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창 갯벌과 '풍천장어'
어미 품속 같은 갯벌, 그 넉넉함에 안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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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갯벌은 힘들고 상처받은 생명에게 넉넉하고 풍성한 어미의 품속과 같다. 모든 생명이 이곳에서 휴식하고 치유하고 삶의 용기를 얻는다. 사진은 드넓게 펼쳐진 고창 갯벌. 최원준 시인 제공 |
새벽녘 길을 떠났는데, 문득 차창을 보니 아~! 그리고 보니 서해.
서해의 끝에 와있었다.
우리나라의 서쪽 바다, 해가 소멸되는 곳.
그래서인지 서해는 늘 아련하고 촉촉하고 미련이 남는 곳.
한때 한 번도 가닿지 못한 서해를 꿈꾸며, 끝닿은 곳 그 너머에는 무엇이 있는지 궁금했다.
청춘의 모든 혼란과 고통과 분노가 사라지는 곳, 방만과 무절제와 어리석음이 용서되는 곳이 있으려니 생각했다. 그리하여 서해의 끝은 새로운 시작이라 믿었다.
큰 바다 향하는 장도의 길 '갯골'
그 길로 떠났다 돌아오는 '풍천장어'
인천강과 서해가 만나는 곳에서 잡혀
숯불에 지글지글 '소금·양념구이'
황홀한 식감의 향연에 빠져들어
그 서해의 끝자락에 닿았다.
날물의 서해에는 젊은 시절 홀연히 떠나버린 사랑처럼 '풋사랑의 바다'는
간 곳이 없고, 먹먹한 그리움으로 밭은기침만 해대는 '홀로 남은 갯벌'만이 나그네를 기다리고 있었다.
갯벌, 지나간 시간이 서서히 추억으로 가라앉는 곳.
어두운 과거와 현재의 사랑이 깊이깊이 머물며 푸른 그리움으로 잦아드는 곳.
그리하여 애틋한 사랑의 흔적만 곳곳에 고랑처럼 남아 있는 곳.
바다와 육지가 만나는 경계의 땅 '갯벌'은, 하루 두 번 바다와 육지를 배웅하고 마중한다.
바다를 보내면 육지가 오고, 육지를 보내면 바다가 득달같이 달려온다.
바다와 육지가 교대로 갯벌의 사랑을 차지하는 것이다.
세상의 이치가 헤어지면 그립고, 만나면 반가운 법이다.
그래서 그리움과 반가움은 서로가 한통속이다.
그리움 속에는 이별이 있고, 반가움 속에는 해후가 있다는 애기다.
자연의 이치가 이럴진대, 하물며 사람의 삶은 불문가지이다.
인생이 덜 익었던 시절, 그저 착하고 순종적인 여인을 떠나보내고 이지적이고 똑 부러지는 여인이 다가왔을 때, 왜 그랬던가?
떠나보낸 여인이 그렇게 사무치게 그리워졌던 것은….
갯벌에 앉아 멀리 '부재의 바다'를 바라보니 폭풍 휘몰아치는 바닷가에서,
떠난 여인에 대한 그리움으로 깡소주 나발 불던 어리석은 청춘이 기억난다.
그래서인지 갯벌은 '나쁜 사랑'이 떠나버린 순애보의 여인과 닮았다.
한 사랑을 보내자마자 새로운 사랑을 찾아 헤매고, 새로운 사랑을 찾고 나면 헤어진 사랑을 그리워하는 것.
나그네는 그런 '못난 사랑'을 갯벌 앞에서 고해성사하는 것이다.
그러나 갯벌은 힘들고 상처받은 수많은 생명에게는 넉넉하고 풍성한 어미의 품속이다.
모든 생명이 이곳에서 휴식하고 치유하고 삶의 용기를 내는 '열두 폭 치마 속'인 것이다.
잉태와 탄생의 공간인 갯벌은, 이 남겨진 사랑의 흔적을 품고 젖을 먹이며 다독다독 살을 찌우는 것이다.
갯벌 사이로 물길이 난다.
갯골.
그 물길은 어미의 품에서 큰 바다로 향하는 장도의 길, 먼바다에서 어미의 품으로 돌아오는 귀향의 길이다.
