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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년03월08일(일요일) 안동시 [만휴정&묵계서원&안동중앙신시장&임청각&월영교]&예천군 [삼강주막마을] 탐방일정
회비 18,938원 1월23일 국민은행 750602-01-190920 노블레스 클럽 계좌로 송금, 2열2번 좌석 예약
탐방지 : 안동시 [만휴정&묵계서원&안동중앙신시장&임청각&월영교]&예천군 [삼강주막마을]
탐방일 : 2026년03월08일(일요일)
탐방코스 및 탐방 구간별 탐방 소요시간 (총 탐방시간 5시간40분 소요)
08:10~11:50 “노블레스 클럽” 버스로 교대역 13번 출구 앞에서 출발하여 경북 안동시 길안면 묵계하리길 42 번지에 있는 만휴정으로 이동 [3시간 40분, 263.2km]
[불길 속 만휴정 살린 '기적의 천'…1,000℃ 화마도 버틴다
YTN 기사 등록 2025.03.27. 오후 2:44.
경북 의성에서 시작된 대형 산불이 급속히 확산되면서 국가유산에 대한 피해 우려가 커진 가운데, 드라마 '미스터 선샤인' 촬영지로 알려진 안동의 만휴정은 방염포 덕분에 기적적으로 화마를 피한 것으로 확인됐다.
26일 국가유산청은 "당초 소실된 것으로 알려졌던 안동 만휴정 일대를 확인한 결과, 산불 피해를 보지 않은 것으로 파악된다"고 밝혔다. 다만, 인근 소나무에서 그을린 흔적이 발견됐으며, 일부 연기와 잔불은 이날까지도 포착돼 재진화 작업을 이어갔다.
만휴정이 산불에서 피해를 면할 수 있었던 것은 방염포 덕분이었다. 국가유산청은 전날 40여 명의 인력과 함께 만휴정의 기둥과 하단에 방염포를 도포했고, 인근 만휴정 원림에 물을 뿌리는 등의 예방 조치를 취했다.
방염포는 특수 방화 성능을 가진 천으로, 불길을 차단하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 방염포는 1,000도 이상의 열기에서도 10분 동안 버틸 수 있으며, 500~700도에서는 무제한으로 열을 차단할 수 있다. 전문가들은 방염포가 만휴정이 화재를 피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고 평가했다.
이날 오전 현장을 둘러본 박대진 안동시관광협의회 이사는 "내부도 큰 피해가 없는 것으로 확인된다"며 "산불 위험 속에서도 방염포를 덮고 마지막까지 현장을 지키다가 빠져나온 소방대원과 공무원들 덕분에 만휴정을 지킬 수 있었다"며 감사함을 표했다.
또 안동시관광협회 직원들은 아침에 이곳을 찾았다 소실되지 않은 만휴정을 보고 눈물을 흘렸다고 전했다. 만휴정 옆 꽃을 피운 매화나무도 기적적으로 화마를 피했다.
만휴정은 조선시대 문신 김계행이 말년에 지은 정자로,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 촬영지로 유명하다. 만휴정은 2011년에 경상북도 문화유산자료로 지정되었으며, 그 주변 자연과 어우러진 경관이 뛰어난 명소로 많은 관광객이 찾는 곳이다.
한편, 지난 22일 경북 의성에서 시작한 산불로 신라 시대 '천년 고찰' 고운사가 전소되는 등 국가유산 피해도 속출하고 있다. 27일 국가유산청에 따르면 오전 11시 기준으로, 보물로 지정된 의성 고운사 가운루와 연수전 전소를 포함해 민속문화유산 3건과 천연기념물 3건 등 국가지정유산 11건이 산불 피해를 입었다고 밝혔다.
YTN digital 류청희]
11:50~12:20 <미스터션샤인>의 촬영지인 안동 만휴정을 탐방
[만휴정(晩休亭)
조선 전기 문신인 보백당 김계행이 지은 정자로, 경북 안동시 길안면에 위치해 있다. 1986년 경상북도 국가유산자료로 등재되었으며, 2011년에는 안동 만휴정 원림이 명승으로 지정되었다.
조선 전기 문신인 보백당 김계행(金係行, 1431∼1517)이 1500년( 연산군 6)에 지은 정자로 경북 안동시 길안면 묵계하리길 42에 위치해 있다. 김계행은 70세에 관직을 그만두고 고향에 돌아와 ‘느지막이 쉴 수 있는 정자’라는 뜻의 만휴정을 짓고 사색과 독서를 하는 공간으로 사용했다. 정자 앞쪽이 시원하게 트여 있어 계곡과 송암폭포 등 아름다운 자연 경관을 만끽할 수 있다. 만휴정 아래에 놓인 큰 너럭바위에는 '보백당만휴정천석(寶白堂晩休亭泉石·보백당의 만휴정이 자리한 샘가의 돌)'이라는 한문이 쓰여 있다.
만휴정은 1986년 12월 11일 경상북도 국가유산자료로 등재되었으며, 2011년 8월 8일에는 안동 만휴정 원림이 국가지정유산 명승으로 등재되었다.
입장요금
일반 3,000원
단체 (20인 이상) 2,000원
안동 시민 2,000원
초등학생 2,000원]
[<미스터션샤인>에 등장한 안동의 주요 촬영지
안동의 만휴정과 고산정이 바라보이는 강변이다. 특히 주인공 남녀의 감정선이 오가고 성장에 큰 영향을 준 곳이기도 해서 가장 눈길을 끈 명소가 되었다.]
