 이른시기에 그것을 실지 생산활동과 생활에 리용하였다는것을 말해준다.
생활의 교제수단이며 지식의 중요한 보급수단인 문자의 발생과 사용은 고대문화발전수준을 가늠하는데서 중요한 징표의 하나로 된다.학자들은 새로 발굴된 단군 및 고조선시기의 글자와 글자생활에 관한 자료를 연구하고 대동강류역 주민들속에서 일찌기 문명시대의 글자 신지글자가 사용되였다는것을 확인했다.
참으로 자연지리적조건이 유리하고 산수수려하여 인류가 발생하여 끊임없이 발전하여온 평양을 중심으로 한 대동강류역은 우리 민족의 문화의 발상지이며 반만년전부터 벌써 정치,경제,문화의 중심지였다.
위대한 수령님과 경애하는 김정일장군님의 세심한 지도밑에 최근년간 대동강류역에 민족의 원시조와 고구려시조왕의 무덤인 단군릉과 동명왕릉이 기념비적건축물로 개건되여 평양이 민족의 성지로 더욱 빛을 뿌리고있는 때에 이 지역의 고대문화에 대한 연구가 심화되여 하나의 공고한 학명으로 내외에 널리 전해지게 된것은 참으로 특기할 의의깊은 일로 된다.
2.5000년전의 단군조선의 성립에 대하여
1)1993년에 평양일대에서 발굴된 《단군릉》에 대하여
①《단군릉》을 단군의 무덤이라고 할수 있는 근거에 대하여
발표자:김홍식
1993년초 위대한 수령님과 경애하는 장군님의 현명한 령도에 의하여 단군릉이 발굴되였다.
나는 단군릉이 실재한 단군의 무덤이라는데 대하여 론하겠다.
단군릉은 평양시 강동군 강동읍에서 서북쪽으로 좀 떨어진 대박산의 동남쪽경사면기슭에 자리잡고있다.
먼저 단군릉의 구조에 대하여 말하겠다.
단군릉은 돌로 쌓은 고구려양식의 돌짠흙무덤이다. 무덤칸은 주검칸과 무덤안길로 이루어진 외칸무덤이고 주검칸의 크기는 동서 273㎝,남북 276㎝,바닥에서 천정고임 1단까지의 높이는 160㎝이다. 벽체는 돌을 차곡차곡 쌓아 만들었으며 천정은 3개의 단으로 삼각고임을 하고 그 우에 뚜껑돌을 덮었다.
이 무덤이 실재한 단군의 무덤이라는것은 무엇보다 먼저 여기에 그려진 벽화를 통하여 알수 있다.1910년에 출판된 장지연의 문집인 《위암문고》에는 《평안도 강동현 서쪽 3리에 큰 무덤이 있는데 둘레가 410자이며 민간에서 단군묘라고 한다. 몇해전에 일본고고학자들이 그것을 팠는데 그 안은 모두 벽돌모양의 돌로 쌓았으며 네벽에는 옛선인과 신기한 장수의 모습이 그려져있었다. 그 모습이 완연하고 변하지 않는다.》고 기록되여있다. 《삼국사기》에서도 단군을 《선인왕검》야라고 하였는데 그것과 《옛 선인》이란 말이 잘 통한다. 단군릉에서는 《옛 선인》과 《신기한 장수》만이 네벽에 그려져있었던 모양인데 이것은 다른 고구려벽화무덤들과는 다른 이 무덤의 특징이다.
단군릉은 4세기말부터 5세기초경에 만들어진 고구려식돌칸흙무덤이다. 단군의 유골이 고구려식돌칸흙무덤에 매장된것은 고구려가 427년에 평양에 수도를 옮긴 사정과 관련된다. 원래 단군의 무덤은 초기형식의 고인돌무덤이였을것이다. 그러나 고구려사람들은 평양에 수도를 옮겨오면서 저들의 무덤양식인 돌칸흙무덤으에 단군의 유골을 새로 안치하였던것이다. 이것은 조선사람의 조상숭배풍습과 관련된다. 고구려사람들은 평양으로 천도할 때 건국시조 동명왕의 무덤도 옮겨왔는데 동명왕릉은 원래 돌각담무덤이였겠지만 평양에 새로 축조할 때 동명왕릉은 돌칸흙무덤으로 만들었다. 고구려의 돌칸흙무덤은 고인돌이나 돌각담무덤에 비해서 발전되고 완성된 묻덤양식이다. 이처럼 훌륭하고 완비된 무덤에 자기 조상의 유골을 안치하는것은 응당하며 좋은 풍습이다. 이러한 점을 고려할 때 이 무덤이 실재한 단군의 무덤이라고 할수 있다.
다음으로 단군릉이 단군의 무덤이라는것을 문헌자료를 통해서 말하려고 한다. 단군릉에 대한 현존하는 력사기록은 1530년에 편찬된 《신증동국여지승람》 평양부 강동현조에서 명백히 찾아볼수 있다. 이 문헌에는 《큰 무덤이 있다.하나는 현의 서쪽 3리에 있는데 둘레가 410자나 된다.민간에서 단군묘라고 전한다.》라고 기록되여있다. 강동군의 서쪽 3리에 있는 큰 무덤이란 바로 이번에 새로 발굴된 단군릉이다. 강동에 단군릉이 있다는데 대해서는 《리조실록》의 여러곳에 기록되여있고 《강동지》는 《신증동국여지승람》과 거의 같은 내용으로 기록하고있다. 이러한 사실들은 단군릉이 실재한 단군의 무덤이라는것을 말해주는 중요한 자료를 재공해준다.
마지막으로 단군릉이 단군의 무덤이라는것은 이 일대의 지명들을 통해서 알수 있다. 단군릉의 서쪽에는 《단군호》가 있으며 단군릉이 위치한 부락을 《단군동》이라고 하였고 그 동쪽마을을 《아달동》이라고 하였다.또한 강동과 성천 일대에는 단군의 출생 및 활동과 관련된 지명이 남아있다. 이러한 자료들은 단군릉이 단군의 무덤이라는것을 뚜렷이 말해주고있다.
이처럼 단군릉은 벽화,력사기록,지명을 통하여 실재한 단군의 무덤이라고 할수 있다.
②《단군릉》에서 출토된 사람뼈의 년대문제에 대하여
발표자:고경준
나는 단군릉에서 출토된 사람뼈의 년대문제에 대하여 말하겠다.
공화국에서는 단군릉에서 나온 사람뼈의 년대를 전자상자성공명법을 적용하여 측정하였다. 전자상자성공명법은 화석뼈,산호초,조가비,종유석 등의 년대측정방법이므로써 현재 세계 여러 나라들에서 많이 사용되고있다.
전자상자성공명법의 원리는 물리학부문에서 1944년에 발견된 이후 1980년대에 고고학고 지질학,인류학과 고생물학 분야에서 년대측정방법으로 광범이 리용되고있다.
이 방법의 우점은 우선 측정자료의 제한을 거의 받지 않으므로 뼈,조가비,산호초,질그릇 등 고고학적대상사료는 물론 여러가지 년대큭정대상에도 적용할수 있으며 사료의 량이 몇그람이면 충분하다는데 있다. 그리고 큭정한 년대값의 믿음성이 높으며 오차가 비교적 적다는데 있다.
현대적년대큭정기로서의 전자상자성공명기는 천억분의 1그람분자까지 측정가능이며 현재 물리학분야에서는 전자상자성공명기에 전자계산기를 결합하고 상사-수자형변환기를 련결하며 측정기술을 최상의 수준으로 끌어올리고있다.
또한 그것은 큭정년대의 범위가 비교적 가까운 년대로부터 먼 년대까지 측정할수 있다는데 있다.
우리 나라에서는 최신형년대측정설비로 서로 다른 기관에서 각각 24회,30회에 걸쳐 단군뼈에 대한 년대측정사업을 진행하였다. 그 결과 그 년대는 지금으로부터 5011±267년전(1993년현재,상대오차 5.4%)으로 확증되였다.
그러면 이 전자상자성공명법이란 과연 어떤 방법인가?
전자상자성공명법이란 뼈가 생긴 때로부터 받아온 방사선의 총량인 루적선량과 뼈가 묻혀있는 지역에서 1년간에 뼈가 받은 방사선의 량인 년간선량을 측정기를 사용하여 정확히 낸 후 루적선량으로 나누고 뼈의 절대년대를 측정하는 방법이다.
