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블로 네루다(Pablo Neruda) 1904∼1973, 칠레 민중시인
1971년 노벨문학상 수상.
『무한한 인간의 시도』, 『열렬한 투석병』, 『지상의 주소』(1931)
1924년 「20편의사랑의 시와 한 편의 절망(絶望)의 노래 」 등
시학詩學 / 파블로 네루다
어둠과 허공 사이, 치장과 처녀 사이,
낯선 심장과 음산한 꿈들을 더불고,
철 이른 창백함, 이마부터 시들어서
내 생명의 하루하루를 여읜 홀아비, 그 성난 상복을 입고,
아, 잠 속이련 듯 마시는, 눈에 안 보이는 물방울들,
떨며 받아들이는 내 주위의 모든 소리에 대하여
난 항상 똑같은 목마름과 똑같은 차가운 열병을 앓는다.
문득 태어나는 귀, 문득 느껴오는, 형언할 수 없는 고뇌,
마치 밤도둑이나 귀신이 나타나는 밤 같은 날들.
거기 나는 응고된 깊은 체적의 겉껍질에 붙어서,
늘 굴욕당한 웨이터처럼, 약간 목쉰 종소리처럼,
낡은 거울처럼, 외딴집의 냄새처럼,
밤이면 고주망태가 되어 돌아오는 손님들을 받는다.
거기는 늘 방바닥에 내동댕이쳐진 옷 냄새와 항상 꽃이 없는,
(아냐 어쩌면 보다 좀 더 덜 비참하게 이야기해서)
그러니까, 사실, 갑자기 내 가슴을 치는 바람,
나의 침실에 굴러떨어진 알 수 없이 영원한 밤들,
끝없는 희생으로 부질없이 불타는 하루하루의 목소리가
나를 안타깝게 슬프게 부른다, 나에게 어떤 예언자적 대답을 요구한다.
거기, 대답 없이 소리쳐 절규하는 사물들의
주먹이 있다, 거기 휴전 없는 싸움 속, 늘 혼미스러운 이름 하나.
시 5
너에게 내 말이 들리도록
내 말소리는 때때로
바닷가 갈매기 발자국처럼
가늘어진다.
가늘디가는 목걸이, 취한 듯 딸랑대는 종소리
포도송이 같은 너의 보드라운 손길을 위한.
나는 나의 말소리를 멀리 바라본다.
내 소리는 이제 나의 것이기 보다 너의 것.
소리는 나의 오랜 고통 위를 담쟁이넝쿨처럼 타고 오른다.
그렇게 젖은 돌담 위를 기어오른다.
이 피투성이 놀이를 만든 죄인은 바로 너.
나의 말들은 나의 어두운 굴속을 빠져나간다.
네가 그 굴을, 그 모든 것을 채운다.
네가 오기 전 그 말들이 지금 너의 공간의 주인이었지.
그 말들은 너보다 더욱 나의 슬픔에 길들여져 있었지.
이제 나는 나의 말소리가 네게 하고 싶은 말을 전하길 바라
네가 내가 원하는 대로 내 말을 알아듣도록.
아직 때때로 고뇌의 바람이 내 말들을 휩쓸어가기도 해.
꿈의 폭풍들이 아직 그 말들을 뒤집어놓기도 해.
나의 고통스러운 목소리 속에서 너는 이상한 소리들을 들을 거야.
오랜 입술들의 울음소리, 오랜 애수의 피눈물.
사랑해다오, 친구여. 버리지 말아다오, 나를
따르라, 친구여, 나와 함께 가자, 이 고뇌의 파도를 타고.
하지만 너의 사랑 빛으로 나의 말소리는 물든다.
너는 모든 것을 가득 채운다, 가득 채운다.
나의 모든 말소리로 하나의 끝없는 목걸이를 만든다
포도송이 같은 너의 보드라운 손길을 위해.
사랑이여 아메리카여(1400)
가발과 연미복 이전
그것들은 강이었다, 대동맥 강물줄기,
그것들은 산맥이었다, 그 민둥한 물결 위
콘도르 독수리나 설원은 움직임이 없어 보였다:
그것은 습기와 숲이었다, 아직 이름 없는
우레, 우주처럼 광활한 평원.
사람은 흙이었다, 옹기였다, 떨리는 진흙 덩이의
눈짓, 점토의 몸짓,
그것은 카리브의 물동이, 치브차의 돌,
제왕의 술잔, 혹은 아라우까나의 규토.
아직 보드라운 핏빛 형상이었다, 하나 그 물기 젖은
수정 무기의 손잡이에는
이 땅의 첫 글자가 쓰여 있었다.
아무도 그 글자를
기억하는 사람은 없었다, 그 후로는:바람이
글자를 잊어버렸다, 물의 언어는
땅에 묻히고, 비밀의 열쇠는 없어졌다
피나 침묵의 홍수에 휩쓸려나갔다.
생명은 없어지지 않았다, 목동의 형제들이여.
그러나 야생장미처럼
숲에 빨간 물 한 방울이 떨어졌다,
그리고 온 땅의 등이 꺼졌다.
나는 여기 그 이야기를 들려주러 나왔다
들소의 평화로부터, 마지막 흙의
두들겨 부서진 모래알까지,
남극의 빛으로 싸인
물거품들 속에서,
베네수엘라의 어두운 평화로부터 흘러내린
짐승의 소굴들 속에서,
나는 당신을 찾았다. 나의 아버님이시여,
구리와 어둠을 산 젊은 투사,
아니면 당신, 한창 자란 풀, 길들여지지 않는 머리칼,
악어 어머니, 무쇠로 만든 비둘기.
