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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 15: 1-3
이 후에 여호와의 말씀이
우리는 12장에 이어서 이제 15장에서도 아브람과 함께 가장 복되고 영광스런 하나님의 음성을 대하게 됩니다. 12장에서는 마치 “고향을 떠나서 본향을 향해 가라”는 명령, 혹은 “육신의 친척 아비 집을 떠나 참되신 부친의 집을 향하라”는 명령을 받은 것과 같습니다. 이렇게 하신 것은 그에게 하나님께서 참된 복을 제공해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은 자기 뜻을 접고 하나님의 뜻을 따르려고 “여호와의 말씀을 쫓아” 갑니다. 15장에서는 하나님이 주실 복이 더 구체적으로 제시됩니다.
1. 본문 1절 상반은
“이 후에 여호와의 말씀이 이상 중에 아브람에게 임하여” 입니다.
아브람의 매사가 번성하고 자기의 뜻대로 척척 진행되고 있을 때에 이 이상이 그다지 불필요한 것처럼 보일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특히 이 이상이 여호와께서 그의 종을 슬픔과 공포에 사로잡혀 있는 자로 여기시고 용기를 가지라고 말씀하시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자들은 공상하기를 아브람이 자기의 조카를 구출하고 돌아와서 모세가 전혀 언급하지 않은 어떤 난처한 상황에 처해 있었던 것이라고 합니다. 이를테면 여호와께서 가끔 그분의 백성을 낮추어 그들이 자기들의 번영에 탐닉하지 않게 하신 것과 같은 일을 그에게 하셨을 것이라고 추측합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은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아브람이 낙담했을 때에 다시 새로운 말씀으로 그에게 힘을 소생시켜 주었다고 추측합니다. 그러나 모세의 말들 가운데는 그런 공상이 가능하게 할 만한 언급이 전혀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원인이 다른 곳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첫째로, 그가 모든 면에서 박수 갈채를 받았지만 그의 마음 속에 여러 가지 억측들이 슬며시 들어있다는 것이 틀림없을 것입니다. 비록 그돌라오멜과 그의 연합군들은 전투에서 패배시켰지만 아브람이 그들을 자극시켰기 때문에 그들이 다시 새로운 군대로 정비하고 새로운 힘을 보강한 뒤에 가나안 땅을 또 다시 공격할 가능성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 땅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그런 위험에 대한 공포심에 사로잡혔던 것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로는, 일반적으로 성공의 소리나 소문은 언제나 그것을 질투하고 시기하는 것을 수반하기 마련인 것과 같이 아브라함이 감히 군대를 이끌고 네 왕들을 정복했던 전투를 치르고 난 후에는 많은 불리한 일들에 직면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이를테면 그가 머지 않아 다른 나라의 왕들을 정복했던 그 내력을 가지고 자기 이웃나라를 대항하여 삼키려 할 것이라는 좋지 않은 의혹도 일어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심지어는 그를 영접하여 융숭하게 대접한 자들까지도 공격할 것이라는 소문도 났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승리가 그에게 명예로운 것과 같이 동시에 그에게 다른 사람의 증오를 일으키는가 하면 그 승리가 많은 사람들의 무서운 경계를 그에게 초래해 주었으며 그들의 의혹의 대상이 되게 하였습니다. 모든 사람이 아브라함의 용감하고 위대한 전쟁의 승리로 인하여 자기들에게 미칠 어떤 위험을 상상했을 것입니다. 때문에 그 모든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분명히 그를 도와 주신다는 확실한 기대를 가지고 그에게 새 힘을 주시기 전에는 틀림없이 고심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 많은 일로 인하여 근심 가운데서 방황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이런 말씀을 하신 것은 또한 다른 목적이 있는 듯합니다 이를테면 하나님이 그의 종의 마음 속에 있는 상치된 잘못을 충족시키고 교정시키시려는 것이었을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그 승리에 너무 우쭐해져서 자신의 소명을 망각하고 자신을 위하여 통치권을 획득하려는 데에 신경을 곤두세웠을 가능성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지금까지 계속해서 방랑의 생활과 끊임없는 고민스런 생활로 지칠대로 지쳐 있는 그는 보다 더 나은 생활과 보다 안정되고 조용한 생활을 원했던 상태에 있었다는 것은 어느 정도 가능한 일입니다. 