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가사상태에 있는 회당장의 딸의 소생과 열두 해 동안 혈루증을 앓았던 여인을 치유하시는 내용이다.
여기서 '회당장'(a leader of the synagogue; ruler)에 해당하는 '아르콘'(archon)은 병행 구절인 마르코 복음 5장 22절과 루카 복음 8장 41절에는 '아르키쉬나고곤'(archisynagogon)으로 나오는데, 이것은 '다스리다'(로마15,12), '주관하다'(마르10,42)라는 뜻을 지닌 '아르코'(archo)의 현재 분사로서 '다스리는 자'라는 뜻이고 권력을 가졌음을 강조하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이와같은 높은 신분에 있는 사람이 나자렛 출신 목수의 아들에게 나아와 많은 사람들 앞에서 옆드려서 절하는 행동은 당시의 종교 사회적인 정황으로 볼 때 놀라운 일이다.
그는 예수님께 와서 '제 딸이 방금 죽었습니다. 그러나 가셔서 아이에게 손을 얹으시면 살아날 것입니다.' 라고 말한다.
병행 구절인 루카 복음 8장 42절에는 회당장의 12살 먹은 딸이 이미 죽은 것이 아니라 '죽어 가고 있다' (is now dying)고 나온다.
하지만 이에 해당하는 '에텔류테센'(eteleutesen; is dead)은 직설법 부정 과거 형태이므로 새 성경의 마태오 복음처럼 이미 죽은 것으로 번역해야 한다. 여기에 '방금'으로 번역된 '아르티'(arti; even now)가 수식하면 방금 전에 죽었다는 의미가 된다.
마태오 복음을 루카 복음과 비교해 보면, 아직 죽지 않은 상태에서 신음하고 있는 딸을(루카8,42) 방금 전에 죽은 것으로 묘사하는 것은 강조하기 위한 것이다.
다시 말해서 마태오 복음 사가는 여기에 나오는 회당장을 죽은 자도 능히 살리시는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을 소유한 자로 묘사함으로써 참된 믿음이 어떤 것인가에 대한 모델을 제시하는 것이다.
즉 마태오 복음 사가가 여기서 강조하는 것은 그리스도께서는 죽은 자도 살리시는 능력을 가지신 생사(生死)를 주관하시는 하느님이라는 사실이다.
그리고는 이제 마태오 복음 9장 20절에 '그때에'에 해당하는 '카이 이두'(kai idu; and behold; and look)가 등장한다. 이러한 표현은 회당장의 딸을 소생시키는 기사 도중에 열두 해 동안 혈루증을 앓는 여자에 대한 새로운 이야기의 삽입 사실을 강조하기 위해서 사용된 것이다.
예수님께 다가와 그의 옷자락 술을 만진 여자가 앓고 있던 병은 혈루증(hemorrhage; bleeding)이었다.
이것은 지속적으로 하혈을 하는 증세를 보이는 부인병의 일종으로서 레위기 15장 25~27절에 나오는 부정한 병으로 간주된다. 이 병은 앓는 사람만이 아니라 이 병을 앓는 사람과 접촉을 한 사람까지 부정하게 되었다.
열두 해 동안 이 병을 앓아서 이같은 유대인의 율법에 대해서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을 여자가 예수님께 다가가 예수님의 옷자락 술을 만지려고 한 행위는 거의 목숨을 건 시도였다고 본다.
그래서 앞이 아니라 예수님 뒤로 다가가 '그분의 옷자락 술'('투 크라스페두 투 히마티우 아우투'; tu kraspedu tu himatiu autu; the edge of his garment)에 '손을 대었다'('헵사토'; hepsato; and touched)는 것은 낮은 포복으로 뒤로 다가가 닿일듯 말듯 겉옷의 술 한자락을 만진 것이다.
이 여자가 이런 목숨을 건 믿음의 행위를 한 것은 지난 12년 간의 육체적 고통과 그에 못지 않게 종교 율법적으로 부정한 자로 여겨져 끊임없이 사회적으로 소외당하고 배척당한 고통이 그렇게 예수님께로 나아가게 한 것이다.
