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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불교와 여행을 사랑하는 사람들 원문보기 글쓴이: 관문
불교의 역사
1. 개요
불교는 기원전 6세기경 고대 인도에서 고타마 붓다에 의해 성립된 후 지금 시대까지 계속 이어져 온 종교이다. 불교는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종교들 중의 하나이다.
불교는 인도아대륙의 동북부 지방인 마가다 왕국에서 시작되어 그 후 중앙아시아, 동아시아, 동남아시아로 전파되었으며 이러한 전파와 더불어 불교는 발전을 거듭하여 다양하고 복잡한 종교적 전통을 지니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불교는 특히 아시아 지역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역사적으로 불교에는 많은 종파와 불교 운동이 있었는데, 원시 불교를 제외할 때 상좌부 불교 · 대승 불교 · 티베트 불교의 전통이 특히 중요하며 현재에까지 이어지고 있다.
2. 원시 불교의 성립
불교는 기원전 6세기경 싯다르타 고타마(Siddhārtha Gautama)에 의해 현재의 인도 동북부 지방과 네팔에 있던 마가다(Magadha) 왕국을 중심으로 성립하였다.
싯다르타는 카필라 성주(城主) 슈도다나(Suddhodana) 왕을 부친으로 하고 마야(Maya) 부인을 어머니로 하여 태어났으며, 샤카 족에 속하는 크샤트리아 계급이었다. 깨달음[覺(각)]을 성취한 후에는 "깨달은 자"라는 뜻인 붓다(불타, 부처)라는 칭호를 더하여 "고타마 붓다(Gautama Buddha)", 또는 "샤카 족의 성자"라는 뜻인 샤카무니(석가모니, Śākyamuni) 혹은 석존(釋尊)이라고 불리었다.
고타마 붓다의 출생지는 룸비니(Lumbini)였고 성장지는 카필라 성[Kapilavastu]이었으나 불교가 종교로서의 요건을 갖추고 역사에 기록되기 시작한 것은 마가다 왕국에서였다. 고타마 붓다의 종교적 활동인 수도(修道), 깨달음[正覺(정각)], 포교(布敎) 등이 지금의 인도 비하르 주에 해당되는 마가다 왕국을 중심으로 전개되었기 때문에 출생지나 성장지보다는 마가다 왕국이 불교 발생의 중심지로 여겨지고 있다.
2-1 시대적 배경
불교가 일어날 당시 인도는 베다(Veda)와 우파니샤드(Upanisad)에 근거를 둔 브라만교가 지배하는 사회였다. 당시 브라만교는 우주의 궁극적 근원인 브라만[Brahman; 범(梵)]과 개인에 내재하는 아트만[Atman; 아(我)]이라는 두 원리가 동일한 것이라는 범아일여(梵我一如)의 사상을 가지고 있었다. 또 인간의 행위는 전생(前生)의 카르마[Karma; 업(業)]에 의해 지배된다는 교의를 가졌으며, 현재의 행위의 결과는 미래의 행위를 결정한다는 윤회 사상(輪廻思想)을 지니고 있었다. 당시의 사상가나 종교가들은 윤회로부터 해탈(解脫)해야 한다는 것을 이론이나 실천 수행을 통해 주장하였다. 브라만교의 카르마, 윤회, 해탈의 사상은 후대 인도사상의 근간을 이루는 것으로 불교 역시 이러한 인도의 전통적 종교, 철학 사상을 근저로 하여 새로운 종교 사상으로 출현하였다.
2-2 붓다의 수행과 깨달음
싯다르타도 “깨달음[無上正等覺(무상정등각); 阿耨多羅三藐三菩提(아뇩다라삼먁삼보리); Anuttarā Samyaksaṃbodhi)”을 얻기 전까지는 이러한 종교적 풍토 속에서 브라만교의 수행 방법을 따랐다. 싯다르타는 29세에 부인인 야쇼다라(Yaśodhara)와 아들 라후라(Rāhula)를 버리고 출가(出家)한 후 선정(禪定)과 고행(苦行)을 택하여 수행하였는데 이들은 당시에 유행되었던 수행법이었다.
싯다르타는 출가 후에 알라라 칼라마(Alara Kalama)와 웃다카 라마푸타(Uddaka Ramaputta)에게 사사하다가 만족하지 못하여 스승을 버리고 5명의 수행자와 함께 고행의 길을 떠나 6년의 고행을 하였다. 하지만 싯다르타는 6년의 고행을 통해서도 깨달음을 성취하지 못하였으며, 이에 고행을 버리고 중도(中道)의 길을 택하였다. 이윽고 마침내 싯다르타는 35세의 해 12월 8일 이른 새벽에 부다가야(Buddhagaya)의 보리수 아래에서 "깨달음"을 성취하여 생 · 노 · 병 · 사의 생사윤회(生死輪廻)의 근원을 단멸(斷滅)하고 열반(涅槃)의 세계를 체현하였다.
