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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909. 묵상글 ( 연중 제23주간 월요일. - 무엇이 중헌디?.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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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909. 연중 제23주간 월요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2024.09.09. 03:29
- 무엇이 중헌디?
율법 학자가 주님께 첫째가는 계명이 무엇인지 여쭈었을 때
주님께서 사랑 곧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라고 답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늘 무엇을 할 때나 어떤 판단이나 결정을 내릴 때
제일 중요한 것을 기준으로 무엇을 하든 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실제 우리의 삶, 아니 저의 삶을 보면
아주 지엽적인 문제에 매달려 일을 그르칠 때가 많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일이나 삶을 그르치지 않고
잘살기 위해서는 우선순위가 잘 정립되어 있어야 합니다.
달리 말하면 가치가 전도되어서는 안 됩니다.
돈 때문에 사람을 죽여서 안 되는 것은 물론이고,
법이나 정의의 이름으로 사람을 죽여서도 안 됩니다.
생명과 사랑은 그 어느 것보다도 중요하고,
심지어는 주일 미사보다도 더 나아가서 나의 하느님보다도 중요합니다.
과거 하느님의 이름으로 전쟁을 일으키고 사람을 죽이곤 했는데
그때 하느님은 그들의 하느님이지 하늘의 참 하느님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이런 때 우리가 죽여야 할 것은 하느님이지 사람이 아닙니다.
이는 불가에서 부처가 집착을 하게 하면 부처를 죽이고,
법경이 집착을 하게 하면 법경을 태워버리라고 한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그런데 이럴 정도로 우선순위가 잘 정립되어 있어야 하지만
가치 정립이 머릿속에서만 잘 되어 있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뼛속까지 그렇게 되어 있어야 한다는 말이고
의식화에 이어 무의식화까지 이루어져야 한다는 말입니다.
사랑의 계명이 제일 중요함을 늘 의식하며 살다가 보면
차츰 의식하지 않아도 그러니까 무의식적으로
늘 사랑을 중심으로 판단도 하고 행위도 하는 것입니다.
의식의 무의식화 차원에서 저는 아직 의식하는 단계이고,
머리와 뼈 사이에서 아직 뼈까지 가지 못한 것 같습니다.
어제 있었던 것에 대입하면 짜증과 사랑 사이입니다.
어제는 수녀원 미사를 마치고 동포 미사를 봉헌하러
센터에 가기 전 식당을 들렀습니다.
식당 안팎이 주말 사이에 난장판 수준이었고,
센터에 올라가니 거기도 정리 정돈이 안 되어 심란했습니다.
청소하는 사람은 없고 이용하는 사람만 있다는 짜증이 올라온 것입니다.
지금까지 늘 그랬고 그래서 늘 제가 정돈해왔는데 어제는 정리하면서
짜증이 올라온 것이고 짜증이 있는 상태에서 짜증 내지 말아야지
그래도 사랑해야지 하며 오시는 분들을 맞이했습니다.
이럴 때 저처럼 이렇게 애매한 또는 어중간한 상태에 있지 말고
얼른 사랑과 정리 정돈 중에 ‘무엇이 중헌디’ 하며 빨리 감정 정리해야 합니다.
사실 정작 정리해야 하고 빨리 정리해야 할 것은 물건이 아니라 감정입니다.
주님께서도 오늘 우리에게 ‘무엇이 중헌디’ 물으십니다.
안식일이 중하냐? 사람이 중하냐?
살리는 것이 옳으냐? 죽이는 것이 옳으냐? 물으십니다.
"안식일에 좋은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
남을 해치는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
목숨을 구하는 것이 합당하냐? 죽이는 것이 합당하냐?"
그리고 이 한 말씀으로 온갖 갑론을박을 중단시키십니다.
아주 명쾌하고 통쾌합니다. 쾌도난마(快刀亂麻)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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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909. 연중 제23주간 월요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아마 초등학교 3학년 때쯤으로 생각됩니다. 누나 방에 들어갔다가 아주 낯선 모습을 본 것입니다. 훌쩍이며 울고 있는 것입니다. 왜 그러냐고, 어디 아프냐고 물으니 읽고 있던 책 내용이 너무 슬프다는 것입니다. 며칠 뒤, 누나가 외출해서 자리에 없을 때 방에 들어가 눈물 흘리며 읽던 책을 꺼내 들었습니다. 그리고 그 책을 읽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과연 누나처럼 눈물을 흘렸을까요?
흘리긴 했습니다. 책 내용이 너무 지루하고 이해가 안 돼서 하품하니 눈물이 나더군요. 초등학생이 읽기에는 전혀 이해되지 않는 내용이었고, 더군다나 책과는 친하지 않았던 시기라 더 그러했던 것 같습니다. 그때 이해하기 힘든 한 가지는 ‘어떻게 책을 읽으면서 울 수 있을까?’라는 점이었습니다.
지금 저는 어떨까요? 지금도 책을 읽으며 울지 않을까요? 아닙니다. 현재 책을 읽다가 우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작가의 마음에 동화될 때입니다. 책에서 감정을 느낄 수 없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뜨거운 감정을 느끼게 됩니다.
알면 알수록 동화됩니다. 우리 주님과도 그렇습니다. 주님을 알면 알수록 그 사랑에 감사해서 눈물도 흘리게 됩니다. 일상 속 기쁨도 주님을 알면서 더 커지고 의미도 생기게 됩니다. 하지만 많은 이가 주님을 알려고 하지 않고 그저 자기 원하는 것만을 외칩니다. 이런 상황에서 주님과 함께 할 수 없음은 너무나 당연합니다.
예수님의 반대편에 서 있던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예수님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알려고도 하지 않았습니다. 단지 고발할 구실만을 바라보고 있지요. 안식일에 오른손이 오그라든 사람을 고칠 것인지, 그냥 내버려둘지만을 보고 있습니다. 예수님도 커다란 스캔들이 된다는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이 사람을 고쳐주시면 어떻게 공격해 올 것을 충분히 예측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예수님께서는 이 사람을 고쳐주십니다. 이것이 당신이 말씀하시고 직접 보여주셨던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만약 예수님께서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 당사자가 사랑하는 가족을 고쳐주셨다면 어떠했을까요? 그때는 예수님의 사랑이 보였을 것입니다. 그 사랑을 보지 못하니 그들은 골이 잔뜩 나서 예수님을 어떻게 할까를 서로 논의합니다.
주님을 알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특히 주님의 사랑을 봐야 이 세상을 더 잘 사는 길이 열리게 됩니다. 주님과 함께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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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명언: 하루하루를 산에 오르는 것처럼 살아라. 천천히 그리고 꾸준히 등반하되 지나치는 순간순간의 경치를 감상하라. 그러면 어느 순간 산 정상에 올라와 있는 자신을 발견할 것이며, 그곳에서 인생 여정 중 최대의 기쁨을 누릴 것이다(해럴드 V. 멜처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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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909. 연중 제23주간 월요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앞 장면의 마지막 구절에서,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이 사람을 위한 것이며, 당신이 안식일의 주인이심을 선언하셨습니다(루카 6,5). 이어지는 오늘 <복음>에서도 당신이 안식일의 주인이심을 드러내 보여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에 병자를 고쳐주는지 고발하려고 지켜보고 있는 사람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안식일에~ 목숨을 구하는 것이 합당하냐? 죽이는 것이 합당하냐?”(루카 6,9)
그들이 입을 열지 않자,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마음이 완고한 것을 몹시 슬퍼하시면서 ‘손 오그라든 사람’에게 말합니다. “일어나 가운데 서라.”(루카 6,8)
예수님께서는 어둠 속에 숨어있는 저희를 빛으로 불러내십니다. 당신 면전으로 불러내십니다. 자비와 치유에로의 부르심입니다. 생명과 구원으로의 부르심입니다.
그리고 말씀하십니다. “손을 뻗어라.”(루카 6,10). 손이 오그라든 사람이란? 마치 마음이 완고한 사람이 가슴에 자기 뜻을 꼭 움켜쥐고 있듯이, 손에 무엇인가를 꼭 움켜쥐고 있는 사람이며, 움켜쥐고 있는 바람에 형제들과 주고받고를 못하고 있는 불통을 의미합니다. 또한 자신을 꼭 쥐고 있어서 완고해져 하느님의 뜻을 거역하고, 하느님과 형제들과 단절되어 있음을 말해줍니다.
묘한 것은, 우리는 태어날 때부터 손을 꼭 쥐고 태어납니다. 거슬러 올라가면, 에덴에서부터 쥐었습니다. ‘선악과’를 손에 움켜쥐었고, 교만과 불순명과 탐욕을 움켜쥐었습니다. 곧 ‘손 오그라든 이’는 죄에 물든 모든 그리스도인의 표상입니다.
사실, 선악과를 따먹고 높아지려 했지만, 그것은 오히려 추락이었습니다. 금단을 어기고 자유를 행사했지만, 그것은 자유가 아니라 오히려 속박이었습니다. 욕심을 부려 자신을 채웠지만, 그것은 오히려 단절과 죽음이었습니다. 결국, 움켜쥐는 것은 추락이요 속박이요 죽음이었습니다.
그러니 오그라든 손을 편다는 것은 단지 움켜 쥔 것을 놓는 것만이 아니라, 그것을 놓고서 고통과 은총의 못을 받아들이는 것을 의미합니다. 당신께서 손을 펴시어 십자가에서 못을 받아들이시고 구원의 피, 화해의 피를 흘리심을 의미합니다. 이제 첫 아담이 움켜쥔 손을 펴시고, 새 아담이 되심을 말해줍니다. 그리하여, 우리가 오그라든 손을 편다는 것은 구원을 받아들임을 의미합니다.