우리 나라에서는 이러한 원리에 기초하여 루적선량을 전자상자성공명장치로 측정하고 그 물질이 묻여있던 곳에서 방사성물질이 내는 년간선량을 단군뼈의 절대년대로 계산하였다. 그 결과 단군의 출생년대가 5011±267년전이라는것이 과학적으로 확증되였다.
단군뼈에 대한 년대측정값의 믿음성은 확고히 담보되고있다.
그것은 우선 루적선량을 평가하는데서 현대적인 전자상자성공명기가 리용되였으며 년간선량을 평가하는데서 특성을 계산한 선량계들이 적용되였다는데 있다. 현재 세계적으로 볼 때에 전자상자성공명장치는 고도로 현대화되여 측정정밀도가 보장되고있다.
그 믿음성은 다음으로 이 년대큭정값이 통계학적으로 화고히 담보되다는데 있다. 측정값의 상대오차는 5.4%로서 적어도 95%의 믿음확률을 받을수 있다.
그 믿음성은 마지막으로 실험의 과학기술적공정이 확고히 담보되며 측정값들의 재현성이 잘 보장되고있다는데 있다. 근 6개월동안에 걸쳐 진행된 54회의 실험결과에는 이 년대값의 재현성이 담보되고있는것이다.
단군릉에서 나온 사람뼈의 절대년대가 5011년전이라는것은 단군이 실재한 존재라는것을 증명해주고있다.
*질의응답
〈물음〉
:어떻게 5000년전의 뼈가 남을수 있었던가?
〈대답〉:
그것은 한마디로 말하여 유골이 부패부식 및 풍화되지 않는 유리한 곳에 매장되였기따문이다.
우선 단군의 유골은 석회암지대에 매장되였다. 석회암지대에 매장되면 뼈속에 있는 유기질이 광물질로 교체되여 돌처럼 굳어져 뼈가 화석화,반화화된다.
다음으로 단군의 유골은 뼈를 부식시키지 않는 토양속에 묻혀있었다. 단군릉안의 토양은 쳐가 부식되지 않고 보존될수 있는 전형적인 중성토양이다.
그러므로 5000년전의 단군의 유골이 강동군일대에서 남을수 있었다.
〈물음〉:단군유골에서 왜 머리뼈가 없는가?
〈대답〉:
단군릉에서 발굴된 유골은 상당히 좋은 상태로 보존되여있었는데 유감하게도 머리뼈가 남아있지 않았다. 단군과 그 안해의 머리뼈가 남아있지 않는것은 일제어용학자들이 단군릉을 도굴하여 머리뼈만 의도적으로 없애버린데 기인된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첫째로,도굴의 흔적이 있다. 뼈들이 원상대로 관대우에 놓여있는것이 아니라 구석에 망탕 뒤섞여있었다. 그리고 《위암문고》에 의하면 일본꼬고학자들이 이 무덤을 팠다고 기록되여있다.
둘째로,뼈의 보존상 특징과 관련된다. 머리뼈는 다른 뼈와 달리 잘 삭아 없어지지 않는 성질을 가진다. 특히 이발은 아주 굳은 골질로 되여있기때문에 싹지도 삭아없어지지도 않는다. 그런데 다군릉에서는 몸뼈가 그렇게도 잘 보존되여있는데 머리뼈는 고사하고 이발이 하나도 남아있지 않는다.
이것은 의심할바 없이 머리뼈를 의도적으로 없앴다는것을 의미한다.
〈뮬음〉:단군유골의 년대를 다른 방법으로 측정하지 못하였는가?
〈대답〉:
그것은 한마디로 말하여 열형광법,핵문렬흔적법,방사성탄소법,전자상자성공명법 등의 년대측정법들중에서 단군유골의 년대를 측정하는데 있어서 전자상자성공명법이 가장 적합하였기때문이다.
열형광법과 핵분렬흔적법은 주로 강한 열작용을 받은 광물들을 사료로 하여 그것이 열을 받은 시기를 결정하는 방법으로서 뼈의 년대측정에는 적합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단군유골의 년대측정을 하는데서 방사성탄소법과 전자상자성공명법으로 측정해야 했다.
그런데 이 사람뼈가 단군릉에서 발굴되였고 또 초보적인 감정에 의하더라도 반화석상태로서 현대뼈가 아니라고 인정되였으므로 더우기 심중하지 않을수 없었다. 왜냐하면 년대측정이 파괴적이라는 큭면에서 치명적인 결함을 안고있기때문이다.
방사성탄소법인 경우 뼈사료가 2000년전의것이라고만 하더라도 100그람의 사료가 요구되는데 그보다 더 오랜 사료라면 그이상의 뼈를 없애야 하는것이다.
모든 유물이 다 그러하지만 단군릉에서 발굴된 유물인것으로 아무리 년대측정이 주요하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민족앞에 죄를 짓는 일이다.
그러므로 공화국에서는 사료가 적게 들면서도 그 년대를 정확히 측정할수 있는 전자상자성공명법 한가지만을 가지고 단군유골의 년대를 측정하였으며 거듭되는 년대측정결과 그 유골이 5011년전의것이라는것을 과학적으로 증명하였다.
2)5000년전의 국가형성문제에 대하여
발표자:강성련
나는 5000년전의 국가형성문제에 때하여 론하겠다.
이 문제에 대하여 론하기 위해서는 먼저 국가의 개념과 국가성립의 기본징표에 대하여 이야기해야 할것이다.
국가란 모든 권력을 틀어쥐고있는 지배계급의 리익을 옹호하고 피지배계급의 반항을 억누르기 위한 독재기구를 말한다.
국가성립의 기본징표에는 중앙과 지방의 통치체제와 벼슬등급제,법 및 앙비군,왕위의 세습화와 신성화 등이 있다.
그러면 우리 나라에서 5000년전에 구까성립의 기본징표가 어떻게 갖추어져있었는가에 대하여 이야기하겠다.
첫째로,중앙통키기구로서는 제가평의회가 있었고 지방통치기구로서는 고을제도를 기본으로 하면서 후국제도,부수도제도 등이 실시되였다.
둘째로,벼슬등급제로서는 《8가》제도가 있었다.
셋째로,법의 유무는 《범금8조》를 통하여 알수 있다.
이상의 세가지에 대해서는 다른 체계에서 좀더 구체적으로 취급하기때문에 여기서는 간단히 넘어가겠다.
넷째로,상비군의 존재는 평양시 강동군 남강로동자구에서 발굴된 황대성유적을 통하여 알수 있다.
상비군이란 《항상 준비되여있는 군대》라는 뜻으로서 전쟁이 있을 때만 병사가 되는것이 아니라 전쟁을 전문으로 맡아하는 국사소유의 군대를 말한다. 상비군이 있어야 성이 자기 역할을 다할수 있으며 만일 상비군이 없었더라면 성 그자체를 쌓을 필요가 없어지기때문에 성의 존재는 바로 상비군의 존재를 의미한다. 황대성성터에서는 2기의 고인돌과 1기의 돌관무덤이 발굴되였는데 이것에 의하여 황대성이 약 5000년전에 축조된 무덤이라는것을 알수 있다.
국가의 기본징표로서는 다섯째로 왕위의 세습화,신성화가 있다. 신성화에 관해서는 첫 왕인 단군왕검을 하늘신의 후손으로 전한 《단군신화》를 통하여 알수 있고 세습화가 이루어졌다는것은 《규원사화》,《단군고기》 등에 실려있는 단군조선시기의 초대 단군 왕검이 2대 단군인 부루와의 세습관계와 《사기》 조선렬전에 실려있는 만조선시기의 만으로부터 아들을 거쳐 손자인 우거에 이르는 세습관계를 통하여 추측할수 있다.
이렇게 지금 단군조선에서 국가성립의 기본징표가 어떻게 갖추어져있었는가에 대하여 이야기했는데 다음으로 이시기 우리나라에서 국가성립의 전제조건으로 되는 군사민주주의단계,노예제의 확립이 이미 갖추어져있었다는데 대하여 이야기하겠다.
단군조선은 력사발전의 합법칙성에 따라 군사민주주의단계를 거쳐 건국되였다.
군사민주주의단계란 원시사회말기로부터 계급사회에로 넘어가는 중간기를 말한다. 군사민주주의단계는 일반적으로 신석기시대말기로부터 청동기시대에 발생하였는데 우리 나라에서는 신석기시대말기인 기원전 4000년기후반기로부터 시작되였다고 보고있다.