12:20~12:25 “노블레스 클럽” 버스로 안동 만휴정을 출발하여 경북 안동시 길안면 국만리길 70 번지에 있는 묵계서원으로 이동
[5분, 1.1km]
12:25~12:50 묵계서원(默溪書院) 탐방
[묵계서원(默溪書院)
경상북도 안동시 길안면에 있는 조선후기 김계행과 옥고를 추모하기 위해 창건한 서원. 교육시설.
1684년(숙종 10) 서원을 세우고, 1706년(숙종 32) 묘우(廟宇)인 청덕사(淸德祠)를 건립하여 김계행(金係行)과 옥고(玉沽)를 제향하였다.
선현배향과 지방교육의 일익을 담당하여오던 중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1868년(고종 5)에 훼철되었다. 훼철되기 전의 경내건물로는 청덕사(淸德祠), 강당인 입교당(立敎堂)을 비롯하여 극기재(克己齋) · 읍청루(挹淸樓) · 진덕문(進德門) · 신문(神門) · 주소(廚所) 등이 있었다.
그 뒤 1925년 도내 유림이 협력하여 강당 등 일부를 복원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중앙의 마루와 양쪽 협실로 된 강당은 원내의 여러 행사와 유림의 회합 및 학문강론장소로 사용하여왔다.
이 서원에서는 매년 3월 중정(中丁: 두번째 丁日)과 9월 중정에 향사를 지내고 있으며, 제품은 4변(籩) 4두(豆)이다. 묵계서원 및 안동김씨 묵계종택은 1980년 경상북도 민속자료(현, 민속문화유산)로 지정되었으며, 재산으로는 전답 6,000평과 대지 1,000평, 임야 5정보 등이 있다.]
12:50~13:23 “노블레스 클럽” 버스로 묵계서원을 출발하여 경북 안동시 경동로 602 번지에 있는 안동중앙신시장으로 이동
[33분, 29.0km]
[안동중앙신시장
안동 중앙신시장은 경북 북부 최대 규모의 전통시장으로 매달 2일과 7일로 끝나는 날짜에 5일장이 열린다. 중앙신시장 앞뒤 출구로 이어지는 골목마다 이른 새벽부터 인근 농민들이 직접 재배한 농작물을 가지고 오거나 외지에서 온 상인들로 긴 노점이 늘어서 있다. 이처럼 다양한 업종들이 상설 운영을 하고 있으며, 마늘, 고추, 떡, 젓갈류, 수산물, 간고등어, 안동한우, 문어, 제수용품 등 먹거리와 생활용품들이 가득하다.]
13:23~14:20 안동중앙신시장에서 점심식사
14:20~14:28 “노블레스 클럽” 버스로 안동중앙신시장을 출발하여 경북 안동시 임청각길 63 번지에 있는 임청각으로 이동 [8분, 2.9km]
[안동 임청각
소재지 : 경북 안동시 임청각길 63
임청각은 형조좌랑(刑曹佐郞)을 지낸 바 있는 이명이 1519년(조선 중종 14년)에 건립한 주택이며, 상해 임시정부 초대 국무령을 지낸 이상룡의 집이기도 하다.
이 집은 영남산(映南山) 동쪽 기슭에 앉아 낙동강을 바라보는 배산임수한 명당에 남향하여 자리잡고 있다.
중앙선 철도부설 때 50여간의 행랑채와 부속채가 철거되어 현재의 규모로 줄어들기는 하였으나, 길에서 보면 맞담 너머로 보이는 웅장한 모습의 행랑채가 이 집이 소위 말하는 99간집이라는 것을 느끼게 해준다.
이 중 보존상태가 양호하여 보물로 지정된 군자정은 임청각의 별당으로 조선 중기에 지은 ‘丁’자 평면의 누각형 건물이다. 앞면 3칸·옆면 2칸 크기이고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을 한 팔작지붕이다. 중심은 남향의 대청이고, 그 서쪽에 이어서 지은 T자형의 온돌방이 부설되어 있다. 내부는 4개의 방으로 구성되어 있다. 건물 둘레에는 툇마루를 돌려서 난간을 세웠으며, 출입은 두 군데에 마련해 놓은 돌층계를 이용하게 되어 있다.]
14:28~15:20 임청각과 안동법흥사지칠층전탑과 고성이씨 탑동파 종택을 탐방
[3대 아닌 4대가 ‘망한(?)’ 독립운동 가문…“무릎 꿇어 노예 되지 않겠다”
경향신문 기사 수정 2025.09.24. 10:28
이기환 역사 스토리텔러
“‘독립운동하면 3대가 망한다’는 말이 더는 통용될 수 없도록….” 이재명 대통령이 8월14일 ‘광복 80주년, 대통령의 초대’ 행사에서 독립유공자 후손들에게 다짐한 약속이다.
친일파 집안은 떵떵거리며 호의호식하고, 독립투사의 가문은 불우한 삶을 대물림해온 쓰라린 역사를 일컫는 표현이다.
그런데 3대가 아니라 ‘4대가 망한’ 가문이 있다.(좀더 정확하게는 ‘4대가 고초를 겪은’이라는 표현이 맞다.) ‘임청각’(보물)으로 알려진 임시정부 초대 국무령인 석주 이상룡(1858~1932)과 그 가문이다.
