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지 않은 슬픔이 들여다보고 있을 때 / 김기택
급히,
멈춘 전동 휠체어가
갑자기 나타난 계단 내리막길을 굽어보고 있다
어떻게 내려갈까
눈과 목이
계단과 휠체어 바퀴를 번갈아 살펴보고 있다
내려갈 생각을 하기도 전에
심장은 엉덩이에서 쿵쾅쿵쾅 흔들린다
아직 내려가지 않았는데도
머리통과 팔다리는 벌써 굴러가다 넘어지고 있다
계단 모서리에서 미리 튕겨 나간 숨소리는
불규칙한 직각이다
벌떡
일어나 뚜벅뚜벅 걸어 내려가는 발이 보이는
평범한 계단 길
둥근
발바닥이 굴러 내려가려 하면
경사는 가팔라지고 직각은 날카로워지는
울툭불툭 계단 길
계단 지름길을 앞에 두고 되돌아가는 동안
바퀴 소리가
통, 통, 통,
가보지 못한 길을 저 홀로 내려가고 있다
계단 길 내려다보던 눈은 그 자리 그대로 두고
돌고 돌아서 온
평탄한 길
고르지 못한 노면이 가끔 심장을 툭, 툭, 친다
— 시집 『낫이라는 칼』 (문학과지성사, 202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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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기택 시인
1957년 경기 안양 출생. 중앙대학교 영어영문학과 및 경희대학교 대학원 국문과 졸업(박사)
1989년 〈한국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
시집 『사무원』 『소』 『껌』 『갈라진다 갈라진다』 『울음소리만 놔두고 개는 어디로 갔나』 『낫이라는 칼』 등
1995년 김수영 문학상, 2001년 현대문학상, 2004년 이수문학상 및 미당문학상, 2006년 지훈문학상,
2009년 상화시인상, 2022년 대한민국예술원상 문학부문 수상
현 경희사이버대학교 미디어문예창작학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