그리고 우리 인간은 번영과 미소짓는 재물에 대한 달콤한 유혹으로 자칫 잘못하면 너무나도 올무에 걸리기 쉬운 존재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그런 위험을 미리 예측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이 거룩한 사람의 마음을 이 허황한 허영심이 사로잡기 전에 그에게 허락해 주신 영적인 은혜를 다시 한번 상기시켜 주시며 그렇게 하여 아브람이 전적으로 그 모든 말씀을 묵종하면서 그밖의 모든 것을 멸시하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아직도 ‘두려워하지 말라’ 고 하는 이 표현이 마치 하나님의 슬픔에 처해 있으면서 괴로워하는 그분의 종을 위로의 말씀으로 달래고 계시는 것처럼 들리기 때문에 사실상 그가 그런 확증에 대한 말씀이 필요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것은 그가 자기의 승리에 대항하여 많은 사람들이 악의를 품고 몰아쳐 그의 늙은 나이에 극심한 괴로움을 당하게 되었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에 그런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이 필요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두려워하는 것을 금지하시려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그가 이미 두려워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하신 것은 세상의 모든 호의나 이 지상적인 부를 담대하게 완전히 무시하고 멸시하며 무가치한 것으로 여기는 것을 배우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마치 하나님은 아브람에게 “다만 네가 호의를 가지고 있다면 네가 전혀 두려워 할 필요가 없다. 이 세상에서 오직 나에게 만족하고 네가 처음 출발할 때와 같은 상태로 너의 순례의 길을 계속 추구해 나가거라. 그리고 네 자신을 이 세상에 집착시키지 말고 하늘나라에 의존하여라” 고 말씀하신 듯합니다. 그러나 이렇게 말씀하신 것은 하나님이 그에게 하늘나라에서 그를 위하여 훨씬 더 엄청난 복들이 쌓여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면서 하나님 자신을 다시 한번 생각해 보도록 상기시키려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브람이 자기의 승리에 절대로 만족하지 않고 그 소명을 계속하게 하시려는 것이었습니다. 모세는 말하기를 하나님이 ‘이상 가운데서’ 그에게 말씀하셨다고 합니다. 그 말도 그는 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가시적인 어떤 상징이 그 말씀에 첨가되어 더욱 더 그 말씀이 권위 있게 하셨다는 사실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여호와께서 그분의 선지자들에게 자신을 나타내실 때에 공식적으로 빈번히 이용하시는 일반적인 두 가지 방법들 가운데 하나이었습니다. 그 사실은 민수기에서도 언급되고 있습니다(민12:6).
2. 본문 1절 하반은
“가라사대 아브람아 두려워 말라 나는 너의 방패요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니라” 입니다.
비록 그 약속이 본문에서는 맨 마지막에 기록되기는 했지만 그러나 순서 면에서는 그 약속이 우선하고 있습니다.
바로 약속하신 그것에 의해서 확증이 좌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친히 약속하신 그것으로 아브람의 마음을 두려움에서 해방시켜 주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람을 격려하여 평온한 마음을 갖게 하셨으나 우리가 믿음으로 하나님이 우리를 돌보고 계시며 그분의 섭리에 좌우되어 있다는 사실을 이해하는 것을 떠나면 과연 무엇이 그런 안정에 대한 근거가 되겠습니까?
그러므로 하나님이 아브람의 방패와 그의 넘치는 큰 보상이 될 것이라는 약속이 가장 우선적인 위치를 점유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나서 거기에 격려가 첨가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의 안전에 대한 그런 보증과 이루 형언할 수 없는 지복(至福)만을 의지하고 그가 절대로 두려워하지 않게 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말의 의미를 더 명확하게 하자면 ‘원인’을 나타내는 단어를 삽입해야 합니다.
