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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년 다해 11월26일 토요일 [(녹) 연중 제34주간 토요일]
[수도회] 주님 앞에 서기 위한 영적 절제와 기도 -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작은 형제회(프란치스코회)
○ 제1독서 묵시 22,1-7
† 복음 루카 21,34-36
◈ 오늘의 묵상
전례력으로 한 해를 마무리하는 날입니다. 지난해를 되돌아보고, 새로
시작되는 대림 시기를 맞이하기 위한 채비를 할 때입니다. 흐르는 시간
속에서 마무리와 새로운 시작은 늘 하나로 연결되어 흘러갑니다. 그
안에서 한 매듭을 짓고 한 해를 정리할 수 있는 것은 하느님께서 주신
은총의 시간입니다.
시간은 과거와 현재와 미래로 구분됩니다. 그러나 과거는 ‘지나간
현재’로서 현재를 만든 시간이고, 미래는 또한 ‘다가올 현재’로서,
현재가 만들어 갈 시간입니다. 결국 과거와 미래는 현재라는 시간의
또 다른 모습으로 하나로 엮어져 있고,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시간은
결국 ‘현재’라는 시간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그날이 덫처럼 갑자기 닥치지 않게 깨어
있으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날이 언제 올지 우리는 알지 못하지만,
우리는 늘 준비하는 마음으로 기다려야 합니다. 사실 하느님의 나라는
우리 구원의 역사 안에서 일어난 모든 사건 안에 이미 존재하고
다가옵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날마다 우리의 삶 안에서 일어나는
이 구원 사건들을 심오한 눈으로 읽어 낼 줄 아는 지혜입니다.
매일의 삶에서 하느님의 나라를 발견할 줄 아는 사람은 세상의 욕심을
버리고 하느님의 뜻을 추구할 줄 압니다. 그리고 또한 자기 자신을
비우고 십자가에 이르기까지 주님의 말씀에 순명할 줄 알게 되고, 이를
통해서 하느님만이 주실 수 있는 진정한 자유를 이미 이 땅에서부터
누리게 될 것입니다. (이정주 아우구스티노 신부)
- 매일 미사 -
◈ [인천] 주님을 제대로 알기 위해 가깝게 다가서야 합니다.
2016년 다해 11월26일 연중 제34주간 토요일
제1독서
"다시는 밤이 없습니다. 주님께서 그들의 빛이 되어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 요한 묵시록의 말씀입니다. 22,1-7
복음
<너희는 앞으로 일어날 이 모든 일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깨어 있어라.>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21,34-36
제가 있는 성지에는 나무들이 참 많습니다. 그러다보니 겨울의 초입에
들어선 요즘, 수북하게 떨어진 낙엽을 많이 보게 됩니다. 이 낙엽들을
멀리서 바라보면 참 예쁘고 또 운치도 있습니다. 노란색, 빨간색, 그
밖의 색깔로 바닥을 예쁘게 칠해 놓은 것만 같습니다. 하지만 가까이
가보면 실망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예쁜 낙엽들을 가까이에서
보겠다고 막상 나무 아래에까지 가보면 그렇게 지저분할 수가
없습니다.
이렇게 멀리서 보게 될 때에는 정확한 판단을 내릴 수 없는 것이
당연합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거리를 두고서 바라보고 있는 것을
아주 가까이에서 그분의 속사정까지 상세히 알고 있는 것처럼 이야기할
때가 참 많아 보입니다. “내가 그 사람 잘 알지.”라고 말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오다가다 한두 번 만난 것이 전부인 경우가 더 많더라고요.
성지 미사를 끝내고 가시는 신자들을 향해서 인사를 하고 있으면 종종
“신부님, 누구 아시죠?”라고 묻는 분들을 만납니다. 솔직히 하루에도
만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러다보니 특별한 인연을 갖고서
오랫동안 만나지 않는 이상 이름을 외우고 있기가 힘듭니다. 그래서
“죄송합니다. 잘 모르겠네요. 누구신데요?”라고 말씀을 드리면,
“신부님께서 매일 묵상 글을 자기에게 보내준다고 하던데요? 그
정도로 서로 친한 사이가 아니세요?”라고 이야기하십니다. 아마
아시는 분은 알 것입니다. 새벽 묵상 글은 신청을 하면 누구나 받으실
수 있다는 점을, 어떤 분들에게만 특별히 보내드리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정말로 제대로 알기 위해서는 가까이에서 다가가야 합니다. 그리고
며칠 전의 묵상 글에서도 썼지만, ‘알다’라는 말이 알(卵)에서
파생되었다는 것은 겉모습 뿐 아니라 속 모습까지 알아야 진정으로
아는 것임을 우리에게 전해주는 것입니다.
