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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루흑마는 느긋하게 걸어갔다. 흑사맹 하남지부에서 유가장에 가려면 낙양을 완전히 가로질러야 했다.
고루흑마는 천천히 걸으며 대충 계획을 세웠다. 지금 고루흑마 옆에는 혈영귀마가 핏빛 눈을 번득였고 뒤에는 흑의를 입은 백 명의 무사들이 그들을 따랐다.
'뇌룡이라......'
지금은 유가장을 치러 가지만 고루흑마의 뇌리에는 온통 뇌룡뿐이었다. 흡혈광마가 뇌룡에게 죽었다는 얘기를 들은 후부터 계속 그래왔다.
흡혈광마는 구대흉마 중 나이도 가장 어리고 무공도 약했다. 내정하게 평가하면 다른 흉마들보다 몇 수 아래였다. 흡혈광마 둘이 모여야 다른 흉마 하나를 상대할 정도였다.
아무리 그렇다 하더라도 흡혈광마를 상대할 수 있는 사람은 무림에서 몇 안 된다. 흡혈광모도 어엿한 구대흉마였고, 이십년 전 구대문파와 치열하게 싸웠다.
그런 흡혈광마를 죽였다는 건 굉장한 고수라는 뜻이다.
"그나저나 유가장에 모두 몇 명이나 남았다고 했던가?"
"백 명 정도입니다."
고루흑마의 물음에 답한 것은 두 흉마의 뒤를 바짝 쫓고 있는 흑의 무사였다.
그의 몸에서 풍기는 기세도 보통이 아니었다. 구대흉마와는 비교할 수 없지만 혈수사 조양보다 대단했다. 아니, 흑수혈검 마창관보다도 더 뛰어났다.
"얼마 안 되는군. 주의해야 할 고수는?"
"혹시 뇌룡이 있다면 모를까 두 분을 곤란하게 만들 고수는 없습니다. 다만 전대장주인 유경환은 그 경지가 꽤 높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유경환이라...... 그 놈은 네가 맡아라."
"예."
흑의 사내는 주저하지도 않고 대답했다. 유경환 정도는 충분히 이길 수 있다는 뜻이다.
이윽고 그들은 유가장에 도착했다. 혈영귀마는 유가장을 눈 앞에 두자 더욱 살기가 짙어졌다. 혈영귀마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눈에서 혈광을 흘리며 정문을 향해 달려들었다.
정문을 지키던 무사 둘은 깜짝 놀라 조치를 취하려 했지만 혈영귀마의 움직임이 너무 빨라 적절한 대응을 할 수 없었다.
콰드득!
푸학!
두 명의 무사가 순식간에 핏물로 화해 흩어졌다. 혈영귀마의 눈이 더욱 짙은 핏빛을 띠었다.
콰앙!
유가장 정문이 산산이 부서졌다.
혈영귀마가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고루흑마는 그 모습을 멀리서 지켜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쯧쯧, 저렇게 성질이 급하니 그 고생을 했지."
고루흑마는 뒤에서 따라오는 흑의인에게 눈짗을 했다. 흑의인은 고개를 살짝 숙인 후 뒤따라오는 부하들에게 손짓을 몇 가지 명을 내렸다.
백 명이나 되는 흑의 무사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그들은 순식간에 유가장을 포위했다.
고작 백 명으로 유가장을 촘촘히 둘러쌀 순 없었다. 하지만 그들은 누구도 걱정하지 않았다. 유가장에서는 아무도 도망칠 수 없을 것이다.
고루흑마가 그 광경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유가장 안으로 들어갔다. 유가장은 온통 피바다였다.
"자아, 슬슬 몸을 풀어 볼까."
고루흑마의 얼굴이 점점 검게 물들어갔다. 고루흑마란 이름을 갖게 해준 고루흑마공이었다.
온몸이 시꺼멓게 변한 고루흑마가 섬뜩한 미소를 피워 올리며 안으로 몸을 날렸다. 그가 지나간 자리에는 남아나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그것이 나무건 벽이건, 그리고 사람이건.그렇게 유가장이 무너졌다. 두 사람에 의해.
"그게 뭐지?"
혈영귀마가 섬뜩한 눈으로 고루흑마를 쳐다봤다. 고루흑마는 흥미로운 눈으로 손에 든 단환을 이리저리 돌려봤다.
"유가장주가 가지고 있던 거다. 그런데 이거......"
"그거 은왕이 얼마 전에 얻었다던 청령환이랑 비슷하군."
혈영귀마의 말에 고루흑마가 고개를 끄덕였다.
"비슷하지만 다르지. 한데 문제는 이걸 유가장주가 가지고 있었다는 점이야."
유가장주가 아무 약이나 가지고 있을 리 없다. 이 약은 꽤 귀한 약이라는 뜻이다. 유가장이 가지고 있는 귀한 약은 딱 하나다.
"설마 진짜 청령환은 아니겠지?"
진자 청령환은 얼마 전 은왕의 손아귀에 들어갔다. 은왕이 그걸 왜 얻으려 했는지 모르지만 그것을 위해 흑사맹 하남지부가 움직였다.
은왕이 청령환을 살피는 모습을 근처에서 본 고루흑마는 청령환의 모습을 확실히 기억했다. 그 청령환에 비해 지금 눈앞에 있는 단환은 모양부터가 너무나 어설펐다.
"그래도 유가장주가 가지고 있던 약인데 가지고 있다 보면 쓸모가 있겠지."
고루흑마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단환을 품에 넣었다.
"그나저나 은왕은 대체 왜 청령환을 원한 거지? 은왕한테는 은환이 있잖아. 모르긴 해도 그게 청령환 따위보다 훨씬 대단하지 않나?"
"청령환을 경험해 보지 않았으니 확실할 수는 없지. 하지만 이해가 안 가는 건 사실이야. 뭐, 어딘가에 필요하긴 했겠지."
고루흑마는 대충 결론지어 대답했다. 혈영귀마는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만족했다. 그에게는 더 이상 파고들 머리도 집요함도 없었다.
하지만 고루흑마는 아니었다. 고루흑마는 은왕이 대체 무슨 일을 계획하는지 알고 싶었다.
물론 대략적인 것은 안다. 흑사맹을 장악해 정협맹과 싸우는 것이 첫 번째 계획이었다.
'문제는 그 이후지. 설마 온 무림을 집어삼키겠다고 날뛰는 건 아니겠지?'
무림을 제패하는 것은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그저 정협맹이나 흑사맹을 장악한다고 되는 일이 아니다.
무림에는 그들 외에도 모래알처럼 많은 고수들이 존재한다. 그들 모두를 통제하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어쨌든 확실히 알아야 돼. 이십 년 전처럼 너덜너덜해질 정도로 이용당하기만 할 수는 없지.'