그래서 ‘아브람아 나는 너의 방패이니 두려워하지 말아라’ 하는 식이 됩니다. 더욱이 ‘방패’ 라는 말을 이용하여 모세께서는 아브람이 언제나 그 분의 보호 아래서 안전하다는 사실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에게 그의 보상에 대하여 상기시켜 주심으로 하나님은 아브람이 오직 그분 자신으로만 만족하라고 가르쳐 주고 계십니다. 그리고 이것이 아브람에게 관하여 일반교훈으로 제시됨으로써 그에게 승리는 하나님이 그에게 추구하라고 계획하신 주요한 것이나 궁극적인 선이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그와 똑같은 복이 이 한사람의 인격 안에서 우리 모두에게 약속되어 있다는 사실을 우리도 알아야 될 것입니다.
이 음성으로 하나님은 날마다 그분의 신실한 자들에게 말씀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일단 그분이 우리를 방어해 주시기 위하여 착수하셨으니 만큼 우리를 그분의 장중에서 안전하게 보호하기 위하여 그리고 그분의 능력으로 지켜 주시려고 날마다 돌봐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제 하나님이 우리의 구원의 보호자로서 자신을 표현하실 목적으로 방해가 되는 임무와 특성을 그분 자신에게 귀속시키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약속을 튼튼한 놋쇠벽으로 여기고 어떤 위험에서도 지나치게 두려워하지 말아야 합니다.그리고 헤아릴 수 없고 가지각색의 육신의 소욕으로 에워싸여 있는 사람들은 때때로 불안하고 그 결과로 현재의 삶을 사랑하는 것에 팀닉되기 때문에 그 문장에서 다른 내용이 뒤따르고 있습니다. 거기서는 하나님이 오직 그분 혼자만이 신실한 자의 행복한 생활의 완성을 위하여 충분한 분이시라는 것을 선언하고 계십니다. ‘상급’ 이라는 말은 ‘상속’ 또는 ‘지복(지극히 큰 복)’ 의 위력을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오직 하나님 안에서만이 우리가 모든 선한 것들 가운데 가장 차원 높은 그리고 철저하게 완전한 선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우리의 마음에 깊이 새겨져 있다면 우리들이 처참하게 고통을 당했던 그런 악한 소욕들을 향하여 쉽사리 발을 끊고 경계선을 쳐야 될 것입니다. 이 말씀의 의미는 이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호의를 베풀어 주실 때 우리는 정말로 행복해질 것이라는 뜻입니다.
그것은 그분이 우리에게 그분의 풍성하신 은총을 부어주실 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마저 우리에게 제공하여 우리가 누릴 수 있게 하시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하나님을 진정으로 모시고 더할 나위 없는 생활을 할 때 그 이상 무엇을 원한단 말입니까? 그래서 다윗은 여호와께서 자기의 상속을 가지고 계시므로 자기는 이제 아름다운 기업을 얻었다는 사실을 자랑할 때에 이 약속의 위력을 알고 있었습니다(시16:6).
그러나 이 육신의 타락한 욕망을 단절하기가 가장 어렵기 때문에 그리고 인간의 배은망덕이 아주 사악하고 가증스런 것이어서 하나님은 사람들을 거의 만족시킬 수가 없으므로 여호와께서는 단순히 ‘상급’ 이라는 말만 상기시키지 않으시고 ‘지극히 큰 상급’ 이라는 말씀으로 그에게 말씀하고 계시기 때문에 그것으로 우리는 지극히 만족해야 하며 풍부한 상태에 있게됨을 마땅히 비할 데 없는 만족으로 여겨야 될 것입니다.
이것이야말로 정말로 가장 풍부한 물질을 공급하는 것이며 우리가 확신할 수 있는 가장 분명한 지원을 제공해 줍니다. 누구든지 자기의 생애가 하나님의 손으로 보존되고 있으며 하나님이 그에게 은혜를 베푸시는 동안에는 결단코 비참하게 될 수가 없다는 사실을 충분히 깨닫고 있는 사람은 그리고 또한 자기의 모든 걱정과 염려들 가운데서 이 피난처에 결국 의지하는 자는 모든 죄악들을 치료하는 가장 좋은 치료제를 발견할 것입니다. 성도들이 분쟁과 비참의 소용돌이로 괴로움을 당하고 있는 한 그들이 완전히 두려움과 염려에서 해방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단지 그 폭풍이 그들의 마음 속에서 잠잠해 있고 하나님의 보호가 모든 위험들보다 더 막강하기 때문에 신앙은 두려움을 이기는 것입니다.