나, 진흙탕 속 잉카인은
돌을 만지고 소리쳤다:
누가 나를 기다렸는가? 그리고 텅 빈
수정 방울 한 줌 위에서 주먹을 불끈 쥐었다.
그러나 나는 사뽀떼까의 꽃들 사이를 거닐었다.
빛은 사슴 떼처럼 다정했다.
그리고 어둠은 파란 눈짓이었다.
이름 없는 나의 땅, 아메리카 없는 아메리카,
적도의 젖줄, 진홍의 창,
당신의 향기가 나의 뿌리를 타고
내가 마시던 술잔까지 올라왔다, 내 입에서
아직 태어나지 않은 말의 가장 가는 밑뿌리까지.
양말에 바치는 노래
마루 모리가 나한테 가져왔다
양말/ 한 켤레 / 그건 그녀의 양 치는
손으로 짠 것, / 토끼처럼 / 부드러운 양말 한 켤레
나는 두 발을 / 그 속에 / 넣는다
마치 황혼과 / 양가죽으로/ 짠 / 두 개의 상자 속으로
밀어 넣듯이.
강렬한 양말, / 내 두 발은/ 양털로 만들어진
두 마리 고기, / 금색 실 한 가닥이 / 들어가 있는
남청빛 / 두 마리 기다란 상어, / 두 마리 거대한 검은 새,
두 개의 대포: / 내 두 발은/ 아 거룩한 / 양말들로 하여
이렇게 명예스러워졌느니. / 처음에 / 그것들은
너무 휼륭해서 / 내 발은 도무지 / 두 늙어빠진
소방수처럼 / 거기에 걸맞지 않게 / 보였다, 그
짜인 불에 도무지 / 어울리지 않는 / 소방수,
그 불타는/ 양말에/ 어울리지 않는.
하지만/ 마치 학생들이/ 부나비를
학자들이 / 신성한 책들을/ 모으듯이,
그것들을 보관하고 싶은/ 강한 유혹을
나는 물리쳤다/ 그것들을/ 금으로 된
새장에 / 넣고/ 매일/ 모이와
분홍색 참외 조각을 / 주고 싶은
엄청난 충동을 / 물리쳤다.
아주 희귀한 / 녹색 사슴을
쇠꼬챙이에 꿰어 구워서/ 가책을 느끼며
먹는/ 정글의/ 탐험가들처럼,
나는 두 발을/ 뻗어/ 그 멋진/ 양말을
신고/ 그리고 구두를 신었다.
내 송시(頌詩)의/ 덕목은 이렇다:
아름다운 건 갑절로/ 아름답고
좋은 건 두 배로/ 좋다, 그게
겨울에/ 양털로 만든/ 한 켤레 양말의 일일 때에는.
쏘네트 16
나는 당신ㅡ한줌의 땅을 사랑한다
행성처럼 광대한 초원이 있으니,
나는 다른 별을 갖고 있지 않다. 당신은 내
증가하는 우주의 복사(複寫).
당신의 큰 눈은 사라진 천체에서
내가 아는 유일한 빛 ;
당신 피부는 유성의 줄기처럼
빗속으로 고동친다.
당신 히프는 나한테는 달 ;
당신의 깊은 입과 그 기쁨은 태양 ;
긴 붉은 광선으로 타오르는 당신의 가슴은,
그늘 속의 꿀처럼 불타는 빛.
그리하여 나는 키스하며 당신의 불타는 형상을
가로질러 간다ㅡ잘 짜이고 행성과 같은, 내 비둘기, 나의 지구.
자력의 예술
많이 사랑하고 많이 걷다보니 책이 나온다
입맞춤과 땅이 없으면
손바닥 가득 사람이 없으면
물방울마다 여자가 없으면, 여자와
배고픔과 욕망과 분노와 길이 없으면
아무것도 방패나 종이 될 수 없다:
눈이 없으니 누가 그 눈들을 뜨게 하랴.
수사학의 죽은 입일뿐.
잎가지의 생식기들을 사랑했다
피와 사랑 사이 나의 시들을 파 새겼다,
굳은 땅에 하나의 장미를 일으켜 세웠다,
불과 이슬의 시새움 속에서,
그래서 나는 노래하며 길을 갈 수 있었다.
오 흙이여 기다려다오
오, 태양이여, 되돌려다오, 내게
나의 농부의 길 위에
그 오랜 숲의 비들을,
되돌려다오, 그 향기와
그 하늘로부터 떨어지던 칼들을,
풀밭과 돌멩이의 고적한 평화,
강 언저리의 촉촉함,
떡갈잎 냄새,
가슴처럼 살아 잇는 바람,
아라우까나 대평원의
사람 냄새 없는 무리 사이 뛰놀던 맥박.
흙이여, 너의 그 순연한 선물을 되돌려다오,
너의 뿌리의 숭엄함으로부터
올라온 침묵의 탑을 돌려다오:
나는 내가 아니었던 사람이 다시 되고 싶다,
그 깊은 곳으로부터 돌아갈 실을 배우고 싶다.
모든 자연 사물들 사이
살 수 있는, 살지 않을 수 있는
삶: 무슨 상관이랴
거기, 졸 하나 더, 어두운 돌 하나,
강물이 쓸어갈 순연한 돌 하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