원시사회말기에 들어서서 로동도구가 발전해나감에 따라 사람들의 로동능력이 중대되여 생산력이 발전해나갔으며 결과 사람들ㄹ은 굶어죽는 일이 없어져 인구가 급속히 불어나게 되였다. 매개 부족의 주민들은 인구가 불어남에 따라 부족의 결정된 거주지를 넘어서 살게 되였다. 그리하여 부족들사이에서는 경계선지대에서 토지를 둘러싼 분쟁이 일어나게 되며 그것이 점차 전쟁으로 확대되여나갔다. 전쟁이 빈번히 일어나게 되자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하여 혈연적으로 가까운 부족들이나 서로 리해관계가 맞는 부족들사이에서 련합이 형성되였다. 이러한 부족련합체들사이에서 어떤 문제를 결정하는 마당이 씨족의 대표들로 구성된 평의회였으며 평의회성원들을 선발하는것이 씨족성원전체가 참가하는 군중집회였다. 또한 평의회에서는 전쟁이 일어났을 때 여러 씨족의 전사들을 통일적으로 지휘하는 군사령관을 선출하였다. 씨족사회발전의 이와 같은 체계를 군사민주주의라고 한다.
군사민주주의단계의 첫시기 군사령관의 권한은 림시적이였으나 전쟁이 부족들의 세력확장을 위한 정복전쟁으로 확대되여나감에 따라 군사령관이 상당한 권한을 가지게 되였다. 큰 권력을 틀어쥐는 존재가 나타났다는것은 국가가 성립하기 위한 전제적요소로 된다.
군사민주주의단계의 특징은 종족들사이에서 적대되는 종족을 전멸시키는 파멸적인 전쟁이 빈번히 일어나게 되였다는것과 전쟁시에 서로 협력하기 위하여 많은 종족들이 방위적대집락에 모이고 살게 되였다는것 등을 들수 있다. 1994년에 발견된 평안남도 덕천시 남양의 대규모집자리유적,그리고 남경유적 제1문화층과 금탄리유적 제2문화층에서 발굴된 전쟁의 흔적이라고 볼수 있는 불에 탄 촌락 등은 이 지역에서 국가성립이전시기에 이미 군사민주주의단계를 거쳤다는것을 잘 보여준다.
다음으로 노예제의 확립에 대하여 말하겠다.
원시사회말기 군사민주주의단계에서는 전쟁에서 포로로 한 사람들을 무자비하게 죽이는것이 기본잉였으나 사회가 발전되여나가는데 따라 전쟁포로를 노예로 부려먹는 경향에로 넘어가게 된다.
우리 나라에서 5000년전에 노예제가 확립되고있었다는것은 룡산리순장무덤을 통하여 알수 있다. 여기서 발견된 사람뼈는 년대측정결과 5069년전의것이라고 확증되였다. 순장무덤이란 죽은 노예주를 매장할 때 그가 생전에 소유하고있었던 노예들을 함께 싱매장하는 무덤을 말하기때문에 순장무덤의 존재는 노예제가 확립되고있었다는것을 의미한다.
마지막으로 경제력에 대하여 말하겠다.
우리 나라에서 5000년전에 경제력이 발전하고있었다는것은 청동기들과 농구들을 통하여 알수 있다.청동기에 의하여 수공업부문에서는 분업이 이루어지게 되였으며 신석기시대이후에 발전한 농구에 의하여 농업생산력이 더욱 발전하게 되였다. 결과 이 당시 경제가 금속히 발전하여 그것이 국가성립의 전제가 되였다는것을 알수 있다. 우리 나라에서는 최근년간의 고고학적발굴성과에 의하여 기원전 4000년기후반기에 이미 청동제품이 사용되였고 기원전 3000년기초중엽에는 청동무기가 사용되였다는것이 판명되고있다.
우와 같은 사실들은 우리 나라에서 5000년전에 국가가 성립하였다는것을 증명해준다.
*질의응답
〈물음〉
: 황대성이 5000년전에 축조된 성이라는것을 좀더 구체적으로 설명해주세요.
〈대답〉
: 성의 축조년대는 보통 성터에서 나오는 유물들과 성의 축조형식 등을 통하여 판단하는데 황대성유적에서는 그를 위한 충분한 유물들이 발굴되지 못하였다. 그러나 여기에서 발굴된 2기의 고인돌과 1기의 돌관무덤을 통하여 축조년대를 추측할수 있다. 이속에서 1기의 고인돌은 오래동안 바람가 비를 맞아 평탄하게 된 썽벽우에 위지하고있었다. 이것은 성벽우의 고인돌이 성이 패쇄되여 오랜 세월이 지난 다음에 만들어진 무덤이라는것을 의미한다. 이 무덤의 류형은 오덕형고인돌인데 이 류형의 무덤들중에서 오늘까지 절대년대가 확증되여있는 무덤은 강동군 구빈리고인돌과 상원군 룡곡리 제4호고인돌이다. 구빈리고인돌의 절대년대는 4990년전이며 룡곡리 제4호고인돌의 절대년대는 4539년전이다. 약간의 차이가 있었다고 하더라도 이 년대가 성이 패쇄된 후 오랜 세월이 지난 다음에 만들어진 고인돌의 년대라는것을 고려한다면 그 밑에 만들어졌던 성벽은 그것보다 더 선행한 시기 즉 5000년전에 축조된것이라고 말할수 있다.
또한 황대성내에서 발굴된 돌관무덤은 마사진 성벽우에 축조된것이였다. 돌관무덤에서 발견된 사람뼈가 측정결과 4975년전의것으로 확인되였다는것을 보아도 황대성이 5000년전에 축조되였다고 말할수 있다.
이러한 점들을 고려하여 황대성이 5000년전에 축조된 성이라고 말할수 있다.
3.단군조선의 면모에 대하어
1)단군조선의 령역문제에 대하여
발표자:박성주
나는 단군조선시기의 령역에 대하여 이야기하겠다.
우리 조상들은 평양일대의 유리한 환경을 리용하여 기원전 30세기초에 대동강류역에 첫 고대국가인 단군조선을 건국하였다.
단군조선은 초기에 대동강류역을 중심으로 하여 북쪽으로는 청천강-압록강류역,남쪽으로는 한강류역까지를 그 령역으로 삼고있었다고 볼수 있다. 그것은 평양시의 강동과 성천 지구에는 단군과 관련한 지명이나 전설이 매우 많이 남아있기때문이다.
둘째로,평양과 그 주변 일대에는 1만여기에 달하는 고인돌무덤이 분포되여있기때문이다. 셋째로,청천강류역에 위치하는 묘향산과 황해도 구월산 그리고 강화도를 포함한 한강하류에 단군과 관련한 전설이 많이 남아있는것을 보아 이 지역에 단군조선의 세력이 강력하게 미치고있었다고 볼수 있기때문이다. 넷째로,이 지역에서 팽이그릇관계유적이 집중적으로 발굴된것을 보아 서북조선일대가 단군조선의 초기령역이였다고 말할수 있다.
이렇게 평양지방지방을 중심으로 건국되면서 초기에는 청천강-압록강류역,한강류역까지를 령유한 단군조선은 기원전 3000년기중엽에 이르러 강성기에 들어섰다.
단군조선은 강성기에 북변과 서변은 료하동부일대까지 포함하였다고 볼수 있다. 이것은 중국동북지방의 신석기-청동기시대의 유적들을 통하여 알수 있다. 압록강이북지역에서는 기원전 3000년기후반기의 고인돌무덤이 수많이 발굴,조사되였으며 그중 몇가지 유적에서는 이른시기의 비파형단검이 출토되였다. 또한 북류송화강류역에서는 길림지구를 비롯한 넓은 지역에서 단군조선과의 문화적공통성이 강하게 나타나고있다.
단군조선은 강성기에 남변은 조선반도의 거의 전역을 포괄하였고 동변은 길림지대와 대체로 오늘의 백두산일대,함경남북도일대까지 포괄하고있었다고 인정된다. 남변이 남부조선까지 포괄하였다는것은 문헌자료에서 그 근거를 찾아볼수 있다. 《제왕운기》의 저자 리승휴는 그 주석에서 《단군이 조선지역을 차지하고 왕이 되였다. 그래서 시라,고례,남옥저와 북옥저,동부여와 북부여,예와 맥은 전부 단군의 통치하에 있었다.》고 하였다. 여기서 시라,고례는 각각 신라와 고려란 뜻이다. 이것은 이 기사가 단군조선의 령억을 신라,고려라는 후세의 지명을 리용하면서 쓴것이라고 볼수 있다. 또한 고고학자료에 의해서도 남부조선지역의 청동기시대문화는 고조선의 기본령역의 그것과 공통성을 가진다.