고루흑마는 어금니를 꽉 물었다. 이십 년 전에는 은왕에게 정말 제대로 이용을 당했다. 무려 구대문파와 싸워야 했으니까. 무림맹이 결성된 것도 자신들 때문이다.
다시 그런 일이 벌어지지 말라는 법은 없다. 게다가 목숨을 보지할 수 있다는 보장도 없다. 벌써 흡혈광마가 죽지 않았는가.
'절대 당하지 않는다. 절대로.'
고루흑마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리고 그 생각은 비단 고루흑마뿐 아니라 머리가 조금 돌아가는 구대흉마의 한결같은 생각이기도 했다.
혈영귀마나 죽은 흡혈광마처럼 머리 쓰는 것을 싫어하고 무슨 일만 있으면 물불 가리지 않고 뛰어드는 자들을 제외하면 모두가 그랬다.
"그런데 정말로 개봉으로 갈 건가?"
고루흑마는 혈영귀마의 물음에 하던 생각을 멈췄다.
"가야지. 어차피 뇌룡이라는 놈을 찾기 전까지는 할 일도 없으니까."
고루흑마의 말에 혈영귀마가 눈을 빛냈다. 혈영귀마의 눈에서 흘러나오는 혈광이 점점 짙어졌다.
조금 전 유가장에서의 싸움으로 많은 피를 봤지만 그것만으로 부족했다. 좀 더 강한 자의 피가 필요했다.
"뇌룡은 아주 강하겠지? 막내를 죽일 정도니까. 아주 기대돼. 크흐흐흐."
혈영귀마가 음산한 웃음을 흘리자 고루흑마가 고개를 끄덕였다. 뇌룡이 아무리 강하다 하더라도 자신과 혈영귀마 둘을 동시에 상대할 수는 없을 것이다.
게다가 자신들에게는 쓸 수 있는 부하가 백 명이나 있다. 그들이 만들어내는 검진도 충분히 도움이 될 것이다.
고루흑마는 뇌룡과 싸울 일을 기대하며 개봉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이제 뇌룡과 싸우기 전에 잠깐의 여흥을 즐길 시간이 되었다.
"하아. 정말로 공자님은 무슨 생각을 하고 계신 건지......"
모용혜는 한숨을 내쉬며 무영이 약을 파는 모습을 바라봤다. 무영이 만든 신선단은 꽤 잘 팔렸다.
아직 약에 대한 소문이 나지 않았는데도 그랬다. 무엇보다 가격이 적당했으며 무영이 워낙 사람을 잘 끌어 모았다.
무영은 개봉에 들어서자마자 적당한 객잔을 잡고 주변 산으로 올라가 재료를 잔뜩 모았다. 당연히 서하린과 모용혜도 그것을 도왔다.
무영은 정말로 많은 약을 만들었고, 지금 그것을 팔고 있었다. 팔지 않고 남겨둔 약도 엄청나게 많았다. 지금 모용혜와 서하린은 남은 약이 든 커다란 등짐을 지키는 중이었다.
"대체 이번에는 왜 이렇게 약을 많이 만드신 거지?"
모용혜의 말에 서하린이 옆에서 입을 열었다.
"이 약은 개봉 근처의 빈민촌에다 파실 생각이셔."
서하린의 말에 모용혜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도 그렇게 생각했다.
"그러시겠지. 낙양에서도 그랬으니까."
모용혜는 그렇게 말하면서도 답답함을 감추지 못했다.
"지금은 정말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닌데......"
흑사맹이 무영을 노리고 있다. 유가장은 아마 더 이상 무영을 뒤쫓지 않을 것이다.
장주가 왔는데도 실패한 일을 누구에게 맡기겠는가. 게다가 유가장은 이렇게 한가하게 인원을 뺄 여유가 없다.
"문제는 흑사맹인데......"
흑사맹은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다. 모용혜는 부디 흑사맹 하남지부만 얽혀 있길 바랐다. 만일 흑사맹 전체와 관계가 있다면 무영은 더 이상 무사하지 못할 것이다.
흑사맹의 마수에서 빠져나가는 가장 좋은 방법은 그와 비슷한 힘을 등에 업는 것이다.
모용혜에게는 그 힘이 바로 정협맹이었다. 무영이 정협맹의 그늘 아래로 몸을 피한다면 흑사맹이 건드릴 수 없게 된다.
흑사맹과 정협맹이 사이가 좋지않고 최근 여러 가지 일이 있긴 했지만 모용혜가 판단하기에 전면전까지 가지는 않을 듯 했다.
전면전으로 가게 되면 흑사맹도 정협맹도 커다란 피해를 입을 테니까.
모용혜는 걱정스런 눈으로 무영을 바라봤다.
"정말 열심히도 파시는구나."
모용혜의 중얼거림에 서하린이 입을 가리고 웃었다. 서하린 역시 모용혜와 비슷한 고민을 했지만 모용혜처럼 깊게 하지는 않았다.
어차피 소주로 가면 어느 정도는 해결될 문제다. 소주에는 아직 흑사맹의 힘이 제대로 미치지 않는다.
강소성은 전체적으로 중소 무가가 많고 그들의 힘이 강한 편이었다. 소주만 해도 서가장과 정가장이 나눠먹다시피 했다. 물론 염왕채가 있었지만 그건 상당히 특별한 경우였다.
흑사맹의 근거지는 호남성이다. 그리고 호남성에서 제대로 강소성에 영향을 미치려면 안휘를 넘어야 한다. 하지만 안휘는 남궁세가의 거대한 힘이 도사리고 있는 곳이었다.
강소에서 서가장의 힘은 상당한 편이다. 게다가 이번 싸움으로 인해 소주를 장악했으니 앞으로 꽤 대단한 무가로 성장할 것이다.
그런 서가장의 힘이라면 흑사맹의 마수로부터 무영 하나 지키는 것쯤은 충분히 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무영이 강하기도 하고 말이다.
"낙양에서부터 뭔가가 변하신 거 같아."
서하린은 그렇게 생각해다. 아니, 확신했다. 낙양 빈민촌에 약을 팔 때부터 무영이 조금씩 변했다. 어쩌면 그게 원래의 모습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서하린은 무영의 그런 변화가 싫지 않았다.
"그나저나 우리 오라버니 약 정말 잘 파신다."
서하린과 모용혜가 그렇게 중얼거리는 사이 무영은 약을 모두 팔아 치웠다.
"오래 기다렸지? 자, 이제 오늘은 이마 쉬자."
무영은 그렇게 말하며 두 여인이 지키고 있던 등짐을 짊어졌다.