오늘 우리는 손을 펴고 성체를 받아 모십니다. 사랑을 건네주기보다 자애심과 이기심을 채웠던 우리의 손을, 위로하기보다 돌팔매질했던 우리의 손을 뻗어 성체를 받아 모십니다. 이제는 움켜쥔 것을 놓아야 할 일입니다. 마음을 풀고 손을 펴야 할 일입니다. 그분을 마음에 품고 구원된 자로 살아야 할 일입니다.
하오니, 주님! 제 손이 당신 구원과 사랑을 건네는 손이 되게 하소서!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손을 뻗어라.”(루카 6,10)
주님!
주고받을 줄 아는 복된 손이 되게 하소서!
주고 싶은 것만 주고, 받고 싶은 것만 받는 손이 아니라
주고 싶지 않아도 주고, 받고 싶지 않아도 받는 손이 되게 하소서!
선악과를 움켜쥔 탐욕과 불순명의 손이 아니라
못과 창을 받아들인 사랑과 신뢰의 손이 되게 하소서!
움켜 쥔 것을 나누어주고,
손을 뻗어 당신의 사랑과 구원을 받아들이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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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909. 연중 제23주간 월요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굽은 마음을 퍼라
아침, 저녁으로 불어오는 서늘한 바람이 계절의 변화를 느끼게 합니다. 맑고 푸른 하늘은 곡식을 여물게 하는 더없이 좋은 선물입니다. 수확의 때가 되면 수고와 땀의 결실을 맛보게 되는 기쁨이 함께합니다. 우리의 삶의 여정도 마찬가지입니다. 최선을 다하고 때를 기다립니다. 약속된 하느님의 나라를 기억하며 지금 여기서부터 수고와 땀의 결실을 기뻐합니다. 기쁨은 희망하는 만큼 확인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손이 오그라든 사람에게 “손을 뻗어라” 하시며 당신의 능력으로 오그라든 손을 이전처럼 성하게 하셨습니다(루카6,10). 손을 뻗는 것은 다른 사람에게 무엇인가 주는 행위이기도 하고, 다른 사람이 주는 것을 받는 행위이기도 합니다. 손을 뻗어 서로의 관계를 형성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손이 오그라든 사람이 손을 편다는 것은 본인뿐 아니라 모두가 기뻐해야 할 일입니다. 그런 기쁨이라면 더 많이 생겼으면 좋겠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못마땅하게 여기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하느님을 생각하는 안식일의 본질적 의미보다는 규정과 규율에만 얽매여 있던 율법 학자와 바리사이들이 그 사람들입니다(루카6,7). 그들은 마음이 오그라들어서 예수님의 활동을 방해하고 마침내는 어떻게 하면 예수님을 죽일 수 있을 것인지 의논하였습니다. 그들은 마음이 오그라든 자신을 보지 못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손뿐만 아니라 마음도 고치시는 분입니다.
자신의 바람이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골을 부리는 것은 어리석습니다. 손이 오그라든 것은 마음이 오그라든 것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러므로 우리 마음을 점검해야 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날마다 놀림감이 되어 조롱거리가 되어도(예레15,10) 뼛속에 가두어둔 주 하느님의 말씀이 심장 속에서 불처럼 타올라(예레20,9) 아버지의 뜻을 따라, 가실 길을 가셨습니다.
혹시라도 사촌이 땅을 사서 배가 아픈 것은 아닌지? 내가 만들어 놓은 ‘하느님 상’때문에 다른 어느 것도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은 아닌지? 주님께서 우리에게 새 마음을 넣어주며 새 기운을 불어넣어 주시길 청합니다. ‘돌처럼 굳은 마음을 도려내고 살처럼 부드러운 마음’을 넣어주시길 희망합니다(에제36,26). 그리하여 안식일은 물리적으로 쉬는 것보다 하느님 앞에서, 하느님 안에서, 하느님과 함께 더불어 향유하는 것이라는 깨우침을 얻길 바랍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말씀하십니다. “십계명은 지켜야 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와의 만남을 위한 것이어야 합니다.”
세상을 살아가면서 부정적인 시각을 가진 사람을 만나게 됩니다. 어떤 일에서든 트집을 잡으려고 합니다. 그는 무엇인가 꼬인 사람입니다. 얽힌 것을 풀면 좋으련만 바른 것도 그릇 것으로 보니 그 사람은 불행합니다. 사사건건 부정적인 태도를 보이며 못마땅하게 생각하는 사람은 어제도 있었고, 오늘도 여전히 있습니다. 그러나 신앙은 부정적인 상황 속에서도 긍정을 찾아내는 삶입니다. 긍정의 주 하느님을 생각하십시오! 행동은 마음 안에 있는 것이 밖으로 나오는 것입니다. 따라서 마음을 잘 가꾸어야 합니다. 무엇이든 주님의 눈으로 볼 수 있는 마음 자세를 굳건히 하여 참 신앙인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불평으로 세상을 더럽히는 사람은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프란치스코). 손을 뻗어 주님의 손을 꼭 잡기 바랍니다. 미루지 않는 사랑을 희망하며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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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909. 연중 제23주간 월요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미국에서 자동차는 신발과 같습니다. 이번에 자동차를 새로 마련했습니다. 전에 사용하던 자동차는 오래되기도 했지만, 일정 속도에 이르면 소리가 났습니다. 뉴욕에서 사용하던 자동차에 익숙해 있었기에 비슷한 차종으로 바꾸었습니다. 제가 처음 운전을 시작한 것이 1991년이니 어느덧 33년이 지났습니다. 처음에 중고차 르망을 사서 1년간 다녔습니다. 다음에는 현대 엑셀을 사서 7년간 다녔습니다. 경기도 적성 성당에 있을 때는 중고차 코란도를 사서 다녔습니다. 코란도는 비포장 길에도 잘 달렸고, 사륜구동이라서 눈길에서도 다닐 수 있었습니다. 캐나다로 연수 가면서 코란도는 동창 신부에게 주었습니다. 동창 신부는 제게 전자사전을 주었습니다. 캐나다에서 와서는 동창 신부의 권유로 소나타를 샀습니다. 그렇게 12년을 타던 소나타는 미국에 오면서 아는 분에게 드렸습니다. 뉴욕에서는 하이랜더를 탔었고, 댈러스에서는 제네시스를 마련했습니다.
33년 자동차를 이용하면서 자동차의 기능이 눈부시게 발전하는 걸 보았습니다. 수동기어는 대부분 자동기어로 바뀌었습니다. 운전자의 편의를 위한 기능이 많아졌습니다. 블루투스 기능이 있어서 스마트폰과 차량이 연결됩니다. 스마트폰에 있는 음악도 들을 수 있고, 전화를 걸 수 있고, 내비게이션도 이용할 수 있습니다. 스마트폰으로 차량의 문을 열 수도 있고, 시동을 걸 수도 있습니다. 차량 점검을 스스로 해서 교체해야 할 부품을 미리 알려 줍니다. 최근에 발전하는 부분은 자율주행 기능입니다. 차선을 유지하는 기능도 있고, 차선 이탈 방지 기능도 있습니다. 속도 조절 기능이 있습니다. 일정 속도를 정해 놓으면 액셀러레이터를 밟지 않아도 속도를 유지합니다. 앞의 차가 속도를 줄이면 같이 속도를 줄이기에 안전한 운행이 됩니다. 앞으로 인공지능이 탑재되면 자동차는 움직이는 사무실이 될 것입니다. 운전자가 목적지를 이야기하면 자동차는 인공지능과 함께 목적에 도착할 것입니다. 운전자는 자동차에서 업무를 보고, 휴식을 취할 수 있습니다.
처음 운전면허를 취득했을 때입니다. 본당 신부님이 제게 이렇게 당부하였습니다. “자동차는 신발과 같다. 너무 크면 움직이기 힘들고, 너무 작으면 발이 불편하다. 발에 딱 맞는 신발이라 생각하고, 절대 무리하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이런 말도 하였습니다. 5분 먼저 가려다가, 50년 먼저 가는 수가 있다.” 신발과 같은 자동차는 자기의 수준에 맞는 것이 좋습니다. 자동차는 빠른 속도로 움직이기 때문에 무엇보다 안전운전이 중요합니다. 아무리 기능이 좋은 차도, 교통법규를 지키지 않으면 사고를 피하기 어렵습니다. 교통법규의 기본은 교통신호와 규정 속도입니다. 교통신호는 서로의 약속이기에 교통신호를 무시하면 큰 사고가 될 수 있습니다. 규정 속도를 넘어서면 돌발 상황에서 차를 제어하기 어렵습니다. 운전자에게는 안전운전이 필요합니다. 장거리 운행을 위해서는 충분한 휴식을 취해야 합니다. 2시간 정도 운전하면 잠시 쉬면 좋습니다. 화물차나, 과적 차량의 뒤는 가능하면 피하면 좋습니다. 앞의 차량과 뒤의 차량도 살펴보면 좋습니다.
