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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이보세상 원문보기 글쓴이: 이보
농업과 일상의 경제학을 완성한 학자(1764~1845)
조선 중반 이후 권력을 좌지우지한 사림세력은 대개 지방에 본거지를 두고 있었다. 예를 들어 이황은 안동, 조식은 합천, 송시열은 괴산(옥천) 일대를 근거지로 삼아 학문을 닦고 제자를 기르며 정치활동을 했다. 이 때문에 사림을 일컬어 재지사림(在地士林ㆍ영남사람, 근기사림, 호남사림 등)이라고도 하다. 이들은 중앙관직에 있을 때는 도성에 머물다가 관직에서 물러나면 즉시 자신의 본거지로 돌아갔다.
그런데 이들과 다르게 누대에 걸쳐 서울에 살면서 중앙 액심 관직에 등용되어 권력과 부를 동시에 거머쥐었던 양반 사대부들이 있었다. 경주 김씨, 반남 박씨, 풍산 홍씨, 달성 서씨 등이 그들이다. 역사학자들은 이 가문들을 '경화거족(京華巨族)'이라고 부른다. 이들은 재지사림과 다른 독특한 학풍과 세련되고 수준 높은 문화를 갖추고 있었다. 특히 사제관계를 통해 학문과 사상을 전수했던 재지사림과 다르게 이들은 가학(家學)을 통해 학문을 다지고 사상을 형성했다. 18~19세기에 홍석주, 홍길주 같은 당대 최고의 문장가를 배출한 풍산 홍씨가 '문장학'을 가학으로 삼았다면 서명응, 서호수를 배출한 달성 서씨는 '농학'을 가학으로 전수했다.
19세기 들어와 동아시아의 농서들을 총망라한 <임원경제지(林園經濟志)>를 저술하여 조선의 환경과 제도에 맞는 '농업경제학'을 구축한 풍석 서유구는 바로 '농학'을 가학으로 전수한 달성 서씨 가문이다. 서명응은 서유구의 할아버지이고, 서호수는 그의 아버지이다. 서유구의 가문은 정조 때 최고의 영광을 누렸다. 서명응은 홍문관과 예문관의 대제학을 지내고 규장각 창설을 주도한 당대 최고의 학자였다. 서호수 역시 규장각 직제학의 자리에 있으면서 여러 국가적 편찬사업에 주도적인 역할을 한 학자 관료였다. 정조시대의 국가 싱크탱크였던 규장각의 창설과 정비는 이들 부자의 손에 의해 이루어졌다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니다. 또한 이 두 사람은 모두 우리나라 농서의 고전이라 부를 만한 책들을 지어 남겼는데, 서명응의 <고사신서(攷事新書)> '본사(本事)'와 서호수의 <해동농서(海東農書)>가 바로 그것이다.
특히 서유구는 할아버지인 서명응이 말년에 저술하고 편찬한 서적의 집필 작업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했으며 <고사신서> '본사'는 함께 만든 책이나 다름없었다. 이때 서유구는 농학의 핵심을 익힐 수 있는 기회를 얻을 수 있었다.; 서호수가 저술한 <해동농서>와 이때의 서적출간 작업은 훗날 서유구가 완성한 '농업경제학'의 기본바탕을 이루게 된다. <고사신서>나 <해동농서>는 특별히 우리나라의 농학을 중국의 그것보다 우선적으로 이해할 것을 강조했다. 그러므로 서유구가 우리 현살과 환경에 맞는 '농업경제학'을 완성해 나가는 데 커다란 영향을 줄 수 있었다.
중국의 지식과 문물, 제도를 맏아들일 때 반드시 우리나라의 현실과 환경에 맞게 적용한다는 것이 달설 서씨 가학의 특성이다. 이 때문에 서씨 가문은 당대에 비배적이었던 주자성리학의 시각에서 벗어나 실학적인 가풍을 갖출 수 있었다. 서명응은 당시 북학파 학자들이 주창한 실학에 적극적인 지지와 찬사를 보냈다. 1782(정조 6)년에 그가 박제가의 <북학의(北學議)>에 붙인 '서문'을 보자.
