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한 해 동안 본지에 연재해 독자들로부터 많은 사랑을 받은 반기성 연세대 지구환경연구소 전문위원의 ‘기후와 역사, 전장과 기상’을 확대 개편한다. 편집자 “바사 왕 고레스 원년에 여호와께서 예레미야의 입으로 하신 말씀을 응하게 하시려고 바사 왕 고레스의 마음을 감동시키셔서….” 성경 에스라서 1장에는 고레스 왕이 유대인들을 고국으로 돌려보낸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여기에서 바사는 페르시아를, 고레스는 키루스 왕을 뜻한다. 키루스 왕은 바빌론에 포로로 잡혀 있던 유대인들을 예루살렘으로 돌려보냈다. 많은 역사학자는 성경에 기록된 이 사실에 의문을 품었다. 고고학자 H. 라삼이 바빌론 성 발굴작업 중 원통형 비문을 발견했다. 놀랍게도 원통형 비문 안에는 키루스 대왕이 유대인들의 예루살렘 귀향을 허락한 내용이 기록돼 있었다. 키루스 대왕의 바빌론 정복과 업적들이 역사적 사실로 증명된 것이다. 키루스 대왕은 서남아시아와 중앙아시아의 대부분을 정복해 아케메네스(페르시아) 대제국을 건설한 위대한 왕이다. 기원전 547년 키루스 대왕은 리디아 정복에 나섰다. 팽팽히 맞서던 양군은 사르디스 동쪽의 작은 벌판에서 대치했다. 리디아의 기병이 강함을 파악한 키루스 대왕은 군사의 대열 앞에 낙타들을 배치했다. 리디아군의 말들이 낙타들을 보고 혼란에 빠지면서 승리를 잡아챌 수 있었다. 전투 상황을 정확하게 파악한 키루스 대왕의 책략이 돋보이는 전투였다. 기원전 541년까지 이란 지역을 거의 정복한 키루스 대왕은 바빌론을 공격하기로 결정한다. 당시 바빌로니아는 벨사살 왕이 다스리고 있었다. 벨사살 왕은 렘브란트 등의 화가들이 그의 연회 장면을 그릴 정도로 먹고 마시고 놀기를 좋아했던 왕이다. 부귀와 사치 속에서 산 오만한 왕이었다고 전해진다. “아무리 그들이 강하다고 해도 이 바빌론 성을 함락시킬 수는 없다.” 벨사살 왕의 말처럼 바빌론 성은 견고했다. 수심도 깊고 폭도 넓은 유프라테스 강이 성을 둘러싸고 흘렀다. 천연적인 자연방어선과 함께 고대 성 중에서는 가장 높고 견고한 성벽이 바빌론을 둘러싸고 있었다. 키루스 대왕이 공격에 공격을 거듭했으나 도저히 바빌론을 함락시킬 수가 없었다. “그래, 이 무더위에 물이 없다면 저항할 수 없을 것이다.” 키루스 대왕은 날씨를 이용하기로 결정한다. 바빌론 지역은 5월부터 10월까지는 건기로 비가 전혀 오지 않는다. 세계에서 가장 무더운 지역으로 7월에서 9월까지는 낮 최고기온이 50도를 넘을 정도로 폭염이 기승을 부린다. 물이 없이는 잠시도 생존하기 어려운 곳이다. 바빌론 성은 건기 계절 동안은 유프라테스 강에 연결돼 있는 수문으로 물을 충분히 공급받았다. 그러기에 가뭄이나 식수 공급 제한에 대한 대비가 전혀 없었다. 키루스 대왕은 강물의 줄기를 바꾸었다. “벨사살이 대연회를 베풀고 있는 사이, 바빌론을 관통해 흐르던 유프라테스 강은 페르시아인들에 의해 성벽 밖에 건축된 대참호 속으로 돌려졌다.”(역사가 헤로도투스) 강의 물줄기를 돌림으로써 바빌론에 공급되던 식수가 봉쇄됐다. 건기로 비가 전혀 내리지 않는 데다가 강으로부터 물이 공급되지 않자 기근이 바빌론을 휩쓸었다. 무더위와 기갈로 병사와 시민들이 쓰러져 갔다. 