한번 꼽아보자. 이상룡 선생(독립장)과 부인 김우락(1854~1933·애족장), 아들 이준형(1875~1942·애국장), 손자 이병화(1906~1952), 동생 이상동(1865~1951·애족장)·이봉희(1868~1937·독립장), 조카 이형국(1883~1931·애족장)·이운형(1892~1972·애족장)·이광민(1895~1945·독립장), 손주 며느리 허은(1909~1997·애족장), 당숙(아버지의 사촌 형제) 이승화(1876~1937·애족장) 등 11명이다.
그 뿐이 아니다. 석주의 종고모부인 의병장 김도화(1825~1921·애국장), 처남 김대락(1845~1914·애족장), 사위 강호석(강남호·1895~1950·애족장), 동생(이상동)의 사위 김태동(1897~1982·대통령 표창), 매부 박경종(1895~1938) 등 인척(혼인으로 맺어진 관계)까지 포함하면 그 숫자는 엄청나다.
■“공자왈 맹자왈은 필요없다”
다른 형제들은 차치하고 석주 이상룡 선생의 직계만 따져보자.
고성 이씨의 종손인 석주는 1858년 임청각에서 태어났다. 퇴계 학통을 계승한 전형적인 유학자 가문에서 수학했다. 바람 앞 촛불처럼 위태로웠던 나라의 운명이 그를 가만 두지 않았다.
1895년 명성황후 시해 및 단발령 반포 이후 각지에서 봉기한 의병을 배후에서 자문·지원했다.
1905년 11월 을사늑약으로 외교권을 빼앗기자 석주는 박경종(매부)와 함께 만거금(萬鋸金·1만 돈꿰미)을 마련하여 가야산에 의병기지를 세우려는 계획을 세웠지만 실패로 돌아간다.(1908)
석주는 ‘공자왈맹자왈’ 만으로는 나라를 구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의 시를 음미해보라.
“오십년간 공맹서(유교 경전)를 읽었는데(五十年看孔孟書)…결국 빈말에 불과하니 어찌 도움이 되랴.(畢竟空言何所補)”(‘우연히 읊다·偶吟·1908)
이후 석주는 대중 교육에서 희망을 찾고, 계몽 운동을 펼치기 시작했다. 협동학교(1907) 및 대한협회 안동지회(1909) 설립이 그것이다.
■처변삼사의 길
하지만 온갖 몸부림도 아랑곳없이 대한제국은 종말을 고했다.(1910년 8월29일)
이런 난국에 지식인들은 어떤 길을 가야 했을까. 유학자이자 항일의병장 유인석(1842~1915)은 당대의 지식인(선비)이 국가의 파국에 맞서 대처하는 세가지 방법을 제시했다.
그것을 ‘처변삼사(處變三事)’라 한다. 그 세 가지는 ‘의병을 일으켜 적을 소탕(거의소청·擧義掃淸)’, ‘은둔·망명으로 유교의 도를 지킴(거지수구·去之守舊)’, ‘목숨을 끊어 지조를 지킴(자정수지·自靖遂志)’이다.(유인석의 <의암집>)
이 중 ‘자정 수지’, 즉 ‘자결 순국’을 택한 이는 최대 90명으로 집계된다. 그 중 11명이 ‘안동 유림’(독립유공자 9명)이었다. 석주는 ‘처변삼사’ 중 어떤 것을 택할 지 깊은 고민에 빠졌던 것 같다.
“내가…아직 결행하지 못한 것은 한 번의 죽음일 뿐…연연하거나 두려운 바가 있어서가 아니다. 철석같은 의지로써 백 번 꺾이더라도 굽히지 않는 태도가 필요할 뿐…어찌 속수무책의 희망 없는 귀신이 될 수 있겠는가.”(‘서사록’)
결국 석주는 만주로 망명해서 독립 운동을 펼칠 결심을 했다. ‘처변삼사’ 중 ‘거지수구’(망명)와 ‘거의소청’(독립운동)이라는 두 길을 택한 것이다. 가산을 처리한 석주는 개인 소유 논밭 일부를 가문의 제사 및 생활비용으로 남겨둔 뒤 ‘노비문서’를 불태워 노비들을 해방시켰다. 석주의 ‘거국음(去國吟·조국을 떠나며 읊는다)’이 심금을 울린다.(1월4일)
“…넋이 나간채 어이없이 나라 빼앗겼네.(無端魂夢擲全甌)…어찌 대장부가 이 한 몸 아끼랴.(焉有英男愛촉루) 잘 있거라 고향 산천 슬퍼 말자(好住鄕園休悵惘) 뒷날에 평정하여 밝은 새날 돌아오리라.(昇平他日復歸留)”
마침내 1월5일과, 15일 고향을 차례로 떠난 석주와 그 일가(50여명)은 27일 압록강을 건넜다. 그때 석주의 나이는 만 53살이었다.
■초대 국무령
석주는 서간도 봉천성 유하현(柳河縣) 삼원보(三源堡) 추가가(鄒家街)로 이동했다.(1911년 4월)
그런 뒤 이곳에 먼저 와있던 이동녕(1869~1940)·이회영(1867~1932) 등과 함께 독립군 기지 개척에 앞장섰다.(이상룡 선생의 세부 활약상은 생략)
뭐니뭐니 해도 석주의 가장 큰 타이틀은 ‘초대 국무령’이었다. 석주는 상해 임시정부가 창조파(새로운 정부 수립 주장)와, 개조파(임시정부 유지)로 나뉘어 갈등했을 때 새로운 지도자로 부각되었다. 1925년 4월 임시정부는 대통령제를 폐지하고 내각책임제(국무령제)를 도입했다.