「이 책에서는 규격에 대해 상세하게 기술하고 있다. 그리고 제작법에 대한 규명이 아주 명확하고 뚜렷하다. 더욱이 뜻을 같이하는 동료의 의견과 해석까지 덧붙였다. 한번 책을 펼쳐서 읽다 보면 보면, 그 내용을 현실에 적용하여 시행할 만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아! 박제가의 마음 씀씀이가 이렇게도 치밀하고 진지하단 말인가! -<북학의> '서문'」
이렇듯 우리나아의 현실과 환경에 맞는 실용적 학문을 강조하는 가풍 덕분에 서유구는 일찍부터 '실학의 대가'로 성장할 수 있는 자질과 능력을 갖출 수 있었다.
농업과 일상의 경제학을 집대성
경화거족의 자손답게 서유구는 20대 후반의 나이에 문과에 급제한 후 출세가도를 달렸다. 이때 그는 정조의 어명을 좇아 농업에 관한 독자적인 견해를 내옿았다. '수리시설과 농기구의 개량, 농서의 편찬과 보급, 한전론에 의한 토지제도 개혁'이 그것이다. 그러나 이런 견해는 앞선 시대의 학자였던 이익이나 박지원 등이 내놓은 농업개혁론의 번주를 벗어나지 못했다. 이전 시대의 경제학자들과 어깨를 겨루고도 남을 만한 대학자로서의 독창적인 면모를 보여주지 못했던 것이다. 그런데 아이러니컬하게도 그가 '조선 경제학의 대가'로 거듭나게 되는 계기는 정치적 불행과 집안의 몰락으로부터 찾아왔다.
서유구 집안의 정치적 후원자나 다름없었던 정조가 급서한 지 6년째되는 1806년(나이 44세)에 당시 서씨 가문을 이끌었던 작은 아버지 서형수가 '김달순의 옥사 사건'에 연루되어 귀양을 가게된다. 할아버지 서명응은 1787년에, 아버지 서호수는 1799년에 이미 사망했기 때문에 집안의 옛 영광을 회복할 희망은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었다.
영광은커녕 자칫 세도권력에 의해 화를 입을 수도 있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서유구는 스스로 홍문관 부제학 자리에서 물러나 은둔 생활에 들어갔다. 이때부터 1824년 조정에 복귀할 때까지 무려 18년 동안 이곳저곳을 옮겨 다니면서 생계를 꾸려나가야 했다. 경화거족의 신분에서 직접 논밭을 갈고 나무를 하면서 먹고 살아야 하는 비참한 처지로 전락한 것이다. 그렇다면 너무 갑작스럽게 찾아온 정치적 불행과 가문의 몰락 앞에서 서유구는 어떻게 처신했을까?
우리나라 사람치고 다산 장약용이 유배생활 18년(1801~1818) 동안 이룩한 '거대한 학문적 성과'에 대해 모르는 이는 거의 없을 것이다. 그런데 비슷한 시기(1806~1824)와 동일한 기간 동안 서유구가 성취한 거대한 학문적 성과에 대해 아는 사람은 별로 없다. 더욱이 정약용이 남긴 저술은 거의 모두 국역되어 일반 독자들도 쉽게 접할 수 있는 반면에 서유구의 저술은 국역된 것이 거의 없는 실정이다.
지금부터 서유구가 18년 은둔생활 동안 쌓아놓은 실학(경제학)의 거대한 봉우리로 올라가 보자.
서유구는 18년 동안 여섯 차례나 거처를 옮기는 어려움 속에서도 유일하게 아등 서우보의 도움을 받아 무려 113권 52책, 250만 자에 달하는 <임원경제지>를 저술햇다. 그가 이토록 방대한 서적을 저술하는 작업에 매달렸던 까닭은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할아버지 서명응 때부터 3대째 내려오는 가학인 '조선의 농업경제학'과 더불어 "향촌과 시골 마을에 사는 사람들에게 반드시 필요한 일", 즉 농사와 의식주 등 일상의 경제생활에 필요한 실용의 학문을 집대성하여 완성하겠다는 확고한 의지 때문이었다.