2-3 불교의 성립
고타마 붓다의 깨달음의 내용은 고(苦) · 집(集) · 멸(滅) · 도(道)의 사성제(四聖諦)와 생사윤회의 모습인 연기(緣起)이다. 고통(苦)의 원인인 집착(集)을 극복 또는 제거(滅)하여 생사윤회를 벗어나는 방법(道)으로 제시된 것이 정견(正見) · 정사(正思) · 정어(正語) · 정업(正業) · 정명(正命) · 정정진(正定進) · 정념(正念) · 정정(正定)의 팔정도(八正道)이다. 고타마 붓다가 깨달은 진리를 법(法; Dharma 다르마)이라 하며 그는 이 법을 펴기 위해 녹야원(鹿野園; 사르나트)으로 가서 다섯 수행자에게 최초의 설법을 하고["초전법륜(初轉法輪)"] 그들을 제자로 삼았다. 이로써 불 · 법 · 승의 삼보(三寶)가 갖추어지고 불교는 비로소 하나의 종교로서 교조(敎祖) · 교리(敎理) · 교단(敎團)을 갖추고 전파되기 시작하였다.
2-4 원시 불교의 발전
고타마 붓다는 45년 동안 교화 활동을 하며 승단을 이끌다가 80세에 쿠시나가르에서 입멸하여 반열반(般涅槃; Parinirvana)에 들었다. 그 후 승단은 제자인 마하가섭 등이 중심이 되어 붓다의 율과 법을 유지하게 되었다.
2-4-1 경전의 결집
불멸후, 곧 붓다의 가르침을 정리하게 되었는데, 붓다가 듣는 사람의 근기에 따라 맞추어 설법한 것["수기설법(隨機說法)"]을 결집을 통해 경전으로 편집하였다. 이것을 제1회 결집이라 한다. 라자기르(왕사성)에 500명의 비구들이 모여 마하가섭을 사회자로 하고 우팔리가 율을, 아난다가 법을 암송하여 붓다의 설법을 정전화(正典化)하였다. 그 후 불교는 마가다 왕국을 근거지로 여러 도시의 왕과 제후 그리고 일반 서민의 귀의를 얻으며 각지로 전파되어 갔다.
2-4-2 아소카와 불교의 전파
기원전 317년경 찬드라굽타(Chandra Gupta)에 의해 인도 최초의 통일 국가인 마우리아 왕조가 성립되고 제3대 왕 아소카가 즉위한 후 불교는 비약적으로 팽창하여 캐시미르와 간다라 지방을 비롯한 인도 각 지역 · 그리스의 식민지인 박트리아 · 스리랑카(실론) · 미얀마(버마) 등 국외로까지 전파되었다. 특히 스리랑카에는 아소카 왕은 자신의 아들 마힌다(Mahinda)를 보내 불교를 전파했다. 아소카 왕은 열렬한 불교 신도로서 '법(法)인 진리'에 의한 통치를 지도 이념으로 삼는 등 불교 발전에 많은 공헌을 하였다.
3. 부파 불교 시대
3-1 상좌부와 대중부의 분열
싯다르타가 입멸한 후 100년이 지나자 계율(戒律) 해석을 놓고 전통적 보수파와 진보적 자유파가 대립되어 두 개의 부파(部派)로 갈라졌다. 전통적 보수파를 상좌부(上座部; Theravada(테라바다))라 하였고 진보적 자유파를 대중부(大衆部; Mahasamghika(마하상기카))라 하였다. 바이샬리(Vaisali; 毘舍離(비사리))에서 비구계(比丘戒)로 10사(事)를 두고 합법(合法)을 주장하는 측과 비법(非法)이라고 반대하는 측이 대립되어 분열되었다. 이를 근본2부의 분열이라고 한다. 비법을 주장하는 측이 700명의 비구를 모아 집회를 열었는데 이것을 제2회 결집이라 한다.
* 10사
1) 소금을 뿔 속에 담아서 지니는 것.
2) 정오가 지난 뒤 공양하는 것.
3) 한 마을에서 탁발을 한 뒤 다른 동네에서 탁발하는 것.
4) 한 구역에서 포살을 두 곳 이상 나누어 하는 것.
5) 어떤 일을 하고 나서 나중에 허가를 받는 것.
6) 선사(先師)들의 행적을 관행으로 삼아 따르는 것.
7) 공양 후에 발효된 우유를 마시는 것.
8) 발효된 과즙을 마시는 것.
9) 앉거나 눕는 자리 깔개를 사용하는 것.
10) 금이나 은을 시주 받는 것.
3-2 소승 20부
근본 2부의 분열이 가져온 분열의 기운은 교리상의 견해, 지도자간의 대립, 지리적 조건 등으로 인하여 더욱 심화되어 붓다의 입멸 후 약 200년 뒤에는 대중부 계통으로부터, 그리고 그 뒤에 이어서 상좌부 계통으로부터 교단의 파생적인 분열이 촉진되었다. 이에 따라 서력 기원을 전후하는 시기에는 18-20개 정도의 부파를 형성하였다.
이 여러 갈래로 분열하는 모습과 파의 이름 그리고 분파의 수에 관하여는 여러 설이 있다. 부파 발생의 주된 원인은 계율의 해석에 관한 학설상의 차이에 있었지만, 학설보다는 지도적 장로(長老)를 중심으로 한 체제가 달랐거나 지리적으로 너무 떨어져 있었기 때문에 새로운 부파를 형성하는 일도 생겼다. 이들의 성립 시기는 대략 서력기원 전후였을 것으로 보인다.