결국 자동차는 운전자를 위한 도구입니다. 장미꽃을 포장한 종이에는 장미 향이 나기 마련입니다. 생선을 포장한 종이에서는 생선 비린내가 나기 마련입니다. 자동차로 이웃을 위해서 봉사하면, 자동차로 가족을 돌보면 자동차는 복음의 도구가 됩니다. 자동차로 도박장을 다닌다면, 자동차로 남을 다치게 한다면 자동차는 사탄의 도구가 됩니다. 안식일도 그렇습니다. 율법과 계명도 그렇습니다. 율법과 계명으로 무고한 사람을 단죄하고, 죄인 취급한다면 그것은 율법과 계명의 정신을 망각하는 겁니다. 안식일이라서 선을 베푸는 행동을 단죄한다면 그것은 안식일의 의미를 망각하는 겁니다. 대사제와 율법학자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던 것도 율법과 계명에 근거했습니다. 하느님의 율법으로 하느님의 아들을 죽음으로 내몰았습니다.
오늘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묵은 누룩을 깨끗이 치우고 새 반죽이 되십시오. 여러분은 누룩 없는 빵입니다. 우리의 파스카 양이신 그리스도께서 희생되셨기 때문입니다. 묵은 누룩, 곧 악의와 사악이라는 누룩이 아니라, 순결과 진실이라는 누룩 없는 빵을 가지고 축제를 지냅시다.” 새 반죽은 제도와 법을 바꾸는 것이 아닙니다. 새 반죽은 순결과 진실입니다. 하느님의 뜻과 의로움을 위해서 십자가를 지고 가는 것입니다. 베네딕토 성인이 했던 것처럼, 프란치스코 성인이 했던 것처럼 우리 시대에는 영성이 더 필요합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필요한 영성을 이렇게 말씀합니다. “내가 너희에게 묻겠다. 안식일에 좋은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 남을 해치는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 목숨을 구하는 것이 합당하냐? 죽이는 것이 합당하냐?” 영성은 하느님의 의로움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거룩함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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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909. 연중 제23주간 월요일. 민동규 다니엘 신부님.
찬미 예수님
오늘 복음의 장소는 회당입니다. 회당에는 주님의 일행과 더불어 율법 교사들과 바리사이들, 그리고 다른 사람들이 있었을 것입니다.
율법 교사들과 바리사이들은 주님을 어떻게 고발할 것인가를 늘 고민하고 있었습니다.
빈틈을 노리는 하이에나처럼 말입니다.
복음에 의하면 회당에는 손이 오그라든 사람이 있었습니다. 주님은 이 사람에게 가운데로 나와 서라고 하십니다. 그냥 고쳐 주시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이 볼 수 있도록 가운데에 그를 세우십니다.
주님은 모든 시선이 집중됨을 아시고 회당이 울리도록 소리치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묻겠다. 안식일에 좋은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 남을 해치는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 목숨을 구하는 것이 합당하냐? 죽이는 것이 합당하냐?”
회당 안에 어떤 사람도 그 자리에서 반대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곳은 밝은 곳이었고 어둠은 그곳에서 숨죽일 수밖에 없었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그렇게 하느님의 선함을 드러내셨습니다.
지금 우리들 마음속에서 주님은 다시 한번 외치십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좋은 일을 해야 하는 것이 합당하냐? 아니면 남을 해치는 것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 라고 말입니다.
우리는 이미 선과 선의 반대를 알고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가끔 선이 아닌 것을 선택하곤 합니다.
오늘 주님의 외침처럼 우리가 늘 선을 선택하기를 바랍니다. 빛의 자녀로서 빛과 함께 살아가는 하루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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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아도 다릅니다.
저는 평균 400개의 봉헌된 초를 매일 아침 켭니다.
그렇게 봉헌된 초에 적힌 이름을 보며 400여 번의 기도를 봉헌합니다.
그렇게 초를 켜 놓으면 오전을 지나 오후가 되어야 하나둘씩 꺼집니다. 11시 미사를 봉헌하며 초가 켜져 있는 것을 보면 저도 모르게 다시 한번 기도하게 됩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사실이 있습니다.
분명 다 같은 초인데 어떤 초는 빨리 타고 어떤 초는 늦게 탄다는 것입니다.
어떤 초는 뭐가 급한지 제일 먼저 꺼지기 위해 활활 타오르기 시합을 하기도 하고 어떤 초는 최대한 조신하게 오래오래 탑니다.
뭐가 좋고, 뭐가 나쁜가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또 왜 그런지도 모릅니다.
그냥 다르다는 것입니다. 공장에서 똑같이 만들었어도 다르다는 것입니다.
하물며 우리는 얼마나 다를까요. 생김도 다르고 배운 것도 다르고 경험도 다른데…. 서로가 다른 것은 아주 당연한 것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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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909. 연중 제23주간 월요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아름다운 삶
“늘 새로운 시작”
“주님, 당신 이름을 사랑하는 이들,
당신이 감싸시니, 그들은 당신 안에서 기뻐하리이다.”(시편5,12ㄴ)
교황님의 파푸아뉴기니 3일째 방문 소식입니다. 파푸아뉴기니 신자들의 순수하고 아름다운 모습에 많이도 감동하신 교황님같습니다. '아름다움(beauty)' 이란 말마디가 유난히 눈에 띕니다.
“사랑안에서 그리스도의 복음의 아름다움을 퍼뜨리라. 그리스도의 복음의 아름다움의 전문가들이 되라. 사랑의 아름다움이 세상을 치유할 수 있다.”
교황님의 귀한 말씀이 파푸아뉴기니 신자들은 물론 자신을 두고 하는 말씀처럼 들립니다. 파푸아뉴기니 신자들은 물론 모든 국민들이 교황님을 '위대한 마음의 사람'이라 격찬하며, 파푸아뉴기니 백성들에 대한 교황님의 사랑은 이들을 믿음안에서 더욱 결합시킬 것이라 말합니다.
사랑의 아름다움입니다. 이런 면에서 사랑의 하느님은 아름다움 자체입니다. 사랑할수록 아름답습니다. 이런 아름다움이 세상을 치유하고 구원합니다. 이미 러시아의 문호, 도스토예프스키는 소설 백치에서 미쉬뀐 공작의 입을 빌어 “아름다움이 세상을 구원할 것이다.”라 말한 적도 있습니다. ‘
아름다움’하니 성가 둘이 생각납니다. 제가 세상을 떠나 장례미사를 한다면 입당성가는 “오, 아름다워라”로 시작되는 성가 402장을, 퇴장성가는 “오, 감미로워라”로 시작하는 성 프란치스코의 태양의 찬가를 부탁해 놓고 싶습니다. 또 강론 대신으로 제 좌우명 자작 고백기도시 “하루하루 살았습니다”를 읽어달라 부탁하고 싶습니다. 참 멋지고 아름다운 축제와 같은 장례미사가 될 것입니다. 아름다운 삶과 세상을 위해 윗 두 성가를 자주 불러보시길 권합니다.
교황님을 통해서 하느님의 아름다움이, 교회의 아름다움이, 복음의 아름다움이 파푸아뉴기니 사람들은 물론 이 기사를 읽는 사람들을 정화하는 느낌입니다. 아름다움의 관점에서 보면 오늘 말씀의 이해도 확연해집니다. 제1독서 바오로의 말씀도 파스카의 삶을, 아름다운 삶을 살아가고자 노력하는 우리들에게 그대로 마음에 와닿습니다.
“여러분의 자만은 좋지 않습니다. 묵은 누룩을 깨끗이 치우고 새 반죽이 되십시오. 여러분은 누룩 없는 빵입니다. 우리의 파스카 양이신 그리스도께서 희생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묵은 누룩, 곧 ‘악의와 사악’이라는 누룩이 아니라, 순결과 진실이라는 누룩 없는 빵을 가지고 축제를 지냅시다.”
순결과 진실의 아름다운 삶을, 주님 파스카의 삶을 살라는 말씀입니다. 세상에 미사보다 아름다운 것도 없을 것입니다. 하느님의 아름다움을 그대로 반영하는 예수님이자 교회 전례이자 성인들입니다. 오늘 화답송 시편 후렴 역시 우리를 아름다운 삶으로 이끕니다.
“주님, 당신 정의로 저를 이끄소서.”
정의의 아름다움이여 정의의 용기입니다. 바로 오늘 복음의 예수님이 그 좋은 본보기입니다. 예수님의 정의와 용기가 굴절됨이 없이 그대로 표현됩니다. 안식일에 회당에서 가르치시는 예수님의 모습에서 신자들의 무지를 일깨우고자 부단히 노력하는 지칠줄 모르는 열정이 감지됩니다. 주님은 안식일에 병을 고쳐 주시는지 감시하는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시선에 개의치 않고 손이 오그라든 사람을 치유해 주십니다.
손이 오그라든 사람이 상징하는 바, 온갖 근심 걱정과 두려움, 그리고 불안으로 위축되어 오그라든 마음의 우리들입니다. “일어나 가운데에 서라.” 그대로 마음이 오그라든 우리를 향한 말씀처럼 들립니다. 이어지는 물음이 적대자들의 정곡을 찌르며 이들의 회개를 촉구합니다. 제1독서 바오로 사도가 말한 악의와 사악의 묵은 누룩의 사람들인 율법학자와 바리사이들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묻겠다. 안식일에 좋은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 남을 해치는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 목숨을 구하는 것이 합당하냐? 죽이는 것이 합당하냐?”
이미 물음 안에 답이 있습니다. 주님은 안식일의 주인입니다. 사랑은 분별의 잣대입니다. 이렇게 사랑의 잣대로 보면 답은 자명하게 드러납니다. 이들에 대한 결과는 하느님께 맡기고 본연의 사명에 충실한 정의와 사랑의 주님입니다.
“손을 뻗어라!”
