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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시대 ‘파묘’는 일종의 권력 쟁탈전이었다
최근 영화 흥행으로 묫자리를 옮긴다는 뜻인 이장(移葬) 대신 ‘파묘(破墓)’라는 생소한 말이 대중에 널리 회자 중이다. 지난 1일 만난 김두규(64) 우석대 교수는 “상징적인 의미에서 이장 대신 파묘라는 단어를 쓰지 않았을까”라고 말했다.
김 교수는 정치인 생가와 선영을 풍수론에 입각해 감정해왔던 국내 풍수학의 대가다. 과거 신행정수도 건설추진위 자문을 비롯해 문화재청 문화재전문위원을 맡았던 김 교수는 강원도·경북도청 이전 등에 참여했다. 조선시대로 치면 지관(地官) 일을 해왔다.
지난 1일 김두규 우석대 교수가 중앙일보와 인터뷰하고 있다.
김 교수는 “한국 사회에서 묫자리는 ‘무덤’ 이상의 의미를 지녔다”고 했다. 선영(先塋)은 시대와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산 사람’에게 더 중요했다. 조선시대 묫자리는 궁중 정치 투쟁의 도구로 쓰였다. 현대사에서도 ‘묫자리’는 정치가들의 권력욕이 투영된 일종의 ‘신전’이 되기도 했다. 이런 ‘묘지 풍수’는 일제 강점기와 경제개발 시기를 거치며 배척됐다가 또 전성기를 맞기도 했다. 시대마다 묫자리에 관한 생각이 이렇게 널뛴 이유는 뭘까.
김 교수에 따르면 좋은 묫자리와 나쁜 묫자리는 어떻게 다를까. 영화 ‘파묘’처럼 지관이 흙 맛을 보고 명당을 구별해낼까. 또 파묘와 이장은 정말 그렇게 빈번했을까. 권력가들은 시대를 막론하고 왜 그토록 묫자리에 집착해왔을까. 김대중 전 대통령, 이해찬 전 총리, 김덕룡·한화갑·이인제·정동영 등 대권에 나선 유력 정치인들의 선영 파묘·이장 현장을 가까이서 지켜 봐온 김 교수는 “풍수가 호황을 누리게 된 것 역시 권력과의 야합” 때문이라고 했다. 그는 권력과 풍수가 맺어온 끈끈한 관계를 인터뷰에서 자세히 설명했다.
목차
1. 트럼프도 믿는 풍수…명당의 조건은
2.“왕릉 ‘파묘’는 곧 권력 쟁탈전”…영화 ‘파묘’와 다른 점은
3. ‘쇠말뚝’과 삼각점
4. 박정희가 불러온 뜻밖의 ‘풍수 전성시대’
5. “DJ·이회창도 파묘(破墓)”…권력과 풍수 관계는
※아래 텍스트는 인터뷰 영상 스크립트입니다.
트럼프도 믿는 풍수, 좋은 터의 조건은
풍수상 좋은 터의 기준은.
풍수의 가장 중요한 두 가지는 산과 물이다. ‘산은 인물을 주관하고, 물은 재물을 늘려준다’는 말이 있다. 1000원짜리 지폐에 담긴 겸재 정선의 ‘계상정거도’에 한국 전통 풍수에서 말하는 명당의 조건이 다 담겼다. 우선 도산서원이 가운데 있다. 그 뒤에 높은 산(주산·主山)이 있고, 우백호(右白虎)와 소나무, 큰 바위가 집을 둘러싼다. 그 집 사이로 작은 도랑이 흐르는데, 이건 서울로 따지면 청계천, 그 앞에 흐르는 큰 물은 한강에 해당한다. 북악산·인왕산·낙산·청계천·한강 등 서울의 명당 모델의 축소판이 도산서원이다.
그래픽 최수아
풍수 개념은 동양에서만 쓰나.