3-3 부파 불교의 성격
이와 같은 불교의 부파적 전개("부파 불교")는 외적 확대와는 달리 성립 당시와 같은 순수성을 잃고 율(律)과 경(經)에 대한 훈고학적인 주석학에 빠졌다. 즉, 아비달마(阿毘達磨) 불교가 발달되어 불교는 승원(僧院) 중심, 출가 중심의 학문 불교로 변화하고, 따라서 대중성을 잃었다. 또 일부에서는 저급한 미신적 신앙에 친화감을 갖게 되어 불교는 본래의 탄력을 잃고 말았다. 이러한 경향에 대해 진보적 입장을 대표하던 대중부 및 재가(在家) 불교도가 중심이 되어 불교 본래의 모습으로 복귀하려는 대승 불교 운동이 시작되었다.
4. 대승 불교의 성립과 발전
4-1 인도의 초기 대승 불교
4-1-1 대승 불교의 성립
대승 불교가 성립된 것은 기원전 1세기경이나 이 움직임의 태동은 그보다 훨씬 전부터 시작된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대승 불교의 대두로 인하여 이전의 6세기 간에 걸친 불교를 통칭하여 소승 불교라 불러 대승 불교와 함께 오늘날까지 불교의 성격을 규정하는 2대(二大) 유파로 간주하게 되었다.
그러나 대승 불교의 대두로 소승 불교는 쇠퇴 · 소멸의 길을 달린 것이 아니라 소승 불교의 부파들은 서로 정통을 주장하며 계속 부파적 발전을 하여, 스리랑카와 같은 남방 국가로도 퍼져갔다. 스리랑카의 경우 기원후 4-5세기 동안 붓다다타(Buddhadatta), 붓다고사(Buddhaghosa; 覺音(각음))와 같은 일단(一團)의 학자들에 의해 수많은 주석서들이 만들어졌다. 이러한 활동이 바탕이 되어 스리랑카의 소승 불교는 미얀마 · 타이 · 캄보디아 · 라오스 등지의 소승 불교와 함께 남방 불교 문화권을 형성하였다.
소승에 대해 대립적 자세를 취하며 일어난 대승 불교는 종래의 관점을 혁신하였다. 수행관(修行觀)에 있어서 자기완성을 주장하기보다 대중의 구원을 우선할 것을 주장하였다. 열반의 상태에 안주해 버리는 아라한(阿羅漢; Arhant) 대신에 보살(菩薩; Bodhisattva)이라는 새로운 이상적 인간상을 제시하였고 이미 열반에 들어간 역사적 인물로서의 붓다 대신에 법신(法身) · 보신(報身) · 응신(應身) 또는 화신(化身)의 삼신설(三身說)과 같은 초월적 불신관(佛身觀)을 내세웠다. 이러한 변화는 자타카(Jataka; 本生譚(본생담)), 아바다나(Avadana; 譬喩文學(비유문학)) 및 아비달마의 우주론의 발달과 더불어 점진적으로 형성되었다.
4-1-2 대승 경전의 성립
기원후 1세기 후반에 쿠샨 왕조가 성립되고 제3대 왕인 카니슈카(Kanishka 재위 127-151)가 즉위한 후 불교는 또 다시 중흥기를 맞게 되었다. 카니슈카는 푸르샤푸라(Pursapura: 현재의 파키스탄 북서부의 페샤와르)에 수도를 정하고 북인도의 대부분과 서인도 북반(北半), 중앙아시아와 아프가니스탄을 포함하는 광대한 지역을 지배하였다. 카니슈카는 국내 각지에 불탑과 사찰을 건립하고 적극적인 불교 보호정책을 썼다. 이때 불교는 파르티아(Parthia), 소그디아(Sogdia) 지방에까지 보급되었고 이 시기부터 이곳의 학승(學僧)들이 중국으로 건너가 불전(佛典) 번역에 종사하였다.
기원전 1세기에서 기원후 3세기에 이르는 사이 대승 운동의 결실로 수많은 대승 경전들이 출현했다. 초기 대승 경전 가운데 중요한 것들은 《반야경(般若經)》·《유마경(維摩經)》·《법화경(法華經)》·《아미타경(阿彌陀經)》· 《십지경(十地經)》 등이다. 이 가운데 《반야경》은 대승 경전을 대표하는 경전으로, 이 경전에 실린 공사상(空思想)은 대승 불교의 기본적 교리로서 불교 사상의 근본 사조를 이루었다.
4-2 인도의 중기 대승 불교
4-2-1 중관파와 유가행파
공사상의 기초를 닦은 대표적 인물은 남인도 출신의 용수(龍樹; Nagarjuna c.150-c.250)로서 그의 《중론송(中論頌; Madhyamaka karika)》은 부파 불교가 지닌 오류를 결정적으로 논박하였다. 용수는 고타마 붓다의 근본사상인 연기설(緣起說)을 공의 입장에서 해명하여 공사상을 철학적으로 기초 지었고, 공사상은 제자인 제바(提婆; Aryadeva 3세기), 또 그의 제자인 라후라발타라 등에게 계승되어 중관학파가 성립되었다.
용수 이후에 《승만경(勝鬘經)》·《해심밀경(解深密經)》·《능가경(楞伽經)》 등이 나타났다 특히 《해심밀경》의 유식설(唯識說; Vijñapti-mātratā)은 270년과 480년 사이에 미륵(彌勒; Maitreya c. 270-350), 무착(無着; Asanga c. 300-370), 세친(世親; Vasubandhu: fl. 4세기) 등에 의해 체계적으로 정리되어 유가행파가 확립되었다. 그 결과 중관학파의 공사상과 유가행파의 유식설은 중기 대승불교 사상의 2대 조류를 형성하는 학설이 되었다.