그가 그렇게 하자 그 손이 다시 성하여집니다. 우리를 향하여는 “마음을 활짝 펴라!”는 말마디로 바꿔 이해해도 무방합니다. 마음과 몸은 하나입니다. 온갖 스트레스와 두려움과 불안으로 오그라든 마음이 활짝 열리고 펴질 때 저절로 몸의 치유도 뒤따를 것입니다. 날마다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의 오그라든 마음을 활짝 펴주시어, ‘늘 새로운 시작’에 ‘아름다운 삶’을 살게 하십니다.
“주님, 주께서는 의인에게 복주시고,
사랑으로 방패 삼아 감싸 주시나이다.”(시편5,13).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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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909. 연중 제23주간 월요일.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눈길 건네는 사람>
“일어나 가운데에 서라.”(루카 6,8)
차가운 사람들
눈길 거두어
어엿이
있음에도
차라리
없어야하는
보잘것없는
작은 벗에게
살가운
마음 담은
눈길 건네는
사람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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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909. 연중 제23주간 월요일.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 교부들의 말씀 묵상✝️
“내가 너희에게 묻겠다. 안식일에 좋은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 남을 해치는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 목숨을 구하는 것이 합당하냐? 죽이는 것이 합당하냐?”(루카 6,9)
바리사이들에게 자비를 가르치시고자 안식일에 병을 고치시다
때로 기적은 말씀을 믿지 않는 자들을 돌이켜 믿게 합니다. 그러나 바라사이들은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병을 고쳐 주시는지 지켜보았습니다. 질투하는 사람의 본성은 남이 받는 칭송을 자기 병의 음식으로 삼고, 누가 명성을 얻으면 샘이 나서 미치지요. “그분은 심오힌 것과 감추어진 것을 드러내시고 어둠 속에 있는 것을 알고 계시며 빛이 함께 머무르는 분이시다”(다니 2,22) 라고 했습니다. 주님은 왜 안식일에 치유를 행하셨을까요? 아마도 잔인하고 냉정한 바라사이들을 자비와 동정으로 이끌기 위해서였을 것입니다. 그 남자의 병[마비된 손]이 그들을 부끄럽게 하고, 그리하여 질투의 불꽂을 꺼뜨리려는 뜻이었을 것입니다.
-알렉산드리아의 키릴루스-
✝️ 생태 영성 영적 독서✝️
마이스터 엑카르트는 이렇게 말했다(대지를 품어 안은 엑카르트 영성) / 매튜 폭스 해제 · 주석
【첫째 오솔길】
창조계
설교 10 하느님은 기뻐하고, 고난을 겪고, 복을 주고, 위로하신다
하늘아, 환성을 올려라. 땅아, 기뻐 뛰어라(이사 49,13).
나는 세상의 빛입니다(요한 8,12)
하느님이 고난을 겪는 목적은 우리의 고난을 기쁨으로 변화시키기 위해서다. “내가 고난을 겪기 전에 하느님이 먼저 고난을 겪는다는 게 사실이라면, 내가 하느님을 위하여 고난을 겪는다면, 나의 모든 고난이 제아무리 크고 파란만장하다고 해도, 그것은 나에게 위안과 기쁨이 될 것이다. 하느님은 우리와 함께 기뻐 뛰고, 우리보다 더 기뻐 뛴다. 뿐만 아니라 하느님은 우리와 함께 고난을 겪고, 우리보다 더 많이 고난을 겪는다.
하느님은 사람과 함께 고난을 겪으십니다. 실로 하느님은 사람이 고난을 겪기에 앞서 고난을 겪으십니다. 하느님은 사람이 하느님을 위하여 겪는 것과는 비교도 안 되게 고난을 겪으십니다 ... 하느님은 기꺼이 우려와 함께 우리를 위하여 고난을 겪으십니다. 만일 우리가 하느님만을 위해서 고난을 겪는다면, 하느님은 고난을 괴로움 없이 겪으실 것입니다. 하느님에게는 고난이 더없이 즐겁습니다. 그분에게 고난은 고난이 아닙니다 ... 하느님은 나와 함께 고난을 겪으시고, 나를 위해 가지고 계신 사랑을 통해 고난을 겪으십니다.(236)
✝️ 월요일 거룩한 독서(렉시오디비나)의 날✝️
루카 14,1-14
수종을 앓는 이를 안식일에 고치시다
예수님께서 어느 안식일에 바리사이들의 지도자 가운데 한 사람의 집에 가시어 음식을 잡수실 때 일이다. 그들이 예수님을 지켜보고 있는데,
마침 그분 앞에 수종을 앓는 사람이 있었다.
예수님께서 율법 교사들과 바리사이들에게, “안식일에 병을 고쳐 주는 것이 합당하냐, 합당하지 않으냐?” 하고 물으셨다.
그들은 잠자코 있었다. 예수님께서는 그의 손을 잡고 병을 고쳐서 돌려보내신 다음,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 가운데 누가 아들이나 소가 우물에 빠지면 안식일일지라도 바로 끌어내지 않겠느냐?”
그들은 이 말씀에 아무 대답도 하지 못하였다.
끝자리에 앉아라
예수님께서는 초대받은 이들이 윗자리를 고르는 모습을 바라보시며 그들에게 비유를 말씀하셨다.
“누가 너를 혼인 잔치에 초대하거든 윗자리에 앉지 마라. 너보다 귀한 이가 초대를 받았을 경우,
너와 그 사람을 초대한 이가 너에게 와서, ‘이분에게 자리를 내 드리게.’ 할지도 모른다. 그러면 너는 부끄러워하며 끝자리로 물러앉게 될 것이다.
초대를 받거든 끝자리에 가서 앉아라. 그러면 너를 초대한 이가 너에게 와서, ‘여보게, 더 앞 자리로 올라앉게.’ 할 것이다. 그때에 너는 함께 앉아 있는 모든 사람 앞에서 영광스럽게 될 것이다.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
가난한 이들을 초대하여라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초대한 이에게도 말씀하셨다. “네가 점심이나 저녁 식사를 베풀 때, 네 친구나 형제나 친척이나 부유한 이웃을 부르지 마라. 그러면 그들도 다시 너를 초대하여 네가 보답을 받게 된다.
네가 잔치를 베풀 때에는 오히려 가난한 이들, 장애인들, 다리저는 이들, 눈먼 이들을 초대하여라.
그들이 너에게 보답할 수 없기 때문에 너는 행복할 것이다. 의인들이 부활할 때에 네가 보답을 받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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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909. 연중 제23주간 월요일. 예수고난회 김준수 신부님.
“손을 뻗어라.” (6,10)
대인공포증이라고 하는 것은 다른 사람에게 나 자신이 어떻게 보이는지를 과도하게, 지나치게 의식하기에 파생된 병이지요. 이런 심각한 병은 아니더라도 우리는 살아오면서 계속 다른 사람의 시선視線을 의식하며 행동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자신감이 있으면 남의 눈치를 보지 않겠지요. 다른 사람의 시선을 의식한다는 것은 결국 다른 사람의 생각이나 느낌에 매우 신경을 쓴다는 말과 같습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고 평가하는 지가 내 행동의 방향 도우미가 되면 그만큼 그 사람의 인생은 불행할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당신이 하신 일을 지켜보고 있는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시선을 아랑곳하지 않고 안식일임에도 불구하고 기꺼이 당신의 치료와 치유가 필요한 오른손이 오그라든 사람을 고쳐주십니다.