사람들과의 관계뿐일까요? 우리는 주님에 대해서도 이렇게 진정한
앎이 필요합니다. 겉모습만 멀리서 보고서 안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마음을 알고 주님의 뜻에 맞게 살아가는 우리들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 주님께서 오늘 복음 말씀을 통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여, 방탕과 만취와 일상의 근심으로 너희 마음이
물러지는 일이 없게 하여라.”
방탕, 만취, 일상의 근심은 주님께서 원하시는 뜻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들은 이 세 가지의 틀에서 벗어나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그저 주님의 자비만을 바라면서, 어쩔 수 없다는 식으로
포기하곤 합니다. 주님의 속마음은 포기하는 우리들의 모습을 원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늘 깨어 기도하여라.”라면서 주님께로 가까이
오는 우리들을 간절하게 원하십니다.
주님을 제대로 알기 위해 가깝게 다가서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 내가
피해야 할 것은 과연 무엇일까요? 지금 당장 피하고 끊어야 합니다.
냉수 한 모금보다 부드러운 말 한마디가 마음을 진정시킨다
(포르투갈 격언).
바닥에 떨어진 예쁜 낙엽... 그러나 가까이에서 보면 그다지...
오 ~ 늘(최천호)
"오늘" 이란 말은 싱그러운 꽃처럼 풋풋하고 생동감을 안겨 줍니다.
마치 이른 아침 산책길에서 한 모금의 시원한 샘물 같은 신선함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언제나 아침에 눈을 뜨면 새로운 오늘을 맞이하고
오늘 할 일을 머릿속에 떠올리며 하루를 설계하는 사람의 모습은 한
송이 꽃보다 더 아름답고 싱그럽습니다.
그 사람의 가슴엔 새로운 것에 대한 기대와 열망이 있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그렇지 않은 사람은 오늘 또한 어제와 같고 내일 또한 오늘과
같은 것으로 여기게 됩니다.
그러나 새로운 것에 대한 미련이나 바램은 어디로 가고 매일 매일에
대한 변화가 없습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있어 "오늘"은 결코 살아있는
시간이 될 수 없습니다.
이미 지나가 버린 과거의 시간처럼 쓸쓸한 여운만이 그림자처럼 붙박여
있을 뿐입니다.
오늘은 "오늘" 그 자체만으로도 아름다운 미래로 가는 길목입니다.
그러므로 오늘이 아무리 고달프고 괴로운 일들로 발목을 잡는다 해도
그 사슬에 매여 결코 주눅이 들어서는 안 됩니다. 사슬에서 벗어나려는
지혜와 용기가 필요하니까요.
오늘이 나를 외면하고 자꾸만 멀리멀리 달아나려 해도 그
"오늘"을 사랑해야 합니다.
오늘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밝은 내일이란 그림의 떡과 같고 또
그런 사람에게는 오늘이란 시간은 희망의 눈길을 보내지 않습니다.
새뮤얼 존슨은 "짧은 인생은 시간의 낭비에 의해서 더욱 짧아진다."
고 하였습니다. 이 말의 의미는 시간을 헛되이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오늘을 늘 새로운 모습으로 바라보고 살라는 것입니다. 누구에게나 늘
공평하게 찾아오는 삶의 원칙이 바로 "오늘"이니까요.
‘오늘’을 어떻게 사시겠습니까? 이 새벽에 큰마음으로 다짐하고
실천하는 오늘이 되세요.
멍석 김문태 선생님의 '오늘'입니다.