공사상 또는 중관사상(中觀思想)의 중관학파와 유식사상(唯識思想)의 유가행파는 7세기에 이르러 인도 대승 불교의 주요한 학파로 군림하게 되었다. 중관파는 용수(c.150-c.250) 이래 불호(佛護; Buddhapalita c.470-540)의 계통과 청변(淸辨; Baviveka c 490-570)의 계통으로 나뉘었고, 전자는 월칭(月稱; Candrakirti: 600-c.650)과 적천(寂天; Santideva 6세기)이 계승하였으며, 후자는 적호(寂護; Santaraksita: 8세기)와 연화계(蓮華戒; Kamalasila: fl. 713-763)가 계승하였다. 유가행파는 세친(世親; Vasubandhu fl. 4세기)을 계승한 진나(陳那; Dignaga c.480-540) 계통과 덕혜(德慧; Gunamati)와 안혜(安慧; Sthiramati 6세기)의 계통으로 나뉘었고 전자는 호법(護法; Dharmapala 530-561) · 법칭(法稱; Dharmakirti: 7세기)이 계승하였다.
4-3 인도의 후기 대승 불교
7세기는 불교사상에 있어 난숙한 발달을 보인 시기였는데 중관파와 유가행파는 불교 내부에서 상호간에 활발한 논전을 벌였을 뿐 아니라 외부의 힌두교나 자이나교의 종파들과도 논쟁을 벌였다. 인도 불교는 이렇게 대승 불교의 학파들을 형성하여 발전을 계속하였으며 그 학문적 전승을 위해 나란타(那爛陀; Nalanda) 사원이 국제대학으로서의 역할을 하였으며 발라비(Valabhi) 사원도 불교학의 중심지가 되었다. 그러나 인도불교의 종교적 열정은 감퇴되기 시작하여 종교 생활은 나란타(Nalanda) · 발라비(Valabhi) · 비크라마실라(Vikramasila)와 같은 대학으로 집중되었고 승단 중심의 불교는 쇠퇴의 길을 걷기 시작하였다.
5. 밀교의 성립과 발전
5-1 밀교의 성립
7세기 중엽에서 말엽에 이르는 시기에 새로운 불교인 밀교(密敎)가 성립하였다. 밀교는 고타마 붓다 당시부터 주법(呪法)으로 전해오던 것으로 주구(呪句) · 진언(眞言 · Mantra) · 다라니(陀羅尼 · Dharani)를 송지(誦持)하여 그것으로 마음을 통일하고 구경의 경지에 도달하여 붓다[佛(불)]가 되는 것을 목적으로 한 불교의 일파였다. 7세기 중엽에 이르러 이러한 사상이 조직화되고 종합되어 《대일경(大日經)》·《금강정경(金剛頂經)》과 같은 문헌으로 나타남으로써 밀교의 기초가 확립되었다.
밀교도 대승불교로 분류되고 있으나 인도에서 대승불교가 쇠퇴하고 있던 당시의 상황을 반영한 사상으로 평가된다. 그 이유는 세친(世親; Vasubandhu fl. 4세기) 이후 대승불교가 지나친 철학적·이론적 경향으로 흘러 일반 대중과 유리되었는데 이에 대한 반작용으로 밀교가 발생한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황은 아비달마 불교의 지나친 철학적·이론적 경향에 대한 반작용으로 대승 불교가 발생한 것과 동일하다. 또 당시 인도에서 탄트라 문학이 유행되었고 그 풍조에 따라 불교의 밀교적 전개가 촉진되었다. 중관사상도 밀교화 되었으며 따라서 밀교는 힌두 사회에서 환영받아 급속히 보급되었다. 8세기 후반에 와서는 밀교가 대중화됨과 동시에 저급한 의례를 도입하기에 이르렀다.
5-2 금강승과 티베트 불교로의 발전
밀교가 대중화되면서 금강승(金剛乘; Vajrayana)이라는 불교 유파가 형성되었다. 금강승 운동을 일으킨 사람은 인타라부저(因陀羅部底; Indrabhuti 687-c.717)였다. 그의 아들인 파드마삼바바(蓮華生(연화생); Padmasambhava)는 밀교를 티베트로 전했고, 또한 당시에 인도로부터 다수의 고승이 티베트에 들어가 밀교를 중심으로 한 대승 불교를 전파하였다. 그러나 티베트에는 중국에서 온 학승들이 있어, 이들과 인도 학승 사이에 견해 차이가 생겨 혼란이 일어났다. 티손데첸(Trisong Detsen 755-797) 왕은 수도 라사(Lhasa)에서 회의를 열어 논쟁을 매듭지었고, 그 결과 인도 측의 점문파(漸門派)의 설이 인정되고 중국의 돈문파(頓門派)의 설은 배척되었다. 이로써 티베트 불교는 인도 후기 불교의 성격을 그 주류로 삼게 되었다. 티베트로 들어간 밀교는 머지않아 라마교로 발전하여 티베트 고유불교로 정착하였다.