주로 동아시아에서 연구하다가 이제 미국이나 유럽도 풍수를 적용해 건물의 부가가치를 올리거나 인테리어에 풍수를 적용한다. 그걸 가장 잘 활용한 게 도널드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이다. 원래 부동산업자였던 트럼프는 돈 잘 쓰는 화교들이 풍수를 따르는 걸 보고 ‘풍수가 사업거리가 되는구나’라고 생각해서 부동산 개발에도 성공했다.
해외 건물 중 풍수를 적용한 곳은.
타이베이101 빌딩은 27층부터 90층까지 8개 층을 하나의 단위로 만들어 중국의 전통적인 솥[정·鼎] 모양을 형상화했다. 솥은 중국에서 권력을 상징한다. ‘솥이 8층씩 8마디가 층층이 올라가는’ 형상이다. 그리고 101빌딩의 원래 이름은 ‘타이베이 국제금융센터’였다. 공사 중에 사고로 사람이 많이 죽어서 빌딩 이름을 ‘101’로 바꿨다. 일(一)은 양(陽), 0은 음(陰)이다. 양·음·양이다. 거꾸로 세우면 주역 8괘 중 이괘(離卦:☲·101)가 된다. 이(離)는 난방(기름)을 뜻한다. 밝은, 문화, 문명을 상징한다. 그러니까 중국의 문명을 빌딩 이름에 넣겠다는 의미다. 또 건물 외벽에 ‘상평통보’처럼 안이 뻥 뚫린 큰 동전 모양 구조물을 붙여놨다. 돈을 많이 벌라는 축원(祝願)이다.
그래픽 최수아
“조선 왕릉 ‘파묘’는 일종의 권력 쟁탈전”
조선시대 지관(地官)은 뭐였나. 지금은 왜 다 사라졌나.
국학 10개 학문 중 기술직에 4개 과목이 있는데, 지리과에 합격해야 지관이 된다. 터를 잡고, 궁궐 짓고, 왕릉을 쓰는 일을 한다. 공무원이다. 아무나 지관이 되는 게 아니다. 9개 고시 과목을 달달 외우고 시험 봐서 합격해야 한다. 조선시대에 공식적으로 지관이 활동하다가 조선이 망하고 사라졌다.
조선시대 풍수가 성행한 이유는.
조선은 유교 국가다. ‘충(忠)’과 ‘효(孝)’가 중요했다. 그래서 부모를 모시는 묘지 풍수가 유행했다. 근데 사회경제학적 관점에서 보면, 조선은 농경 사회다. 논과 밭이 필요하다. 그럼 산이 필요하다. 그런데 조선은 토지공개념제다. 나라에서 사패(賜牌) 하는 경우도 있지만 조상의 묘가 산에 있으면 정식 소송을 거쳐 자기 땅으로 받을 권리가 생긴다. 그래서 산이 굉장히 중요했다. 또 임진왜란 이후에 온돌이 보편화했다. 땔감이 필요하다. 그럼 산이 필요하다. ‘내 땅이 아닌’ 산이지만 조상 묘가 그 산에 있는 걸 증명하면 내 산으로 만들 수가 있었다. 이런 여러 이유로 조선에선 묘지 풍수가 굉장히 성행했다. 지관은 그걸로 돈을 많이 벌기도 했다.
묫자리 판단 기준은.