- 인천교구 갑곶 성지 조명연 마태오 신부 -
◈ [수도회] 주님 앞에 서기 위한 영적 절제와 기도
- 기 프란치스코 신부
2016년 다해 11월26일 연중 제34주간 토요일 루카 21,34-36
“너희 마음이 물러지는 일이 없게 하여라!”(루카 21,34)
주님 앞에 서기 위한 영적 절제와 기도
오늘은 전례력으로 연중시기의 마지막 날입니다. 인간사 모든 것에는
시작과 끝이 있지요. 그러나 끝은 변화의 문이 닫혀버린 종착점이
아니라 또다른 출발점이요 전환점일 뿐입니다. 하느님 안에 숨쉬며
살아가는 우리에게는 매순간이 하느님의 선과 의미를 찾아가는 기도의
자리요 은총의 때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그날은 온 땅 위에 사는 모든 사람에게
들이닥칠 것이다.”(21,35)라고 하시면서, 세상 끝날에 “사람의 아들
앞에 설 수 있는 힘을 지니도록”(21,36) ‘모든 사람’이 준비해야 함을
상기시켜주십니다. 어떤 준비가 필요할까요?
먼저 예수님께서는 “마음이 물러지는 일이 없게 하라.”(21,34)고
권고하십니다. ‘마음이 물러진다는 것’은 주님의 말씀과 영으로부터
멀어지는 것을 뜻합니다. 영적 감각이 무디어지고 육에 길들여진
상태를 말하고, 하느님과의 관계의 끈이 약해져 세상의 가치나 흐름에
자신을 내맡겨버리는 것을 말합니다. 하느님을 잊고 현실에 안주하는
태도를 일컫는 것이기도 합니다.
마음은 영과 육의 작용이 일어나는 곳이요 영이신 주님께로 들어가는
문입니다. 마음은 "방탕과 만취와 일상의 근심"(21,34), 탐욕과 쾌락의
추구, 게으름 등에 의해 물러집니다. 따라서 마음이 물러지지 않도록
하느님의 영을 채우려면 "스스로 조심해야"(21,34) 합니다. 매순간
무엇을 하든 하느님 앞에 있다는 의식을 갖고, 마음을 물러지게 하려는
은밀한 움직임과 자극 그리고 환경에 끌려가지 않도록 주의깊게
살펴야 할 것입니다.
나아가 주님 안에 중심을 두는 영적 절제를 살도록 힘쓸 필요가
있습니다. 영적 절제란 현재를 즐겨 나쁜 행실에 빠지는 방탕이나
만취를 피하고, 과거를 하느님께 맡기고 미래를 하느님 섭리에 맡기며
근심하지 않고 살아가는 총체적인 태도를 의미합니다. 영적 절제란
주님의 말씀과 자비의 손길을 기억하는 것을 말하지요. 따라서
“이 세상 근심과 걱정 때문에 주님을 잊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성 프란치스코, 지도자 편지 3)
다음으로 주님 앞에 서기 위한 준비는 “늘 깨어 기도하는 것”(21,36)
입니다. 기도한다는 것은 내 존재를 사랑이요 선이시며 삶의 궁극적
의미이신 주님 안에 두는 것을 말합니다. 기도는 사랑으로 사랑이신
주님을 부르는 것이며, 생명이신 주님을 호흡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기도란 사랑의 호흡이요 사랑의 들음이며 사랑의 깨어있음입니다.
기도란 사랑 안에 머물고 사랑과 일치하며 사랑을 갈망하면서 멈추어
한없이 자기 시간과 자기 전부를 바치는 것이기도 합니다. 기도는
영원한 기다림이요 마음이 물러지지 않게 하는 결정적인 힘인
셈입니다.
우리 모두 덫처럼 갑자기 들이닥칠(21,34) 마지막 날에 사람의 아들
앞에 설 수 있기 위하여, 영적 절제를 통해 스스로 조심하여 마음이
물러지지 않도록 힘써야겠습니다. 오늘도 깨어 기도함으로써 사랑의
힘으로 주님 앞에 설 수 있도록 기도의 불씨를 살려나가는 은총의
시간이 되길 희망합니다.
-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작은 형제회)(프란치스코회)
강론채널 주소 : story.kakao.com/ch/francesco -
◈ [수도회] 알타반의 말씀사랑
2016년 다해 11월26일 연중 제34주간 토요일
"너희는 앞으로 일어날 이 모든 일에서 벗어나 사람의 아들 앞에 설 수
있는 힘을 지니도록 늘 깨어 기도하여라." (루카 21,36)
전례력으로 오늘이 한 해의 마지막 날입니다.