방금 전 약을 팔아서 번 돈이 모두 은자 두냥이었다. 그리 큰돈은 아니지만 며칠 객잔에서 편히 머물며 밥을 먹을 정도로는 충분했다. 아니 차고 넘쳤다
무영은 가벼운 발걸음으로 객잔을 향해 걸었다. 모용혜와 서하린은 그런 무영을 바라보며 따뜻하게 미소 지었다.
무영은 홀가분한 얼굴로 빈민촌을 나섰다. 오늘은 시간이 늦었으니 개봉에서 하루 더 머물 생각이었다.
"결국 준비한 걸 전부 팔았네요."
무영이 준비한 신선단의 양이 상당했음에도 모조리 팔렸다. 중복해서 팔지 않고 일일이 확인을 했는데도 그랬다.
그만큼 빈민촌에 몸이 좋지 않은 사람들이 많다는 뜻이기도 했다. 그들은 당분간 그나마 편안한 삶을 누릴 것이다.
하루 벌어 하루 먹고사는 그들에게는 아프지 않은 것만으로도 충분히 행복한 일이었다.
"개봉에서 시간을 너무 지체했어요."
모용혜는 여전히 흑사맹이 걱정스러웠다. 흑사맹이 본격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한다면 아무리 무영이 대단하다고 해도 절대 빠져나갈 수 없기 때문이다.
"흑사맹 하남지부만으로 아마 쉽게 움직이지 못할 거야."
서하린이 단정하듯 말하자 모용혜가 눈을 크게 떴다. 서하린이 이런 의견을 내리라고는 생각도 못했기 때문이다.
"유가장이 더 이상 흑사맹을 견제하지 못하는 상황인데도?"
"유가장이 아예 멸문했다면 모를까, 그렇지 않다면 함부로 전력을 이동시킬 수 없을 거야. 상권도 장악해야 할 테니까."
"그건 그렇지만......"
생각해 보니 그럴 가능성이 더 컸다. 흑사맹이 움직이긴 하겠지만 많은 인원을 빼낼 수 없다면 훨씬 괜찮은 상황이다.
고수가 떼로 몰려오지 않는 이상 얼마든지 몸을 피할 수 있고, 적당한 수라면 충분히 제압할 수도 있을 테니까.
"아마 흑사맹에서도 오라버니가 고수라고는 생각 못할 거야. 그러니 예상에 차질이 생기겠지."'
서하린의 말에 모용혜가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그 말이 옳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걱정 되는 건 어쩔 수 없다. 서하린과 달리 모용혜는 흑사맹을 직접 여러 번 겪어 봤다. 그래서 그들의 무서움을 더 잘 안다.
"그래도 조심해야 돼. 조심해서 나쁠 건 없으니까."
"그야 그렇지."
서하린과 모용혜가 한창 대화를 나누며 걷고 있을 때 무영이 갑자기 걸음을 멈췄다.
"오라버니?"
"왜 그러세요?"
서하린과 모용혜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무영은 굳은 얼굴로 가만히 서서 앞을 노려봤다 . 두 여인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무영과 무영이 바라보는 곳을 번갈아 쳐다봤다.
무영은 자신에게만 쏟아지는 진득한 살기에 긴장감을 끌어올렸다.
살기에 담긴 기세가 정말로 대단했다. 만이리 무영이 무공을 익히지 않은 보통 사람이었다면 심맥이 끊어져 즉사했을 수도 있었다.
"숨어 있지 말고 나오시죠."
무영의 말에 모용혜와 서하린이 화들짝 놀라 고개를 돌려 무영이 바라보고 있는 쪽을 쳐다봤다.
지금 그들이 있는 곳은 빈민촌에서 개봉으로 가는 길목이었다. 주변에 사람이 숨을 만한 곳이라고는 군데군데 서 있는 나무들뿐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무영이 바라보고 있는 나무 뒤에서 두 사람이 슬며시 몸을 드러냈다. 한 명은 마치 뼈다귀만 남은 것처럼 빼빼 말랐고 다른 한 사람은 피처럼 붉은 눈동자를 가지고 있었다.
"우리가 동시에 쏟아내는 살기를 견디다니 보통 놈이 아니로구나."
고루흑마가 눈에 이채를 띠며 말했다. 분명히 떠돌이 약장수라 했다. 듣기로는 무공을 ㅈ너혀 모르는 사람인 듯했다. 한데 지금 보니 꼭 그렇지만도 않았다.
고루흑마가 그렇게 흥미로운 눈으로 무영을 살피고 있을 때, 혈영귀마는 눈을 더욱 붉게 물들이며 무영 옆에 서 있는 두 여인을 훑어봤다.
"아주 맛있게 생긴 계집들이로구나. 크흐흐흐."
서하린과 모용혜는 혈영귀마의 눈길을 받는 순간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그리고 가슴에 으은한 충격을 받았다. 혈영귀마의 음산한 웃음에는 내력이 가득 담겨 있었다.
"흐윽......"
모용혜가 먼저 견디지 못하고 한 발 뒤로 물러섰다. 서하린도 창백해진 얼굴로 뒤로 물러났다.
무영은 당황하며 양 손을 휘저었다.
꽈르릉.
무영의 손을 중심으로 은은한 뇌기가 퍼져 나갔다. 그러자 모용혜와 서하린이 한결 편안한 표정을 지었다. 혈영귀마가 흘려보내는 내력을 무영이 흩어놓은 것이다.
고루흑마는 무영의 그 한 수에 안색이 변했다.
"설마......"
고루흑마가 한 발 앞으로 나섰다. 그의 눈에서 일순 광채가 번득였다. 그리고 온몸이 시커멓게 변해갔다. 고루흑마공이었다.
"뇌기를 제대로 다루는구나. 뇌룡과는 무슨 관계냐? 혹시 네가 뇌룡이냐?"
고루흑마는 그렇게 말을 했지만 설마 무영이 뇌룡일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아무리 그래도 흡혈광마를 죽이고 흑사맹과 유가장의 싸움을 힘으로 눌러 말린 뇌룡이라기엔 너무 젊었다.
"이게 무슨 짓입니까."
무영이 분노하며 혈영귀마를 노려봤다. 고루흑마의 질문에는 굳이 대답하고 싶지 않았다.
자신이 뇌룡이라는 사실을 떠벌리고 다닐 만큼 얼굴이 두껍지도 않았거니와 그것이 나중에 굉장히 귀찮고 복잡한 일로 발전할 수도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일단 무릎을 꿇어라. 죽기 싫으면."
고루흑마의 말에 무영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어째 하나같이 힘 있는 사람들은 이런 식인지 알 수 없었다. 상대를 깔아뭉개고 그 위에 올라서려 한다. 무영은 그것이 너무나 마음에 안들었다.