이때(9월) 초대 국무령으로 추대한 인물이 석주였다. 당시 68살인 석주가 갈등과 분열을 아우를 수 있는 어른으로 꼽힌 것이다. 석주는 그해(1925) 9월 상해에 도착, 초대 국무령으로 공식 취임했다.
지금으로 치면 내각책임제 정부의 총리가 된 것이다. 석주는 다양한 국립운동세력 인사들로 내각을 구성하려 했다. 그러나 임시정부의 분열은 상상 이상이었다.
결국 석주는 5개월 만인 1926년 2월 사임하고 만주로 돌아갔다. 이후 석주는 갈가리 찢겨진 독립운동 단체의 통합을 위해 힘썼다.
그러나 1932년 5월12일 그렇게 원했던 조국의 광복을 보지 못한채 타계하고 말았다. 향년 74세의 나이였다.
석주는 “국권을 회복하기 전까지는 내 유골을 고국에 싣고 가지 말고 우선 이곳에 묻어 두고서 기다려라”는 유언을 남겼다.
■고난의 시작
석주의 아들, 즉 2대는 이준형 선생(애국장)이다.
1911년 당시 만 36살이었던 이준형은 아버지를 따라 일가 50여 명을 이끌고 만주행을 결행했다.
석주 일가가 우여곡절 끝에 목표지(만주 추가가촌)에 도착한 것은 무려 3개월 만인 4월18일이었다.
그때부터 본격적인 고난이 시작되었다. 우선 도착하자마자 살 집과 먹을 거리를 구하는 일부터 시작해야 했다. 사실 석주 일가가 1월에 고향을 떠난 이유가 있었다.
파종 전에 만주에 도착해야 농사기반을 마련할 수 있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러나 언제 농사를 직접 지어본 일이 있었던가.
그런 판국에 부모와 아이들까지 거느린 대가족의 호구지책을 마련해야 했다. 설상가상으로 가뭄까지 겹쳐 첫해부터 농사는 흉작이 되었다.
평생 처음 혹독한 생활고에 시달렸다. 그 사이 이준형은 6살 난 딸과 둘째(아들)까지 잃었다. 그런 상황에서도 석주와 이준형 등 남성들은 독립운동을 위해 밤낮없이 뛰어다녔다. 집안일은 오롯이 여성들의 몫이었다. 오죽하면 석주의 처남(김대락)이 그 딱한 처지를 한탄했다.
“아녀자들을 연고도 없는 산중에 두고…독립 운동에 애쓴다니, 마치…‘자기 밭은 버려두고 남의 밭을 맨다’는 조롱을 받기에 알맞지 않을까.”
김대락은 외조카 이준형과 마주 앉아 통곡했다.
“생질(이준형)이 와서…마주 앉아 울었다…몸 담을 곳조차 없으니 한탄스럽고 한탄스럽다.”(김대락의 <백하일기> 1911년 12월16일)
■지독한 생활고
고향에서 가산을 털어 마련한 자금은 곧 바닥을 드러냈다. 석주는 아들(이준형)을 고향으로 보냈다.(1913) 종가(임청각)를 팔아 독립 및 생활 자금으로 충당하려 했다. 고향에 도착한 이준형은 집안 사람들을 앞세워 임청각의 매각을 시도했다. 실제 매각 대금 2000원에 계약 성사 직전까지 갔다.
그러나 실 매수자가 일본인(오카마 후사지로·小鎌房次郞)이라는 사실이 알려지자 깨지고 말았다.
결국 임청각은 고성 이씨 가문 사람 3명이 1000원에 매수하는 것으로 처리했다. 종중이 ‘매각 형식’을 빌려 독립 자금을 석주 일가에게 건넨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석주의 손주 며느리 허은(이준형의 아들인 이병화의 부인)은 “시아버지(이준형)가 가져온 돈은 500원이며 이 중 일부를 신흥무관학교 운영비로 보탰고 나머지는 생활비로 썼다”고 소개했다.
그 생활비라는게 기막히다. 허은은 “조직원들이 워낙 많아 그들을 먹여 살리는 일 자체도 ‘큰 일(역사·役事)’이었다. 작은 국가 하나를 경영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고 회고했다.
“시조부(이상룡)가 서로군정서 독판(총 책임자)으로 있을 때 가족 수당으로 매달 쌀 서 너 말씩 나오긴 했으나 늘 부족했다…우리가 고모네(이준형 매부 강호석·1895~1950·애족장)에 얹혀살면서…방 한 칸은 군정서 회의하는 방으로 썼다…고모네가 고향(상주)에서 가산을 처분한 돈으로 생계도 꾸리고 정객들 뒷바라지도 했다.”(허은의 <아직도 내 귀엔 서간도 바람소리가>)
■눈 녹듯 사라진 돈
그러나 고초는 더욱 심해졌다. 이준형은 안동에서 종손 임무를 대행하고 있던 사촌동생(이형국)에게 “우리가 다른 일(독립운동) 때문에 농사를 지을 수 없으니 돈 좀 마련해 보내라”는 다급한 편지를 보낸다. 그러나 그런 식으로 보낸 돈은 눈 녹듯 사라졌다. 이준형은 “어렵게 마련한 돈이 달아오른 난로에 떨어진 조각 눈 같다”고 표현했다.
앞서 언급한 석주의 손주 며느리(허은)는 16살 때인 1922년 석주 집안으로 시집왔다. 그 어린 신부의 고초가 얼마나 심했을까.