한 해 동안 열심히 사셨지요? 수고 많이 하셨습니다.
한 해를 돌아보면 감사할 일도 많고 후회스런 일도 좀 있을 겁니다.
기뻤던 일도 많았고 괴롭고 고통스런 일도 좀 있었을 겁니다.
사랑 때문에 행복했고 미움 때문에 속상하기도 하였습니다.
이해 받아서 고마웠고 오해 받아서 서글프기도 하였습니다.
기대보다 큰 은혜와 축복에 어쩔 줄 몰라하였고
생각지도 않았던 일들에 원망스럽기도 하였습니다.
그렇지만 결론은 “감사”입니다.
어쨌거나 이렇게 살아 있고 아직도 기도할 수 있고
여전히 사랑할 힘이 남아 있기에 감사할 뿐입니다.
그리고 미우나고우나 한 해 동안 관계와 인연을 맺었던
모든 이를 위해 감사하는 마음으로 기도합니다.
그리고 부족한 글 안에서도 하느님의 영을 찾아 읽으신
알타반의 말씀사랑 독자들께도 감사 드립니다.
새로운 한 해 주님께서 더 큰 깨달음을
여러분에게 직접 내려주시기를 기도하며 작별인사 고합니다.
내년 한 해는 침묵 중에 더 기도하고
기도 중에 여러분을 만나 뵙겠습니다.
나마스떼~
제 안에 있는 영이 여러분의 영께 인사 올립니다.
깨어 기도하는 나날 되시길 축원합니다.
- 프란치스코회 성심원장 오상선 바오로 신부 -
◈ [수원] "이 모든 일에서 벗어나 사람의 아들 앞에 설 수 있는 힘을
지니도록 늘 깨어 기도하여라."(루카 21, 36)
한상우 바오로 신부|오늘의 강론 묵상
2016년 다해 11월26일 연중 제34주간 토요일
"이 모든 일에서 벗어나 사람의 아들 앞에 설 수 있는 힘을
지니도록 늘 깨어 기도하여라."(루카 21, 36)
흔들리는 촛불처럼 한 해가 이렇게 저물어갑니다.
흔들리며 뿜어내는 촛불의 향기처럼
흔들리며 한 해를 기도안에서 떠나보냅니다.
우리모두 언젠가는 사람의 아들 앞에 서게 될 피조물들입니다.
이 모든 생명의 주인이 다시금 누군지를 깨닫게됩니다.
달걀 껍질을 벗기듯 한 해를 되돌아보니
주님께서 이끌어 온 주님의 시간들이었습니다.
주인 앞에서만 존재할 수 있는 우리들임을 깨닫게됩니다.
다시금 빈자리를 내어드려야 할 시간입니다.
빈자리를 내어드린다는 것은
일용할 양식을 주신 주님께 감사드리는 것입니다.
한 해를 봉헌하며 감사할 일들을
찾아보니 모든 것이 감사할 일이 되었습니다.
깨어있는 삶이란 이렇듯 감사하며 떠나보내는 삶입니다.
우리의 아픔과 슬픔까지도 기도의 소재가 되어
감사로 체온을 나누는 한 해의 마지막 되시길 기도드립니다.
감사를 감사로 깨어나게 하시는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기 때문입니다.
베풀어주신 이 모든 것에 감사드립니다.
주님, 저희들이 한 해동안 살아온 삶을 어여삐 받아주십시오.
처음과 끝 모두가 감사가 되게 하소서.
-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 -
◈ [서울] 연중 제34주간 토요일
2016년 다해 11월26일 연중 제34주간 토요일
<너희는 앞으로 일어날 이 모든 일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깨어 있어라.>
† 루카 21,34-36
27명의 부제님들이 교구장님과 면담을 하였습니다. 내년 2월3일
서품식이 끝나면 교구의 사제로 사목을 하게 될 것입니다.
교구장님께서는 부제님들에게 질문도 하시고, 앞으로 하고 싶은
사목의 방향도 물어보셨습니다. 26년 전에 김수환 추기경님께서 저와
동창 신부님들을 만나 주셨습니다. 서품 성구에 대해서 질문하셨고,
준비를 잘 하라고 덕담을 해 주셨던 기억이 납니다.