「사람이 살아가는 데는 나아가 벼슬하고 물러나 머무는 두 가지 길이있다. 세상에 나아갈 벼슬할 때는 백성에게 혜택을 주어야 하고 물러나 머물 때는 스스로 의식주에 힘쓰고 뜻을 길러야 한다. 세상을 다스리기 위해서는 정치와 교화가 필요하다. 때문에 그에 관한 책은 헤아릴 수 없이 많다. 그러나 향촌으로 물러나 머물면서 자신의 뜻과 생업을 돌볼 수 있는 서적은 거의 없다. 우리나라에서는 겨우 <산림경제> 한 권을 찾아볼 수 있을 뿐이다. 그러나 이 책도 수집한 정보나 자료가 충분하지 못하다. 이에 나는 한촌과 시골 마을에 널리 흩어져 있는 모든 서적을 두루 모아 책을 저술하기로 했다. -<임원경제지> '예언'」
서유구는 여기에서 모든 서적을 두루 모아 책을 저술했다고 했다. 그럼 실제로 그가 모아 참고하고 인용한 서적의 분량은 어느 정도였을까? 그가 <임원경제지>에 인용하고 있는 서적은 900여 종이지만 이 책을 저술, 편찬하기 위해 참고한 서적은 수천 종애 달했다. 그렇다면 가문이 몰락했던 서유구가 어떻게 이토록 엄청난 규모의 서적을 고장하고 저술, 편찬활동에 활용할 수 있었을까?
경화거족들은 경제력과 더불어 높은 학식과 문화수준을 갖춘 덕분에 서화나 골동품은 물론 각종 서적 수집에도 열을 올렸다. 특히 서유구의 집안은 항아버지 서명응과 아버지 서호수 때부터 장서가로 명성을 날리고 있었다. 이들은 청나라 사신행 당시 엄청난 규모의 책들을 구입해 돌아왔다.
서명응은 1755년과 1769년 두 차례 청나라를 다녀왔다. 그리고 두 번째 청나라 여행길에서는 천문학과 역법 등 중국과 서양의 과학기술에 관련된 서적을 포함해 5백여 권에 달하는 책을 가져왔다. 당시 조선 최고의 천문학자였던 황윤석이 서명응의 집에서 책을 빌려 갈 정도로 이 집안은 최신 정보와 지식을 담은 귀중한 책들을 많이 보관하고 있었다.
서호수 역시 1776(정조 1)년과 1790년 두 차례 청나라에 다녀왔다. 그는 특별히 학자 군주였던 정조의 특명까지 받아 서적을 구입하기도 했는데, 임금의 명령을 수행함과 동시에 자신과 집안사람에게 필요한 수많은 책들을 함께 가져왔다. 장서가 집안의 학풍 속에서 성장한 탓에 서유구 역시 어렸을 때부터 즐겨 책을 모으는 습관을 갖고 잇었다.
이렇게 수집된 장서 수천 권이 <임원경제지>를 저술, 편찬할 때 '학문의 저수지' 역할을 한 것이다. 더불어 1860년 홍문관 부제학을 사퇴하기 전까지 서유궁의 관료생활은 대부분 서적의 편찬과 교열 등 학술과 관련되어 있었다. 또한 그는 규장각에서 생활하는 동안 풍부한 책들과 자료들을 마음껏 열람하면서 지식의 폭을 엄청나게 넓힐 수 있었다. 이때 서유구는 조선과 중국은 물론 일본, 더 나아가 서양의 각종 지식과 학문까지 종합적으로 흡수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장서가 집안의 학풍과 높은 학문적 식견을 길러준 관료생활 덕분에 가문의 몰락과 온갖 간난 속에서도 조선 최고의 '농업과 일상생활의 경제학' 서적인 <임원경제지?가 탄생할 수 있었다. 물론 가학과 향촌의 일상에 필요한 '실용의 학문'을 집대성하겠다는 서유구의 확고한 의지가 원동력이 되었음은 말할 나위가 없다.