동부령역에 대해서는 길림지대와 백두산일대,함경남북도일대에서의 고인돌무덤,돌관무덤 등의 분포정형과 그밖의 유적유물의 분포정형을 통해서 알수 있다. 함경남북도에서 100여기에 달하는 고인돌이 발견된 사실이 그것을 보여준다,
이러한 사실은 단군조선이 지금으로부터 5000년전에 평양을 중심으로 하면서 동방의 강력한 국가로 존재하고 자체의 령역을 계속 확장해나갔다는것을 말해준다.
2)단군조선의 수도 및 정치제도에 대하여
①단군조선의 수도에 대하여
발표자:고란춘
나는 고조선의 수도의 위치문제에 대하여 론하려고 한다.
최근시기 위대한 수령님과 경애하는 장군님의 현명한 령도에 의항여 고조선문제를 주체적립장에서 새롭게 정립하고 고조선의 수도가 조창기부터 변함없이 평양이였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단군릉의 발굴은 그 직접적인 계기로 된다.
과거사회에서 왕들의 무덤은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 수도부근을 쓰는것이 관례로 되고있었다. 례컨대 고구려벽화무덤은 고구려의 수도인 평양부근에 집중되여있으며 신라왕릉들은 경주에 집중되고있다. 또한 리조시기에도 수도 서울부근에는 왕릉이 집중되있다. 단군릉이 평양일대에서 발굴된 사실로부터 고조선의 수도를 료동지방이 아니라 평양일대에서 찾아야 할것이다.
평양이 단군조선의 수도였다는것은 우선 문헌자료를 통해서 알수 있다.
현존하는 우리 나라 력사책들가운떼서 가장 오랜 기록인 《삼국사기》의 고구려본기 동천왕 21년조예는 고구려가 247년에 백성들과 종묘사적을 평양으로 옮겼다는 내용이 실려있고 《평양은 본래 선인왕검이 살던 곳이다.》기록이 덧붙어있다. 이 기사에서 《선인왕검》이란 《단군왕검》을 가리키며 《선인왕검이 살던 곳》이란 단군이 도읍하고있었던 곳을 말하는것이다. 다음으로 1451년에 편찬된 《고려사》지리지 서경 류수관조에는 평양부가 본래 3조선의 옛 수도였다는것을 언급한 다음에 단군조선이 세워질 때 《선인이 박달나무아래에 내려왔는데 나라사람들이 임금으로 내세우고 평양에 수도를 정하였으며 이를 단군이라고 하였다.》는 기사가 있다. 《세종실록》지리지 평양부조에는 《고려사》지리지의 단군기사와 같은 내용이 실려있는데 역시 평양이 3조선의 옛 수도였고 단군이 도읍한 곳이였다는것을 강조하였다. 또 《삼국유사》는 《위서》와 〈고기〉를 인용하면서 단군이 아사달에 도읍을 정하고 후에 백악산아사달로 옮겼다고 기록하였다. 〈백악산〉,〈아사달〉은 〈밝산〉,〈아침산〉을 의미하는 고대 우리 말의 한자표기이다. 즉 이것은 평양의 대박산과 잘 통한다. 아사달과 평양은 같은 의미를 가지므로 단군이 평양에 수도를 정했다고 증명할수 있다.
평양이 단군조선의 수도였다는것은 다음으로 유적유물을 통해서도 알수 있다.
우리 나라 고고학계에서는 최근년간의 대대적인 고고학적발굴사업에 의하여 고인돌과 돌관무덤,집자리유적들을 수많이 발굴하게 되였다.
고인돌에 대하여 말한다면 평양일대에는 고인돌의 모든 류형이 존재하며 특대형고인돌이 다른 지방보다 많이 분포되고있다. 고인돌에는 초기형인 침촌형,중기형인 오덕형,말기형인 묵방형이 있는데 이 모든 고인돌이 분포되여있는 지방은 평양이외에 보지 못한다. 그리고 평양일대에는 대노예주의 무덤인 특대형고인돌이 다른 지방보다 많이 분포되고있다. 평양일대에는 특대형고인돌이 15기이상 분포되고있는데 이것은 다른 지방에 1∼2기밖에 없는것에 비하여 매우 많다.
돌관무덤에 대하여 말한다면 평양일대에서 발굴된 돌관무덤에서는 금동 혹은 금으로 만든 귀걸이,가락지,회색도기 등이 출토되였는데 이러한 유물들은 당시 지배계급들만이 소유할수 있었다. 그러므로 돌관무덤에 묻힌 사람도 고인돌에 묻힌 사람들과 같은 지배계급에 속하고있었다는것이 명백하다.
집자리유적에 대하여 말한다면 대동강류역 및 황주천 유적에는 남경유적,남양유적,표대유적,금탄리유적,석탄리유적 등 많은 집자리유적들이 발굴되고있다.여기서 특히 주목되는것이 남경유적이다. 이 유적은 평양시 삼석구역 호남리에 위치하였는데 이 유적은 22개의 청동기시대의 집자리가 집중되여있다. 제33호집자리에서 갈돌이,제36호집자리에서 탄화된 낟알이 발견된것은 이 일대의 주민들이 유리한 자연지리적조건 즉 넓은 벌판지대에서 농업을 비상히 발전시켰다는것을 알수 있게 한다. 이 일대에서 발굴된 집자리유적은 지리적으로 유리한 평양일대에 사람들이 많이 모여 농업을 위주로 한 생산활동을 벌렸다는것을 시사해준다.
고인돌,돌관무덤,집자리유적을 통하여 평양이 고대문화의 중심지이며 단군조선의 수도였다는것이 명백히 밝혀졌다.
평양이 단군조선의 수도였다는것은 강동 및 성천 지구의 지명을 통해서도 알수 있다.
강동과 성천일대에는 단군의 출생과 활동을 전승하는 지명이 집중적으로 분포되여있으며 그 수는 60여개나 된다.강동일대의 단군관계지명을 보면 주로 단군의 출생과 성장과정,사망지를 전한것들이다. 그에 비하여 성천일대의 단군관계지명은 단군의 활동과 그의 선조나 력대 왕의 행적을 주리 전하고있다. 《강동읍지》에 의하면 강동과 삼동,성천일대는 옛날 《평양동천》이라고 불리우면서 강동군과 성천군을 평양에 속한 하나의 지역으로 보고있었다. 강동군에는 대박산이란 큰 산이 있는데 이 《대박산》이란 단군의 출생지로 전해지고이는 《태백산》이다.《대》와 《태》는 《크다》를,《박》과 《백》은 《밝다》를 의므하므로 단군과 관련한 지명이라고 볼수 있고 이 대박산의 중턱에는 단군이 출생하였다고 전하는 《단군골》이 있다. 그외에도 강동에는 단군의 출생과 성장을 전하는 지명이 분포되여있다. 성천일대에는 왕이나 군주를 표현하는 《군》,《황제》,《천황》이라고 칭한 지명,그리고 왕의 선조를 표현하는 《고황》,《고황제》,《천황》이라고 칭한 지명이 수많이 분포되여있다.《군》이 붙힌 지명에는 군자로동자구의 군자리,군자마을,거흥리일대의 군승곡,군승동,군승고개 등을 들수 있으며 《황제》가 붙힌 지명에는 군자로동자구의 황주동,황주계곡,덕암지역의 황제암,황제석을 들수 있다. 《천황》이 붙히 지명에는 천황동,천황천 등이 있다. 조선에서 사용되는 한자어를 보면 《군》,《황제》,《천황》은 모두 왕을 나타내는 단어들이다. 이러한 한자말의 의미에 비추어보면 거흥리지역의 군승,군승곡이란 지명은 단군이 전투에서 승리했던 지역의 다른 지명이라고 생각할수 있으며 또 군자리나 군자마을은 단군이 살던 거주지라고 생각할수 있다. 《군자》는 왕을 의미한다. 《군자》란 지명은 덕망이 높고 지위가 높은 인물들을 표현한것으로 해석되고있다. 그러나 성천지방의 지명은 그런 의미가 아니라 《군주》,《왕》자신을 나타내는 의미로 생각되였으며 단군과 이어진 관계로 유래되여있다.
이러한 지명들은 평양이 단군조선의 수도였다는것을 시사해주고있다.
마지막으로 평양일대는 인류발상지의 하나여다.
