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어가기 전에 헤겔의 추종자들 또는 아류들, 그리고 그의 영향을 받은 철학사조를 훑어보자.
우선 헤겔에게 영향을 준 철학은 칸트, 피히테, 그리고 셀링이었다.
ㅇ 칸트 : 졸라 길고, 아직도 이 잉간이 뭔말 했는지 정확히 이해하는 사람이 없어서 생략... 지도 지가 뭔말 했는지 알까 싶다. ㅇ 요한 고틀리프 피히테 : 칸트철학은 본질은 주체 또는 자아가 탐구의 근본적인 문제라는 점이라고 주장. 실천적 인식에 대한 칸트의 사상을 이처럼 해석한 것은 분명히 칸트를 자의적으로 해석한 것임. 그는 물자체의 존재를 부인하고, 세계는 다만 일종의 거대한 주체인 절대자아일 뿐이라고 함. 이런 사상은 나중에 헤겔과 독일 민족주의자들에게 적극 수용됨 ㅇ 프리드리히 폰 셀링 : 그는 독일의 낭만주의와 밀접하게 관련이 있으며, 칸트의 비판철학을 예술에 상당한 중요성을 부여하면서 결합시키고자 하였음. 그는 저서 "선험적 관념론 체계"에서는 피히테의 사상을 따르고 있었으나, 곧 피히테의 사상에 식상함.
헤겔의 사상은 다른 철학자들에 비해 엄청나고 지속적인 영향을 끼쳤는데, 크게 나누면 좌파, 정통, 우파 헤겔주의자가 있고, 이탈리아와 영국에 관념론을 태동시켰으며, 후에 본문에서 다룰 낭만적 반동주의자들도 나왔다.
ㅇ 좌파 헤겔주의자 : 다비드 스트라우스, 청년 헤겔주의자들(포엘바하, 루게, 바우어), 마르크스와 엥겔스(유물론으로의 회귀) ㅇ 정통 헤겔주의자 : 로젠크란츠(비판 없이 헤겔의 체계를 지속시킴), 로체, 지그바르트 ㅇ 우파 헤겔주의자 : 돕, 고셀(헤겔주의와 기독교를 조화시키고자 함.적어도 몰러가 보기엔 택도 없는 짓이었지만, 이명신 강도사는 포기하지 않는다.) ㅇ 이탈리아의 관념론 : 크로체, 겐타일 ㅇ 영국의 관념론 : 신헤겔주의(그린), 브래들리 맥타카트 ㅇ 낭만적 헤겔반대자 : 쇼펜하우어, 폰 하르트만(헤겔과 쇼펜하우어를 조화시키려고 했지만 글쎄...), 키에르케고르, 니체 ㅇ 마르부르크 학파 : 신 칸트주의 형이상학의 재생
헤겔은 인간과 자연, 우주의 비밀을 드러낸다고 주장하면서 방대하고 복합적인 체계를 구성한 19세기 초기의 철학자 중 으뜸이었다.(우웩 ~) 헤겔의 관념론은 이러한 체계의 시대에 독일은 물론 많은 유럽 사상을 지배하였다. 이상하게도 헤겔과 그의 추종자들은 그들의 거대한 체계와 당시 세계의 점점 더 복잡해지는 사회적, 경제적 변동간에 실제적으로 전혀 연관짓지 않았다.(마르크스가 헤겔에 대해 딴지거는 부분이다) 청년 헤겔학파 사람들이 헤겔을 대중화하려고 한 반면에, 쇼펜하우어는 헤겔이 주장했던 것을 모두 단호하게 거부하였다.
"헤겔은 멍청하기 이를 데 없고 희안한 허풍쟁이에 지나지 않는다. (우와 ~~~)
그는 독일 관념론 흐름 전체의 절대적인 반정립(관념론 자체에 대한 반대)으로서 등장하였다. 그는 거대한 체계를 싫어했으며, 단일한 사상을 오히려 선호하였다. 또한 그는 상아탑적인 철학을 거부하였다. 그의 통렬한 비난 문장인 "대학철학론"은 아직도 읽어볼 만 하다고 하던데, 서점에는 구하기 힘들다. 대학도서관에 가면 있을까? 사실 돈주고 사기엔 안 내키고...
그는 헤겔주의자들의 형이상학, 종교철학, 그리고 독일 민족주의를 공격하였다. 무신론자로 자칭하면서 그는 계몽주의, 특히 볼테르를 다시 살펴보았다.