“…날만 새면 숨쉬는 것부터가 돈이었다. 군자금 독립자금 만드는 일이 가장 급선무…”
“항상 손님은 많았는데 땟거리는 부족…지독한 감기 때문에…내가 부뚜막에서 죽 솥으로 쓰러져 (큰일 날 뻔)…17살 때였다.”
“신흥무관학교에 다니던 남편(이병화·석주의 손자)이 방학 때 집에 왔는데…식량 구하느라 죽을 고생했다. 꾸지도 못하니 굶기를 밥먹듯 했다.”
“아이 낳고 한달 지나 남편(이병화)이 왔다가 훌쩍 떠난 뒤 6년간 한번도 오지 않았다…만주와 조선을 훑고 (독립운동 하러) 다닌다고 했다.”
“집은 여름에 비가 얼마나 새던지…석주 어른(이상룡) 편히 주무시라고 부자(이준형과 이병화)가 마주 앉아 우산을 들고 밤을 지샜다.”
■마루 위의 제비집
그러나 1930년대 만주의 상황은 최악을 치닫고 있었다. 1931년 9월18일 일본이 만주를 침공하여 괴뢰국(만주국)을 세웠다.
절망한 석주는 답답하고 근심하고 분개하여 밤잠을 이루지 못하다가 병석에 누웠다. 석주는 한많은 한마디를 남기고 서란현(舒蘭縣) 소과전자(小鍋甸子)에서 서거했다. 그때가 1932년 5월12일이었다.
“국토가 회복되지 않으면 내 해골을 조국에 싣고 돌아가면 안된다. 이곳에 묻어두고 기다리도록 하라.”
일본의 만주 침략과 만주국 수립 등으로 희망이 사라지자 석주의 아들인 이준형은 가솔을 이끌고 안동으로 돌아왔다.
귀국 직후(1934) 모친(김우락 선생)까지 여윈 이준형에게 또 하나의 고비가 닥쳤다. 경경선(중앙선) 철도 부설로 임청각이 헐릴 위기에 놓인 것이다.
“선대로부터 물려받은 집은 장차 철도 때문에 부서질 판…400년 지켜온 유물이 빈 언덕이 된다면 어찌 마음이 절통하지 않겠습니까만…스스로 하늘을 우러러 길게 탄식만 할 따름….”(이준형의 <동구선생문집> ‘상·조병건에게 답함’)
실제로 조선총독부가 세차례나 측량기사들을 보내 표지판을 세웠다는 이야기가 편지에 등장한다.
불행 중 다행으로 최종 확정된 노선은 애초에 걱정했던 수준은 아니었다. 집 전체가 없어질 것으로 짐작됐지만 결과적으로 본채와 아래채는 그냥 남고, 행랑채와 앞마당이 철도 부지로 들어갔다.
그렇지만 이준형은 “철도가 집에 대들듯 너무 가까워서…‘마루 위의 제비’처럼 위태롭다”고 걱정했다.
■2대의 자결순국
선친(1대 이상룡)이 타계한 후 아들(2대 이준형)의 삶도 막바지로 치닫고 있었다.
이준형은 병고에 시달리면서도 부모의 장례를 모두 치르는 과정에서 형편은 더욱 어려워졌다. 그 와중에도 부친의 유고를 정리했고, 유고의 마무리짓는 유사(遺事·고인의 사적)를 썼다. 그러던 1942년 9월2일 이준형은 자결 순국의 길을 택한다. 결정적인 계기가 있었다고 한다.
이준형은 길에서 고무공을 갖고 놀던 아이들로부터 “이 공은 (일본이) 싱가포르를 점령한 기념으로 학교에서 나누어 주었다”는 말을 들었다. 이 말을 들은 이준형은 “이제 독립할 가망이 없다”고 낙심했다.
그는 유서 1편과 절명시 1수를 남겼다. 그는 유서에 “나의 처사(순국)를…경망스럽다 여길지 모른다. 그러나 의리(捨生取義·목숨을 버리고 의리를 좇음)가 있으니 슬퍼하지 마라”고 썼다.
‘처변삼사’ 가운데 부친(1대)은 ‘거지수구(去之守舊·망명)’와 ‘거의소청(擧義掃淸·의병 거병)’을 따랐다. 여기에 아들(2대)은 ‘거지수구(망명)’→‘거의소청(거병)’→‘자정수지(自靖遂志·자결순국)’를 모두 거친 것이다. 그의 절명시가 심금을 울린다.
“근역(한국)의 새 봄은 멀어 하늘의 뜻이니(天心尙遠春回槿)…귀머거리 벙어리로 구차히 사는 것도 가소롭다.(聾啞苟存還可笑) 원컨대 아버님 따라가 하늘에서 모시련다.(願隨吾父侍云閭)”
■8번 앉은 혼주석
3대(석주의 손자)인 이병화는 어떨까.
이병화는 할아버지(이상룡)-아버지(이준형)을 따라 만주로 망명한 후 신흥무관 학교를 졸업했다. 그는 1921년 압록강을 건너 의주 청성진 경찰주재소를 습격, 순사를 살해한 뒤 귀대했다가 일경에 체포되어 징역7년형을 받았다. 1950년 한국전쟁의 와중에 독립운동으로 인한 옥살이와 고문의 후유증으로 객지(충남 아산)에서 병사했다.
석주의 증손, 즉 4대째에도 고난은 이어진다. 석주의 손자 이병화의 슬하에는 6남1녀가 있었다.
이중 장남~4남 등 4명은 독립운동 집안이라는 이유로 감시받고, 또 교육도 제때 받지 못한채 불우한 나날을 보내다가 젊은 나이에 타계했다.