평양을 중심으로 한 대동강류역은 토지가 비욕한것으로부터 오랜 옛날부터 사람들이 살아온 인류발상지의 하나로서 력사의 시원지이다. 이것은 구석기시대의 유적들이 증명해주고있다. 우리 나라에서 가장 오랜 유적인 평양시 상원군 흑우리의 검은모루유적은 지금으로부터 약 100만년원의 원인들의 생활모습을 보여준다. 평양일대에서 원인 다음단계의 인류류형인 고인이 남긴 유적으로서 대현동유적,승리산동굴유적이 발굴되였는데 여기서 나온 화석들을 각각 《력포사람》,《덕천사람》이라고 부른다. 뿐만아니라 평양일대에서는 고인 다음단계의 인류류형인 신인들이 남긴 유적인 룡곡리유적,승리산유적,만달리유적 등이 있다. 여기서 발굴된 화석들은 각각 《룡곡사람》,《승리산사람》,《만달사람》이라고 불리우고 있다. 이상과 같은 사실은 평양일대가 원인,고인,신인 등 인류진화의 각단계를 거치면서 사람들이 살아온 인류발상지이며 초기의 문화가 창조된 력사의 시원지라는것을 말해준다.
평양일대는 또한 신석기,청동기 시대의 문화가 일찌기 발전한 고대문명의 발상지였다.
남경유적,표대유적,금탄리유적,룡곡리유적,남양유적,궁산유적 등은 그 대표적인 실례로 된다.이 유적들에서 출토된 농구들은 당시 사람들이 농업을 위주로 하여 생산활동을 벌리였으며 그 과정에 세계를 깊이 인식하고 지식과 경험을 쌓아나갔다는것을 말해준다. 이들은 석기의 모양과 기능을 보다 세련된것으로 만들며 일반석제와 다른 광석을 발견하고 그를 얻는 금속기술을 체득해나가는 과정에 청동기문화를 창조하였다.매개 유적들에서 볼수 있는바와 같이 청동기시대집자리는 신석기시대집자리의 웃부분에서 출토되였으며 층위학적으로는 상하관계에 있으므로 신석기시대를 창조한 조선옛류형사람들이 남긴것이라는것이 명백하다. 이처럼 평양일대는 인류가 발생한 후 오랜 력사적과정을 거쳐 발전하여온 인류발상지의 하나이다.
앞서 론한 모든 내용들은 평양이 단군조선의 수도였으며 민족의 성지였다는것을 말해준다.
*질의응답
〈물음〉
:평양을 민족의 성지로 주장하는것은 공화국이 《고조선-고구려-고려》를 기본으로 한 《민족의 정통성》을 립증하려는 정치적인 의도가 아닌가?
〈대답〉
: 단군릉바리굴은 정치이전의 과학연구사업으로서 진행한것이였고 유골밝견은 공화국학자들에게 있어서도 뜻밖의 일이였다.
공화국학자들은 문헌자료들의 전면적재검토,대대적인 고고학적발굴조사사업,지명조사 등을 통하여 평양이 단군조선의 수도였다는것을 론증하였다.
그리고 평양이 단군의 출생지이며 건국한 터전이고 사망한 곳이라는것이 확인되기때문에 비로소 평양을 민족의 성지라고 말하게 된것이며 민족사의 명맥이 고조선에서 뿌리내린것이 확실하기때문에 《고조선--고구려-고려》에로 이어지는 민족의 정통에 대하여 론한것이지 누구도 우리 공화국정권의 정통이 고조선에 뿌리박고있다고는 말한적은 없다.
왜냐하면 민족사의 정통과 정권의 정통은 별개의 문제이며 우리 공화국정권이 계승하고있는것은 《고조선-고구려-고려》의 정통이 아니라 우리 당의 빛나는 혁명전통이기때문이다.
②단군조선의 정치제도에 대하여
발표자:손지혜
나는 5000년전에 단군조선이 국가로 성립되였다는것을 립증하기 위하여 국가징표에 따라 통치체계와 벼슬등급제 그리고 법에 대하여 말하겠다.
단군조선시기에는 중앙통치기구로서 벌써 후세의 대신급에 해당하는 가들로 편성된 8가제도가 확립되였으며 지방통치기구로서는 고을제도가 정비되였고 관료질서면에서는 관리들의 관료신분등급을 규제하는 등급제가 수립되였다.
먼저 단군조선의 통치체제에 대하여 말하겠다.
국가통치제제란 지금으로 말하는 도도부현제와 같은것으로 리해할수 있는데 단군조선의 통치령역내에는 왕의 직할시,후국,소국,속렁 등이 존재하여 그것들은 지방통치에서 큰 위치를 차지했다.
기본지방행정통치기구는 고을제도였다. 15세기 실학자인 량성지의 《눌재집》권4 고을칭호승작조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여있다.
《신이 조용히 생각하건데 동방의 고을은 단군이래로 산과 강이 막히는것과 거리가 멀고 가까운것.인구가 많고 적은데 따라 선이 되였으니 일시적인 우혜와 혜택으로 각을 높이거나 낮추어서는 안된다.》
단군조선시기의 통치체제에서 특징적인것은 후국제를 실시한것이였다. 후국제란 왕이 여러 종족뜰의 추장을 《후》로 정하고 그 사람을 시키고 일정한 지역을 통치하는 통치방법을 말한다. 중국에서는 분봉제라는 통치방법을 쓰고 자기 왕조부터 즉 자기와 피가 통한 일가친척부터 지방의 권럭자를 두었는데 단군조선은 그것과는 달리 종족의 우두머리를 시쳐 통치했다는데서 다른 나라와 차이가 있다. 이것은 딴군조선이 각이한 종족들의 통합에 의하여 국가를 이른 사정과 관련된다. 고조선왕조가 수립된 이후시기 서북조선지역을 제외한 조선반도전역과 만주지역에는 숙신,예,맥,부여,구려,옥저,한 등 동족의 여러 《소국》들이 수많이 분포되고있었다. 료동반도일대 유적유물을 분석한 중국학자들속에서 이 일대 원주민들이 5000년전에 이미 청동기시대에 들어서고있었으며 4000년전에는 황하류역문화와는 엄연한 차이를 가진다고 주장하고있다. 이것은 기원전 30∼25세기경에 이미 《소국》이 형성되고있었던 가능성이 매우 크다는것을 말해준다. 단군조선왕조의 통치자들은 주변의 이러한 소국들을 하나씩 복속시키면서 령토를 확장하였는데 이 종족들을 소멸시키는것이 아니라 《소국》으로서의 체제를 유지시하면서 지배하여왔다는것을 알수가 있고 후국제의 형식은 단군조선왕조의 간첨통치의 방법을 가지고 진행되였다고 볼수 있다.
통치체제에서 또하나 특징적인것은 부수도제도를 실시한것이다. 부수도란 넓어진 령토를 지킬 때 전선사령부 또는 예비수도로 설치한 조선의 고유한 통치체제였다. 부수도는 전쟁시에 수도와 같은 지위에 있었으며 그것은 고조선-한전쟁때 왕검성에 국왕과 태자,대신,장군들이 모두 나가있었던 실례를 통해서도 알수 있다. 단군조선시기의 부수도의 하나에 당장경이 있다. 당장경은 단군이 평양일대에서 큰물피해가 일어났을 때 옮겨온 림시수도로 단군관계전설에 의하여 오늘까지 전해져왔다. 그러나 일부 학자들속에서는 《기자동래》설에 기초하여 단군이 평양으로부터 수도를 옮겼다는것을 주장하는 경향도 있으나 이것은 력사적사실에 댜하여 옳게 분석하지 못하고있다고 볼수 있다. 단군조선에서 실시된 부수도제도는 그후 만조선,고구려,발해,고려 등에 계승되여나갔으며 그 실례가 왕검성,봉황성,발해4경,서경 등이다.
다음으로 벼슬등급제도에 대하여 말하겠다.
고조선시기 관료기구는 단군조선왕조의 첫시기에 비교적 그 면모를 갖추었다고 볼수 있다.
단군조선시기의 중앙관제에서 특기하여야 할 점은 중앙정부가 각 지방에 뿌리내린 후왕들과 지방에 할거한 귀족세력을 포섭하여 그들을 유효적절하게 왕권에 종속시킨것이다. 단군조선에서는 임금의 통치밑에 있던 직할시안의 귀족세력과 중앙의 최고위급관리들로 이루어진 군사민주주의적평의기구가 있었으며 단군은 제가평의기구의 수속을 통하여 그 기구를 조종하면서 그것을 왕권에 종속시켰다. 제가평의기구는 임금의 자문기관이였으나 중대사의 처리와 심의를 직접 담당하는 경우도 있었다.