농업과 일상의 경제학을 위한 백과전서
대부분의 독자들은 교과서에서 <임원경제지>를 농학, 즉 농업에 관한 서적이라고 배웠을 것이다. 그래서 어쩌면 필자가 이 책을 두고 '농업과 일상의 경제학서'라고 밝히고 있는 것에 대해 거부감을 느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다시 한번 단언하건대 <임원경제지>는 농업은 물론 일상생활의 경제활동을 종합적으로 밝혀 놓은 경제학서이다. 그 이유를 지금부터 살펴보자. 먼저 다소 지루할자 모르지만, <임원경제지>가 16가지로 분류해 담고 있는 정보와지식의 내용부터 알아보자. <임원경제지>는 보통 <임원십육지(임원십육지)>라고도 불린다. 그 까닭은 서유구가 이 책에서 '농업과 일상생활의 경제'에 관해 모두 16가지 분야로 나누어 저술햇기 때문이다.
하나, '본리지(本利志)'는 13권으로 농사 및 전제(田制)와 경작 등 농업일반에 관한 내용이다. 여기서는 농업생산의 이로움과 새로운 농사기술과 영농법을 다루고 있다.
둘, '관류지(灌畦志)'는 4권으로 채소 및 약용식물의 재배에 관해 다루고 있다.
셋, '예원지(藝원志)'는 5권으로 화훼류 66종을 소개하고 그 재배방법을 자세하게 다루고 있다.
넷, '만학지(晩學志)'는 5권으로 과일과 차, 대나무, 담배 등 특용작물의 재배와 수확 및 관리방법을 다루고 있다.
다섯, '정공지(展功志)'는 5권으로 누에치기와 길쌈, 비단 직조와 염색방법 등 향촌 여성들의 농사와 일상에 관한 경제활동을 다루고 있다.
여섯, '위선지(魏鮮志)'는 4권으로 농업과 관련한 기상, 그리고 천문관측을 다루고 있다.
일곱, '전어지(佃漁志)'는 4권으로 축산과 사냥, 강과 바다의 수산에 관해 다루고 있다.
여덟, '정조지(鼎俎志)'는 7권으로 각종 음식과 조리방법 및 조미료, 그리고 술과 계절 음식을 다루고 있다.
아홉, '섬용지(贍用志)'는4권으로 집의 건축과 가재도구 및 장식품, 옷과 각종 교통 및 운송수단을다루고 있다.
열, '보양지(보養志)'는 8궝으로 건강한 생활을 위한 섭생 및 양생법과 어린아이를 위한 육아법을 다루고 있다.
열하나, '인제지(仁濟志)'는 가장 많은 분량인 28권으로, 인체 질병의 원인과 치료에 관한 한방의학 전반을 다루고 있다.
열둘, '향례지(鄕禮志)'는 5권으로 집안에서 반드시 치러야 할 관혼상제와 가정의례를 다스리는 방법을 다루고 있다.
열셋, '유에지(遊藝志)'는 6권으로 독서법, 실용 수학, 활쏘기, 서예, 서화 등 자기 계발에 관한 내용을 다루고 있다.
열넷, '이운지(怡雲志)'는 8권으로 취미생활과 관련된 도구와 문장구, 예술품 감상과 장서 및 서적 괸리는 물론 여행 등 여가생활을 경제적으로 누리는 방법을 다루고 있다.
열다섯, '상택지(相宅志)'는 2권으로 전국의 지리 환경을 살펴서 삶의 터전으로 삼을 만한 주거고간을 선택하는 방법에 관해 다루고 있다.
열여섯, '예규지(倪圭志)'는 5권으로 상업활동과 재산증식 및 관리, 전국 팔도의 시장경제에 관해 다루고 있다.
<임원경제지>는 농업을 다룬 '본리지'에서 시작해 상업과 시장을 다룬 '예규지'로 마무리된다, 농업에서 의식주까지 당대 사람들의 일상 경제전반을 총체적으로 다루는 백과전서다운 면모이다. 여기에서 농업은 향촌의 경제생활의 한 분야로 다루어지고 있을 뿐이다. 물론 농업 경제의 중요성 탓에 '본리지'가 첫머리를 장식한다.