당대의 율법에 따르면, 안식일에 손이 오그라든 사람을 고친다, 는 것은 분명 법에 어긋나는 일이며 올바른 행동은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발단은 예수님께서 회당에서 가르치고 계셨는데 마침 회당에 손이 오그라든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 사람을 두고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그를 돕지는 못할망정 잠잠히 있으면 좋으련만, 예수님을 고발할 구실을 찾으려고 시선이 오그라든 사람보다 예수님을 지켜보고 있었던 것입니다. 물론 예수님의 시선은 그에게서 떠나지 않았고 이미 예수님은 자신의 도움이 필요로 하는 사람임을 직감하셨기에 따뜻한 시선으로 그를 주시하고 있었습니다. 동일한 사람, 곧 도움이 필요한 오그라든 사람을 향한 시선이 전혀 달랐던 까닭은 사람에 대한 전혀 다른 시선과 접근방식에서 기인한다고 생각합니다. 예수님의 시선은 언제나 자신의 시선만이 아니라 자신이 손수 지은 사람에 대해 한없이 너그럽고 자비로운 시선으로 바라보시는 아빠 하느님의 마음으로 그 오그라든 사람을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그에 반해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의 시선은 안식일 법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도움을 필요한 사람은 보이지 않고 얄팍하고 편협한 시선에서 예수님의 행동만을 바라보고 있었던 것입니다. 오늘날도 민간인을 사찰하고 있다는 소식을 접할 때마다, 사람이 우선하는 세상이 아니라 법이 우선하는 세상임을 절감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들이 지켜보고 있는 시선을 상관하지 않고 오그라든 사람에게 “일어나 가운데에 서라.”(6,8)하고 그를 이끄셨습니다. 마치 “하늘나라에서는 누가 가장 큰 사람입니까?”하고 예수님께 묻자, 예수님께서 “어린이 하나를 불러 그들 가운데에 세우시고, ‘누구든지 이런 어린이 하나를 내 이름으로 받아들이면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다.’”(마태18,1.5)하고 말씀하신 장면이 오버랩해서 다가옵니다. 이런 육체적인 장애를 겪고 있는 사람을 받아들이는 것이 바로 예수님 당신을 받아들이는 것이며 자신을 보내신 아빠 하느님을 받아들이는 것과 같습니다. 이런 예수님의 깊은 마음은 바로 “내가 너희에게 묻겠다. 안식일에 좋은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 남을 해치는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 목숨을 구하는 것이 합당하냐? 죽이는 것이 합당하냐?”(6,9)라고 묻고 질책하심에서 잘 드러납니다. 오그라든 그 사람 또한 하느님의 사랑스런 자녀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을 살리고 구원하는 일이 바로 하느님의 일 곧 예수님께서 하고자 하는 일이었기에 예수님은 안식일임에도 불구하고 오그라든 사람을 살리는 일을 선택하시고 실행하신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 의하면 오그라든 손을 가진 그 사람은 그로 인해 행동이 불편했겠지만, 마음은 오그라들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손이 오그라들지 않은 그들은 마음이 이미 오그라든 사람들이었기에 예수님 말씀의 깊은 뜻을 헤아리지 못하고 “골이 잔뜩 난”(6,11) 모습에서 잘 드러나고 있습니다. 결과적으로 손이 오그라들었던 그 사람은 “손을 뻗어라.”(6,10)라는 예수님의 말씀으로 손이 다시 성하게 되었지만, 반대로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의 마음은 더 오그라들고 더 굳어졌겠지요. 어느 쪽이 더 인생을 아름답게 있는 그대로 바라보면서 행복하게 살았을까 상상해 봅니다. ‘목숨을 구하는 것이 합당하냐? 죽이는 것이 합당하냐? 그것이 곧 문제입니다. 그 해답은 바로 사람을 살리는 일, 구원하는 일입니다. “주님, 혹여라도 제 마음의 오그라듦, 완고함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하여 주시고, 오늘도 제 손과 발이 당신 구원의 도구가 되도록 이끌어 주십시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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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909. 연중 제23주간 월요일. 굿뉴스 게시판-우리 묵상 체험
■ 안식일에도 사랑 실천의 일은 해야만 /
박윤식 [big-llight] 240908. 19:59 ㅣNo.175801
우리는 종종 율법 학자, 바리사이들의 바늘 하나 꽂을 자리 없는 속 좁고 옹졸함을 본다. 그들은 안식일 규정이라는 율법으로 마치 돌같이 굳어만 있었다. 어딜 가나 그들은 그것을 하나같이 들먹이며 예수님께 트집 잡는다. 회당에서 그들은 예수님께서 손이 오그라든 이를 치유하시는 모습을 지켜본다. 그들이야말로 육신은 멀쩡하지만, 영적으로 손이 오그라든 이들이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내가 너희에게 묻겠다. 안식일에 좋은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 아니면 너희들처럼 남 해치는 일을 하는 게 합당하냐? 목숨구하는 게 합당하냐? 아니면 죽이는 게 합당하냐?” 그리고 모두를 둘러보시며 그 병자에게, “손을 뻗어라.” 하고 이르셨다. 그러자 그 손이 다시 성해졌다. 그들은 골이 잔뜩 나, 예수님을 어떻게 할까 의논하였다.’
이렇게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에 사람을 살리는 것이 좋은지, 죽이는 것이 좋은지를 아예 대놓고 물어보신다. 안식일 법의 정신과 그 목적을 물어보신 거다. 그들은 이미 법의 정신을 잃은 이들이었기에 대답을 하지 못한다. 그런 이들 앞에서 예수님께서는 손이 오그라든 이를 앞에 세우시고는 보란 듯이 “손을 뻗어라.”하고 이르셨다. 법에 속박된 이를 해방시키려는 거다. 예수님께서 율법에 자유로우실 수 있으셨던 그 이유는, 이미 당신이 누군지를 아셨기 때문이다.
안식일은 말 그대로 쉬는 날이다. 일해서도, 시켜서도 안 되었다. 그렇다고 맹탕 놀기만 한다면? 휴식으로 거룩함을 지니는 게 본래 정신일 게다. 오늘날 주일은 의무적인 미사 참여 날로만 인식된다. 빠지면 고해성사를 봐야하기에 귀찮아 성당에 간단다. 그렇지만 주일은 주님 축복을 체험하는 날이다. 예수님은 이날 손이 오그라든 이를 고치셨다. 지켜보던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에게 ‘이렇게 좋은 일 하는 게, 남 해치는 것이냐?’라고 강한 톤으로 질문하시면서.
그런 구체적 질문을 하시는 예수님의 그 의도는? 안식일의 취지를 뭔지도 모르고 있음을 질책하신다는 모종의 암시일 게다.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안식일에 사람을 치유하시는 예수님을 율법의 모독자로 여겼다. 그들은 안식일의 주인이신 예수님을 믿지 못하여 알아보지 못했다. 손이 오그라든 이는 자신의 욕망과 이기심으로 주님을 배척한 이를 뜻하리라. 하느님께 손 내밀어 그분 뜻과 계획을 받아들인 이는, 안식일의 주인이신 예수님을 만난 이 일게다.
사실 예수님께서는 완고한 그들의 마음이 부드러워지기를 원하셨다. 그들이 하느님의 온유하심과 자비하심에 시선을 고정하기를 바라셨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당신을 율법의 모독자로 고발하리라는 것을 이미 아셨지만, 그들에게 율법의 주인이심을 당당히 피력하신 거다. 이렇게 그분께서는 규정에만 얽매어 좋은 일 하지 않고, 목숨 구하지 못하는 이가 아님을 드러내셨다.
더 나아가 세상의 모든 율법은 오직 하느님 사랑과 그 정의를 드러내, 인간 구원에 봉사하는 것이라는 걸 그들에게 알리신 것이리라. 사실 분명한 것은 율법 학자와 바리사이들의 율법주의를 경계해야 하지만, 나아가 예수님의 여러 말씀을 각자 편리하고 유리하게 마음대로 해석하는 유혹도 경계해야 할 게다. 그리고 우리 역시 오그라든 옹졸해진 마음의 병을 버려야 하리라. 그리하여 사랑 실천이 하느님의 뜻이라는 걸 깨닫자. 하느님은 모든 이를 살리시고자 예수님을 보내셨다. ‘하느님과 이웃 사랑’이 모든 율법의 출발이다. 지금 우리네 모습은 어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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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909. 연중 제23주간 월요일. 안소근 실비아 수녀님.
십계명에서 안식일 규정의 의미는 두 가지입니다.
한편으로는 하느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실 때 일곱째 날에 쉬시면서 그날을 거룩하게 하셨기 때문에 우리도 그날을 거룩하게 지내야 한다는 측면과(탈출 20,8-11 참조),
다른 한편으로는 하느님께서 이스라엘을 이집트 땅 종살이에서 해방시키셨음을 기억하여 인간이 해방을 누리게 하여야 한다는 측면입니다.
그래서 안식일에는 인간이 — 나와 식구들과 종들이 — 일을 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가축과 이방인까지도 일을 하지 않게 되어 있습니다(신명 5,12-15 참조).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하신 일들은 그 두 측면에서 모두 그분께서 “안식일의 주인”(루카 6,5)이심을 드러내었습니다.
첫째로 안식일이 주님께 속한 날이라면 예수님께서는 그날의 주인이시므로, 안식일 규정에 매이시지 않습니다.
그래서 지난 토요일 복음에서는 예수님의 제자들이 안식일에 밀 이삭을 뜯어 먹는데도 예수님께서는 그것을 막으시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오늘 복음에서는, 안식일이 인간이 해방되는 날이기에 손이 오그라든 사람이 지금까지 지니고 있던 제약에서 풀려나게 하십니다.
우리에게도 안식일 계명은, 주일이 주님의 시간이고 또 인간의 시간이라는 두 측면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 본래 의미를 올바로 깨닫고 살아갈 때, 안식일 규정은 폐지되지 않습니다.
현대인에게 주일은 평일에 하지 못한 밀린 일들을 하는 시간이 되기도 하고, 즐기기 위한 날이 되기도 하여 그 거룩함이 잊히고 있습니다. 하느님을 기억하고 인간이 해방되는 안식일의 본뜻을 되살려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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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하 자료는 보관을 위해 추가 첨가한 자료입니다
(1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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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909. 연중 제23주간 월요일. 김명겸 요한 신부님.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이
예수님을 지켜봅니다.
그 눈빛은 그리 좋지는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안식일 규정을 지키는지 어기는지
감사하는 눈빛이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그 마음을 들키고 싶지는 않습니다.
겉으로는 아닌 척 하지만
회당 안의 분위기는 차갑게 느껴집니다.
그 냉랭함을 깨시듯 예수님께서는
손이 오그라든 사람을 부르십니다.
모든 사람의 눈을 그에게 집중시키십니다.
그가 사람들의 주목을 받으면서
숨겨 왔던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마음이
드러납니다.
마음을 들킨 그들은
당황한 나머지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합니다.
오히려 거기에서
예수님과 안식일 규정을 가지고
싸웠으면 어땠을까 생각해 봅니다.
그들에게는 안식일 규정을 지키려 하는
그들 나름의 논리가 있습니다.
그들이 그것을 지키는 것은
자신들은 그것이 옳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것을 지키지 않는 예수님은
잘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을 속으로만 생각하면서
불만만 키워가는 것보다는
직접 대화하면서 서로의 접점을 찾는 것이
더 좋지 않았을까 생각해 봅니다.
하지만 자신들의 생각을 바꾸고 싶지 않은 그들은
예수님도 당신의 주장을 고집하실 것이고
그래서 접점을 찾기는 어려울 것이라고
단정 지으면서
대화를 시도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서로 다릅니다.