항복 외에는 선택이 없었다. 키루스가 바빌론에 입성한 것은 기원전 539년 10월 29일이었다. 우기가 시작되기 직전이었다. 날씨를 이용한 전술적 쾌승이었다. 키루스 대왕은 무수한 전투에서 승리를 거머쥐었다. 그러나 그의 전쟁 기록 중에 처참한 패배를 기록한 적이 있다. 바로 인도정벌 전쟁이다. 인도원정 루트로 게드로시아 사막을 선택했다. 사막 기후는 너무나 참혹했다. 밤에는 뼈까지 스며드는 강추위, 낮에는 견디기 힘든 무더위, 강력한 모래바람은 수시로 불어왔다. 물과 식량 보급이 제때 이뤄지지 않았다. 풍토병과 기근으로 병사들이 쓰러져 갔다. 인도 정복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키루스 대왕이 바빌론으로 돌아왔을 때 살아 온 부하는 겨우 일곱 명뿐이었다. 인도와 전투조차 하지도 못하고 날씨에 대패한 전쟁이었다. 키루스 대왕에게 치명적 패배를 안긴 게드로시아 사막은 알렉산더가 인도원정에서 돌아올 때도 엄청난 병력 손실을 안긴 악명 높은 사막이기도 하다. 키루스 대왕은 강력한 페르시아 제국을 세운 뛰어난 왕이었다. 후에 페르시아를 정복한 알렉산더 대왕 조차 키루스 대왕의 무덤만은 파괴하지 않았을 정도로 그를 위대한 왕으로 존경했다. 지금도 이란인들은 그를 ‘가장 자랑스러운 건국의 아버지’라고 부른다. “냉혹한 현실을 다루는 이성적이고도 냉철한 판단력, 정직하고 진실하게 살아야 한다는 인간미, 자신이 정복한 나라의 포로들을 존경심으로 대우하는 포용력, 대제국을 건설하면서도 이기주의에 빠지지 않았던 냉정함. 현대를 살아가는 리더들은 키루스 대왕의 이런 모습을 배워야만 한다.” 21세기 역사학자 ‘래리 헤드릭’의 말을 새겨봤으면 하는 오늘이다. [Tip-키루스 대왕의 리더십] 거대한 페르시아 제국을 이뤘던 키루스 대왕의 리더십은 도대체 무엇이었을까? 첫째, 그는 국민들의 마음을 읽고 필요한 것을 해결해 줬다. 바빌로니아 국민들이 가장 원하던 그들의 신에 대한 경외심을 보여 줬다. 마르두크 신전을 세우고 마르두크 신앙에 기초한 통치이념을 확립했다. 바빌로니아 국민들이 키루스 대왕에 가장 협조적인 민족이 됐음은 물론이다. 둘째, 민족융화정책으로 국가 체제를 견고하게 만들었다. 여러 민족의 문화를 존중하고 포용했다. 반란과 대립의 가능성이 큰 민족들을 하나로 아우르는 데 성공한 것이다. 셋째, 인재를 등용해 적극 활용했다. 리디아 전쟁에서 포로로 잡은 크로이소스 왕을 살려 가장 충성스러운 조언자로 활용한 것이 좋은 예다. 넷째, 인간 심리에 대한 깊은 통찰력을 갖고 있었다. 병사들은 키루스 대왕에 대한 무조건적인 신뢰와 존경을 보냈으며 그를 위해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싸웠다고 한다. 다섯째, 관대하고 공평하며 아량 있는 정복자였다. 어느 민족이든 차별하지 않았다. 포로로 잡혀 있던 유대인들을 전부 고향으로 돌려보낼 만큼 아량이 있었다. 메대인들이 키루스가 정복자가 아닌 자기 민족이라고 생각했을 정도였다. 여섯째, 새로운 전략과 전술을 만들어내 활용했다. 최강의 페르시아 기병대 창설을 통해 신속한 기동력을 보유하면서 수많은 전투에서 승리할 수 있었다. <반기성 연세대 지구환경연구소 전문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