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
결혼해서 처음 들어간 이문동 집은 철로변 13만 원짜리 전셋집이다. 70년도에 불교신문 기자하면서 장가들 때 부모님 지원 한 푼 없이, 결혼축의금으로 마련한 집이다. 그곳은 홍수 때 중량천이 범람하여 물에 잠겼던 곳이라 이문동 중에서도 가장 싼 곳이었다. 방 하나에 현관 겸 부엌이 붙고, 창문 없는 방은 양철지붕이라 여름에 무척 더웠다. 잠잘 때 다리 뻗으면 다리가 벽과 캐비닛에 닿아 다리를 구부리고 자야 했다. 가구라곤 신혼이랍시고 마련한 캐비닛 하나와 밥그릇과 숟가락 몇 개가 전부였다.
명동서 출생하여 덕수 초등, 이화 여중고, 고대 나온 아내는 임신 중 서울 구석배기 이문동 셋방에서 팬티 런닝만 입고 긴 여름 더위에 지쳐있다가, 남편이 퇴근해서야 겨우 부엌문 닫아걸고 수돗물로 샤워하고, 저녁 먹고 바람 씐다고 더러운 냇물 흐르는 뚝방에 가곤 했다. 간혹 어머님이 오시면 우리가 불쌍해서, 냄비도 사오시고 연탄도 넣어주시고, 꾸깃꾸깃한 용돈도 놓고 가시곤 했다.
두 번째 살았던 집은 수유리 25만 원짜리 전셋집이다. 당시 보통 전세금 30만원보다 5만 원 싼 집이다. 대한불교신문에서 월급 1만6천원 받다가 공개시험 치고 내외경제 수습 1기 기자 합격해서 옮겨 4만 5천 원 받던 때다.
집주인은 기독교방송 기자였는데, 부인이 어떻게 잘난체 하는지, 우리더러 대문을 못쓰고 화장실 옆문을 쓰게 했다. 강아지 데려가니 싫다고 해서 남에게 주었고, 거기서 아들 낳았는데 기저귀물 많이 쓴다고 수도세 올렸다.
며느리 산간호 오신 어머님이 주인 눈치 보고 굽신굽신하시던 모습이 지금도 가슴 아리다. 고향에 방 아홉 개 큰 기와집에 사시던 어머님이다. 얼마나 맘이 아프셨으면 나에게 나지막이 '사주를 보니 네가 나중에 큰 회사 사장 된다더라'라고 속삭여주시곤 하셨다. 돌아가신 어머님께 나는 죄인이다.
세 번째 집은 수유리서 더 변두리로 나간 창동에 마련한 정국이네 문간방이다. 전셋값이 6개월마다 올라서 발버둥 치며 저축해도 더 변두리로 밀려갈 수밖에 없었다. 여기서 직장인 남산 밑 회현동 신문사까지 버스로 한 시간 반이 걸렸다. 셋집 주인은 사람 좋았으나, 반지하에 미장원 세든 여자가 고약하였다. 여름밤에 간혹 우리는 옥상에 가서 도봉산을 쳐다보며 바람을 쐬었는데, 옥상에 놓아두었던 자기 고추장이 누구 손을 탔다고 우리를 의심하는 바람에 근처로 옮겨갔다.
네 번째 집은 집장사 집으로 정원이 큰 집이다. 여기서 아들 돌을 맞아 어린이 프로 때문에 월부로 흑백 TV를 처음 샀으니, 재산목록 1호였다. 지금 장가가고 신도리코 계장인 아들이 당시 '딸랑딸랑 딸랑딸랑 으쓱으쓱' 어린이프로 이 음악만 나오면 춤추며 재롱부리던 일이 새롭다. 그러나 어느날 아침 우리 일가족 3명은 연탄가스에 중독되어 죽을 뻔했고, 돈이 없어 병원에 못 가고 동치미 국물로 치료한 바람에 그 이후 우리 부부 모두 기억력이 나빠지고 말았다.
진짜 가난하던 시절이었다.그러나 요즘 386세대처럼 '가진 자와 못 가진 자' 소리는 하진 않았다. 사실 자본주의 사회는 냉엄하다. 고등학교 동창 하모군을 퇴근길에 창동서 우연히 만났는데, 알고보니 그는 내가 살던 집장사집과 똑같은 큰 정원이 있는 쌍둥이 옆집에 살았다. 그는 유명한 하점생 서울시 교육감 조카로 집안이 넉넉해서 같은 사회초년생인데 대궐 같은 집에 살았다. 그 친구 부인은 내가 복학한 고대 국문과 여학생이라 나도 알고 아내도 아는 얼굴인데, 지하 전세방에 사는 우리 집엔 일체 놀러 오질 않았다.