3. 본문 2절 상반절은
“아브람이 가로되 주 여호와여 무엇을 내게 주시려나이까” 입니다.
이 칭호에서 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어떠한 특별한 표가 그 이상에 찍힌 것이 추론됩니다.
그래서 아브람은 그 말씀의 발언자에 대하여 전혀 의심하지 않고 확신 있게 부릅니다. 그것은 사단이 사람을 기만하는 명수이며 하나님의 이름으로 사람들을 많은 간교한 짓을 하여 현혹시키기 때문에 무언가 확실하고 잘 드러나는 구분이 참되고 거룩한 말씀으로 나타나는 것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그렇게 하여 거룩한 조상들의 신앙과 마음들을 동요되지 않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언급되는 이상(異常)에서 아브람에게 하나님의 엄위성(嚴威性)이 현현되었습니다. 그것이 그의 신앙에 충분히 확증을 주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그대로 나타나신 것이 아니라 단지 인간들이 그분을 이해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자신을 나타내셨던 것입니다. 하지만 아브람은 그토록 영광스런 약속을 멀리 바라다 보면서 그리고 한편으로는 자기에게 자식이 없는 것을 불평하면서 지금까지 자기에게 씨를 주시지 않은 것 때문에 하나님에게 투덜거리는 것을 보면 거의 온유함이 결여된 상태에서 처신하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하나님의 보호 아래에서 받아들여진 것과 그분을 모시고 누리는 행복한 생활보다 더 이상 바람직한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그러므로 아브람이 자기에게 제공된 도저히 비교할 수 없는 은덕(恩德)을 경멸하고 자식을 받기 전에는 전혀 만족할 수가 없다고 하면서 야기시킨 반대는 경건히 결여된 것으로 보입니다. 하나님 바로 그분께서 취하고 있는 관대함은 그것에 대한 변명을 허용하십니다.
첫째는, 여호와께서 우리를 괴롭히고 압박하던 염려들과 문제들을 우리의 가슴에다 붓도록 허락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둘째로, 그 불평의 의도를 고려해 보아야 합니다. 단지 그가 고독하다고 말한 것이 아니고 그 모든 약속의 효력이 그의 자손에게 달려있는 것을 알고 있는 그는 그토록 필요한 담보를 그에게 주시라고 요구한 것이 그렇게 부당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만약 이 세상의 복과 구원이 그의 자식을 떠나서는 도저히 바랄 수가 없었다면 그리고 그 자식을 주시겠다는 약속마저 그를 실망시키는 것처럼 보였을 때는 그 외에 다른 일들은 그 안중에서 연기처럼 사라졌을 것이며 적어도 그의 마음을 달래지 못하고 또한 그의 소원들을 만족시켜 주지 못했을 것이라는 사실은 전혀 이상하지 않고 당연한 결과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하나님이 호의를 베풀어 그분의 종의 불편을 생각하실 뿐만 아닙니다. 또한 즉시 그의 기도에 호의적인 응답을 주신 이유입니다. 모세는 아브람에게 자연적으로 우리 모두에게 상속되어진 감정을 귀속시키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아브람이 자기의 상속자를 낳게 되기를 간절히 바랐다는 것이 그보다 더 높은 차원을 보지 않았다는 것을 입증하는 증거는 될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확실히 이 약속들이 그의 생각에서 시들어 있지 않은 것만은 사실입니다. ‘네 자손에게 내가 이 땅을 주겠다’ 는 것과 ‘네 후손으로 모든 민족들이 복을 받을 것이다’라는 약속입니다.
전자의 약속은 나머지 사람들에게 아주 밀착되어 있으므로 만약 그것이 사라진다면 그들에 대한 모든 확신들이 사라졌을 것입니다. 한편 후자의 약속은 그 안에 구원의 전체적인 은혜스런 서약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아브람은 그 안에다 하나님이 약속하신 모든 것을 올바로 포함시키고 있습니다.