무영은 고루흑마와 혈영귀마를 지그시 노려봤다.
"크흐흐흐. 간덩이가 한참이나 부은 놈이로구나. 뭐, 어차피 죽일 생각은 없으니까 걱정하지 마라. 그나저나......"
혈영귀마의 눈이 다시 서하린과 모용혜를 훑었다. 서하린은 면사로 얼굴을 가리고 있었지만 혈영귀마에게는 아무런 효과도 없었다.
"정말 살 떨리게 예쁜 계집이로구나. 내 지금까지 백이십년을 살아왔지만 저렇게 예쁜 것은 처음이다."
혈영귀마의 말에 고루흑마가 슬쩍 서하린을 쳐다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고루흑마 역시 서하린의 외모에 감탄했다. 몇 십 년 동안이나 꿈쩍도 않던 성욕이 슬며시 올라왔다.
"오늘은 아주 즐거운 날이 될 듯하구나. 그건 그렇고 아직도 무릎을 꿇지 않았구나."
고루흑마의 눈이 다시 무영에게로 향했다.
"쓸 만한 약을 만든다지?"
고루흑마의 말에 무영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흑사맹?"
고루흑마의 얼굴에 섬뜩한 미소가 나타났다.
"그런 건 중요치 않다. 중요한 건, 약을 만드는데 다리가 필요 없다는 사실이지."
고루흑마가 슬쩍 손을 휘둘렀다. 손끝에서 날카로운 기운이 쏜아져 나갔다. 마치 칼이 휘몰아치는 것 같았다.
무영은 온몸에 힘을 끌어 모아다. 피할 수는 없었다. 무영이 피하면 그의 뒤에 서 있는 두 여인이 다치게 될 것이다. 고루흑마가 쏘아 보낸 기운은 그만큼 대단했다.
"하아압!"
퍼버벙!
무영의 몸 여기저기에서 폭음이 터졌다. 순식간에 자욱한 흙먼지가 무영 일행을 뒤덮었다.
고루흑마는 눈에 이채를 담아 손을 한 번 더 휘저었다. 막강한 경력이 튀어나와 무영 일행을 뒤덮은 흙먼지를 순식간에 걷어냈다.
"호오, 이건 생각보다 더 대단하구나!"
고루흑마가 감탄했다. 무영은 아무런 타격도 입지 않고 우뚝 서 있었다.
고루흑마가 날린 날카로운 기운은 분명히 무영의 다리를 완전히 뒤덮었다. 한데 아무런 흔적도 남아 있지 않았다. 옷조차 멀쩡했다.
"그냥 떠돌이 약장수가 아니로군. 네놈 정체가 뭐냐?"
고루흑마가 팔을 걷으며 한 발 앞으로 나섰다. 고루흑마의 팔은 마치 숯처럼 새까맸다. 고루흑마공을 팔에 집중시킨 것이다. 그와 동시에 얼굴은 귀신처런 창백해졌다.
그 모습에 모용혜의 안색이 급변했다.
"대, 대체 당신은 고루흑마와 무슨 관계죠?"
이처런 몸 색깔이 검게 물들었다 새하얗게 탈색되는 무공은 고루흑마공이 거의 유일했다.
그리고 고루흑마공을 익힌 사람 중 살아남은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이십 년 전 고루흑마가 마지막이었다. 그리고 그는 죽었다고 알려졌다.
한데 그 고루흑마공이 다시 등장한 것이다.
"백이십 년을 살아왔다는 말을 허투루 들었구나."
고루흑마가 음산하게 웃으며 말했다. 모용혜는 경악에 찬 얼굴로 외쳤다.
"서, 설마, 당신이 고루흑마인가요?"
고루흑마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더 이상 감추고 말고 할 필요도 없었다. 어차피 이들은 더 이상 세상의 밝은 빛을 볼 수 없게 될 테니까.
"아아...... 어, 어찌 이럴 수가...... 분명히 이십 년 전에 죽었을 텐데......."
모용혜의 말에 고루흑마가 코웃음을 쳤다.
"흥, 그때 내가 죽는 모습을 누가 확인이라도 했다던가?"
모용혜는 그 말에 대한 답을 알 수 없었다. 너무 오래전 일이라 당시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정확히 전해지지 않았다.
그때의 일에 대해 알려진 사실이라고는 무림맹에서 구대흉마를 주살했다는 것이 전부였다.
모용혜와 서하린에게 눈앞에 있는 사람이 고루흑마라는 사실은 그야말로 충격이었다. 만일 그게 사실이라면 무영이 아무리 대단하다 하더라도 절대 무사히 도망칠 수 없을 것이다.
모용혜가 충격에 빠져 있을 때 이번에는 서하린이 고루흑마 옆에 서 있는 혈영귀마를 보며 뒤로 주춤 물러섰다.
"서, 설마 당신도......"
"내가 바로 혈영귀마다. 그러니 내게 몸을 바치는 걸 영광으로 알도록. 크흐흐흐."
혈영귀마가 음흉하게 웃으며 서하린을 향해 한 걸음 다가갔다. 서하린은 창백하게 질린 얼굴로 몸을 덜덜 떨었다.
"후우, 정말 어떻게 돌아가는 건지 모르겠군."
무영은 그렇게 중얼거리며 고루흑마와 혈영기마를 번갈아 노려봤다. 무영의 눈에서는 마치 번갯불이 번득이는 듯했다.
고루흑마와 혈영귀마는 무영의 눈빛에 섬뜩함을 느끼며 걸음을 멈췄다. 두 사람이 멈추자 무영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그럼 얼마 전에 소주에 나타났던 흡혈광마도 우연히 나온게 아니라 뜻이군."
무영의 말에 고루흑마의 눈이 커졌다.
"네놈이 그걸 어떻게 아느냐?"
놀란 것은 고루흑마뿐이 아니었다. 모용헤와 서하린도 함께 놀랐다. 흡혈광마는 비록 구대흉마 중 가장 약하다고 평가되지만 가장 잔인하고 악랄한 인물이었다.
한데 그런 흡혈광마가 소주에 나타났다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흡혈광마처럼 쉽지는 않겠지? 아무래도 둘이나 되니까."
무영의 말에 고루흑마와 혈영귀마가 몸을 흠칫 떨었다. 그리고 이내 분노 가득한 눈으로 무영을 노려봤다.
"그럼..... 네놈이 뇌룡이로군. 내 아우를 죽인."
고루흑마가 한 자 한 자 씹어 뱉듯 말하자 무영이 대수롭지 않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스승님께서 구대흉마는 반드시 죽여야 한다고 신신당부하셨거든. 그때는 이미 죽은 사람들인데 왜 그러너 말씀을 하시는지 몰랐지만, 이제는 알겠군."
