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서 전식(沙西 全湜) 선생의 학문과 사상에 대한 학술대회” 자료집 소개
2014년 5월 10일에 상주문화원에서 제5회 상주문화와 역사인물 학술대회가 개최되었습니다.
남계 표연말 · 이재 조우인 · 사서 전식 선생의 학문과 사상에 대한 학술대회에서 순천대학교 사학과 이욱교수는 사서 전식선생에 대한 주제 발표를 하였습니다. 소제목은 ‘대를 이은 의병장, 沙西 全湜’이었습니다.
● 전식 [ 全湜 ]
본관 옥천(沃川). 자 정원(淨遠). 호 사서(沙西). 시호 충간(忠簡). 1589년(선조 22) 진사가 되고 임진왜란 때 의병을 모아 왜병 수십 명을 죽이고 김익남(金益南)의 추천으로 연원(連源)도찰방이 되었다. 1603년 문과에 급제했으나 광해군의 실정으로 벼슬을 포기하고 정경세(鄭經世)∙이준(李埈) 등과 산수를 유력(遊歷)하여, ‘상사(商社)의 삼로(三老)’로 불렸다.
1623년 인조반정으로 예조정랑에 등용, 기주관(記注官) ·지제교(知製敎)를 겸하였고 부수찬 ·교리가 되어 경연(經筵)에 참석하였다. 그 뒤 전적 ·장령을 역임하고 1624년 이괄(李适)의 난 때 태복시정(太僕寺正)으로서 왕을 호종하였다. 집의(執義)를 거쳐 병조참의∙병조참지에 올랐다가 연평군(延平君) 이귀(李貴)와 원수(元帥) 장만(張晩)의 실책을 논박한 뒤 고향에 돌아갔다.
1628년 이조참의를 거쳐 대사간이 되었으나 병으로 사퇴하고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일으켜 적을 방어하였다. 1642년 중추부지사 겸 경연동지사(經筵同知事)∙춘추관동지사에 이어 대사헌에 보직되었으나 취임하지 않았다. 영의정이 추증되었고, 상주(尙州) 백옥동(白玉洞) 서원에 배향되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전식 [全湜] (두산백과 두피디아, 두산백과)
● 조우인 [曺友仁]
1588년(선조 21)에 사마시에 합격해 진사가 됐고 1605년에 문과에 급제해 여러 벼슬을 지내다가 1616년(광해군 8)에는 함경도경성판관을 지냈다.
1621년에는 제술관(製述官)으로 있으면서 광해군의 잘못을 풍자했다가 그 글로 말미암아 3년간 옥에 갇혔다. 인조의 등극으로 풀려나 상주(尙州)의 매호(梅湖)에서 은거하며 여생을 마쳤다.
시·서예·음악에 뛰어나 삼절(三絶)이라는 평을 받기도 했다. 특히, 그의 가사집 『이재영언(頤齋詠言)』에는 「매호별곡(梅湖別曲)」·「자도사(自悼詞)」·「관동속별곡(關東續別曲)」·「출새곡(出塞曲)」 등 4편의 가사작품이 실려 전한다.
「매호별곡」은 1624년경 그가 노경에 은거하던 상주군 사벌면 매호리에서 자연을 벗하며 한가롭게 살아가는 소박한 선비의 정경을 노래한 작품이다.
「자도사」는 광해군을 풍자했다가 옥고를 치른 그의 나이 61∼63세 때인 1621∼1623년에 지은 것이다. 임금을 사모하는 충성스런 신하의 마음을 노래한 작품이다.
「관동속별곡」은 만년에 정철(鄭澈)의 「관동별곡」을 읽고 느낀 점 있어 전날 젊은 시절에 유람했던 관동지방을 추억하며 쓴 기행가사다. 내용에서 정철의 「관동별곡」과의 중복을 피하고 새로운 장소를 중심으로 노래하고 있다. 이 가사의 서문에는 「속관동별곡」이라고 하여 이 작품의 이름은 두 가지로 불린다.
「출새곡」은 1616년 가을에 경성부사로 부임하여 이듬해 봄에 변방의 산천풍토와 봄놀이를 두루 즐긴 뒤 쓴 기행가사이다. 서울의 흥인문을 떠나 임지인 경성에 다다르기까지의 노정에서 보고 느낀 것과 임지에서의 봄놀이, 그리고 변방의 목민관의 고독감 등을 노래했다. 저술로는 문집 『이재집(頤齋集)』과 가사집 『이재영언』이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조우인 [曺友仁]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 표연말 [表沿沫]
본관 신창(新昌). 자 소유(少游). 호 남계(藍溪). 김종직(金宗直)의 문인. 1471년(성종 2) 식년문과(式年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였다. 그 후 1478년 봉교(奉敎)로 재직할 때 신임(新任) 관리로부터 주연(酒宴) 대접을 받았다가 파직되었다. 1482년 복직(復職)되어 1484년 공조좌랑이 되고, 1486년 장례원(掌隷院) 사의(司議)로서 문과중시(文科重試)에 병과로 급제, 장령(掌令) ·사간(司諫) 등을 거쳤다.
1495년(연산군 1) 응교(應敎)로 춘추관편수관(春秋館編修官)이 되어 《성종실록(成宗實錄)》의 편찬에 참여하고, 이듬해 직제학(直提學)으로 폐비(廢妃) 윤씨(尹氏)의 추숭(追崇)을 반대하였다. 그 뒤 승지 ·대사간을 지냈다.
소릉(昭陵:文宗妃 顯德王后陵) 추복(追復)에 관한 사실을 사초(史草)에 적은 것과 김종직의 행장(行狀)을 미화(美化)해 썼다는 이유로 1498년(연산군 10) 무오사화(戊午士禍) 때, 경원(慶源)으로 유배 도중 은계역(銀溪驛)에서 죽었으며, 1504년 갑자사화(甲子士禍) 때 부관참시(剖棺斬屍)되었다.
당대의 문장가로서 유호인(兪好仁) 등과 함께 성종의 총애를 받았다. 뒤에 신원(伸寃)되고, 함양(咸陽)의 구천서원(龜川書院), 함창(咸昌)의 임호서원(臨湖書院)에 배향되었다. 문집에 《남계문집(藍溪文集)》이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표연말 [表沿沫] (두산백과 두피디아, 두산백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