《규원사화》에서는 단군조선의 관료기구를 《8가》로 이야기하고있다. 중앙관제의 기본인 《8가》를 비롯한 여러 가들은 평의기구의 성원이였으며 동시에 최고관청의 고위관직을 차지하였다. 《가》들은 관리로서 국가의 행정사업을 분담받고 그 직무를 수행하였다. 《8가》속에서 호가는 제가를 통솔,마가는 문서,우가는 농업생산,웅가는 국방,응가는 형벌,로가는 보건,구가는 쟝관의 통솔,학가는 도덕륜리 등의 임무를 담당수행하고 해당한 관청을 관할하였다. 《8가》의 특징에 대하여 말한다면 그것은 짐승명을 관직명으로 리용하였다는것이다. 이 《8가》제도는 후세에 부여에서 《6가》로 계승되였으며 후조선의 말기와 만조선시기에는 종래와 다른 상,대부,박사,장군 등의 관직명이 나타났다.
단군조선과 부여의 《가》제도의 관련성에 대하여 말한다면 짐승명을 관직명으로 하는 딴군조선의 특징은 부여에 계승되였으나 단군조선과 부여의 《가》제도를 대비해보면 정치제도상의 몇가지 문제에 대하여 종래와 다른 각도에서 고찰할 필요가 있다.
첫째로,단군조선에서는 왕자가 직접 정치에 참가했으나 부여에서는 그런 경향이 적었다. 초대 단군인 왕검통치시기 그의 첫째아들인 부루는 호가로서 그외의 《가》들을 통솔했으며 둘째아들인 부소는 형벌을 담당했고 셋째아들인 부우는 보건을 담당하였다. 각 왕자가 국가정권의 임무에 직접 참가하여 관청장관으로서 국무를 집행한것은 후대에 가도 있었으나 단군조선시기와 같이 많이는 없었다. 그러나 부여의 6축관직명가운데는 단군조선의 3가 즉 호가,응가,로가가 보이지 않는다. 6축관직명중 호가,응가,로가가 없는것은 부여에서는 왕자의 중앙정계진출이 제도상 기본적으로 패지되였기때문이라고 할수 있다.
둘째로 중앙관직편성에 있어서 단군조선과 부여의 공통성이 뚜렷하다는것이다. 또한 단군조선의 《가》제도는 만조선시기에 와서 《상》제도로 변천된 가능성이 크다. 그것은 직능상으로 보아 《상》제도가 《가》제도와 마찬가지로 지방세력들이 자기 고장과의 깊은 관계를 가지면서 중앙관직도 맡았다는점에서 부여의 《가》제도와 거의 같으므로 그것이 《계승》되였다고 볼수 있다.
단군조선시기에 평의회기구가 있었으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대노예주가 모여 국가정치를 운영해나간것으로서 하층농민,노예의 의견은 정치에 반영안되였다고 볼수 있다.
마지막으로 고조선에 법이 있었는가 하는 점에서 본다면 아직 이 문제가 공화국에서는 심의중에 있으나 《범금8조》에서 법의 유무를 추측할수 있다고 본다.
《범금8조》는 고조선의 노예사회의 발전상을 집약적으로 보여주는 국가법이다. 현존하는 몇개 조항만 보아도 둘레의 국가가 단군조선에 복속하여 전쟁포로가 없어진 결과 노예를 새로 얻기 위한 수단으로 법을 만들었다는것을 알수 있다. 이제까지는 《범금8조》의 재정년대를 만조선이 성립된 기원전 2세기초엽보다 앞서재정되였다고는 보지 못한다는 견해가 일반적이였으나 이번 연구아에서는 그 년대를 비상히 올려 후조선성립시기인 기원전 14세기경에 재정되였을것이라고 본다.
한대 대국주의,사대주의 봉건사가들은 고조선의 《범금8조》를 중국 은왕조말기의 《기자》가 《기자조선》을 만들었을 때 같이 제정했다고 주장하였다. 이미 《기자동래》설은 후날에 날조된것이라고 증명되였으나 이와 함께 《범금8조》까지 부정하여서는 안된다. 《범금8조》에 대하여 처음으로 기록한 《한서》지리지를 구체적으로 검토하면 《범금8조》와 《기자》는 아무런 관계가 없고 《범금8조》가 고조선의 고유한 법이라는 사실을 확인할수가 있다. 이 법을 후조선성립시기와 관련시켜 생각했다는 사실을 보아보면 《범금8조》의 재정시기가 후조선의 성립시기와 깊은 관련을 가지고있었다는 근거가 될것이라고 할수 있다. 따가서 이번 연구에서는 《범금8조》가 기원전 14세기경에 제정되였다는 견해를 내놓겠다.
《범금8조》는 보나리 노예주의 리익을 보호하여 노예의 수를 증가하기 위한 법적담보로 만들어진것이므로 노예주와 노예,자영소농민의 계급분화를 보여준다.
《범금8조》는 단군조선시기에 그 모양이 일정하게 만들어져있었다고 볼수 있다. 그것은 후조선이 단군조선의 정치경제제도를 계승한 국가였다는것으로부터,그리고 고인돌의 건축과 룡산리노예순장무덤의 발굴을 통해 볼수 있기때문이다.
만조선시기에 노예가 존재했다는것은 앞에서 이야기되였기때문에 여기서는 자세히 이야기안하지만 노예의 첫 형태는 전쟁포로 혹은 죄를 저지른 사람이였으므로 단군조선시기에는 이미 기본적인 법의 모양이 만들어지고있었다고 생각할수 있다.
이러한 정치제도의 확립은 단군조선이 이미 계급국가로서의 모체를 완비한 나라였으며 동시대의 다른 나라들에 비해서도 발전된 정치구조를 가진 고대국가였다는것을 말해준다.
3)고조선의 문화에 대하여
발표자:최명선
우리 민족은 예로부터 슬기로운 문화를 가진 자랑찬 민족이다.
고조선시기의 유적이나 유물에서도 일찍부터 우리 민족이 높은 문화기술을 가지고있었다는것을 잘 알수가 있다.
평양을 비롯한 서북조선지방은 일찍부터 우리 선조들에 의하여 개척되여왔으며 청동기문화가 발전하였다. 지난시기 우리 나라에서는 청동기문화의 개시를 기원전 2000년경으로 보아 이 시기를 청동기시대로 정하였다. 그러나 최근에 단군 및 고조선 력사가 새로 해명된 조건하에서 조선의 금속문화의 발생기에 대한 발굴조사과정에 고조선초기에 해당되는 청동기와 금동제품,금제품 등이 수많이 발굴되였다. 기원전 25세기경에 해당되는 평양시 상원군 룡곡리5호고인돌무덤에서는 비파형창끝,룡곡리4호고인돌무덤에서는 청동단추가 출토되였다. 이것은 고조선초기에는 벌써 동합금인 청동이 많이 사용되고있었다는 증거물로 된다.
그 대표적인 유물이 비파형단검이다. 비파형단검은 기원전 3000년기에 이미 고조선에서 씌여진 청동단검이다. 이 단검은 량쪽이 다 날로 내려오면서 점차 넓어지다가 량쪽으로 돌기부를 이루었으며 아래부분은 움푹 오무라들었다가 다시 넓어져서 등굴게 되였다. 그 생김새가 우리 나라의 민족악기의 하나인 비파와 비슷하므로 비파형단검이라고 하며 또 비파형동검이라고도 한다. 검자루는 거꾸러T형으로 생겼는데 여기에 검자루맞추개들을 맞추게 되여있으며 검자루와 검몸도 조립하게 되였다. 이와 같이 비파형단검은 검몸,검자루,검자루맞추개들을 따로 만들어서 그를 조립하게 되였으며 검날의 선이 독특한 생김새로 굴곡을 이룬것이 특징이다. 이러한 특징은 그후 좁은놋단검에 계승되였다.
비파형단검은 고조선 이른시기의 유물가운데서 가장 대표적이며 상징적인 유물이다. 거기에는 우리 조상들의 창조적지혜와 발전된 청동기제조기술 및 예술적재능이 잘 반영되고있다.
세계적으로 청동기의 력사는 순동시대부터 청동시대에로 발전했는데 나라와 지역별로 청동의 화학조성은 서로 차이가 있다. 따라서 청동기의 화학조성을 통하여 지역적인 특징을 알수 있고 그 발전의 정도도 평가할수 있다.