무영은 그렇데 대꾸하며 양손을 가볍게 털면서 몸을 풀었다.
상대는 구대흉마 중 둘이다. 게다가 자신에게는 지켜야 할 사람도 둘이나 있다. 조금이라도 방심하면 낭패를 면치 못할 것이다.
무영 뒤에서 사태를 지켜보던 모용혜와 서하린은 놀란 눈으로 무영의 등을 바라봤다.
'흡혈광마를 죽였어?'
'소주에서..... 그럼 흡혈광마는 설마 서가장을?'
모용혜는 단순히 무영이 흡혈광마를 죽였다는 말에 놀랐지만 서하린은 그 이면에 있는 사실을 발견했다. 정가장과 염왕채가 서가장에 쳐들어왔을 때, 그들은 조력자를 기다리고 있었다.
남궁세가의 좌우쌍위가 있는데도 안중에도 두지 않고 조력자를 기다렸다. 서하린은 그 조력자가 어쩌면 흡혈광마였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만일 그렇다면 무영은 서가장을 살린 은인이다. 흡혈광마가 왔다면 그날 서가장은 절대 무사하지 못했을 테니까.
서하린은 고개를 들어 무영과 두 흉마를 쳐다봤다. 그들은 서로 맞붙기 일보직전이었다. 서하린은 급히 소리쳤다.
"대체 왜 서가장을 노린 거죠?"
서하린의 외침에 고루흑마가 눈을 크게 뜨고 서하린을 쳐다봤다. 그러더니 피식 웃으며 대꾸했다.
"그걸 왜 내게 묻느냐?"
"흡혈광마와 정가장이 손을 잡았다는 걸 모를 것 같나요?"
고루흑마의 안색이 살짝 변했다. 사실과는 조금 다르지만 꼬리가 잡혔다는 사실이 중요했다. 그 사실을 어떻게 알았는지 확인해야만 했다.
"그걸 어떻게 알았느냐?"
'역시.'
서하린은 속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겉으로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말을 이었다.
"그걸 내가 왜 알려줘야 하죠?"
고루흑마가 그 말에 피식 웃었다.
"훗, 어설프군. 일단 이놈을 잡아 족친 후, 쾌락에 몸을 떨면서 술술 불게 해주마."
고루흑마의 눈이 순식간에 욕정에 불탔다. 서하린은 그 눈빛에 온몽에 벌레가 기어가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얼굴을 찡그리며 뒤로 물러났다.
"네 상대는 나 아니었나?"
무영은 그렇게 말하며 고루흑마의 시선을 다시 가져왔다. 그리고 양손에 뇌기를 모았다.
빠지지직!
무영의 양 주먹에 섬광이 어리기 시작했다. 꽤 강렬한 뇌전이 요동쳤다.
"호오, 정말로 뇌기를 자유자재로 다루는구나. 뇌기라는 건 세상에서 가장 강하다 해도 과언이 아니지. 하지만 아무리 강해도 맞아주지 않으면 의미가 없는 법."
고루흑마의 몸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그리고 무영 옆에서 유령처럼 솟아올랐다. 그 귀신같은 움직임에 서하린과 모용혜의 눈이 커다래졌다.
하지만 무영은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손을 들어올렸다.
빠직!
"크윽......"
고루흑마는 당황한 얼굴로 뒤로 물러섰다. 방금 무영의 관자놀이를 향해 주먹을 날렸는데, 무영이 뇌기 가득한 손으로 그것을 막아낸 것이다.
고루흑마의 주먹을 확인한 사람은 장내에 무영뿐이었다.
"제법이군."
고루흑마는 저릿저릿한 손을 흔들며 무영과 거리를 벌렸다. 아무리 대충 움직였다고 하지만 자신의 움직임을 잡아냈다는 건 충격이었다.
고루흑마의 몸이 더욱 새까매졌다. 고루흑마공을 극성까지 끌어올린 것이다. 고루흑마의 몸이 또 사라졌다. 이번에 나타난 곳은 무영의 뒤였다.
고루흑마는 무영의 등을 향해 흑마장을 내질렀다. 지독한 마기가 무영을 향해 쏟아져 나갔다.
"흐아압!"
커다란 기합소리와 함께 무영의 온몸에서 뇌전이 뿜어져 나왔다.
콰과광!
흑마장과 뇌기가 부딪쳐 거대한 폭음을 울렸다. 고루흑마는 창백해진 얼굴로 뒤로 주춤 물러났다. 그의 양옆에 서하린과 모용혜가 놀란 눈으로 서 있었다.
고루흑마는 양팔을 뻗어 두 여인을 잡으려 했다. 하지만 무영의 움직임이 훨씬 빨랐다.
콰득!
무영은 어느새 고루흑마 앞에 서 있었다. 고루흑마의 양 손목을 제압한 채로 그를 노려봤다.
파직! 파직! 파지지직!
무영이 조금 전까지 서 있던 자리에서 미약한 뇌전이 번득였다.
"크으윽......"
고루흑마는 괴로운 신음을 흘렸다. 무영에게 잡힌 손목으로 부터 뇌기가 밀려들어왔다. 몸에 침입한 뇌기가 혈맥으로 파고들었다. 그 고통이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였다.
"그 손 놔라!"
이번에는 혈영귀마가 외치며 몸을 날렸다. 혈영귀마의 양손에서 시뻘건 덩어리가 뭉클거리며 튀어나왔다. 그것은 무영을 향해 쏜살같이 날아갔다.
무영은 고루흑마를 앞으로 쭉 밀이 던지며 양손을 들어올렸다. 무영의 손에 강렬한 뇌기가 일었다.
빠지지직!
퍼버벙!
붉은 덩어리는 뇌기와 부딪쳐 산산이 부서졌다. 그것은 혈영귀마의 혈기(血氣)였다. 혈기 덩어리는 뇌기에 의해 흔적도 남지 않고 타 버렸다.
"정말로 보통 놈이 아니구나."
고루흑마는 몸에 침투한 뇌기를 서서히 흩어버리며 중얼거렸다.
무영의 움직임은 고루흑마조차도 쫓기 어려울 정도로 빨랐다. 그리고 강했다. 무영이 다루는 뇌기라는 힘은 상대하기가 너무 까다로웠다.
고루흑마는 혈영귀마에게 눈짓을 했다. 혈영귀마는 음산한 미소를 지으며 혈무공을 끌어올렸다. 혈영귀마의 몸에서 붉은 안개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크흐흐흐. 내가 왜 혈영귀마라 불리는지 보여주마."