6. 인도 불교의 쇠퇴
8세기 중반부터는 금강승(金剛乘) 불교가 팔라 왕조(Pala Empire 750-1174)의 보호를 받으며 마가다(Magadha) 지방과 서벵골(West Bengal) 지방에서 영향을 끼치고 있었으나 이때의 불교는 거의 힌두교나 다를 것이 없는 상태로 변질되고 말았다. 불교는 오히려 중국 · 한국 · 일본에서 번성하였다. 이와 같이 인도에서 불교가 쇠퇴된 것은 불교 자체가 내적으로 변화를 일으켜 미륵(彌勒) · 관음(觀音) · 대일여래(大日如來) 등의 부처나 보살이 힌두교의 신들과 거의 같은 성격과 기능을 갖게 되었고 이슬람교의 박해에 의해 승려의 수가 줄어들고 사원이 파괴되었기 때문이었다.
7. 아시아로의 불교의 전파
7-1 1세기부터 10세기 사이의 대승불교의 전파 경로
인도에서 불교가 소멸된 대신 불교는 남방 아시아의 스리랑카 · 미얀마 · 타이, 중앙아시아의 여러 나라, 북방 아시아의 티베트 · 중국 · 한국 · 일본 등 아시아 전역으로 전파되어 각 지역의 토착 문화와 융합하여 다채로운 종교 문화를 이룩하였다.
7-2 중국으로의 전파
중국에 불교가 전래된 것은 1세기경이라고 추정되지만 불교 경전의 한역(漢譯)은 2세기 후반부터 본격적으로 행해지고 위진 남북조 시대부터 명 시대까지 중국 불교는 크게 번창하여 독자적인 불교문화를 형성하였다.
7-2-1 초기 수용기
인도로부터 중국으로 불교가 전래된 시기는 전한(前漢: BC 206-AD 8) 시대였으며 불교 경전이 본격적으로 번역된 것은 후한(後漢: 25-220) 시대에 들어와서이었다. 불교의 전래 당시, 세간(世間) 또는 현세를 떠나 출세간(出世間)으로 나아갈 것을 주장하는 불교의 교의는 당시의 중국의 현세주의적 사상풍토와는 상치되어 쉽게 수용되지 못하였다. 따라서 처음에 불교는 도교적 신앙과 결부되어 신선방술(神仙方術)의 하나로 수용되었다. 이와 같은 불교의 초기 수용기는 대체로 전한말(前漢末)에서 4세기 말까지 약 400년간이라 여겨지고 있다.
7-2-2 중국 불교의 확립
전한말(前漢末)에서 4세기 말까지 약 400년간의 초기 수용기 이후, 5세기 초에서 6세기 말까지의 200년간 불교는 중국에서 착실히 뿌리를 내리게 되었다. 이 시기 동안 불교 경전의 전래가 격증되고 많은 인도 승려들이 중국으로 들어왔다. 구마라습(鳩摩羅什; Kumārajīva 344-413) · 담무참(曇無讖; Dharmakṣema 385-433) · 보리유지(菩提流支; Bodhiruci 5세기말-6세기초) · 진제(眞諦; Paramārtha 499-569) 등이 나타나 불교 경전과 논서들을 본격적으로 번역함에 따라 불교의 학문적 · 신앙적 토대가 이루어졌다. 이에 따라 경론(經論)을 연구하는 학파가 형성되었으며 이들 학파들은 단순한 학파를 넘어 종파(宗派)로까지 발전하였다. 이러한 종파들로는 아비달마를 연구 · 강술한 비담종(毘曇宗), 《성실론(成實論)》을 연구 · 강술한 성실종(成實宗), 열반경(涅槃經)을 연구 · 강술한 열반종(涅槃宗), 《십지경론(十地經論)》을 연구 · 강술한 지론종(地論宗), 《섭대승론(攝大乘論)》을 연구 · 강술한 섭론종(攝論宗) 등이 있었다. 수나라(隋: 581-618)가 중국을 통일하면서 문화의 남북 대립이 통합 · 해소되고 불교계에도 신기풍이 일어났다. 6세기 말에서 8세기 초까지의 약 150년간의 시대 동안, 전대(前代)의 연구와 신앙을 기초로 중국 독자(獨自)의 불교 종파가 발생하였다. 이러한 독자적인 중국 불교 종파로는 길장(吉藏 549-623)의 삼론종(三論宗), 지의(智顗 538-597)의 천태종(天台宗), 신행(信行 541-594)의 삼계교(三階敎), 도작(道綽 562-645)의 정토종(淨土宗), 도선(道宣 596-667)의 율종(律宗), 규기(窺基 632-682)의 법상종(法相宗), 법장(法藏 643-712)의 화엄종(華嚴宗), 혜능(慧能 638-713)의 선종(禪宗), 일행(一行 683-727)의 밀교 등의 종파가 있었다.
7-2-3 선종의 성립과 발전
선종은 중국 불교의 두드러진 특징을 나타내는 종파로서 보리달마(菩提達摩 ?-528)에 의해 중국에 전해진 이래 육조 혜능(慧能 638-713)에 이르러 불교계에 일대 변혁을 일으켰다. 그 후 선종 5가라고 불리는 임제종(臨濟宗) · 위앙종(潙仰宗) · 조동종(曹洞宗) · 운문종(雲門宗) · 법안종(法眼宗)의 종파가 성립되었고, 선종은 중국은 물론 한국과 일본의 불교와 문화에 큰 영향을 미쳤다.
7-3 한국과 일본으로의 전파
수 · 당 · 송 시대를 거쳐 형성된 중국 특유의 불교는 한국 · 일본에도 전래되었다. 고구려 소수림왕 2년(372년) 부견(符堅)에 의해 불교가 전래된 이래 고구려 · 백제 · 신라는 중국에서 전래된 종파를 종합하는 종합불교(綜合佛敎) 또는 통불교(通佛敎)적 성격을 지향하면서 독자적인 불교문화를 꽃피웠다.