베를린에서 대학 강사로서 잠깐 재직하는 동안에 그는 주저인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를 저술하였는데, 이 책은 처음에는 거의 별다른 영향을 미치지 못하였다. 쇼펜하우어는 칸트로부터 출발하여, "물자체는 의지에 해당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 주장이 철학에 끼친 그의 독특한 공헌이다. 아는 바와 같이, 칸트는 현상세계와 그가 알 수 없는 것이라고 말한 물자체의 세계를 구별하였다. 그러나 우리는 의지의 작용을 통해서 현상세계를 안다고 쇼펜하우어는 주장한다.
육체는 그 실재성이 의지에 머무는 한 현상이며, 육체의 직접적인 앎을 통하여 우리는 의지를 안다.
이렇게 주장한 다음에 그는 다음과 같은 개념을 발전시키고 있다.
ㅇ 의지가 근본적인 것이다. 이성과 감각은 의지로부터 따라나온다. ㅇ 개별적인 의지는 사실은 단 하나인 보편 의지에 불과하다. ㅇ 이러한 보편 의지는 맹목적이고 비이성적이며 악이다. - 그리고 그렇기 때문에 모든 괴로움의 근원이 된다. ㅇ 의지의 부정을 통해서, 즉 자비·청빈·사랑·금식을 통해서 인간은 지혜를 성취할 수 있다.
"마치 우리가 비누 방울을 될 수 있는 한 오래 그리고 크게 불듯이 우리는 쓸데없는 목적을 추구하지요. 그게 곧 터져 버릴 것임을 분명히 알면서도 말이오."
다른 철학자들과 마찬가지로 쇼펜하우어도 이론과 실제간의 차이를 알고 있었다. 그는 잘 먹고 마셨으며, 여자를 희롱하기도 했고, 무례한 경우가 있었는가 하면 탐욕스럽게 굴 때도 있었다. 나이 많은 침모를 계단 아래로 밀어서 심하게 다치게 한 적도 있었다. 그의 여성론은 다음과 같은 점을 주장하고 있다.
"여자가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나 큰 일을 하게 되어 있지 않음을 알려면 여자가 생겨먹은 모습을 그저 쳐다보기만 하면 된다" 이 점이 와따구유 씨! 에이 ~ (YWCA) 아줌마들이 쇼펜하우어에 대해 게거품 물고 덤비는 이유다. 정리해서 말하자면 루소가 주장했던 것처럼 그도 시대의 흐름과 사조의 영향을 벗어나지 못했으며, 여성에 대해 편협한 시각을 갖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여자가 생겨먹은 모습이란 것이 당시의 사고방식 즉, "여자가 배워서 뭘 하냐? 춤 잘 추고, 몸매 빵빵하고, 애만 잘 낳으면 되지"라는 보편의지(?)에 함몰되고 말았던 것이었다.
의지가 최고라는 쇼펜하우어의 사상은 니체, 베르그송, 제임스, 듀이와 같은 철학자들에게 영향을 끼쳤다. 철학 이외의 분야에서는 바그너와 그리고 어쩌면 가장 중요하다고 할 수 있는 프로이트를 포함한 많은 낭만주의적 예술가와 신비주의자들에게 영향을 끼쳤다.
그의 기독교와 성경에 대한 시각을 살펴보자.
"아! 내 마음을 붙들고 늘어지던 유대인의 미신을 이렇게 깨끗이 씻어주다니..."
우파니샤드를 읽고 이렇게 탄성을 내지른 쇼펜하우어는 모든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죄인이라는 말만 듣고 자랐기에 동양의 성선설도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왔을 것이다. 그는 평소 자신의 시각이 범인의 그것을 초월했다고 생각해오다가, 기독교 안에서 모든 것을 보고 판단해 왔다는 것과 함께 그런 시각의 한계를 문득 깨닫게 된 것이다. 하지만, 자신이 참조했던 볼테르처럼 극단적인 기독교 반대 활동은 하지 않았다. 누구처럼 "반대는 않겠지만 믿지도 않겠다"는 식이었다. 그리고, 그의 종교관은 불교나 힌두교와 많이 통한다.
다음은 개독 먹사들이 자주 인용하는 키에르케고르다. 하지만 그의 철학의 진수를 안다면 섣불리 언급해서는 안될 것이다. 물론 순두부 신자들에게는 먹혀들겠지만...