의사 분들은 인턴, 레지던트, 전문의의 과정을 거치게 됩니다. 지인
중에는 대학병원의 교수로 계시는 의사 선생님이 계십니다. 사람의
생명을 다루는 일이기 때문에 규율도 엄격하고, 계속 연구해야 하는
것 같았습니다. 사목의 현장에서 사제들도 비슷한 과정을 거치는 것
같습니다. 부제로 지낼 때는 강론을 하거나, 봉성체를 하고, 예비자
교리를 가르칩니다. 신학교에서는 가장 높은 학년으로 존경을 받지만
사목의 현장에서는 모든 것을 배워야하는 신입사원과 같습니다. 서품을
받으면 주로 보좌신부로 사목을 하게 됩니다. 엄격한 본당 신부님을
만나면 힘들지만 많은 것들을 배울 수 있습니다. 자상한 본당 신부님을
만나면 사목이란 신자들을 사랑하는 것이라는 것을 배울 것입니다.
저는 일곱 분의 본당 신부님을 모셨고, 8년 동안 보좌신부로
지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늘 깨어 있으라.’고 말씀하십니다. 눈을
뜨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신학생 때 선배님들에게
들었던 말을 생각하면서 ‘깨어있음’의 의미를 나누고 싶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쓰리에스’라고 배웠습니다.
첫 번째는 성덕(Santitas)입니다. 하느님의 보다 큰 영광을 위해서
살아야 하고, 하느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분별해야 합니다. 성덕은
기도함에서 시작합니다. 성덕은 말씀을 통해서 자라납니다. 성덕은
미사로 하나가 됩니다. 성덕은 사랑으로 열매를 맺습니다. 성덕이 있는
사람은 직책과 상관없이, 능력과 상관없이 주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두 번째는 지덕(Sapientia)입니다. 교회의 가르침을 늘 가까이하고,
세상에 드러나는 시대의 징표를 분별하고, 책을 가까이 하는 것입니다.
요즘 우리는 분별력이 부족한 지도자 때문에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본당 공동체나, 조직을 담당하는 사제들은 따뜻한 마음과 냉철한
판단력이 필요합니다. 감정에 휩쓸려서는 안 됩니다. 신중한 선택을
해야 하고, 일단 선택했으면 끝가지 믿어주는 것이 필요합니다. 열
사람의 친구를 만드는 것도 중요하지만 한 사람의 적을 만들지 않는
것이 중요합니다.
세 번째는 체덕(Sanitas)입니다. 건강한 몸에 건강한 정신이 함께하면
좋습니다. 건강한 몸은 사제 본인을 위해서도 중요하지만, 공동체를
위해서도 중요합니다. 건강한 몸은 건강한 습관에서 시작됩니다.
규칙적인 식사, 적당한 운동, 금연, 절주도 중요합니다. 병을 고치는
의사가 늘 아프면 사람들은 신뢰하지 않을 것입니다. 주님의 복음을
전하는 사제도 건강한 몸과 마음을 간직하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사제는 세상에 나와서 홀로서야 하기 때문에 많은 유혹을 겪게 됩니다.
규칙이 보호해 주는 것도 아니고, 학교의 울타리가 지켜 주는 것도
아니고, 동료들과 함께 지내는 것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부제님들과
함께 면담을 하면서 구상 시인의 ‘꽃자리’라는 시를 생각하였습니다.
“ 반갑고 고맙고 기쁘다.
앉은 자리가 꽃자리니라.
네가 시방 가시방석처럼 여기는
너의 앉은 그 자리가 바로 꽃자리니라.
반갑고 고맙고 기쁘다.”
저는 신학생 때, 신학교를 가시방석처럼 여긴 적이 많았습니다.
규칙적인 생활, 공동 기도, 성격이 다른 친구들, 어려운 공부가 힘겹게
느껴졌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지금 신학교에 있는 학생들도 저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뜻을 지키고
따른다면 그곳이 바로 ‘꽃자리’입니다. 우리가 일상의 근심으로 마음이
물러진다면 그곳이 바로 ‘가시방석’입니다. 우리가 하느님 앞에 바로
설 수 있도록 늘 깨어 기도한다면 그곳이 바로 천국입니다.