8. 한국불교
8-1 고구려
우리나라에 불교가 처음으로 전해졌다는 공식적인 기록은 고구려 소수림왕(서기 372)이 중국의 전진 왕으로부터 불상을 받은 것이다. 하지만 그 이전에 인도 출신인 가야국의 수로왕비 허 씨가 인도로부터 불교를 직접 가져왔다는 학설도 제기되고 있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소수림왕 이전에 이미 불교가 우리나라에 뿌리 내리고 있었다는 것이다.
고구려가 받아들인 시기의 불교는 중국의 격의불교였다. 이후 인도의 중관사상을 계승한 삼론종에 대한 연구가 발달하였고 유식학과 중국의 천태종, 열반종이 유입되어 교학의 발전이 이루어졌다. 그러나 고구려 말기에는 도교가 성행하고 불교는 정치적 세력 투쟁에 휘말려 제 역할을 하지 못한 채 고구려의 패망을 맞았다.
8-2 백제
백제는 서기 384년 침류왕 때 동진의 마라난타에 의해 불교가 전래되었다. 백제불교의 특징은 율종 중심의 교학에 있는데 그 밖에도 열반종, 삼론종, 성실종 등의 연구도 활발하여 교학에서 선구적인 역할을 하였다. 특히 백제는 일본에 불교와 선진문물을 전해줌으로써 일본 고대사 발전에 큰 영향을 주었다.
8-3 신라
신라에는 고구려 묵호자에 의해 서기 417년에 불교가 전래되었으나, 서기 527년 이차돈의 순교로 불교가 승인되었다. 신라불교의 고승대덕들은 ≪삼국유사≫ 등의 기록을 통해 그 행적이 전해지는데 원광-안한-자장-보덕-낭지-혜숙-혜공-대안-원효-의상-태현 스님 등으로 이어지는 일대 사상가들이 배출되면서 7~8세기에 화려한 황금기를 맞이하였다. 원광법사는 삼국통일의 원동력이 된 화랑도에 세속오계를 주어 정신적인 방향을 제시하였다. 또한 원효, 의상 스님이 이루어낸 눈부신 교학 연구의 성과와 인재 양상은 중국에 까지 큰 영향을 주었고, 한국불교 발전의 밑거름이 되었다.
신라인들은 특히 삼국 통일을 전후하여 "신라 땅이 바로 불국토"라는 신념으로 가득 차게 되었는데 이를 불국토 사상(佛國土 思想)이라고 하며 호국불교사상이라고도 한다. 신라인들의 불교를 매개로 한 정신적인 통일과 힘의 결집이 작은 나라 신라가 삼국통일을 이루게 되는 배경이 되었다. 신라인들의 이런 사상이 투영된 것으로 용화향도(龍華香徒)라 불렀던 화랑과 불국사, 석굴암, 경주 남산 등의 불교성지가 있다. 용화향도(龍華香徒)란 "미래불인 미륵부처님이 오시는 용화세계(龍華世界)를 여는 무리"라는 뜻으로 신라의 땅에 미래불의 국토인 용화세계를 건설하겠다는 신념의 표현이라고 볼 수 있다. 이처럼 신라인들이 심혈을 기울여 만들어낸 문화적 걸작은 불교에 대한 깊은 믿음에서 우러나온 것이었으며, 그것은 백제와 고구려의 문화적 발전을 포괄한 삼국의 성취였다.
삼국시대에 전래된 불교는 각 나라와 지역마다 독특한 특성을 지닌 채 발전하면서 우리의 전통 사상과 문화로 깊이 뿌리내렸다. 불교는 특유의 사상적 포괄성으로 민속 신앙을 흡수하여 우리 민족의 전통 사상과 문화로 자리 잡았다. 특히 원효, 의상, 원광 같은 고승들의 정신적인 역할은 삼국통일의 원동력이 되었고, 교학에 대한 독창적인 연구 성과는 불교뿐만 아니라 한국 사상사의 근원이 되었다.
8-4 구산선문(九山禪門)
통일신라 말부터 일어나기 시작한 선종의 흐름을 계승하여 신라 말에 개산한 일곱 산과 고려 초의 두 산을 합쳐 구산선문(九山禪門)이 된 것은 고려 초의 일이다. 고려시대에 선종의 구산(九山)과 교종의 다섯 가르침을 합하여 오교구산(五敎九山)이 성립된 것이다. 오교구산이란 5개의 교학과 9개의 선종 종파를 말하는 것으로 선종과 교종이 여러 갈래로 나뉘어져 다양한 모습을 띤 것은 신라가 망해가던 시기에 각 지역의 호족세력의 출현과도 연관이 있다고 보고 있다. 호족의 실력자들은 자신의 세력을 도모하기 위하여 불교의 정신적인 지도자들을 모셨기 때문이다.
8-5 고려
고려시대 불교는 삼국시대에 이어 국교(國敎)의 지위를 확립하여 국가적인 지원 아래 막대한 영향력을 가지게 되었다. 오늘날 최고의 경전으로 받드는 고려대장경을 조판하였고 세계 최고의 인쇄술을 발전시키기도 하였다. 또한 도선 국사의 영향으로 전국 방방곡곡에 사찰과 탑이 세워졌다. 당시에는 건축술도 뛰어나 우리나라 최고의 목조건축물로 꼽히는 봉정사 극락전과 부석사 무량수전도 이때에 지어진 것이라고 한다. 이와 함께 불화(佛畵)가 발전하여 세계 최고의 걸작으로 평가되는 많은 작품을 남기고 있다.