혈무가 순식간에 혈영귀마와 고루흑마를 감쌌다. 핏빛 안개느 그것만으로 모자라는 듯 점점 세력을 확장했다. 스멀스멀 기어서 무영이 있는 곳으로 뻗어나갔다.
무영은 혈무가 다가오는 것을 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혈무에 담긴 기운이 왠지 심상치 않아 보였다.
무영이 그러고 있을 때, 모용혜가 뾰족한 목소리로 외쳤다.
"조심하세요! 혈독무(血毒霧)예요!"
"혈독무?"
"그걸로 화산파 장문인을 죽였어요!"
혈영귀마의 혈독무는 실제로 상당히 무서운 무공이었다. 그것은 혈기를 이용한 일종의 독 안개였다.
혈독무는 상당히 무서운 마비독이었다. 일단 들이마시면 혈영귀마가 혈독을 제거해 주기 전까지 몸을 움직일 수 없게 된다.
이십 년 전, 화산파 장문인뿐 아니라 화산파에서 손가락에 꼽히는 고수 스물이 한꺼번에 혈독무에 갇혀 허무하게 죽임을 당했다.
무영은 모용혜의 설명을 들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긴장은 했지만 두렵지는 않았다. 무영의 몸에서 조금씩 뇌기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일단 몸 밖으로 나온 뇌기는 뇌전을 만들며 사방으로 흩어졌다.
무영의 몸 주변으로 섬광들이 피어났다. 밝은 뇌사(雷蛇)들이 몸 여기저기에서 튀어나와 사방으로 구불거리며 요동쳤다.
빠지지지직!
치지지직!
무영의 몸에서 흘러나오는 뇌전이 혈무에 닿는 순간 혈무가 붉은 연기가 되어 흩어졌다. 뇌기가 혈무를 태운 것이다. 무영은 훨씬 더 많은 뇌기를 방출했다.
순식간에 무영의 몸이 완전히 벼락으로 뒤덮었다. 지금 무영의 모습은 예전 흑사맹과 유가장의 싸움을 말릴 때와 똑같았다.
"후우우......"
무영은 호흡을 고르며 몸을 조금씩 움직였다. 여전히 혈무가 자욱히 퍼져나가고 있었다.
모용혜와 서하린은 긴장 가득한 얼굴로 무영과 혈무를 바라봤다.
혈독무의 무서움에 대해서는 많이 들어왔다. 예전 구대흉마와 무림맹의 싸움은 지금도 수많은 이야기꾼들에게 회자될 정도로 유명한 이야기였다.
두 여인의 눈이 커다래졌다. 갑자기 무영의 몸이 수십 개로 불어난 듯했기 때문이다.
수십으로 불어난 무영의 몸은 곳곳을 누볐다. 무영의 몸이 한 번 지나간 자리에는 혈독무가 깨끗이 타 버렸다.
혈영귀마가 뿜어낸 혈독무가 대부분 사라지기까지 걸린 시간은 촌각에 불과했다.
"뭐야, 저 괴물 같은 놈은!"
혈영귀마는 자신의 혈독무가 대부분 사라지자 놀라서 소리쳤다. 더 이상 혈무공을 끌어올리는 것은 바보 같은 짓이었다.
혈영귀마는 긴장한 얼굴로 고루흑마를 쳐다봤다. 무영에 대한 두려움이 슬며시 일어난 것이다.
고루흑마는 어금니를 꽉 물었다. 가슴이 떨려왔다. 이것이 두려움인지 강한 자와 싸우기 때문에 생긴 희열인지 구분할 수 없었다.
"대단한 놈인건 확실하군. 그래도 이기는 건 우리다."
고루흑마는 그렇게 말하며 혈영기마에게 전음을 보냈다.
[인질을 잡아라.]
혈영귀마는 고개를 끄덕이며 무영 뒤에서 서 있는 두 여인을 쳐다봤다.
아무리 무영이 대단하다고 해도 고루흑마와 싸우는 와중에 자신으로부터 두 여인을 모두 지켜낼 수는 없을 것이다.
[한 명이면 충분하다. 한 명만 노려라.]
고루흑마가 덧붙인 말에 혈영귀마가 굳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한 명만 노리는 것이 확실한 것은 맞다. 혈영귀마는 면사를 쓰고 있는 서하린을 노리기로 결정했다. 서하린이 훨씬 예뻤기 때문이다.
혈영귀마이 얼굴에 음흉한 웃음이 스쳤다. 그 순간 고루흑마가 고루흑마공을 극성까지 끌어올리며 무영을 덮쳤다.
콰아아아!
거대한 기세가 바람이 되어 무영을 덮쳤다.
꽈르릉!
무영의 몸을 뒤덮은 벼락이 더욱 거대해졌다.
혈영귀마는 은밀하게 몸을 날렸다. 자신이 낼 수 있는 최대한의 속도로 빙 돌아 모용혜와 서하린 사이로 들어섰다.
혈영귀마의 경공이나 보법은 구대흉마 중에서도 수위를 다툰다. 혈영귀마는 무영이 절대 눈치채지 못했다고 확신했다. 혈영귀마의 손이 서하린의 어깨로 향했다.
막 서하린의 어깨가 혈영귀마의 손아귀에 잡히려는 순간, 거대한 벼락이 쏟아져 나갔다.
꽈르릉!
"커어억!"
고루흑마는 낭패한 얼굴로 비틀거렸다. 그의 눈에 저만치 나가떨어진 혈영귀마의 모습이 들어왔다.
"미, 믿을 수가 없구나....."
고루흑마는 믿을 수 없었다.
자신과 손을 섞어 압도하면서도 한편으로 혈영귀마를 견제할 수 있다는 것을 믿을 수 없었다. 이 정도라면 구대흉마 중 누구도 일대일로는 절대 이길 수 없을 것이다.
혈영귀마는 바닥에 쓰러진 채로 꿈틀거렸다. 꿈틀거릴 때마다 빠직거리며 뇌전이 공중으로 흩어졌다. 정신을 잃은 듯 눈에는 흰자밖에 보이지 않았다.
고루흑마는 무득 두려워졌다. 자신이 저런 꼴이 되지 말란 법이 없지 않은가.
'무서울 정도다. 나도 혈영귀마의 움직임을 파악하지 못했거늘......'
"자, 이제 하나 남았군. 시간 없으니 빨리 끝내주지."
무영은 호쾌하게 말하며 앞으로 한 발 움직였다. 무영이 한 발 나서자 고루흑마가 한 발 뒤로 물러났다. 무영의 온몸에서 빠직대는 뇌전이 그렇데 두려울 수 없었다.
고루흑마는 혈영귀마와 무영을 번갈아 쳐다봤다. 이대로 도망가는 것은 참으로 수치스러운 일이지만 지금은 어쩔 수 없었다.