서로 다르다는 것은
같은 것을 다르게 생각할 수도 있음을 말합니다.
그런 다른 사람이 함께 살기 위해
대화가 필요합니다.
물론 나의 의견이 옳다고 생각할수록
대화보다는 강요하고 싶습니다.
그리고 강요하기 위해 힘을 사용합니다.
만약 내가 힘이 약하다고 생각하면
내 생각을 표현하기보다
상대방의 약점을 잡아서
공격하는 방식을 선택하기도 합니다.
그렇게 해서
끝까지 자신의 생각을 관철시킵니다.
이것은 함께 살아가는 방식이 아님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힘의 논리는 자기보다 더 센 사람을 만나면
무너질 뿐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어떤 행복을 찾고 있는지
생각해 보았으면 좋겠습니다.
지금 당장은 내 방식만 고집하고 싶지만
한 발 양보한다는 것은
결국 그를 위한 것이 아니라
나를 위한 것임을
생각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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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909. 연중 제23주간 월요일.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여러분 각자 인생의 주역이 되십시오!
언젠가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사람처럼 오른손이 오그라든 형제를 만난 적이 있습니다.
그의 상황을 미처 파악하지 못했던 저는 습관처럼 오른손을 내밀며 악수를 청했습니다.
그 순간 형제님의 표정이 묘했습니다. 악수를 하는 것도 아니고 안하는 것도 아니고 어색한 광경이 연출되었습니다.
지금 생각해도 너무나 송구스러워 가슴을 치게 됩니다.
곰곰이 생각해보니 손은 참으로 고맙고도 유용하고, 성스럽고도 은혜로운 축복의 도구입니다.
우리는 손을 통해 각자의 일을 하고 생계를 꾸려갑니다.
손을 통해 시를 쓰고 하고 악기를 연주합니다. 손을 통해 미사를 봉헌하고 기도합니다.
손을 통해 이웃 사랑을 실천하고 이웃을 축복합니다.
이런 면에서 안식일 날 회당 안에 앉아 있던 오른손이 오그라든 사람의 고통과 수모가 얼마나 큰 것이었는지를 생각합니다.
그토록 성스럽고 유용한 은총의 도구인 손이 오그라들었으니, 당사자에게는 참으로 큰 고통이었을 것입니다.
회당에 들어온 다른 모든 사람들은 보란 듯이 멋진 두 손을 높이 쳐들고 주님의 이름을 찬양했지만, 오그라든 손의 소유자는 큰 부끄러움에 어찌할 바를 몰랐을 것입니다.
오그라든 손 때문에 평생 남의 눈을 의식하며, 위축된 삶을 살아온 사람을 눈여겨보신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이었기에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이 고발하려고 눈에 불을 켜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오그라든 손을 치유시켜 주십니다.
다음의 예수님 말씀이 참으로 감동적입니다.
“일어나 가운데에 서라.”(루카 6,8) 손이 오그라든 사람입장에서 얼마나 감격적이었겠습니까?
본의 아니게 평생토록 이 세상의 아웃 사이더로 살아온 그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일어나 가운데에 서라.” 하시며 그를 무대의 주인공으로 만들어 주신 것입니다.
우리의 주님은 바로 이런 분이십니다.
자신의 삶을 주도적으로 살아가지 못하는 우리, 언제나 세상의 변방에서 빙빙 돌고 있는 우리를
무대의 한 가운데로 초대하셔서 적극적으로, 멋진 주인공으로 살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우리는 주님을 우리 삶의 중심에 모심으로 인해, 그분이 우리 매일의 삶 한가운데 굳건이 현존하심으로 인해, 각자 삶의 주인공으로 살아갈 수 있음을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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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909. 연중 제23주간 월요일.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손이 오그라든 병자의 치유
예수님은 항상 인간이 현재보다 더 자유롭고 사람답게 살 수 있도록 해주시는 것을 우선으로 하신다. 예수님은 손이 오그라든 사람을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 앞에 두고 날카로운 질문을 던지신다. “안식일에 좋은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 남을 해치는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 목숨을 구하는 것이 합당하냐? 죽이는 것이 합당하냐?”(9절) 이는 사람을 제도라는 법에 묶어놓으려고 하는 그들을 공박하시는 말씀이다.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하느님의 참뜻을 행하기보다는 인간적인 규례를 중요시하는 사람들이었다. 우리가 명심해야 할 것은 관례와 규칙보다 사람의 생명을 돕는 일과 사람에게 선행을 베푸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것이다. 예수께서 안식일에 기적을 행하신 것은 그들을 자비와 동정으로 이끌기 위해서였다.
예수님의 질문은 저들의 어리석음을 드러내는 지혜로운 질문이다. 만일 안식일에 좋은 일을 하는 것이 합당치 않고, 생명을 구하는 일이 법에 금지되어 있다고 대답한다면, 그들은 스스로 율법을 비난하는 자들이 된다. “어찌하여 내가 안식일에 한 사람의 온몸을 건강하게 만들어준 것을 가지고 나에게 화를 내느냐?”(요한 7,23) 그분은 아담이 금지된 열매를 따기 위해 내밀었던 손(창세 3,6)을 선행의 건강한 힘으로 회복시켜주셨다. 범죄를 저질러 마비된 손이 선행으로 치유되었다. 우리도 주님께 우리의 오그라든 손을 뻗게 해 달라고 청하여야 한다.
“손을 뻗어라.”(10절) 손을 뻗는다는 것은 탐욕과 불경으로 오그라든 손을 편다는 것이다. 이제는 손을 뻗어야 한다. 구걸하는 가난한 사람에게 손을 뻗고, 이웃을 돕고 어려운 사람들을 돕고, 불의하게 모욕당하는 사람이 해를 입지 않도록 손을 뻗어야 한다. 우리의 죄를 사해 주십사고 하느님께 손을 뻗어야 한다(이사 1,15.17 참조). 손을 내밀어 뻗으면 치유를 받는다. 손을 뻗는다는 것은, 옳은 일을 행하고 선을 실천하는 것이다. 제도와 규칙에 앞서 이것이 진정으로 사람을 위하는 일인가, 괴롭히는 일인가를 먼저 생각해야 할 것이다. 여기에서 참으로 하느님의 사랑이 나올 것이며 그 사랑이 이웃에게로 전해진다. 내가 율법주의자가 될 때, 지금 오늘을 사는 나도 그분을 제대로 보지 못하고 우리 안에서 그분이 현존하시는 것을 방해하고 죽이는 내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잘못을 우리는 범하지 않도록 하여야 한다. 인간의 존엄성, 즉 하느님의 모습임을 항상 기억하며 이웃을 대하는 우리가 되도록 노력하여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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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909. 연중 제23주간 월요일. 전삼용 요셉 신부님.
누가 미사의 은총을 받아가는가?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오른손이 오그라진 사람을 고쳐주십니다.
손이 오그라졌다고 죽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오늘 기적은 회당에서 중심에 서야 할 사람이 누구인지 정확히 가르쳐줍니다.
바리사이와 율법학자들은 모든 병을 하느님의 벌로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회당에서 중심 자리를 차지해야 할 사람들은 자신들이라고 자만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에겐 연민이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마음을 드러내기 위해 이렇게 질문하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묻겠다.
안식일에 좋은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 남을 해치는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 목숨을 구하는 것이 합당하냐? 죽이는 것이 합당하냐?”
“너희들은 착한 사람이냐?”라고 물으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착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은총은 착한 사람에게 향합니다.
영화 ‘신데렐라 맨’(2005)은 대공황 동안 극심한 빈곤에서 복싱 경력을 되찾은 프로 복서 제임스 J. 브래독의 실화를 바탕으로 한 전기 스포츠 드라마입니다.
영화는 이미 나이가 많고 부상이 잦아 권투 면허를 잃은 브래독의 일상으로 시작합니다. 일용직도 찾기 어려운 상황에서 아이들을 부양할 돈이 없는 브래독의 사정은 정말 딱합니다. 그러나 가족을 부양해야 한다는 마음으로 자기를 쫓아낸 권투협회에 가서 거지처럼 구걸합니다.
전 코치 조 고울드는 그에게 많은 돈을 기부해줍니다.
어느 날 조가 찾아옵니다.
한 권투선수의 부상으로 자리가 비었는데 권투협회에 브래독을 자신이 추천했다는 것입니다.
조는 다시 권투를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멋진 경기로 승리를 따내고 브래독은 승승장구합니다.
오른손 부상 때문에 왼손으로 막일을 해야 해서
왼손의 파워가 급격하게 높아졌던 것입니다.
세계 챔피언 결승전은 그야말로 드라마입니다.
현 세계 챔피언은 하도 무자비하여 링에서 선수 2명을 사망하게 하였습니다.
아내와 코치는 그래도 브래독을 믿어줍니다.
브래독은 상대선수가 다른 선수를 죽도록 패는 장면을 계속 돌려보며 그의 약점을 알아내고 결국 세계 챔피언이 됩니다.
브래독은 ‘신데렐라 맨’으로 불렸습니다.
일용직 막노동꾼에서 세계 챔피언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된 데는 코치와 그에게 감동하여 다시 기회를 준 권투협회의 힘이 컸습니다.
권투협회는 왜 그에게 다시 기회를 주었을까요? 아이들을 부양하기 위해 자신들에게 구걸까지 하는 그의 마음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착한 사람을 도와주고 싶은 것은 모든 사람의 본성입니다.