관을 열면 살은 다 없어지고 뼈만 그대로 있다. 끔찍할 것 같지만 그 뼈가 그대로 있으면 약간 노란 색을 띤다. 검지 않고 황골(黃骨)이다. 그러면 정말 예뻐 보인다. 그건 어떤 땅이냐면, 물이나 나무 뿌리가 관에 들어가지 않고 온전히 보존된 땅이다. 대체로 뼈가 온전히 있는 곳이 풍수상 길지에 해당한다. ‘조상이 좋은 곳에 뼈 그대로 온전히 있으면 후손과 서로 좋은 기를 공유해 잘 된다’는 동기감응(同氣感應), 이게 묘지 풍수의 핵심이다. ‘뼈대 있는 집안’이라는 말도 그래서 나왔다. 반면 파묘(破墓)했을 때 물이 많이 들어가면 뼈가 녹아서 거의 없다. 더 심각한 건 벌레가 들어간다. 특히 뱀이 월동하러 관에 들어갈 수 있다. 그러면 조상의 뼈가 나쁜 기운에 침해받고, 그 기운이 후손에게 전달된다고 인식된다. 그래서 이런 걸 막기 위해 관 주변을 회격(灰隔) 하기도 한다.
또 다른 나쁜 묫자리 조건은.
가장 대표적인 게 바람이다. 바람이 계속 불어 봉분(封墳)을 계속 치면 잔디가 말라 죽는다. 근데 그게 1년, 2년, 10년 계속되면 관 속의 뼈가 까맣게 변한다. 그걸 풍염(風炎)이라고 하는데, 그러면 ‘그 집안에 우환이 있다’고 한다. 바람·물·나무·벌레가 대표적인 흉지 조건이다.
영화 ‘파묘’에서는 묫자리 주변 ‘여우’가 또 흉지의 상징이던데.
옛날에 여러 이유로 아이들이 많이 죽었다. 그러면 아이들을 산에 묻는다. 근데 깊게 묻지 않는다. 그러면 여우들이 많이 파먹었다고 한다. 그래서 여우가 파먹는 땅은 안 좋은 것으로 보긴 한다. 근데 ‘파묘’에선 여우를 다의적이고 상징적으로 (해석)한 거 같다. 한국의 그 무엇을 침해하는 것으로 묘사된 것 같다.
영화처럼 실제로 지관이 흙 맛으로 묫자리를 판단하나.
영화니까 비주얼하게 보여주기 위함이 아녔을까. 사실 지관들이 그렇게 하지 않고, 무덤 주변에 흐르는 물맛을 보거나 물 색깔을 보고 땅을 이야기한다. 산, 흙과 물은 역상 관계로 생각하는데, 산의 모습은 물로 나타난다.
영화 '파묘' 스틸.
조선 왕릉도 파묘와 이장이 잦았나.
조선 왕릉 이장은 몇 가지 관점에서 봐야 한다. 왜 왕릉은 좋은 자리를 쓸까. 왕족이 대대손손 번창하기 위함이다. 근데 조선은 끊임없이 역모가 있었다. 그건 주로 실력자들이 한다. 그래서 위해 할 만한 사대부나 명문가들을 제압하기 위해 명당을 못 쓰게 해야 했다. 그렇다고 함부로 못 쓰게 할 순 없다. 그래서 (왕족이 죽으면) 새로운 땅을 찾는 것보다 한양도성 백 리 안에 명문가 무덤을 찾고, 그걸 빼앗는다. 강제로 뺏진 않고 종손을 불러서 “전하께서 새로운 능 자리로 고민이 많다”고 넌지시 말한다. 그러면 명문가에선 무슨 말인지 알고 헌상(獻上)했다. 좋은 자리를 빼앗는 셈이다. 왕릉의 한 80% 이상이 새로운 자리를 찾지 않았다. 세종대왕 영릉, 세조 광릉 등 전부 다 그렇게 빼앗은 묫자리다. 조선 왕릉 파묘는 끊임없이 명당을 빼앗던, 일종의 ‘권력쟁탈전’이다.
파묘·이장을 자주 하는 이유는.