고창의 풍천장어도 이 갯골을 따라 어미의 품으로 돌아오거나 떠났을 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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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소한 맛이 일품인 풍천장어. |
고창갯벌 앞에서 장어를 굽는다.
고창군 하전마을.
서해로 열린 넓디넓은 갯벌이 끝없이 펼쳐져 있는 곳. 이곳 갯벌 앞에서 풍천장어를 굽는다.
땀 뻘뻘 흘리며 숯불에 기름 뚝뚝 떨어뜨리며 지글지글 익어가는 장어를 굽는다.
큰바람 몰고 강을 거슬러 오르는 그 당당함을 배우기 위해, 멀리 독경 소리에 선운사로 찰박찰박 오르던
그 미물들의 불심을 취하기 위해 풍천장어를 굽는다.
세상의 기름진 것들 중 가장 깊은 맛의 장어구이가, 해풍을 맞으며 맛있게 구워지고 있는 것이다.
풍천장어(風川長魚)는 선운사에서 곰소만으로 흘러드는 인천강과 서해가 만나는 곳에서 잡히는 뱀장어.
예부터 조수간만의 차가 큰 서해안의 민물과 바닷물이 만나는 지점을 '풍천(風川)'이라 했는데, 인천강은
물길이 바뀔 때마다 큰바람이 서해 바닷물을 몰고 들어와 거센 물결이 일으키는 대표적인 풍천.
강물과 바닷물이 10km 이상 넘나드는 이 강을 지역 사람들은 '풍천강'이라고 불렀다.
이 인천강의 바닷물과 민물이 합류하는 곳에서 잡힌 장어를 '풍천장어'라 한다.
풍천장어는 고창갯벌이 튼튼하게 잘 키운 생명이다.
땅에서도 바닥을 박차고 오르는 당찬 모습을 보면 갯벌이 얼마나 든든한 어미인지 알겠다.
이 풍천장어가 고창갯벌 그 막막한 곳 앞에서 구워지고 있다.
이글거리는 숯불에 노릇노릇 구워진 풍천장어를 소금에 콕 찍어 먹는다.
조근조근 씹으니 단단한 육질이 제법 식감이 좋다.
곧이어 고소한 장어의 육즙이 마구 터져 나온다.
구수한 냄새가 벌써 한입 가득이다.
특히 담수와 해수가 알맞게 섞인 곳에서 자라서인지, 주체할 수 없이 진한 맛의 깊이가 예사롭지 않다.
복분자를 넣어 만든 양념장에 구운 장어도 맛을 본다.
향긋하게 양념 익는 냄새가 일미(一味) 중의 일미다.
달콤하면서도 고소한 맛이 그저 그만이다.
또 그 맛만큼이나 영양소도 풍부하기에 더욱 기꺼운 음식이다.
소금에 찍어 먹고 양념에 구워 먹고, 갖은 채소 쌈에 다양한 소스를 얹어 싸먹는다.
찢은 김치에 돌돌 말아먹어도 어울리고, 들깻가루 섞은 샐러드와 함께 먹어도 참 좋다.
깻잎 장아찌와 정구지 겉절이와 함께해도 괜찮다.
그리고 마지막 생강 채를 입에 넣으면 입안이 개운해지며 다시금 장어를 부르는 것이다.
갯벌의 시간은 유한하다.
그 정해진 시간 동안 갯벌은 사랑을 하고, 그 사랑으로 잉태한 생명을 소중하게 키워낸다.
철없는 사랑이 떠나가도 붙잡지 않고, 경박한 사랑이 머리 긁적이며 돌아와도 내쫓지 않는다.
순박한 조강지처의 땅이자, 다정다감하고 자애로운 어미의 땅이 갯벌인 것이다.
곰소만을 따라 물길처럼 흐르다 멈춘 고창갯벌에서, 옛 청춘의 방황과
떠나보낸 여인의 그리운 기억이 새삼스럽다.
부슬부슬 서해 갯벌에 비가 내린다.
그러나 나그네의 마음속에는 슬프도록 아름다운 노을이 지고 있다.
조용히 흐느끼는 갯벌의 울음소리만 애잔할 뿐이다.
cowejoo@hanmail.net
최원준
시인·동의대
문창과 겸임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