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야구사와 맥을 같이 한다.선린이라는 이름이 야구사에 처음 등장한 것 이 1911년.1905년 야구가 국내에 선보인 지 6년 만의 일이다.그러나 학생들 끼리 하는 대항전에 불과했고 정식으로 팀이 구성되지도 않았다.1920년 정식 으로 야구부가 창단됐지만 여전히 교내 동아리활동 수준에 지나지 않았다.공 식대회에 처음 출전한 것은 1929년 갑자원대회.일제 치하인 관계로 선수 구 성도 일본인들이 중심이 될 수밖에 없었다.
해방과 한국전쟁 등 격동의 틈바구니에서 잠시 해체되는 아픔을 겪기도 했 지만 야구의 명맥만은 꿋꿋하게 유지했다.그리고 본격적으로 야구의 틀이 잡 히기 시작한 60년대 이후 야구는 선린을 말하는 또다른 이름이 됐다.
*?야구로 하나된 선린* 선린을 하나로 뭉치는 힘은 바로 야구다.각계로 진출한 동문들이 야구에 쏟는 관심은 각별하다.비단 동문들뿐만이 아니다.고교 야구팀 가운데 유난히 많은 팬이 몰려다닌다.선린이 우승권에 들면 동대문야구장이 떠들썩해질 정 도다.그만큼 선린의 야구는 사람들을 즐겁게 하는 매력이 있다.
비결은 호쾌하고 선이 굵은 공격야구에 있다.선린은 전통적으로 타격이 강 한 팀이다.한동화(전 쌍방울 감독) 김충(SK 스카우트 팀장) 박용진(한화 2군 감독) 배성서(전 빙그레 감독) 이해창( 전 삼성 선수) 등을 필두로 김우열( 전 OB선수) 이선웅 박노준 김건우 이병훈 송구홍 등 좋은 타자를 끊임없이 배출했다.물론 유남호(삼성 코치) 이길환 윤석환(SK 코치) 등 걸출한 투수도 많았지만 상대적으로 타자의 우수성이 돋보였다.
*?선린 전성시대* 선린야구의 틀을 잡은 인물은 61년 감독으로 부임한 박종해씨다.당시만 하 더라도 생소했던 겨울 합숙훈련까지 실시하는 열정을 보였고 한동화,김충,박 용진 등 유망주를 스카우트해 팀 체질을 개선해나갔다.영어와 일본어로 된 야구기술서적을 손수 번역해가며 선수들 지도에 활용했다.
그렇게 다져진 저력이 한꺼번에 폭발한 것이 69년.대통령배를 시작으로 청 룡기,화랑대기,황금사자기까지 4개 대회를 석권했다.당시 마운드를 이끈 주 인공이 삼성 유남호 코치.현재 선린의 지휘봉을 잡고 있는 정장헌 감독은 든 든하게 안방을 지키며 찬스 때마다 맹타를 휘둘렀다.정 감독은 그 해 전국대 회에서 47타수 18안타를 기록해 이영민타격상을 수상하는 영광을 안기도 했 다.
선린은 70년대 후반부터 80년대 초반까지 윤석환,박노준,김건우,유지홍 등 스타 선수를 연이어 배출하며 제2의 전성기를 누렸다.
■백년을 딛고 천년을 날자 80년대 중반이후 명가의 자존심에 주름이 잡혔다.85년 화랑기 우승을 끝으 로 15년이 지나도록 우승과 인연이 없었다.우수한 선수를 끌어모으는 데 한 계에 부딪쳤기 때문이었다.서울 지역의 유망선수들은 경기,서울 등 인문계 명문고로 진학하기를 원했다.심지어 선린중학교 선수들도 선린을 택하기를 꺼렸다.원인은 뻔했지만 세상이 그렇게 돌아가는데야 어쩔 도리가 없었다.