그야말로 수많은 군중들이 예수님 곁을 스쳐 지나갔지만 '믿음을 가진 손'으로 치유자이신 예수님을 만진 사람은 바로 이 여자 한 사람 뿐이었던 것이다.
마태오 복음 사가가 예수님께서 워낙 뛰어난 능력을 가지신 분이기에 그분이 입고 계시는 옷까지도 신비한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미신적 요소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여자의 혈루증과 예수님의 겉옷이 '인간의 부정함'(uncleanness of human)과 '하느님의 거룩함' (holiness of God)의 상징물로 서로 대조하여 인간의 부정은 오직 하느님을 통해서만 해결될 수 있고 구원받을 수 있음을 보여준다.
이에 대해 예수님께서는 '딸아, 용기를 내어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로 말씀하신다. 마태오 복음 9장 21절과 22절에 '구원을 받겠지'에 해당하는 '소테소마이'(sothesomai), '구원하였다'에 해당하는 '세소켄'(sesoken), '구원을 받았다'에 해당하는 '에소테'(esothe)는 모두 영적 구원을 나타낼 때도 사용되는 '구원하다'라는 뜻의 '소조'(sozo)를 원형으로 취한다.
이 단어의 용례를 보면, 육체의 질병으로부터 구원을 원한 여자의 예수님을 향한 인격적인 믿음은 자신을 육체적으로 뿐만 아니라 영적으로까지 구원하는 아름다운 결과를 낳은 것이다. 결국 예수님의 말씀에 의하면, 여자를 구원한 것은 그녀의 '믿음'('헤 피스티스'; he pistis; faith)이었다.
그리고는 이제 다시 예수님께서 회당장의 집에 이르러 거기서 일어난 사건을 이야기한다. 여기서 '피리를 부는 이들'에 해당하는 '투스 아울레타스'(tus aulletas; the flute players; the minstrels)는 축제(묵시18,22)나 장례식장 같은 곳에 고용되어서 관악기를 연주하는 자들을 가리킨다.
그리고 '소란을 피우는 군중'에 해당하는 '톤 오클론 토리부메논'(ton ochlon thorybumeron; the noisy crowd)는 초상집에 와서 죽은 자를 위해서 돈을 받고 특별히 곡을 하는 사람들을 가리킨다.
보통 유대인들의 장례 절차에서는 최소한 2명의 피리 부는 자와 1명의 곡하는 자가 필요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물러가라 하시며 '저 소녀는 죽은 것이 아니라 자고 있다'고 말씀하신다. 여기서 '자고 있다'에 해당하는 '카튜데이'(katheudei; is asleep)는 인간적 수준에서 '수면을 취한다'거나 '혼수 상태(coma)에 빠졌다'는 뜻이 아니다.
이것은 하느님의 수준에서 죽음이 영원한 끝이 아니고 잠시 동안 자는 것과 같다는 의미이다. 즉 예수님께서 죽은 자를 살리는 일은 잠자는 자를 깨워 일으키듯 쉬운 일이라는 의미인 것이다.
우리는 오늘 두 가지 소생과 치유의 기적 사화를 접하면서 회당장(야이로)의 믿음과 예수님의 옷자락의 술을 만진 여자의 믿음을 보면서 우리 자신은 생사대권을 가지신 주 예수님께 어떤 믿음을 가지고 주님을 대하며 주님께 나아가 기도하는 지를 묵상해야 한다.
이러한 복음적 믿음은 예수 내 생명의 주님만이 내 결핍된 선을 채워 주시고 내 악을 제거해 주시리라는 강한 내적 확신으로서 기적을 이루는 바탕이 되는 것이다.
회당장 야이로처럼 '겸손하게' 그리고 열두 해 동안 하혈한 여자처럼 '행동하는 믿음'을 통해 '예수님께부터 감동을 불러일으켜야만' '그분께로부터 전능의 힘이 나오게' 된다.
출처: 피앗사랑, rigel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