누구나가 부모에게 그런 자비심으로 키워졌기 때문입니다.
왜 신데렐라는 다른 언니들보다 하늘의 선택을 받아 축복받았을까요? 착했기 때문입니다.
착한 사람은 다른 사람이 아픈 것을 보지 못합니다.
자신의 처지가 죽어가고 있더라도 죽이는 것보다 살리는 것을 좋아합니다.
김학배 안젤로 신부는 평화방송 강의에서 한 장애인 변호사 이야기를 해 주셨습니다.
그 장애인이 사법고시를 준비 중일 때 명동성당을 힘겹게 오르락내리락하며 합격하게 해 달라고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한 아이가 성당으로 올라가면서 쩔뚝거리며 힘겹게 오르는 자신을 보고는 함께 오르고 있는 엄마에게 이렇게 물어보았습니다.
“엄마, 저 사람은 왜 저렇게 된 거야?”
어머니는 그 사람이 듣고 있었음에도 자녀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너도 엄마 말 안 듣고, 하느님 안 믿으면 저렇게 돼!”
이 말을 듣고는 그분은 그만 다리에 힘이 풀려 바닥에 털썩 주저앉고 말았습니다.
그리고는 그런 사람들이 다니는 성당 미사에 나갈 자신감이 없어진 것입니다.
하느님은 누구에게 은총을 주실까요? 타인의 아픔을 이용하는 사람에게 은총을 주실 수는
없습니다.
더 교만해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전에 한 장애인이 자기 동생을 사랑하는 법을 이야기해 주었습니다.
동생이 친구들과 함께 있을 때, 혹시 길에서 자신과 마주치게 되면 아는 척을 안 하고 그냥 지나쳐 달라고 말하였다고 합니다.
이것이 자신이 동생에게 해 줄 수 있는 가장 큰 것이라는 것입니다.
친구들에게 장애가 있는 언니를 두었다는 말을 동생이 듣지 않게 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이런 자매는 미사에 오면 엄청난 은혜를 받습니다.
은혜는 착한 사람의 몫입니다.
레베카도 불쌍한 여행객에게 물을 주고 낙타에게도 물을 먹였기 때문에 아브라함의 며느리가 되었습니다.
성모 마리아도 은총을 받으신 이유는 그러한 착한
마음을 지니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미사 때 들어오기 전에 일주일 동안 어떻게 살아왔나를 되새기며 이 질문에 대답해야 합니다.
“내가 너희에게 묻겠다.
안식일에 좋은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 남을 해치는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 목숨을 구하는 것이 합당하냐? 죽이는 것이 합당하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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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909. 연중 제23주간 월요일. 송영진 모세 신부님.
<주일은 결코 ‘노는 날’이 아닙니다.>
“다른 안식일에 예수님께서 회당에 들어가 가르치셨는데, 그곳에 오른손이 오그라든 사람이 있었다.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예수님을 고발할 구실을 찾으려고, 그분께서 안식일에 병을 고쳐 주시는지 지켜보고 있었다.
예수님께서 그들의 생각을 아시고 손이 오그라든 사람에게, ‘일어나 가운데에 서라.’ 하고 이르셨다. 그가 일어나 서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너희에게 묻겠다.
안식일에 좋은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 남을 해치는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 목숨을 구하는 것이 합당하냐? 죽이는 것이 합당하냐?’ 그러고 나서 그들을 모두 둘러보시고는 그 사람에게, ‘손을 뻗어라.’ 하고 말씀하셨다.
그가 그렇게 하자 그 손이 다시 성하여졌다. 그들은 골이 잔뜩 나서 예수님을 어떻게 할까 서로 의논하였다(루카 6,6-11).”
1) 이 이야기에 나오는 장애인은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이 의도적으로 데리고 온 사람입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병자들과 장애인들을 보면 그냥 지나치시지 않고, 안식일이라고 해도 모두 고쳐 주실 것이라고 예상했습니다.
그리고 자기들이 예상한 대로 예수님께서 병자들과 장애인들을 고쳐 주시면, 안식일 규정을 어겼다고 고발할 생각이었습니다.
그 당시에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생명이 위독한 응급환자가 아니면 안식일에는 병을 고치는 일을 하면 안 된다고 주장했습니다.
뒤의 13장에 그들의 주장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회당장은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병을 고쳐 주셨으므로 분개하여 군중에게 말하였다.
‘일하는 날이 엿새나 있습니다.
그러니 그 엿새 동안에 와서 치료를 받으십시오. 안식일에는 안 됩니다.’ 그러자 주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위선자들아, 너희는 저마다 안식일에도 자기 소나 나귀를 구유에서 풀어 물을 먹이러 끌고 가지 않느냐?
그렇다면 아브라함의 딸인 이 여자를 사탄이 무려
열여덟 해 동안이나 묶어 놓았는데, 안식일일지라도 그 속박에서 풀어 주어야 하지 않느냐?’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니 그분의 적대자들은 모두 망신을 당하였다.
그러나 군중은 모두 그분께서 하신 그 모든 영광스러운 일을 두고 기뻐하였다(루카 13,14-17).”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병의 치료’를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노동’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을 악에서 해방시켜 주는 사랑과 자비’ 라고 가르치셨습니다.
그리고 악의 억압에 짓눌려 있는 사람들을 해방시켜 주는 사랑과 자비는, 안식일 규정과는 상관없다고 가르치셨습니다.
군중이 모두 기뻐하였다는 말은, 예수님 덕분에
율법의 억압에서 해방된 것을 기뻐하였다는 뜻입니다.
<사실 율법 자체가 악한 것은 아닌데, 사람들을 억압하는 도구로 변질되면, 그냥 ‘악한 것’이 되어버립니다.>
2) “예수님께서 그들의 생각을 아시고” 라는 말은, 그들의 ‘악한 의도’에 예수님께서 정면으로 맞서셨음을 나타냅니다.
<예수님은 인간의 구원과 해방을 위해서 당신의 목숨을 바치신 분입니다.>
11절의 “그들은 골이 잔뜩 나서 예수님을 어떻게 할까 서로 의논하였다.” 라는 말은, “그들은 분노와 증오심에 가득 차서 예수님을 죽이는 방법을 서로 의논하였다.” 라는 뜻입니다.
죽이는 것은 이미 결정되어 있는 상황이고,
어떻게 죽일 것인지, 그 방법을 찾았다는 것입니다.
3) 여기서 “합당하냐?”는, “하느님의 뜻에 합당하냐?”이고, “무엇이 하느님의 뜻이냐?” 라는 질문입니다.
‘좋은 일’은, ‘하느님께서 보시기에 좋은 일’, 즉 선행과 사랑 실천을 뜻합니다.
‘목숨을 구하는 것’은, 병자들을 치료하고 돌보는 일을 포함해서, 어떤 고통을 겪고 있는 사람이 그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일들을 전부 가리킵니다.
예수님의 질문에는, “좋은 일을 하지 않는 것은 남을 해치는 일을 하는 것과 같다. 목숨을 구하는 일을 하지 않는 것은 죽이는 것과 같다.” 라는 가르침이 들어 있습니다.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에 나오는 사제와 레위인은, ‘좋은 일’과 ‘목숨을 구하는 일’을 해야 하는 상황이라는 것을 보았으면서도(알았으면서도)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냥 지나가 버렸습니다(루카 10,31-32).
따라서 그 사제와 레위인은, ‘남을 해치는 일’과 ‘죽이는 일’을 한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사실 ‘좋은 일’과 ‘목숨을 구하는 일’은 요일과 상관없이 언제든지 늘 해야 하는 일이고, 안식일에는 특히 더 많이, 특히 더 잘해야 하는 일입니다.
<‘해치는 일’과 ‘죽이는 일’을 해도 되는 날은 없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을 다시 정리하면, “안식일은, 아무것도 안 하고 쉬는 날이 아니라, 적극적이고 능동적으로 선행과 사랑을 실천해야 하는 날이고, 목숨을 구하는 일을 해야 하는 날이다.”입니다.
<‘해도 된다.’가 아니라, ‘해야 한다.’입니다.>
4) 오늘날의 우리는 안식일을 지키지 않고,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안식일 다음날’, 즉 ‘주일’을 지키고 있지만, 예수님의 가르침은 변함이 없습니다.
주일은 ‘노는 날’이 결코 아닙니다.
‘선행과 사랑, 목숨 구하는 일’을 실천해야 하는 날입니다.
물론 평소에도 그런 일들을 꾸준히 해야 하지만,
주일에는 특히 더 잘해야 합니다.
미사 참례를 한 것으로 주일을 지켰다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된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미사 참례는 주일을 지키는 일 가운데 일부일 뿐입니다.
날마다 거룩하게 살아야 하지만, 특히 주일에는 하루 전체를 거룩하게 지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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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909. 연중 제23주간 월요일. 함승수 세례자 요한 신부님
“손을 뻗어라.”
오늘 복음에서는 ‘율법주의’의 어두운 면이 고스란히 드러나고 있습니다. 안식일 규정을 글자 그대로 지키려는 이들이, 안식일 그 자체를 만드신 분과 대립하는 모습을 통해서입니다. 안식일에는 ‘일을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 율법주의를 내세우는 율법학자와 바리사이들의 논리입니다. 하느님께서도 창조사업을 마치신 다음인 일곱째 날 아무 것도 안하고 안식을 취하셨으니, 그 날을 기념하는 안식일에는 그 어떤 일도 해서는 안 된다는 겁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에도 사람들에게 하느님 나라를 드러내는 당신의 일을 쉬지 않으십니다. 병자들을 치유하시고 마귀를 쫓아내시는 그 일을 통해 하느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과, 더 나아가 온 인류와 함께 하신다는 기쁜 소식을 선포하시는 것이지요. 물론 그 일 자체는 ‘나쁜 일’이 아닙니다. 바리사이와 율법학자들이 문제 삼는 것은 그 일을 하는 날이 하필이면 안식일이라는 겁니다.