혈영귀마는 보아하니 다시 회생하기가 어려울 것 같았다. 지금 자신까지 붙잡히느니 차라리 도망가서 후일을 도모하는 게 훨씬 현명한 선택이었다.
'그냥 도망가면 분명히 잡힌다.'
방금 전 무영의 그 어마어마한 능력을 봤다. 그냥 몸을 돌렸다간 벼락에 맞아 혈영귀마와 똑같은 꼴을 당할 것이다.
'젠장. 그놈들을 데리고 왔어야 하는 건데.'
은왕이 내려준 일백 흑귀들이 함께한다면 뇌룡과 싸워 이길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들이 펼치는 박룡검진(博龍劍陳)은 말 그대로 절대고수 하나를 상대하기 위한 검진이다. 뇌룡처럼 막강한 자를 상대하기 위해 고안해낸 훌륭한 검진이었다.
그들이 박룡검진을 펼치고 자신과 혈영귀마가 날뛴다면 아무리 뇌룡이 강하더라도 충분히 이길 수 있을 것이다. 고루흑마는 그것이 너무나 아쉬웠다.
고루흑마는 고루흑마공을 최대한 끌어올렸다. 지금 그가 믿을 건 그것뿐이었다.
고루흑마공은 온몸을 금강불괴에 가깝게 만드는 효과가 있었다. 극성으로 끌어올리기만 하면 아무리 도검에 부딪쳐도 끄덕없었다.
'더불어 이런 효능도 있지.'
고루흑마의 몸이 점점 더 새까마졌다. 마치 온몸에서 먹물이 흘러나오는 것 같았다. 옷까지 검게 물들 정도였다. 고루흑마의 몸이 꿀렁거렸다.
무영은 그 순간 눈을 빛냈다.
"교활한 놈이로군."
무영이 주먹을 꽉 쥐고 앞으로 그대로 내질렀다.
꽈르릉!
무영의 주먹에서 벼락이 쏟아져 나갔다.
그 벼락은 고루흑마의 몸을 그대로 강타했다. 고루흑마는 전혀 반응조차 하지 않았다. 고루흑마의 몸이 산산이 부서져 가루가 되어 흩어졌다.
안개처럼 흩어진 검은 가루 뒤로 엄청난 속도로 도망가는 고루흑마의 모습이 보였다. 고루흑마공으로 만든 가짜 몸을 세워놓고 진짜 몸은 은밀히 빠져 도망간 것이다.
무영은 멀어져 가는 고루흑마를 차가운 눈으로 노려봤다.
꽈릉!
천둥소리와 함께 무영의 몸이 사라졌다. 방금 전까지 무영이 서 있던 자리에 뇌전이 줄기줄기 쏟아졌다.
빠지지직.
서하린과 모용혜는 이 엄청난 광경을 그저 멍하니 쳐다볼 뿐이었다. 두 여인의 눈이 멀어져가는 고루흑마에게로 향했다.
꽈르릉!
뇌성과 함꼐 고루흑마가 직각으로 꺾여 옆으로 날아갔다. 바닥에 쓰러진 고루흑마가 몸을 부들부들 떠는 모습이 보였다.
"어, 어떻게 저런 신위가 가능한 거지?"
모용혜는 자신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지금까지 자신이 뇌룡 화무영을 너무 과소평가해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정도라면 구대흉마가 모조리 몰려와도 이길 수 있을 것 같았다.
무영이 고루흑마 옆에 서서 두 여인을 향해 손짓을 했다. 어차피 그쪽으로 가야 개봉으로 들어설 수 있으니 가긴 가야 헀다.
서하린과 모용혜가 멍한 표정으로 무영을 향해 걸어갔다. 무영의 몸에는 어느새 뇌기가 말끔히 사라져 있었다. 뇌기가 없는 무영의 모습은 영락없는 떠돌이 약장수였다.
유가장이 무너졌다는 소문이 파다하게 퍼져 나갔다. 놀랍게도 유가장은 단 한루 만에 무너졌다. 흑사맹과의 싸움에서도 살아남았는데 정체불명의 흉수에게 무저진 것이다.
소문은 날개라도 달린 듯 곳곳으로 스며들었다. 당연히 소문은 개봉에도 자리를 잡았다.
"정말? 정말로 유가장이 무너졌어?"
"그렇다니까. 나도 믿을 수가 없어."
서하린과 모용혜는 놀란 눈으로 유가장의 몰락에 대해 이런 저런 얘기를 나눴다.
"역시 흑사맹이겠지?"
"그렇겠지. 그래도 아무리 흑사맹이라지만 하루에 아무도 모르게 유가장을 처리할 수는 없었을......"
서하린은 말을 하다 말고 입을 다물었다. 그렇게 될 수 있다. 고루흑마와 혈영귀마가 무영을 찾아오기 전에 유가장에 들렀다면 말이다. 흑사맹과 그들이 손을 잡았다면 충분히 가능하다.
"왜 말을 하다 말아?"
"말이 되는 것 같아서. 그들이라면 가능하니까."
"그들? 설마......"
서하린이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구대흉마야. 아마 오라버니를 찾아오기 전에 유가장부터 처리했을 거야."
서하린의 말에 모용혜가 회의적인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구대흉마가 유가장을 처리할 이유가 없는데...... 그들이 뭐가 아쉬워서?"
"그럼 그들이 뭐가 아쉬워서 우리 서거장을 노렸을까?"
구대흉마가 서가장을 노렸다는 말에 모용혜가 깜짝 놀랐다.
"그게 무슨 말이야?"
"말 그대로 구대흉마가 서가장을 노렸었어. 오라버니 덕분에 살았지만......"
서하린의 말에 모용혜가 고개를 돌려 무영을 바라봤다. 무영은 침상에 앉아 두 여인의 대화를 가만히 듣고만 있었다.
"정말인가요? 구대흉마를...... 설마 그럼 흡혈광마?"
서하린이 고개를 끄덕였다.
"당시 정황을 생각하면 분명해. 정가장도 틀림없이 구대흉마와 손을 잡았어. 흑사맹도 마찬가지고."
모용혜의 눈이 믿을 수 없다는 듯 흔들렸다. 하지만 그렇게 생각하면 아귀가 어느 정도 맞아 떨어진다.
"대체 그들이 왜......."
아무리 구대흉마라지만 이렇게 함부로 날뛰다가 무림맹에 걸려드는 날에는 무사하지 못한다.
무림맹은 그리 호락호락한 곳이 아니다. 비록 이십 년 전의 싸움으로 구대문파의 정기가 많이 훼손되긴 했지만, 그 이십년이라는 세월은 훼손된 힘을 보충하기에 충분한 시간이었다.
