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백 석탄박물관 구경하고서 만항재 오르다 2019.2.23
태백석탄박물관 설립취지
석탄은 우리나라의 유일한 부존 에너지 자원으로서 생활연료 공급과 기간산업의
중추적인 역할로 국가 경제발전에 크게 기여해 왔으나 청정에너지 사용 증대로 그 수요가
급격히 줄어들고 있어 그간의 석탄산업 변천사와 석탄의 역사적 사실들을 한곳에 모아
귀중한 사료가 되도록 하고, 후세들에게 열악한 작업환경 속에서도 산업역군으로서
석탄생산에 종사한 광산근로자들의 업적을 알리고, 석탄산업 전반에 대하여 직접 체험
할수 있는 학습장으로 활용하여 석탄에 대한 기억을 되새기고자 함.
석탄박물관 전경(홈피에서 퍼온사진임)
석탄박물관 입구
권양로 (석탄광산의 상징적 높은 탑)
케이지나 스킾에 실려있는 석탄이나 자재를 권양기등에 감아
올리거나 내리기위한 구조물이다. 일종의 기중기라고나 할까....
전시관 통로
석탄의 생성과정부터 각종 광물, 그리고 광산 장비및 사진전시등
광산 발파용 다니너마이트와 발파준비하는 모습
추억의 구공탄(연탄)
기계로 찍기 이전엔 이렇게 떡메 치듯이 찍어냈다고 한다.
모형이 실감난다^^
기억이 나실테지요^^
9공탄 (초기엔 구멍이 9개 연탄) 19공탄 (구멍이 19개 연탄)
구공탄을 보면서 빛바랜 오랜 추억이 희미하게 떠올려진다.
향수에 젖어보는.....
그래서 인터넷을 뒤져 연탄 사진과 연탄에 관한 詩를 골라 올려본다.
( 아래 시와 사진은 퍼온사진임- 이의제게시 삭제하겠습니다.)
까만 사랑 / 취기 안강로
천년 사랑은
애기가 울면서
보채는 사랑입니다
까만 사랑은
즈믄해를 하루로
천년을 더한 사랑입니다
찰나의 불꽃에
온 겁을 태우는
얼빠진 사랑입니다
까만 사랑을 아십니까
연탄 / 김상현·시인
열아홉 개의 구멍으로 세상을 보면
열아홉 고비의 험한 고갯길 인생행로가 보인다
연탄이 타는 것은 피가 타는 것
연탄은 가난한 사람들의 시름을 태우고
달동네 구들장에서 훨훨 승천한다
때론 상가 마당에 모닥불로 타올라
둘러선 조문객의 쓸쓸한 표정들을
어디론가 가져간다.
열아홉 개의 구멍이 타는 불꽃은
수천 년 땅 속에 갇힌 원한을
고단한 삶의 넋두리와 함께
이생에서 화장이라도 하는 듯한
엄숙한 모습이다.
연탄 / 김종태·시인
흰 연탄이 가벼운 이유는
밤새 정열을 다 뿜었기 때문이다
너에게 묻는다 / 안도현·시인
연탄재 함부로 발로 차지 마라
너는
누구에게 한 번이라도 뜨거운 사람이었느냐?
온몸으로 사랑하고 나면 / 한덩이 재로 쓸쓸히 남는게 두려워
나는 그 누구에게 연탄 한장도 되려하지 못했나보다
하지만 삶이란 나를 산산히 으깨는 길 / 눈내려 세상이 미끄러운 아침에
나 아닌 다른 이가 마음 놓고 / 걸어갈 그 길을 나는 만들고 싶다
새끼줄끝에 매듭을 옭아서 빠지지 않게 하여 낱장으로 연탄을 사서 때던 시절도....
그리고...이런 먹먹한 슬픈 신문기사도 종종 .....
젊은 시절 셋방살이 할적에 연탄가스를 들이마시고 마당으로 기어나와 몽롱한체 허우적거리니
쥔집 아주머니가 신건지(동치미) 를 한사발 떠와 멕여주었던 그런 기억도....
당시에 연탄가스는 소량정도는 보통으로 마시고 살았던것 같다
갱내 작업 사진
광산촌의 금기사항
사북사태 -1980년 4.21일 계엄하에서 발생한 사북 사태는.....
전시관 통로에 사진전
갱도 체험
갱도 안에(지하 탄광) 설치된 사무실
석탄을 채굴하는 모습 ( 한참 지난뒤 상당히 기계화된 시절의 모습같다)
응금처치용 고압산소기
광산기록 사진전 ‘나는 탄광부 김충길이다’(특별전시)
광산기록 사진전 ‘나는 탄광부 김충길이다’
탄광부라는 제2의 직업을 가지고 태백에서 삶을 영위했던 광부 김충길 씨의 삶을 소개하는
이번 사진전은 지역 광산기록 작가인 김재영 작가(한양대교수)와의 협업으로 추진되었다.
광부의 시선으로 담은 삶의 다양한 모습에서 우리의 자화상을 돌아보며, 추억과 감동을
느낄 수 있는 소중한 시간이 될 것으로 기대된다.(사진전 소개글에서)
탄광 매몰사고 사진
(아래글은 성공회대학교 자료에서 옮긴것으로 당시의 탄광촌 실상을 엿볼수있다)
막장인생’이라고 자조하는 탄광노동자인 광부들에게 현실은 캄캄한 막장만큼이나 어두웠다.
호흡조차 곤란한 수백 수천 미터 지하막장에서 진폐증에 시달리며 탄을 캐내도 월 평균 임금은
최저생계비에도 못 미쳤다.
이들의 사택은 6평 남짓한 방 한 칸에 부엌 하나가 전부였다. 시커먼 탄가루를 씻어내려면
꼭 필요한 목욕탕이 없는 것은 물론 따뜻한 물도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보통 수백 미터, 깊게는 수천미터 지하로까지 내려가야 하는 막장 노동 속에서 한해 평균
200명의 광부가 목숨을 잃고 5,000명 이상이 중경상을 입었다. 10명 가운데 1명꼴로 일어나는
막장 사고를 운 좋게 피한다고 하더라도 진·규폐증이 광부들을 기다렸다(하략)
태백석탄박물관을 관람하고 사진전시를 보면서......
열악하고 혹독한 환경에서 살아갈수밖에 없었던 막장인생에 대하여
안타까움과 비애를 공감하며, 짙은 페이소스를 느꼈다.....
당시의 탄광촌 가정을 재현한 모형전시
태백석탄박물관을 뒤로하고
함백산 만항재 오르다
불연 그곳에 가고싶다 하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