그러나 농업을 다룬 '본리지'보다 한방의학과 처방법을 다룬 '인제지'가 거의 2배나 많은 분량을 차지하고 있다. 게다가 건강을 다룬 '보양지' 역시 8권이나 된다. 농사보다 의료와 건강에 관한 내용이 훨씬 더 많은 것ㄷ이다. 서유구는 실제 경험을 통해 일상생활을 살아갈 때 생걔나 의식주 못지않게 중요한 것이 건강와 의료문제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인제지'와 '보양지'에 그토록 많은 지면을 할애했던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 부분에서는 상업과 재산관리 및 증식방법 그리고 팔도의 시장에 대해 다루었다. 당시 발전하고 있던 시장경제와 상품 - 화폐경제에 알맞는 경제생활을 강조했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따라서 <임원경제지>가 '농업에 관한 실학 서적' 즉 농서라는 교과서적인 상식은 이 순간부터 깨끗이 잊어버려야 한다.
사상 하나, 도덕과 윤리보다 물질생활이 우선
단순하게 말하자면 경제학이란 '재화가 인간생활에 가져다주는 이로움'을 논하는 학문이라고 할 수 있다. 도덕이나 윤리적인 가치보다는 재화의 생산과 유통과 분배, 즉 물질생활을 우선적으로 다루는 것이 경제학이다. 조선을 지배한 이데올로기였던 주자성리학은 도덕과 윤리 같은 정신적인 가치만 유독 강조했다. 성리학자들에게 도덕과 윤리는 세계와 인간을 다스리는 근본 규범이었다. 물질생활의 가치를 부정하거나 그것을 도덕과 윤리적인 가치보다 하위에 두는 한 경제사상의 싹은 결코 자라날 수 없었다. 서유구는 이런 성리학적 가치관에 대해 대단히 비판적이었다. 그의 사상은 바로 이 지점에서 출발했다.
「나는 유독 농학에 힘을 쏟아 기운이 다하도록 중단하지 못했다. 왜 그랬겠는가? 나는 일찍이 유학의 경전을 공부했다. 그런데 내가 언급할 만한 것들은 이미 옛사람이 모둬 말해버렸다. 내가 다시 말하다고 해도 세상에 무슨 보탬이 있을 것인가? 또한 나는 일찍이 세상을 다스리는 학문을 공부했다. 그런데 글줄이나 읽었다는 선비라는 사람들이 머리를 싸매고 궁리하거나 짐작해 하는 말은 모두 '흙으로 끓인 국'이요 '종이로 만든 떡'일 뿐이었다. 아무리 잘한다고 해도 실제 생활에 무슨 보탬이 있을 것인가? -<행포지(杏浦志) '서문'」
서유구는 성리학의 가치를 앞세워 정신적인 삶의 고귀함을 내세우는 사대부들을 향해 이렇게 비판했다.
"헛되이 곡식만 축낼 뿐 세상에 아무런 보탬이 되지 않는 자로는 저술하는 사대부가 진실로 우두머리이다."
"나는 사대부들이 앉아서 논하고 일어나서 행한다는 도가 무엇인지 도대체 모르겠다."
실제 생활에 절실하게 필요한 학문, 즉 이용후생의 학문이 아닌 학문은 모두 쓸모없는 짓에 불과하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그에게는 실용에 도움이 되는 학문만이 진정한 학문이었다.
<임원경제지>는 앞선 시대의 실학자이느 홍만선(洪萬選)의 <산림경제(山林經濟>를 모델로 삼아 저술한 책이다. 이런 사실은 서유구가 이 책의 서문에 해당하는 '예언'에서 밝혔다. 그것은 유학의 도덕과 윤리보다는 재화의 이로움을 추구하는 삶, 즉 물질생활을 더 중요하게 다루었던 <산림경제>의 경제철학을 수용한다는 뜻이었다.
정신적 삶의 가치를 앞세운 고담준론에서 벗어나 재화의 이로움, 즉 물질생황의 가치를 논하는 것이야말로 자본주의와 더불어 탄생한 경제학의 핵심이었다. 이런 점에서 서유구의 사상은 근대 경제학의 징후를 내포하고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만약 조선이 일본과 서양의 제국주의에 의해 이식된 자본주의가 아니라 자생적인 자본주의의 기을 걸었다면 어떠했을까? 만약 그랬다면 서유구는 봉건시대의 경제이론과 자본주의 경제학사이에서 '가교' 역할을 한 위대한 사상가로 평가될 수 있지 않을까?
