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 총선이 좌우파 판도를 가를 모양이라 국가적으로 중요하다. 그래 사업가 출신 933의 한 친구는 동해시 이철규, 평창 윤상범, 동작 나경원 선거사무소 개소식 다녀온 모양이다. 그 문자 보고 30여 년 전 김 모 대통령 후보자 만난 기억이 살아난다.
김대중 씨는 속초에서 만났다. 대통령 유세 때였던 것 같다. 한 번은 관리부장이 오피스텔 두 개와 강당을 김대중 씨가 쓴다고 보고했다. 부장 생각엔 사무실 사용계약금 받은 일을 칭찬받고 싶었던 같다. '어? 돈 받아? 그쪽에 연락해서 돈 도로 돌려주시오.' 이리 지시하니 그는 선뜻 이해 안 가던 모양이다. 쭈뼛거리며 눈치를 본다. '썩어도 준치라고, 그래도 김대중 씨는 우리나라 3김 중 한 분인데 그런 분한테 돈 받아서 쓰나? 우리 백화점에 와서 강연한 게 오히려 우리 백화점 피아르해준 것이요. 우리가 도로 그 양반한테 광고비 줘야지...' 그랬더니, 좀 있다 속초 당 지부장한테서 득달같이 전화가 왔다. '감사합니다 사장님! 선생님한테 보고하겠느니 어쩌니', 돈 없는 야당 신세 하소연도 할 겸 고맙다는 인사였다.
나야 그때나 지금이나, 정치는 지붕 위 닭처럼 보는 사람이라 관심 없다. 그러나 같은 호남 출신 그룹 회장은 어떨까? 미리 보고는 해두는 것이 좋겠다 싶어 전화 보고 하니, 노 회장이 누군가? '그랬어? 그럼 김대중 씨 오시면 자네가 한번 만나소. 내 안부도 좀 전하고....' 직접 만나서 자기 생색 좀 내라는 것이다. 역시 술수 높은 능구렁이 노인은 나보다 한 수 위다. '그러겠습니다.' 이렇게 대답하고 속초 지구당에 연락했더니 금방 면담 시간이 왔는데, 그런데 소릴 듣고 우리 그룹 종합조정실에서 난리가 났다. '김대중 씨는 절대 만나선 안된다'는 것이다. 아들 회장이 대통령 출마한 이회창 씨와 경기고 동창이라 그런 것이다. 아들 쪽은 선거 자금도 좀 건넨 것 같았다. '알았어요.' 일단 이렇게 대답은 했다. 그러나 일은 꼬였다. 아버지는 만나서 인사하라 하고, 아들은 안된다고 펄펄 뛴다. 김대중 씨 쪽에도 문제인 게 멀쩡히 면담 신청해 놓고 어떻게 취소하나? 그날 그룹 본사는 밤 10시까지 절대 만나지 말라는 전화를 나에게 세 번이나 했다. 독촉 세 번 받고 내가 한참 골치 썩이다 내린 결론은 '아따 호떡집에 불났나? 골치 아프게.' '만나고 안 만났다고 보고하면 그만이지'라는 거였다.
이튿날 김대중 씨를 만났다. 대통령 나온 후보자는 그런 것인가. 15층 복도 전체가 그분 만나려는 사람들로 시장판 이뤘다. 전라도 사람들이 한없이 줄 서서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전라도지만 평소 별로 친하지도 않은 노 회장 안부 전하려고 면담 신청했다 하긴 뭔가 좀 싱거운 거 같아 궁리를 했다. 그 당시 내가 낸 책 한 권 증정하겠다는 구실이었다.
방에 들어가니 정동영 정희경 두 분이 수행하고 있었다. VIIP라고 우리 관리부장은 방에 병풍도 하나 갖다 놓았다. '백화점 사장님이십니다.' 날 데려간 속초 지부장이 소개하자, '서로 인사하세요.' 김대중 씨가 손을 뻗어 배석한 두 사람을 가리킨다. 그래 내가 '아! 이분들은 제가 잘 아는 사람들입니다.' 하고 대답했다. 생판부지 남자가 자기들 앞에서 잘 안다고 하니 당사자들이 더 놀랬을 것이다. 그러나 내 말도 따져보면 틀린 말 아니다. '이분들은 요즘 신문과 TV에 맨날 나오는 분들 아닙니까?' 일동이 전부 웃고 말았다.