고려시대 불교는 정치와 밀접한 연관을 가지고 있었다. 국왕들은 대대로 당대의 고승(高僧)을 국사(國師)로 모셔 정신적인 지도를 받았다. 왕실의 후원으로 사찰이 방대한 토지를 소유하게 되고, 스님들이 높은 권세를 누리게 되어 그 폐단도 적지 않았다. 뜻 있는 스님들 사이에 권세를 멀리하고 수행자의 본분으로 돌아가자는 운동이 일어났는데 보조 스님의 정혜결사, 요세 스님의 백련결사가 그 예라고 할 수 있다.
8-6 조선
조선시대 불교는 숭유배불정책으로 인해 억압과 수난을 당했다. 조선은 유교를 통치 이념으로 정하고 불교사상의 영향력을 의도적으로 비하하였다. 고려시대 큰 규모로 성장하였던 사찰의 토지를 몰수하고 스님들을 백정과 같은 팔천민의 하나로 신분을 낮추었으며, 서울 도성 출입을 금지시켰다. 뿐만 아니라 셀 수 없이 많았던 사찰을 몇 십 개만 남기고 강제로 폐찰 하였으며, 각기 특성을 지니고 성장하던 각 종파(宗派)도 선종과 교종의 양종으로 통합하는 등 불교를 탄압하였다.
그러나 불교는 혹독한 배불정책에도 불구하고 산중으로 깊이 들어가 명맥을 이어 나갔다. 유교가 정치적인 지배권을 행사하였지만, 왕족과 양반가의 부녀자들은 대대로 믿어 온 불교를 배척하지 않았다. 특히 태조와 세종, 세조, 정조 등은 매우 독실한 불교신자였으며 직접 간접적으로 불교의 발전에 기여하였다. 세종은 훈민정음을 창시하면서 한문으로 된 불교경전을 백성들이 쉽게 알 수 있도록 한글로 번역하게 하기도 했다.
1592년에 일어난 임진왜란 때에는 서산, 사명대사가 구국을 위해 승병을 조직하고 전쟁에 나아가 큰 공을 세우기도 하였다. 수많은 스님들이 흘린 피로 인하여 불교에 대한 탄압은 수그러드는 듯 했으나 시간이 지남에 따라 다시 혹독한 탄압이 계속되기도 하였다.
조선 후기로 접어들면서 유교질서가 한계를 드러내고 조세제도의 문란으로 백성들의 삶이 어렵게 되자 사찰도 여러 가지 시련을 겪게 되었다. 특히 개혁적인 스님들은 유교지배 아래의 조선을 혁신하고자 백성들과 함께 여러 활동에 참여하게 되었고, 각종 민란에 스님들의 참여도 나타나게 되었다. 19세기 빈발하는 봉건체제에 대한 민중들의 봉기와 밖에서 밀려오는 서양열강의 침략 속에서 불교사상으로 조선을 개혁하고자 이동인스님, 유대치, 김옥균, 박영호 거사 등이 개화당을 결성하여 서기 1884년 정변을 일으켰으나 실패하여 희생되기도 하였다.
8-7 일제시대
일본제국주의의 침략 아래 놓여 있던 20세기 전반은 한국불교에도 암울한 시기였다. 국가의 강력한 통제 아래 다양한 종파로 나뉘어 있던 일본불교는 정부의 후원 아래 경쟁적으로 우리나라에 들어와 포교 활동과 동시에 식민지 지배를 정당화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이것은 서양 제국주의자들이 침략에 앞서 선교사를 파견하여 식민지배의 정보 탐색과 지배 이념 창출에 앞장섰던 것과 유사한 것이다. 1911년 조선총독부가 제정하여 시행한 <사찰령>은 조선불교를 식민 통치 아래 놓이게 한 법이었으며, 일본에 대한 예속을 촉진한 것이기도 했다. 일제는 사찰령과 여러 조치를 통해 조선불교의 훌륭한 전통을 유린하였는데 그 대표적인 것이 승려의 결혼을 허가한 것이었다. 일본불교는 오래 전부터 승려의 결혼을 허가하고 있었는데 조선불교의 청정비구와는 다른 것이었습니다. 이리하여 일제시대에 우리나라 스님들이 대부분 결혼을 하여 가족을 거느리게 되었는데 이것은 부처님의 근본정신과도 다른 것이었으며, 조선불교의 전통과도 다른 것이었다.
한편 식민지 시대에 불가피하게 일본에 협력하면서도 조선불교의 전통을 지켜 나가기 위해 본사 주지스님들을 중심으로 1941년 조선불교조계종을 결성하여 총독부의 법인 인가를 받았다. 그러나 백용성, 한용운, 박한영 등 적지 않은 스님들과 재가불자들이 일제의 식민지배에 끝까지 저항하며 조선불교청년회, 만당 등을 중심으로 민족 독립운동을 벌였고, 일제의 불교정책을 거부하던 청정 비구승들도 선학원을 결성하여 자주적인 활동 거점을 유지하면서 조선불교의 전통을 지키고 있었다.