사상 둘, 농업기술을 개선하고 둔전제 실시해야
서유구 사상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농업개혁론'은 크게 두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하나는 농업기술과 영농방법을 개선해 생산성을 크게 높이려고 한 것이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농업의 근본문제라 할 수 있는 토지제도를 '둔전제(屯田制)'로 개혁하고자 한 것이다. 서유구는 이 두 가지를 부국안민, 즉 튼튼한 국가재정과 백성의 경제억 안정을 위해 반드시 실현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했다.
농업개혁론에 관한 서유구의 생각을 알 수 있는 문헌과 자료들이 남아 있다. 정조 시대에 쓴 <농대(農對)>와 '순창군수응지소(淳昌郡守應旨疎)', 그리고 18년 간의 시골생활 동안 저술한 <임원경제지>와 <의상경계책(擬上經界策)>이 그것이다. 이 중 <임원경제지>는 향촌의 경제생활에 필요한 농업기술과 영농방법의 개혁론이 주된 내용을 이루고 있다. 이 채에서 특별히 주목되는 점은 '조선의 환경과 조건에 맞는 농업개혁'을 강조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는 "사람들은 효율과 이익을 중요시해 그것을 중심으로 움직이고 모인다"라고 보았던 서유구의 사상과 일맥상통한다.
「사람이 사는 지방은 제각각 다르고 생활습관과 풍속도 같지 않다. 생활하는 방식도 과거와 현재의 차이가 있고 우리나라와 외국의 구별이 존재한다. 어찌 중국 사람에게 필요하다고 해서 그대로 우리나라에서도 필요하다고 할 수 있겠는가? 이 책에서는 우리나라를 중심으로 필요한 방법들을 취하고 그렇지 않을 것은 버렸다. -<임원경제지> '예언'」
토지개혁에 재한 서유구의 입장은 <농대>나 '순창군수응지소'에서는 '한전론'이었다가 이후 <의상경계책>에서는 '둔전론'으로 변화한다. 그는 토지겸병으로 인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모든 땅을 국가가 소유하고 경자유전의 원칙을 지키는 '정전제'를 실시해야 한다는 이상을 버리지 않았다. 젊은 시절 그가 주장한 한전론은 당장 정전제의 이상을 실현할 수 없는 현실과 타협한 토지개혁론이었다. 우선적으로 대토지 소유의 폐단부터 없애려고 한 것이다.
그런데 정조 사후, 스스로가 대토지 소유자였던 세도정권이 득세하는 바람에 '한전론'조차 실현 불가능한 상황이 되었다. 그러자 최소한의 토지개혁 방안으로 서유구가 주장한 것이 바호 '둔전론'이었다.
그가 주장한 둔전은 단순하게 말하자면 국가가 주도해 설립하는 '시범농장' 또는 '협동농장'이었다. 둔전은 국가에서 재정을 출자하여 설치하는 '국둔(國屯)'과 부자가 개인 재산을 출자해 만드는 '민둔(民屯)'으로 나뉜다. 전자는 '국영 농장', 후자는 '민영 농장'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 둔전론은 앞선 시대의 중농조의 경제학자들이 주장했던, 균전론, 한전론, 정전론, 여전론과는 근본적으로 차이가 있었다. 전체 토지에 대한 개혁을 목표로 삼은 것이 아니라 일부 한정된 지역에서 한정된 규모로 둔전을 설치하자고 주장한 점이다. 아마도 서유구는 세도정권 아래서는 전면적인 토지개혁을 이룰 수 없다고 생각한 듯하다.
그러나 그는 세도정권의 보수성을 인정한다고 해도 시범농장의 성격을 띠는 둔전을 일부지역에서나마 설치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할 수 있다면 자신이 구상한 새로운 농업기술을 적용해 생산성을 높이고 상업적 농업경영을 통해 국가재정과 백성의 경제력을 튼튼하게 할 수 있다고 여겼다. 당시 그가 둔전 설치를 주장한 곳은 서울의 동서남북 4곳과 북쪽 국경지대, 그리고 서남해안의 도서지역 등이었다. 그리고 전국 8도의 감영과 지방고을에도 서울의 사례를 모방해 둔전을 설치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둔전은 서유구가 여렸을 때부터 익힌 농학과 숱한 고난에도 불구하고 힘써 갈고 닦은 농업개혁론을 시험해 볼 수 있는 무대였다. 물론 둔전론은 전국적 차원에서의 토지개혁 문제를 제기하지 못항 한계를 지니고 있었다. 하지만 서유구는 세도정권 아래에서 실현 할 수 있는 유일한 토지개혁론이라고 생각했다. 그가 말년에 이르도록 정전제의 이상을 버리지 않았다는 사실을 보더라도 둔전론은 현실과 타협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나온 차선책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외척이 권력을 독점하고 전횡하는 세도정권 아래서는 둔전론 같은 제한적 개혁론조차 발붙일 데가 없었다.