대학친구 하나는 대구 부잣집 아들이었다. 그는 졸업 후 취직않고 백수로 놀았지만, 부친이 사준 가게 붙은 마포집과 김포 가도 빌딩이 1년마다 천문학적 숫자로 값이 올랐다. 열심히 일해도 되지않겠구나. 절망감 비슷한 것이 가슴속에 고이기 시작했다. 죽자 사자 일하고 쥐꼬리 월급 받아야 무슨 소용인가? 명문대가 밥 먹여주나? 소용없다. 사회는 그런 걸 알아주지 않는다. 서울대도 마찬가지. 당시 신문사에 서울대 출신 선배 기자 한 분이 있었는데, 그 분이 요절하여 상가에 가보니 미아리 길음시장 단칸방에서 유난히 미인이던 미망인 혼자서 울고 계셨다. 그때 배고픈 기자 그만 두고 회사원 되자고 결심했다.
겨울밤 버스에 흔들리며 창동에 내리면, 칼바람은 웡웡 귓전을 때리는데, 그 겨울 얼어붙은 땅에 떨어진 달빛 아래 시커먼 전봇대 그림자가 꼭 내 모습 같았다. 나는 왜 이런가? 울고 싶은 심정으로 포장마차에 들어가 따뜻한 어묵국물을 안주 삼아 소주를 마시곤 했다.
다섯 번째 전셋집은 이문동 과부집이다. 그곳은 경성사범 나와서 자유당 명동 부녀위원장 지내신 장모님이 몰락한 후 버스 정류장 옆 길가 구멍가게 하시던 곳 근처다. 아내는 장모님 식사와 빨래 도와주고 아이 간식비와 부식비를 보충했다. 우리는 저금하느라 눈이 빨개가지고 플라스틱 바가지도 꿰매 쓰고 슬리퍼도 꿰매 신었다. 주인인 과부는 자식은 있지 수입은 없지, 세든 사람들 갈취하고 살았다. 방마다 전기 수도세 분담시키고 자기는 한푼도 안 내어 셋방 사람들이 성토하곤 했다.
나는 여기서 재산목록 2호 선풍기를 샀다.어찌나 대견한지 시원한 바람을 몇 번씩이나 틀어보며 아내와 기뻐하던 그 시절이 지금도 잊히지 않는다. 이때 태어난 딸애가 지금은 미국서 박사학위 마치고 판사와 결혼하여 일산에 산다.
궁즉통(窮則通)이란 말 있다. 궁하면 통하는 것이다. 월급은 거북이 걸음이고 전셋값은 토끼뜀이라, 1년 저축해도 오르는 전셋값을 못 따라갔다. 이렇게 평생 살 생각하니 귀도 차지 않아서 이판사판 눈 딱 감고 일을 저질렀다.
이문동 꼭대기에 축대집이 하나 있었다. 아마 이 집이 이문동 전체에서 가장 작은 집일 것이다. 대지 28평 건평 15평, 방 셋. 가격은 230만원이라 했다. 아카시아 무성한 축대 아래로 청량리서 춘천 다니는 기차가 보였다.
흥국생명보험에서 100만원 빌리고, 사내 새마을금고, 언론인금고, 전세금 합치고도 돈이 모자라, 방 세 개 중에서 큰방 가운데방 두 개는 세를 주고, 나는 옆탱이 작은 방 하나만 쓰기로 하고 그 집 계약했다. 꼬불꼬불 배배 꼬인 좁은 골목길 돌아올라가면, 오래된 벽돌 엉성하게 쌓아 올린 담장 허술한 그 집이 내가 서울서 처음 소유해 본 집이다.
그러나 우리 부부는 집주인이란 생각에 그렇게 행복했다. 누구는 셋방살이 끝에 내집 마련하여 자기 이름 적힌 문패를 달면서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전세살이 4년 만에 나는 그야말로 살 떨리는 감격적 내 집 입성을 했다. 그러나 그다음 악전고투한 이야기 말로 어찌 다하랴! 배보다 배꼽이 더 컸다. 빌린 돈 이자 갚기 위해 이를 악물고 살았다. 출퇴근용 버스표 달랑 두 장 들고 신문사 나가면, 삼영다방 아가씨가 와서 커피 주문을 받는데, 나만 주문을 못했다. 그때 옆자리 선배가, '이 사람아 집도 집이지만 명색이 기자가 아침에 모닝커피 한잔 않고 어찌 일과를 시작하니? 앞으로 무한정 당신 형편 될 때까지 모닝커피 책임질 터이니 내 이름 긋고 마시게' 했다. 이 분 이름이 이태성이다.
점심은 긋고먹는 배달도시락이었다. 춥고 배고프던 시절이라 그것도 일미였다. 담뱃값 절약하려고 하루방 담배를 피웠다. 명동 거리에 나가서 마도로스 파이프 사서, 아침에 출근하면 잎담배 채워 한 모금 피우고 끄고, 점심 먹고 한 모금, 퇴근 전에 한 모금 하는 식으로, 한 달 하루방 한통으로 담배를 해결했다.