철학적으로 어수선하고 웅성거렸던 19세기를 한 마디로 요약한다면 헤겔과 반헤겔이라는 발로, 또는 관념론과 유물론이라는 말로 설명할 수 있다. 그러나, 덴마크의 사제인 키에르케고르는 이러한 범주 그 어디에고 집어넣기가 어렵다. 어떤 면에서 그는 실존주의의 할아버지라고 불릴 수 있기는 하나 사실상 19세기에는 소속되지 않는다. 그는 냉소적인 측면과 심오한 신앙적 사상가의 측면이 교차하면서 나타났던, 매우 기이한 인물이었는데, 젊은 시절(42살)에 죽고 말았다. 키에르케고르의 주된 공격목표는 헤겔과 헤겔의 추상적인, 일체를 보편화하려는 체계였다.
존재는 개별자와 연관된 범주다. 보편 관념과 연결된 것이 아니고 말이다.(뭔 소리여?)
키에르케고르에게는 헤겔이 모든 실재를 그의 변증법적 실재적 존재라는 그물로 붙잡아서 그 구멍에 잡아넣으려고 한 것으로 비쳤다.(아항~ 이 말이었구나) 키에르케고르로서는 철학은 개별자로부터 출발하여 개체로 끝나는 것이어야 했다. 개별자는 행동하고 선택해야 하는 것이며, 이것이 바로 존재라고 하였고, 진리는 공리나 체계가 아니라 주체성인 것이며 가장 열정적인 내부성찰의 어떤 사용과정에서 재빨리 취하게 되는 객관적 불확실성(?)이라고 하였다.
아주 기이하게도 키에르케고르는 평생동안 기독교인으로 남아있었으며, 또한 위트가 있고 명석했으며 작가와 비평가들을 즐겁게 해주었다. 윤리학에 대한 깊은 관심과 타인을 향한 연민이라는 사상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자신의 약혼자를 향해서는 아주 냉정하게 행동했다. 결과적으로 자신의 철학적 작업이 결혼보다 더 중요하다고 공공연히 선포하였으며, 결국 약혼은 파기되고 말았다. "인생 여정의 단계"에서 그는 여성에 대해 다음과 같이 썼다.
여자는 농담의 차원에서만 올바르게 해석될 수 있다.
키에르케고르는 헤겔의 추상적 관념론을 거부하고 생동감 있는 철학을 신봉하였다.(인생은 뒤돌아서 생각해야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인생은 전진하면서 살아야 한다.) 그가 주장한 신, 영원에 이르는 과정을 살펴봄으로써 그의 사상을 유추할 수 있을 것이다.
처음에 개인은 기지와 관능의 세계를 탐구한다(돈 후앙이 대표적이지. 몰러는 카사노바가 더 좋지만 말야. 어쨋거나 이것만으론 불충분하다.). 하지만 인간은 도덕적 책임을 지닌 세계를 탐구해야 한다(소크라테스? 하지만 이것만으로도 부족하지...). 많은 노고와 공포 등등을 거친 다음에 인간은 주체성의 본질, 즉 일종의 합리적인 자살(?)이나 신앙의 도약이라는 상태에 이름으로써 자신의 운명을 영원성에 내던진다.
(피에쑤)
키에르케고르를 언급하기 전에 개독들에게 그를 섣불리 인용하거나 언급하지 말라고 하였다. 물론 개독들은 위험, 참화, 전쟁, 질병, 공포와 함께 모든 노고를 거쳐서 구원(영원성)받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키에르케고르가 말한 노고와 공포는 개독들의 디디알과는 다르다. 아니 오히려 개독들은 아주 간편하게도 무조건적인 믿음과 기도, 지옥/악마에 대한 공포만 경험(물론 실질적인 공포경험도 아니구)하고서는 영원성에 도달하겠다고 덤비는 공짜심리에 물들어 있으며, 또한 먹사들이 그렇게 유도하고 있다. 신학대에서 아주 유용하게 활용되는 키에르케고르... 에혀~
안티 제위분들은 키에르케고르를 가지구 삽소리 하는 먹사를 보거덩 위에서처럼 살포시, 그러나 깊게 떵침 찌르시기를...
현상학, 실존주의, 그리고 본격적인 여성해방론의 등장
세계를 바라보는 이와 같은 상호 연관된 방법은 주관성 및 그런 주관성의 기술과 관계되어 있다. 현상학은 "경험에 대한 기술적(記述的, descriptive )철학"이라고 불려왔다. 프란츠 브렌타노(의류회사 창시자와 동명이인이다)는 그의 기술 심리학과 함께 현상학파의 아버지로 인정받고 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정신적 과정을 정확히 살펴보아야 한다. 원인과 결과에 관한 모든 가정은 제거되거나 괄호 속에 넣어버려야 한다.