첫째(도증)와 둘째(세증)은 일제강점기에 아버지와 할아버지가 불령선인(불량하고 위험한 조선인)으로 지목되어 중학교에 진학할 수 없었다. 그중 장남은 해방후 행방불명되었다가 ‘업혀’ 돌아와 시름시름 앓다가 타계했다. 둘째는 6·25전쟁 때 행방불명되었다. 셋째(석증)와 넷째(철증)도 일찍 사망했다.
다섯째(아들·이항증)과 여섯째(딸·이혜정)은 어릴적 보육원에서 자랐다. 이항증씨가 중·고교 야간부를 졸업하고 은행에 입사했을때 ‘독립운동가 유족에, 돈도 없는 위험인물’이라는 이유로 신원보증을 서주려는 사람도 없었다고 한다. 딱한 소식을 듣고 안동 유림 몇 명이 보증을 서주었다고 한다.
형제들 중 막내(이범증)만 농사일을 돕다가 형설지공으로 학업을 계속해 장학생으로 학자금을 받아가며 대학(고려대 사학과)까지 나왔다. 유일한 대학졸업자다.
다섯째 이항증씨의 한마디가 심금을 울린다.
“내 앞의 형님 네 분이 모두 돌아가셨다. 그래서 아버지 없는 조카가 9명이 되었다. 내가 혼주석에 8번 앉아야 했다.”
■무릎 꿇어 종이 되지 않으리
돌이켜보면 망명이라는 간난신고의 길을 겪지 않아도 되었다. 고향 안동에서 종가를 지키며 편히 살 수도 있었다. 그러나 석주는 ‘무려’ 53살의 나이에 압록강을 건넜다. 고성 이씨 일가 50여명도 그 분을 따랐다. 왜 그랬을까. 압록강을 건너며 읊은 시에 해답이 나와 있다.
“이 머리가 쪼개질지언정 이 무릎을 꿇어 종이 되지는 않으리라.(此頭寧可斫 此膝不可奴)”(‘도강’)
석주와 그 일가는 이역만리에서 풍찬노숙하며 독립투쟁에 나섰다. 왜 후회하지 않았겠는가.
그러나 석주는 마음을 다잡았다.
“갑자기 밀려오는 고향생각 억누르기 어렵지만(斗覺鄕懷按住難)…오랫동안 살았던 좋은 곳을 속절없이 버리고(千年福地無端棄) 세파에 몸 던졌으니 편안하기를 바라겠는가.(苦海投身却望安)”(‘새벽에 일어나 입으로 읊조려 분서 어른에게 보이다’ 2수)
따져보니 석주 가문을 두고 “독립운동 하니 3대, 아니 4대가 망했다”는 표현을 쓰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다. 석주 가문이야말로 천고에 빛날 ‘으뜸 명문가문’이라 칭송할 수 있겠다.
이상룡 가문을 ‘명문 가문’으로 평가할지, ‘4대가 망한 가문’으로 치부할 지는 온전히 후손들의 몫이 아닐까. 참 초대 임시정부 국무령을 지냈고, 가문 전체를 독립운동으로 이끈 이상룡 선생이 3등급(독립장)의 대우를 받고 있다. 그분의 이름에 걸맞지않은 서훈 등급이 아닐까. 마침 올해가 이상룡 선생의 국무령 취임 100주년 되는 해다.
(이 기사를 위해 김희곤 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박물관장과 김호태 국무령이상룡선생기념사업회, 이범증 전 중앙중학교장, 김양균 서울시 문화본부 문화유산보존과 문화유산연구팀장이 도움말과 자료를 제공했습니다.) 이기환 히스토리텔러 lkh0745@naver.com
<참고자료>
이항증, <나는 임청각의 아들이다>, 디플랜네트워크, 2024
허은 구술, 변창애 기록, <아직도 내 귀엔 서간도 바람소리가-독립투사 이상룡 선생 손부 허은 회고록>. 민족문제연구소, 2010
김희곤, ‘이준형의 독립운동과 임청각의 수난’, <한국독립운동사연구> 63권,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2018
서울역사박물관, <국무령 이상룡과 임청각-나라 위한 얼과 글>(특별전 도록), 2025
호광수, ‘석주 이상룡의 망명 한시 텍스트와 상황성’, <중국인문과학> 31권, 중국인문학회, 2005
이상룡, <석주유고>, 석주이상룡기념사업회 편, 1996
이준형, <동구유고>, 석주이상룡기념사업회 편, 1996]
[안동법흥사지 칠층전탑