하지만 하느님께서 안식일을 정하시고 그 날에 사고 팔고 심고 짓고 하는 세상의 일을 하지 말라고 하신 이유는 일 자체를 하지 않는 것에 의미가 있어서가 아니라, ‘세상의 일’을 잠시 내려놓고 일주일에 단 하루라도 신경써서 해야 할 더 중요하고 좋은 일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우리 삶 곳곳에 숨어있는 하느님 사랑의 흔적들을 찾아보고 그분 사랑을 깊이 느끼며 내가 받은 그 사랑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느님을 찬미하는 일입니다. 우리의 찬미가 하느님께는 아무런 보탬이 되지 않으나 하느님께 대한 우리의 믿음을 굳게 함으로써 우리가 구원받는데에 도움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찬미는 그저 입으로만 해서는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하느님 아버지께서 나에게 바라시는 뜻을 헤아리며 적극적으로 그분께서 바라시는 사랑과 자비, 나눔과 선행을 실천해야 그것이 우리 영혼을 구원으로 이끄는 ‘좋은 일’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율법주의자들에게 이렇게 물으십니다. “안식일에 좋은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 남을 해치는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 목숨을 구하는 것이 합당하냐? 죽이는 것이 합당하냐?” 여기서 ‘합당하냐?’라는 질문의 내용을 좀 더 구체적으로 표현하면 그것이 ‘하느님의 뜻에 비추어 합당하냐?’, 그것이 ‘하느님께서 진정으로 바라시는 것이냐?’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이런 질문을 하신 의도는 단지 합당한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을 구분하는데에 있지 않습니다. 하느님께서 바라시는 ‘좋은 일’을 하지 않는 것은 남을 해치는 악행을 저지르는 것과 같고, 어려움이나 위험에 빠진 이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노력하지 않는 것은 그의 목숨을 빼앗는 큰 죄를 저지르는 것과 같다는 뜻인 겁니다. 이 중요한 근본원칙은 안식일을 포함한 모든 날에, 그 어떤 예외도 없이 철저하게 적용되는 것이지요.
그 답이 너무도 자명한 이 질문에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고 완고하게 버티는 그들의 모습에서, ‘사랑의 실천이 중요하다’는 말을 귀에 못이 박히게 들으면서도 ‘십계명을 어기지만 않으면 된다’는 생각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우리 모습이 겹쳐져 보이는 건 왜일까요? 나 혼자만 경건하고 엄숙하게 산다고 구원받는 게 아닙니다. 신앙생활은 “나 혼자 산다”가 아니라, 하느님 뜻에 따라 모두 함께 어우러져 사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내 소유, 내 생각을 지키기 위해 오그라든 손을 주님을 향해 믿음으로, 이웃을 향해 사랑과 자비로 쫙 펼쳐야만 구원받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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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909. 연중 제23주간 월요일. 정인준 파트리치오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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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909. 연중 제23주간 월요일.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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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909. 연중 제23주간 월요일.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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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909. 연중 제23주간 월요일.
풍성한 인생으로 이끄시는 하나님을 소망하는 삶
<2024.9.9> 아침을 여는 묵상 (왕하 4:38~44절)
❝풍성한 인생으로 이끄시는 하나님을 소망하는 삶❞
❚ 때로는 결핍을 경험할지라도 긍휼로 보살피시며 풍성히 채우시는 하나님을 신뢰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 어떤 하나님을 소망해야 합니까?
➲ 사랑으로 먹이시는 하나님을 소망하는 삶이어야 합니다(38~39절).
엘리사가 선지학교를 방문할 목적으로 길갈에 이르게 되었을 때, 흉년으로 인해 제자들이 굶주리고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엘리사는 제자들의 굶주림을 해결하기 위해 사환에게 큰 솥을 걸고 국을 끓이라고 지시하였습니다(38절). 그런데 이때 한 사람이 채소를 캐러 들에 나갔다가 들호박을 따서 옷에 가득히 담아 가져와서 그것이 무엇인지도 잘 모르는 채로 국솥에 썰어 넣었습니다(39절). 흉년과 기근 속에서 엘리야를 통해 사르밧 과부를 먹이셨던 하나님이 그리고 엘리사를 통해 수넴 여인의 필요를 채워주셨던 하나님께서 이번에는 제자들의 굶주림과 필요를 채워 주고자 하셨습니다.
삶의 궁핍과 결핍은 하나님을 믿고 살아가는 사람이라고 해서 피해 가는 것은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소망해야 하는 것은 하나님은 이러한 처지에 있는 우리 자신의 문제를 잘 알고 계시고, 그것을 해결해 주시기 원하시는 사랑의 공급자라는 사실입니다. 지금 당장은 힘겨운 삶을 살아갈 수밖에는 없지만, 조금만 더 힘을 내고, 인내하여 사랑으로 먹이시고, 필요를 채우시는 하나님을 기대하는 삶이어야 합니다. 궁핍한 인생들을 긍휼히 여기시고, 굶주린 영혼을 만족하게 하시는 사랑의 공급자가 되어 주시는 하나님을 소망하고, 신뢰합니다.
➲ 기적으로 먹이시는 하나님을 소망하는 삶이어야 합니다(40~41절).
끓인 국을 퍼서 제자들에게 가져다주었습니다. 제자들이 그 국을 먹으려고 맛을 보다가 깜짝 놀라 엘리사를 급히 불러 ‘...솥에 죽음의 독이 있나이다’라고 소리를 쳤습니다(40절). 엘리사는 가루를 가져오라고 하여, 가루를 솥에 뿌리자 죽음의 독이 사라지고 생명을 살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41절). 엘리사가 솥에 던진 가루가 무엇인지 알 수는 없지만 분명한 것은 그 가루 자체가 해독 작용을 일으킨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어떤 가루를 사용하든 하나님의 능력이 임할 때 독이 제거되는 기적이 일어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은 엘리사를 통해 먹기에 불가능한 음식을 먹을 수 있는 음식으로 바꾸는 기적을 보여 주심으로 제자들을 먹이셨습니다.
불가능해 보이는 한계 상황을 바꾸셔서 가능케 하시는 하나님을 신뢰합니다. 해결 자체가 불가능하게 보이는 상황에 있는 우리 자신을 돕기 원하시며 긍휼히 여기시며 오늘도 육적인 배부름과 영적인 배부름의 기적을 베푸시는 하나님을 소망합니다. 그러므로 나의 시선을 기적 그 자체에 두는 것이 아니라 기적의 근원이 되시는 하나님께 두어야 하겠습니다. 기적의 공급자로 나의 삶에 역사하는 하나님을 소망하고, 신뢰합니다.
➲ 풍성하게 먹이시는 하나님을 소망하는 삶이어야 합니다(42~44절).
한 사람이 바알 살리사에서 처음 추수한 곡식으로 만든 보리떡 20개와 채소 한 자루를 엘리사에게 가져옵니다. 그는 처음으로 추수한 곡식을 하나님께 드리기 위해 먼 곳에서 걸어서 왔습니다. 엘리사가 그것을 사람들에게 나눠 주어서 먹게 하라고 하였더니, 사환은 ‘100명이나 되는 무리가 먹기에는 부족하다’(43절)고 대답합니다. 이에 엘리사는 ‘...무리에게 주어 먹게 하라 여호와의 말씀이 그들이 먹고 남으리라...’(43절)하셨다고 말하며 다시 나누어 주라고 지시합니다. 그리하여 그가 그들 앞에 주었더니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대로 먹고 남음(44절)이 있는 기적이 나타났습니다.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지 않고 육적인 눈으로 바라본 사환은 떡 20개와 채소 한 자루로 100명의 사람들을 먹인다는 것은 도저히 불가능한 것을 보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100명의 사람들이 먹고도 남을 만큼이나 풍성하게 먹이셨습니다.
예수님의 오병이어 기적을 떠오르게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순종과 헌신의 삶을 살아갈 때, 풍성한 하늘의 양식을 누리는 삶이 됩니다. 하나님의 풍성함을 누리고 살아가고 있는 것만큼 이제는 하나님께 우리 자신을 드리는 헌신의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한 사람의 작은 헌신과 드림이 그리고 한 아이의 작은 헌신과 드림이 하늘의 풍성한 양식이 되어 수 많은 사람들에게 큰 유익을 가져다주었습니다. 이제는 우리 한 사람의 작은 헌신 그리고 우리 교회의 희생과 배려가 하나님께 드려져야 합니다. 이럴 때 하나님 나라는 더욱 왕성하게 일어나게 될 뿐만 아니라 하늘의 양식으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풍성한 인생을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이제 우리 자신이 받고, 누리며 살아가고 있는 것만큼 하나님께 풍성히 드리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오늘도 영적 굶주림과 갈급함은 오직 하나님만이 채워 주실 수 있음을 믿고, 사랑의 공급자이신 하나님만을 신뢰하며 살아갈 뿐만 아니라 진정한 양식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날마다 경험하고 영생의 풍성함을 누리면서 살아갈 수 있기를(삼하 4:38~44절)...
행복의 시작 예수 그리스도!!!
빛이 있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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