책을 맡아 보관할 자식도 아내도 없으니
1806년 정게에서 축출당한 지 18년이 지난 1824년, 마침내 서유구는 관직을 되찾았다. 그런데 관직 생활을 다시 시작한 후에도 그는 <임원경제지>를 저술하는 일을 멈추지 않았다. 1827년에 이르러서 <임원경제지>의 방대한 저술 작업은 일단락되었다.
하지만 이후에도 보완작업이 계속되었다. 그가 그토록 오랜 기간 동안 방대한 규모의 저술작업을 할 수 있었던 데는 외아들 서우보의 도움이 컸다. 지금까지 전해 오는 서유구의 모든 저술에는 서우보가 교열자라는 사실이 밝혀져 있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서우보는 1827년 33살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뜨고 말았다. 서유구의 아내는 그보다 훨씬 더 일찍 세상을 떠났다. 이때문에 서유구는 애써 이룩한 학문적 성과가 흔적도 없이 사라지지나 않을까 하는 불안의 나날을 보내야 했다.
그런 비통한 심정을 담은 글이 현재 남아있다. 이 글에서 서유구는 "나는 수십 년 동안 저술에 공을 들여 <임원십육지> 100여 권을 최근에야 끝마쳤다. 그러나 책을 맡아 보관할 자싣도 아내도 없으니 한스럽기 그지 없다"라고 했다.
실제로 그는 죽을 때까지 <임원경제지>의 보완 작업을 계속하면서 이 대저작의 간행을 위해 무던히 애썼다. 하지만 끝내 뜻을 이루지 못했다. 그리고 <임원경제지>를 비롯한 수많은 그의 저술들은 필사본으로 이곳저곳을 떠돌다 흩어졌다. 다행히 손자 서태순 등 후손들이 뜻을 잇기 위해 저술들을 '자연경실장(自然經室藏)' 또는 '풍석암서실(楓石巖書室)'이라고 찍은 종이에다 필사했기 때문에 대부분이 오늘날까지 전해질 수 있었다.
그럼 후대의 학자들 중 서유구의 사상을 계승한 사람은 누구였을까? 서유구는 젊은 시절 박지원에게 드나들면서 학문을 배웠기 때문에 일찍부터 그 손자인 박규수 등과도 친했다. 서유구가 1845년 82세의 나이로 사망했을 때, 박규수는 이미 30대 후반에 접어들어 있었다. 따라서 서유구의 사싱이 박규수의 근대 개화사상에 적지 않은 영향을 주었을 것이라고 짐작해 볼 수 있다. 실제로 박규수는 <임원경제지>에서 얻은 감동을 시를 통해 표현했다.
나라의 병폐를 치유하는 심오한 경륜을 지녔지만
향촌에서 농사짓고 나누는 일을 좋아할 뿐이네
<임원십육지>를 직접 구해 읽었는데
책에 온갖 보배 넘쳐나 신기루 속처럼 헤매네
요즘 사람들은 사업(事業)과 공업을 천하다고 여겨
정치와 경제를 다스리는 책에 곰팡이가 필 지경인데
유독 공의 의론을 익히 들어보니
학문이 실용에 적합하지 않다면 진실로 부끄럽게 여겨야 하네
비록 서유구의 사상을 온전하게 전승한 학자는 없었지만 그의 큰 뜻만은 박규수를 비롯한 근대 개화파 학자들에 의해 일부나마 계승되었다고 할 수 있다.
한정주「조선을 구한 13인의 경제학자들」다산초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