에드문트 후설은 그의 "논리적 탐구"에서 현상학의 기본적 방법을 정립하였다.
1인칭에 집착해야만 한다. 당신 자신의 의식에 관한 지식이야말로 확실한 것이기 때문이다. 무엇이 정신적 과정에 본질적인 것인가를 정확히 알아내고 그 나머지는 버려야 한다. 다시 말해 당신 자신에게서 전제를 없애버리자는 것이다. 그렇다고 이 방법이 경험적인 것은 아니다. 그 방법은 실제적인 대상을 초월하는데 목적이 있다. 즉 경험 그 자체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다. 도대체 뭔 소리여?
생생하고 분명한 것으로 "환원"하는 과정에 의해서 우리는 경험의 본질에 도달한다. 그 다음에 우리는 이와 같은 본질로 이끈 논리적 구조인 정신의 객관적 기능들을 관찰하게 된다.
너무 제1인칭에 집착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문제가 제기되었지만 후설은 "선험적 주관성"에 대해 논의함으로써 극복하였다. 선험적 주관성은 나의 본질과 의미가 상대방과 유사하다고 유추에 의해 증명될 수 있음을 뜻한다.
후설은 의식의 "지향적" 대상을 강조하였다. 이것은 반드시 실제적이나 물질적이지는 않은 대상으로서 사고가 "목표"로 삼는 것이다.
지향성은 모든 의식의 뚜렷한 징표다.
사회학자들은 특히 현상학적 방법을 받아들였다. 후설이 그의 사상을 발전시킴에 따라 당초 후설의 사상이 점점 더 불분명해졌다. 결국 그는 "나"는 알 수 없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이런 회의주의는 현상학으로서는 사실 문제거리다. 만일 우리가 "나"를 알 수 없다면, 누구를 알 수 있는가?
비트겐슈타인이라면 틀림없이, 현상학은 너무 멀리까지 끌어간 언어 게임이라고 주장했을 것이다. 아무튼, 만일 후설이 그처럼 멀리까지 가지는 않았다고 말한다면, 하이데거는 확실히 멀리까지 갔다고 말할 수 있다. 마르틴 하이데거는 현상학자, 실존주의자, 나치, 수다쟁이, 또는 위대한 정신의 소유자 등으로 다양하게 평가되고 있다. 그는 분명히 히틀러의 권력이 상승하는 것을 환영했으며, 후설과도 그가 유태인이라는 이유로 결별하였다. 하이데거는 자신이 현상학자라고 말했지만, 그 이외는 누구나 하이데거를 최초의 무신론적 실존주의자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사람들은 대부분 그가 대단히 난해한 철학자이며, 그의 사상을 요약하기가 거의 불가능하고, 미친 듯이 사변적인 사람이라는 데 동의한다. 그의 철학방법은 분석철학의 엄격한 논리로부터는 엄청나게 떨어져 있다.
"존재와 시간"에서 나는 존재의 의미가 무엇인가를 묻는다. 대답에 대해 걱정할 필요는 없다. 내 사명은 모든 사람들이 질문하도록 만드는 것이니까.
철학으로서가 아니라 소외된 현대인의 관점에서 보면, 하이데거의 저술은 현대의 불안을 분명히 파악하고 있다. 현존재는 "내던져짐"을 경험한다.
그것은 타자에 의해 혼돈된 존재의 발견에 깜짝 놀라는 것이다. 이리하여 불확실성 또는 부조리로 전락해 버리게 된다. 불안과 무의미성이 시작되면서 현존재는 그 자체를 이런 불안을 통해 알 뿐이다. 훌륭한 철학이 늘 그렇듯이 여기에도 해결책은 있다. 현존재가 세계를 향한 관심을 기울이는 노력을 할 때 문제는 해결된다.
금세기의 가장 저명한 철학자인 쟝 폴 사르트르는 후설과 하이데거 사상을 실존주의라고 알려진 일관된 사상형태로 발전시켰다. 소설, 희곡, 정치활동을 통하여 사르트르는 결단의 철학, 자유의 철학에 관심을 가졌다. 그는 철학을 거리로 끌어내고 싶어했다. 그의 사상은 세계 내의 존재에 관한 것이었다. 그의 철학은 모두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는 명제에 바탕을 두고 있다.