8-8 근대 이후
1945년 해방과 더불어 한국불교에는 필연적으로 일제불교의 청산과 교단의 정화가 과제로 제기되었다. 해방의 혼돈기에 불교개혁과 교단혁신을 위한 여러 단체가 조직되어 활동하였으나 좌우이념 대립의 와중에 휩싸여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전쟁 직후 일제시대에 합법화되었던 스님의 결혼제도에 반대하면서 교단의 정화를 요청한 청정비구들의 운동이 시작되면서 한바탕 홍역을 치르지 않을 수 없었다. 1954년 이승만 대통령이 몇 차례에 걸친 정화지지 유시문을 발표하여 정화운동이 본격화되었다. 여러 차례의 혼돈 끝에 정화운동은 성과를 보여 조계종은 청정비구 중심의 출가 승려로 재편되고 여기에 반대한 스님들은 독립하여 창종하였다. 이런 우여곡절 끝에 한국불교는 여러 종단으로 나뉘어졌으나 오늘날 불교계 각 종단의 협력기구인 <한국불교종단협의회>를 구성하고 전불교도의 뜻을 대변하고 있다.
한국불교의 장자 종단인 대한불교조계종은 1960-70년대 정화운동의 후유증으로 심각한 분란이 있었으나 1970년대 후반 뜻 있는 불자들의 노력으로 포교, 역경, 도제양성이라는 종단의 3대 과업이 정립되었고, 이를 중심으로 대중불교 운동과 민중불교활동이 전개되어 성과를 거두기도 하였다. 『종헌(宗憲)』과 『종법(宗法)』등 제도개혁을 단행하고 총무원과 더불어 도제양성과 포교를 전담하는 기구로 <교육원>과 <포교원>을 독립시켜 종단 활성화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그러나 우리 민족은 남과 북으로 분열되어 대립하고 있으며, 급격한 산업화, 도시화, 서양화로 정신적인 혼돈과 물질지향적인 가치관의 팽배, 민족문화 경시 풍조 등이 만연하고 있다. 또한 산업문명의 부산물인 환경오염은 매우 심각하여 전 세계적 차원에서 새로운 문명에 대한 갈망이 높아 가고 있다.
이 어려운 시대에 한국불교는 민족통일의 정신적 지주가 되어야 하며, 인간의 욕망을 절제하고 자연환경을 살리는 새롭고 건강한 문명 창조의 사상적 밑거름이 되어야 할 것이다. 또한 물질과 경쟁 위주의 사회에서 지나치거나 상처 입은 많은 대중들을 동체대비(同體大悲)의 사상으로 포용하고 모두가 더불어 자유롭고 편안하게 살 수 있는 불국토를 이루어야 할 것이다. 이 모든 과제가 불교를 믿고 수행하는 불자들이 부처님의 가르침을 제대로 공부하고 믿으며 실행해 나간다면 언젠가 찬란한 불국토가 우리 앞에 열리게 될 것이다.
* 읽어보면 좋을 책들
1. 대한불교조계종 포교원 포교연구실 엮음, 조계종 신도교재 3 역사, 불교사의 이해,
조계종출판사, 2004
2. 히로 사치야 지음/강기희 옮김, 소승불교와 대승불교, 민족사, 1994
3. 히라카와 아키라 외 편/정승석 역, 대승불교개설, 김영사, 2005
4. 히라카와 아키라/이호근 옮김, 인도불교의 역사 상, 민족사, 1989
5. 히라카와 아키라/이호근 옮김, 인도불교의 역사 하, 민족사, 1989
6. K.S. 케네쓰 첸/박해당 옮김, 중국불교 상, 민족사, 1991
7. K.S. 케네쓰 첸/박해당 옮김, 중국불교 하, 민족사, 1994
8. 일연 스님 지음/이민수 옮김, 삼국유사, 을유문화사, 1994
9. 가마타 시게오/신현숙 옮김, 한국불교사, 민족사, 1990
10. 대한불교조계종 교육원 편, 曹溪宗史, 고중세편, 조계종출판사, 2004
11. 대한불교조계종 교육원 편, 曹溪宗史, 근현대편, 조계종출판사, 2001
12. 川崎庸之 ‧ 笠原一男 지음/계환 스님 옮김, 일본불교사, 우리출판사, 2009
13. 마츠오 겐지 지음/김호성 옮김, 인물로 보는 일본 불교사, 동국대학교출판부, 2005
첫댓글 이 글은 다음 카페 '불교와 여행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서경지역에서 실시하고 있는 '불교기초교리강좌'의
제3강 '불교의 역사' 강의자료입니다. 강의 시간과 장소는 2014년 7월 21일 월요일 저녁 7시, 조계사 일주문
왼쪽 두 번째 건물 선일빌딩 8층 국청회 법당입니다. _()_
체계적으로 정리 잘헀습니다~~ 감사합니다~~
교리강좌는 누구나 들어도 되나요? 혹 낮에도 강의가 있는지요..
누구나 들을 수 있습니다. 원래는 불여사 서경지역 회원을 위한 강좌이지만..
낮에는 강의가 없습니다. 아직 시작 단계이라서요.
차츰 범위를 넓혀보려고 생각 중입니다. _()_
시간나면 저도 듣고 싶은데...
괴안은가요?
네, 아래 글을 참조하세요.
http://cafe.daum.net/altlovebuddha/PEK/2971
http://cafe.daum.net/altlovebuddha/PEK/2975
http://cafe.daum.net/altlovebuddha/PEK/30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