"뭔가가 있어. 그게 뭔지는 모르지만."
서하린의 말에 모용혜는 고개를 끄덕이지 않을 수 없었다. 뭔가 있는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그 실체를 잡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더 답답했다.
"구대흉마가 전부 살아 있고, 그들이 한꺼번에 날뛴다면 정말로 무섭겠지?"
모용혜의 말에 서하린이 생가도 하기 싫다는 듯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건 정말로 끔찍한 일이었다. 두 여인은 그렇게 몸을 떨다가 문득 고개를 돌려 무영을 바라봤다.
그러자 떨리던 몸이 거짓말처럼 멎었다.
"오라버니, 지켜주실 거죠?"'
서하린이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무영은 그런 그녀의 웃음이 너무 보기 좋았다. 가슴이 떨릴 정도로.
무영의 얼굴에도 환한 웃음이 떠올랐다. 그리고 고개가 위아래로 움직였다.
모용혜는 왠지 그 모습에 가슴이 아려왔다.
조양은 흑사맹의 모든 힘을 동원해 뇌룡에 대한 정보를 모았다. 하지만 아무것도 알아낼 수가 없었다. 거의 유일한 접점이던 유가장도 깨끗이 사라져 버렸으니 더 막막했다.
조양은 두려웠다. 고루흑마와 혈영귀마가 어떤 자들인지 너무나 잘 알기에 더 두려웠다. 그들이 돌아오기 전까지는 어떻게든 성과를 만들어내야만 했다.
그렇게 조양이 벌벌 떤 지 칠일이 지났다. 그때까지도 두 흉마는 나타나지 않았다. 조양은 목숨을 연장할 수 있어 기뻤다. 하지만 그렇게 이틀이 더 지나자 마냥 기뻐하고만 있을 수는 없었다.
안절부절 못하는 조양에게 흑귀들이 찾아왔다. 흑사맹에 파견된 흑귀들의 책임자는 흑령이라 불린다. 조양은 흑령이 다가오자 긴장했다.
"무, 무슨 일이오?"
"두 장로님들이 아직도 안 돌아오셨소. 그분들이 어디로 가셨는지 말해 주시오."
어려울 것 없었다. 조양은 흔쾌히 대답했다.
"그분들은 개봉으로 가셨소."
"개봉?"
"개봉에 약장수 하나를 잡으러 가셨소."
조양의 말에 흑령의 얼굴이 꿈틀거렸다.
"내가 지금 네놈과 장난 하는 걸로 보이나?"
흑령의 몸에서 날카로운 기세가 뭉클거리며 흘러나왔다. 조양은 당황해서 급히 손사래를 쳤다.
"진정하시오. 내가 왜 귀하에게 허튼소리를 하겠소. 내 말은 진짜요."
조양의 말에 흑령은 기세를 거둬들였다. 그리고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대체 약장수는 왜 잡으러 갔단 말이오?"
"상당히 쓸 만한 약을 만드는 자요. 그분들께서 큰 흥미를 보이셨소."
조양의 말에 흑령이 그제야 고개를 끄덕였다. 어떨 때는 자신조차 종잡기 힘든 자들이다. 생각해 보면 충분히 그럴 수도 있을 듯했다.
흑령은 고개를 몇 번 끄덕이고는 뒤돌아 물러갔다.
조양은 흑령이 사라지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후우, 정말로 귀신같은 자로군. 그나저나 왜 아직도 안 오는 거지? 설마 무슨 일이 생긴 건 아니겠지"
조양은 잠시 고민하다가 이내 고개를 저었다. 지금 그에게 더 급한 건 그들의 안위가 아니라 자신의 안위였다.
그것을 잘 지키기 위해서는 어서 뇌룡에 대한 정보를 모아야 했다.
흑령은 흑귀들을 모조리 이끌고 개봉으로 쉼 없이 달려갔다. 좋지 않은 예감이 들었기 때문에 상당히 서둘렀다.
"흩어져서 찾아라."
흑령의 명에 흑귀들이 사방으로 흩어졌다. 그들의 움직임은 빠르고 은밀했다.
흑령은 흑귀들이 흩어지는 것을 확인하며 천천히 주변을 돌았다. 개봉에 그들이 있을 만한 곳은 기루 정도였다. 구대흉마가 허름한 객잔에 머물지는 않을 것 아닌가.
흑령은 흑귀들과 개봉을 이 잡듯 뒤졌다. 하지만 찾을 수 없었다. 그들의 탐색 범위가 조금씩 넓어졌다.
그리고 개봉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쓰러져 있는 그들의 시체를 발견했다.
시체는 인적이 없는 숲에 버러져 있었다.
"믿을 수가 없군."
흑령은 그렇게 중얼거리며 시체를 살폈다. 얼굴에 고통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상당히 고통스럽게 죽은 모양이었다.
옷자락이 풀어 헤쳐져 있는 걸로 봐서 누군가 이미 시체를 한 번 뒤진 듯했다. 그래도 일단 확인은 해야 했다.
"옷을 벗겨 봐라."
흑귀들이 두 시체의 옷을 벗겼다. 흑령은 고루흑마의 옷에서 뭔가를 발견하고 손을 뻗었다. 흑귀가 옷을 흑령에게 전했다.
흑령은 옷 속에서 단환 하나를 발견했다. 돈주머니나 돈이 될 만한 건 하나도 없었는데 오직 그 단환 하나만 남아 있었다.
"이건 뭐지?"
흑령은 잠시 고민하다가 일단 품에 약을 넣고 두 흉마의 시체를 살폈다. 그리고 침음성을 흘렸다.
"으음, 이건......"
믿을 수 없게도 벼락에 맞은 듯했다. 시체에 이런 흔적을 남길 수 있는 사람은 지금으로써는 한 명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뇌룡이 개봉에 있었군."
그것이 흑령이 내린 결론이었다. 흑령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손을 슬쩍 들었다.
"철수한다."
흑령의 명에 흑귀들이 신속히 자리에서 물러났다. 물론 두 흉마의 시체도 함께였다.
흑령은 흑귀들이 모두 사라진 후에야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은왕꼐 보고 드려야겠군."
흑령의 모습도 이내 서서히 사라져갔다.
시체 두 구가 잠자던 솦은 다시 침묵에 빠져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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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잼나게 봤습니다.다음을 기다릴게요.감사합니다.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잘보고갑니다..~~
16.1.18
기대하시라 다음 편을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들감
감사합니다
잘 읽었습니다
점점 재밌네요^^
매일 올려주시면 좋겠습니다.
잘읽었습니다. 감사...
고맙게 잘보고 있어요~~~
즐감
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