고조선에서는 동합금을 만드는데 석과 연을 섞여서 만들었다. 왜냐하면 순수한 동보다 거기에 석과 연을 섞임으로써 그 강도와 견도에서 차이가 생기기때문이다. 그러나 거기서 중요한것은 섞이는 비률이다. 너무 많이 석과 연을 섞이면 그것은 유리처럼 깨여지기 쉽게 된다.
고조선초기의 청동가공기술을 통하여 다음과 같은 결론을 얻을수가 있다.
첫째로,고조선시기의 청동가공기술은 동,석,연 3원소합금기술의 특징을 가지고 자기 발전의 전성기를 맞이하였다는것이다. 고대의 일부 나라들에서 청동의 화학조성은 동에 비소만을 섞인 《동-비소》합금과 《동-석》,《동-비소-석》합금 등의 종류가 있어서 《동-석-연》합금이 있었다고 해도 그것은 조선과 그 량적측면에서 합금비률이 다르다. 이것은 지역마다 청동의 화학조성이 달랐다는것을 나타내고있다.
둘째로,고조선의 청동가공기술은 초기부터 높은 단계에 있었다는것이다. 동,석,연을 섞인 량질의 재료를 만드는것은 청동제작초기에는 매우 어려운 일이였다. 그것은 아무리 자연계의 풍부한 동을 재취했다고 해도 석과 연의 특성을 알고 동에 섞이는것은 경험과 기술이 필요하고 그런 제조기술은 간단히 이루어지지 못한다. 그러나 조선에서는 이러한 기술공학적특성을 파악하고 고조선초기부터 재료적으로 매우 질좋은 청동을 만들어내였다.
력사의 발전단계에서 금속문화는 당시 사회의 문명수준을 나타내는 징표의 하나이다. 평양과 그 일대에서 출토된 이 금속제품들의 가공기술은 고조선의 초기로부터 선조들이 얼마나 일찌기 금속문화를 창조하였으며 거기서 고조선의 문명이 이른 시기부터 발전하고있었고 그것이 세계금속사에 어떠한 영향을 주어왔는가를 립증해준다.
다음으로 우리 나라 최초의 문자인 신지글자에 대하여 말하겠다.
일반적으로 우리 민족의 첫 민족글자는 훈민정음이라는 《정설》이 있는데 우리 나라의 옛 기록들에는 훈민정음창제이전에도 일정한 우리 글자가 쓰이였다는것을 적지 않게 전하고있다. 또한 전국각지에서 발굴된 유적유물에도 가장 초보적인 문자형태인 그림문자가 씌여져있다.
조선의 신석기시대,청동기시대의 바위,석기,뼈장식품,토기,청동제품 등에는 여러가지 류형의 문자에 가까운 추상화된 도형,부호가 수많이 그려져있다. 초보적인 분석에 의하면 그주의 일부 류형은 신지글자의 모양과 형태적인 계승관계를 나타내고있다. 이런 사실은 원초문자의 형태가 원시사회는 물론 그 이후의 시대에서도 잔존적으로 사숑된것을 이야기하며 그런 원초단계를 거쳐 신지글자가 만들어진것을 말해준다. 여기서 신ㅈ글자는 다른 나라에서 받아들인것이 아니라 여러가지 준비단계를 거쳐 조선에서 발생,발전한 조선민족의 고유한 글자임을 알수 있다.
《신지글자》라는 이름이 《단군조선-고조선시기의 글자》를 가리킨다는것에서도 이 글자가 조선민족의 고유한 문자라는것을 알수 있고 또한 《글》,《붓》,《쓰다》 등과 같은 글자생활의 과정을 나타내는 기초적인 말마디들이 다 고유한 우리 말임을 통해서도 잘 알수 있다.
신지글자는 단군조선시기부터 조선어를 기록한 문자로서 국가의 관리와 문화의 발전에 크게 기여하였다. 옛 기록들에서 고구려사람인 소문 대영흥이 《신지필사》에 주석을 하고 서문을 썼다는 기록이 있고 《고려사》를 비롯한 다른 기록들에도 《신지필사》를 한문으로 번역했다는 기록이 있다. 이것은 《신지필사》란 서적이 처음 한자아닌 다른 문자로 씌여져있었다는것을 말해준다. 《신지필사》가 한자이외의 문자로 씌여져있었다면 그것은 바로 신지가 만들었다고 전해지는 신지글자로 씌여져있었던것에 다름없을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훈민정음이전에도 조선에 독창적인민족문자가 이썼다는것을 알수가 있다.
이렇게 조선민족은 5000년전부터 문자생활을 하였는데 동방나라들속에서 당시 국가를 수립하고 비교적 세련된 문자생활을 보내던 나라는 조선이외에 없다. 동방나라들에서 갖앙 이른시대에 만들어졌다고 하는 중국의 갑골문자는 지금으로부터 4000∼3500년전의 문자로써 신지글자보다 뒤늦게 만들어진것이다.
신지글자와 꼭같은 글자가 오랜 옛날부터 중국에 알려져있고 남아있으면서 오늘은 《창힐글자》라고 불리우고있다.
그러면 《창힐글자》란 어떤 글자인가?
《창힐글자》는 그 글자모양이 한자처럼 네모나지도 않고 획수도 많지 않으며 새발자국처럼 자연스럽고 간결하다, 또 창힐글자는 모두로 28자이다. 여기서 신지글자는 모두리 16자이기때문에 두 글자간에 12자의 차이가 있기는 하나 그들의 모양새나 째임새로 보아 한갈래의 글자라는것을 알수 있다.
그러면 어느 한쪽이 기원적인것이고 어느 한쪽이 전파된것인가?
이 문제를 밝히기 위해서 몇가지 측면에서 보아보면 첫째로,이 글자는 한자가 아니라 한자계통도 아니다. 그 리유는 그 모양새와 째임새가 한자와는 다르며 그 글자를 중국의 한자로 옛날부터 해독하려고 애를 썼으나 해독하지 못했다는것으로 알수 있다.
둘째로,《창힐글자》는 《이족글자》도 아니다. 일부 학자들속에서 소수민족의 하나인 이족의 글자라는 설도 있지만 그 글자의 발싱,발전의 년대가 크게 차이나며 또한 그 형태류형자체가 분명히 구별된다.
단군조선건국이래 고대동방나라들은 서로 오가며 물물교역을 하면서 문화문화를 발전시켜왔다. 이러한 과정에 신지글자가 전파,발전되여 창힐글자로 되였다고 보는것이 가장 타당할것이다.
다음으로 고대조선의 독특한 무덤양식인 고인돌무덤의 변천과정에 대하여 론하겠다. 그러나 그에 앞써 고인돌의 변천이 그 째임새에서 나타나므로 변천관계를 보기위해서는 먼저 고인돌무덤의 류형과 형식을 구분하고 그 년대를 고찰할 필요가 있다.
둘째로,관돌을 내면에 세워서 무덤칸에 조립한것이지만 뚜껑 1개의 묘역안에 오직 하나의 무덤이 있는 개별화된 무덤이다. 이것을 《오덕형》고인돌무덤이라고 한다.
셋째로,하나의 묘역안에 1기의 무덤이 있지만 돌관을 쪼각돌 혹은 강돌로 쌓아서 만든 무덤이다. 이것을 《묵방형》고인돌무덤이라고 한다.
이 3개 류형의 고인돌무덤은 골관짜임새의 특성에 따라 각각 몇개의 형식으로 다시 세분된다.
침촌형고인돌무덤은 집합식무덤이지만 이 경우에도 돌관의 구조형식에 따라 다음과 같은 4가지 형식으로 세분된다. 그것은 첫째로,돌관을 두께 4∼5㎝인 얇은 판돌로 조립한 고인돌이다, 이 무덤을 1형식의 침촌형고인돌무덤이라고 한다. 둘째로,하나의 묘역안에 있는 여러개의 무덤의 돌관이 1형식과 같은 얇은 판돌로 조립한것도 있고 완전한 고임돌의 체모를 갖춘 두께 15∼20㎝정도의 두꺼운 고임돌을 놓고 조립한것과 연약한 돌관곁에 두꺼운 고임돌을 덧 세워놓은것 등 이른바 《복합형》의 무덤을 제2형식으로 한다. 셋째로,1개의 묘역안에 여러개의 돌관이 있지만 한결같이 두께 20∼30㎝이상 되는 두꺼운 고임돌을 세우고 그 사이에 2개의 막음돌로 막아 돌관을 조립한 무덤을 제3형식이라 한다. 넷째로,제4형식의 침촌형고인돌무덤은 상원군 장리에서 처음으로 발견되였는데 이 무덤의 특징은 하나의 묘역안에 판돌 4개로 돌관을 조립하여 만든 무덤과 쪼각돌로 쌓아 돌관을 조립한 무덤이 결합된것이다.