조금 더 좋은 자리로 가고 싶은 사람 욕심은 끝이 없다. 그리고 산 사람과 마찬가지로 죽은 자도 땅속에만 있으면 답답하다고 한다. 한 번씩 옷도 새로 입혀주고 이승 바람을 쐬게 해준다는 거다. 그걸 ‘멸례’라고 한다. 실제로 조선 최고 풍수사 남사고는 아버지 묘를 아홉 번 이장했다. 명성황후도 아버지 민치록 묘를 여주부터 광주·제천·보령까지 네 차례 옮겼다. 그땐 이장이 지금처럼 쉬운 것도 아니다. 그 일대 땅을 다 수용하고 보상비도 줘야 하니 돈이 많이 든다. 그렇게 원성을 사도 이장한 건 ‘좋은 자리로 (묘를) 옮겨 놔야 자기가 잘된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첩장(疊葬)’도 생소하다. 흔한 일인가.
다른 나라는 많이 쓰는데, 우리나라는 드물다. 다만 이런 경우는 있다. 몇 번 봤는데, 왕의 광중(壙中·무덤 구덩이) 깊이는 10자(303cm)를 판다. (한자로) ‘십(十)’자다. 아래 땅이 있고, 그 관 위에 또 땅을 덮는 모양이다. 열 ‘십(十)자’를 아래위로 닫은 ‘왕(王)’자가 된다. 그래서 ‘10자(303cm) 깊이를 판다’고 하면, 예를 들어 그 땅이 정말 좋으면 세월이 흘러 봉분이 없어진 그곳에 누군가 ‘3자(90cm)’를 파서 새로 묘를 만든다. 그러면 첩장(疊葬)이 된다. 많은 이장 현장을 가보면 동일한 자리에 여러 흔적이 많다. 마치 연탄, 구공탄처럼 구멍이 뻥뻥 뚫린 흔적이 있다. 물론 땅이 메워져 있지만 토질이 다르다.
일제의 쇠말뚝? “측량 위한 삼각점”
‘파묘’라는 말도 생소하다.
파묘라는 용어보다는 이장이라는 개념이 더 많이 쓰는데, 이 영화는 파묘로 썼다. (일제의) ‘쇠말뚝’을 꺼내는 작업으로, 파묘를 (상징적인 차원에서) 접근했기 때문에 그런 게 아니었을까.
실제로 일제 강점기에 한국 전통 풍수가 부정됐나.
일본이 조선을 침략하고 식민지화하려면 철도나 도로가 필요하다. 위도·경도·표고(標高)를 기록하는 지점에 ‘삼각점’이라고 주로 시멘트나 철로 된 큰 말뚝을 주로 동네 뒷산이나 가장 잘 보이는 곳에 박는다. 지금도 등산하다 보면 삼각점이 많다. 사람들은 ‘우리 동네 뒷산에다 쇠말뚝을 박았네?’ 또는 ‘무덤 자리를 없애고 조선의 정기를 끊기 위해 쇠말뚝을 박았네?’라고 반응한다. 일본이 조선을 식민지화한 건 잘못이고 우리는 당한 피해자가 맞는데, 일본이 풍수 침략을 했다는 건 아니다.
삼각점. 그래픽 신다은
삼각점은 왜 안 없애나.
그건 지금도 필요하다. 지금도 (토지 측량을) 하려면 필요하다. 국토부도 삼각점을 설치할 수밖에 없고, 보존할 수밖에 없다.
쇠말뚝이 민족정기 말살을 위한 것이란 해석은 과한 건가.
그렇다. 김진명의 『풍수전쟁』이란 소설 첫 부분에 일본이 한국의 5개 명산에 쇠말뚝 꽂는 게 나온다. 그걸 대통령비서실 사무관이 제거해 나간다. 소설은 국가적인 차원에서 한 것이고, ‘파묘 (영화)’는 개인적 차원에서 한다. 일본이 우리에게 준 여러 피해와 모욕감이 크다. 그렇지만 소설에서 그런 감정을 자꾸 자극하는 건 과연 올바른 걸까…한국의 명산을 보자. 얼마나 많은 고압선이 지나가나. 그 이상 실질적인 영향을 끼치는 ‘쇠말뚝’이 어디 있나.
