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완서 ‘시인의 꿈-詩의 쓸모’
“너는 참 착한 아이로구나. 그러나 할아버지가 얻으러 다니는 건 그런 말이 아니란다.”
“그런 말하고 또 다른 말도 있나요?”
“암, 있고말고. 요새 떠다니는 말은 새로 생긴 물건의 이름하고, 그걸 갖고 싶다는 욕심을 위한 말이 전부지. 그러나 시를 위한 말은 그런 물건에 대한 욕심과는 상관없는 마음의 슬픔, 기쁨, 바람 등을 나타내는 말이란다. 얻으러 다녀 보니 그런 말이 어쩌면 그렇게 귀해졌는지. 이 근처엔 거의 없고 저 변두리 평민 아파트 근처에나 조금씩 남아 있는데, 거기도 온종일 헤매야 겨우 한두 마디 얻어 가질 정도로 드물어.”
“그게 언제 모여 시가 되나요?”
“아직 아직 멀었지만, 언젠가는···.”
“사람들이 그걸 읽을까요?”
“아직 아직 멀었지만, 언젠가는···.”
“그걸 읽으면 사람들이 어떻게 달라질까요?”
“너는 지금 궁전 아파트에 살지?”
“네.”
“궁전 아파트 현관의 신발장은 무슨 빛깔이더라?”
“모두 상앗빛이에요. 손잡이는 금빛이고요.”
“지금 궁전 아파트에 사는 사람은 아무도 상앗빛 신발장을 의심하지 않지? 그러나 시를 읽는 사람이 생기면 그걸 의심하는 사람도 생길 거야. 나는 상앗빛을 좋아하나? 아닌데 나는 노랑을 좋아하는데. 그러면서 어느 날 노랑색 페인트를 사다가 신발장을 칠해서 자기만의 신발장을 갖는 사람이 생겨난단 말이다. 물론 파랑 신발장, 빨강 신발장을 찾는 사람도 생겨나지. 그래서 궁전 아파트 신발장이 아닌 제 나름의 신발장을 갖게 되는 거야. 또 어린이 중에서도 어른이 가르쳐 준 놀이 말고 새로운 놀이를 만들어 내는 어린이가 생겨날 테지. 그 어린이는 판판한 아스팔트 밑에는 도대체 뭐가 있을까 하는 호기심을 참지 못해 그것을 파헤쳐 그 속에 숨은 흙을 보고 말 거야. 그래서 그 속에서 몇 년째 잠자던 강아지풀과 명아주와 조리풀과 토끼풀과 민들레의 씨앗을 눈뜨게 하고. 매미의 마지막 애벌레가 허물을 벗고 가로수를 향해 날아오르게 할 거야.”
할아버지의 주름투성이 얼굴이 아이들의 얼굴처럼 더없이 맑아지고 눈은 꿈꾸는 것처럼 한없이 먼 곳을 보고 있습니다.
“할아버지, 이상해요. 할아버지 말씀을 듣고 있으려니까 괜히 가슴이 울렁거려요. 이런 느낌은 처음이에요.”
“아이야. 고맙다. 할아버지가 이제부터 말을 얻어다 시를 써도 늦지는 않겠구나. 시인의 꿈은 가슴이 울렁거리는 사람과 만나는 거란다.”
박완서 <시인의 꿈>에서(창비)
박완서의 단편 <시인의 꿈>은 ‘시인’이 어떤 사람인지조차 알지 못하는 세상을 배경으로 한다. “길이란 길은 모조리 포장되고 집이란 집은 모조리 아파트로 변한 아주 살기 좋은 도시”에 한 소년이 살고 있다. 이 소년은 아파트 광장에서 자동차 비슷한 집 하나를 발견한다. 작은 창으로 들여다보니, 작은 침대와 책 몇 권이 있다. 그 집의 주인은 수염이 하얀 할아버지. 그는 시인이었다.
아파트 사람들은 시인이 사는 이 집을 경계했지만, 소년은 그런 지저분한 곳에 사람이 산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소년은 무슨 이유에선지 그간 보아왔던 넓게 잘 꾸며진 방과 응접실, 깨끗한 서재보다도 이 초라한 집이 마음에 들었다.
어느 날 소년은 몰래 들어간 시인의 집에서 그림책 하나를 발견한다. 여러 종류의 곤충이 가득 그려져 있는 책이다. 곤충을 직접 본 적 없는 소년은 책에 실린 갖가지 곤충이 마냥 신기했다. 소년은 학교에서 다만 인간에게 이로운 곤충과 해로운 곤충 두 가지만을 배운 것이다.
소년은 시인이 어떤 사람인지 알지 못했다. 할아버지 시인에게 시가 무엇이고 시인은 또 어떤 사람인지 묻는다. 시가 노랫말과 같은 것이라는 말에 소년은 반색하며 ‘솔직히 말해서 벙글콘은 아이스크림입니다’ 같은 아이스크림 광고 음악을 말하는 거냐고 묻는다. 그러자 할아버지는 진짜 시가, 시인이 없어졌다고 한숨짓는다. 소년은 시가 왜 없어졌는지 궁금했다. 할아버지 시인은 말했다. “곤충을 이로운 곤충과 해로운 곤충의 두 패로 나누듯이 사람들은 사람이 하는 일도 두 가지로 나누었다. 쓸모 있는 일과 쓸모없는 일로.” 그렇듯 시와 시인은 쓸모없다는 결정이 내려졌고 저절로 도태되고 말았다. 그 가운데 쓸모 있는 시를 쓰려는 시인들은 ‘샴푸는 비단결 샴푸, 엄마의 좋은 친구 비단결’ 같은 노래를 짓기도 했다.
할아버지 시인은 그런 결정은 잘못된 것이라 여긴다. 몸을 잘살게 하는 데 초점이 맞춰진 결정일 뿐, 마음을 잘 살게 하는 점에서 본다면 시는, 시인은 꼭 필요하다. 소년은 할아버지의 말을 잘 이해할 수 없었다. 시가 없어도 불편한 점은 없을 듯했다. 할아버지는 ‘살맛’이라는 말로 설명해 주었다. “살맛은 나야말로 남과 바꿔치기할 수 없는 하나뿐인 나라는 것을 깨닫는 기쁨이고 남들의 삶도 서로 바꿔치기할 수 없는 제 나름의 삶이라는 것을 깨달아 아껴 주고 사랑하는 기쁨”이라고. 시인의 말을 듣던 소년은 어쩐지 가슴이 울렁거리는 듯했다. 그러자 시인은 기뻐 말한다. “이제부터 말을 얻어다 시를 써도 늦지는 않겠구나. 시인의 꿈은 가슴이 울렁거리는 사람과 만나는 거란다.”
시는 잘 다듬어진 언어로 부르는 노래이다. 언어는 문화와 사상을 담아내는 그릇이기도 하다. 물질이 우선되는 시대에 시인의 언어는 너무 느려서 무용해 보인다. 눈에 보이는 것만을 보려 들자면 시는 쓸모없다. 보이지 않는 세계를 보려는 이들이 시인이다. 보이지 않는 것이 보이는 것보다 덜 유용하다고 단정 지을 수 있을까.
출처 : 문학인신문(http://www.munhakin.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