오덕형고인돌무덤은 무덤간의 문돌형식에 따라 3개 류형으로 구분된다, 1형식은 무덤은 무덤간을 조립한 4개의 판돌중 1개의 막음돌전체를 문돌로 쌓고 각 부문들의 돌다듬기솜씨가 거친것이고 2형식은 한칸막음돌 즉 문돌안에 높이 60∼80㎝정도인 문턱들로 가로막아놓고 그밖에 문들을 맞세운것이다. 3형식의 무덤은 지석술이 세련되고 무덤칸 한편 막음돌전체가 아니라 3분의 2는 막음돌로 고정시키고 나머지 무덤칸모서리에 나들문을 낸것인데 그러한 무덤은 평양일대의 대형고인딜에만 보인다.
묵방형고인돌무덤인 경우에는 돌관출입구의 변화에 따라 2가지 형식으로 구분된다. 1형식의 묵방형고인돌무덤은 새 벽체만 ㄷ자형으로 쪼각돌로 쌓고 개방된 한켠벽전체의 문판들을 세운것이며 2형식의 무덤은 3벽을 비롯하여 한켠벽전체가 아니라 3분의 2만 쪼각돌로 쌓아 돌관을 만들고 돌관의 한켠구석에 나들문을 만든것이다.
이와 같이 평양일대의 고인돌무덤은 침촌형은 4개,오덕형은 3개,묵방형은 2개 형식으로 세분된다.
구조형식으로 볼 때 침촌형고인돌무덤은 오덕형과 묵방형 고인돌무덤보다 이른 형태이다. 그것은 무엇보다 먼저 오덕형,묵방형 고인돌무덤은 집합적인 침촌형고인돌무덤의 분화된 형태라는데 있으며 또한 그 분포범위가 퍽 좁다는 분포상 특성에서도 반영되여있다. 또한 무덤도 하나의 구조물이기때문에 건축공학적측면에서 선후관계를 론한다면 오덕형고인돌무덤은 크기나 구조로 보아 발전된 새로운 공법을 적용하지 않고서는 도저히 쌓을수도 없으며 따라서 그 공법상 특성으로 하여 일정하게 발전된 생산력을 전제로 한다는데서 알수 있다.
이러한 고인돌무덤의 변천은 우리에게 무엇을 보여주는가?
그것은 고인돌무덤이 우리 민족의 특징적인 무덤이라는것이다. 평양일대에서 처음으로 창조된 고인돌무덤은 단군조선의 성립과 같이 시작된 고대문명의 발단과 함께 더욱더 발전하여 고조선문화의 중요한 구성부분의 하나로 되여있으며 그것은 점차 동족의 고대주민들이 살던 지역으로 확산되여나갔다. 고인돌무덤의 변천과정은 단군조선의 문화를 풍부하게 하였다.
강동군에서 단군릉이 발굴되여 평양일대에서 1만 4천여기의 고인돌무덤이 조사발굴됨으로써 유구한 우리 력사의 시원이 평양에서 발단되고 민족문화의 원류가 평양을 중심으로 하여 이루어졌다느것이 명백하게 되였다.
고조선에서는 청동기문화와 고인돌무덤 등과 함께 천문학분야에서도 그 우월성을 볼수 있다.
고조선에서는 일찍부터 천문현상을 깊이 현구하여 천문지식을 당시로서는 비교적 높은 수준으로 발전시키였으며 그것은 앞서 론한 고인돌무덤의 별자리그립에 잘 반영되여있다.
고조선의 천문지식은 고구려에 의하어 계승발전되였다. 고구려천문학은 1년을 365.25일로 하는 매우 정확한 력서를 만들어썼으며 많은 항성들의 위치와 운동에 관한 리론을 정확히 알고있었다. 또 력사기록들에는 평양에 첨성대가 있었다고 씌여져있고 천체운동에 관한 기록이 밝혀져있다. 이런 사실들은 고구려의 천문지식이 당시로서는 매우 높은 수준으로 발전하였다는것을 말하여준다.
그러한 높은 천문지식은 단군조선의 천문학전통을 계승하여 더욱 발전시킴으로써 이루어진것이였다.
고구려가 고조선의 천문학을 계승하였다는것은 첫째로,고인돌무덤에 새겨져있는 별의 형태와 별표식의 크기에서 볼수 있다. 고인돌무덤의 별은 동그라미모양으로 표시되고있다. 또한 고인돌무덤의 별표식은 크기가 각이하게 되고있다. 이것은 고구려시기의 별그림에서도 알수 있다.
계승썽은 둘째로,고인돌무덤에 새겨진 별그림의 위치하 별의 수에서 볼수 있다. 고조선사람들은 고인돌무덤의 뚜껑을 하늘과 같이 생각하고 거기에 별을 그렸으며 거기에 새겨진 별수도 무덤에 따라 각이하다. 이것도 고구려벽화무덤에서 볼수 있는것이다.
계승성은 셋째로,고인돌무덤에서 별자리의 표식수법과 별자리의 모양,놓인 상태에서 볼수 있다. 고인돌무덤의 별가운데서는 별자리표식이 있는건과 없는것이 있는데 이것은 놉고 길게 된 홈으로 별과 별사이를 련결하는 방법으로 표시되여있다.또한 별자리는 별수를 각이하게 하면서 그 모양을 기하학적도형을 기본으로 하면서 일부 물건을 상징한것도 있다. 이처럼 고구려시기의 별자리표식과 별자링의 별수,별자리모습 놓인 상태 등도 단군조선의 천문지식의 계승임을 말해준다.
계승성은 넷째로,고인돌무덤의 별그림구성과 천문연구기관의 설치 및 하늘숭배사상에서 볼수 있다. 고구려사람들도 고조선의 하늘숭배사상을 계승하여 해마다 해와 달,별 등 하늘에 제사를 지내면서 숭배하였고 자기들의 시조인 동명왕의 아버지는 다섯마리의 룡이 끄는 수레를 타고 하늘에서 내려왔다고 하였으며 자신들을 하늘의 후손이라고 하였다.
이상에서 본바와 같이 고구려의 깊은 천문지식은 모두 단군조선시기의 천문지식을 계승하고 발전시킨것이다는것을 말하여준다. 그리고 고구려의 천문지식은 우리 나라 중세시기 천문학발전의 중추를 이루었다. 그것은 결국 단군조선의 천문학은 우리 나라 천문학의 시원으로 된다는것이다.
이처럼 단군조선은 초기부터 발전된 문화를 갖추고있었다. 원래 문명이란 사람들이 금속도구와 문자를 리용하면서 국가라는 하나의 정치조직속에서 살게 되였을 때 그것을 문명이라고 한다. 즉 단군조선이 비파형단검문화를 창조하고 신지글자를 사용하였다는것은 단군조선의 도읍지이며 고대문명의 발상지인 평양에서 문명이 개화하였다고 말할수 있다.
북한의 고조선에 대한 연구는 리지린이라는 역사학자가 대표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북한에서의 역사는 정권의 이익에 의해 많은 부분이 왜곡 되어 있어 많이 아쉽습니다. 우리가 연구할 수 없는 고구려 부분을 북한에서는 할 수 있지만 그 자료에 대한 왜곡이 있다는게....
첫댓글 출처가 어딥니까?
원출처는 조선신보나 조선통신일 것으로 생각됩니다. 지금은 정부에서 막아놔서 갈 수 없고 history21에 있는 것을 가져왔습니다.
북한의 고조선에 대한 연구는 리지린이라는 역사학자가 대표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북한에서의 역사는 정권의 이익에 의해 많은 부분이 왜곡 되어 있어 많이 아쉽습니다. 우리가 연구할 수 없는 고구려 부분을 북한에서는 할 수 있지만 그 자료에 대한 왜곡이 있다는게....
좋은 자료입니다^^ 스크랩 해두었습니다.
북한이 단군조선사 복원에 심혈을 기울이고 있는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네요. 중국의 동북공정에 대비해 만든 고구려연구재단마져도 단군조선을 언급하지 않고있는 남한의 강단사학계와 대비됩니다. 무슨 논리로 중국의 역사왜곡에 대항할런지...
북한 정권의 고조선사는 극히 객관성이 떨어집니다. 북한 사학계에서 단군릉이라고 주장하는 무덤도 실제로는 북한 자신들이 만들어낸 것이라고 봐야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