아예 없던 일은 아니지 않나.
이런 경우는 가끔 있었다고 본다. 예컨대 조선인 중에서 독립운동 (활동) 성향이 강한 명문가 사람에게 영향 끼칠 곳에 쇠말뚝을 박는 경우는 봤다.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박정희가 불러온 뜻밖의 ‘풍수 전성시대’
경제개발 시기, 풍수는 어떤 대접 받았나.
1960년대 박정희 대통령이 집권하고 경제개발 할 때 가장 필요한 게 도로였다. 많은 땅이 잘리고 묘들이 옮겨지면서 ‘맥이 잘린다’고 사람들이 불안해했다. 또 조상 묘를 옮겨야 하는데. 더 좋은 대체지를 찾아야 한다. 그럼 지관들이 필요해진다. 결국 묘지를 이장하면 건설부에선 풍수로 인한 건설 방해와 저항이 심하니 ‘풍수 공부를 해야 하지 않나’라고 해서 무라야마 지준(村山智順)이 썼던 책을 다시 보기도 했다. ‘건설과 풍수’가 비등비등했던 시기다.
결국 묘지 의미가 약해졌다.
이유는 두 가지다. 도시화와 난방 연료 전환. 1970년대 전까지 우리나라는 온돌이었다. 땔감을 뗄 ‘내 산’이 필요했고 조상의 묘를 거기 모시면 내 산이 될 수 있었다. 근데 1970년대 들어서 난방 방식이 바뀌었다. 도시화로 인구가 늘어 땔감 수요는 늘었다. 결국 산들이 전부 민둥산이 됐다. 비만 오면 산사태였다. 그래서 정부가 난방 원료를 바꿨다. 결국 산이 필요 없어졌고 덩달아 묘지 의미도 약해졌다.
박정희 전 대통령은 개인적으로 풍수를 가까이하지 않았나.
국가 통치자로서 풍수의 흔적을 없앴지만 개인의 가치관과 상반되는 경우도 있었다. 박정희 형인 박상희씨가 1930년대 할머니 묘를 구미 상모동의 최고로 좋은 자리에 썼다. 지금도 그대로 있다. 그걸 박 전 대통령도 안다. 또 분당에 한국학중앙연구원(옛 정신문화연구원) 터 역시 박 전 대통령이 잡았다고 한다. 그리고 초대 대법원장을 지낸 가인 김병로의 수유리 묫자리도 박 전 대통령이 직접 터를 잡아줬다. 직접 들은 얘기다.
“DJ·이회창도 파묘(破墓)” 권력과 풍수 관계는…
최근에도 권력자들의 파묘·이장 많았나.
1980~90년대 많은 사건이 일어났다. 김대중 전 대통령, 이해찬 전 총리, 김덕룡, 한화갑, 이인제, 정동영…(거의) 다 대권에 한 번씩 나선 분들인데, 이장을 했다. 내가 직접 가서 현장을 본 것만 그렇다. 이름 없는 사람들은 더 많이 있을 수 있다.
기억에 남는 사례는.
김대중 전 대통령이다. 훌륭한 분인데 험난한 정치 역정을 겪었다. 40대에 대선에 출마해 안 되니 참모들이 오죽 답답했겠나. 그래서 전남 신안 하의도에 있는 아버지 묘를 경기도 용인으로 이장했다. 문제는 어머니 묘를 그대로 두고 아버지 묘만 모셔왔다. 이게 당시 광주에서 엄청나게 문제가 됐다. 직접 들은 이야기인데, 그 정도로 풍수에 민감했다. 또 대선 전에 동교동 자택도 일산 정발산 아래로 이사를 했다. 대통령 퇴임 후엔 다시 동교동으로 돌아왔다. 그걸 보고 이회창 전 총리도 이장하고….
1996년 5월 16일자 중앙일보 기사. 그래픽 이경은
이회창 전 총리도 파묘했나.