안동 법흥사지 칠층전탑은 국내에서 가장 크고 오래된 통일신라시대 칠층전탑으로 높이는 17m, 기단부 7.5m이다. 이 일대의 지명을 법흥리라 부르고 있는 것으로 미루어 통일신라시대에 창건되었다는 법흥사(法興寺)에 세워진 전탑으로 추정된다. 이 탑은 1487년(성종 18)에 개축된 바 있다. 기단(基壇)은 단층에 평면은 방형이고 현재는 지표에 팔부중상(八部衆像) 또는 사천왕상(四天王像)을 양각한 화강석 판석을 1면에 6매씩 세우고 남면 중앙에는 계단을 설치하였다. 팔부중상이나 사천왕상들의 조각수법으로 보아 서로 제작연대에 차이가 있을 뿐 아니라 배치순서도 무질서하다. 또한 기단상면은 비스듬히 둥글게 시멘트를 칠하여 어느 정도 원형이 보존되어 있는지 의문이다. 그 이유는 단층기단 측면에 이렇게 많은 조상(彫像)을 배치한 예가 없기 때문이다. 칠층전탑의 구조는 탑신부(塔身部)는 각 층을 길이 약 28㎝, 너비 약 14㎝, 두께 약 6㎝의 진회색의 무늬 없는 전돌로 어긋나게 쌓았다. 초층옥신은 매우 높고 남면 중앙 하반부에 화강석으로 테를 둘러 작은 감실(龕室)을 개설하였다. 내부는 위를 방추형으로 줄여 1면 48㎝의 방형 구멍이 정상에 나 있어 찰주공(擦柱孔)으로 보인다. 2층 옥신은 초층옥신의 높이에 비하여 약 4분의 1로 높이가 급격히 줄었을 뿐 3층 이상의 체감률은 심하지 않아 7층이라는 높이에도 불구하고 전체적으로 안정감이 있다. 옥개석(屋蓋石)은 전탑 특유의 형태로서 처마 상하에 층단이 나타나며 처마는 수평이고 각 층 옥개의 너비는 석탑에 비하여 현저히 감축되었다. 밑의 받침 수는 초층부터 9단·8단·7단·6단·5단·3단이고, 옥개 상면의 층단 수는 초층부터 12단·10 단· 9단·8단·7단·6단·5단으로 상층으로 갈수록 차츰 체감되었다. 현재 낙수면에는 극히 일부에 기와를 입혔을 것으로 보이며 전탑에 앞서 목탑이 존재하였고 전 탑은 목탑을 모방한 것임을 보여준다. 상륜부(相輪部)는 현재 노반(露盤)만이 남아 있으나 영가지(永嘉誌)에 기록된 ‘부동오이(府東五里)’에 있다는 ‘법흥사전탑(法興寺塼塔)’이 이 전탑으로 추정되고 있는데, 법흥사전탑에 관하여 ‘상유금동지식이고철면납관주성객사소용집물(上有金銅之飾 李股撤面納官鑄成客舍所用什物)’이라는 기록이 있어 원래는 금동 상륜부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고성이씨 탑동파 종택
안동 영남산의 동쪽 기슭에 작은 계곡을 끼고 있는 넓은 대지에 자리한 옛집이다. 현 소유자의 11대 조상인 이후식(1653∼1714)이 조선 숙종 때 안채를 짓고 이어 사랑채를 짓다가 완성하지 못한 것을, 손자 이원미가 마저 짓고 대청인 ‘영모당’도 지었다. 대청에서 북쪽으로 약간 떨어진 곳에 있는 ‘북정(北亭)’은 영조 51년(1775)에 지어졌다. 순조 24년(1824)에 대수리를 하였고, 1991년에는 안채의 정침을 고쳐 지었다. 잡석으로 높이 쌓은 축대 위에 지어진 중문간을 들어서면 사각형의 안마당이 나오고 이를 둘러싸고 비교적 큰 규모의 안채가 있다. 안채의 왼편에서 앞쪽으로 사랑채가 있는데, 마루방에 ‘정우재’라는 현판이 걸려있다. 대청은 앞에 넓은 연못이 있는 별당건물로 ‘영모당’의 현판이 있다. 북정은 서쪽에 흐르는 계곡물을 향하여 배치된 ‘一’자형의 정자이다. 안채의 오른쪽에는 사당이 있다. 조선 중기 양반집의 요소를 두루 갖추고 있는 주택으로 주변의 자연환경과 건물을 잘 조화시킨 산간저택이다. 또한 독특한 구조와 수법·전통양식이 잘 보존되어 있어 전통주택연구의 중요한 자료이다. (출처 : 국가유산청 홈페이지)]
15:20~15:25 “노블레스 클럽” 버스로 임청각을 출발하여 경북 안동시 석주로 203 번지에 있는 월영교로 이동 [5분, 2.5km]
15:25~16:20 월영교와 월영대와 안동 석빙고와 남반고택을 탐방
[월영교
월영교란 명칭은 댐 건설로 수몰된 월영대가 이곳으로 오게된 인연과 월곡면, 음달골의 지명을 참고하여 지어지게 되었다. 낙동강을 감싸듯 하는 산세와 댐으로 이루어진 울타리 같은 지형은 밤하늘에 뜬 달을 마음속에 파고들게 한다. 월영교는 이런 자연 풍광을 드러내는 조형물이지만, 그보다 이 지역에 살았던 이응태 부부의 아름답고 숭고한 사랑을 오래도록 기념하고자 했다. 먼저 간 남편을 위해 아내의 머리카락으로 만든 한 켤레 미투리 모양을 이 다리 모습에 담았다.
◎ 한류의 매력을 만나는 여행 정보 - 예능 <나는 솔로>
16기 영식, 현숙이 한복을 입고 산책을 즐기던 장소다. 야간 조명으로 한층 로맨틱해진 분위기 덕분인지, 두 사람은 상대방을 향한 자신의 마음을 다시 한 번 확신했다. 영식, 현숙처럼 달밤 산책을 즐겨도 좋지만, 호수 위를 유유히 떠다니는 문보트를 타고 강 위에서 월영교 풍경을 감상하면 특별한 추억을 남길 수 있다.]