밖에는 만나고 싶은 사람들 인산인해다. 바쁜 분인데 우물쭈물할 필요 없어 나는 바로 본론에 들어갔다. '제가 듣기로 선생님은 책을 많이 읽는 어른으로 알고 있습니다. 혹시 지방 출장 가실 때 비행기 기다리는 시간에 보시라고 제가 쓴 책 한 권 올리려고 왔습니다. 동양 고전을 간략히 소개한 책입니다. 저희 노 회장님 안부도 전해 올립니다.'
그러자, 김대중 씨가 책을 펼쳐보더니, '아 출판사가 김영사군요. 김영사 좋은 출판사지요. 곧 내 책도 거기서 한 권 나옵니다.' 그러면서 배석한 사람에게 자기 책 가져오라 해서 즉석 휘호하고 건네준다. 한길사에서 나온 <나의 길, 나의 사상>이란 책이었다.
본인 이름 새겨진 탁상시계와 만년필도 선물한다. 나는 그날 책 하나 주고 책과 만년필, 시계, 셋을 얻었으니 장사 잘 한 셈이다. 김대중 휘호가 새겨진 그 만년필은 훗날 그에게 귀한 물건일 것이라 나에게 살갑게 구는 호남 출신 후배에게 주었다. 지금은 멈추었으나 시계는 쓰레기통에 버리긴엔 그래서 지금 갖고 있다.
강연 잘한다고 해서 김 선생 강연 다 들어보았는데, 말은 청산유수고 군중을 끌고 가는 힘이 있었다. 강연 마치고 돌아갈 때, 나는 내 집 찾아온 손님 가실 때 배웅이나 해야겠다고 백화점 입구에 나갔다가, 김대중 선생한테서 또 다른 선물을 받았다. 수많은 인파 속에 묻혀있던 나를 어떻게 보았던지 모르겠다. 선생이 인파를 헤치고 나에게 다가오더니, 손으로 내 얼굴을 당겨 귓속말을 건넨다. '회장님께 잘 다녀갔다고 안부 전해주시오' 내용은 그거였다. 그러나 나는 그때 정치 9단의 그 제스처가 무엇인지 의미를 몰랐다. 그걸 이튿날 아침에야 깨달았다. 새벽에 대명콘도 골프연습장에서다. 경찰서장 만났더니, '김사장! 사람이 어찌 그럴 수 있소? 자주 만나는 사람끼리....' 이상한 소릴 했다. '아니 서장님 무슨 말씀입니까?' 물으니, '우리 사이에 서로 숨기고 그러지 맙시다. 수사과장한테 어제 김대중 선생과 귓속말한 거 다 보고 받았소.' 한다. 아마 내가 서울의 무슨 대단한 사람인양 착각한 모양이다. 군중 앞에서 정치인 귓속말 하나가 이처럼 약빨 강할 줄 몰랐다. 같이 운동하던 세무서장은 더 놀래버렸다. 그분은 호남 분이다. 행시 합격했으나 백이 없어 지방 세무서 전전하던 그는 당장 큰 백 만난 것이다. 그날 이후 아침밥은 거의 세무서장이 샀다. 그런데 세 사람이 오면 백화점 사장이 물 주지, 세무서장이 물주겠는가. 음식점 주인도 그날 놀래 자빠졌다. 경찰서장, 세무서장, 음식점 주인 태도가 백팔십도 달라져버리자 속초는 나에게 천국이었다. 마침 속초 지청장 지원장은 내 대학 후배다. 속초는 동해와 설악산 경치가 아름답지요? 그곳은 김대중 씨 때문에 거사가 더 술맛 나던 고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