편집국의 나이 많은 고참선배 속에서 새파란 수습기자가 파이프 물고 다니는 모습을 상상해 보라. 박모 편집국장 네 사정을 아는지라, '자네 파이프 아주 멋있는데?' 격려해주시곤 했다. 몸이 튼튼했기 다행이지, 그러다 병이라도 났으면 어쨌을까? 치료비 때문에 모든게 결딴나고 말았을 것이다. 좌우지간 이렇게 1년 버티자 나는 모닝커피 내 돈 내고 사 먹을 수 있게 되었고, 재산목록 3호인 25만 원짜리 청색전화도 놓았다.(당시 백색전화는 100만 원 하던 시절이다) 그리고 마당 한 뼘 땅에 배나무 심고, 배꽃 감상하며 내 인생에서 가장 아름다운 세월을 살았다.
그 후 신문사 그만두고 기업체로 옮겨갔다. 몇 년 뒤 축대집 1천2백만원에 팔고, 9백만 원 대출 얻어 33평 집을 2천백만 원에 샀고, 그 집을 3층으로 올려 전세 끼고 9천8백만 원짜리로 만들었다. 그리고...그리고... 아이들 학군 때문에 이문동에서 강남으로 이사 가서 대치동 13평 주공아파트에 살다가 두 번째 연탄가스 먹고 돈이 없어 병원 대신 김칫국 마시고 넘겼고, 그다음 17평 신해청아파트에 살다가, 31평 은마아파트 전세살이 끝에, 처음으로 1억짜리 서초동 33평 아파트 마련했다. 그때가 나이 불혹 넘어서다. 아남건설에서 세운 조합 아파트 하나 얻었던 것이다. 1억이면 월100만원씩 저축해도 대략 10년 걸린다. 그러나 생계비 교육비 쓰고 나면, 월 100만 원씩 저축할 수 있던 가정이 어디 있던가?
좌우지간 이렇게 강남에 아파트 한 채 마련하느라고 청춘시절 20년을 허비했다. 가난의 뜨거운 맛을 본 사람은 안다. 나는 눈에 불을 켜고 회사에서 일했다. 집 마련 후부터 토요일 일요일 없이 무조건 비서실에 나가서 일하고, 평일도 밤 10시 전에는 퇴근 않았다. 다른 누구들처럼 친구 만나가며 어영부영한 것이 아니라, 독 오른 독사처럼 살았다. 다시는 이문동 전세방 시절로 되돌아가기 싫었기 때문이다. 그 덕택에 재계에서 지독한 노인으로 정평이 났던 회장이 20년간을 감탄하며 나를 자기 최측근에 두었을 것이다. 젊은 시절 혹독한 가난은 이래서 인생의 스승이다.
그 다음 이사 간 곳은 강남구 삼성동 61평 빌라. 이 집은 대리석 바닥에 벽난로에 욕조와 세면기 보일러 전부 외산이다. 정원에는 감, 모과, 매화, 철쭉, 앵두, 체리, 청포도, 백목련, 자목련, 백장미, 흑장미, 피스장미, 백송(白松)까지 있었다. 걸어서 강남 중심지 테헤란로 10분 위치에 이런 정원이 있는 집은 드물다.
그러다 퇴직하자 2001년에 집을 외국인에게 월세 주고, 구리 토평 삼성아파트 45평으로 가서 두 번 다시 세상 일은 되돌아보지 않고 전원생활 했다. 또 2005년 초에 수지 61평 대우아파트로 옮겼다. 수지는 서울과 거리는 멀지만, 전용 텃밭 크고, 거실 하나가 15평이니 내가 서울에 처음 마련했던 이문동 축대집 건평 전부 합친 넓이이다. 내겐 과분한 느낌도 들지만, 그동안 같이 고생한 아내에 대한 보답인 셈이다. 올봄부터 우리 부부는 호미 들고 텃밭에서 상추 토마토 등 무농약채소 가꾸어 자급자족하며 살 것이다.
고진감래(苦盡甘來) '젊어 고생은 돈주고도 못산다'지만, 어쨌든 우리는 이렇게 어렵게 살았다. 한 가지 자랑스러운 것은, '한강의 기적'을 이룩하고 우리나라 경제를 세계 11위권에 올려놓은 주역은, 바로 우리 해방둥이 전후(前後) 세대인 점이다. 그러나 지금 386세대는 이런 힘든 前세대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것 같다. ( 이 글 초안은 19년 전 대우아파트 살 때 만든 것이다)
첫댓글 김거사!참으로 고생 많이 하였소.그때는 다 그렇게 살았소.옆에서 고생 안한분이 힘들었겠군요?
인생 다그런거지요.살아 봅시다.
고맙소 동대문 사단장님. 옛날 <닭 한마리> 집에서 쏘주 먹은 일도 다 추억이오.