[안동 석빙고
석빙고는 얼음을 저장하기 위해 돌을 쌓아 만든 창고이다. 특히 이 석빙고는 낙동강에서 많이 잡히는 은어를 국왕에게 올리기 위해 만들어진 것으로, 조선 영조 13년(1737)에 지어졌다. 형태는 동·서로 흐르는 낙동강 기슭의 넓은 땅에 강줄기를 향하여 남북으로 길게 누워 있으며, 입구는 특이하게 북쪽에 옆으로 내었다. 안으로 계단을 따라 들어가면 밑바닥은 경사져 있으며, 중앙에는 물이 강으로 흘러가도록 만든 배수로가 있다. 천장은 길고 크게 다듬은 돌들을 무지개모양으로 틀어 올린 4개의 홍예(虹霓)를 세워 무게를 지탱하도록 하고, 각 홍예 사이는 긴 돌들을 가로로 채워 마무리하였다. 천장의 곳곳에는 환기구멍을 두었는데, 이는 안의 기온을 조절하기 위하여 설치한 것으로 바깥까지 연결하였다. 전체적으로 규모는 큰 편은 아니나 보존상태는 양호하다. 특히 석빙고는 그 위치가 매우 중요한데, 안동댐 건설로 수몰될 위기에 처하여 지금은 본래의 위치보다 높은 곳으로 옮겨왔다. 이전에는 바로 옆에 강이 흘러서 얼음을 운반하기가 아주 쉬웠을 것으로 보인다.]
[남반고택(南沜古宅)
안동댐 야외민속촌 소재 / 안동시 문화유산 제79호
이 집은 원 소유자인 이필구씨의 집안이 5대에 걸쳐 살아오던 집으로 이만형선생의 구택이다. 이 집은 건축 당시에 이만형 선생이 홍문관교리의 벼슬을 지냈기 때문에 택호를 교리댁(校理宅)이라 하며, 선생의 옛집이므로 남반구거(南沜舊居)라고도 한다.
안동댐 건설로 수몰된 도산면 의촌동에서 1976년 이곳으로 이건하였다.
이만형(李晩瀅, 1825~?)
선생은 조선후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진성(眞城)이며 자는 양수(揚叟), 호는 남반(南沜)이다. 퇴계 선생의 11대손으로 예안에서 출생하였으며, 1855년(철종 6) 식년시병과에 급제하였다. 1877년(고종 14) 통훈대부에 올라 홍문관교리와 지제교, 경연시강관, 춘추관기주관 등의 벼슬을 역임하였다.]
16:20~17:14 “노블레스 클럽” 버스로 월영교를 출발하여 경북 예천군 풍양면 삼강리길 17 번지에 있는 삼강주막마을로 이동 [54분, 61.0km]
[삼강주막마을 — 나루터의 역사와 정취가 깃든 공간
소재지 : 경북 예천군 풍양면 삼강리길 17
풍양면에 위치한 삼강주막마을은 낙동강, 내성천, 영강의 세 물줄기가 만나는 삼강나루터에 자리한다. 이곳은 1900년대 초 보부상과 사공들에게 숙식과 요기를 제공하던 주막을 복원한 곳으로, 옛 시대의 풍경을 고스란히 간직한다. 주막 뒤편에는 수령 약 500년의 회화나무가 굳건히 서 있어 마을의 역사를 묵묵히 증명한다. 강변을 따라 걷다 보면 나루터의 바람 소리 속에 옛 사람들의 이야기가 들리는 듯하다.
출처 : 이코노미사이언스(https://www.e-science.co.kr)]
17:14~17:30 삼강주막마을 탐방
[삼강주막마을
예천에 속한 삼강에서 내성천과 낙동강, 금천이 만난다. 강원도 황지 연못에서 발원하는 낙동강이 안동댐을 거쳐 삼강나루에 도착하고,봉화에서 발원한 내성천이 회룡포를 휘감아 삼강나루에 모이며 문경에서 발원하는 금천이 구불구불 회돌아 삼강나루 앞에서 서로 몸을 섞는다. 삼강나루터에 자리잡은 삼강주막은 낙동강 강줄기1300리에 남은 마지막 주막이다. 주막은 삼강주막마을 부녀회에서 운영하며 옛 주막의 전통을 잇고 있다.
삼강나루터는 경남 김해에서 올라오는 소금배가 안동까지 가기 전 쉬어가는 곳이자 문경새재를 넘어 서울로 가기위해 반드시 거쳐야 했던 관문이었다. 삼강주막은 이 나루를 오가는 길손들에게 허기를 면하게 해주고, 보부상들의 잠자리로, 시인묵객들의 흥을 돋우는 장소로 이용돼 온 유일한 조선시대 주막이다.
세월이 흘러 소금배가 올라오지 않고 사람을 건네주던 나룻배마저 없어지자 한 때 네 개나 있던 삼강나루의 주막이 다 사라졌지만, ‘마지막 주모 유옥연 할머니가 명맥을 유지해 왔다. 유할머니는 6·25때 남편을 잃고4남매 키우기 위해 주모를 시작해 60년간 자리를 지켜왔다. 그리고 일을 그만둔 지 한 달 후, 2005년10월88세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주모가 떠나자 주막마저 사라질 위기에 놓였다. 다행히 경북도에서 1900년대 지어진 주막 건물을 민속자료(제304호)로 지정하고 복원했고, 삼강주막마을에서 운영하면서 옛 주막은 살아남았다.
올 가을은 삼강주막에 들러 호기롭게 외쳐보자.
"주모 술 한 상이요~"]
17:30~20:30 “노블레스 클럽” 버스로 삼강주막마을을 출발하여 서울 교대역으로 귀경 [3시간, 191.8km]
만휴정 지도
안동 묵계서원 지도
안동중앙신시장 지도
안동 임청각 지도
안동 월영교 지도
예천 삼강주막마을 지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