4. 본문 2절 하반에서 3절은
“② 나는 무자하오니 나의 상속자는 이 다메섹 엘리에셀이니이다
③ 아브람이 또 가로되 주께서 내게 씨를 아니 주셨으니 내 집에서 길리운 자가 나의 후사가 될 것이니이다” 입니다.
여기서 ‘무자’ 하다는 말은 은유적인 표현입니다.
우리 생활은 마치 경주하는 것과 같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아브람은 이미 자기가 늙었다는 것을 알고 말하기를 ‘지금까지 그토록 많은 세월을 살아왔으니 이제는 나의 생애의 과정이 조금밖에 남지 않았습니다’라고 합니다. ‘이제 나의 목표지에 거의 다달았습니다. 그리고 나서 생애의 과정도 끝나고 있으니 내가 자식도 없이 죽을 것입니다’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수치를 더 확대하려고 ‘외국 사람이 나의 상속자가 될 것입니다’ 라고 합니다.
우리는 다메섹이 그의 나라의 이름이었으며 몇몇 사람들이 잘못 추측하고 있듯이 그의 ‘어머니’의 고유한 이름은 아니라는 데에는 의심하지 않습니다. 어떤 자들은 마치 그가 ‘내 친척들 가운데 한 사람이 나의 상속자가 되지 않고 다메섹에서 난 시리아 인이 될 것입니다’ 하고 말한 것처럼 추측하고 있습니다. 아마 아브라함이 그 사람을 메소포타미아에서 샀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는 또한 그를 (메섹)의 아들이 (샤칵크)고 부르고 있습니다. 그 말의 의미에 관하여 문법가들은 일치하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은 그 말을 라는 말에서 유출해 내고 있는데 그 의미는 앞뒤로 달리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그 말은 ‘청지기’ 또는 ‘감독자’ 라는 말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큰 집을 관리하고 유지하는 사람은 맡겨진 일을 하노라면 자연히 이리저리 뛰어다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은 그 말을 (수우크)에서 파생해 내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잔 나르는 사람’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를테면 이라는 말은 때때로 ‘버리다’ 는 의미를 지니고 있기 때문에 그는 버려진 집의 아들이라고 불려졌다는 표현입니다. 그러나 아직도 그렇게 불려진 이유가 아브람이 그에게 모든 것을 맡겨서가 아니라 아브람 자신이 그 외 다른 사람에게는 전혀 소망을 두지 않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여겨집니다. 그러므로 그가 아들이 없는 집의 아들이라고 그를 불렀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 이유는 텅 비어 있거나 버려진 곳을 점유하고 있는 외국인이 그것을 상속받게 되는 것이므로 이와 같이 외국 사람에게 넘어가는 것을 황폐하고 무자(無子)한 가문이라는 사실을 입증해 주는 증거였습니다.
그 후에 그는 경멸적인 표현으로 그를 한 가정의 종 또는 그의 집에서 태어난 종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곧 ‘내 집에서 길리운 자가 내 후자가 될 것이니이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그래서 그는 경멸적으로 마치 ‘나의 상태는 이제 가련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심지어 내 계승자로서 자유인은 얻지 못할 것입니다’ 라고 말한 것처럼 들립니다.
그러나 그가 어떻게 다메섹 사람이며 동시에 아브람의 집에서 출생한 노예가 될 수가 있었는가 하는 점이 의문으로 대두되고 있습니다. 이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은 두 가지가 있습니다. 그것은 그가 그 집의 아들이라고 불리고 있는 것은 그가 거기서 태어났기 때문에서가 아니고 그 집에서 교육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또 다른 하나는 그의 아버지가 시리아 출신이기 때문에 다메섹인이라 불리고 있다는 것인데 두 가지 해답 중 그 어느 쪽도 선택할 수 있습니다. 아무튼 아브람은 우리와 성정이 같은 사람입니다. 때문에 아브람에게 하셨던 방식으로 오늘날 우리도 여전히 살아 계신 하나님의 격려와 위로를 받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