국민윤리 시간에 우리는 기껏 "사르트르, 실존주의자,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라는 정도만 암기했다. 실존이 본질에 앞선다는 말이 뭔 말인지, 어떻게 그렇다는 건지는 대학 철학과에 입학해야만 알 수 있다.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는 이 구토를 유발할지도 모르는 명제는 당신을 벽으로 끌고갈 거라고 말할 수 있다. 존재가 있고 그 다음엔 무(無)가 있는데, 무는 존재의 심연에 마치 벌레처럼 똘똘 감겨 있다. 신이라든가 절대정신 같이 존재를 결정하는 그런 것은 없다. 그래서 본질은 없다. 다시 말하면 우리가 먼저 존재하고, 그 다음에 인생의 본질이 뭔가를 찾아야 한다. 그리고 우리가 발견하게 되는 것은 우리 자신과 세계 사이는 텅 비어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존재를 꿰뚫고 있는 무(無)라는 것이다. (하이데거는 이것을 불확실성이라고 하였다) 자유에 이르려면 불안을 느껴야 하듯 진실은 "우리가 자유롭다는 것을 발견했는데 알고 보니 감옥 안에서의 자유더라"는 것과 같다. 인간은 항상 자신의 생인 자유로부터 도망가려고 한다. 인간은 하이데거처럼 결단을 내릴 수 있는 것같이 생각하는 것이다. 우리는 시간의 끝을 잡을 수는 없다.
나쁜 믿음을 지닌 인생을 살면서 자기 자신을 속이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 자기 자신의 자유를 거부하고, 자신으로부터 진리를 은폐하고, 부르주아의 생을 사는 사람들은 나쁜 믿음을 보여준다.
제2차 세계대전과 인간에 대한 인간의 비인도적 현실은 사르트르로 하여금 레지스탕스에 가담하게 만들었지만, 또한 마르크시즘에 대하여 더욱 관심을 갖게 되었다. 사르트르는 결단을 부인하지 않았다. 인간은 자기 자신을 구성하고 있는 것으로부터 항상 무언가를 만들 수 있다고 그는 생각하였다. 그는 항상 실존주의적인 자유와 마르크스의 집단적 투쟁 사상을 조화시키려고 노력하였다. 또한 "피투성이의 막다른 골목"에서 휴머니즘적인 실존주의를 완성하기 위해 존재와 결단간의 변증법을 이용한 "변증법적 이성비판"을 하고자 하였는데, 여기에서 다음과 같은 정치적인 의미를 찾을 수 있다.
오늘날 우리의 자유는 자유롭게 되려고 투쟁하기 위한 자유로운 선택일 뿐이다. 그건 바로 우리의 손을 더럽히는 것을 의미한다.
사르트르는 철학하기 위해 거리로 나섰으며, 실존주의와 마르크시즘간의 논쟁은 구조주의가 도래할 때까지 프랑스의 지성계를 지배하였다. 사르트르, 시몬느 드 보봐르, 메를로 퐁티는 "현대"를 편집했는데, 이는 좌익 잡지로서 이런 논쟁의 중심적 역할을 하였다. 사르트르는 나이가 들면서 정치적으로 더욱 적극성을 띠어 갔으며, 반제국주의와 혁명적 투쟁을 지지하였다. 그는 프란츠 파농이 식민정책을 공격하는 것을 지지했으며, 그의 "대지로부터 버림받은 자들"의 서문을 썼다. 그의 오랜 동료인 드 보봐르와의 계속된 논쟁을 통하여 그는 보다 구체적인 정치 사상을 발전시켰고 여성해방론을 이해하게 되었다.
사르트르가 쓴 "존재와 무"의 문제점은 존재가 사회계약에 의해 어떻게 제약을 받는지에 대해서 아무런 설명도 없다는 것이다. 그가 아무런 문제도 없는 듯이 행동하는 것은 괜찮지만 그의 행동은 사람들에게, 특히 나에게 영향을 끼친다. 자유는 우리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 교묘하다. 나는 이 문제를 해결하려고 노력했다. 이 문제를 소설로 쓰기도 했지만 여전히 중요한 문제로 남았다. 그것은 실존적인 문제이기도 하지만 역사적, 철학적 문제이고, 성과 관련된 문제이다
드 보봐르는 사르트르에게 커다란 영향을 끼쳤으며 실존주의에서 중요한 인물이었다. 그러나 보봐르가 여성해방론에 끼친 영향 때문에 이것이 더 강조되고 기억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녀의 독창적인 책 "제2의 성"(1949)은 여성해방론의 새로운 물결을 일으켰으며, 또한 여성 억압의 역사적 성격, 특성에 관하여 철학이 이해가 부족하였다는 의문을 제기하였다.(이 책에 대한 깊은 이해가 없이 페미니즘을 논하거나 주장하는 것은 위험한 독단에 빠질 수가 있다. 게다가 이 책은 20세기 초반의 관점으로 쓰여진 책이니 이를 감안하고 읽어야 한다.) 소크라테스로부터 사르트르에 이르기까지 여성은 철학에 있어서는 문제로서 부각되지도 않았다. 여성이 인류의 상당수를 차지하고 있는데도 이렇게 된 것은 이상하기조차 한 일이다.