오늘은 교회의 전례력으로 한해를 마감하는 날입니다. 교회의 전례력은
예수님의 탄생을 준비하는 대림시기를 지내고 있으며, 대림시기는
예수님의 탄생 4주전부터 시작됩니다. 그리고 오늘은 예수님의 탄생
4주전입니다. 2016년도 이제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올 한해 주님께서
베풀어주신 은혜를 감사드리며, 이웃들에게 잘못한 것이 있다면
뉘우치면서 주님의 자비를 청해야 하겠습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서울 대교구 성소 국장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
◈ [청주] 깨어 있어라 |반신부의 복음 묵상
2016년 다해 11월26일 연중 제34주간 토요일
<너희는 앞으로 일어날 이 모든 일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깨어 있어라.>
† 루카 21,34-36
깨어 있어라.
톨스토이는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세 가지 ’를 이야기 했습니다.
우리에게 가장 소중한 순간은 바로 지금입니다. 가장 필요한 사람은
지금 내 곁에 있는 사람입니다. 가장 중요한 일은 지금 내 곁에 있는
사람에게 선을 행하는 일입니다. 그는 깨어 있는 삶이 무엇이지
알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시간과 만남, 하는 일’이 우리 삶의 모습을
드러내 줍니다. 지금 누구와의 만남을 이루고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살펴야 하겠습니다.
때로는 풀어지고 싶은 마음이 있습니다. 아무도 모르는 곳에 가서
마음껏 즐겼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여, 방탕과 만취와 일상의 근심으로 너희 마음이
물러지는 일이 없게 하여라”(루카21,34)고 말씀하십니다. 주님께서
간곡히 당부하셨는데 그 말씀을 외면 한다면 결과는 뻔합니다. 저의
마음을 꿰뚫고 계시니 변명의 여지가 없습니다.
그렇지만 우리의 마음은 참으로 흔들비쭉입니다. 사실 “나는 내가 하는
것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나는 내가 바라는 것을 하지 않고 오히려 내가
싫어하는 것을 합니다”(로마7,15).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사람의 아들
앞에 설 수 있는 힘을 지니도록 늘 깨어 기도 하여라”(루카21,36)
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를 비롯한 많은 사람들은
육체적인 것에 마음을 쓰고 육체를 따라 삽니다. 어둠의 행실을 벗어
버리고 빛의 갑옷을 입어야 하며 언제나 대낮으로 생각하고 단정하게
살아가야 하지만 마음뿐입니다.
“성령을 따라 사는 사람들은 영적인 것에 마음을 씁니다”(로마8,5).
그러나 우리 삶의 현실은 영적인 것보다는 육적인 것이 더 매력적이고
가까이 있습니다. 아파트 베란다 밑으로 휘황찬란한 네온사인들이
번쩍이며 유난히 빛나는 빨간 십자가를 등지고 유혹합니다. 한 잔술에
몸을 맡길 수 있는 그곳에 가고 싶습니다. 그리고는 후회할 것입니다.
“늘 깨어 기도하라”는 말씀을 되새겨야 하겠습니다. 유혹은 일회적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유혹을 받으시고
말씀으로 물리치셨지만 악마는 다음 기회를 노리면서 예수님을
떠나갔습니다(루카4,13). 하물며 연약한 우리에게는 얼마나 자주
접근하겠습니까? 그러니 회개의 삶도 한 번으로 해결되는 것이
아닙니다. 일생을 통해 죽음에 이르기까지 계속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깨어 있어야 합니다. 바오로 사도는 말합니다. “정신을 차리고
깨어 있도록 하십시오. 여러분의 적대자 악마가 으르렁거리는 사자처럼
누구를 삼킬까 하고 찾아 돌아다닙니다. 여러분은 믿음을 굳건히 하여
악마에게 대항하십시오”(1베드 5,8-9).
주님께서 오시는 그 날과 시간을 모르니 만큼 언제나 깨어 기도하고
잠시라도 방심하는 일이 없기를 바랍니다. 분명 방심하는 순간이
심판의 날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늘 성령 안에서 온갖
기도와 간구를 올려 간청하십시오. 그렇게 할 수 있도록 인내를 다하고
모든 성도들을 위하여 간구하며 깨어있으십시오”(에페6,18). 미루지
않는 사랑을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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