그래서 ‘상업고등학교’의 딱지를 떼고 ‘정보고등학교’로 교명을 바꿨 고 올 3월부터는 ‘선린인터넷고등학교’로 또다시 변신을 시도한다.때 맞춰 야구에 각별한 관심을 보여온 천광호 교장이 선뜻 1500만원의 스카우트비를 지원해 오랜만에 스카우트다운 스카우트를 했다.명가의 전통을 새 천년에도 이어가기 위해 전지훈련지인 강릉에서 선수들과 함께 구슬땀을 흘리고 있는 정장헌 감독은 “우승을 장담할 수는 없지만 누구에게도 쉽게 지지는 않을 전력을 갖췄다”고 자신한다.
■또 하나의 전통 선린에는 아버지가 둘인 선수가 많다.한 사람은 피를 나눈 친부이고 또 한 사람은 든든한 후견인으로 야구에 전념할 수 있도록 배려해주는 양아버지다 .
정장헌 감독이 대표적인 사례다.부친을 일찍 여읜 정 감독은 가족의 생계 를 책임지기 위해 야구를 포기해야 했다.이미 마음을 굳히고 부산진역 앞에 구두닦이 자리까지 잡아놓은 그의 딱한 사정이 당시 감독을 맡고 있던 박진 원씨(현 재미 야구협회장)의 귀에 들어갔다.박씨는 수소문한 끝에 동문인 사 업가 신성철씨를 후견인으로 내세웠다.
신씨는 정 감독의 양아버지를 자처하며 가족들의 생활비는 물론 용돈까지 챙겨주며 살뜰한 후원을 아끼지 않았다.정 감독도 훈련이 끝난 뒤에는 신씨 가 경영하던 서점을 돌보며 신씨의 은혜를 갚으려고 노력했다.교직원 숙소의 한쪽 구석에서 숙식을 해결하는 고생을 감내하며 3년을 버텨낼 수 있던 것 도 신씨의 따뜻한 보살핌 덕분이었다.
정 감독은 선린의 지휘봉을 잡으며 전국대회를 제패한 뒤 당당하게 찾아뵙 겠다고 신씨와 철석같이 약속했다.어느덧 칠순을 훌쩍 넘긴 신씨와의 약속을 지키는 것.정 감독이 그토록 우승을 열망하는 또다른 이유다.
정 감독 이후 생활이 어려운 선수를 동문 선배가 양아들 삼는 아름다운 전 통이 자리잡았다.
이해창과 원로야구인 풍규명씨도 비슷한 사례.오갈 데 없는 이해창을 집으 로 데려가 숙식을 해결해 줬고 결국 그의 딸과 결혼해 후견인 관계가 장인과 사위 관계로 발전했다.
숱한 스타플레이어들과 명선수-지도자를 수없이 많이 배출한 한국야구의 산실. 선린이
배출 한 스타들은 최근에 만도 이해창, 김우열, 김광수, 김건우, 박노준등 일일이 열거
할 수 없을 정도. 특히 고교야구의 마지막 전성시기이던 80년대 초반 김건우-박노준콤
비가 이끌던 무적 선린상고를 기억하는 팬들이 지금도 많다. 선린은 모두 8차례 중앙전
국대회 우승을 차지했 으나 유독 봉황기에서만 우승을 하지못한 징크스를 가지고 있기
도 하다. 지난해 에이스이던 무쇠팔 전하성의 역투로 대통령배와 청룡기 4강에 진입한
선린은 올해 전반적인 전력약화로 고전하고 있다. 우선 5회 이상을 버텨줄 투수가 눈에
띄지 않는다. 3학 년생 우완 박흥일, 우완 황덕균, 권익한(이상 2학년)등이 이어 던지나
다소 힘에 부친다. 안방도 불안하다. 주전인 이동용과 뒤를 받치는 정재엽 모두 1학년이
라 아직은 경험부족이 눈에띈다. 3년생 유격수 김민석은 내야수비의 중심이자 타선의
핵. 그 밖의 내야진은 1-2학년으로 구 성되어 있다. 1루수 유희진(1년), 2루수 장석환,
이성준(이상2년), 3루수 오동규(1년)등이 그 들로 내년쯤에는 좋은 결과가 기대된다. 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