"여자란 무엇인가"하고 질문을 던지는 것은 철학자들로 하여금 그들의 형이상학적인 입장을 난처하게 만들었다. 사르트르는, 결단을 내리고 미지의 것에로 실존적인 '비약'을 하는 그런 자유를 믿고 있었다. "제2의 성"에서 드 보봐르의 요지는, 만일 누구나 이런 자유를 지녔다면 여성에게 가해진 끝없는 억압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겠는가 하는 것이었다. 여성들이 그렇게 선택했는가? 아니면 이러한 잠재적 자유는 특별히 여성에게는 일종의 환상과 같은 것인가? 철학은 모든 문제에 대답을 지니고 있다고 주장해왔지만, 이런 의문은 제기해 본 적도 없었다. 이 문제는 참으로 사라지지 않는 중대한 문제였다. 만일 철학이 여성을 남성과 관련된 '다른 한쪽'이라고 가정하고 따라서 남성에게 종속된 존재라고 본다면, 철학 자체는 철학이 다룬 조건들을 개념화하는데 실패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마치 플라톤이 말한 동굴 속에 갇혀 있는 사람처럼 맹목적인 것이었다.
* 동굴인 : 현상과 실재의 차이를 설명하려고 플라톤이 내세운 비유 모든 사람들이 동굴 속의 사슬에 매어 있다. 죄수들은 그림자밖에 볼 수 없는데 그 그림자들을 실재라고 생각한다. 그중 어떤 사람이 탈출하여 동굴을 떠나 실재세계를 본다. 그 사람은 되돌아오지만 햇빛에 눈이 부셔서 그 전보다 더욱 어리석게 되고 만다.
히파티아의 죽음은 기독교적 도그마에 의한 이교도 처단의 하나일 뿐이었지만 이는 자유사상과 철학의 몰락이며, 반쪽성장의 빌미일 수도 있다. 그녀의 생 이전과 이후의 철학을 보았을 때 그녀가 여성해방론과는 아무 상관이 없을지라도 여성억압과 여성역할무시의 희생자로 상징될 수는 있다. 기독교적 도그마는 철학에 대한 여성의 위치를 깡그리 뭉개버렸다는 것이다. 중세 이후 근대까지도 루소가 역설적으로 지적한 것처럼 교육은 남성 중심적이었고, 여성이 형이상학적인 고찰을 할 기회가 없었다. 기껏해야 "정신에는 성별이 없다"고 말한 메리 울스톤크래프트의 짧은 반동과, 죠르주 상드 정도의 낭만적 도피(불쌍한 쇼팽...)와 반항이 고작이었다.
여자는 농담의 차원에서만 올바르게 해석될 수 있다. - 키에르케고르 여자가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나 큰 일을 할 수 없게 되어 있음을 알려면 여자가 생겨먹은 모습을 그저 쳐다보기만 하면 된다. - 쇼펜하우어 남자는 전쟁을 위해, 여자는 전사의 재창조를 위해 훈련되어야 한다. 그 밖의 것은 다 어리석은 짓이다. - 니체,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中에서
남성적인 가치로 얼룩진 철학이 걸치고 있는 마쵸맨적인 가면을 벗김에 있어서 여성해방론은 철학이 종종 추구해 온 확실성을 분쇄하는데 도움이 되고 있다. 철학의 웅장한 구상과 절대적인 진리들은 지난 수십 년 동안 붕괴되어 왔다. 초기 그리스인들이 추구했던 절대적 '진리'라는 사상 자체가 여러 면에서 공격을 받고 있다. 인공지능, 탈구조주의, 해체주의, 그리고 계몽주의와 이성론적 사상에 대한 비판이 모든 것에 해답을 제시하려는 철학의 야망을 모두 갉아먹고 있다. 철학 전체를 반성해볼 수 있는 전혀 새로운 언어, 여성 언어가 고안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여성해방론자들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