대선에서 한 번 떨어졌지 않나. 그래서 아마 이장을 서둘렀을 거다. 그랬는데 또 떨어졌다. 이 전 총리가 (대선에) 두 번 안 되니까 아예 파묘해서 (묘 자체를) 없앴던 거로 알고 있다. 사실은 이제 그 부분은 내 잘못도 많이 있다. 선거 전에 대선 후보들 선영(先塋)이나 생가(生家)도 가보게 하는데, 내가 알고 있는 거로 평가하지 않나. 그런 게 (파묘·이장에) 좀 참고가 되지 않았을까… 지금 생각하면 죄송한 생각도 많이 든다.
정치인들이 자주 파묘·이장하는 이유는 뭔가.
대선후보가 나오면 주변에 지관들이 쫙 달라붙는다. 이장해서 대통령이 되면 몸값이 올라가니까.
정치인과 풍수가들이 서로를 이용하는 건가.
풍수가 호황을 누리게 되는 게 권력과의 야합이다. 그게 전두환·노태우 이장 사건이다. 그들은 헌정을 유린하지 않았나. 국민 설득이 안 된다. 풍수에 제왕 터가 있다. 그걸 활용했다. 당시 유명한 손석우라는 지관이 그 작업을 했다. 1980년대 전두환과 노태우가 소위 ‘왕비가 나올 터’로 이장을 했다. 결과적으로 대통령이 되지 않았나. 그런 걸 보니 너도나도 ‘이장해야겠다’는 생각을 한 셈이다. 이장의 전성시대가 그 무렵이다.
그들은 자신들이 누울 곳을 알아봤나.
옛날부터 왕이 되면 가장 먼저 하는 게 자신이 죽어 묻힐 자리 만들기다. 힘 있을 때 지관도 다양하게 뽑을 수 있다. 전두환도 합천 선영(先塋) 부근에 정말 좋은 자리를 만들어놨다. 그때 소문나서 그 자리에서 기(氣)를 받겠다고 누워 있는 사람 많았다. 노태우도 한 10여 년 전에 고향 부모님 묘 아래에 자리를 만들었다. 그런데 결과적으로 둘 다 못 들어갔다. 풍수서에 보면 ‘악행을 많이 쌓으면 하늘이 그 사람한테 땅을 주지도 않고, 또 땅은 그 사람을 받아들이지도 않는다’는 말이 나온다. 그나마 노 전 대통령은 동화 경모공원에 안치됐다. 당시 본인이 허가해준 곳이다. 전두환은 죽어서도 고향에 못 가고 있다. 집에 있는 거로 안다. 파주에 가려다 반대에 부딪혔다. 결국 땅이 아니라 사람이 안 받은 셈이다. ‘너무나 땅에 매몰되지 말아라. 덕을 쌓아라. 그래야 임금 된다’는 말이 있다. 고향 묫자리로 못 간 건 결국 덕을 잃었기 때문 아닐까.
전두환 전 대통령의 합천 선영(왼), 노태우 전 대통령의 대구 동구 선영(오른쪽)
많은 정치인이 공관 등을 정할 때 풍수를 참고한다고 한다.
그들은 모두 능력이 탁월하다. 실력은 비슷한데, (선거는) 때로는 ‘바람’, ‘운’이다. 그 바람이 어디서 오는지 설명이 안 된다. 그때 내가 좋은 운을 만들 수 있는 게 뭐냐…‘8층에 근무할 거냐’ ‘7층에 근무할 거냐’ ‘책상이나 그림을 어느 방향에 둘 것인가’에 민감해진다. 선거철만 되면 지관들 호황이다. 여의도에 보면 대선후보들이 자주 가는 대산·한양·금강 빌딩 등등…그게 나름대로 이유가 있다. 특히 대권을 꿈꾸는 사람들은. 공공연한 비밀 아닌가.
그래픽 최수아
에디터
관심
중앙일보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